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3화 (103/193)

  우리 셋 중 오직 라냐만이. 익숙한 듯 자리를 지켰다. 그녀는 내 손을 꼬옥 잡으며 싱긋 웃었다.

  "친구. 따라와."

  라냐는 더이상 헤매지 않았다. 이곳은 카르드라실. 엘프의 영역. 그녀는 이곳의 모든 곳을 꿰고 있었다.

  나는 밟는 곳마다 잔뜩 피어있는 꽃을 보며 말했다.

  "은방울꽃. 예쁘네요."

  "꺾어도 돼."

  "정말요? 생각보다 개방적이네요. 그럼 하나만…?"

  고개를 숙여 은방울꽃 하나를 꺾는다. 특유의 청초한 향이 감돌았다. 나는 꺾은 은방울꽃을 슈리엘에게 보여주었다.

  "냄새 맡아볼래요? 음. 단어 선정이 좀 이상했나?"

  "됐다. 나랑은 맞지 않아."

  "그러면 꽃 말고. 냄새. 맡아볼래요?"

  "…집어치워라."

  재미없는 사람 같으니라고. 나는 풀어진 가슴팍을 조여 매고 다시 길을 걸었다. 라냐는 내가 무슨 짓을 한지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그녀는 순수했다.

  반대로. 엘븐 나이트는 이해한 듯 헛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안내는 라냐가 더 잘할 것 같군요.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는 떠나기 전, 라냐를 불러 단단히 충고했다.

  "라냐. 너 또한 지모신님의 부름을 받은 세 개의 빛 중 하나다. 그 점을 명심하도록 해. 절대로. 지모신님을 욕보이지 마라."

  "알았어. 명심할게."

  그렇게. 그는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눈 깜짝할 새에 사라진 엘븐 나이트. 그가 서 있던 장소엔 밟혀 누운 풀만이 남아있었다.

  * * *

  카르드라실의 '주거지'는 24시간 온화한 기후로 유지되고 있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딱 미적지근한 온도. 피 냄새가 이는 바깥과 비교되는 풍경이었다.

  조금 놀라웠던 건, 그들이 나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엘프들이 자연 그대로 사는 줄 알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평범하게 살아갔다. 땅의 기반도 다져져 있고, 디자인도 인간과 비교해서 꿀리지 않았다. 자연과 어우러진 목조 건축물. 보는 것만으로 눈이 정화되는 느낌이다.

  ―정말, 인간이라고?

  ―저 붉은 머리 마법사도? 엘프처럼 보이는데?

  ―머리가 붉어. 귀도 길지 않아.

  그리고. 우리는 주거지에 도착하자마자 엘프들의 지대한 관심을 받아야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세계수의 부름을 받은 엘프라면 몇 번이고 봐왔지만, 이번엔 인간이었다. 방벽 건설 이래 최초로 인간이 카르드라실에 입장한 것도 모자라 세계수의 땅을 밟는다 하니 놀랄 수밖에.

  덕분에, 라냐는 이 폭발적인 관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는 엘프였으니까. 선망의 눈길을 받긴 해도 직접적으로 터치당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정령들이 이렇게나 좋아하는 인간은 처음 봐요! 원로님도 이렇게 많은 정령을 부리진 못했는데…."

  나는.

  엘프가 아닌 정령들에게 고통받고 있었다.

  못해도 오십. 그정도로 많은 정령들이 몸에 달라붙어 부비적대고 있었다. 주변 엘프들이 감탄할 정도였다. 얼굴에 달라붙는다고 시야를 가리는 건 아니었지만, 자리를 찾지 못한 정령이 엄한 곳에 붙으니 참으로 난감했다.

  "하으, 읏."

  "괜찮으세요…?"

  "괜찮, 아요. 그보다 빨리. 옷부터 입으러. 가요."

  정령이고 자시고. 

  세계수를 만나기 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우선, 옷부터 갈아입어야 했다.

  '하니쉬'라 불리는 예복인데, 세계수를 만나려면 필수적으로 입어야 하는 옷이다. 엘프들은 평상복으로 입기도 한다. 지금 엘프들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는 라냐도 하니쉬를 입고 있었다.

  "…이걸 평상복으로 입는다고요?"

  "네? 네!"

  남성복의 경우 별다른 특징이랄 게 없지만, 여성복의 경우 조금 과감하게 노출이 되어있는 편이었다.

  새의 꼬리처럼 뒤로 길게 뻗어있는 치마. 하지만 앞은 허벅지를 겨우 넘어갈 정도로 짧았다. 이걸 입으려면 당연히 가터벨트를 벗어야 하기 때문에, 앞으로 맨다리가 그대로 노출됐다.

  상의는 배꼽이 보이는 크롭티였다. 정확히는, 배꼽으로 내려오는 천이 반투명했다. 전체적인 디자인은 현대적이기보다는 클래식한 느낌이 강했다.

  "으음. 혹시 선조 중에 엘프가 계신가요?"

  "…인간이에요."

  코디를 끝마친 엘프 아가씨는 입을 다물지 못하며 감탄하기 바빴다. 막말로, 엘프보다 예뻤다. 자기 객관화가 확실한 내가 봐도 주변 엘프를 가볍게 압살할 정도였다.

  나는 세계수를 만날 준비를 끝마치고 밖으로 나섰다. 마당에는 이미 옷을 갈아입은 슈리엘이 서 있었다.

  "슈리엘. 저도 다 입었어요."

  "뭐하다 이리 늦…."

  "흐. 눈이 참 정직하시네요."

  "…닥쳐라."

  밖으로 나오자마자 정령들이 몸에 달라붙는다. 마나를 핥아 먹으면 알아서 떨어지기에 잠시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가슴에 파고들어 부비적대는 정령들의 감촉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으, 흐."

  "아까부터 왜그러는 거지?"

  "정령. 안 보여요?"

  "내 눈엔 안 보인다만."

  정령 친화력이 처음부터 맥스를 찍을 줄 누가 알았던가. 자연의 보고인 카르드라실이라 더 심한 것 같았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내뿜는 마나가 그리 맛있―

  "하, 흐익?!"

  속옷 사이로.

  정령들이 들어왔다.

  "이봐! 괜찮나?"

  "마, 만지지 마― 힉, 흑!"

  나는 그대로 땅에 주저앉았고, 바닥에 짓눌린 정령은 깜짝 놀라 빠져나가려 애를 썼다. 하지만 그 발버둥이. 묘하게 아랫도리를 자극해 이상한 기분이 마구 들기 시작했다.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다.

  "…."

  엘프들의 시선이 몰린다.

  '…씨발.'

  오늘부터 정령 혐오자가 될 것 같았다.

  내가 야릇한 신음을 내며 주저앉자 엘프들의 시선이 몰려들었다. 다행인 점은, 저들의 성관념이 인간과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어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방에게 그럴 의도가 없다 해도. 그것을 내가 어떻게 느끼는가는 다른 문제였다. 내게 옷을 입혀준 엘프 아가씨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조곤조곤 물었다.

  "으음? 인간들도 번식기가 있나요?"

  "아니. 아니에요. 단순히 정령들이 장난친 거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그녀는 이게 왜 부끄러운지 이해조차 못 하는 모습이었다.

  엘프들에게 성적 흥분이란 그저 종의 보존을 위한 장치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이라고 성적 쾌감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행동 원리의 우선순위가 '고정' 되어있다는 게 인간과의 차별점이었다. 저들은 번식보다 세계수 보호가 더 우선순위에 있다. 이는 변하지 않는다.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따라서, 카르드라실이 과포화 상태가 될 조짐이 보이면 모든 번식 행위를 멈춘다. 방벽 안의 땅은 제한되어있다. 가뜩이나 부족한 자원을 소모하면서 인구를 늘리는 건 그다지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엘프가 칼 몇 대 맞는다고 죽는 종족도 아니고, 기본적으로 장수까지 하는지라 신중하게 아이를 낳아야했다.

  "이번 일로 너무 많은 잎이 지모신님 곁으로 가긴 했죠. 저희도 슬슬 아이를 가져야…."

  "―그만, 그만! 아, 흠. 소리쳐서 미안해요. 그냥. 조금 부끄러우니 넘어가 주세요. 제발."

  그러나 오늘처럼. 악마들의 농간으로 아인들이 미쳐 날뛰고, 그를 저지하려 나선 엘프들이 적지 않게 하늘로 떠났을 때에는. 되려 적극적으로 아이를 가지려고 하는 편이다. 그들은 이를 번식기라 부른다.

  이런 기계적인 모습 때문에. 

  일각에선 엘프가 '사람답지' 않다고들 말한다. 맞다. 동의한다. 저들은 기계다. 슬픔은 있되 추모는 없다. 한시적인 슬픔. 그리워하지 않는다. 마치 어딘가 고장 난― 아니.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된 종족. 인생의 삼분지 이를 세계수 지키기에 소모하는 게 엘프다.

  사실, 나도 라냐를 볼때 가끔 소름이 끼칠 때가 많다. 그나마 우리가 세계수에게 선택받아서 저 정도지, 그냥 평범한 인간이었으면 싸늘한 표정으로 활부터 들이댔을 거다.

  슈리엘은 기가 찬 목소리로 명령했다.

  "헛짓거리하지 말고 빨리 일어나기라 해라."

  "하아… 손 좀 잡아줄래요? 다리에 힘이…"

  슈리엘의 손을 잡고 일어난다. 나는 뜨거운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열심히 바람을 보냈다. 하지만 붉어진 얼굴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그리고 왜인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정령 때문인가? 몸이 무거워진 느낌이 든다. 살짝 몽롱하기도 하고. 정확한 원인을 찾지 못한 나는 그냥 부끄러워서 그런 걸로 생각하기로 했다. 이런 일에 더는 사고를 할애하기 싫었다.

  "친구. 다 입었어? 어울려."

  "고마워요 라냐. 그럼, 안내 좀 해줄래요?"

  "물론. 따라와. 다른 친구들은 데려오면 안 돼. 허락받은 이만 들어올 수 있어."

  하니쉬를 입은 우리는 라냐의 안내를 받아 세계수로 향했다. 라냐가 말하길 세계수를 만나는 건 자신도 처음이라고 한다. 긴 생을 사는 엘프지만, 지모신을 만날 기회는 많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살면서 두 번 이상 지모신님을 뵙는 엘프는 손에 꼽는다고 말했다.

  나는 얼굴에 부채질을 하며 길을 나섰다. 얼굴이 묘하게 붉다. 슈리엘은 이런 나를 보며 걱정된다는 듯 물었다.

  "아까부터 얼굴이 붉구나. 감기라도 걸린 건가?"

  "모르겠어요. 조금, 답답하네요."

  일단 몸에 이상은 없는 건 확실하니 무시하고 전진하기로 했다. 라냐에게 물어도 잘 모르겠다는 대답만 돌아오니 원.

  "라냐. 앞으로 얼마나 남았어요?"

  "곧 결계. 얼마 남지 않았어."

  신발은 신지 않았다. 맨발로 땅을 밟아도 돌조각에 찔린다거나 하지 않았다. 사토처럼 고운 흙과 매끈한 풀들이 몸을 지탱해주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침대보를 밟는 것처럼 보드라운 감촉이 발을 감쌌다. 

  나는 점점 많아지는 정령들을 보며 감탄했다. 주거지에서 보았던 정령들이 저위계 정령이었다면, 지금 보이는 정령들은 환계에서나 살 법한 고위계 정령들이었다. 저 중에 하나만 계약해도 제국에선 이름난 정령사로 대접받을 것이다.

  짙어지는 초목. 중독될 것 같은 자연의 향기. 우리는 끝없이 펼쳐지는 몽환적인 세상에 홀린듯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라냐가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친구. 지금부터 결계에 진입할 거야."

  "결계? 앞에 일렁이는 저걸 말하는 건가요?"

  "맞아. 1방벽. 세계수를 지키기 위한 결계."

  앞을 바라보면 푸른색으로 일렁이는 반투명한 막 같은 게 보였다. 세계수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결계. 1방벽이었다.

  1방벽은 오로지 결계로만 이루어진 곳이었다. 선조 엘프들이 평생을 바쳐 보수, 발전시켜온 방위 마법의 정수. 이 결계는 세계수와 공명하며 자아를 가지고 움직였다.

  자아를 가진 결계. 허락받지 않은 자는 가차 없이 튕겨낸다. 무시하고 들어온 자에겐 자연의 분노를 맛보여준다. 오직, 세계수의 허락이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금역.

  라냐는 반투명한 막을 통과하며 말했다.

  "조심해. 눈과 귀를 의심하지 마."

  의심하지 마.

  라냐는 의미 모를 충고를 하며 결계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도 들어가지. 나 먼저 가겠다."

  두 번째로는 슈리엘이.

  그는결계를 넘어가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밖에선 내부를 볼 수 없는 구조인 것 같았다. 호기심이 동한 나는 결계에 손을 뻗어보았다. 살짝 차가웠다. 물리적으로 만져지는 종류의 결계였다.

  "들려요? 저도 들어갈게요."

  그렇게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간다. 얼굴을 감싸는 결계. 알을 둘러싼 피막을 뚫는 것 같은, 다소 불쾌한 감각이 전신을 흝는다. 얼굴을 찡그리며 결계를 뚫고 나온 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슈리엘과 라냐를 찾았다.

  "…슈리엘? 라냐?"

  그런데.

  보이질 않았다. 

  고요했다. 그리고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싱그러운 풀과 구름은 밖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 주변을 돌아다니던 정령도. 풀벌레도. 하늘을 날아다니던 새들도.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강제 이동 술식인가?'

  이토록 분석하기 어려운 결계는 처음이었다. 천 년 가까이 설계된 결계를 하루아침에 분석하면 그게 더 이상하겠다만 하여튼. 나는 주변에 마나를 퍼트려 주변을 스캔―

  "으윽?!"

  ―파직.

  마나가.

  강제로 끊겼다.

  "아으, 윽."

  픽, 하고 터지는 코피. 나는 몸을 비틀며 고통에 신음했다. 마나가 역류한다. 무릎을 꿇고 코피를 막고 있던 나는 결국, 고통을 참지 못하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하으. 흐. 대체, 누가."

  급하게 재구축을 한다. 뒤틀린 장기를 바로 맞추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는 온몸의 신경을 세우고 주위를 경계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애초에 세계수의 결계 안에서 공격할 놈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라냐나 슈리엘이 날 공격했을 리도 없고.

  "흐, 긋?"

  그 순간.

  머리를 울리는 한마디.

  ―남의 몸을 염탐하는 건 좋지 않단다.

  몰려드는 어지럼증. 나는 땅에 머리를 박고 끙끙거렸다. 남의 몸을 염탐하는 건 좋지 않다니. 설마, 내가 주변을 스캔하려 들어서 그런 건가? 이딴 짓을 할만한 존재는…

  '…세계수.'

  젠장. 지켜보고 있다는 건가. 라냐의 '눈과 귀를 의심하지 말라' 라는 말이 조금은 이해가 갈 것 같았다. 나는 어느 종류의 마법이든 사용하길 깔끔히 포기하고 길을 걸어갔다.

  마치 이곳으로 오라는 듯 눕혀져 있는 풀. 그리고 양옆으로 꺾인 고목들. 다른 곳과 비교해서 부자연스러운 풍경이었지만 그녀의 말처럼 의심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갔다.

  나아가고, 나아가고, 나아갔다.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나무를 향해서.

  하지만.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겠다. 몇 시간이 지나도 높이 뜬 태양은 그대로였다. 지금 밤 아니었나? 모르겠다. 시간 감각이 사라져 간다. 더위에 목이 탄 나는 혹시나 싶어 손끝에 물방울을 생성해봤지만, ―눈물을 흘리긴 아직 이르지 않니? 라는 말과 함께 마나가 강제로 끊겼다.

  지쳐간다. 혹사당한 발은 진물이 날 정도로 아팠다. 조금 쉬고 싶었지만, 아까부터 점점 달아오르던 몸은 식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끝내 숨조차 쉬기 어려울 정도로 몸이 뜨거워졌다.

  "하아… 하, 윽. 흐."

  쌍둥이 악마와는 달리 대응할 수 없었다. 몸 내부에 마나를 모아 터트릴 수도 없었고, 설사 그게 가능하다 해도 써먹을 곳이 없었다. 허공에다 몸을 폭파해서 뭐 어쩌려고.

  이러다 진짜 죽을 것 같았던 나는 왔던 길을 한 번 돌아가 봤다. 그러나. 온 길의 두 배 이상을 걸어도 제자리걸음이었다. 주변 풍경이 변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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