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루셸리니 (5)
시간을 되짚어 돌아가 보면, 내 감정이 유독 다채로워진 건 5일 전쯤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웠는데… 지금은 사소한 일에도 자주 웃는다. 삶이 무료해 진지하게 자살만 생각했던 나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평범한 소녀만 남아있었다.
임신 때문일까. 산부에게 나타나는 증상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강렬히 체감되는 증세가 하나 있었다. 감정의 기복.임신을 하면 감정 기복이 심해진다고 한다. 세례의 장에서 흉하게 몸을 떨었던 것도, 진정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이 터져 나온 것도 모두. 겁 없이 생명을 품은 자에게 내린 천벌이요 축복이었다.
아직 부르지 않은 배를 쓰다듬으며 생각한다. 몸을 내던지지 않고서는 어떤 것도 느낄 수 없던 나였기에. 더 크게 와 닿은 것일 수도 있다. 사소한 것에 웃고, 울게 해주며, 파멸과 고통 말고는 존재 의미가 없는 몸뚱어리에 생명이라는 가치를 새겨준 소중한 내 아이.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지만 극도로 흥분해 있었다.
당연히. 나도 처음엔 남자였던, 아니. 사람인 만큼 임신은 두렵기만 했다. 그래서 피임도 확실하게 했고. 고통과 파멸 속에 살아가던 내게 갑자기 아이라니. 과거의 나였다면 면전에 엿 날리고 파이어볼을 갈겼을 거다. 그런데. 비록 실수였지만. 막상 아이를 가지고 나니 두렵지만은 않았다. 모성애? 아니면 단순 정신병? 무엇이든 상관없다. 언제 또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신전에다녀왔다고…?"
"슈리엘. 열어보세요."
슈리엘은 봉투에 작게 그려진 푸른 물병을 보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선물을 사러 가겠다더니 신전을 다녀와? 그것도 검소, 베풂이 신조인 성류회의 신전에? 성류회는 기념품 따위를 팔지 않았다. 그들은 신도들이 자발적으로 내는 헌금에만 의존했다. 성황청이 인정한 3대 종파인 만큼 신도는 많아 돈 걱정은 없었지만, 아무튼. 나랑은 상관없는 이야기.
"빨리."
나는 그의 옷자락을 당기며 재촉했다.
과정이 어떻든 이 아이는 너의 씨앗이니 네 얼굴 보기가 부끄럽구나. 봉투를 들고 망설이는 슈리엘을 보자 애간장이 탔다. 얼굴이 조금씩 붉게 물들어간다. 창피함은 아니었다. 슈리엘이 어떤 말을 할지 몰라서. 자꾸만, 손발이 쪼그라드는 오글거리는 대사가 생각나서….
결혼할 생각은 없지만, 갑자기 청혼이라도 하면 곤란했다. 내가 어디 속박될 사람은 아니거든. 무릎이라도 꿇으면 어떡하지. 그, 그래도….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는 같이… 있어 주는 것도….
그 순간.
-찌익.
봉투가 찢겼다. 정신이 바짝 든다. 별것 아닌 일인데도 입이 말랐다. 슈리엘은 열린 봉투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조심스럽게 종이를 꺼냈다. 반으로 접혀있는 누런 종이는 살짝 벌려진 틈새로 하얀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는 찢어진 종이봉투를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고, 양손으로 종이를 들어 천천히 펼쳐보았다.
"루셸리니 령, 제 2지구 신전 부신관 셰멜…."
"…."
"탄생의… 축복을… 내림."
한글자 한글자. 속 내용이 읽혀갈 때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발밑에서 올라오는 열기는 점점 몸을 기어오더니 머리끝까지 퍼졌다. 몸이 뜨겁다. 흥분됐다. 성적 흥분은 아니다. 뭐라고 할까, 이 열기는 일종의 기대감이었다. 그때, 슈리엘의 눈동자가 종이 한가운데를 향했다. 신전 공용 기호가 그려진 부분.
동그라미 속 점은.
하나였다.
"…도련님."
"너…."
"저, 임신했어요."
슈리엘은 점 하나 그려진 종이에 얼굴을 처박곤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충격받았겠지. 나도 안다. 하물며 네 아이라는데. 그리고, 두 줄 뜬 임테기를 들고 달려오는 여자가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일 거다. 이해한다.
"…."
"후흐흐…"
웃는다.
나는 저 흔들리는 눈동자가 마냥 재밌기만 했다.
"…언제부터지?"
"2주. 2주에요."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슈리엘 앞에서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럴수록 그에게서 떠나가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철없는 아이처럼 방방 뛰었다. 이름은 뭐로 할지. 어떻게 키울지. 무슨 옷을 입히고 무엇을 가르칠지. 고작 2주밖에 안 된 아이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상상했다.
솔직히. 나도 모르겠다. 왜 이렇게 아이에게 집착하는지. 지금도, 시간이 지날수록 집착은 심해지고 있다. 하아. 어쩌면, 나는 대리 만족을 원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내가 누리지 못한 행복을 아이가 대신 받는 것으로 만족하는, 아이에게 나를 투영시키려는, 어찌 보면 조금 더러운 욕망에서 기인한 집착일지도 몰랐다. 이건 아이를 소유물로 본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러나.
제 역할을 다하면 버리는 소유물로 대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설령 내 아이가 나를 증오한다 해도. 나는 사랑으로 보듬어주리라. 나는 횡설수설하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축복, 받았어요. 아이는 무사하대요."
"…계획은 있나?"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이를 가진 적은 처음이라…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지우고 싶진 않아요."
그런데.
"유진."
"으, 네?"
반응이… 영, 좋지가않았다.
종이를 접어 품에 넣은 슈리엘은 내 손을 잡고 외진 곳으로 향했다. 백작저의 구석, 조그마한 분수대와 미로 정원이 딸린 작지만 아름다운 곳이었다. 분수대에서 튄 물방울이 저녁노을을 받아 보석 같이 빛난다. 나는 시원한 바람 속에서, 잘 관리된 풀 내음을 맡으며 미로 안으로 향했다.
"슈,슈리. 엘?"
"쉿."
이상, 했다.
"…유진. 너와 나 말고 또 누가 이 사실을 알지?"
"으 에, 예?"
"하아…. 미안하다. 당황해서 말이 헛나왔다."
머리를 박박 긁은 슈리엘은 잘린 고목에 앉아 두서없이 말을 이어갔다.
"피임… 은, 하지 않은 건가? 약을, 먹었다든가."
"아, 아니에요. 했어요. 저, 정말. 정말이에요."
"…."
"그, 그게. 그러니, 까. 야, 약은 안 먹었, 는데에…"
아… 젠장. 쓸데없이 감정적이게 되어서는. 충분히 이성적으로 대화할 수 있음에도 눈물이 핑 돌았다. 왜 우는 거야. 슈리엘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잖아.
나는. 그가 좋아할 줄 알았다. 날 속박할 명분이 생겼다며, 오히려 협박하려 들 줄 알았다. 그랬다면. 나도 어울려줬을 텐데. 차마 아이를 다치게 할 수는 없어 자궁을 두드리는 난폭한 섹스까지는 아니더라도,어, 엉덩이로 하든가, 입으로 해준다든가. 아이를 지키며 할 수 있는 플레이는 많았다. 솔직히, 내가 변태라서 그런지 임신하면 그것밖에 안 떠올랐다.
나는 슈리엘의 반응이 당황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안에 싸지르고 마개를 끼운 건? 마차에서 그렇게 나한테 박아댔던 건? 전부 나 임신시키려는 거 아니었어? 억울했다.
슈리엘은 찔끔 흐르는 눈물을 보더니 크게 당황하며 날 진정시키려 들었다. 역효과였다. 그럴수록 감정은 격해지기만 했다. 그는 내가 말도 못하고 눈물만 방울방울 흘리자, 그런 의미가 아니라며 손수 눈물을 닦아주었다.
"의미가 왜곡 되었음을 인정한다. 사과하지. 그러니 울지 마라 유진. 내가 탑에서 했던 말, 기억하나?"
"…책임. 진다고 하셨, 습니다.."
"그래. 난 네편이다."
"…예."
"단지, 놀랐을 뿐이다. 나는… 네가 아이엔 관심이 없는 줄 알았다."
그는 내가 당연히 피임을 한 줄 알았단다. 당하는 걸 즐기는 것과 아이를 가지는 건 다른 얘기니까. 이 세상은 낙태를 쉽게 생각한다. 실제로도 쉬웠고. 마법을 쓰거나, 신전에서 없애버리거나. 굳이 부작용 있는 약을 먹을 필요도 없었다. 이 세상은 태어나지도 않을 아이를 걱정하기엔 삶이 너무 각박했다. 결정적으로 난 마법사였다. 마법추구와 아이를 저울질시키면 마법을 택하는 놈들. 아이가 생겼다 해도 바로 지워버릴 줄 알았던 거겠지.
"저도 피임은 합니다. 헌데, 제 아랫도리에 마개를 끼우시고도 안 생길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다만.
그런 짓을 해놓고서.
…이제와서 변명이라니.
"…."
"방계가 두려우십니까?"
귀족들은 아이 문제에 무척 민감하다. 방계. 휘어버린 가지가 생길 수 있다. 올곧게 뻗은 가지와 달리, 휜 가지는 나무에 무게만 더해 성장을 더디게 만든다. 휜 가지를 쳐내려면 어찌 됐든 혈족을 죽여야 하니 비난을 피할 수도 없다. 물론, 내가 귀족이라면 문제는 없겠지. 하지만 나는 평민이다.
"제가 권력을 원해 아이를 지우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은 아이의 '정당성'을 핑계로 권력을 요구하는 것. 너희의 피를 이었으니. 너희의 이름을 이었으니. 걸맞은 권력을 달라. 눈치 빠른 방계는 조용히 살아가지만, 수십 수백 년씩 대를 이어나가면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나는."
그러니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네가 해코지 당할까 두렵다."
조짐이 보이기만 해도 싹을 쳐내는 수밖에.
"하이라크가 이 사실을 알면 널 죽이려 들 거다."
"……."
"일단은 숨겨라. 때가 좋지 않으니."
슈리엘은 날 껴안곤 한참을 토닥거리더니, 곧 눈물이 멎자 품에서 떼어놓았다. 그는 착잡한 얼굴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붉은 머릿결이 슈리엘의 손에 걸려 삐죽 튀어나온다.
"돌아가자. 상황 정리도 얼추 끝났으니, 식사 정도는 대접할 수 있겠지."
"…예."
"아버지는 삼 일 뒤 돌아온다고 했으니… 그 전에 대책을 물색해보겠다."
나는 우울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슈리엘도. 아이는 처음이었다. 서로가 미숙하니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냥, 너무 쉽게 생각했었던 것 같았다.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에 기뻐할 사람만 있는 건 아니라는 걸. 봉투에 종이를 담을 때까지만 해도 설레는 마음밖에 없었는데, 현실을 마주 보니 가시밭 투성이었다. 그랬었지. 이 세상은 원래 이랬어. 잊고 있던 속삭임.
나는 환영받지 못했다.
* * *
"고마워요. 칼버드."
"무얼."
나는 칼버드에게 몇 가지 짐을 맡기곤 배정된 방에 들어갔다. 내게 배정된 방은 백작저 3층, 구석진 자리에 있는 임시 체류자용 방이었다. 귀빈용보다는 낮고, 하녀들이 쓰는 숙소보다는 나은 방. 참고인이라는 신분에 딱 맞는 방이었다.
그렇다고 방의 질이 낮은 건 아니었다. 여긴 백작가였다. 벽지와 바닥 재질만 해도 평민들은 꿈도 못 꿀 재료다. 가구들도 온통 고급품으로 도배되어있었고…. 내가 배정받은 방 역시 나 혼자 쓰기엔 과하게 넓고, 고급스러웠다. 귀족 영애나 쓸 법한 침대에 누워 숨을 돌리니 다른 세계에 온 느낌이었다. 아. 다른 세계 맞지.
성황청으로 떠나기 3일 전.
나는 이곳에서 참고인의 신분으로 '대접' 받아야 했다. 내가 평민인 만큼 고개는 못 숙이더라도 최소한의 보답은 해줘야 한다는 슈리엘의 의사 표명 덕이었다.
'루셸리니의 첫 번째 가지'라 불리는 슈리엘의 형 또한 볼 수있었다. 하이라크 루셸리니. 완벽한 예법을 선보이니 슈리엘처럼 놀라더라. 그의 별명이 철혈공자라 했나. 살벌한 별명과는 다르게 슈리엘보다 키가 작고, 여리여리했다. 눈동자가 맑은 건 집안 이력인지 똑같았다. 물론 슈리엘에 비해 키가 작다는 거지 남자 중에서도 훤칠한 키였다. 슈리엘과 달리 결혼했다고 들었는데… 부인은 보이지 않았다. 식사 시간이 되면 만날 수 있으려나.
그보다.
"하아…."
애. 어떡하지.
나는 철저히 포커페이스를 연기했다. 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은 슈리엘을 빼면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방심해선 안 된다. 하이라크가 가주의 뜻을 대변하는 만큼, 임신 사실을 알면 내게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른다. 설상가상으로, 슈리엘은 나와 잠시 거리를 두겠다고 하였다. 어쩔 수 없다. 붙어먹다 하이라크한테 오해라도 사면 곧바로 눈치 게임 시작이다.
이제 나는 혼자가 되었다.
아니, 뱃속에 아이가 있으니 둘이려나.
"…."
애써 스스로를 위로하려 해도, 우울감은 끝을 모르고 치솟기 시작했다. 우울했다. 여관에 처박혀 일주일 동안 자해만 했던 시절이 떠오른다. 슈리엘이 있는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속이 답답했다. 슈리엘이 가문을 지고 완전히 내 편을 들어주었다면. 이런 생각도 들었다.
….
숨이 가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