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대삼림 (4)
슈리엘은 상자 속에 갇힌 유진을 바라보며 연신 얼굴을 쓸어내리기 바빴다. 어젯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심란한 속을 갈무리하며 자책한다. 마기에 침식되고 그녀를 덮친 것까진 기억났다. 하지만 그 과정이 기억나지 않았다. 평소엔 침식이 되더라도 기억까진 잃지 않았는데… 침식의 강도가 심해졌다.
―대행자 슈리엘. 거래를 하러 왔습니다.
탑 최정상에서 악마와대치했을 때. 순간 분노로 오러가 검게 물들었을 때가 있었다. 아마 침식이 가속화된 건 그때부터가 아닐까. 그 증거로 최근 신성력을 받으면 몸이 가려워지기 시작했다. 거부 반응이었다. 침식의 진행도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그런데 정말 웃기게도. 가속화의 트리거는 유진이었다. 그녀를 보면, 머리가 울린다. 어떤 짓을 해서라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라고. 욕망의 극대화. 파괴 본능의 각성. 주체할 수 없다. 당연히 이딴 사고가 머리를 지배하려 하면 혀를 깨무는 한이 있으려도 참으려 한다. 나는 망나니가 아니다. 그렇지만. 아이는 괜찮다느니. 무슨 짓을 해도 된다느니. 그런 유혹하는 듯한 말을 들어버리면. 참을 수 있을 리 없잖아.
"우으… 슈리, 에엘…."
그리고 그 결과물이.
팔다리가 잘린 채 상자 속에 갇힌 유진이다.
목 조르기부터 시작한 가학 행위는 구타. 골절로 이어졌고 종국에는 절단까지 가버렸다. 강도가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궁금한 점은 이 모든 가학행위에 어떤 저항도 없었냐는 것이다. 상자 안을 내려다본다. 팔다리 따위는 손쉽게 복구하는 고위 마법사가 안에 갇혀있다. 그렇다면 왜. 그만한 실력을 갖췄으면서 바로 탈출하지 않았는가. 유진이 마조히스트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중증일 줄은 몰랐다. 피학성애를 넘어 사망선망이었다.
유진은 시선을 주고받는 게 부끄러운지 자꾸만 눈을 돌렸다. 몸 하나 가리지 못하고 알몸으로. 팔다리가 잘린 벌레 같은 모습으로 몸을 돌리려 한다. 허나 좁은 상자 안에서 그런 움직임이 가능할 리 없었다. 결국 그녀는 몸을 비틀길 포기하고 달뜬 숨만 내쉬었다.
눈물만 주렁주렁 흘리며 꺼내지기를 기다리는 유진은, 정말 인정하기는 싫지만, 마음 깊은 곳의 음심을 자극했다. 팔다리가 잘려도 풍만한 가슴과 백옥같이 흰 피부는 그대로. 배덕감이 가져다주는 이질감이 장난이 아니다. 마치 성처리용 장난감 같지 않은가. 스스로 결손 취향은 없다고 자부했으나 본판이 이렇게 아름답다면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기다려라. 꺼내줄 테니."
"우으…."
상념을 떨쳐버리고 손을 뻗는다. 상자 속 유진은 몸을 움찔거리며 음란한 냄새를 내뿜었다. 다리 사이로 고인 정액과 애액의 냄새는 퇴폐적이다 못해 끔찍했다. 슈리엘은 비어버린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번쩍 들어 올렸다.
"흐읏, 히잇, 히그윽…!"
그뿐인데. 손이 닿았을 뿐인데. 유진은 한 차례 절정 하며 고개를 떨궜다. 몸이 부르르 떨린다. 당황한 슈리엘은 흔들리는 몸을 고정하기 위해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당연하게도 역효과였다. 절정은 더 심해져 숨을 쉬기 어려울 지경까지 이르렀다.
유진의 몸은 극도로 민감해져 있었다. 시야 차단에 사지절단. 움직임과 시야가 제한되니 주변을 파악할 방법이 촉감과 청각밖에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정액과 애액 냄새가 풀풀 풍기는 상자 안에 하루 동안 처박혀 있었으니. 글러먹은 마조 몸뚱어리가 버틸 리 없었다. 허리가 휜다. 연속 절정에 뇌가 타버리는 것만 같았다.
"하익, 히기이잇…?!"
아침 대낮부터 신음이 퍼지면 그로서도 곤란하다. 주변 눈치를 본 슈리엘은 황급히 유진의 입을 틀어막았다. 유진은 입을 닫을 생각도 못 하고 침을 흘려댔다. 그러면서도 황홀한 얼굴을 짓고 있는 그녀는 미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눈이 풀려 있었다.
"헤윽, 헤엑…."
유진이 정신을 차리고 사지를 복구한 건 슈리엘의 품속에서 세 번은 더 절정한 뒤였다.
* * *
다시 돌아와 백작저 2층.
슈리엘의 집무실.
나는 평소대로 집무 책상에 걸터앉아 슈리엘의 서류 작업을 도와주었다.
서류를 훑어보는 내 얼굴엔 미소가 번져있었다. 역시 쾌락도 쾌락이지만 죽음의 끝에서 생을 갈구하는 필사적인 갈망이 제일 흥분되는 감정이었다.
하으… 다시 생각하니 아랫배가 찌잉 울린다. 슈리엘에게 가길 잘했다. 지금이라면 그가 뭘 부탁해도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개운했다.지금까지 목 조르기라는 다소 밋밋한 플레이만 해오다가, 사지가 절단되는 난폭한 플레이를 하니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다. 거기에 방치 플레이까지… 몸을 민감하게 만드는 방법이 비단 미약만 있지 않다는 걸 새롭게 깨달았다.
"…."
"…슈리엘? 괜찮아요?"
하지만 기분이 고양된 나와 달리, 슈리엘의 얼굴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내가 말을 걸어도 묵묵부답. 침울한 표정으로 서류 작업을 계속한다. 그는 눈치를 보면서 '미안함'이라는 감정을 품고 있었다.
이거 나도 좀 미안한데. 충분히 저항할 수 있었음에도 무시하고 당한 건 나다. 그런 일에 죄책감을 느껴버리면 내 기분도 언짢아진다. 어떻게 해야 하지. 목 조르기까지는 세이프였는데… 역시 사지 절단은 그도 부담되는 걸까. 이런 거에 흥분하는 내가 이상한 거겠지. 저게 정상이다.
"…성황청은 언제 가실 생각이십니까 도련님."
분위기 전환을 위해 주제를 돌린다.
말투까지 본래의 예의 바른 유진으로 바꿨다.
오늘은 전력 정비를 위해 성황청으로 떠나는 날이자, 루셸리니의 가주가 돌아오는 날이었다. 물론 내가 가주를 볼 일은 없었다. 딱히 볼 이유도 없을뿐더러 만날 짬도 안 됐다. 회의 내용이라고 해봤자 다른 가문과의 교류나 제국의 경제 동향 따위의 것들이었다. 나나 슈리엘보단 하이라크가 더 주의 깊게 들어야겠지.
슈리엘은 일정에 관한 질문까지 무시하긴 조금 그랬는지 약간의 텀을 두고 대답했다.
"오후 세 시 이후 마차가 준비되는 대로 떠난다."
"…애매한 시간이네요."
"아버지와 얘기할 게 있다. 영지에 관련된 것이니 딱히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러고 보니, 가주께서 성황청 대회의에 출석하셨다고 하셨지요. 실례가 안 된다면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슈리엘은 입꼬리를 비틀며 투덜거렸다.
"나 때문이다. 탑에 너무 오래 고립됐어. 실질적인 사망 선고를 내리고 이권에 대한 계약 내용을 수정하러 간 거겠지. 뭐, 내가 멀쩡히 살아 돌아와 엿을 먹이긴 했지만."
"…대행자의 삶은 꽤 고단하군요."
"그렇지만도 않다. 저택에 틀어박혀 서류 작업만 하는 것보단 낫지. 하이라크라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직접 본 것과 머리로만아는 건 다르니까."
현장직과 사무직의 차이인가. 그렇다 하기엔 작업하는 서류가 너무 많은데…? 그럼 하이라크는 대체 얼마나 많은 작업을 하는 거지? 산처럼 쌓인 서류를 보며 의문에 빠졌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그보다.
분위기가 많이 풀어졌다. 슈리엘의 얼굴도 평소대로 돌아왔고…. 지금이 적기라 생각한 나는 읽고 있던 서류를 살포시 내려놓으며 책상에서 내려왔다.
"저기, 슈리엘."
"…또 뭐냐."
"어제 일은 미안해요."
슈리엘은 눈가를 가늘게 좁히며 날 바라봤다. 또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그 시선을 무시하고 슈리엘에게 다가갔다.
"뭐랄까. 어젯밤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그리 자책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저도 딱히 싫지는 않았고…."
그가 앉아 있는 의자를 염동력으로 뒤로 당긴다. 의자는 드르륵 소리를 내며 뒤로 끌렸다. 나는 그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재빨리 다가가 무릎 위에 걸터앉았다.
"으음, 솔직히 말해서. 좋았어요. 그렇게 난폭하게 몰아붙이는 거. 그리고 슈리엘도 알잖아요. 제가 그런 취향이라는 걸."
올려다본 시선에선 경멸이 느껴졌다. 나는 그 경멸조차도 쾌락으로 바꾸어 얼굴을 붉혔다. 부끄러움에 얼굴을 내리고 우물쭈물거린다. 뭐라도 말했으면 좋을 텐데. 욕을 하든, 주먹을 날리든… 반응이 없으니 더 달아올랐다.
"그, 그러니까아… 이제 원할 때 막 때리거나, 난폭하게 범해도 돼요. 물론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거절도 있겠지만… 저, 전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이는… 아무리 난폭하게 몸을 다뤄도 멀쩡하다 했고…."
나는 어젯밤 서류 작업 내내 가슴을 주물럭거린 슈리엘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으음… 가, 가슴이라도 만질래요?"
밑가슴을 들어 가슴팍에 문댄다. 내가 봐도 음탕한 젖가슴이었다. 이 키에 이만한 가슴은 반칙이 아닐까. 하지만 그래서 더욱. 남자를 홀리기엔 좋았다.
수치심을 참고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정말 별거 없었다. 고마워서. 난폭하게 범해진 뒤 항상 자책하는 슈리엘을 보니 마음이 약해진 것일 지도 몰랐다. 그래도.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된 건 오로지 슈리엘 덕이니… 한 번쯤은 이쪽에서 나서는 것도 좋겠지.
"너는… 너는…."
슈리엘은 이를 꽉 물고 부들거렸다. 나는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열심히 몸을 밀착했다. 목 조르기? 아니면어제처럼 절단? 뭐든 좋았다. 오후 세 시까지 시간도 많이 남았으니 한 번은 즐길 수 있겠지. 그리고 이번 일로 죄책감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거다. 어떤 짓을 해도 내가 좋다고 하면 그로서도 거절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러나.
―똑똑.
내 원대한 계획은 노크 소리한 번에 무너졌다.
"주인. 공께서 부르십니다."
중후한 노인의 목소리. 칼버드였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무릎에서 내려왔다.
'좋을 때 방해하기는.'
무릎에서 내려온 나는 총총 걸어가 늘 그랬던 것처럼 집무 책상 위에 걸터앉았다. 아무 서류나 집어 읽는 척을 한다. 슈리엘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콧소리를 냈다. 나는 능청스럽게 입술을 삐죽이며 서류를 넘겼다. 그래도 의미는 잘 전달됐으리라 믿는다.
"…아버지가 부르는군.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 세 시에 떠나야 하니 그때 동안은 준비할 수 있도록. 그 사이에 무슨 문제라도 벌였다간…"
"그럴 일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밖에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슈리엘은 살짝 짜증스럽게 충고했고, 나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 작게 한숨 쉰 슈리엘은 장비를 챙기고 문밖으로 나섰다. 혼자가 된 나는 약간의 간격을 두고 따라나섰다. 같이 나가면 의심받을 테니.
* * *
마차는 오후 세 시가 되자마자 딱 나타났다. 루셸리니 가의 인장이 크게 새겨진 백색 마차. 나는 슈리엘과 함께 한 마차를 타고 성황청으로 떠난다.
칼버드는 '그때의 일' 이후로 자리를 마부 옆으로 옮겼다. 우리 곁에 있어 봤자 못 볼 꼴만 본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기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많이미안했다.나야 즐긴다 쳐도 칼버드는 아닐 테니까. 그 나이 먹고 도련님 정사 뒤처리나 해야 한다니 나 같아도 짜증이 나겠다.
"성황청에 도착한 뒤 곧바로 대삼림으로 떠날 거다. 준비는 됐나?"
"…딱히 챙길 건 없으니 괜찮습니다."
목적지는 실베흐린 대삼림으로 정해졌다. 내가 수많은 서류를 교차검증 하며 동선을 짜준 덕이었다. 슈리엘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이견은 없었다.
"슈리엘."
그때. 하이라크가 나타나 무언가를 휙, 하고 던졌다. 주먹만 한 기계 장치. 마나 회로가 있는 걸 보니 아티팩트였다. 갑작스레 아티팩트를 받아든 슈리엘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하이라크를 바라봤다.
"이건?"
"마기 정화제다. 성황청에 도착하면 사제를 불러 작동시켜라."
"…아버지가 준비한 건가?"
"아니."
"난 마기에 중독됐다 한 적 없어. 누가 말했지?"
슈리엘은 내게 눈을 돌렸고, 나는 말한 적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하이라크는 재수 없는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가 내 동생 몸 하나 파악하지 못하리라 생각한 건가? 멍청하긴. 내 충고하는데 저년이랑 떨어지는 게 좋을 거다. 네가 저 모험가에게 어떤 마음을 품었든 간에, 지금 상태를 악화시키는 건 분명하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