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1화 〉대삼림 (1) (81/193)



〈 81화 〉대삼림 (1)

불안에 떨었던 게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로 아이는 건강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 과할 정도로. 처음엔 셰멜의 말이 거짓말인  알았다. 배에 칼빵을 놓아도 죽지 않는 아이라니. 상식적으로 그게 말이 되겠냐고. 그러나 말이 되고를 다 떠나서, 내가 놓치고 있는  하나 있었다. 나는 상식 운운하면  되는 놈이었다. 나야말로 상식에서 벗어난 존재라는 걸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크 메이지. 나는 상식을 파괴하는 마법사였다. 육신만은 인간이라 믿고 있던 바보같은 마법사. 생각해보면 마나를 무한정으로 빨아들이고 방출하는 몸이 멀쩡할 리 없었다. 그도 그럴 게, 평범한 인간은 내가 운용하는 마나의 천 분의 일조차 담지 못한다. 막말로 내 몸은 자연에 떠다니는 모든 마나의 집합체라 할 수 있었다.

내가 밥도 안 먹고 화장실도 안 가는 이유는, 생명 유지의 모든  마나로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몸엔 평생을 그리 살아도 충분한 마나가 있으니까. 그렇다면 아이는? 아이라고 다를 게 있나. 밥도 안 먹는데 대체 어디서 영양분을 끌어왔을까. 아이도 터득한 거다. 생명 유지를 마나로 대체하는 방법을.

실제로.
아이가 전개한 보호막은 내가 사용하는 베리어와 똑같았다.

아이는 마나를 자연에서 통짜로 끌어다 썼다. 따로 정제하는 방식을 거치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내가 쓰는 방식이었다.

…모방.
내 마법을 따라 하고 있었다.

이거, 나보다 강한 건 아니겠지.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긴다. 급속 성장제가 끌어온 시간은 8주 정도였다. 아직 임산부가 생각날 정도로 배가 부르진 않았지만, 아주 약간이나마 굴곡이 느껴졌다.

'8주 동안 재구축을 안 하면 이렇게 된다는 건가…?'

떨떠름한 얼굴로 가슴을 주물럭거린다. 여생女生의 대부분을 작은 가슴으로 살았던 나는 이 커다란 가슴이 영 적응되지 않았다. 가슴만 떼다 보면 외형은 거의 그대로인지라 배덕감이 장난아니다. 몸뚱어리 자체가 범죄인 느낌.

나는 내 몸의 높은 성장 포텐셜에 감탄하다, 성장한 키가 고작해야 2cm라는 사실에 짜증이 솟구쳤다. 그래도 몇 년 재구축을 참다 보면 160cm까진 클 수 있지 않을까. 일말의 기대를 해본다. 워낙 땅딸막하게 살아서 그런지 키가 크고 싶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재구축은 마나 파장에 기록된 모습으로 '되돌리는' 것이라 원래 모습보다 키를 높일 수는 없다.  160cm의 유진은 아직 기록되지 않은 미래였다. 무리하면  수야 있지만… 도박이다.

"후우…."

감정을 추스른다.
신전을 나오면 밤이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보석처럼 박힌 별들이 반짝이며 길을 알려주었다. 석유가 마나라는 특이 자원으로 대체된 세상의 하늘.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고 아름다웠다. 마나를 사용한다고 매연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기에, 이 세상은 온난화 따위의 걱정은 하지 않아도  것 같았다.

밤 특유의 서늘한 공기가 몸을 맴돈다. 나는 길을 나서며 셰멜의 주의사항을 떠올렸다. '―그렇다고 자궁을 적출하는 미친 짓은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도대체 내 뭘 보고 그런 주의사항을 건넸는진 불명이지만, 참 용한 인간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백작가로 향하다, 길에 널린 이상한 종이쪼가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뭔가 해서 집어봤더니 오늘 내가 벌인 짓이 뜬소문과 함께 대서특필  있었다. 언제 이런 걸  거지. 하여튼 지구든 이세계든 기사에 영양가 없는 건 똑같았다.

그러나. 흥미를 끄는 것들도 몇 개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도 관심이 가는 글을 하나 집어 읽었다.

―우리는 그 찬란하고도 영광스러운 빛 속에서 진리를 엿보았으니 누구라도 그 빛의 주인을 아는 자가 있다면 백색 마탑으로 찾아오도록. -백탑주 레오클라이드-

 아래에는 백지 수표를 약속하겠냐느니, 자질에 따라선 차기 탑주의 자리를 넘겨줄 수 있다느니 등의 파격적인 조건이 이어졌다. 나는 흥미로운 눈길로 글을 읽어내리다, 이내 결심을 내렸다.

하지말자.

딱 봐도 귀찮아 보였다. 부분적이나마 감정을 되찾고 삶의 목표를 정했다 해도, 저런 것엔 귀신같이 흥미가 가질 않았다. 내가 지금까지 귀족위를 안 따는 이유와 일맥상통했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언젠가는 귀족위를 따야 하는데… 내가 귀찮음과 권태를 이겨낼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이 들었다.

그러니 오늘은 헛지랄하지 말고 돌아가자. 그런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생각하기 싫었다. 아이도 멀쩡했고, 주민들도 돌려놓았고. 나름 알차게 보냈다. 물론 반 정령체인 아이를 정상이라 부르기엔 어폐가 있었지만, 그렇게 자랄 운명이라는데 어쩌겠나. 기형이나 괴물로 변하지 않았음에 감사해야지.

* * *

시간이 흐르고, 달빛마저 사그라들어 너머로 보이는 건물 빛에만 의존해야 했다. 새벽이 다가오는데도 환하게 켜진 백작가의 불빛. 나는  빛을 따라 밤거리를 거닐었다. 발걸음은 가벼웠다. 스트레스의 주원인이었던 아이 문제가 해결되니 몸은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꽉 막힌 사고가 풀어지니 여유가 생긴다.

하지만.
그 사고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들이 딱히 생산적인 종류는 아니었다. 자궁에 극독을 들이부어도 멀쩡하다라… 솔직히,  말을 듣자마자 아이 때문에 하지 못했던 난폭한 플레이들이 떠올랐다. 부디 아이가 이런 내 변태같은 성격을 닮지 않기를 빌어야겠다.

개인적으로 원하는 시츄에이션들이 많았지만, 이런 건 직접 말하면 자극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어떻게 하면 '그런 상황'을 끌어낼 수 있는지 고민한다. 일단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슈리엘이었다.  본심을 알고, 진심으로 죽기 직전까지 줄을 탄다. 그러니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눈치채고 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끼익.

문이 열린다. 이제는 익숙해진 백작저의 정문. 나는 밤늦게까지 경비를 서는 보초에게 손수건을 보여주곤 유유히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가문의 상징이 가로로 쭉 장식된 초단初段을 밟고 올라간다.

나는 잡일 중인 하녀들을 향해 가볍게 묵례하고, 슈리엘의 집무실에 노크했다.

-똑똑.

"……."

대답이 없다.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려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혹시 안에 없는 것은 아닌지 문고리를 돌려보았고―

덜컥.

문이 열렸다.

"슈리엘?"

등은 켜져 있었다. 나는 혹여 보는 눈이 있는지 주위를 확인하고, 발소리를 내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

슈리엘은 의자 등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책상에는 서류 더미가 산처럼 쌓인 걸 보니 잠시  좀 붙이는  같았다. 그와 별개로 나는 어마무시한 양의 서류에 기겁하며 입을 벌렸다. 영지 관리는 하이라크가 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럼  서류들은 대체…? 혼자서 처리할 수 있는지 의심이 든다.

 그랬던 것처럼 책상에 걸터앉은 나는 서류 몇 장을 들어 확인했다. 소리 나지 않게 조용히 종이를 넘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수배중인 악마들의 예상 경로였다. 그중에서도 우리가 놓친 악마 포르딜, 코르딜. 쌍둥이 악마의 예상 경로가 쭉 나열돼있었다. 카할리아에서 이동 가능한 경로는 다음과 같았다.

첫 번째로는 케탈리아 늪지대였다.

나태의 악마 아르타니아를 잡아 족친 곳이었다. 도망치기엔 부족함이 없는 곳이지만, 딱히 여기로 도망갈 것 같진 않았다. 케탈리아 늪지대는 특유의 위험성으로 발길이 끊긴 지 오래다. 인간을 적대하는 악마가 인적도 없는 한가한 곳에 관심을 둘 것 같진 않았다. 아르타니아는 예외로, 그냥 게을러서 그런 거고.

두 번째로는 제국 극서쪽, 세계수의 영역과 맞닿아 있는 실베흐린 대삼림이었다.

세계수. 엘프들의 영역.  엘프는 폐쇄적인 이미지와 달리, 기본적으로 영역 내에 들어오는 인간들을 적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실베흐린 대삼림은 인간들에게 인기가 있는 지역이었다. 열매 따고 약초 채집하는 정도는 신경도 안 쓰거든. 희귀 약초도 다수 분포되어있어 몬스터들만  피해 다닌다면 한몫 챙길 수 있는 곳이었다.

물론 화염 마법을 쓰지 않고, 세계수를 욕보이지 않는다는 조건만 붙는다면.

엘프들은 화염계열 마법을 극도로 혐오한다. 손에 불을 일으키는 마법사를 보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죽이려 들 정도다.

물론 그들도 기술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불을 사용해야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어서 그런지 불법 혐오는 전보단 사그라들었지만… 태초부터 풀뿌리와 함께한 종족에게 불을 들이대는  그닥 좋은 선택이 아니다.

또한 세계수를 욕하는 것도 참지 않았다. 그냥 크기만 한 나무가 뭐가 좋다고 그리 감싸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냥 엘프 앞에서 세계수 관련해선 닥치고 있는 게 상책이다.

'이곳이라면 가능성이 있겠네.'

그 뒤로 여러 지역이 설명됐으나 실베흐린만큼 가능성이 크지는 않았다.

'엘프들의 나라라….'

나는 엘프라길래 그냥 세계수 근처에서 활 잡고 뺑이치는 놈들인 줄 알았는데, 관련 자료를 조사해보니 수성전의 달인이자 범평화적인 종족이었다.

엘프들은 악마와의 전쟁 이후, 모든 기술을 세계수를 지키기 위해 발전시켜 왔다.
성벽 관련 기술로는 드워프 뺨을 칠 정도였다.

거대하고 견고한 성벽은 곧 안전을 보장했고,  안전에 이끌린 여러 종족이 몰려들었다. 대표적으로 수인獸人들이 있었다. 머리에 귀 달리고 엉덩이에 꼬리 달린 놈들. 엘프들은 흔쾌히허락해주었고, 그들의 나라는 절대다수의 수인과 소수의 엘프가 공존하는 기묘한 공생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그들의 나라는 이름이 없다. 엘프들은 세계수만 지키면 아무래도좋아 딱히 지을 생각도 없어 보였고. 인간들이 우스갯소리로 부르길, 엘프보단 꼬리 달린 털 뭉치가 많다하여 캣타워라 부르고 있다.

그렇게 서류를 붙잡고 시간을 보낼 때.

―쨍!

"윽…!"

너무 열중해서 읽었나. 몸을 뒤치적거리다, 책상 모서리에 있는 잉크병을 보지 못하고 떨어트렸다. 커다란 가슴에 가려진 시야 때문이었다. 아래 시야각이 좁아지니 이런 사소한 문제가 생겼다.

잉크병이 깨지며 검은 물감이 바닥을 더럽힌다. 낭패였다. 나는 책상에서 내려와 클린 마법을 돌리려 했다.

그때.
소음을 들은 슈리엘이 눈을 떴다.

"누구지?"

눈을 뜨고 제압하기까지는 순간. 슈리엘은 자신의 방에 겁도 없이 들어와 서류를 훔쳐 읽는 좀도둑의 목을 잡고 바닥에 눕혔다.

"까흑, 끄으윽…."
"넌…."

순식간에 목을 잡혀 바닥에 눕혀진다. 나는 뒤통수와 양어깨에 전해진 고통에 신음하며 몸을 뒤틀었다. 숨이 막힌다. 충격에 눈앞이 새하얘졌다. 슈리엘은 목을 움켜쥔 손을 한동안 놓지 않았다.

"뭐야. 너였나."

허나, 저항할 수 있어도 저항하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다쳐서는 안 될 이유'가 마구 생겨나 전처럼 걱정 없이 고통을 즐기기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셰멜의 보증이 있고, 내가 직접 확인해봤다.

이 정도는 괜찮아.
 정도는…

걱정이 결여된 고통은 쾌락만을 낳았다. 나는 부러진 어깨뼈와 졸린 목에서 오는 통증에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애원했다.

"흐끄윽… 수, 숨…"

숨을 쉬지 못해 얼굴이 새파래질수록 속옷은 투명끈적한 액체로 서서히 젖어갔다. 그때, 목을 움켜쥔 슈리엘의 손이 느슨해졌다. 그의 손은 마구 숨을 몰아쉬는 얼굴을 만족스럽게 쓰다듬다, 목덜미.  내려가 가슴으로 이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