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루셸리니 (6)
극심한 우울증세는 약간의 탈력감을 동반했다. 몸에 힘이 빠지고 부들부들 떨린다. 나는 침대 위에서 눈을 감고, 쥐죽은 듯 숨만 몰아쉬었다. 공황과는 달랐다. 아니. 차라리, 공황 증세라도 왔으면 좋겠다. 생각을 정리할 새도 없이 픽 쓰러졌으면 좋겠다. 숨을 쉴 때마다 차분해지는 머리가 미웠다.
왜. 왜. 그런 말을 해서. 나중에 말해도 됐었잖아. 슈리엘의 말대로 때가 좋지 않았다. 너무 이른 소식이었다. 제대로 된 신분을 확보한 뒤에 말했어야 했다. 순진했다. 나는 평민이었고, 그는 백작가의 영식이다. 그 까마득한 차이를 왜 생각하지 못한 걸까.
생각해보면, 이렇게 질질 짜지 않아도 충분히 해결 가능한 일이었다. 신분의 차이? 내 능력이면 귀족위, 못해도 남작은 가볍게 딸 수 있으리라. 역사를 통틀어 다섯이 채 되지 않는 아크 메이지인데 누가 나를 가로막을까. 제국을 뒤집고 왕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리고 굳이 전투가 아니더라도 마법 논문 하나면 모든 마탑에서 날 우대해줄 것이다.
하지만. 한 번 몰아친 감정은 도저히 막기가 어려워서. 슈리엘에게 거부당했다는 생각이 들자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머리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나만 버려지는 게 아니잖아. 내게 아버지가 누군지 묻는 아이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그 환영 속의 나는 아이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하아… 하아으…"
이마를 감싸고 떨리는 몸을 억지로 진정시킨다. 자해를, 할까? 그러면 좀 진정될지도 몰랐다. 아니야. 잘못 했다가 아이라도 다치면? 마음껏 몸에 칼을 대도 상관없던 과거와는 다르다. 나는 지킬 것이 생겼다. 쌓여가는 불안은 나가지 못하고 야금야금 육신을 갉아먹었다.
-똑똑.
감정의 바닷속에서 난파된 배처럼 가라앉던 도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팔만 스르륵 내려 눈을 떴다. 천장에 달린 등은 화려한 장식만큼 빛도 강렬했다. 바라보기도 힘든 강한 빛이 직선으로 내려와 눈을 비춘다. 나는 침대에 누운 상태 그대로, 노크 소리에 대답했다.
"들어오세요."
"방은 마음에 드나?"
"…칼버드."
문 너머 목소리의 주인은 칼버드였다.
-끼익.
문이 열리고, 백발의 노인이 얼굴을 비쳤다. 그는 저택 안임에도 불구하고 전신에 경갑을 착용했고, 미궁에서 쓰던 대검까지 챙겼다. 마차에서 내리기 전과 다름없는 모습. 은으로 장식된 칼집이 빛을 받아 번쩍인다. '손님'에게 '대접'을 한다기엔 너무나도 무례한 복장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손님이 아니었다. 나는 참고인이다.
더군다나, 칼버드는 날 경계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여러 차례 실패한 구원대의 총지휘관은 다름 아닌 칼버드 본인이었기에, 미궁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행자가 있다 해도, 미궁은 F급 모험가가 최정상까지 살아남긴 불가능에 가까운 곳이다. 내가 힘을 숨겼다고 생각하겠지. 맞다. 나는 힘을 숨겼다. 칼버드가 내게 손을 대지 못하는 건 슈리엘 때문이지 내가 결백해서가 아니다.
"…방은 문제없어요."
"허허. 한동안 안 쓰던 방이라 걱정했건만, 기우였나."
"그래서, 왜 찾아오신 거죠?"
"못본 새에 까칠해졌군."
"…무례, 사과드립니다."
"됐네. 그보다 일어나게."
무례라면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대답한 게 무례겠지.
칼버드는 제 주인의 안위에 병적으로 집착했다. 자신을 향한 무례는 가볍게 묵인하나, 그 무례가 주인을 향한다면 망설임 없이 칼을 뽑아든다. 그러나 딱 한 번. 그가 주인을 두고 돌아설 때가 있었으니. 마기에 침식된 슈리엘이 칼버드의 딸을 두고 협박했을 때였다. 달마다 드는 치료비용이 엄청나다 했나.
하아.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욱신거리는 머리를 무시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얼마 눕지도 않았는데 벌써 부스스해진 머리칼이 눈을 가렸다. 나는 얼굴을 찡그리고 머리를 정리했다. 팔이 하나라 그런지 느렸다. 조금 한심하게 바라보는 칼버드에 시선이 박힌다.
"쉬는 도중에 방해해서 미안하다만, 곧 식사 시간이다. 준비해라."
"…도련님께서는 두 시간 후에나 준비된다고 하셨는데요."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시계를 본다. 아직 30분밖에 안 지났다. 칼버드는 희미한 한숨을 내쉬며 허허 웃었다.
"그 상태로 가겠다는 건가?"
"…나름 청결은 유지했습니다."
클린 마법의 존재로 나는 항상 청결한 상태다. 겉뿐만이 아니라 속까지도. 찌꺼기는 속에서 태우니 화장실을 갈 필요도 없다. 플레이 도중 실금하는 건… 음. 조금 다른 얘기다. 굳이 설명은 하지 않겠다. 어쨌든 나는 흙 하나 묻지 않은 말끔한 상태였다. 그러나, 칼버드의 지적은 청결이 아닌 예절이었다.
"그 어쭙잖은 예절 가지고 식탁에 설 생각은 하지 말게나. 주인은 넘어갈지 몰라도 공께선 그러지 않을 걸세."
"…."
"귀족들의 예절은 책만 보고 배우기엔 한계가 있는 법이지. 내가 하나하나 가르칠 테니 어서 오도록."
고작 그거 때문에 날 부른 거냐. 라고 말할 뻔한 걸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냈다. 칼버드는 내 못마땅한 얼굴을 보고도 아무 말 없이 등을 돌렸다. 젠장. 짜증은 나도 따라가야겠지.
"좋다. 조금만 더 팔을 낮추도록."
"…."
"아니. 고개는 들고."
"하아…."
반강제로 배운 귀족들의 식사 예절은 의외로 간단한 것들이었다. 자세 같은 건 배움이 빠르니 별로 어렵지 않았다. 소리를 내지 않고 고기를 써는 법이나,시선을 맞추고 팔을 움직이는 법 따위는 정말 사소한 것들이었다. 나는 그렇게 식사 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칼버드와 시간을 보냈다.
"훌륭해. 한 시간 만에 모든 예법을 소화할 줄은 몰랐다만…."
"…과찬입니다."
"아니, 정말이라네. 팔 하나로 고기를 써는 사람이 어디겠나? 포크 대신 마나를 사용해 고기를 고정하다니. 어지간한 마법사도 힘들어할 일이야."
이제는 대놓고 힘을 숨기지 않았냐 물어본다. 나는 그 노골적인 칭찬에 한숨만 퍽퍽 쉬었다. 그래도 성실하게 가르쳤기에 넘어가 주겠다. 배운 건 있으니까. 내가 그 정도로 염치가 없진 않다.
-딸랑.
그때. 종이 울렸다. 하녀 한 명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칼버드 님.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준비의 끝.
칼버드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내게 말했다.
"이제 가보게나. 내 역할은 이걸로 끝일세."
"경께선 가지 않으십니까."
"내가 아니라 너를 위한 대접이니까. 장소는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
고개를 끄덕인다.
허허 웃는 그의 미소는 어딘가 작위적이었다.
* * *
슈리엘이 말한 '대접'은 루셸리니의 위세를 고스란히 보여주듯, 가히 왕의 만찬이라 부를 만큼 호사스러웠다. 진짜 왕의 만찬이란 건 아니고, 그냥 내가 표현할 수 있는 한계였다. 식탁에 눈을 돌린다. 이름 모를 요리들은 식탁 위에 한 아름 올려져 보는 것만으로 침을 꿀꺽 삼키게 하였다. 살인적이게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잘차려진 음식은 존재만으로 우울해진 기분을 달래주었다.
헌데, 정작 나를 초대한 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넓은 테이블에 나 혼자만 앉아있으니 무척 어색했다. 덕분에 나만 고통스러웠다. 이런 음식들을 눈앞에 두고서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한다니. 침이 절로 고였다.
-또각.
그렇게 침만 삼키고 있을 때. 발소리가 들렸다. 찰랑이는 금발 머리.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큰 키. 슈리엘이었다.
"도련, …님."
"유진."
밝아지려는 얼굴을 가까스로 돌려놓는다. 고작 몇 시간 떨어진 것이지만, 오랜만에 만난 사람처럼 반가웠다. 그가 원망스럽기는 해도, 아이의 아버지라 생각하니 도저히 미워할 수 없었다. 내가 이러는데. 슈리엘이 이 일련의 표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는 내게 다가와 아주 작은 목소리로, 간결하게 말했다.
"오늘 밤. 내 집무실로."
"…."
밤. 집무실. 할 얘기라도 있는 걸까. 입으로 하는 얘기가 아닐 수도 있다. 나는 슈리엘의 중의적인 표현에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뭘 생각하는 거야. 중의적 표현이고 나발이고, 평범하게 대책을 논의하려는 거겠지. 혼자서 망상을 폭주시키고 있자니 또 다른 발걸음이 이어서 들려왔다. 슈리엘은 빠르게 떨어져 자신의 자리에 앉아버렸다.
"늦어서 미안하군. 손님을 부르고 음식 앞에서 기다리게 하다니. 이런 결례가 또 없어."
하이라크 루셸리니. 슈리엘이 정석적인 금발 귀공자라면, 하이라크는 살짝 하얀빛이 감도는 백금발이었다. 첫 만남은 아니니 거창한 인사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는 비어버린 팔에 눈을 두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팔이 부족해 무례함을 보일 수 있는 점 미리 사과드리겠습니다."
"주제는 알고 있으니 보기 좋구나."
하이라크는 슈리엘의 '귀족다움'을 배는 강화한 자였다. 그는 날 때부터 귀족이었으며 바뀌지 않았다. 모험가를 향한 멸시. 아랫것을 천시하는 행동거지가 몸에 배어있었다. '주제를 알고 있으니 보기가 좋구나.' 지금 한 말도 얼핏 들으면 비꼼이나 조롱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하이라크에겐 '당연한' 일일 것이다.
다만. 그에게 대들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내 옆에 있으니.
"팔이 떨어진 게 유진 잘못은 아니지."
슈리엘.
그는 나를 대신해 분노했다.
"그럼 네 잘못이라 해야 속이 풀리겠느냐? 변호를 해줘도 알아먹지를 못하니 의욕도 안 나는군."
"앉아서 서류만 주야장천 읽는 놈이 뭐가 어째?"
"입버릇 하고는. 밖에 나가더니 입이 걸레가 되어 돌아왔어. 칼버드에게 한소리 해야겠구나."
"으극…."
"그만. 평민 앞에서 추태를 부려서 되겠느냐."
슈리엘은 이를 빠득 갈곤 포크를 쥐었다. 그러곤 예법은 싸그리 무시하곤 콱 찍어 크게 한입했다. 하이라크의 미간이 좁혀진다. 나름의 복수 같았다. 나는 그 옹졸한 복수에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필사적으로 막아야 했다. 멍청이. 그래도 고마워.
"그래. 이름이 유진이라고 하였느냐."
하이라크는 포크도 집지 않고 내게 말을 돌렸다.
"예. 모험가 출신, F급입니다."
"상급 오러 나이트인 칼버드도 세 차례나 공략에 실패한 탑을, 슈리엘과 단둘이서 돌파했다고? F급 마법사가?"
"…."
"정체를 밝혀라."
첫마디부터 추궁이라니. 직설적이어도 너무 직설적이었다. 덕분에 포크를 쥐던 손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모험가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등급이 낮습니다."
"마탑 소속인가."
"아닙, 니다."
그 이후 강요에 가까운 질의·응답을 12분이나 이어갔다. 하이라크의 어조는 사나웠지만 적의는 없었다. 그래서일까. 슈리엘은 불만을 품을지언정 그를 말리지 않았다.
"내 너에게 물어볼 게 많지만, 곧 성황청으로 떠난다 하니 이쯤에서 그만두겠다. 음식이 식어가는구나. 어서 들거라."
"감사… 합니다."
"아. 그전에. 마지막으로."
"…예?"
"슈리엘과 무슨 관계지?"
"…."
얼굴이 굳는다. 물 흐르듯 바꾼 주제에 충분히 반응하지 못해 찰나의 순간 포커페이스을 풀어버렸다. 낭패였다. 하이라크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잤나?"
이번엔 뇌가 굳었다. 나는 하이라크의 직설적인 화법에 무어라 대답하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그는 실실 웃으며 슈리엘에게 눈을 돌렸다.
"탑에서 어떻게 살아 돌아왔나 했더니, 그런 거였나."
"너… 그 주둥아리 한 번만 더 놀리면…."
"사실인가? 한 번 떠본 것인데 한심하긴. 쯧. 네가 아무리 대행자 일로 밖을 쏘다닌다 해도 정도가 있는 거다. 네가 평민과 붙어먹었다는 사실을 아버님이 알면 어찌 생각할까."
슈리엘이 말도 못하고 얼굴만 붉히고 있자 이상하게도 심기가 불편해졌다. 또. 내가 평민이라서. 그가 모욕을 당하는 거구나. 동시에, 그가 나를 위해 분노한 것처럼, 나 또한 그를 위해 분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탁 소리 나게 포크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로드 루셸리니. 서부가 살아가는 법을 아십니까."
무례였고, 결례였다. 하지만 시선을 모으기엔 더할나위 없었다. 하이라크의 눈이 이쪽을 향한다.
"당장 입에 풀칠하기도 벅차, 미래를 끌어 써 현재를 만족하는 곳이 바로 서부입니다. 은화 하나는커녕 동화 다섯 푼만 쥐여줘도 자기 혈육의 목에 칼을 꽂아넣는 게 서부란 말입니다. 제가 그동안 지낸 곳이라곤 그런 야만적인 곳밖에 없으니 귀족들의 사정을 모르는 건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로드 루셸리니, 제가 그곳에서 배운 게 딱 한 가지 있었습니다."
하이라크는 말이 없었다. 그는 어디 지껄여보라는 듯 침묵을 고수했다. 나는 그 시선에 주눅들지않고 말을 이어갔다.
"주제 파악입니다. 저는 제 주제를 압니다. 제가 루셸리니의 대행자와 고작 하룻밤을 지새웠다고뭐라도 된 듯 으스대겠습니까. 대행자께서 저를 취한 건 군것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러니 로드 루셸리니, 공께서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만약. 명령하신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배를 가르겠습니다. 저는 천한 평민인데요.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말을 끝낸 나는 싱긋 웃으며 다시 포크를 쥐었다. 식어 냄새가 빠진 고기 요리를 접시에 담는다. 맛있었다.
"하."
넋 나간 웃음소리가 테이블 위를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