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거짓 선지자 (1)
목에 희미한 실선이 생긴다. 흐르는 핏방울. 사내는 진심으로 목을 그어버릴 생각이었다. 한 발자국이라도 더 다가온다면 그는 망설임 없이 멱을 따버릴 것이다. 사제들도 사내의 기세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날카롭게 갈린 칼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팔다리를 자르고 배에 구멍을 뚫어도 목은 비교적 건전하게 내버려둔 것 같았다. 목조르기 질식 섹스가 건전하냐 따지면 할 말은 없다만, 잘리는 것보단 낫잖아. 그럼 죽으려나.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평가다.
그러니까 확, 목을 그어버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말이야. 처음이잖아. 처음은 늘 흥분된다. 아이를 가진 후엔 자제하자 마음먹었는데, 막상 이런 상황이 닥쳐오니 온갖 욕망이 들끓었다. 생의 끝자락에 내세워지고 싶다. 목에 댄 칼을 내려다볼수록 몸에 열기가 올랐다. 말로는 부정해도 이 답도 없는 피학욕망이 내 본심이었다.
"비겁한 사교도 자식! 신벌이 두렵지도 않으냐!"
추잡하고 퇴폐적인 망상이 폭주중이 나와 달리, 저들의 눈빛은 음산한 살의를 머금어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누구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대치가 이어진다. 사내는 차근차근 거리를 벌려나가면서 사제들에게 말했다.
"신이 있다면 당장 날 죽이고 이 불쌍한어린 양을 구했겠지. 그게 너희가 줄곧 말하던 신벌 아닌가?"
"닥쳐라! 모두 고개를 들어라! 사교도의 말은 들을 가치가 없다!"
"주린 배를 붙잡고열심히 기도해도 광주리에 빵 한 조각 내리지 않는 신을 믿을 바엔, 나 차라리 악마를 믿겠다."
사내는 이를 뿌득 갈며 손에 힘을 주었다. 따끔한 통증이 밀려온다. 아주 약간이지만, 목에 파고든 칼날은 살을 찢고 피를 머금었다. 핏방울은 목을 타고 가슴으로 내려와, 배꼽까지 도달했다. 새하얀 피부 위에 흘러내린 피는 무척이나 눈에 띄었다. 사제들의 눈에 핏발이 선다. 내가 인질로 세워지지만 않았어도 도륙을 내버렸을 텐데. 그런 분노가 느껴졌다.
음. 그냥 공격해도 상관없는데 말이야. 그리고 꼭 나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벗어둔 옷을 사제들도 봤다. 하얀색 사제복과 조금 비싸 보이는 내 옷. 옷가지의 수를 보면 이곳에 누군가 더 있는 건 확실했지만, 테리알은 꼭꼭 숨어버려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다.
테리알은 잘 숨었는지 모르겠네. 장전된 석궁이 신경 쓰였다. 괜히 움직이다 맞기라도 하면… 바로 게임 끝이다. 그러나 이런 내 걱정과 달리 사내는 테리알에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보기는 한 걸까, 아니면 인질은 하나로 족한 걸까. 그는 내 턱을 잡아 위로 올린 후, 목선이 드러나도록 얼굴을 고정했다.
"으긋…."
"오늘 밤까지 추격을 멈춰라. 그럼 소녀를 풀어주겠다고 맹세하지."
웃기게도, 나는 인질로서 해야 할 역할을 충분히 수행 중이었다. 헛웃음이차올랐지만, 턱을 잡은 사내 때문에 으븝거리기만 할 뿐 다른 말은 나오지 않았다. 사제들은 가당치도 않다며 무기를 겨누었다.
"간악한 사교도의 믿을 것 같으냐!"
"믿을 수밖에 없겠지."
―깊은 구렁 속에서 당신을 부르짖나이다. 사내는 눈을 감고 조용히 기도문을 읊었다. 죄악을 견디지 못한 어린 양의 음산한 기도문. 사내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동시에,불길한 마력이 솟구치며 사내의 가슴속에 깃들었다.
'심장을 걸었어?'
파악한 바로는 일종의 계약 술식이었다. 계약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심장이 터져 죽을 거다. 흥미롭지만 배우고 싶진 않았다. 저런 건 사제들이 말한 사교… 즉 사술에 해당했다. 마법은 마도의 본질인 창조에서 멀어질수록 '사교'에 가까워지는 경향이 있었다. 오해는 하지 말아야 하는 게, 흑마법과는 달랐다. 이 세계에서 흑마법은 암속성을 다루는 모든 마법을 칭하는 단어다.
"…."
"뭐하나? 너희들도 맹세하지 않고. 나만 맹세할 거라 생각한 건가? 내가 그 정도로 멍청할 줄 알고? 10초 이내로 맹세하지 않을 시 목을 따버리고 자살하겠다."
"…큭."
"십, 구, 팔, 칠…."
숫자가 세어지고, 남은 시간이 삼 초밖에 남지 않았을 때. 사내는 팔에 힘을 강하게 주었다. 피가 터져나온다.
"끄흑…."
핏줄이 끊기고, 더 진한 색의 피가 흘러나온다. 조금 깊게 배인 것 같았다. 나는 눈물이 핑 도는 고통에 이를 꽉 물고 신음을 참았다. 이 필사적인 인내가 사제들에게 어떻게 보였을지는 몰라도, 그들의 결심을 재촉한 건 분명했다.
하얀 머리의 여사제가 다급히 수인을 맺는다. 신성력이 스며들며 그들의 몸을 감쌌다.
"…신의 이름을 걸고, 오늘 하룻밤. 추격을 멈추겠다."
"좋다. 진즉에 그랬어야지."
신의 이름을 내건 맹세는 어기는 순간 죄악이되어 낙인으로 남는다. 이마부터 시작해 가슴께까지 새겨지는 짙은 성흔. 그 고통과는 별개로,신앙인으로서 살아온 인생이 송두리째 부정당하기에 어느 맹세보다 강력하다 할 수 있었다.
싸늘한 침묵이 오간다. 사내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뒤로 물러났다. 서로의 거리가 희미하게 보일 정도로 멀어지자, 멀리서 살벌한 중얼거림이 들렸다.
"…추격, 중지."
추격은 없었다.
나는 그렇게 속옷만 입은 채 인질이 되어 외곽 중심으로 향하게 됐다.
* * *
"시스터 헬라…."
"…내 불찰이다."
이단심문관 헬라는 모닝스타를 내려두며 침음을 흘렸다. 불가피한 희생이 있더라도 사교도를 척살하는 게 자신의 소명이지만, 인질로 잡힌 소녀를 보자 무기를 거둘 수밖에 없었다. 어린아이를 인질로 잡다니. 이 부덕한 천둥벌거숭이 같으니라고. 부디 신의 자비를 바라며 속으로 뇌까린다. 헬라는 백발의 포니테일을 거칠게 풀며 이를 갈았다. 머리가 스르륵 내려온다.
묶인 머리칼을 풀자, 힘들게 억누르던 이성도 같이 풀렸다. 살기가 흐른다. 부릅 뜬 눈은 흉하게 충혈되어 무척이나 살벌해 보였다. 이는 다른 여사제들도 마찬가지였다. 흐르는 바람 소리는 어딘가 소름이 끼쳤다.
심장을 내건 맹세. 어떤 우회적 수단으로도 어길 수 없는 절대적인 맹세는, 그의 심장이 증인이 되어 이루어졌다. 그러나 확실한 맹세를 받았음에도 영 미덥지가 않았다.
거짓 선지자 헤리엇….
그는 사술사다. 재료를 구하기 위해 묘지를 파헤치고 어린아이 넷을 실험에 희생시킨 극악무도한 인간쓰레기. 그 외 발견하지 못한 죄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성황청과 신전에서 이를 갈고 추적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그는 사람을 모았다. 모으고, 제 뜻을 따르도록 동참시켰다. 헤아릴 수 없는 죄악의 늪에 사람들을 빠트렸다. 그 수가 상당해 꼬리를 자르는 것만으로는 잡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헤리엇의 주 타겟은 밀려난 외곽민이었다. 세상의 부조리를 전파해 회유시키고, 확실한 이득을 주어 제 뜻을 따르게 한다.
거짓 선지자. 그는 영리했다. 사람을 모으는 이유는 '실험 재료'를 충당하기 위함도 있었으나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조직화.
그에 따른 분포화.
초기 진압에 실패하면 영원히 꼬리만 잘라야 할 수도 있다. 더욱 골이 아픈 건, 외곽민 대다수가 헤리엇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헤리엇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확실한 실을 주었다. 굶지 않아도 되며, 아프지 않아도 되는 몸을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인망을 쌓았다. 그렇게, 자신의 영역을 구축해나갔다.
헤리엇은 그것을 축복이자 구원이라 말하지만 실상은 더럽기 그지없었다. 영혼을 박제하고, 몸을 시체에 가깝게 바꾸는 게 뭐가 축복이란 말인가. 그의 손을 거친 자들은 죽어도 구원받지 못하고 영원히 인형으로 다뤄진다.
하지만.
외곽민들은 알면서도 시술을 받았다. 그들은 밀려난 자였다. 동부의 찬란함에 이끌려, 그 빛을 품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지만 끝내 품지 못하고 밀려난 이들이다. 그렇게 빛을 품지 못한 자들은 더 갈망하기 마련이었다. 빛을 모르고 살아가는 이들보다 더 강렬히 갈망했다. 한 번 눈에 담은 빛은 너무나 찬란해서, 결코 잊을 수 없기에. 빛을 주겠다는 그 한마디를 거절할 수 없어서.
그게 거짓된 빛인 줄도 모르고.
"부신관님은 뭘 하고 있지?"
추격 실패.
헬라는 지금쯤 3지구를 들쑤시고 있는 셰멜을 상상하며 입을 열었다. 끝내 궁지에 몰았지만 또 실패하고 말았다. 이렇게 본신을 추격해 상처를 입힌 건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더 뼈아팠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보고할 건 보고해야 했다. 그리고 그에 따른 벌도 받아야 했다. 자신이 속한 3조의 명령권자는 자신이었기에 모든 책임은 자신이 받아야 했다.
"3지구 외곽 연구소를 발견, 해체하고 있습니다."
수정구를 꺼내 든 여사제 하나는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수정구를 지닌 이들끼리 시야 공유가 가능한 성유물이었다.
"2지구에 헤리엇이 나타났다고 전…."
헬라는 고삐풀린 이성을 다잡으며 보고… 하려고 했다.
―히끅.
호숫가 돌 뒤에서 작고 여린 딸꾹질이 들렸다. 헬라는 돌덩이 위에 올려진 옷가지들을 쓰윽 확인한 뒤, 부하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명령했다.
"…옷을 회수하고 누군지 확인해라. 사교도로 확인될 시 즉결 처형한다."
모닝스타를 집어 든다. 묵직한 무게감. 헬라는 발소리를 죽이고 호숫가로 다가갔다.
"…."
조심스럽게. 반격의 여지를 주지 않도록, 바로 공격할 수 있게 자세를 잡고선 다가간다. 위에 올려둔 옷가지를 지나치자, 헬라는 뜻밖의 인물을 볼 수 있었다.
자신과 같은 백발의 소녀. 예배가 끝나면 항상 재미난 일을 찾아 밖으로 나가는 신전의 문제아. 그러나 곧 포기하고 청소나 하는, 그래도 착하고 성실한 아이.
"테리알?"
수습 사제 하 테리알.
"제, 제발 살려주세요. 죄송해요, 제, 제발. 제발…."
그녀는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빌고 있었다.
"시스터 테리알! 대체, 여기서 뭘 하는…"
"사, 사려. 살려주세요. 히끅… 살려, 주세요…."
패닉에 빠져 말도 못하는 테리알을 보자 두통이 밀려왔다. 여기서 대체 뭘 하던 거냐 테리알. 인질로 잡힌 소녀와 관련이 있을지도 몰랐다. 헬라는 손을 들어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전원! 테리알을 회수하고 복귀해라!"
"복귀하실 겁니까?"
"아니. 나는 주변을 탐색하겠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의 도주를 방해하는 순간 맹세가 깨질 겁니다."
"괜찮다. 주변을 둘러보는 것뿐이니."
부하들이 테리알을 들쳐메고, 신전으로 복귀한다. 헬라는 참담한 심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대체, 어디로 들어온 거지?'
외곽 입구는 병사들이 막고 있을 텐데. 의문을 품은 헬라는 주변을 탐색하다, 약간 허름한 성벽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성벽을 주의 깊게 살피다, 작은 홈을 찾았다.
'개구멍….'
복귀하면 당장 이 구멍을 막아야겠다 다짐한 헬라는 결국 차오른 분을 못 이겨, 모닝스타를 들고 애꿎은 나무만 박살 냈다.
* * *
"후우. 드디어 따돌렸군. 때마침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내 감사를 표하지. 이름이 뭔가? 내 이름은 헤리엇이라네. 보다시피 저 빌어먹을 미친년들한테 쫓기고 있는 몸이지마는… 하룻밤은 벌었으니 천만다행이라 할 수 있겠지. 다 자네 덕분일세. 아차, 피가 너무 흐르는군. 이봐, 듣고 있나? 약이라도 줄까? 지금 가지고 있는 약이라곤 하만타 풀뿌리를 갈아 만든 가루약밖에 없다만, 뭐 이 정도로 충분하겠지. 일부러 급소는 피해 배었거든. 난 그렇게 난폭한 사람이 아니라네."
"닥쳐, 요…."
"그렇게 피를 흘려놓고선 말할 기운이 남아있다고? 생각보다 체력이 좋은가 보군. 연구할 가치가 있겠어. 그보다, 마을에 도착하면 내 크게 대접해주지. 이번에 정말 끝장나는 줄 알았거든. 이거야말로 신의 기적이 아닌가! 역시, 신은 날 버리지 않았다네. 저들은 날 거짓 선지자라 부르지만 나 또한 신앙심을 품은 어린 양에 불과하지. 그리고, 아프고 가난한 이의 몸을 고쳐주고 밥 좀 먹인 게 무슨 중죄라도 되나? 내 연구를 방해하는…"
"으윽…."
귀가 터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