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대로 돌아가겠죠. 저는 이 공간에 남겨지고, 엄마는 아빠랑, 그 귀가 긴 언니랑 같이 세계수 아줌마를 만나러 갈 거예요."
여기에 꽤 있었던 걸로 아는데… 슈리엘이나 라냐는 지금쯤 뭐 하고 있는지 궁금하긴 했다. 아니면 시간이 다르게 흐르려나? 그건 나가 봐야 알 문제. 지금 생각하진 않기로 했다.
나는 에일린의 조막만 한 손을 쥐고 타이르듯 말했다.
"에일린. 언젠가 또 만날 수 있을 거야. 반드시"
"그럼요. 엄마 딸이 누굴 만나겠어요? 아직 육체가 미성숙해서 세상 빛을 보기엔 멀었지만, 못해도 삼 개월. 그 정도면 온전한 육체를 만들 수 있어요."
"…온전한 육체? 설마, 나올 때부터 성장을 끝마친다는 소리니?"
"물론이죠. 세계수 아줌마가 도와줬어요. 하지만 엄마가 원한다면 어린아이 모습으로 지낼게요."
그 순간. 에일린의 몸이 흐릿해졌다. 아니. 정정하겠다. 에일린이 아니라 내 몸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시야도. 세상도. 나도. 점점 투명해져 가며 이 세계에서 튕겨 나가려 하고 있었다.
"시간이 다 됐나 봐요! 이제 작별이에요. 엄마. 엄마?"
"그, 래. 에일― 에일. 린."
목소리가 지직거린다. 나는 에일린의 손을 놓지 않으려고 몸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가루가 된 손은 에일린의 손을 통과해버리고 말았다.
"만나서 즐거웠어요. 그럼. 잘 가요 엄마."
"에에― 린. 에일, 린―…"
눈을.
감는다.
* * *
―…봐.
―……구…일어…
희미하게 들리는 목소리. 나는 몽롱한 머리를 억지로 각성시키고 상황을 파악했다. 내가 누워있는 곳은 거대한 나뭇잎이었다. 옆에는 연못이, 앞에는 수백 미터를 넘는 거대한 나무가―
'나무?'
세계수.
나는 세계수의 앞에서 일어났다.
"이봐! 일어났나? 악몽이라도 꾼 건가?"
"친구. 슬퍼? 눈물 흘리고 있어."
내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라냐와 슈리엘이었다.
그들은 나와 달리 무사히 세계수를 만났는지 몸 멀쩡히 서 있었다.
"미안해요. 오래 누워있었나요?"
"하! 그걸 말이라고 하나?"
"…?"
그들은 내가 에일린을 만나고 온 지 모르는 듯했다. 그런데. 심상 세계에서의 시간은 세 시간을 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렇게까지 성을 내다니? 슈리엘은 이상할 정도로 말을 아꼈다. 대신, 라냐가 말을 해주었다.
"친구. 사흘 동안 잠들어 있었어."
"네, 무, 뭐요?"
삼 일? 내가 얼마나 자고 있었던 거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정돈했다. 몸은 멀쩡했다. 오히려 전보다 좋아진 것 같았다. 세계수의 축복 덕분인가? 컨디션은 좋았다.
그런데.
슈리엘의 모습이 조금 이상했다.
"…슈리엘?"
"…나도 아니까 입 열지 마라."
"…."
그의 머리에 나 있는 황금색 뿔.
마치 악마에게나 있을 법한 뿔이었다.
"하아… 빌어먹을 세계―"
"그만. 지모신님을 욕하지 마. 분명 뜻이 있을,"
"뜻이고 나발이고 이딴 꼴로 돌아갔다간 가문에서 내쫓길 거다. 그건 네가 책임질 건가?"
"…."
세계수에게 '선물'을 받은 건 나 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슈리엘은 그 파리한 입술만큼이나 안색도 창백했다. 쌍둥이 악마를 처리하고 세계수를 만나러 왔더니 뜬금없이 뿔이 달리다니. 그가 당황스러운 만큼 나도 당황스러웠다. 나는 에일린을 만난 기쁨도 잊고 다소 어이없는 표정으로 물어봤다.
"뗄려고 시도는 해봤어요?"
"…네가 잠들어 있는 사흘 동안, 내가 벽에 머리를 얼마나 박은 줄 아나?"
"잠시만요. 이리 와보세요."
그는 따로 말하지 않아도 자세를 낮춰 머리를 보여줬다. 정수리 부근에 나 있는 두 개의 뿔. 황금 빛깔의 뿔은 나뭇가지처럼 구불구불 갈라져 있었다. 순록에게나 달릴 법한 뿔이었다.
뿔은 손을 뻗어 만지자 우우웅 진동하며 그 존재감을 과시했다. 황금 빛깔이 진해진다. 촉감은 상당히 매끄러웠다. 분석을 시작한다. 나는 뿔이 무슨 작용을 하는지 찬찬히 살펴보았다.
살펴본 결과, 뿔은 주변에 떠다니는 마나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빨아들인 마나가 많을수록 진해지는 식이었다. 문제는 이걸 어디다 사용하느냐는 것이다. 열심히 주변 마나를 빨아들이고는 있었지만, 그거 외엔 딱히 사용법을 모르겠다.
20cm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사슴뿔. 불행인지 다행인지 앞으로 뻗어 자는 데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는 악마 사냥꾼이었다. 루셸리니의 검, 신의 대행자. 드래곤도 뿔이 있고 수룡인들도 뿔이 있지만,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뿔은 오로지 악마들을 위한 흉물이었다.
검은색이 아닌 게 천만다행이었다. 뿔의 색까지 검었으면 당장 주거지 엘프들에게 집중 사격을 맞아 고슴도치가 됐을 것이다. 검은 뿔은 악마의 상징이다.
뿔에서 손을 뗀다. 슈리엘은 어디 말 좀 해보라는 듯 뚱하게 눈을 떴다. 나는 이걸 말해도 되나 싶어 몇 초 고민하다가, 이내 상관없다는 결론을 도출하고 입을 열었다.
"주변에 떠다니는 마나를 빨아들이고 있어요. 주변인에게 해를 끼치는 종류는 아니에요.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왜 뿔이었을까요? 굳이 이런 방식으로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고개를 틀어 세계수를 바라본다. 밑에서 올려다본 세계수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했다. 라냐는 매 순간이 감격스러운지 상기된 얼굴로 세계수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몸에 이상은 없구요?"
"이상은 없다. 오히려 전보다 더 좋아진 느낌이야. 심마 문제도 해결된 것 같고."
"세계수 덕인가요?"
"저 빌어먹―. 흠. 그래. 다 '위대하신 지모신님' 덕이지. 덕분에 마기도 깔끔하게 해결하고. 참으로 고맙구나. 젠장."
"…괜찮을 거에요. 악마 말고도 뿔 달린 종족은 많잖아요?"
"뿔 달린 인간은 없지. 그리고 내가 괜찮아도 성황청과 가문이 괜찮다 할까? 대외적 활동은 모두 닫혔다고 보면 돼. 암부에서 활동하는 놈들마냥 얼굴을 가리고 활동해야 할 판이라고."
"그래도."
"…그래.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해봐야겠지."
세계수가 달아준 뿔이라 하면 최악의 상황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운이 좋다면 역으로 이미지 메이킹에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고. 세계수에게 인정받은 성스러운 대행자. 좋지 않은가? 물론 당장은 그 무엇도 알 수 없었다. 이게 독이 될지 득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세계수는.
슈리엘이 분노의 찬 시선으로 노려봐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에게도, 나에게도.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나도 영문을 모르겠다. 에일린을 만난 건 좋았지만, 정말 이걸 보여주려고 우리를 초대한 건가? 나에겐 딸을 만나게 해주고, 슈리엘 머리엔 뿔이나 달려고? 세계수가 내리는 명령만큼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멀찍히 한숨만 쉬는 그에게 내가 잠든 사흘간의 공백을 물어보았다. 당연하게도 별 소득은 없었다. 세계수가 말을 건 건 내가 유일한 것 같았다.
세계수와 나눴던 얘기는 숨기기로 했다. 딸을 만난 것도, 세계수가 딸의 육체를 만들어준다는 것도.
의미 없는 숨김이지만 적어도. 슈리엘에게만은 숨기고 싶었다.
만난다면 딸과 함께.
둘이서 만나고 싶었다.
"저기, 슈리엘."
"뭐지?
"딸 이름은 에일린으로 하기로 했어요."
"……그래."
그래도.
이름 정도는 말해도 되겠지.
"…."
슈리엘은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우물우물거리다, 이내 꾹 닫곤 고개를 돌렸다. 나는 조금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등판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만 돌아가지. 라냐! 잊은 건 없겠지?"
"응. 활도 잘 챙겼어."
참고로 라냐는 세계수에게 활을 받았다. 세계수의 가지로 엮은 활. 그녀는 굉장히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토록 동경하는 지모신에게 받은 귀중한 선물인 만큼 놓치지 않게 꼭 쥐고 있었다.
* * *
숲을 통과하면 곧바로 거주지였다. 가는 수고는 덜어주겠다는 나름의 배려로 생각된다. 처음부터 이랬으면 얼마나 좋아? 같은 길을 수 시간이나 걸었던 나로선 상당히 괘씸할 수밖에 없었다.
슈리엘은.
거주지에 도착하자마자 활을 겨눈 엘프들을 맞이해야 했다. 하지만 이것이 세계수가 달아준 뿔이라는 걸 알자마자 석고대죄하는 그들이었다.
"라냐. 만나서 즐거웠어요. 라냐는 카르드라실에 남을 생각인가요?"
"응. 지모신님을 지켜야 하니까."
"…그래요. 언젠가 다시 만난다면 포옹이나 해줘요."
"포옹? 지금도 해줄 수 있어."
"형식적인 인사니까 굳이 해줄 필요는, 으읏. 라냐?"
나와 라냐는 가르퀴나 구로 향하는 통로를 앞에 두고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포옹이라는 다소 격한 방식으로.
그녀는 카르드라실에 남을 심산이었다. 엘프니까 당연하겠지―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저들의 자아가 묶여있다는 세계수의 말이 떠오를 때마다 어딘가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와 슈리엘은.
카르드라실의 영구적인 출입권을 얻었다. 아마 인간으로선 최초가 아닐까 싶다. 물론 출입권을 얻었다 해도 이곳에 올 이유는 없을 테지만. 세계수의 기행으로 뿔이 달린 슈리엘은 더더욱.
"칼버드를 만나야 해. 신전에서 대기하겠다고 했으니 그곳으로 가자. 일 처리는 빠삭하게 처리하는 노인네니 마차 정도는 준비해뒀겠지."
엘븐 나이트의 안내를 받고 벽을 통과한다. 사흘이나 지났지만 아직 제대로된 수습조차 하지 못한 가르퀴나 구. 아직 피 냄새가 가시질 않았다. 그렇게 가르퀴나 구를 지나 바르하이야 구로, 적랑문을 통과해 실베흐린 대삼림으로. 카르드라실을 빠져나온 우리는 곧바로 성 마이할 신전으로 향했다.
"이봐! 아무도 없나?!"
신전은 한적했다.
항상 마당을 쓸고 있었던 수습 사제들도 보이질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더 들어가 예배당에 도착했을 때 즈음, 겨우 아인 사제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휘장을 보면 수습 사제였다. 그는 예배당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상당히 초췌한 몰골이었다.
"이봐!"
"크흠. 음. 흠? 지금 일과 다 끝났으니―"
"대행자 슈리엘 루셸리니다. 교구장을 만나러 왔다. 교구장은 어디 있지?"
"뿌, 뿔? 케흑, 켁. 자, 잠시만요! 뭐라고요?"
"교구장을 만나러 왔다고 했다."
"…아."
슈리엘의 머리에 달린 뿔을 한동안 쳐다본 사제는 몇 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실수를 깨닫곤 급하게 허리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현재 교구장님은 구호 활동으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핏빛 달의 여파가 아직도 끝나지 않아서…."
핏빛 달.
공식적으로 명명된 이번 사태의 이름이었다.
신전은 다행히 달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는 이것을 신의 기적이라 하면서, 지금이야말로 신의 뜻을 널리 퍼트릴 수 기회라고 설명했다. 신전이 텅 빈 건 구호활동에 전부 차출돼서 그렇다고 한다. 신전을 지킬 최소한의 인원 중 하나가 자신이라나 뭐라나.
"헌데 그 뿔은…."
"네 알 바가 아니다."
"옙."
"그럼 칼버드는 어딨지? 이곳에 오기로 약속했을 텐데."
"아! 그분이라면 지금 접객실에 있습니다. 예배실을 나가 오른쪽으로 쭉 직진하시면 됩니다."
그의 말을 따라 접객실을 가보면 백발의 노인이 침대에 누워있었다. 칼버드였다. 그런데 어째 이곳에 처음으로 도착했을 때보다 더 힘이 없어 보였다. 그는 인기척을 느끼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지? 이 시간에 올 만한 자는…"
"칼버드. 저희 왔어요."
"…유진! 그럼, 주인은?"
한 박자 늦게. 슈리엘이 들어온다.
"주인! 돌아오셨군―… 주인?"
"만나는 사람마다 머리를 보고 입을 벌리니 미치겠구나. 가면서 설명할 테니 마차나 준비하도록. 복귀한다. 악마는 처리했다."
"…해내실 줄 알았습니다. 마차는 준비해뒀습니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병사들이 대기중입니다."
* * *
약간의 어수선함을 등에 지고 마차에 올라탄다.
에스코트는 없었다.
서로 그럴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덜컹. 덜컹.
"…."
"…."
악마를 퇴치하고 몸 성히 돌아왔으니 기뻐해야 함이 옳았지만, 마차 안의 분위기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항상 내 몸을 만지작거리던 슈리엘도 오늘만큼은 정자세로 등을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숙제를 끝냈는데 새로운 숙제가 생긴 기분이라 해야 하나. 슈리엘은 머리에 난 뿔을. 칼버드는 은퇴 후의 계획을. 나는 삼 개월 뒤 만날 딸아이를. 모두 저마다의 고민을 하느라 바빴다.
그 적막 속에서. 마차 바퀴만 굴러가는 고요한 소음 속에서. 나는 고개를 내밀어 휙휙 지나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떠난 지 세 시간 정도 되었을까. 우리는 실베흐린 대삼림에서 벗어나 대평원에 진입한 참이었다.
"끝났, 네요."
"다 끝났지."
"참. 세상 다 끝난 것처럼 말하면 제가 뭐가 돼요?"
슈리엘은 한동안 아주 바쁠 것이다. 날 만날 틈도 없을 정도로. 무릇 귀족이란 약점을 잡혀서는 안 됐다. 약점이 잡힐 것 같으면 역으로 공세에 나가 기회로 만들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수의 뿔은 약점이자 기회였다.
분명 다른 귀족들의 공격이 있을 것이라 사료된다. 특히 같은 악마 사냥꾼 가문인 프루카이스와 앙그리드 쪽에서 말이다. 대행자의 지분을 뺏으려고 혈안이 되겠지. 오늘처럼 악마를 퇴치한 공적이 있으면 더더욱. 그들로서는 루셸리니의 독주가 그닥 달갑지 않을 것이다.
그쪽 사정을 잘 모르는 나로선 말로만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도와준답시고 상대 가문에 메테오를 떨어트릴 수는 없잖는가. 귀족들 간의 다툼은 다 그렇듯 혀로 이루어지는 추악하고 더러운 싸움이다. 나는 그곳에 끼고 싶지 않았다.
"유진. 앞으로의 계획이라도 있나?"
슈리엘은 눈을 뜨더니 내게 손을 뻗었다. 장난감을 다루듯 이곳저곳 찌르고 주물렀다. 웬일로 잠잠하다 싶었더니 또 시작. 제 버릇 못 버린다고 아주 자연스러운 손길이었다.
속옷 사이로 굵은 손가락이 들어온다. 그는 클리토리스 위에 손가락을 얹더니 살살 굴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다리를 움찔 떨었다. 투명끈적한 액체가 분비되기 시작한다.
"…흐읏, 모, 목표는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