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외곽으로 (2)
"외곽… 이요?"
테리알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얼굴엔 나 같은 소녀가 왜 외곽을 찾는지 궁금하다는 표정을 드리웠다. 하여튼 생각 읽기 참 쉬운 사람이다. 나는 테리알의 걱정어린 얼굴을 무시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설명하자면, 외곽을 찾는 이유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셰멜을 만나고 싶다는 이유고, 하나는 단순 호기심이다.
그리고, 말하기 조금 부끄럽지만, 조금 더러운 욕망도 껴있었다. 요즘 너무 순하게 시간을 보냈거든. 아이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새로운 자극을 찾으러 가는 거다. 석화 물약 같은 걸 찾으면 더 좋고. 구하면 나중에 슈리엘이랑 같이 써먹어 봐야지.
"외곽은 어떤 곳일까 궁금하기도 하고… 그보다 부신관님에게 볼일이 있어서요."
"으음… 그다지 추천해 드리진 않아요. 장소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 위험하다고 들었거든요."
"괜찮아요. 그런 건 숱하게 겪어봐서."
나는 그녀의 만류에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외곽'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은 뒷골목과 다를 게 없었다. 실상은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돈 없어 밀려난 놈들이 모인 변두리라는데 별 차이가 있겠는가. 테리알도 내 말에 부분적으로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으음…! 그렇다 해도 단속 때문에 힘들 거에요. 이미 나간 사람들은 내버려두지만, 전에 말한 불온 신앙 문제도 있고, 치안 따위의 문제가 얽혀서 겉으로는 막아두고 있거든요."
"겉으로는?"
"문서상으로만 금지라는 뜻이에요. 저희 신전에서 주기적으로 진행하는 자원봉사도 법적으로는 금지거든요. 영주님께 직접 허락받은 지라 문제 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경비가 허술하다고 가볼 생각은 하지 않는게 좋아요! 저도 잡힐 뻔했거든요!"
"…가본적 없다고 하셨더니, 거짓말이었군요."
"네? 아, 네?! 그, 그게… 헤헤.저는 아직 수습 사제라 잡일밖에 못 하거든요. 지루하기도 하고… 아…! 이 말은 비밀로 해주세요…! 저번에도 부신관님한테 걸려서 엄청 깨졌단 말이에요…!"
문제아였구나.
문득, 슈리엘의 말이 떠올랐다. 밖에서 누군가 네 신분을 물어보면 자신의 전속 시녀라 대답하라고. 셰멜은 이미 눈치챈 듯했지만 테리알은 아니었다. 밖에서 꼬투리 잡히지 않고 활동하기엔 더없이 편한 신분이기도 한데… 아직 제대로 된 신분도 없겠다, 한동안 신세 좀 져야겠다.
"괜찮아요 테리알."
"비밀로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게 아니라…."
품에서 손수건을 꺼낸다. 루셸리니가의 인장이 새겨진 은색 손수건. 나는 손수건을 펼쳐 인장이 보이도록 내밀었다. 테리알은 뜬금없이 손수건을 건내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새겨진 인장의 종류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지금 그녀가 두 발 딛고 사는 영토의 주인, 루셸리니. 그들의 인장이 새겨져 있었다.
단속? 루셸리니의 이름을 무시하고 막아설 병사가 있다면 그 용기에 찬사를 보내주마.
"그, 그건."
테리알의 입이 벌어진다. 살짝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칼버드와 책에서 배웠던 예법을 기억해낸 뒤, 품위있게, 절도있게 인사했다. 손과 다리는 다소곳하게, 허리는 가볍게 숙인다. 과한 예의는 차리지 않는다. 인사하는 순간만큼은 루셸리니가 내 주인이었다. 루셸리니가 아닌 이에게 과한 예의를 보일 수는 없지. 슈리엘의 이름을 빌리는 이상 가문에 먹칠은 하지 않도록 해야했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백작가의 긍지 높은 검, 대행자 슈리엘 루셸리니 님의 전속 시녀, 유진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창백해진 얼굴로 빗자루를 꽉 쥐었다. 백작가의 전속 시녀라 하면 귀족이 아닌가. 사제를 포함한 모든 종교직들은 위치상으론 평민보다 위였지만 결코 귀족을 넘을 수 없었다. 신관이나 추기경 같은 예외가 아니라면 귀족에게 예의를 차리는 게 맞다. 그런데, 테리알은 예의를 차리긴커녕 위법 사실을 자랑스럽게 밝혔다. 그러니 겁 날만도 하지. 아무 말도 못 하고 파들파들 떠는 게 귀여워 보였다.
"음, 테리알?"
"…자매님? 유진 님? 어, 어어… 뭐, 뭐라고 인사해야…."
"제게 물어본다 한들 알겠습니까."
"죄, 죄송합니다!"
"…신경 안 쓰니 평소대로 대해주세요."
금새 흥미가 식어버린 나는 한숨을 쉬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역시, 누굴 곤란하게 만드는 건 취향이 아니다. 슈리엘을 괴롭힐 땐 재밌었는데… 그거랑 이거랑 다른가 보다.
테리알은 의외로 쉽게 진정했다. 바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순수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둘 다인 건지. 사칭이라 생각할 법도 한데 철석같이 믿는 걸 보니 바보 같았다. 귀족과 대면하는 게 처음 같아 보였다. 빗자루를 떨어트린 테리알은 허둥지둥 고개를 숙였다. 빗자루를 주워든 테리알은 나풀거리는 백발을 정리하지도 않고 말했다.
"외곽을… 가고 싶으시다 하셨죠?"
"네. 이왕이면 봉사지역까지 알려주셨으면 해요."
"으음…."
이번엔 또 뭐가 문젠데. 그녀가 말을 흐리자 미간이 좁혀진다. 테리알은 당황하며 말을 이어갔다.
"외곽까지 길이 조금 많이 복잡해서요…! 아마 말로는 설명하기 힘들 거에요."
"그래서…?"
테리알은 주변 눈치를 보곤, 입술을 쓱 핥은 뒤 조용히 말했다.
"…제가 안내해드릴까요?"
* * *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테리알은 기쁜 얼굴을 지으며 방방 뛰었다. 그 모습이 흡사 밀린 휴가를 받은 장병과 같았다. 이해는 간다. 신전에 처박혀 잡일만 하고 있다는데 질릴 만도 하지. 별개로 그녀의 비행에 일조하는 게 아닌가 싶어 조금 찔리기도 했다. 그래도, 길 안내를 부탁할 거면 안면이 있는 사람이 나았다. 서부에서 생긴 인간불신. 모르는 이는 다 예비 범죄자다. 물론 동부는 다를 테지만… 이곳이 동부라는 걸 깨달았을 땐 그녀와 함께 길을 나섰을 때였다.
백발의 미소녀 사제와 함께 다니니 걸음 하나하나가 그림의 한 폭 같았다. 가뜩이나 키 차이도 별로 나지 않아, 사제복만 아니였으면 친한 자매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렇다고 내 키가 크다는 건 아니다. 그녀의 키는 158은 되어 보였다. 하아. 이래도 나보다 6cm 컸다. 내 키가 땅딸막하단 건 알고 있지만 테리알에게도 밀리니 기분이 묘했다. 하긴 나보다 작기가 힘들겠지. 나보다 작으면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나이가 분명했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고…."
길은 복잡했다. 그녀가 복잡하다고 한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신전 뒷문으로 나가 오른쪽으로 꺾고, 한참을 직진한 다음 미로 같은 뒷골목을 돌파한다. 그 후 나오는 구불구불한 흙길을 따라 빛이 바래 허물어진 벽에 도착한다. 의심이 드는 건, 길이 정말 이것밖에 없느냐는 것이다. 외곽까지의 정식 루트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렇게 복잡한 길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그야 여긴 개구멍이었으니까. 그녀가 자랑스럽게 외친다. "빨리 오세요!" 몸을 낮추고, 구멍을 기어갈 준비를 마친 테리알은 활짝 웃으며 내게 따라오라 손짓했다. 후우…. 이거 괜찮은 거 맞나. 괜한 의심을 거두고 그녀를 따라간다. 그녀에게 날 속일 지능이 있으리라 생각되진 않았다. 너무 저평가했나. 아무튼.
읏차. 귀여운 기합을 내며 고개를 숙인다. 개구멍은 오랫동안 다녔는지 고르게 파여, 작은 체구의 여성 한 명 정도는 무리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딱 테리알이나 내가 아니었다면 들어가지 못할 크기. 돌조각에 스치지 않게 조심스럽게 기어간다. 속도가 느리다 보니 이곳저곳에 흙먼지가 묻어 떨어지지 않았다. 이건 테리알도 마찬가였는지 새하얀 사제복이 흙먼지로 더렵혀졌다. 나는 열심히 기어가며 테리알에게 물었다.
"테리알. 여기 꽤 왔었나봐요?"
"네! 말하긴 부끄럽지만, 예배가 끝나거나 밤이 되면 종종 오거든요. 아직은 저밖에 모르는 거 같아요!"
"밤에도…? 그보다, 옷이 많이 더럽혀진 거 같은데… 혹시 돌아갈 때 그냥 돌아가나요?"
"근처에 호수가 있거든요! 그곳에서 씻으면 문제 없어요. 게다가 그곳은 바람도 잘 들어서, 옷을 널어두면 빨리 마르더라구요. 개구멍으로 돌아갈 땐 옷은 접어서, 품에 안고 기어가면…"
…뭐라고?
내가 뭘 들은 거지.
"자, 잠깐만요 테리알. 혹시 지금까지 혼자 왔어요?"
"…네? 음, 네!"
"미쳤어요?"
신성력 각성도 못한 수습 사제가, 야밤에 혼자 뒷골목을 돌아다니곤, 위험천만한 외곽 호숫가에서 목욕을 한다고? 무방비한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신전은 대체 뭘 가르친 거냐. 테리알은 자신이 저지른 짓이 얼마나 위험한지 자각도 없어보였다.
"네, 네?"
"다른 사람이 보기라도 하면 어쩔려구요? 지금까지 여기 몇 번 왔어요?"
"여, 열다섯… 음. …안 걸렸으니 괜찮지 않을까요?"
"그게 아니라, 하아…."
찰싹! 기어가던 테리알의 엉덩이를 때리자 찰진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 셰멜한테 말하는 게 더 빠르겠지. 미안하지만 이건 말해야겠다. 내가 아는 사람이 어딘가에서 간살당했다는 소리가 들리면 좀 많이 슬플 거 같거든. 테리알은 영문도 모른 채 엉덩이를 맞자 힝힝거리며 기어가는 속도를 높혔다.
"도착, 이에. 요!"
"끄응…."
조금 길이가 되는 개구멍을 빠져나오자, 포장이 되다 만 도로가 보였다. 나무 몇 개가 잘려져 썩어가는 걸 보아하니 개발 도중에 멈춘 지역 같았다.
우리는 외곽 초입에 도착했다.
"후아아… 이 맑은 공기…! 제가 이래서 이곳을 좋아해요."
테리알은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기지개를 켰다. 근처에서 맑은 물 냄새가 풍겨왔다. 테리알이 말한 호수가 분명했다. 그러고 자시고. 본래 목적인 셰멜을 만나야 하지 않겠는가.
"테리알. 그래서 셰멜… 부신관님은 어디로 갔죠?"
"그게…."
"그게?"
"저도 잘 몰라요!"
"…."
죽이고 싶다. 라고 생각이 든 건 찰나였다. 나는 욕바가지가 튀어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른, 다고요?"
"아, 아아… 그게! 그게… 설명할 테니 화내지 말아주세요오…."
테리알은 느껴지는 살기에 부르르 떨며 손사래를 쳤다.
"일정표만 있을 뿐이지 자세한 장소는 말해주지 않아요. 그게, 장소 선정은 부신관님이 하시는지라…."
"그럼, 그걸. 미리 말해주시면. 되지 않았습니까."
"그, 그게… 유진 님이 외곽은 어떤 곳인지 궁금하다 하셔서…."
그걸 그렇게 해석한 건가. 문득 테리알의 나이가 궁금해졌다.
"테리알, 나이가 어떻게 되죠?"
"네? 열여섯이요!"
미쳐 돌아버리겠군. 화를 내려던 내가 바보 같아졌다. 그리고, 셰멜에게 단단히 일러두는 것도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열여섯이라니. 대체 신전에서 뭘 했기에 이리 순진하게 자란 걸까.
"…그동안 신전에서 뭐 했어요?"
"으음… 청소하고, 빨래하고, 기도하고, 신도님들 안내하고…."
"그게 아니라, 신전에 오기 전에 하던 일이 있을 거 아니에요."
"없어요…! 다섯살 때부터 신전 보육 시설에서 자랐거든요."
"…부모님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전 신성력을 지닌 채 태어났어요. 이렇게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신전에서 관리해요. 언제인지는 몰라도, 신성력 각성은 거진 확정이니 미리 사제로 키우는 거죠. 강압적이진 않아요. 부모님과 만나고 싶을 때 만날 수도 있고, 신전살이를 거부할 수도있어요. 그래도. 지루하긴 해도, 전 이 일이 좋아요. 나가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들었…"
그만.
나는 테리알의 입을 막으며 말을 끊었다.
"…알겠어요. 그래서, 부신관님이 어디로 갔는지는 모른다는 거죠?"
"음… 네! 하지만 이곳 근처라는 건 확실해요. 2지구 외곽은 이곳밖에 없거든요. 1, 3, 4지구 외곽의 거리와 시간을 생각해보면 나흘로는 불가능해요. 분명 이곳일 거에요."
"고마워요. 그거면 충분해요."
그런가. 그거면 충분하다. 남은 시간은많았다. 만나고 돌아올 건데 뭐. 나는 목을 한 번 돌려 몸을 푼 뒤 길을 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테리알."
"네?"
"…왜 따라오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