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 친구. 괜찮아?"
"아, 안 죽으니까. 내, 내장 좀. 흐큽. 안으, 로. 넣어, 줄래요?"
생으로 재구축하는 것보다, 속에 내용물을 채우고 재구축하는 게 훨씬 빨랐다. 라냐 정도면… 재구축은 밝혀도 되겠지. 나는 떨어진 내장을 도로 집어넣으며 재구축을 가속했다.
"끄흐윽…."
라냐는 내게 다가와 어쩔 줄을 몰라하다, 내장을 넣은 옆구리가 아무는 모습을 보자 망설임을 거두었다. 끊어진 창자 조각들을 모아 안을 채워간다. 모양을 맞추고, 잇는 건 재구축 과정에서 알아서 되니 그냥 넣어주기만 해도 충분했다.
"아윽, 큭."
"미안해. 괜찮아?"
"괜찮, 아요."
가끔 라냐의 뾰족한 손톱이 멀쩡할 내장을 건들 때가 있었는데, 피를 토할 정도로 아팠다. 그때마다 라냐는 어쩔 줄 모르며 연신 사과하기 바빴고, 나는 괜찮다며 미소 지었다.
'…엘프 놀리는 거 생각보다 재밌네.'
어디까지 뒤틀리는 거지.
내 취향.
엘프가 손수 내장조각을 집어 뱃속에 담아주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 아마 손에 꼽을 거다. 있으면 죽으려나. 아무튼.
그녀는 그저, 눈을 감고 안도할 뿐이었다. 친구가 죽지 않았음에 기뻐하고, 올바른 길로 인도한 지모신에게 감사한다. 세계수 관련 일화만 나오면 악마에 가깝게 묘사되는 엘프들이지만, 기본적으로 범평화적인 종족이라 마음씨 하나는 고왔다.
'그 고운 마음을 가지고 노는 기분이라 조금 미안하기도 하고.'
나를 보호대상으로 보는 저 눈빛.
속이 간질간질하다.
다행인 점은 내 상처를 치료하느라 재구축에 관해선 신경을 투자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집요하게 캐물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이다.
"음. 라냐. 괜찮으니 손 좀 떼줄래요?"
"기각. 가만히 있는 게 좋아. 상처가 아물지 않았어."
"상처, 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물러난다. 아무리 살펴봐도 상처는 없었다. 재구축은 완벽했다. 그런데, 내가 멀어지는 거리만큼 라냐도 다가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과보호는 사절인데 말이지. 양손을 이용해 거리를 벌린 나는 품속에서 작은 금속제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게 아니라, 이거 관련해서 허락을 맡으려고요."
"허락?"
"세계수의 잎."
"…!"
분위기가 급변한다. 성공적인 주제 변환이었다. 나는 사슬을 끊고 상자를 열어, 노래져 말라가는 잎을 꺼내 라냐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얼굴을 굳히고 손바닥 위에 조심스레 잎을 올려놓았다. 혹여 잎이 바스러질까 최대한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세계수의 잎…. 진짜야. 친구, 어디서 구한 거야? 조금 전 죽인 아인의 집?"
"불법 결투장을 운영 중인 페스커라는 아인인데… 그놈이 빼돌린 거 맞아요. 아, 그리고. 라냐?"
"친구. 아파? 아프면 포션을 구해올 게."
"아뇨아뇨. 조금 궁금한 게 생겨서요."
계획은 나중에 차근차근 말하도록 하고… 나는 피가 뭍은 그녀의 활시위를 보며 말했다.
"페스커가 누군지 어떻게 알고 죽인 거에요?"
그녀는 방에 들어오고 나서 내 존재를 깨달았다. 그러니까, 페스커가 날 습격했다는 사실도, 그가 잎을 빼돌리려 한다는 사실도 모른 채 죽였다는 소리가 된다. 어차피 내가 죽이려 했지마는… 그래도. 알고 죽인 거랑 모르고 죽인 거랑 다르잖아. 라냐는 별거 아니라는 듯 나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괜찮아. 그것도 지모신님의 명령. 「파란 지붕에 들어가 가장 먼저 보이는 아인의 얼굴을 꿰뚫어라.」명령을 수행했으니 문제 없어."
"어. 음, 네."
"그리고, 지모신님의 일부를 빼돌리는 자들은 재판 없이 처형할 수 있어. 지모신님을 욕보인 자도 마찬가지야."
"…아인들이 반발 안 해요?"
"반발한 아인들은 모두 죽었어."
"…."
즉결 처형권이라. 엘프라는 종족도 정상은 아니라는 걸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세계수가 내리는 알 수 없는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남을 죽이는 것도 서슴치 않으며, 혹여 세계수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해당 '종족'을 대상으로 무기한 척살령을 내리는 게 엘프들이었다.
"하아. 그래요. 라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친구끼린 허락 맡지 않아도 돼. 편하게 말해줘."
"그럼 결론부터 말할게요. 악마를 잡기 위해 세계수의 잎이 필요해요."
"악마?"
세계수 잎을 든 손이 약하게 떨린다. 엘프 나름의 융통성을 최대로 발휘하고 있는 중이라 짐작된다. 세계수의 잎을 회수할 것이냐, 악마를 잡을 기회를 얻을 것이냐. 나는 입만 우물쭈물 거리는 라냐의 손을 잡고 말했다.
"일단 나가도록 해요. 계획은 바르하이야 구로 돌아가면서 얘기해 줄게요. 이곳은… 피 냄새 조금 역해서."
신발 밑창에 붙은 뇟조각과 살점을 모서리에 긁어내며 돌아선다.
빛이 꺼지고 어둠만이 남은 파란 지붕 아래. 머리를 잃은 황호족의 시체만이 검붉은 피를 흘리며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 * *
렉센 구를 지나 바르하이야 구로.
우리가 자리를 이동하는 동안에도 암시장 시세는 점점 올라, 금화 열 장을 웃돌았던 잎의 가격이 벌써 열 다섯장을 돌파했다. 그 탓에, 음지에서 활동하는 거물들이 잎 한 장을 얻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고 있었다. 엘프들에겐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그만큼 잎 회수율이 떨어진다는 얘기였으니까.
급한 쪽은 우리였다. 상대는 시간이 많을수록 강해지는 존재. 흡수한 정기로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슈리엘이랑 칼버드가 돌아오려면 시간이 좀 남았는데… 둘이서라도 접근해볼래요?"
"괜찮을까? 인원이 너무 적어."
잎은 악마를 유인하는 데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 라냐의 굳은 결의가 여기까지 전해진다. 다 죽어가는 잎 하나 가지고 호들갑 떠는 게 아닌가 싶지만, 저들에게 지모신은 세계 그 자체였다. 이 작은 결정 하나에 얼마나 많은 고민이 담겨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인원. 더 필요해. 카르드라실에 증원을 요청할까?"
라냐가 묻는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괜히 인원을 늘렸다 전쟁의 악마라도 출몰하면 곤란하다. 나 혼자로도 충분할 것 같기도 했고. 그리고 아직 싸우긴 이르다.
"아직 싸우긴 일러요. 정확한 위치도 모르고… 우선 암시장에 가보는 게 좋겠어요. 암시장 위치, 알아요?"
"미안해. 카르드라실 밖으로 나선 적이 별로 없어서 이곳 지리는 잘 몰라. 어쩌지?"
엘프들은 세계수와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완전한 노터치를 선언했다. 아인들의 문제는 아인들끼리 해결해라. 그러니 암시장에서 뭘 팔든 신경 쓰지 않았다. 마약을 팔든, 청부 살인을 하든 엘프들의 상관이 아니다. 라냐가 암시장의 위치를 모르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괜찮다.
"괜찮아요. 음지에 빠삭한 아인 한 명을 알고 있으니까."
적합한 인재를 한 명 아니까.
눈을 감고 집중한다. 나는 렉센 구 전체에 마나를 흩뿌려 내게 금제가 걸린 대상을 수색했다. 여기 와서 금제를 건 인물이라곤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설산 이리 시렉. 시중에 판매금지된 맹수용 진정제와 급속 치료제를 결투장에 조달한 장본인. 불법적인 아이템을 구한 만큼, 암시장으로 향하는 통로 또한 알고 있을 것이다.
「시렉. 들려?」
금제가 걸린 대상은 그 내용이 머리에 박혀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이걸 살짝 변형한다면, 텔레파시 형태로 써먹을 수 있었다. 「'시렉. 들려?' 라는 말에 대답하지 않으면 죽는 금제.」 라던가. 물론, 나 말고 이런 미친 기술을 쓰는 사람이 있을진 모르지마는.
시렉은 머리에 박히는 정체불명의 '힘'에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앙. 응? 뭐, 뭐야 씨발!
「잘 들리나 보네. 지금 당장 튀어와. 주소는 바르하이야 구로 통하는 적랑문으로. 안 그럼 머리 터트릴 거니까 알아서 해.」
―이런 씨-
이어지는 욕설은 듣지 않고 정신 집중을 해제한다. 나는 부서진 문에 기대어 말했다.
"친구. 뭐 한 거야?"
"안내해줄 아인을 불렀어요. 기다리면 안내견…이 아니라. 흠. 말실수. 안내인이 올 거예요."
"대단해. 텔레파시야?"
"뭐, 비슷해요."
* * *
암시장에 들어가려면 약간의 사전준비가 필요했다. 가장 먼저, 변장을 해야 했다. 암시장 단속 최우선 순위를 자랑하는 세계수의 잎을 팔러 가는데, 엘프가 떡하니 버티고 있으면 퍽이나 좋아하겠다. 그리고 그럴 것 같진 않지만, 혹시 악마 본인이 직접 거래를 하러 나오는 경우엔… 날 못 알아볼 리 없잖아? 얼굴을 가릴 필요가 있다.
"씨발. 보내준다며?"
"다시 안 부른다는 소리도 없었지."
"옘병."
운명을 받아들인 시렉은 욕을 하면서도 착실히 안내를 이어갔다. 왼쪽엔 내가, 오른쪽엔 라냐가 있어 도망칠 곳도 없었다.
"친구. 답답해. 벗으면 안 돼? 귀는 가렸잖아."
"죄송해요. 조금만 참으세요."
라냐는 목까지 내려오는 베일이 불편한지 자꾸만 쪼물딱거렸다. 앞이 보이기는 하는 건지 의심될 정도로 진한 검은색의 베일은 얼굴 전면을 덮어버렸다. 이렇게 귀를 포함해 얼굴을 통짜로 가려버린 건 정말, 정말 어쩔 수 없는 이유에서였다.
"시렉. 눈 돌려."
"본다고 닳아? 얼굴도 가려놓고."
"허벅지 훔쳐본 거 라냐한테 말하기 전에."
"아, 젠장."
라냐가 지나치게 예뻤다.
엘프는 이 세상의 미적 기준을 담당할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자랑한다. 암시장에 라냐같은 미인이 등장하면 자연스럽게 엘프가 나타났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도 엘프였고. 그리고 이곳에 엘프와 아인 밖에 더 있겠나? 인간이 암시장에 올 일이 얼마나 된다고.
몰른 나도 베일을 썼다. 외모도 외모지만, 악마에게 들통 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옷도 일부러 펑퍼짐한 디자인에 몸 위로 로브까지 걸쳐 입었다.
"렉센 구도 암시장이 있긴 하다만… 거긴 황호족만 존나게 몰려 있어 품목이 적어. 댁들이 찾고 있는 놈들은 아마 이곳 바르하이야 구나 철웅족이 지배하는 헬쿤 구에 있을 거야."
"나머지 하나는?"
"거긴 암시장이 없어. 가봤자 허탕 칠 걸. 바르하이야 구 암시장은 밤에만 열리는 거 알고 있지?"
나는 시렉의 말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바르하이야로 복귀하는 데 시간을 많이 써서 그런지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곧 어둠이 찾아올 테니 문제없다.
예상대로 암시장에 도착할 즈음엔 해가 완전히 내려가 칠흑같은 어둠이 우리를 반겼다. 거리의 등들이 차례대로 꺼지기 시작한다. 시렉은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고 신속하게 암시장 입구로 향했다.
"이제 도착이니 얼굴 간수 잘 하소."
꾸불꾸불한 뒷골목 길을 통과하자 약간 트인 길이 보인다. 그 앞에는 적랑족 아인 둘이 입구를 막고 있었다. 시렉은 그들을 아는 눈치인지 자연스럽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시렉. 저번에 물건 사 갔던 놈. 알지?"
"알다마다. 오늘은 무슨 일로 온 거야?"
"뭘 좀 팔러."
"호오. 뭐?"
"세계수의 잎."
"무, 뭐? 씨발. 진짜냐? 이번에 가격 폭등했다는 그거?"
"대리인으로 온 거니까 탐내지 말고. 나 죽여서 뒷감당할 수 있으면 해보던가. 그러니까 비밀로 좀 해주소."
그는 품속에서 동화 몇 푼을 꺼내 그들에게 던져주었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쳐도 되지만, 이렇게 돈을 쥐여주면 트러블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돈을 받은 적랑족 문지기는 동화를 냉큼 품에 집어넣고 문을 열어주었다.
"칼 안 맞고 살아 나간다면 나중에 한턱 쏘라고. 그런데 뒤에 둘은?"
"손님이야. 문제없으니 들여보내기나 해."
잠시 눈이 맞는다. 다만 짙은 색의 베일이 시선을 차단해 얼굴을 보는 일은 없었다.
"……."
"……."
그렇게 몇 초 후.
"좋아. 통과!"
별탈 없이 암시장에 입성할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영감님을 찾아가야겠어."
"영감?"
시렉은 내부로 진입하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온갖 거 다 팔고 사는 드워프 영감이오. 조금이라도 쓸모가 있으면 뭐든지 다 사가는데, 그 돈이 어디서 나오는지는 아무도 몰라. 암시장의 불가사의 중 하나지. 저번엔 무려, 씨발. 다이아몬드를 자루째 사들였다니까?"
시렉은 신기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 돈에 혹해서 습격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최근 영감을 습격한 적랑족 일곱이 정체 모를 아티팩트 처맞고 단숨에 가버렸으니까."
자기방어 하나는 확실한 영감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세계수의 잎도 취급하나?"
"물론이고. 저번에 엘븐 나이트한테 잡혔다가 풀려났는데, 아마 파르늄을 뇌물로 바친 거 같아."
라냐의 눈이 꿈틀거린다.
그렇게 활을 꺼내려는 그녀를 겨우겨우 진정시키려던 찰나.
"잠깐만요 라냐. 쉿. 시렉, 너도 닥쳐."
시렉이 말한 드워프 영감의 가게.
그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아직도 잎을 구한 놈이 없다고?"
"뒷골목 전체에 공고를 뿌렸으니 못해도 삼 일이면 나올 걸세."
"아니… 아니. 시간이 없어. 돈을 더 올릴 테니 이틀 내로 해결해 줘. 선금이야."
"…그거, 참. 흠. 알겠네. 노력은 해보지."
피부 전체에 붕대를 감싼 정체불명의 누군가. 붉게 그을린 흑발이 인상적이다. 결정적으로, 관자놀이를 가리는 비정상적으로 큰 모자가 있었다. 우리같이 변장이 필요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저런 큰 모자를 쓰는 종족은…
'…포르딜.'
뿔을 가리려는 악마, 정도려나.
숨을 죽여라. 기척을 내지 말아라. 나는 허둥대는 시렉의 뒤통수를 때린 뒤 억지로 몸을 숨겼다. 이렇게 바로 만난 줄은 몰랐는데…. 동선이 겹쳤다. 암시장이 개장하자마자 올 정도면 저쪽도 상당히 급한 걸까. 우리는 코너 뒤에 몸을 숨긴 채 머리만 삐쭉 내밀어 포르딜로 추정되는 놈의 모습을 관찰했다.
이미 하늘로 떠난 페스커의 말대로였다. 겉으로 보이는 피부 전체에 붕대가 감긴 모습. 한 곳의 예외 없이 꼼꼼하게 감겨 있었다. 머리카락이 그을린 걸 보면, 전신에 화상이라도 입은 모양이었다.
전신에 화상을 입을 정도의 공격이라면, 역시 그때의 공격 때문이겠지. 미궁 최정상, 내가 몸을 포기하면서 날린 대폭발의 여파. 그때는 나도 정말 죽는 줄 알았다. 팔은 날아가고 살은 다 타들어 가고…. 후에 듣기를 악마가 공간을 동결시켜서 겨우 살 수 있었다 했는데, 돌이켜보면 가장 짜릿했던 순간이었다.
나는 그때의 일을 되뇌이며 몸을 숨겼다.
'치유를 못했어. 세계수의 영향인가?'
아마 세계수가 마기를 억누름에 따라, 악마가 지닌 초월적인 치유력 또한 상실된 게 아닌가 싶다. 한가지 의문은, 굳이 치유를 포기하면서까지 이곳에 와야 하는 이유가 있냐는 것이다. 재추격이 시작되기까지의 공백 기간. 못해도 한 주는 넘을 텐데 그동안 정말 아무런 손도 못 썼다고?
"쟤가 대체 누구―"
"「닥쳐.」
시렉을 닥치게 하고 상황을 정리한다. 일단, 왜 치유를 못했는지는 무시하기로 했다. 내 머리로 이해하지 못하는 일은 굳이 이해할 필요가 없는 게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해를 포기하는 경우는 단 두 가지. 상식을 초월한 일이거나, 알아도 결과가 바뀌지 않을 때. 어떤 변수가 있든 저놈을 잡아 족쳐야 하는 건 변치 않는 사실이었다.
―친구. 제압할까?
정신을 차리면 몽실거리는 바람 뭉치가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라냐가 부리는 바람 정령이었다. 그녀는 정령을 부려 내게 속삭였다. 나는 눈을 돌리지 않은 채 대기 수신호를 보냈다. 아직 때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