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얘기 좀 할까?"
"넌―"
―쿵.
얼굴을 보자마자 문을 닫는다. 문이 닫히며 날아온 풍압에 머리칼이 휘날린다. 다가가 문고리를 당기면 잠겨있는 상태였다. 시렉은 소음에 흠칫하며 머리를 긁었다.
"저 양반 왜 저래?"
"하아…."
"음?"
벌써 개수작인가. 딱히 추궁할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지. 하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린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음. 음? 야, 야. 자, 잠깐―."
"고개 숙여!"
―콰직!!!!
"으아아악!!!!"
마나를 끌어올려 술식을 짠다. 날으는 폭풍은 강철의 칼날과 같으니― 바람을 불어 문을 날려버린다. 문은 강력한 풍압에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파편을 뿌렸다. 기겁한 시렉은 고개를 숙여 튀는 나뭇조각을 피했고, 나는 몸에 베리어를 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크아아악!"
앞으로 나아가자 창문을 부수고 도망치려는 페스커의 모습이 보였다.
'어림도 없지.'
오른발을 들어 약하게 땅을 찍는다. 목표 좌표는 창문 앞. 지이잉. 발 밑에 마법진이 새겨지는 동시에, 페스커가 서 있는 자리에도 시퍼런 마법진이 생겨났다. 불속성 마법은 안 된다. 그랬다간 엘프들이 발작할 가능성이 높았다.
―쿠구궁!
엘프들이 좋아하는 흙마법이 좋겠네.
"쿠흐으억?!"
자기 밑에 솟아난 날카로운 흙 기둥을 피하려 백스텝을 밟은 페스커는 아차, 한 표정을 지었다. 백스텝을 밟은 자리에는―
"어딜 도망가?"
내가 있었으니까.
"젠자아앙! 인간으로 변장한 엘프인가?"
페스커는 도주로가 막히자 다른 길을 탐색했다. 창문은 흙기둥으로 막혔고, 정문은 내가 떡하니 서 있다. 예상되는 경로는 오른쪽 방. 들어오기 전에 맵 스캔으로 미리 머리에 박아놨다.
―딱! 이번엔 손가락을 퉁긴다. 작디작은 얼음 파편들이 튕긴 손가락 사이로 생겨난다.
손가락을 튕기거나 발을 찍는 건 허세가 아니다. 아무리 무영창으로 마법을 쓸 수 있다 해도, 마력이 나가는 통로를 지정해줘야 마법 사용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물론 안 그래도 쓸 수는 있지만, 그러려면 몸 전체를 '통로'로 지정해 줘야 했다.
"이, 이럴 수가!"
이렇게 작은 제스처로 마법을 쓰면 상대가 대처하기가 어렵거든.
―쩌저적! 오른 방문이 얼어버려 더는 물러날 곳도 없다. 궁지에 몰린 호랑이. 아니, 작고 하찮은 쥐. 내 앞에선 황호족도 쥐새끼에 불과했다.
"순순히 항복해. 거기서 한 발자국이라도 더 움직이면 뇌를 얼려버릴 거야."
"난 죄가 없소! 시키는 대로 했단 말이요!"
"뭔 개소리야?"
"…엘프가 아니오?"
"난 인간이야."
"카르드라실에서 나온 엘븐 나이트가 아니라고?"
"그게 뭔데?"
"…?"
"뭐?"
시발.
또 자기만 아는 얘기 하네.
동서남북으로 총 네 개의 구가 있는 4방벽과 달리, 3방벽부터는 한 개의 구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부족장들이 거주하고 있는 3방벽 가르퀴나 구. 제국과 비교하자면 서부와 동부 정도의 차이이다. 가르퀴나 구에는 4방벽처럼 구를 대표하는 종족은 없고, 대개 부유한 아인들이 주로 살아간다.
그리고 더 안쪽으로 가면 2방벽.
엘프들의 거주지 카르드라실이 존재한다.
이곳은 방벽 건설 이래 단 한 번도 출입이 허락되지 않은 엘프들의 성지이다. 왜냐면. 그보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1방벽. 세계수를 지키는 벽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엘프들이 세계수를 아끼는 마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을 거다. 병적일 정도로 심했다. 마치, 엘프라는 종족 자체가 그 큰 나무를 지키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그런 엘프 중에서도 '지키기'에 특화된 자들이 바로 엘븐 나이트다. 제국이 대행자라는 인간 병기를 뽑아 악마와 연관된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엘븐 나이트는 세계수와 연관된 문제를 '해결'한다.
보통 피와 강철로 철저하게 응징하는 편이다. 문제의 근원을 제거하는 것만큼 '지키기' 쉬운 방법은 없으니까.
"그러니까, 세계수 잎을 빼돌리려 했다고?"
"그, 그렇소."
그리고 엘븐 나이트들이 가장 많이 해결하는 문제가 바로 날아간 세계수의 잎을 회수하는 일이다.
암시장에서 극비리에, 고가로 거래되는 품목 중 하나가 세계수의 잎이다. 엘프들이 광적으로 지키고 있는데 어떻게 구하느냐고? 정상적인 루트로는 죽어도 못 구한다. 우연히 떨어진 걸 줍는 방법밖에 없다.
세계수는 결계에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그 높이만 이백오십 미터를 훌쩍 넘기는 거대한 크기를 자랑한다. 말 그대로의 초거목巨木. 당연히 오십 미터 남짓한 방벽으로는 가려지지 않는 크기다. 뻗은 가지만 수만 개가 넘고, 지금도 잎이 자라나고 있다. 그만큼 방벽 밖으로 날리는 잎의 수도 많았다.
세계수 잎은 수명이 다해가면, 가지에서 떨어져 저 멀리 날아가게 된다. 보통 엘프들이 즉각적으로 회수하는 편이지만, 가끔 결계를 뚫고 떨어지는 잎들이 존재한다.
모든 마법사… 아니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종족이라면 누구든지 군침을 흘리고 달려들 희귀 아이템. 포션으로 만들면 엘릭서가 되고, 마법 재료로 쓰면 기존의 것을 훨씬 뛰어넘는 성능을 뽑아낼 수 있다. 그냥 섭취해도 마나통이 늘어날 정도다.
"줍고 안 돌려주면 못해도 추방이라 들었는데."
근데 그걸 엘프들이 가만히 지켜볼까? 제 부모보다 끔찍이 여기는 게 세계수인데, 그거 가지고 재료로 쓰겠다 하면 퍽이나 좋아하겠다.
"그, 그러니 제발! 이 일은 함구 좀 해주시오. 갑자기 세계수 잎 시장값이 폭등을 했단 말이오. 한 장만 구해도 이 거지 같은 결투장 일도 청산할 기회니까!"
"이 씨발놈! 나한테 짬처리 맡기고 계속 자리를 비우더니, 그런 속셈이었어?"
"닥치게나! 이번 일만 성공한다면 자네도 한 몫…"
"지랄 염병도 상대를 가려가면서 해야지, 내가 그 말을 믿을 거 같아?"
하아…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결투장이고 세계수고 나발이고 스트레스가 잔뜩 몰려온다. 내가 악마 쫓으러 왔지 뒷골목 범죄자 잡으러 온 게 아니란 말이지.
"「다 닥쳐.」"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시렉과 페스커의 입이 다물린다. 그들은 꾹 닫힌 입에 깜짝 놀라며 흠칫했다. 시렉은 한 번 당해봐서 그러려니 하는 모습이었다.
"세계수 잎 가격은 왜 폭등한 거야?"
일단 차근차근 정리해보자. 세계수와 관련된 문제인 만큼 가벼운 사안을 아닐 것이다. 나는 페스커에게 건 침묵 마법을 해제하며 턱짓했다. 그는는 턱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아, 음. 그것이, 요즘 뒷골목에서 세계수의 잎을 구하는 자가 있소. 그자 혼자서 기존 입찰가의 다섯 배는 넘게 올렸다네."
"누군데?"
"내가 아오? 전신에 붕대를 둘렀다는 얘기 말고는 알려진 바가 없소. 아마 그 상처를 치료하려는 거겠지."
"…붕대?"
"세계수 잎 장당 금화 열 장을 약속하니 눈이 돌아갈 수밖에. 그 돈만 있으면 가르퀴나 구에서 발 뻗고 살 수 있다오. 이번엔 건전한 사업으로 돈을…"
금화 열 장? 상당한 거액이었다. 헌데, 그런 돈을 가지고 있는 놈들이 뒷골목을 돌아다닌다라? 뒤가 구렸다. 나는 얼어버린 테이블 위에 턱을 괴고, 페스커를 빤히 바라봤다.
"그래서, 일은 잘 풀리나?"
"호, 혹시, 구미가 당기는가? 내 금화 세 장… 아니 네 장까지는 약속해 줄 수 있다네."
"한 번만 더 말 돌리면 죽일 거야."
"큼! 운 좋게 구하긴 했다네. 딱 한 장에, 그것도 다 썩어가는 마른 잎이긴 하다만…"
세계수의 잎은 얼마나 말랐던 가치가 있는 법이었다. 잎이 마르든 말든 딱히 상관없는 이야기. 세계수가 담고 있는 정기는 자연 그 자체였다.
'정기… 자연의 정기라…'
이거.
결정적인 힌트일지도 모르겠다.
"잎 어딨어?"
거래자를 만나야겠다. 쌍둥이 악마일 확률이 높았다. 세계수 잎을 구하는 목적이 비단 치료뿐만은 아닐 것이다.
"지, 지하 창고에…"
"안내해."
"찾으면 가져갈 건가?"
"하아….「 말대꾸하면 머리가 터져 죽는다. 」"
"무, 뭐― 크, 크아아악?!"
입을 뻥끗한 페스커는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바닥을 굴렀다. 말대꾸를 하면 머리가 터져죽는 금제. 시간을 벌려는 속내가 너무 뻔했다. 한참을 구른 페스커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일어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부러진 안경태를 바로 잡고 지하 창고로 향했다.
"나, 나도 따라가야 하나?"
"아니. 넌 이만 가도 돼."
"지, 진짜― 아, 흠. 알겠다. 만나서 반가웠고, 다신 만나지 말자!"
"생각 바뀌기 전에 빨리 뛰어가는 게 좋을 거야."
깨겡.
나는 꼬리를 살랑이며 줄행랑치는 시렉을 보며 등을 돌렸다.
* * *
바닥을 때려 부순다는, 다소 터프한 방식으로 지하 문을 개방한 페스커는 어두컴컴한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빛의 구체를 만들어 방을 밝히자, 돌벽에 나무판자를 덧댄 음습하고 건조한. 기분 나쁜 방이 눈에 들어왔다.
"저거야?"
"…열쇠는 두 번째 서랍에 있소."
나는 쇠사슬로 묶여있는 작은 금속제 상자로 다가갔다. 파르늄으로 가공한 상자라니. 어지간히 소중히 여기는 듯했다. 하긴 이게 금화 열 장을 가져다줄 물건이라는데, 나 같아도 애지중지하겠다.
―철컥. 자몰쇠 구멍에 열쇠를 꽂아 넣고 돌리자, 청아한 소리와 함께 그 내용물이 드러났다.
"확실히, 마법사들이 환장할 만하네…"
잎에 담긴 마나의 총량은 둘째 치고, 얼핏 보기만 해도 촉매로서의 기능이 기가 막혔다. 아크메이지인 나도 이걸 쓰면 한 단계 더 높은 마법을 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뭐… 그 정도까지 가면 행성 파괴급이라 쓸 일도 없을 것 같았지만. 아무튼. 내겐 쓸모없는 물건이었다.
이건 엘프들에게 돌려주는 게 낫겠지. 쌍둥이 악마를 낚는데 한 번 사용하고 나면 곧바로 돌려주자. 물론 그 전에, 라냐에게 허락을 맡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건 내가 가져갈 게. 고마워."
"…."
철컥. 상자를 닫고 사슬을 묶는다. 솔직히 별 기대 안 했는데 이득을 많이 봤다. 여기서 더 조사하기보다는, 다시 돌아가 합류하는 게 더 나아 보였다. 그렇게 상자를 품에 넣고 돌아가려는 찰나.
―탁!
땅을 박차는 소리. 나는 다시 등을 돌려 페스커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
보았….
보았, 는데.
―콰득, 크득!
"…이게, 쿠흡. 지금. 뭐, 끄흑. 하는."
"자그마치 금화 열 장인데, 내가 미쳤다고 주겠나?"
맹수에게 등을 보이는 것만큼 멍청한 짓이 없다고 내가 말 했던가. 페스커는 내가 뒤돌아서자 곧바로 습격을 강행했다. 콰득. 쿠득. 역겨운 소리. 옆구리에 손을 꽂아넣은 페스커는 핏물이 잔뜩 배인 내장을 꺼내 밖으로 쏟아냈다. 유지 중이던 빛의 구체가 꺼지며 사방이 어둠에 잠긴다.
'모양을 보면 소장인가… 아니, 대장인가? 둘 다일 수도 있고.'
후두둑 떨어진 내장을 감상하며 힘없이 늘어진다. 자궁은… 애초에 빗맞았긴 했다만, 만에하나 공격당했더라도 딱히 상처 입진 않았을 것 같았다. 아이는 몸 내부에 이물질이 들어오자, 그 즉시 자궁 전체에 베리어를 전개해 자신을 지켜냈다.
…사실, 짐작은 하고 있었다. 오러를 저렇게 뿜어내는데 눈치 못챌 리 없잖아.
그리고, 아이도 알고 있는 눈치였고.
저항 없이 몸을 내준 건, 아이가 보호 마법을 준비하길래 한 번 실험해 본거였다. 자기 보호를 위한 마법일까, 아니면 나를 지키기 위한 마법일까. 결과적으로는 자기 보호를 위한 마법이었다. 내가 죽어도 혼자 잘 살 수 있다는 걸까. 뭔가, 아이한테 무시당한 기분이라 살짝 우울해졌다. 엄마 좀 많이 슬플 지도.
"커흡, 흐극…."
"후우… 웬 미친년 때문에 일을 그르칠 뻔했어. 퉤."
나는 핏기 없는 눈으로 마나를 끌어 올렸다. 재구축을 하는 동시에 마법 술식을 짠다. 편안하게, 뇌를 얼리는 걸로 보내줄 테니 지옥에서 감사하도록 하렴.
―쩌저적.
내가 기댄 벽부터 천천히 얼어가기 시작한다. 아주 천천히, 그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느리게.
"으, 음?"
페스커는 느껴지는 한기에 뒤늦게 눈치를 챘지만 이미 늦―
"…?"
―펑!
페스커의 머리가. 돌조각과 뇌수를 흩뿌리며 쾅 하고 터졌다. 나는 뺨에 묻은 피와 뇟조각을 밀어내며 의아해했다. 머리가 터졌다고? 그런 술식을 짠 적은 없는데? 외부인의 개입인가?
'누구지?'
쿵. 머라 없는 시체가 기우뚱 하고 쓰러진다. 나는 그 너머에 시선을 두었고, 곧이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시체가 되어버린 페스커의 뒤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라, 냐?"
"…친구?"
어둠 속에서도 확실하게 보이는 은빛 머리칼. 활시위를 거둔 자리에는 아름다운 외모의 엘프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라냐.
라냐가 이곳에 왔다.
하지만, 어떻게 알고?
"어떻게, 온. 거에요?"
"속삭였어. 지모신님이 인도해준 자리."
"세계수 한테, 예언, 이라도. 카흑. 받았, 어요?"
"틀려. 예언과는 달라. 하지만, 지모신님이 명령하신 일을 따르면 무조건 좋은 결과가 나와."
세계수는 종종 엘프들에게 알 수 없는 명령을 내린다는데, 그 결과가 나쁜 결과로 이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무엇을 시키든 착실히 따른다나 뭐라나.
라냐는 몇 시간 전, 렉센 구의 파란 지붕으로 향하라는 명령을 듣고 무작정 발을 옮겼다고 했다.
"신기한, 나무네요."
"지모신님은 나무가 아니―…"
"케흑…."
"…친구. 아파?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아."
"불은. 안 켜는 게, 좋을. 걸요."
음.
아직 내장 다 못 넣었는데.
―딱! 라냐는 손가락을 튕기며 작은 빛의 구체를 만들었다. 사방이 밝아지며 힘없이 늘어진 내 모습도 같이 드러났다. 사방으로 내장이 쏟아진 흉측한 모습. 라냐의 얼굴이 급속도로 창백해졌다.
"하, 하. 그러니까 불 켜지 말라 했는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