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화 (120/193)

  그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더 소리쳤다간 목이 완전히 나간다. 그도 이 사실을 알았기에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빨라.'

  세상이 선이 되어 눈에 비친다. 콜린의 뒤에 타 옆으로 보는 세상은 여러 줄기의 선이었다.

  강화 발굽을 이용한 말들의 전진은 가히 전격전電擊戰을 떠올리게 할 만큼 빨랐다. 주변에 있는 몬스터는 싹 무시하고 목적지부터 가겠다는 계획이었다. 그 후엔 마탑에서 보급받은 신무기를 통해 몬스터들을 소탕한다. 여기서 오거, 드레이크 따위의 고위험 몬스터는 나와 콜린의 몫이었다.

  그러나. 때때로 말들의 속도를 따라잡는 몬스터들이 나올 때가 있었다. 전에 마주친 그리핀이나 황무지 점늑대 따위가 추월하며 따라붙었다.

  "대장! 양 측면에 늑대 다섯! 회피 불가!"

  하지만.

  콜린은 신무기를 꺼내지 않았다.

  "붉은 마녀―!!

  붉은 마녀를 불러라.

  "―부탁한다!!!"

  그러면 해결될 것이다.

  ―크르르르!!!

  황무지 점늑대는 말 옆에 바짝 붙어 발목 따위를 노렸다. 마상전투가 미숙한 보급병에게만 붙어 기회를 노린다. 개새끼들의 술수를 파악한 나는 마나로 실을 만들어 하반신을 단단히 묶었다.

  '처음 써보는 기술이지만….'

  전부터 되는지 궁금한 기술이 하나 있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쓰긴 위험해 시도하지 않은 마법. 아니. 정정하겠다. 마법이라기엔 조금 어폐가 있었다.

  이는 창조가 아닌 간섭이니까.

  양 손바닥을 펼친다. 폭포수처럼 흐르는 마나를 조율해 오로지 손끝을 향하게 만든다. 나는 수천 가닥의 마나를 엮어 마법진을 만들어냈다.

  오른손은 땅을 향해서, 왼손은 하늘을 향해 둔다.

  사파이어처럼 밝게 빛나는 손바닥. 새하얀 피부 위로 미미한 푸른 잔향이 남는다. 그 보잘것없는 진동을 느끼며 정신을 집중한다. 주변은 병사들의 고함으로 시끄러웠지만, 정신은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영겁의 시간 속에서 단 한 번의 찰나를 노린다. 나는 눈을 감고 주변 일대의 마나 흐름을 파악하는 데 모든 집중을 쏟았다.

  감은 눈 사이로 희미하게 빛나는 푸른색의 선들.

  땅과 하늘이.

  선명하게 구분되기 시작했다.

  나는 하늘의 선을, 땅의 선을 붙잡아 내 통제하에 두었다. 손바닥 위. 푸른 마법진에 얽히는 수억 개의 얇고 긴 선. 단 한 개도 놓치지 않는다. 세상은 하나의 선이 되어 묶여버렸다. 

  그 순간.

  '지금.'

  땅을 움켜쥔 오른손은 위로.

  하늘을 삼킨 왼손은 아래로.

  반전.

  땅과 하늘이 교차한다.

  '흩어져라.'

  ―깨, 깨갱?!

  "대, 대장?! 말들이 떠오릅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붉은 마녀―!!!! 무슨 짓을 한 거냐아아―!!!"

  콜린은 흔들리는 고삐를 잡으며 소리쳤다.

  질타가 담긴 고함은 아니었다. 순도 백 퍼센트 당황에서 나온 외침이었다. 그를 반영하듯 그의 얼굴엔 놀라움 뿐이니 분노보다는 감탄이 맞겠지.

  아래를 바라보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같이 높은 하늘이 '보였다'. 하지만, 앞을 바라보면 여느 때와 같은 땅과 바위들이 우리를 반겼다.

  붕 뜨는 부유감은 거짓이 아니다. 땅을 박차는 진동도 거짓이 아니다. 모두 진실한 감각이니 착란이나 환각 따위가 아니다.

  나는 땅과 하늘의 경계를 흩어버렸다.

  "하우으… 이제 몬스터 안 만나고 목적지까지 쭉 갈 수 있을 거예요."

  따라오던 늑대들은 하늘로 '떨어져' 죽어버렸을 것이다.

  "아윽… 머리야."

  너무 과하게 정신을 집중했나. 시야가 일그러진다. 나는 안구를 일부러 터트린 뒤, 피가 흐르기 전 재구축을 해 정상적인 시야를 되찾았다.

  세상의 경계를 건드리는 건 효율이 좋지 않고, 또 넓은 범위로 시전하면 뇌가 터질 것이다. 재차 반복하듯 실용성이 꽝이었다. 아마 육체를 포기하고 영체 상태에서 시도한다면 될 것 같기도 한데… 해보고 싶진 않았다.

  "이제, 몬스터 걱정, 없이 달릴, 수 있어요."

  나를 중심으로.

  서른 명의 병사를 감싸는 불안정한 경계.

  우리가 지나간 곳은 아마 일 초도 안 지나 경계가 복구될 것이다. 선을 억지로 묶은 만큼 반발력도 강해 풀리는 시간도 빨랐다.

  누군가 흩어진 경계를 목격하는 일은… 드래곤급이 아닌 이상 없을 것이다. 경계 안으로 진입해야만 이 몽환적 광경을 볼 수 있다. 어지간하면 말이다.

  "환술에 흑마법이라… 하하!! 마녀라는 이름에 걸맞은 마법이구나!!"

  이거 환술 아닌데.

  알아서 생각하라지.

  나는 병사들이 이 불안정한 경계에 휩쓸리지 않게 세심한 조절을 이어갔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바빴다. 이걸 설명해봤자 알아들을 리도 없었고, 이해하면 그거대로 문제니 그냥 입 닫고 있었다.

  "방향 틀기가 어렵, 구나!"

  "웬만하면 직진만 하세요. 방향도 제가 틀어줄 테니."

  "…마법으로 그게 되나?"

  "되니까, 하겠죠. 윽…."

  "괜찮나?"

  "미안, 해요. 머리가… 아파서요."

  콜린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지만 끝내 이해를 포기하고 고삐를 잡았다. 기사에게 마법사는 이해 불능의 영역이다. 반대도 마찬가지고.

  "하늘 보지 마세요. 아래도 보지 마시구요. 앞만 보면서, 직진."

  머리가 아프다. 역시, 경계를 흩트리는 건 할 만한 짓이 아니다. 될 것 같아서 해봤는데 진짜 될 줄은 몰랐지.

  '…이 기술도 봉인.'

  카피 에고 만들기, 초장거리 텔레포트, 경계 만지기. 이로써 두 번 다신 안 쓰는 기술이 하나 더 추가됐다.

  "하아…."

  머리가 너무 아프다.

  * * *

  흩어진 경계는 마법진을 깨트리자 곧바로 정상으로 돌아왔다. 몇몇 병사들이 구역질을 하며 이거 환술이 맞느냐 물어봤는데, 대충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휴식하겠다! 모두 간이 천막을 치도록!"

  몬스터의 방해 없이, 거기에 강화 발굽을 이용해 쾌속 전진한 결과 우리는 세 시간도 안 돼서 파헬른 상행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석적인 루트론 여섯 시간이 걸리는 걸 생각하면 엄청난 시간 단축이었다.

  "으윽…."

  그리고 그건 모두.

  내 노력 덕이었다.

  "으그극…."

  흩어진 경계를 세 시간이나 붙들고 있었더니 죽어버릴 것 같았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죽을 것 같았다. 도중에 풀까 생각해봤는데, 경계라는 게 그리 단순하지가 않았다. 전진을 멈추라고 할 수도 없었고, 결국 악으로 깡으로 버텼다.

  …세상에 간섭한 대가치고는 싸게 먹힌 거로 생각하자.

  "이봐. 몸은 괜찮나? 원한다면 빠져도 된다. 네 덕분에 이렇게 빨리 올 수 있었으니까."

  "…괜찮아요."

  "내가 여러 사람을 만나봤지만… 괜찮다는 사람 중 괜찮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다시 묻지. 괜찮겠나?"

  휴식 시간은 십 분. 신속한 소탕이 요구되기에 그 이상 쉴 수 없었다. 파헬른 남작령은 지금도 파도처럼 밀려드는 몬스터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 하고 있었다.

  "…시간 끌면 더 어지러워질 것 같으니 빨리 죽이고 돌아가죠."

  "좋은 마음가짐이다."

  남들은 간식 먹거나 잡담을 나눌 때. 나는 십 분 동안 끙끙대기만 했다.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진다.

  슈리엘한테 옮은 건가. 원래 표정 관리 잘했었는데… 

  "준비해라! 우리의 임무는 섬멸이다!:"

  말들을 숨기고, 저마다의 무장을 한다. 나는 로브를 제외하면 맨몸이었다. 콜린은 자신의 덩치만큼 큰 대검을 들고 있었고, 병사들은 창과 검을, 그리고 허리춤에 이상한 지팡이를 두 개씩 달고 있었다.

  ―촤아악!!!

  솟구치는 초록색 피. 우리의 앞을 가로막던 고블린 무리는 콜린의 검격 한 방에 모두 반으로 갈라졌다.

  "최대한 신속하게 움직이겠다!"

  뻗어나가는 고블린의 괴성.

  "―소탕 개시!!!"

  콜린은 저 멀리 보이는 가장 거대한 몬스터에게 달려갔다.

  사전에 보고 받았던 오거였다.

  오거.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덩치와 힘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오거의 특징은 대체로 못생겼다는 것이다.

  ―쿠어어어어!!!!!

  "흐으읍!!!!"

  

  사람만 한 대검이 푸르게 빛난다. 오거와 콜린의 격돌. 대체 누가 오거인지 분간이 안 된다. 허나 벅차 보이진 않았다. 딱히 내가 도와주지 않아도 잘만 잡을 것 같아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저지대 몬스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고블린이나 그렘린 등의 허접한 몬스터였지만, 수가 많아 쉽사리 정리할 수 없었다. 나는 병사들에게 베리어를 씌워주는 등 간접적인 지원을 하며 소탕을 도왔다.

  그렇게 거진 한 시간을 저지대 정리에 힘을 썼다.

  그러나.

  고지를 뚫지 못하면 모두 헛수고였다.

  언덕 위를 지키는 뒤틀린 용 대가리, 드레이크. 자신에게 다가온다면 같은 몬스터라도 불길을 내뿜는다.

  '굳이 다가갈 필요도 없지.'

  ―쿵!

  병사들에게서 떨어진다. 언덕길 초입에 도달한 나는 발바닥에 상당량의 마력을 모아 발구름을 일으켰다. 드레이크가 서 있는 땅을 폭파할 심산이었다.

  그런데.

  빨리 끝내고 싶은 생각이 너무 과했던 걸까.

  "지, 지진인가?!"

  "―엎드려!"

  "무슨 일이야! 대장한테 보고부터 해!"

  ―콰아아아아아아앙!!!

  '…아차.'

  힘 조절을 생각 못 했다.

  하늘 위로 솟구치는 흙기둥. 허나 그 규모는 단순한 기둥이라 부르기 무리가 있었다. 언덕 전체가 들썩였다. 땅이 뒤집히고 위에 있는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드레이크는 물론이고 그 주변에 깔려있던 몬스터도 생매장을 금치 못했다.

  병사들은 날아드는 흙을 피해 빠른 속도로 도망갔다.

  "무슨 일이냐! 신무기가 말썽이라도 일으, 아니. 이게 대체."

  마침 오거의 멱을 따고 돌아온 콜린. 그는 뒤집힌 언덕을 보더니 입을 떡 벌렸다.

  언덕은 푹 가라앉아 돌무더기를 겉으로 내보였고, 황갈색의 진토가 사방을 뒤엎었다. 드레이크? 그놈들은 땅속에 파묻혀, 흙 위로 입만 뻐끔대며 산소를 갈구했다. 아마 내버려 두면 알아서 죽을 것이다.

  "…그것도 흑마법인가?"

  "…."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변명거리를 생각했다.

  그때.

  "―구원대다! 모두 합류해라!"

  가라앉은 언덕 너머로 보이는 푸른 깃발.

  그곳에는 검을 휘감은 용이 새겨져 있었다.

  '파헬른 남작령.'

  파헬른 남작령의 병사들이었다.

  병사들의 수는 열둘이었다. 그들은 한창 전투 중이었다가, 언덕길에서 울리는 함성을 듣곤 곧바로 달려온 듯했다. 피투성이인 몸과 다르게 환한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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