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형색색으로 빛나는 조명에 눈을 찡그리고 무대를 향해 걸어간다. 꼴에 마법사가 참전했다고 방호 결계까지 쳐놓은 모습이었다. 간단한 마법으로도 뚫릴 형편없는 술식이었다만, 여기 있는 아인 모두가 마법에 문외한이었다.
즉. 내가 보여주는 마법이 곧 저들이 생각하는 마법이 된다. 연기하는 모든 게 저들에겐 진실로 다가가니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무대를 이끌 수 있었다.
"네가 그 마법사인가?"
차쿠루와 눈이 맞는다. 그는 직전에 싸운 흔적을 지우지도 않고 앞에 당당히 섰다. 피 냄새가 코를 찌른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도도하고 싸가지없는 마법사를 연기해야 했다. 나는 일부러 코를 막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털 넘새 나니까 입 좀 닫으시죠."
"하하… 소문이 사실이었나보구나."
"무슨 소문?"
"네가 아인을 깔본다는 소문 말이다. 지금이라도 사과한다면 끝은 자비롭게…"
"사실만 말한 건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죽을 준비나 하세요. 아인들의 수준이 어떤지 구경하러 온 거니까, 베른처럼 멍청하게 당하진 않았으면 좋겠네요."
"이 건방진 년이…."
―우우!!! 그냥 죽여버려 차쿠루!!!!
―최대한 가지고 놀다 죽여버리라고!!!!
관객들의 야유가 들린다. 나는 속으로 웃으며 마법을 준비했다. 직전의 싸움으로 차쿠루의 수준은 파악했다. 그러니 딱 눈높이에 맞게, 그가 적당히 상대할 수 있는 마법만 사용할 생각이다.
―그럼! 경기이이!!!! 시자아아악!!! 하겠습니다아아!!!
숨막히는 신경전이 끝나고, 시렉의 시작 선언이 들린다.
"흡!"
선공은 직전의 싸움처럼 차쿠루였다. 그는 아직 풀리지 않은 흉포화를 이용해 손톱을 내질렀다. 뻔했지만 그 힘과 기세가 하늘을 뚫어 그냥 막기는 어려운 공격이었다. 나는 베리어를 펼쳐 공격의 궤도를 흘린 뒤, 날카로운 토검을 연성해 일직선으로 내질렀다.
"소용 없다!"
순식간에 반대쪽 손을 이용해 토검을 부러트린 차쿠루는 그대로 돌려차기를 시전했다. 한 치의 망설임 없는 자연스러운 연계였다. 나는 사고를 가속해 정지된 세상 속에서 판단을 내렸다.
'스치는 정도만.'
각도와 궤도를 정확히 계산해, 목을 아슬아슬하게 빗겨 맞추는 정도로 상처를 입는다.
"꺄흑?!"
한껏 당황한 표정을 연기하고 뒷걸음질 친다. 따끔한 통증과 혈향이 느껴진다. 목을 만지면 얕게 배인 목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분노에 잠식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 냄새 나는 짐승 새끼가…"
그 후로는 적당히 상대해줬다. 심각하지 않은 공격은 맞아주고, 나도 당하지만은 않고 적당히 공격을 날린다. 스무합이 넘어갈 정도로 기다란 공방이 이어지는가 하면, 무대가 울릴 정도의 강력한 한 합이 있기도 했다.
"빈틈이 많구나!"
"닥쳐!"
얼굴을 악귀처럼 일그러트리고 손을 크게 든다. 어떤 마법이 좋을까. 그래. 빙속성 마법이 좋겠네. 이걸 그냥 두고 볼 리 없던 차쿠루는 내게 달려오며 도발했다.
"왜 그러지? 고작 그 정도 수준인가? 어서 날 죽여봐라!"
"…얼어라."
굳이 영창은 안 해도 되지만, 마법사가 기술명 외치는 건 불문율이지 않은가. 솔직히 왜 외치는지 모르겠다. 상대보고 대처하라고 외치는 건가? 모르겠다.
"…?!"
―쩌저적! 무대 위가 빙판이 되는 동시에 얼음송곳이 날아간다. 스텝을 밟아 피하려다 발이 묶인 차쿠루는 무력하게 옆구리를 내주고 말았다. 허나 깊지는 않은 상처였다. 운신에는 지장이 없도록 계산한 결과였다.
"그대로 압사당해 죽어!"
이어서 흙 마법을 준비한다.
차쿠루의 머리 위로 거대한 돌덩이가 내려온다. 맞으면 무조건 죽는다. 일촉즉발의 위기였다. 관객들은 처음 보는 마법의 향연에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도 저것을 맞을 차쿠루를 향한 걱정이 이어졌다.
상황만 보면 내가 악역이고, 차쿠루는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괜찮다. 이 과열된 분위기는 나락으로 떨어질 때의 격차를 더해주는 장치일 뿐이니.
몸을 주춤한 차쿠루는 핏줄이 터질 정도로 몸에 힘을 주더니―
"흐으으읍!!!"
―그대로.
발을 묶은 얼음장을 깨부수고 내게 점프했다. 쨍그랑! 얼음 깨지는 소리와 땅을 박차는 소리가 동시에 들린다. 그를 놓친 돌덩이는 애꿎은 무대 바닥만 박살 냈다. 나는 입을 떡 벌리고 속삭였다.
"마, 말도 안―"
"끝이다!"
만화 영화 속 히어로처럼. 하늘 위로 높게 점프한 차쿠루가 조명을 가리며 낙하한다. 발톱을 뾰족하게 세운 드롭킥. 나는 당혹감으로 물든 얼굴로 뒷걸음질 쳤고, 이내 벽에 닿아 더는 물러날 곳도 없는 상태에서 절규했다.
"꺄흐으으윽?!"
맞은 부위는 허벅지였다. 피부가 찢겨나가며 샛노란 지방층과 근육이 드러난다. 발톱에 찢겨서 그런지 직격당한 부위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갈려버렸다.
"아아아아아아악!!!!!!!!!"
아프다. 미치도록 아팠다. 나는 고개를 처박고 고통에 신음했다. 눈물과 콧물이 쉴새 없이 흘러나온다. 한 발짝 떨어진 거리에서는 과열된 콧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차쿠루의 콧김이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요!!!! 마법사의 공격을 무시하고 그대로 회심의 일격을 날려버린 차쿠루우우!!!! 멋진 모습이었습니다아아아!!!!
극도로 흥분한 사회자가 소리친다. 확실히, 내가 봐도 조금 멋진 광경이었다. 발을 묶은 빙판을 깨부수고 마무리 일격이라니. 나, 사실 연출에 재능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결투는… 누가 봐도 차쿠루의 승리였다.
"아흐, 흐으윽! 포, 포션. 포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아악, 자, 잡지마… 아아, 으끄으으흣?!"
머리채를 잡아 들어 올린 차쿠루는 날카로운 손톱을 세우고 목에 들이댔다.
"죽는 방법은 선택할 수 있도록 해주지."
"히, 히끅…"
관객석 뒤로 그대로 먹어버리라느니, 반으로 갈라서 죽이라는 등의 외침이 들린다. 관례에는 맞지 않는 과격한 방식뿐이었다. 아마 내가 도발한 것 때문이 아닐까. 관객들은 통쾌한 표정으로 내게 손가락질했다.
"자, 잠깐마한……."
"말해라."
이제, 클라이막스였다.
나는 오줌까지 지리며 최대한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런 건 줄. 몰랐단 마히야… 내가 잘모태써… 제, 제발…"
정적.
사회자도. 차쿠루도. 관객석도. 모두가 침묵에 빠진다.
지하 결투장에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소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인간 계집의 입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사, 살려줘… 머, 뭐든지 할테니까아…"
콰당! 정적만이 가득한 무대 위에 둔탁한 충격음이 울려 퍼진다. 나를 쓰레기 내던지듯 내팽개친 차쿠루는 눈에 핏발을 세우며 얼굴을 붉혔다. 아인차별적 도발을 들어도, 결투 도중 심각한 상처를 입어도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우지 않았던 그 사납던 맹수가. 비굴하게 울부짖는 '살려줘' 단 한마디에 평정심을 잃었다.
―우우!
―넌 자존심도 없냐!
"조용!"
곧이어 관객들의 야유가 우박처럼 쏟아지며, 그 이상으로 분노한 차쿠루의 발구름이 일었다. 저들이 분노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결투를 모독했다! ―황호족을 욕보였다! 인간의 관점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저들에게 결투는 하나의 의식과도 같았다. 문명화된 도시 속에서 거세된 맹수의 본능을 이끌어내는 의식.
그런 결투의 끝에서 목숨을 내놓는 건, 황호족 사이에선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무릎이 꺾인 범이여. 천하를 호령하는 맹수로 기억될 것이냐, 아니면 한낱 고깃덩어리가 되어 먹히겠는가. 딱히 황호족이 아니더라도 승자가 내리는 존중 속에서 편히 눈을 감는다면 그리 비참한 최후는 아닐 것이다. 그런 거 있잖는가. 넌 훌륭한 상대였다- 하면서 등을 돌리는 악역들.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그런 클리셰를 싫어한다. 악역은 악역답게. 상대방을 최대한 고통스럽게 가지고 놀면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피 섞인 기침을 하곤 고개를 들었다. 지금 움직이기엔 출혈이 조금 걱정됐지만… 아직까진 아슬아슬하게 괜찮았다.
"지금 나를 모욕하는 건가!"
전투가 선사해준 고양감은 차갑게 식어 심장을 두드렸다. 차쿠루는 심장 가득 찬 분노로 소리쳤다.
"히, 히끅…."
나는 한심스러운 모습으로 바닥에 엎드렸다. 이마와 가슴이 바닥에 눌릴 정도로 땅과 밀착한 자세. 손등은 가지런히 모아 이마에 댄다. 이른바 도게자라 불리는 자세였다.
―아아!!! 이게 뭔가요!!! 인간 마법사가 비굴하게 묵숨을 구걸하기 시작했습니다아아!!!
힐끗 살펴본 사회자는 활짝 웃고 있었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알고 있는 것처럼 비열하게 웃었다. 연민의 감정은 없었다. 나는 사방에서 내리꽂히는 시선 속에서 비굴하게 중얼거렸다.
"제, 제송. 합니다. 사려, 살려주―."
―퍼억!
"끄흑?!"
어, 라. 말을 하다 말고 눈앞이 핑 돌았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아. 걷어차였구나. 정신을 차리면 발길질에 저 멀리 날아가는 중이었다.
"쿠흡, 케흑…."
입에서 피가 주룩주룩 흘러나온다. 갈비뼈가 부러지며 내장을 찔렀다. 슬슬 재구축을 해야겠다. 출혈이 위험한 수준에 이르렀다. 다행인 점은, 여기 있는 모두가 인간의 내구도를 모른다는 것. 저들의 반의반만 힘을 써도 나 같은 계집은 육포가 되어버릴 텐데. 재구축이 아니었다면 두 번은 더 죽었을 것이다.
"하윽…."
나는 전보다 퀭해진 눈으로 차쿠루를 올려봤다. 미간을 가로지르는 상처 사이로 흉흉하게 빛나는 눈. 정말로, 정말로 간만에 느끼는 시선의 차이였다. 상하관계가 확실하게 정해진 이 순간. 나는 상처 입은 연약한 암컷이었다.
"모두 들어라!!!!"
차쿠루는 간절한 눈으로 벌벌 떠는 내 앞에 서 관객들을 향해 소리쳤다.
"내가 이 인간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그는 식어버린 열기를 '다른 방식'으로 끌어올리길 택했다.
"이 승리는 나의 승리고 아인들의 승리다! 나 기꺼이 너희들의 말을 따르겠다!"
차쿠루는 무대 위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당당히 선포했다. 쉽게 말하자면 관객들의 대리인이 되겠다는 것이었고, 본인이 거머쥔 생사여탈권을 넘겨주겠다는 뜻이었다.
―찢어버려!
―가죽을 벗겨버려!
"히, 히이…."
조금 더 직관적으로 설명하자면.
내가 빌어야 하는 대상이 바뀌었다.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럽게 죽고 싶다면 알아서 하도록."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다시금 머리를 박았다. 관객들을 향해서, 조금 더 자비로운 처우를 내려주기를 바라며. 사실, 이 모든 행위가 저들의 가학심을 자극할 뿐인 덧없는 행동이란 건 잘 알고 있다. 기쁜 마음으로 어울려주마.
"죄송. 죄송합니다."
―쿵! 돌조각 가득한 땅에 머리를 박는다. 나는 찢어진 이마 사이로 흐르는 피를 보며 말했다.
"이, 인간 주제에. 아인님에게, 건방지게. 대, 대들어서."
―쿵!! 이마에 박힌 돌조각이 떨어지기도 채 전에 다시 머리를 박는다. 의식이 흐릿해지며 몸에 힘이 빠졌지만 강인한 정신력이 다시금 목숨줄을 이어갔다.
"주제도 모르고. 덤볐습니다. 제, 제발―."
그 순간, 이 비참한 애원이 끝나기도 전에. 관객석의 아인 하나가 차쿠루에게 외쳤다.
―옷을 찢어버려!
"힉…."
나는 핏기가 빠진 창백한 얼굴로 차쿠루를 올려봤다. 그는 무표정이었다. 그저 묵묵히, 손톱을 세워 소리 없이 다가왔다.
"꺄아악?!"
―촤악!!!
"보, 보지마아… 말아, 말아주세요."
나는 창피함에 고개를 숙이고 부들부들 떨었다. 속옷까지 단번에 찢긴 옷은 걸레짝이 되었고, 풍만한 가슴과 분홍빛 유두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비교적 멀쩡한 다리를 잡아 공중에 들어 올린 차쿠루는 손톱 하나를 세워 그대로 하의를 찢어발겼다.
순식간에 알몸이 되어버렸다. 조금 튀어나온 배를 보자 차쿠루의 손이 살짝 떨렸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그는 더는 내 배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제, 제바아… 히끄읏…."
울먹이는 소리를 내며 애원한다. 한 짝 다리만 잡힌 채 공중에 들어 올려진 내 모습은 다 잡은 사냥감과 같았다. 실제로는 장난감에 가까웠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찢긴 허벅지 사이로 피가 줄줄 흘러나와 흉측해 보일만도 한데, 관객들은 전보다 더 흥분했다. 여성 아인들은 입을 가리고 흥미진진한 눈으로 이 사태를 관망했고, 남성 아인들은 바지 사이의 물건을 세우며 소리 질렀다.
―범해버려!
과연 이런 부탁까지 들어줄까.
저들도 반신반의한 상태로 소리친 것이 느껴졌다.
"흐이잇?!"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차쿠루는 아인들의 대리인. 저들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줄 준비가 돼 있었다.
"아, 으. 으?"
거꾸로 매달린 얼굴 뒤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땀에 젖은 기분 나쁜 냄새. 묵직한 고깃덩어리 같았다. 나는 헛숨을 삼키며 관객석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묘하게 흥분해 있었다. 특히, 여성 아인들의 입이 떡 벌어지며 닫힐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 아니죠? 차쿠, 루? 자, 잘못했어요. 제, 제발. 뭐든지 한다고, 했잖아요."
"…."
역시나 말이 없다. 나는 방울진 눈물을 떨어트리며 흐느낄 뿐이었다.
"히, 흐엑?"
그는 몸을 뒤집어 목에 팔을 걸고 무게를 지탱했다. 몸이 뒤집히며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다리 사이로 뜨겁고, 단단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차쿠, 루읏?! 히윽…?!"
목을 두른 팔에 힘을 주는 것과 다리 사이로 흉기에 가까운 물건이 들어온 것은 동시였다.
"헤극, 흐그…."
흘러나온 애액은 먼지에 흡수되어 상당히 건조한 상태였다. 그랬는데. 그래서 넣는 쪽도 아플지도 몰랐는데. 차쿠루는 그딴 건 신경도 안 쓰고 꽉 다문 보지 사이로 자신의 물건을 집어넣었다.
차쿠루의 귀두 끝에는 작은 가시가 오돌토돌 박혀있었다. 생짐승의 것과 비교하면 가시 크기가 작았지만, 아인亞人이라는 종으로 진화된 지금도 그 흔적은 남아있었다.
"끄흡. 끄흐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