소설리스트

123화 (123/193)

  하지만.

  …하지만.

  "마법. 쓰고 싶어요?"

  거절당한 것도 모자라 이런 말까지 듣고 있으니.

  카미에르는 자신이 너무나 한심했다.

  그런데.

  "도와줄 수 있어요."

  영문 모를 질의응답이 끝나고.

  붉은 머리의 마법사는 민감한 화두를 꺼내 들었다.

  카미에르는 울컥했다. 도와줄 수 있다니. 얼마나 무책임한 말인가. 자신에게 돈을 뽑아먹을 생각이겠지. 저런 말로 자신을 유혹한 사기꾼 놈들만 이미 수십이 넘었다. 카미에르는 유진을 믿지 않았다.

  "…아니. 당신은 못 합니다. 못할 겁니다. 전 둔재니까요. 둔재는 둔재답게. 할 수 있는 것만 하면 됩니다."

  못해야 한다. 그래야만 했다. 나는 둔재니까. 네가 도와준다 한들 변하는 건 없을 것이다. 희망을 품기엔 이미 너무 많은 어둠을 담았다.

  "잠시. 조용히."

  그래야만 했는데.

  눈앞의 소녀가 잠시 시야에서 사라진 순간.

  "커흑―?!"

  잠시 정신이 끊겼다. 카미에르는 약간의 기시감을 느꼈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게 된 느낌. 동시에 사고가 느려졌다. 찰나의 시간이 영겁처럼 느껴진다. 마치 호수 밑바닥에 가라앉은 기분.

  눈을 뜨면.

  소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주인 없는 침대만 카미에르를 반겼다.

  그리고, 꺼지지 않는 불씨도 함께.

  "부, 불?!"

  파헬른의 저택은 오로지 나무로만 지어졌다. 작은 불씨라도 저택 전체로 퍼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는 불씨를 발로 짓밟으며 꺼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노력은 보상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불은 그대로였다. 그가 신고 있던 신발만 달구어졌을 뿐이었다. 

  '…물을 가져와야 해!'

  ―철컥, 철컥!

  문은 열리지 않았다. 카미에르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 붉은 머리 마법사. 유진. 그년이 불을 지르고 문을 잠근 게 분명하리라.

  ―콰앙!

  카미에르는 충혈된 눈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충격으로 들썩이는 문. 부수지 못했다. 귀빈실의 두꺼운 문을 뚫으려면 칼이나 도끼가 필요했다. 오러가 있었더라면. 마법을 쓸 줄 알았더라면. 그딴 것들 따위 필요하지 않았을 텐데.

  "왜, 난."

  이따위로 태어난 걸까.

  카미에르는 점점 퍼지는 불길을 바라보며 무릎을 꿇었다. 패배자다운 최후였다.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는 끝. 분노로 이가 부서진다.

  그냥 이대로 타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불씨는 느리지만 그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바닥부터 타오른 불꽃은 어느새 벽면까지 당도했다.

  카미에르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보았다. 칼질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패배자의 손바닥이었다.

  '내게. 재능이 있었다면.'

  천장에서 떨어진 불똥이 옷깃을 강타했다.

  불이 붙었다.

  "하…."

  실소. 소녀가 원망스럽진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자살이 아닌 사고사로 죽을 수 있었으니. 늘 둔재였으며 패배자였다. 그런 자신에게 돌아갈 집 따윈 없었다.

  살갗이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서, 카미에르는 손을 뻗었다.

  죽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마법이나 오러를 쓸 수 있다면…

  이 불꽃을,

  타들어 가는 내 몸을,

  이 세상을,

  내가 있을 자리 하나 없는 이 세상을,

  모조리 얼려버릴 마법을―

  "………아."

  ―쩌저적.

  그 순간. 카미에르의 손을 중심으로 마나가 퍼져나갔다. 너무나도 새하얀 마나였다. 

  새하얗고, 파랬다.

  카미에르는 전율했다. 

  불꽃이 얼었다. 귀빈실을 불태우던 불꽃은 마나째로 얼어버려 그 율동적인 모습을 간직했다. 

  귀빈실은 눈의 마녀가 살 법한 설국雪國으로 변해버렸다. 목재 바닥은 매끄러운 빙판이 되었고, 주변을 장식하고 있던 가구들은 시간마저 얼어붙은 듯했다.

  너무 놀라 숨을 내쉬자, 그의 입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주위는 하얗게 서리가 내려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차가웠다. 카미에르는 자신의 몸 내부에 새하얗고 푸른 마력이 공존함을 느꼈다.

  충만한 마나. 의지대로 흘러가는 마력의 흐름.

  12년간 그토록 노력했지만 얻지 못했던 그것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 아아."

  혹여나 이게 환상은 아닐까 불안해진 카미에르는 자신이 아는 마법 하나를 펼치기에 이르렀다. 배우기만 하고 써보진 못했던 마법 프리즈Freeze. 수水계, 그중에서도 빙氷계에 속하는 기본적인 빙결 마법이었다.

  마나가 요동친다. 마나는 그의 의지대로 모였으며, 발산되었다. 눈앞의 가구는 얼어붙다 못해 갈라져, 눈가루가 되어 스러졌다. 이 모든 것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내가.

  마법을 썼다.

  카미에르는 힘이 풀려 털썩, 하고 무릎을 꿇었다. 흘러내린 눈물은 곧바로 얼어 보석처럼 떨어졌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끊임없이 마법을 썼다. 마나의 흐름을 더욱더 느끼고 싶었다. 황홀했다. 마법을 쓸 때마다 누군가 속삭이는 듯했다. 넌 패배자가 아니라고. 넌 둔재가 아니라고. 넌, 노력했다고.

  처음 같은 위력은 나오지 않았지만, 그는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뻐했다. 마침내 마력이 다해 탈진 상태에 다다르자 그는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내쉬었다.

  ―끼이익…

  그 순간.

  굳게 닫힌 문이 열렸다.

  "도련님."

  "…."

  "일어나세요."

  고개는 함부로 숙이는 게 아니에요. 귓가를 맴도는 소녀의 말. 카미에르는 차마 고개를 떨구지 못하고 흉한 눈물만 방울방울 떨어트렸다.

  그날.

  파헬른의 거리에 눈이 내리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고작 삼십 분이었지만, 파헬른의 주민들은 그때 느낀 한기와 추위를 절대 잊지 못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들이 묘사한 삼십 분의 눈발은 다음과 같았다.

  마치.

  세상이 얼어버린 것 같았다고.

  만찬이 끝난 후.

  파헬른엔 몬스터 웨이브가 종료됐다는 공식 성명이 발표됐다. 강단 위 우렁찬 목소리로 말하는 카미에르의 표정은, 세상 누구보다 기뻐 보였다.

  ―파헬른은, 버텨냈습니다.

  그간 마음에 내려앉은 서리는 녹지 않았다.

  그는 얼어붙은 심장을 녹이기보단 이용하길 택했다.

  나는 휴식 중인 병사들을 기다리며 카미에르의 열연을 보았다. 입을 열 때마다 튀어나오는 하얀 김… 그가 각성한 마나는 정말이지 새하얬다. 보통 마나는 푸른색으로 발현되기 마련인데, 그의 마나는 이상하리만치 새하얬다. 

  '…뒤는 알아서 하겠지.'

  부디 자만심에 빠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마법을 각성하면 사고가 실리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기에, 각성 초반에 각별히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자아를 지키지 못하면 오만함에 잡아먹혀 괴물이 되어버린다. 물론 사전에 이야기는 나눴지만, 인간이란 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법이다.

  그래도 걱정되지는 않는다.

  그는 실패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유진."

  잠시 눈을 감고 명상을 하고 있자, 근처에서 카미에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단을 바라보면 연설은 이미 끝난 상태였다. 주민들은 환한 얼굴로 각자의 보금자리로 돌아갔고, 상인들은 칙칙한 거리에 밝은 색채를 불어넣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카미에르는 지켜낸 파헬른의 거리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도련님."

  "알고, 있습니다."

  "…."

  혹여 누가 볼까 눈치를 본다. 평민에게 고개 숙이는 귀족은 소문이 나면 심히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카미에르는 90도로 허리를 꺾으며 내게 감사를 표했다.

  "이걸, 대체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

  "노력은 가치를 잃었고, 관용은 약자의 비굴함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처음으로 희망을 보았습니다."

  "…."

  "그간 실패뿐인 삶이었습니다. 너무. 너무 길었습니다."

  "…."

  "당신의 정체가 무엇이든 발설하지 않겠다 약속합니다. 아니, 저는 말할 자격조차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한쪽 무릎을 꿇는다. 기사의 무릎도, 귀족의 무릎도 아닌 군주의 무릎이었다. 파헬른을 이을 그가 무릎을 꿇었다. 근처 주민들의 시선이 날아왔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 엄숙하고 성스러운 모습에, 차마 일어서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칼을 뽑아 바닥에 내리꽂으며 말했다.

  "언젠가. 지금은 아니지만."

  머리에 내려앉은 서리. 

  "꼭 보답하겠습니다."

  몰아치는 한기.

  반나절도 안 지난 짧은 만남이었지만, 내가 일으킨 기적은 한 사람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다. 나는 약간의 후회감을 느끼며 피식 웃었다. 역시 오지랖을 부려봤자 좋은 거 하나 없다.

  그래도.

  "도련님."

  착한 사람을 흉내 내는 것도 나쁘진 않은 기분이다.

  "일어나세요."

  나는 카미에르의 몸을 일으켜 세우며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었다. 그는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름 진지한 말 같았지만, 내겐 어린아이 재롱에 불과했다. 의도와 진심은 알겠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

  "자, 어깨 펴고, 허리 세우고."

  자세를 교정해준 뒤, 까치발을 든다. 미약한 신음마저 내며 필사적으로 손을 뻗는다. 그러자, 겨우 머리에 손이 닿았다. 나는 카미에르의 머리에 내려앉은 눈 조각을 떼며 말했다.

  "훨씬 낫네요."

  카미에르는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 출렁거리는 가슴에 잠시 눈이 갔음을 알았지만, 구태여 말하진 않았다.

  "제게 보답하려면 좀 힘드실 거예요."

   복귀 준비를 하는 콜린과 병사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다음에 만날 때 저는, 아주 높은 곳에 서 있을 거거든요."

  이제 본격적으로 마탑을 오를 차례다. 지금까지 쌓은 명성을 바탕으로 더 높은 곳을 향해 도약할 것이다.

  "칼을 뽑으실 필요는 없어요. 나중에. 저를 위해 손을 들어주기만 하면 돼요."

  너는. 옆에서 올라갈 나를 지지해주기만 하면 된다.

  "유진! 돌아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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