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는지는 묻지 말아라.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건 당연 3방벽 가르퀴나 구였다. 엘프들이 2방벽 카르드라실과 1방벽 세계수를 지키기 위해 사살을 동반한 강제 진압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서 오러를 기본으로 배우는 아인들을 손쉽게 제압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건 전쟁이었다.
악마를 잡는 동안 가르퀴나 구는 전쟁이 일어났었다. 이렇게나 많은 아인들이, 엘프들이. 고작 악마 두 명의 농간에 놀아나 죽은 건, 방벽이 설치된 역사 이래 가장 큰 충격이자 악마를 향한 경각심을 다시금 상기시켜 주는 사건이었다.
자연스레.
유진의 텔레포트로 복귀한 일행은 초토화된 도시를 맞이해야 했다.
슈리엘은 기절한 라냐를 들쳐메고 피에 젖은 거리를 거닐었다. 같이 텔레포트한 드워프 영감은 거리의 참상을 보더니 하얗게 질린 얼굴로 도망치기 바빴다. 슈리엘은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쉼터를 찾기 위해 바삐 발을 놀렸다.
"하아. 망치 돌려줄 부족장들이 살아있을련지 모르겠군."
"친구. 윽. 어딨어?"
"깨어났나?"
"이거, 놔. 친구. 친구를 찾아야 해."
그러던 도중, 라냐가 깨어났다. 그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슈리엘은 사라진 마기에 안도하면서도, 뒤처리할 생각에 골머리를 앓았다. 겨우 정신을 차린 라냐가 다시 충격에 빠질 정도로 도시의 참상은 끔찍했다.
그때.
"멈추십쇼."
은색의 경갑을 차려입은 사내 한 명이 슈리엘과 라냐 앞에 나타났다. 슈리엘은 검을 뽑아들고 경계했다. 붉은 달은 내려왔지만, 그 여파는 아직도 진행형이었다. 그러나. 긴장한 슈리엘과 달리, 라냐는 무장을 거두고 당당하게 걸어갔다. 그러곤 말했다.
"…엘븐 나이트. 무슨 일이야?"
엘븐 나이트.
그 말을 듣고 다시 외관을 살펴본다. 라냐와 똑같은 은발, 그리고 긴 귀. 어깨에 달린 휘장엔 활대 사이로 검이 꽂혀있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저들은 엘프였다. 엘프 중에서도 세계수를 지키는 임무를 부여받은 수호자. 엘븐 나이트.
그럼에도 경계를 풀 수는 없었다. 그야 전신에 피칠갑을 하고 있었으니까. 털이 묻은 걸 보면 한바탕 아인들을 제압하고 온 모양이었다. 그는 옷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라냐의 질문에 답했다.
"지모신님이 인도하신 길입니다. 이곳에 있는 세 명을 데려오라 했는데…"
두 명밖에 없군요.
작게 읊조린다.
"…."
라냐는 입술을 깨물었다. 싸움 도중에 기절해버려 전투의 양상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알지 못했다. 눈을 뜨면, 바르하이야 구였다. 라냐는 기절해버린 자신을 슈리엘이 챙기고 도망친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의 사고는 '유진이 희생했다.' 라는 극단적인 쪽으로 기울어졌다.
입술 사이로 흐르는 피를 머금고, 비애悲哀에 젖은 원통함을 내뱉으려던 찰나.
―딸랑.
방울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쿠드! 속도 줄여!"
하늘을 올려다보면 머리 셋의 고양이가. 붉은 머리의 마법사를 태우고 창천을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하늘을 한 바퀴 빙 돌면서 고도를 낮추던 삼두묘 쿠드는 근처 건물 위로 착지해 유진을 내려다 줬다.
폴짝. 유진은 겁도 없이 건물에서 뛰어내렸다. 그녀는 바람의 정령과 마법을 이용해 낙하 속도를 줄이더니, 먼지 한 번 나지 않게 가볍게 착지하며 인사했다.
"미안해요. 조금 늦었나요?"
"하! 뭐 하다 13분이나 걸린 거지? 설마 저 고양이를 타고 온 건 아니겠지?"
"괜찮아요. 얌전한 아이니까요. 그리고, 27분 걸린 누구보다는 낫잖아요?"
"…."
반격을 맞은 슈리엘이 입을 다문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냐는 유진이 멀쩡히 돌아왔다는 사실에 더없는 기쁨을 느꼈다. 그녀는 지금, 종을 초월한 동료애로 충만해졌다.
"친구. 살아있었구나."
"아흑. 라, 라냐?"
예고없는 포옹.
라냐는 유진을 꼭 끌어안고 고운 눈물을 흘렸다.
"…."
그 광경을 바라본 엘븐 나이트는 끼어들 틈을 찾지 못해, 어이없는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 * *
쿠드는 '빠르다'라고 밖에 설명하지 못하겠다. 정말. 정말로 빨랐다. 공기 저항을 무시하듯 하늘을 내달리는 쿠드는, 10,000km가 훌쩍 넘는 거리를 10분 만에 주파했다. 그 등에 탄 나는 놀랍게도, 멀쩡했다. 별다른 마법적 처리를 가하지 않아도 튕겨 나간다거나 속도에 짓눌린다거나 하지 않았다.
"쿠드! 속도 줄여!"
딸랑. 청아한 방울 소리. 쿠드는 말 대신 방울을 흔들며 대답했다. 딱히 목적지를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바르하이야 구까지 태워준 쿠드는 하늘을 한 바퀴 빙 돌더니 근처 건물 위로 착지했다. 위치는 정확했다. 밑을 내려다보면 라냐와 슈리엘이 은발의 엘프 한 명과 대치 중이었다.
나는 곧바로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중간에 중력 마법으로 충격을 덜 생각이었으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바람이 나를 받쳐주며 가속도를 덜어줬다. 이건 착각이 아니었다. 발을 떼자마자 몸에 달라붙는 바람의 정령들. 그들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내던졌다.
원래 정령들이 인간에게 호의적이었던가. 모르겠다. 마나를 나눠주는 걸로 소소하게 보답한 나는 거리에 울려 퍼지는 수많은 종소리를 뒤로하고 가볍게 착지했다.
"미안해요. 조금 늦었나요?"
"하! 뭐 하다 13분이나 걸린 거지? 설마 저 고양이를 타고 온 건 아니겠지?"
"괜찮아요. 얌전한 아이니까요. 그리고, 27분 걸린 누구보다는 낫잖아요?"
"…."
내 머리 위를 빙글빙글 돌다 소리 없이 사라진 쿠드. 슈리엘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검을 집어넣었고, 정신을 차린 라냐는 예고도 없이 나를 껴안았다. 나는 갑자기 울음보를 터트린 라냐를 밀어내고 상황 설명을 요청했다.
"아흑. 라, 라냐. 잠시만요. 어떻게 된 거에요? 저분은 또 누구고?"
은장발의 엘프. 하지만 남자였다. 그리고 활을 중심으로 싸우는 일반적인 엘프들과 달리 검을 들고 있었다. 라냐는 닦지 못한 눈물을 옷소매로 슥슥 비볐다. 마음을 진정시킨 그녀는 울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엘븐 나이트. 지모신님이 우리를 불렀어."
"수호자가요? 왜요?"
세계수의 수호자 엘븐 나이트. 엘프 최정예 전력이 왜? 나는 눈을 돌려 수호자를 바라봤다. 그는 몸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말했다.
"우선 이 난장판을 정리하느라 제대로 된 정황 파악을 못 하는 점 사과하겠습니다. 라냐. 이자들이 악마를 퇴치한 인간들인가요?"
"…미안. 싸움 도중에 기절해버렸어. 그래도. 친구들이 쓰러트린 건 확실해."
"바르하이야 구의 대지진… 틀림없이 저 붉은 머리의 마법사가 저지른 일이겠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따라오도록 하세요. 지모신님이 당신들을 부릅니다."
너무 쉽게 믿는 거 아니야? 나는 어이없어하면서도 발을 움직였다. 후에 알게된 사실인데, 고위 엘프들은 '믿음'의 진실을 파악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한다. 거짓말을 간파하는 속 편한 기술은 아니다. 누군가 사실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믿음'에만 해당하는 기술이니까. 우리가 악마를 퇴치했다고 굳게 믿는 라냐처럼.
엘븐 나이트는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인간들에게 떠맡겼다는 사실에 부끄러워하면서, 악마를 무찌른 우리에게 연신 감사를 보냈다. 그는 폭주한 아인들 때문에 즉각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다고 한탄했다. 2방벽 카르드라실에 침투하기 위해 벽을 타고 올라오는 아인들은 엘프들을 미치게 하기 충분했다. 그들에겐 악마퇴치보다 세계수 수호가 더 중요했다.
"그래서. 어디로 가는 거지?"
슈리엘은 아무래도 좋다며 엘븐 나이트를 닦달했다. 슈리엘은 생각보다 바쁜 몸이었다. 악마를 퇴치했으니 본가와 성황청에 보고도 해야 했고, 헤어진 칼버드와 합류도 해야했다. 그리고. 향후 악마들의 동향에 관해 철저하게 분석해야 했다.
이런 대규모적인 혼란은 역사적으로도 드물었다. 지금까지의 악마들이 '장난기'로 행동했다면, 이번 쌍둥이 악마의 행동 동기는 '증오'와 '살의'가 대부분이었다. 마왕이 활개 치던 시절에나 일어날 법한 일이란 말이다.
슈리엘은 이번 일을 절대 가볍게 넘기지 않았다. 타지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넘길 사안이 아니었다. 당장 카할리아만 봐도, 슈리엘과 내가 파견 나가지 않았더라면 붉은 달이 뜨는 곳은 이곳이 아니라 제국이었을 테니까.
삼 일.
아마 삼 일도 지나지 않아 이곳이 악마에게 습격당했다는 정보가 제국 전체에 퍼질 것이다. 제국의 인간들이 이 사실에 어떻게 반응할지는 명백했다. 특히 동부에 발을 내린 자들은 자신들이 거머쥔 평화가 위협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경기를 일으킬 테지.
불안의 싹이 트였다. 깊게 뿌리내린 싹은 곧 명분이 되어 인간들을 압박할 것이다. 이제 악마는 그저 뜨고 지는 태양처럼. 태풍처럼 지나가는 자연재해가 아니었다. 이건 '습격'이었다. 불안과 명분에 압박당한 인간들을 언젠가 '대응'을 원할 테고 그것은 즉―
―전쟁.
전쟁이 다가온다.
슈리엘 루셸리니.
그는 서서히 꺼져가는 축복의 기운을 느끼며 말했다.
"엘븐 나이트. 우릴 불러놓고 음식 따위를 대접할 생각이라면 당장 그만두는 걸 추천하지. 미안하게도 그럴 시간이 없어. 우릴 생각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일이 생각보다 심각해."
세계수의 수호자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지모신님의 명령은 수행되어야 합니다."
이런 빌어먹을 귀쟁이들.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만 중얼거린다. 라냐도 따라가는 게 당연하다는 것처럼 앞장서서 걷고 있었다. 그녀를 통해 말해봤자 지모신 어쩌고 하면서 역으로 설득할 게 분명했다. 나는 쓰게 웃으며 슈리엘에게 말했다.
"그냥 따라가는 게 어때요? 항상 일만 하고 살 수는 없잖아요."
"하아. 어떻게 그만한 힘을 가지면서 그리 태평할 수가… 아니. 아니다. 그래. 젠장. 미치겠군."
나는 머리를 벅벅 긁는 슈리엘을 보며 쿡쿡 웃었다. 그는 여기저기 싸돌아다닐 것처럼 생겨도 워커홀릭 기질이 있었다. 어찌 보면 그의 형 하이라크보다 심했다. 칼질과 서류작업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 둘 다 일 중독자였다.
"봐봐요. 말도 제대로 안 나오면서. 그리고 혹시 몰라요? 우리를 카르드라실에 초청할지."
"꿈 깨도록. 방벽 건설 이후 2방벽 너머로 들어간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어."
그때.
우리의 말을 들은 엘븐 나이트가 뒤돌며 웃었다.
"솔직히. 저도 놀랐습니다. 하지만 지모신님의 뜻인데 어쩌겠습니까. 당신들을 데려오라는데."
"…네?"
우리는 발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수호자 옆에 서 있는 라냐는 묘하게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가슴을 쭉 펴며 말했다.
"유진. 엘프들의 친구야. 정령 친구들도 인정하고 있어."
"…그 말은?"
"카르드라실. 들어올 수 있어. 지모신님의 뜻."
슈리엘은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을 와락 구겼다. 짜증이 나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는 상식을 초월하는 일을 목격하거나 들으면 종종 얼굴을 구겼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엘프들의 성지에 초대받았다는 사실에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런 우리들에게.
엘븐 나이트는 담담한 표정으로 라냐의 말을 '정정'했다.
"정확히는, 카르드라실이 아닙니다."
2방벽.
카르드라실이 아니었다.
"네…? 그럼?"
"말했잖습니까. 지모신님이 당신들을 부른다고."
1방벽.
세계수.
우리는 세계수의 초대를 받았다.
카르드라실.
인간으로 태어나 이곳을 밟기란 쉽지 않다. 엘프들에게 파르늄을 수없이 바쳐도, 운 좋게 다친 엘프들을 구해도.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은혜를 입혔든 간에 세계수의 허락이 없으면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 바로 카르드라실이었다. 비단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에게 금지된 엘프들만의 성역.
그를 입증하듯 2방벽. 카르드라실로 통하는 문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벽. 거대한 벽만이 카르드라실을 감싸고 있었다. 벽을 타고 올라오지 못하게 중간중간 가시까지 박아놓은 모습은 엘프들의 광적인 집착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나는 너머로 보이는 방벽의 자태에 침을 꿀꺽 삼켰다. 슈리엘은 한 번 와봐서 그런지 태연해 보였다.
엘븐 나이트의 안내를 받은 우리는 가르퀴나 구의 거리를 가로질렀다.
살짝 빠른 템포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구인 만큼 거리의 풍경은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이는 방벽에 가까워질수록 심해졌다. 벽을 오르려다가 떨어져 머리가 터진 아인. 엘븐 나이트에게 두동강 나 내장을 쏟아낸 아인. 길을 가다 밟히는 게 있으면 높은 확률로 내장 조각일 정도로 시체들이 많았다.
나는 신발 밑창에 달라붙은 창자 조각을 떼며 혀를 내둘렀다. 아크 메이지의 정신이라고 거부감까지 없애주지는 못했다. 반면. 라냐는 혐오감이라는 감정이 거세된 것처럼 이 참상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는 엘프와 아인들이 맺은 불가침 조약 때문이었다. 엘프들은 세계수만 건들지 않는다면 아인들의 성장과 발전에 어떠한 관여도 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미친 아인들이 카르드라실로 쳐들어오면 말이 다르지만 말이다. 엘프들이 아인들을 죽인 건 정당방위였다. 적어도. 엘프들이 생각하기엔. 고로, 이번 사태에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세계수는 지켜졌다. 엘프들이 해야 할 일은 끝났다.
"멈추세요. 이곳을 통해 들어갈 겁니다."
우리는 시체의 산을 지나 방벽 앞에 도달했다. 그곳에 문은 없었다. 하지만 굳이 지적하진 않았다. '고작' 이런 것에 딴지를 걸기엔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엘븐 나이트는 회반죽 색으로 점칠 된 벽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지모신님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몇 가지 일러두겠습니다."
손을 얹은 곳에서부터 푸른 선이 위아래로 뻗어나간다. 선은 성인 남성 한 명 정도의 높이까지 올라가더니, 곧 멈춰 양옆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첫째. 절대로. 불을 피우지 마세요. 이곳에서 불을 다룰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불의 정령뿐입니다."
쑤욱. 벽 안으로 손을 집어넣는다. 자물쇠에 열쇠를 집어넣듯 깊숙이 넣은 다음, 주먹을 쥐고 한바퀴 돌린다. 그러자 지이잉거리는 소리와 함께 벽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문이 열렸다. 카르드라실. 엘프들의 성역으로 가는 문이 마침내. 인간을 위해 열렸다.
문 너머로는 푸른 빛밖에 보이지 않았다. 엘븐 나이트는 그 푸른 빛으로 거리낌 없이 걸어갔다. 나는 그를 따라 문 안으로 들어갔고, 첨벙. 하는 물에 빠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차갑다. 동시에 포근했다. 그는 환한 빛에 눈을 뜨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말했다. 두 번째 주의였다.
"둘째. 웬만하면 오는 호의를 거절하지 마세요. 당신들을 향한 호의가 곧 지모신님을 향한 호의입니다."
두 번째 주의는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그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당신들은 저희 엘프에게 부러운 존재입니다. 부러운 존재인 동시에 인정받은 자들입니다. 아무리 엘프라 해도 감히 밟을 수 없는 지모신님의 거처를 인간의 몸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당신들의 행동이 곧 지모신님을 대변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이해했다.
요약하자면 우리에게 세계수를 투영한다는 뜻이었다. 고작 세계수의 부름을 받은 것 가지고 이런 과한 호의를 보인다는 게 웃기기도 했지만, 굳이 이것까지 이해하려 하진 않았다.
"저희의 거절이 단순한 거부로 끝나는 게 아니군요."
"부디 부탁드립니다. 이미 소문이 파다합니다."
엘프는 세계수와 관련된 일에 한해서 싸이코패스가 따로 없는 행동을 보이지만, 기본적으로 이타적인 종족이다. 이렇게 착해빠진 종족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궁금할 정도로 착했다. 나는 순간, 세계수가 내리는 이해할 수 없는 명령들이 저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가에 가서 물을 마셔라.
세 번째로 만나는 자에게 활과 화살을 건네라.
대로변에 삼 분간 서 있어라.
라냐에게 들은 '세계수의 명령'은 그 의도를 알 수 없으나 그것은 늘 엘프들에게 도움이 되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했다. 강가에서 물을 마시려고 고개를 숙이면 머리 위로 화살이 날아간다든가, 활과 화살을 받은 엘프가 습격에서 살아남았다던가. 그런 식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저도 당신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악마를 죽이고 카르드라실을 구원해준 인간? 지모신님의 대변자?"
엘븐 나이트.
그가 받은 명령은 「바르하이야 구. 무너진 여관 앞. 세 개의 빛을 내 앞으로 인도해라.」
…였다.
"빛. 빛입니다."
그의 목소리가 격해진다.
"지모신님이 빛이라 말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저희 엘프들은 잎으로. 아인들은 맹수라 부르던 지모신님이 '빛'이라 말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지모신님은 '자신'을 칭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항상 우회적으로 명령하신 분이었는데, '내 앞으로 인도해라' 라니."
그 순간.
빛이 거두어지고, 새로운 '세상'이 우리를 반겼다. 새하얀 꽃잎이 뺨을 스친다. 나는 빛이 가시지 않은 눈을 겨우겨우 진정시키고 나서야 카르드라실의 본모습을 목도할 수 있었다.
코 끝에 퍼지는 대자연의 향기. 심장이 요동친다. 싱그러운 풀 냄새가. 흐르는 물소리가. 서 있는 것만으로 심신이 정화되는 맑은 공기까지. 눈이 가는 장소마다 푸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나는 '압도된다'라는 말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서론은 여기까지. 자, 여러분. 카르드라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고작 방벽 하나만 넘었을 뿐인데.
나는.
나와 슈리엘은.
자연에 압도됐다.
"이건. 정말. 음. 아름답네요."
"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