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저곳을 조사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렉센 구의 뒷골목은 거리에서 볼 수 없는 '불법적인' 시설들이 많았다. 불법적이라 해도 마약이나 살인 청부 같은 극단적인 시설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진짜 음지에서 활동하는 시설들과 비교하면 귀여운 수준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시설을 꼽자면.
―정말인가? 타르하가 죽었다고?
―연승가도를 달리던 중 괴물 신인에게 당했다더군.
뒷골목의 결투장.
렉센 구를 돌아다니면 쉽게 볼 수 있는 게 결투장이었지만, 무허가 결투장은 일반적인 결투장과 많은 차이가 있었다. 뒷골목 결투는 승자가 패자의 모든 권리를 가진다. 당연하게도 패자는 죽는다. 살려주면 관객들의 야유는 물론이고 패자 측에서도 인정을 못 한다고 한다나.
이른바 결투 중독. 황호족이 워낙 싸움을 좋아하다 보니 생사결이 법으로 금지될 정도였다. 하지만. 법이라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결투는 황호족의 본능을 충분히 자극하지 못했다. 그들은 무허가 결투장의 '투사'로 참전해 목숨을 판돈으로 경기를 뛴다.
죽는 순간까지 맹수로 살아가는 이들. 딱히 남들에게 피해를 주진 않아 단속도 미비한 편이었다. 물론 대놓고 생사결을 벌이다 걸리면 얄짤없다.
그러나.
욕망을 구체화하기엔 조금 일렀다. 조사는 하고 즐길 생각이다. 아직 시간은 많았다.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은 5일. 그 후로는 다시 바르하이야 구로 집결해 조사한 정보를 이어야 했다.
"…풀이 말랐다고요?"
"그래. 얼마 전부터 화단의 풀들이 물을 줘도 마르더라고. 나름 애지중지 키운 식물인데… 참 아쉽게 됐어. 그런데 나만 그런 게 아니야."
황호족이 아무리 난폭하다 해도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바보 종족은 아니었다. 다행히도, 묻는 질문엔 따박따박 대답해주는 친절함은 있었다. 그 결과 결정적인 증거는 아니더라도 활동 흔적은 발견할 수 있었다. 근래에 들어 풀들이 자주 썩기 시작했단다. 아마 쌍둥이 악마가 정기를 흡수한 영향이 아닐까 생각된다.
'날도 어두운데 이쯤 하고….'
시간이 흐르고. 해는 어둠에 잡아먹혀 잿빛 공기가 세상을 뒤엎었다. 첫날의 성과로는 충분했다. 본격적인 조사는 내일 하면 될 것 같고…
'…뒷골목.'
그럼. 가볼까.
* * *
어둠이 내려온 뒷골목만큼 위험한 곳이 있을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는 점에서 미궁과 다름이 없었다.
"…."
나는 후드와 망토를 깊게 눌러 쓰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연초를 피는 황호족들의 껄렁한 시선이 몰려들었지만 무시하고 전진한다. 내가 가려는 곳은 결투장이었다. 목숨이 오가는 생사결의 장.
저 멀리 미약하게 빛나는 등이 보인다. 나는 저것이 일종의 표식임을 알았다. 이 등을 따라간다면 결투장의 입구로 갈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치고받고 싸워서. 끝내 피투성이 승리를 쟁취하러 결투장을 방문하려는 건 아니다. 나는 그곳에서 패배할 생각이다. 아슬아슬하게 패배해서, 꼴사납게 목숨을 구걸할 생각이다. 슈리엘이랑 너무 오래 붙어먹다 보니 색다른 자극이 필요했다.
"하으…."
벌써 아랫배가 움찔거린다. 나는 허벅지를 비비 꼬며 힘겹게 움직였다.
뒷골목의 패배자는 일말의 후회 없이 심장을 내미는 것이 관례다. 무릎이 꺾인 호랑이는 다시는 일어날 수 없다. 이것이 뒷골목 '투사'들의 신념이었으니까. 승자는 승리의 명예를, 패자는 만족스러운 죽음을. 그게 뒷골목의 결투장이었다. 그런 그곳에서 절대로 해선 안 되는 게 하나 있었으니.
바로 목숨 구걸이다.
만약에라도 살려달라고 빌면 놀랍게도―
'죽이지는 않는다고 했지.'
―살려준다.
거짓말은 하진 않는다. 온갖 능욕이란 능욕은 다 준 뒤 팔다리 불구로 만들어버리곤 뒷골목에 내던지는 것일 뿐. 살려는 주지만, 사실상의 사망 선고와 같았다.
'최대한 도도하고 싹수없게 나오다가…'
패배의 끝에서 무너진다면. 그 격차에서 오는 괴리감은 분명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쾌락을 선사해줄 것이다.
"흐…."
미약하게 빛나는 등을 따라가면 지하로 내려가 는 계단이 보였다. 아래는 빛이 들지 않아 한없이 어두웠다. 결투장의 입구였다.
"멈춰라. 누구지?"
망설임 없이 계단을 내려가려 하자, 입구를 지키던 아인 하나가 튀어나와 앞을 가로막았다. 회색 귀를 보니 황호족은 아니었다. 그는 피우던 연초를 떨어트려 발로 짓밟은 뒤, 걸쭉한 침을 뱉곤 말했다.
"황호족인가?"
고개를 젓는다.
회색 귀의 아인은 귀를 쫑긋거리며 되물었다.
"결투는 세 시간 뒤에나 있는데… 그럼 왜 온 거야?"
세 시간 뒤라. 모두가 잠든 새벽에 경기가 시작하는 건가. 나는 후드를 벗어던지며 말했다.
"그 결투. 외부인도 참가 가능합니까?"
"어, 어…?"
후드와 망토를 벗자 풍만한 가슴과 고운 얼굴이 드러났다. 등불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받아 선명하게. 회색 귀의 아인의 눈에 들어간다. 그는 말을 더듬으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뭐, 뭐?"
"인간도 참가할 수 있냐는 말입니다."
"…참나. 기다려라."
계단을 내려가고 정확히 삼 분 뒤. 회색 귀의 아인은 올드한 안경을 쓴 중년의 황호족과 함께 올라왔다.
"…인간?"
"참말이라니까. 갑자기 찾아와서 느닷없이 결투를 하고 싶다 하는데…"
"알겠으니 입 다물어라. 흐음. 흐음…?"
시선이 맞는다. 그대로 몇 초 후, 황호족 중년은 안경테가 벌어질 정도로 눈을 커다랗게 떴다.
"…너는!"
"…?"
만난 적이 있나. 아는 눈치였다. 나는 입을 닫고 묵묵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년, 그년이다!"
"…?"
"멍청한 놈! 소문을 못 들은 것이냐?"
"무슨 소문? 댁만 아는 얘기 하지 말고 알아듣게 얘기를 좀 해보쇼!"
"문지기 베른을 단 한 합 만에 쓰러트렸다던 마법사!"
벌써 소문이 퍼진 건가. 하긴 대놓고 도발하고 도망쳤는데 모를 리가 없겠지. 거기에 있던 황호족만 열둘이 넘었는데.
"마법사…. 마법사! 이거, 이번 경기는 볼만하겠구나! 이봐! 그 말. 취소하지는 않겠지!"
나는 도발하듯 웃어 보였다.
"그럼요."
이 좋은 기회를 왜 놓칠까.
지하 결투장에 들어가기 전 몇 가지 준비가 필요했다. 무허가 불법 시설인 만큼 비밀 유지 각서와 '사소한 약속'을 필요로 했다. 각서라 해도 서류에 도장 찍고 법적 효력 어쩌고 하는 체계적인 방식은 아니었다. 이 세상엔 말에 강제력을 부여하는 '맹세'가 존재했다.
도장 찍기보다 더 간편하고 성능도 확실하다. 시전자가 죽어도 남아있으니 도망친다는 선택지는 고르지 못한다.
"그 종이를 찢는 순간 당신은 지하 결투장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되오. 만약에라도 하게 된다면…."
"머리가 터져 죽는다. 알고 있어요."
"하하! 호탕해서 좋구나! 그 정도 배짱은 있어야지!"
―찌익. 종이 찢기는 소리가 미미하게 퍼진다. 종이에서 흘러나온 마나가 머리를 감쌌다. 특정 발언에 반응해 뇌를 터트리는 언약 술식이었다. 해주 하려면 할 수는 있지만, 굳이 그러진 않기로 했다.
"그리고… 알고는 있겠지?"
"…."
그리고.
결투장의 투사들에게 적용되는 '사소한 약속.'
승자는 패자의 생사여탈권을 가진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중재는 없다. 맹세로 묶이는 절대적인 언약. 경기 도중 무슨 짓을 당하든 신경 쓰지 않겠다는 소리였다.
사실, 승리와 패배를 깔끔하게 인정하고 목숨마저 쿨하게 내놓는 황호족 특성상 그리 강조되지는 않는 조항이었다. 지면 죽는 거야 다 알고 있는 사실이고… 승자도 패자를 존중해 최대한 덜 고통스럽게 보내주는 편이다. 심장을 꺼내거나, 두개골을 분쇄해버리는 등의 퍼포먼스가 그것이다.
물론. 추하게 목숨 구걸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만 붙는다면.
상대가 도망치는 순간부터 맹수 대 맹수로 싸우는 전사들의 결투가 아닌, 그저 사냥 시간을 즐기는 포식자의 유희로 변해버린다.
"알고, 있습니다."
"좋아! 자네에게 황호족의 자질이 엿보이는군! 부디 죽지 말고 살아남게나! 그래야 다음 경기도 뛸 수 있을 테니!"
붉게 물든 뺨을 전투의 열망으로 오해한 황호족은 내 어깨를 두드리더니 멋대로 돌아가 버렸다.
"하아…."
황호족과 같이 있던 회색 귀의 아인이 한숨을 쉰다. 그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내게 말했다.
"또 짬 처리구먼. 이보쇼. 대진표는 알고 있나? 베른을 쓰러트렸다 하니 누구랑 붙든 중간은 하겠지. 붙고 싶은 상대라도 있소?"
"대진표가 어떻게 되죠?"
"투사로 참전해놓고 대진표도 모르나?"
"부끄럽게도."
"허참. 뭐, 맹세도 했으니 이제 와서 물릴 수는 없겠지. 오늘 경기는 괴물 신인 차쿠루와 삼거리에서 이름 좀 날리던 레타가 붙는다네. 아무리 외부인이라 해도 들어는 봤겠지?"
"…모릅니다."
"그것도 몰라? 돌아버리겠구만. 그래 그러면… 그게 좋겠어."
회색 귀를 쫑긋 세운 아인은 몇 초간 고민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아인은 태생적으로 마법사가 나오기 힘든 종족이라네. 마나를 각성해도 죄 오러로 발현하니 마법사 한 번 보기가 금과 같을 노릇이지."
"그래서?"
"이번 경기의 승자가 너와 붙는 거야. 마법사와 싸울 수 있다고 하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걸세. 황호족은 그런 놈들이니까."
나는 턱을 매만지며 고민에 빠졌다. 그럼 승자가 힘이 빠진 상태로 싸워야 하는 게 아닌가? 만전의 상태에서 비등하게 싸우다 패배해야 재밌는데 말이야. 회색 귀의 아인은 내 고민을 읽었는지 괜한 걱정 말라며 손을 저었다.
"삼십 분만 쉬어도 멀쩡히 일어나는 괴물 같은 놈들이니 걱정하지 말게나. 상처는 포션으로 치료하면 되니 문제없고."
"으음…."
"대답은?"
문지기 베른을 떠올린다. 각혈할 정도의 상처를 입고도 오 분 만에 일어났었지. 그 정도 치유력이면 한바탕 싸운 후에도 멀쩡히 싸울 수 있겠지. 좋아.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요."
"알겠네! 그럼 대기실에 가서 좀 쉬든지 말든지 하소."
나는 그의 말대로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은 말만 대기실이지 헬스장과 다름이 없었다. 몸을 풀기 위한 샌드백과 굴러다니는 묵직한 쇳덩어리들. 아무리 봐도 헬창들이나 쓸 법한 방이었다.
내가 저런 걸 쓰면서 땀낼 일은 당연히 없겠고… 그나마 마음에 드는 건 창문을 통해 경기를 직관할 수 있는 정도려나.
약속한 시각이 되고, 경기가 시작된다.
사회자는 내게 대진표를 알려주었던 회색 귀의 아인이었다. 이름을 물으니 '시렉', 종족을 물으면 '설산 이리'란다.
지하 경기장엔 수많은 아인이 몰려 있었다. 비단 황호족 뿐만이 아니라 적랑족은 물론이고 거북이와 곰족도 보였다. 기다란 귀를 가진 아인도 있는 걸 보아 묘족도 낀 것 같은데… 역시, 제일 재밌는 건 옆집 불구경이라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반갑습니다 아인 여러분!! 오늘 경기는 괴물 신인 차쿠루와…
사회자 시렉은 형식적인 인사를 끝마치고, 한껏 과열된 분위기 속에서 목청껏 소리쳤다.
―이번 경기의 승자느으은! 문지기 베른을 한 합 만에 쓰러트렸다던 정체불명의 마법사와 싸울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됩니다아아!!!
"마법사?"
"자기보다 약한 놈의 말은 듣지 않는다던, 그 싸가지없는 마법사 말인가?"
"들어본 적 있나?"
"물론이고말고. 내가 듣기론…"
관객들이 웅성거린다. 나에 대한 소문은 부풀리고 부풀려져, 어느샌가 아인을 깔보는 인간 마법사로 변해버렸다. 청력을 강화시켜 들어보니 아인들은 털 냄새가 풍겨서 좆같다느니, 못 배워서 미개한 아인들에게 몸소 마법을 가르쳐주러 왔다는 등의 헛소문들이 섞여 있었다.
"흐."
좋아. 더 각색해버리렴. 이렇게 거짓 정보가 생긴다면 나야말로 환영이다. 시렉은 이빨이 드러날 정도로 크게 웃으며 소리쳤다.
―그럼! 경기이이!!!! 시자아아악!!! 하겠습니다아아!!!
두 호랑이가 땅을 박찬다. 선공은 차쿠루였다. 시작부터 광포화를 사용하고 달려든 차쿠루는 길게 뻗은 손톱을 이용해 안면을 노렸다. 코끝을 스치는 날카로운 공격. 하지만 닿지 못했다.
정말 격렬하고, 한 번 실수하면 곧바로 목이 날아가는 합이 순식간에 오간다. 서로의 상처가 늘어날수록 관객들의 환호는 더 커졌고, 투사들의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그 뒤로도 아슬아슬한 공방이 펼쳐졌다.
결과만 말하자면, 차쿠루가 이겼다. 경기 시작 전 사회자가 읊었던 화려한 이력은 장식이 아니었다.
―승자는 차쿠루우우우!!! 모두, 승자와 패자에게 영광의 박수를 보내주시길 바랍니다아아!!!
"끝장내버려!!!"
"심장 뽑기! 드디어 볼 수 있는 건가!"
차쿠루는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를 배경으로 피니시 무브를 준비했다. 일반적인 피니시와 차이가 있다면, 이건 말 그대로 '끝장내는' 기술이었다.
죽음을 직감한 레타는 무릎을 꿇고 가슴을 내주었다. 순순히 패배를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콰직! 살을 찢는 난폭한 소음과 함께 피비린내가 풍긴다. 하하 웃으며 손을 들어 올린 차쿠루의 손에는 아직 뛰고 있는 따끈한 심장이 들려 있었다.
"""와아아!!!!!"""
광기로 물든 관객석을 향해 소리친다.
"마법사를 데려와라!!!"
순간 시선이 맞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단방향 유리창이라 저쪽에서는 안 보일 텐데. 착각이겠지.
―쿵쿵!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마 날 부르는 소리가 아닐까 싶다.
"들어오세요."
―끼익.
문을 열고 들어온 자는 중년의 황호족이었다.
"이봐! 바로 다음 경기 시작이야! 준비해라!"
"…휴식 시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랬다간 흥이 다 식을 걸세! 잔말 말고 무대로 뛰어가! 차쿠루 본인이 저렇게 소리치지 않는가!"
"하아…."
* * *
―문지기 베른을 단 한 합만으로 쓰러트린 정체불명의 마법사!!!! 그녀를 묵사발 내겠다 선언한 차쿠루!!!!! 다음 경기는 휴식 없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