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집애 같은 신음을 내며 뒷덜미를 잡힌다. 라냐는 내 뒷목을 잡고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저 멀리 내던졌다. 목에 멍이 생길 정도의 힘. 대차게 땅을 구른다. 나는 넘어지기 직전, 목 너머로 여러 개의 화살이 쏘아지는 것을 보았다.
―쐐애액! 날카로운 파공음. 바람이 실린 화살이 하늘을 향해 날아간다. 정령의 힘을 받은 화살은 의지를 가진 것처럼 궤도를 비틀고, 점차 가속해 파괴력을 더해갔다.
나는 배일을 벗어던지고 일어섰다. 정말 빌어먹게도,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눈동자를 돌린다. 내가 있던 자리는 검은 칼날이 박혀 땅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라냐가 아니었다면 녹아내린 건 땅이 아니라 내가 됐을 것이다. 위력을 보면 즉사까지는 아니더라도… 재구축에 상당히 시간이 걸렸을 것 같았다.
나는 화살이 쏘아진 곳에 눈을 돌렸다.
"…코르딜."
외진 건물 옥상. 거칠게 붕대를 풀고 있는 포르딜과 그녀를 보조해주는 남성체 악마 하나. 마법 추방자 코르딜이었다. 둘 되어 하나 된 쌍둥이가 한곳에 모였다.
"기회는 한 번뿐이야 포르딜."
"…여분의 목숨이라. 괜찮네."
포르딜의 몸이 타오르는 재처럼 빛난다. 화상으로 진물투성이였던 피부는 본래의 색을 되찾았지만, 여기저기 조각나 텅 빈 속을 보였다. 그 속엔 근육도, 내장도 없었다. 칠흑같은 어둠뿐이었다. 껍질. 저건 껍질이었다. 껍질에 영혼만 처박은 모습. 그녀는 손을 쥐락펴락하더니 내게 시선을 돌렸다.
"날 죽이고 싶었으면 상자를 열기 전에 죽였어야지 자기? 아, 죽이기는 했어. 덕분에 이런 병신같은 몸이 됐지만."
"…잎으로 뭘 한 거지?"
"연극의 끝을 미리 말하면 재미없잖아?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알게 될 테니…"
말을 끊은 그녀는 손톱을 바로 세웠다. 카가각! 손톱이 교차하자 날카로운 금속음이 퍼진다.
"나머지는 지옥 가서 듣는 게 어때?"
눈에 붉은 달이 차오른다. 그녀는 투신자살을 하듯 힘없이 건물에서 떨어지더니, 돌연 허공을 박차 내게 달려들었다. 경로는 일직선. 양손을 교차하며 사선으로 쭉 밴다. 사고를 가속한다. 저건 오러가 담긴 공격이다. 나는 전면에 베리어를 전개하고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포르딜. 무시하고 달려가."
"고마워, 자기?"
코르딜이 허공에 손을 긋자 베리어가 증발해버렸다. 마법 추방. 성역이 설치됐다. 몇 번을 봐도 성가신 능력이다. 나는 혀를 차고 라냐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발에 정령들이 모여들며 몸을 이끌었다. 회피 기동. 아슬아슬하게 고개를 젖히자 손톱이 코끝을 스쳤다. 정령도 마법으로 취급되는 줄 알았으나 그것까진 아니었다. 공격 마법은 불가능해 보였지만, 움직임을 보조해주는 것까진 영향을 받지 않았다.
"네 남자친구도 없는데 안타깝게 됐어?"
포르딜은 입꼬리를 올리며 조소했다.
"라냐. 엄호 좀 해줘요."
"알았어."
정령들의 보조를 받으며 요리조리 피해 나간다. 하지만, 그것도 슬슬 한계가 찾아와 몸에 상처가 늘어나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팔을 잘라 폭파할까? 아니. 공격 템포가 생각보다 빨랐다. 상처는 입힐 수 있어도 후속 조치를 못 한다.
라냐는… 똑같이 마법을 차단당해 별다른 수를 쓰지 못하고 있었다. 화살을 쏘고는 있지만, 마법이 실리지 않은 화살촉은 그냥 철 덩어리를 던지는 것과 같았다. 포르딜은 화살촉을 가볍게 튕겨내며 계속해서 달려들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다. 슈리엘. 적어도 칼버드라도. 오러 나이트가 있어야 전투가 수월할 텐데. 이렇게 가면 소모전이다.
"라냐. 라냐라도 물러나요."
"거절. 엘프는 친구를 버리지 않아."
"세계수가 위험해도?"
"…그런 가정은 무의미해. 난 도망치지 않을 거야. 악마들을 죽이는 건 엘프들의 염원. 이 또한 지모신님의 뜻이야."
솔직히 말해서, 죽을 것 같진 않았다. 작정하고 버티기에 들어가면 마기를 감지한 슈리엘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라냐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흔하디흔한 딜레마다. 라냐가 죽는 걸 알면서도 버티거나, 아니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녀를 지키거나. 인간성을 시험당하는 일은 항상 엿 같았다. 의견충돌. 마법사의 이성은 항상 나와 반대되는 의견을 내뱉기 때문이다.
'좆까렴.'
뭐… 답은 정해져 있지만.
"친, 구?"
활시위를 당기다 말고 멈칫한다. 라냐는 내가 갑자기 악마에게 달려들자 화들짝 놀라며 정령을 보냈다. 나를 뒤로 이끌려는 힘이 느껴진다. 나는 정령들에게 그럴 필요 없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하지만, 정령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나를 지키려는 라냐의 의지가 더 강했다.
쓸데없이 착하기는. 발구름을 일으켜 정령들을 떼어낸다. 그럼에도 떨어지지 않은 정령들은 무시한다. 정 방해가 되면 발가락을 폭파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떼어내야겠다.
"드디어 미쳐버렸구나!"
"엿먹어."
전부 미쳐버린 세상에서 혼자 멀쩡하면 그게 미친놈이지. 달려드는 포르딜에게 건성으로 대답하고 오른손을 뻗는다. 아주 익숙한, 그리고 결코 잊을 수 없는 그때의 장면이 플래시백 된다. 몸을 폭탄으로 사용해 일대를 날려버렸던 그 순간. 하얀 섬광이 세상을 뒤엎었다.
'그때처럼 강하게 터트리진 않을 거고….'
사고를 가속한다.
푸슉! 칼날이 손바닥을 파고들고 팔을 가르기 시작한다. 나는 칼날이 손목 근처까지 도달했을 때, 팔꿈치 '내부'에 베리어를 전개했다. 몸 내부에 베리어를 펼친다는 발상은 쉽게 할 수 없을 것이다. 평범한 마법사는 그럴 수도 없을 거고. 왜냐면. 그딴 짓을 하면 근육이 잘리거든.
―촤아악!! 근육 내부에 베리어가 생성되자 뚝, 하고 떨어지는 오른팔. 피보라가 인다. 나는 그 즉시 오른팔을 들어 피를 흩뿌렸다. 서로의 시야가 가려지고, 그녀가 당황한 틈을 타 거리를 벌린다. 끔찍한 통증이 척추를 타고 올랐지만 이를 꽉 물고 버텼다.
"라냐!"
그녀에게 소리치자 정령들이 온몸에 몰려들었다. 팔에 새긴 폭파 술식이 터지기까지 3초. 폭발 반경에서 벗어나려면 빨리 거리를 벌려야 했다.
―콰아아앙!!!!
"캬하으흐으으긋?!"
정확히 3초 후.
커다란 굉음과 함께 팔이 산산조각이 나며 백색 섬광을 흩뿌렸다. 육편이 되어 날아가는 고깃조각들. 포르딜은 팔이 폭발할 거라고 생각도 못했는지 그대로 얻어맞아 저 멀리 날아갔다. 이미 한 번 당해놓고 두 번 당해? 멍청하기는. 비록 그때처럼 일대를 날려버릴 위력은 나오지 못했지만, 상처 정도는 입힐 수 있었다.
"이, 건방진. 년이."
"코르딜. 그때랑 같아. 저 마법사와 근접하면 몸 내부를 폭파해서―"
"하! 그거 마음에 드네. 다섯 번만 더 부딪히면 죽일 수 있다는 거지?"
"…최대한 막아볼게. 조심해"
그리고. 가성비 좋다는 말 취소하겠다. 이쪽은 팔 하나를 날렸는데, 저쪽은 고작 화상이다. 불합리의 극치였다. 마법까지 차단하고 싸우는데 너무한 거 아니야?
"친구! 괜찮아? 파, 팔이. 떨어졌어."
"괜찮, 윽. 사실 안 괜찮아요."
풍압과 정령에게 몸을 맡기고 뒤로 빠지자, 라냐가 나타나 나를 공주님 안기로 받아들었다. 나는 휘청거리며 그녀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포르딜은 타버린 얼굴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톱 칼날을 재정비했다.
"친구. 빠져나가야 해. 너무 많이 다쳤어. 정령 친구들을 붙여줄게. 정령 친구들이 카르드라실에 지원 요청을 해줄 거야."
"라냐, 는요?"
"버틸 거야. 친구가 빠져나갈 때까지."
"제가 나가자 할 땐 씨알도 안 먹히더니… 고개나 숙여요. 라냐."
―촤아악! 머리 위로 칼날이 스쳐 간다. 나는 왼팔을 이용해 그녀의 자세를 낮췄고, 그 덕에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 나는 키가 작아서 맞지 않았다. 속으로 한숨 쉰다. 싸움에서 몸집이 작은 건 단점보다 장점이 더 많았지만, 묘하게 짜증났다.
"도망칠 생각이야?!"
몰아치는 칼날 폭풍.
그녀는 손톱을 뽑아 수리검처럼 던졌다.
성역 밖으로 나가 메테오라도 날려야 하나. 하지만. 그러면 못해도 수천 명은 죽으리라. 아니, 도시 전체가 날아갈지도 몰랐다. 시가전을 고집하는 악마는 이래서 문제였다. 차라리 평지에서 싸웠더라면 인명 피해 상관없이 마법을 날릴 수 있었을 텐데.
내가 후퇴한다면, 또 놓치고 말겠지. 저놈이 슈리엘이 올 때까지 여기 죽치고 앉아있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차라리, 포르딜이 분노로 날 죽이려 들 때, 역으로 응해주며 버티는 게 나았다.
그러나.
"이미 늦었어! 코르디이이일!!!"
그 순간.
코르딜이 서 있던 자리에서 한 줄기 빛이 오르기 시작했다.
거대한 빛기둥. 붉은빛을 발산하며 하늘로 솟구친다. 기둥은 하늘을 비추는 달까지 닿았고, 곧 달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실핏줄이 가득한 그녀의 눈동자처럼. 새하얀 달이 핏물로 가득 차기 시작한다.
항상 눈을 감고 있었던 코르딜이 눈을 뜬다. 그러곤 말한다. 우리를 향해 시선을 돌리고. 똑똑히 바라보면서.
"붉은 달이 피어올랐구나. 아름답지 않아?"
블러드 문.
붉은 달이 우리를 비춘다.
동시에. 암시장 바깥에서 아인들의 울음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울려 퍼졌다.
부족장들을 만나 '시험'을 치른 슈리엘은 등에 거대한 망치를 매고 바르하이야 구로 복귀 중이었다. 신성력의 힘이 잔뜩 담긴 성유물 수켈로스의 망치. 키가 큰 슈리엘도 다루기 힘들 정도의 크기였다.
후우웅! 허공을 향해 망치를 휘두르자 충격파가 터진다. 슈리엘은 부족장들에게서 받은 무기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쓰고 있는 애검 '카라반'도 만만치 않게 뛰어난 무기였지만, 장검에선 느낄 수 없는 묵직한 감각이 그를 매료했다.
사실, 처음 부족장을 만나러 갔을 때만 해도 실망스러운 기색밖에 없었다. 그들은 겁쟁이였다. 악마를 잡아야 한다 하니 지레 겁 먹고 떨기나 하고. 가르퀴나 구에서 나가지 않고 처박혀 있다 할 때부터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물론 그들이 처음부터 겁쟁이는 아니었을 거다. 문명화된 도시 속에서 야생의 본능이 거세되어서 그런 거겠지.
지금 등에 메고 있는 망치는 철웅족과 황호족이 주관하는 힘의 시련을 통과한 증거였다. 슈리엘은 망치 말고도 여러 권한을 받을 수 있었다. 이제 주변 눈치 보지 않고 난리 칠 수 있었다. 그도 어쩔 수 없이 귀족이라 외교 문제에 민감했다.
그런데.
"…뭐야?"
어두운 밤, 신성력으로 빛나는 망치만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는 그 순간. 시선 너머로 거대한 빛줄기가 보였다. 거대하고, 또 눈이 멀 정도로 밝아서 어디에 서든 잘 보일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끝이 아니었다. 달이 붉게 물들었다. 진홍색으로, 또 강렬하게. 달에 홀려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니 장미 잎 같은 붉은 파편들이 부유하며 슈리엘의 뺨을 때렸다.
'…마기 조각.'
마기.
정신이 번쩍 든다. 악마의 흔적이 강하게 느껴진다. 세계수의 축복을 무시하고 어떻게 마기를 발현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한 증거였다. 너무 늦었나. 짜증이 몰려온 슈리엘은 눈을 잔뜩 찡그리고 거리를 쟀다. 빛 기둥이 올라온 곳은 바르하이야 구다.
발을 바삐 움직인다. 이동하며 확인한 주변 마나는 기괴하게 뒤틀려 있었다. 상당히 넓은 범위가 그렇게 뒤틀렸다. 하지만, 이 뒤틀린 마나가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는 아직 몰랐다. 슈리엘은 온몸의 신경을 세우고 주변을 경계했다.
―크르르르…
맹수의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들린다. 붉은 달이 피어오르고, 주변 아인들의 상태가 이상해졌다. 하나같이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대고 있었다. 비대해진 근육, 솟아오른 손톱. 저건 광포화였다. 일시적으로 짐승의 본능을 개화시켜 전투력을 상승시키는 수단.
그 속에 이성은 없었다. 지금 그들에게 슈리엘은 하나의 먹잇감에 불과했다. 아인들의 시선이 몰린다. 슈리엘은 망치를 쥐고 땅을 박찼다.
"꺼져라!"
쿵! 달려드는 아인을 밀쳐내고 자리를 옮긴다. 슈리엘은 더 많은 아인들이 몰려들기 전에 뒷골목으로 자리를 피했다. 광포화를 하더라도 한 줌의 이성은 남겨두었던 아인들이 날짐승이 되어버렸다. 그것도 분노에 물든 흉포한 맹수가.
―딸랑.
그렇게 달려가는 도중 희미한 방울 소리가 울렸다. 딸랑, 딸랑하고 울리는 방울은 거리에 상관없이 귀를 간질였다. 슈리엘은 침을 꿀꺽 삼켰다. 다시 하늘을 본다. 붉은 달. 붉게 물든 하늘. 그리고. 빛줄기를 향해 날아가는 머리 셋의 거대한 고양이.
'미치겠군. 쿠드까지 나왔어. 어떻게 된 거지?'
역사서나 악마와 관련된 이야기를 보면 마왕과 그의 오른팔 바르페우고스가 가장 많이 다뤄지지만, 그에 못지않게 자주 등장한 악마가 하나 있었다. 아니, 악마라기 하기도 뭐했다. 그냥 고양이였다. 머리 셋 달린 고양이.
'책에서나 볼 법한 놈을 실제로 볼 줄을 몰랐는데.'
인간에게 위협적인 악마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저놈이 나타나는 순간 경계 등급을 최고로 올리기 일쑤였다. 삼두묘 쿠드는 죽음이 모이는 곳에만 오기 때문이다. 학살, 전쟁, 사고 등 뭐가 됐든 간에.
재앙의 전조가 일어나면 빠짐없이 나타나는 삼두묘 쿠드. 그냥 나타나서 쉴새 없이 떠들 뿐인 고양이이나, 그 녀석이 나타났다는 건 보통 일이 파국으로 치달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쿠드는 일부 악마 숭배자들에게 사신으로 통하기도 한다. 죽음이 일어나는 곳에 나타나 지켜보기만 하는 존재.
뒷골목을 최단 거리로 돌파하며 뛰어간다. 발에 오러까지 두르고 전속력으로. 이렇게 빨리 등장할 줄은 몰랐는데… 따로 연락망을 챙기지 않은 게 실책이었다. 그렇게 수십 분을 달려 바르하이야 구에 도착했을 땐, 이미 난장판이 나 있는 상태였다.
"크아아아아아!!!!"
"사, 살려―"
포식과 피식. 야생의 본능이 휘몰아친다. 바르하이야 일대를 지배하던 적랑족은 떼를 지어 약소 부족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그것도 현재진행형으로. 목과 급소가 물어뜯긴 채 죽어있는 아인들이 눈에 속속들이 들어온다. 슈리엘은 그 끔찍한 광경을 뒤로하고 빛줄기를 향해 뛰어갔다.
널브러진 시체 중에서는 여관을 운영하던 라-쿠니 족 소년의 것도 있었다. 자신이 준 금화를 손에 꼭 쥐고, 텅 비어버린 눈으로 식어간다. 스쳐 지나간 인연이라도. 아는 사람이 죽었으니 기분이 아주 더러웠다.
'전쟁을 일으키려고 작정한 건가?'
일개 악마가 할 짓이 아니었다. 쿠드가 나올 정도의 대규모 혼란이라니. 전 생명체를 향한 선전포고와 다름없지 않은가. 악마 사이에서도 이런 짓은 트롤링으로 통했다. 싸우기를 좋아하나 전쟁은 썩 달가워하지 않는 게 악마들이기 때문이다.
그때. 슈리엘은 익숙한 외침을 들었다.
"이노오옴!!! 썩 꺼져라!!!"
중후한 노인의 목소리. 자신의 호위 기사인 칼버드의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린다. 슈리엘은 붉은 달빛을 받으며 달려갔다.
"칼버드!"
칼버드는 수많은 아인들에게 둘러싸여 힘겹게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검날은 뽑지 않은 채, 검집만 휘둘러 제압한다.
"주인!"
슈리엘의 외침을 들은 칼버드가 온 힘을 다해 아인을 밀쳐냈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손톱을 막으며 억지로 돌파한다. 뺨이 찢어지고 머리칼이 잘린다. 그는 그런 혼란 속에서 단 한 명의 아인도 죽이지 않았다. 슈리엘은 기가 찼다. 외교적 문제를 피하려고 그러는 건가? 당장 죽을 것 같은데 뭐하는 짓거리지?
"멍청한 놈! 비켜라!"
수켈로스의 망치를 들어 횡으로 휘두른다. 카가각! 풍암으로 땅이 긁힐 정도의 힘. 망치에 담긴 신성력은 슈리엘의 오러와 만나 푸르고, 환한 빛을 내며 세상에 내려앉았다.
―케극?!!
후우웅!! 망치에 얻어맞은 아인들이 뭉탱이로 날아간다. 아인들은 벽에 부딪히고 나서야 부유감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이윽고 몸이 축 늘어진다. 죽지는 않았다. 마음 같아선 죽이고 싶었으나, 슈리엘은 칼버드가 저들을 굳이 죽이지 않은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마침내 아인들의 공세에서 벗어난 칼버드는 거친 숨을 가다듬으며 주인에게 인사했다.
"허윽.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인."
"왜 죽이지 않은 거지?"
"쇤네가 어찌 주인의 허락도 없이 칼을 놀리겠습니까. 혹시, 오는 도중 한 명의 아인이라도 죽이셨습니까?"
"하! 이딴 건 허락 맡지 않아도 된다. 칼 맞고 반격조차 하지 않는 건 관용이 아니라 우둔함이야. 일단 너의 말에 답하자면, 죽이진 않았다. 칼 휘두르는 시간조차 아까워서 말이지."
"후우. 잘하셨습니다. 대행자의 칼은 악마에게만 향해야 하는 법입니다."
"넌."
지랄 말라는 말이 턱밑까지 차오르다 만다. 슈리엘은 그의 고지식함에 성을 내고 싶었으나 시간이 부족했다.
"헛소리 말고 따라오도록. 너도 그 빛은 봤겠지?"
"물론입니다. 헌데."
"헌데?"
"큼. 이 꼴로 따라가 봤자 도움이 될련지 모르겠습니다."
"…."
베인 상처가 너무 많다. 체력적으로도 지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여관에서도 피곤하다고 먼저 들어갔었다. 슈리엘은 하얗게 물든 칼버드의 턱수염을 보며 생각에 빠졌다. 하지만. 슈리엘이 입을 열기 전에 칼버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도. 늙고 병든 육체라도. 고기 방패가 될 수 있다면 기꺼이 따라가겠습니다.
슈리엘의 판단은 빨랐다.
"은퇴시켜 달라는 말은 길게도 하는구나. 알겠다. 빠져라. 내 너의 노후 계획을 친히 짜주도록 하지."
이런 말을 듣고 억지로 따라오게 할 정도로 막 나가는 놈은 아니었다. 그리고 말로는 이렇게 구박을 주지만 내심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슬슬 본가로 보내줄 생각이었다. 계약으로 인해 죽을 때까지 루셸리니를 섬겨야 함이 맞지만, 그렇게까지 오래 묶어둘 생각은 없었다.
"은퇴라니요. 제가 감히―"
"딸 보고 싶다고 했지? 내가 이 뒤로 무슨 말 할지 모르니 처신 잘하는 게 좋을 거야."
"…."
포션을 던지고 등을 돌린다.
그 이상의 말은 없었다.
'빛줄기가 점점 세지고 있어.'
슈리엘은 망치를 챙기며 다시금 뛰었다.
저만한 빛줄기를 라냐나 유진이 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만약에. 자신보다 먼저 도착했다면. 뭘 해보기도 전에 성역이 펼쳐졌다면. 쌍둥이 악마가 생존한 이상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마법이 차단된 마법사에게 기사는 천적이었다.
뜀박질을 반복해 어느새 뒷골목. 길은 구불구불해서 직선으로 나아가기가 힘들었다. 슈리엘은 길을 찾는 대신 망치를 휘둘러 벽을 부수며 앞으로 나아갔다.
'마나의 흐름이 끊겼다.'
계속 직진하던 와중, 슈리엘은 마나의 흐름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마나가 끊겼다. 정확히는, 마법이 사라졌다. 마법적 기류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
'성역을 설치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