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4화 (104/193)

  "빌어먹을… 세계수…."

  나는 세계수를 욕하며 드러누웠다. 누가 들으면 어찌하느냐고? 들으라고 말한 거다. 젠장. 될 대로 돼라지. 밝은 태양 빛이 눈에 쏟아진다. 사실 엘프들이 날 죽이기 위한 계획이었다면? 나는 그것에 속은 것이라면? 죽음이 가까워지니 온갖 잡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죽음, 이라.'

  말라 비튼 입술. 뜨거운 몸. 흐릿해져 가는 의식. 그런데 막상 죽는다고 하니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위기감 없는 죽음이 또 있을까. 마치 잠을 자는 것 같은 익숙한 기분. 나는 눈을 감고 죽은 듯 숨을 내쉬었다.

  ―살고 싶니?

  이런 나에게.

  세계수는 말을 걸어왔다.

  "살고, 싶으냐고…?"

  그래. 살고 싶니.

  머리가 울린다.

  "……글쎄."

  즉답하지 못했다.

  나는 그 사실에 조금 비참한 기분이 들어, 하려던 말을 삼키고 다른 질문을 내뱉었다.

  "살고 싶다 하면, 살려줄 건가?"

  세계수는 말이 없었다.

  나는 젖먹던 힘까지 끌어 말을 이어갔다.

  "…내가 안 되면 아이라도 살려줘. 마나가 통하기만 하면 알아서 클 수 있으니까. 제발."

  ―날 너무 잔인하게 보는구나.

  "자연이 잔인하지 않았던 적이 있던가."

  머릿속에 중성적인 웃음소리가 울린다. 세계수의 웃음소리였다. 세계수는 웃으며 내게 말했다. 

  ―대단해. 사랑이 지극정성이야.

  "…."

  대답하지 못했다. 목과 입술이 갈라져 피가 흐를 정도였다. 나는 눈을 뜨기도 힘들어, 대신 미약한 숨소리로 세계수에게 답했다. 세계수는 하하 웃더니 이야기를 이어갔다.

  ―마왕을 무찌른 용사도 버림받기 전엔 걸맞은 보상을 받았었지. 내 너에게 카르드라실을 구한 상을 줄 터이니 부디 마음에 들면 좋겠구나.

  보상.

  그거 하나는 마음에 드네. 다 죽어가는 판에 보상을 줘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나는 실소를 터트리며 의식 밑으로 가라앉았다. 들리는 소리마저 옅어진다. 그 와중에도 세계수의 말은 선명하게 들려 가까스로 의식을 유지할 수는 있었다.

  ―엘프는 태어나기도 전에 마법을 배운다. 들어 봐서 알지?

  더 깊게.

  ―하지만. 마법은 가볍게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란다.

 가라앉는다.

  ―마법의 본질은 창조. 마법사는 자신만의 세상. 즉 자아를 구축할 줄 알아야 비로소 마법사라 불릴 수 있단다.

  의식의 저편으로.

  ―나를 지키는 불쌍한 아이들은 세상 빛을 보기도 전에 본능에 새겨진단다. 지모신. 나를 지켜야 한다고. 그래서 마법을 배울 수 있는 게야. 이미 만들어진 자아가 있으니까. 저주에 가까운… 쇠사슬이 그들을 묶고 있으니까. 그닥 달가운 이야기는 아니야.

  깊은 심연 속으로.

  ―태어나기도 전에 자아를 확립한다는 건 많은 위험을 동반하지. 자아가 무언가에 묶일 가능성이 있어. 드래곤의 오만방자한 성격 또한 그렇게 탄생한 거란다.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만인지상의 오만함을 배우니까. 그런데.

 그런데.

  ―너는 다르구나.

  의식이 꺼지지 않았다.

  ―너는 달라. 묶이지 않았어.

  눈을.

  ―네 어미를 만나고 싶다고 하니 내 기꺼이 들어주겠다. 그럼.

  뜬다.

  ―만나서 즐거웠다. 좋은 시간 보내거라.

  깊고 어두운 심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하늘 아래 고인 물웅덩이 위.

  "…."

  붉은 머리 소녀가 나를 보며 지그시 웃고 있었다.

  소녀가 가녀린 발을 내디딜 때마다 새하얀 파동이 일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암흑밖에 비추어지지 않는 웅덩이 위로 새하얀 원이 새겨진다. 그녀는 이 모든 게 즐겁다는 듯 들뜬 표정으로. 하지만 조심스럽게.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절벽 위의 아름다운 꽃을 발견한 것처럼. 아쉬움에 차 보기만 해야 한다는 걸 잘 아는 것처럼.

  그렇게 마지막 발걸음.

  소녀는 불과 다섯 걸음의 거리를 두고 발을 멈췄다. 그러곤 나를 올려다봤다. 똑똑히 눈에 새기겠다는 무언의 의지까지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나를 들여다보는 만큼, 나도 그녀를 보았다. 120cm는 될까. 나보다 키가 한참이나 작은 그 아이는. 나의 얼굴과 많이 닮아있었다. 이 세계에 떨어지고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았던 마법사 유진의 얼굴. 이 몸으로 어린 시절을 겪은 적은 없지만 만약, 내가 이 세계에 나고 자랐다면 이렇게 자랐을 것 같은 얼굴.

  심장이 미치도록 뛰었다. 온갖 감정이 홍수처럼 밀려든다. 나의 감정이 아니라 소녀의 감정이었다. 나는 사무치는 감정의 폭거에 반사적으로 뒷걸음쳤다. 고장 나버린 몸. 폭발할 것만 같은 심장을 무시하고 거리를 벌린다. 하지만. 도망의 끝에서 굳게 감았던 눈을 뜨면. 어느샌가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이런 나를.

  그녀는 웃으며 기다릴 뿐이었다.

  그 환한 미소를 보자. 아플 정도로 떨리던 몸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용암처럼 뜨거웠던 심장이 이내 차갑게 식었을 때. 나는 물러나기만 했던 발을 멈추고 주먹을 꽉 쥐었다. 제대로. 앞을 마주 보기 위해서.

  그제야. 

  그녀는 더욱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하아…."

  눈앞의 소녀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깊고 깊은 한숨이었다. 소리를 통해 전해지는 말은 아니었다. 정신을 통해서 전해지는― 전달자의 감정과 의지가 함께 느껴지는. 그런 말이었다. 소녀는 이윽고 미소를 지우고, 다소 슬퍼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 너무 빨랐어요."

  그 회한悔恨에 젖은 표정은 저만한 소녀에게서 나올 수 없는 표정이었다. 아니. 지어선 안 되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게 너무나 궁금해서. 혹여 내 탓일까 싶어 미치도록 불안해서. 떨리는 목을 억지로 쥐어짜 한마디. 고작해야 한마디를 뱉을 수 있었다.

  "무엇이."

  무엇이. 무엇이 빨랐냐고.

  그녀는 눈을 감아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옷자락이 우산처럼 펼쳐지며 물방울을 흩뿌린다. 정확히 다섯 방울이 떨어져나가 수면을 건드렸을 때. 소녀는 입을 열었다.

  "모든 게."

  방울 하나가 솟아오른다. 그곳엔 아이가 무사함에 기뻐하는 내 얼굴이 비쳐 있었다. 급속 성장제를 맞고 셰멜을 만났을 때였다.

  "탄생은 축복으로. 기쁨과 함께했지만."

  두 번째 방울이 솟아오른다. 팔다리가 잘린 채 웃고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성황청으로 떠나기 전. 마기에 침식된 슈리엘이 참지 못하고 날 덮쳤을 때였다.

  "그 과정은 고통뿐이니."

  세 번째 방울. 아인들에게 무참히 겁탈당하는 지하 결투장의 내가 흐릿하게 지나갔다. 나는 부끄러움에 입술을 깨물었다. 다 보고 있었구나.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서 더 만나기가 무서웠다.

  "하지만. 그게 고통으로 위장한 행복임을 누가 알았을까요."

  네 번째 방울.

  이번엔 조금 더 과거. 물방울은 여관에서 칼 잡고 팔이나 긋던 시절의 나를 비추었다. 아직 많이 불안정했을 때의 시절. 삶의 목적조차 잡지 못하고 자살기도나 매일매일 하던 그때의 나.

  "미안해요. 엄마 몰래 기억을 읽었어요. 지금 물방울에 비추어진 모습은, 제가 읽을 수 있는 최대한의 기억이에요. 그런데 약간 후회스럽기도 하네요. 기억을 읽는 게 아니었어요. 너무. 너무 빨리 알아버렸네요."

  다섯 번째 방울은 내가 아니라 소녀를 비추고 있었다. 어두운 심연. 끝없는 물웅덩이 속에서 베리어를 펼치기 급급했던 소녀가. 그러면서도 하늘을 올려다보기를 멈추지 않는 소녀가.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다면 좋았을 텐데. 왜 그런 짓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더라면 시원하게 욕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불행하게도 그걸 전부 이해해버렸네요."

  나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미안하다고 소리칠 자격조차 없는 걸 뼈에 사무칠 정도로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몸이란 걸 알기에. 괜찮다는 핑계로. 사실 괜찮지 않아도 언젠가는 저지를 것이라는 걸 알았기에.

  나는 저 발을 쭈뼛거리며 자책하는 모습이 너무 보기 싫었다. 소녀가 억지로 미소를 지을 때마다. 핏기가 빠져 창백해진 얼굴만큼 감정도 얼어 부서졌다. 너무 빨리 철이 들어버린 내 아이야. 나를 위해 슬퍼하지 마렴. 그렇게 말하려 했다. 그러나. 소녀의 말이 더 빨랐다.

  "맞아요. 저는 잘못이 없어요. 다 엄마 잘못이에요. 아빠 잘못은… 음. 없어요. 무죄. 무죄!"

  "…."

  "엄마랑 아빠한테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그래도. 그래도."

  "…."

  "막상 만나니까 좋은 말만 하고 싶더라고요. 그러니까."

  처음으로.

  어린아이의 망설임이 느껴졌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소녀가 원하는 건.

  "안아줄 수 있어요?"

  양손을 뻗어 내게 향한 손은 배려심마저 느껴지는 곱디고운 가락이었다. 마음의 준비조차 하지 못한 미숙한 나를 위해 거절까지 염두에 둔 소극적인 손짓. 손끝에서 느껴지는 다정함은 필히 나를 위한 것이었다.

  나는 조용히. 말없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머리카락 한 올도 놓치지 않기 위해 꼭 끌어안았다. 주름진 옷자락도.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온 잔머리도. 모두 내 안에 담기 위해 뛰는 가슴에 소녀의 얼굴을 밀어 넣었다.

  조금 답답할지도 모르는데.

  소녀는 히히 웃으며 등 뒤로 손을 뻗었다.

  "엄마 품은 따듯해서 좋아요. 여긴 너무 차갑거든요. 추운 건 아니지만, 역시 뱃속부터 자아를 가진다는 건 조금 힘드네요."

  "…미안해."

  "뭐가 미안해요? 애초에 엄마랑 저는 몸이 반 정령체에요. 절반 이상이 마나로 이루어져 있으니까요. 언젠간 일어날 일이었어요. 그리고 엄마 덕분에 마법도 써보고, 세계수 아줌마도 만나고. 오히려 좋은 거죠 뭐."

  세계수. 여자였구나. 혹은 겉으로 보이기에만 여성체일 수도 있었다. 나는 아이 앞에서 침울한 표정으로 계속 있는 것도 좋지 않다고 생각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세계수랑 만났다고?"

  "네! 정확히는, 카르드라실에 들어왔을 때부터 말을 걸었어요. 신기한 아이구나, 하면서요."

  남의 아이한테 찝쩍대기는… 살짝 불쾌했지만, 내색은 할 수 없어 웃는 표정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랑 만나고 싶다고 하니, 의식을 먼저 꺼놓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음. 엄마 정신은 죽음에 가까운 피해가 아닌 이상 꺼지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어요. 미안해요."

  "아니. 아니야. 괜찮아. 넌 잘못 없어."

  내가 괜찮다고 하자 아이는 또다시 히히, 하고 웃었다. 천진난만한 웃음소리. 듣는 것만으로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아이는 가슴에 머리를 비비면서 내게 물었다.

  "근데 엄마는 아픈 거 좋아하잖아요. 맞죠?"

  이걸 어떻게 대답하지.

  난감해진 나는 대충 얼버무리며 대답했다.

  "…그렇, 다고 할 수 있겠지."

  "그래도 두 번 다신 못하겠어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죄송해요. 저도 아빠처럼―"

  맙소사.

  지금처럼 식겁한 적이 없던 것 같았다. 나는 듣기가 무서워 목소리까지 높이며 뒷말을 차단했다.

  "아,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정말로!"

  "정말요?"

  "정말이야. 정말. 앞으로도 그럴 일 없으니까 안심해도 돼."

  분위기가 풀어졌다. 내가 웃으면 아이도 따라 웃는다. 우리가 서 있는 물웅덩이는 어느새 푸른 초목을 비추고 있었다. 카르드라실이었다. 밖에 나가지 못하는 아이는 이렇게 밖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알겠어요. 엄마 말 따를게요. 그런데 엄마."

  "응?"

  아이는 꺄르르 웃더니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옷자락을 붙잡았다. 열망이 느껴지는 손가락. 나는 아이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기도 했고, 겁이 나기도 했다. 방금처럼 이상한 말이라도 뱉었다간 멘탈이 견디지 못한다. 하지만. 아이가 물어본 질문은 조금 더 복잡하고. 말하기 어려운 그런 질문이었다.

  "제 이름은 뭐예요?"

  이름.

  그 말을 들은 나는 한참을 고민하고, 이전에 생각해놓았던 여러 가지 이름 중 하나를 골라 아이에게 말해주기로 했다.

  "…에일린."

  "에일린?"

  "네 이름은 에일린이란다."

  밝은 빛이 되어 이 어두운 세상을 비추기를 기원하며.

  나는 아이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꿔도 돼. 원하는 이름이라도 있니?"

  "아니요! 마음에 들어요! 그럼 전 에일린 루셸리니가 되는 건가요?"

  "…어, 그게. 음. 에일린."

  예상치 못하게 훅 들어온다. 나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마른 입술만 연신 핥아댔다. 면전에다 대고 '넌 사생아야' 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느냐. 귀족의 성은 쉽게 이을 수 없었다.

  하지만.

  "노, 농담이니 슬퍼하지 마세요! 저도 알아요. 엄마가 정식적으로 가문에 편입되지 않는 이상 루셸리니의 이름을 잇지 못한다는 거."

  "…."

  "그리고. 이번 일이 끝나면 루셸리니를 떠날 거란 것도 알고 있어요."

  어찌보면 더 슬픈.

  에일린은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더 강하게 끌어안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아빠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해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세계수 아줌마가 엄마를 빈사상태로 유지하고 있거든요. 엄마의 정신을 제 심상 세계로 끌고 오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조치였어요. 그런데. 곧 엄마의 정신이 깨어나려고 해요."

  "…깨어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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