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9화 〉루셸리니 (4) (69/193)



〈 69화 〉루셸리니 (4)

뭐라도 말하고 싶었다. 뭐라도 말해서, 이 복잡한 기분을 표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의 감정은 너무나 어려워서. 아크 메이지의 머리로도   없는 난제 중의 난제여서. 어떻게든 말로  길이 없어서. 뱃속에서  생명이 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으니. 말문이 막혀서. 그냥. 그냥…

………


……

…안 죽었구나.

칼날 같은 손톱에 가슴이 뚫리고, 초근거리 폭발에 휘말리기까지 했는데.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고? 지금까지? 사람이 너무 놀라면 소리 지르거나 몸을 떨지 않는다. 경직. 경직뿐이다. 충격에 신음조차 못 낸다. 숨이 멎을 듯한 어지러움이 몰려온다.


지금 내가 그랬다.


"차라도 드시겠습니까."


셰멜은 이런 반응이 익숙한지 능숙하게 상황 정리를 했다. 그녀는 축복을 내리는 부신관. 이런 일을 수도 없이 반복해 왔을 거다. 그런 그녀에게 임신 사실에 충격받고 허둥대는 사람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셰멜은 단아한 찬장을 열어 식물 뿌리가 가득 담긴 물병을 꺼내 들었다. 그녀가 직접 만든 차였다.

쪼르륵. 무색 찻잔에 샛노란 물이 따라진다. 생강차 비스름한 냄새가 났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잔을 들어 차를 들이켰다. 쓰고, 더럽게 맛이 없었다. 그래도 꾸역꾸역 목구멍에 집어넣었다. 사실, 잔에 뭐가 따라졌든 일단 들이켰을 것 같았다. 목구멍에 따듯한 액체가 넘어가니 머리가 조금 맑아진 기분이 들었다.


"자매님은 동부 사람이 아니군요."

셰멜은 비어버린 잔을 채우며 되물었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들이켰다. 여전히 맛대가리 없는 차였다. 그런데도 계속 손이 갔다. 마실수록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어서, 손을 멈출 수 없었다. 한 번 긴장이 완화된 몸은 보기 흉할 정도로 덜덜 떨리더니 힘이 주욱 빠져버렸다.


셰멜은 역시, 라는 추임새를 뱉으며 쓰러지려는 나를 부축해 의자에 앉혀놓았다.

"마탑에서 내려온 모험가십니까?"
"…마법사도 맞고, 모험가도 맞지만 마탑 소속은 아니에요."
"모험가… 그럴 줄 알았습니다. 동부에서는 맡을 수 없는 전장의 냄새가 났거든요. 꽤 짙은 향이었습니다."
"…예."


펑펑 운 것도 아니고, 잠에서 막 깨어난 것도 아닌데 깊은 수심에 가라앉은 목소리가 나왔다. 쪼르륵. 차가 물줄기를 그리며 내려온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잔을 집어 차를 마시려 했다. 그때, 셰멜은 검지를 들어 내 손을 막았다. 나는 그대로 멍하니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막 파동이 잦아들어 잔잔해진 수면 위로, 공황에 빠진  모습이 흐릿하게 비추어졌다.


셰멜은 찻잔을 멀리 치워버리곤 손을 꼬옥 쥐었다. 따듯했다. 수많은 신도를 올곧은 길로 이끈, 인도자의 이력이 고스란히 담긴 온기가 손을 타고 올라온다. 신성력의 전개로 하얗게 물든 셰멜의 눈동자가 본래의 자주색으로 돌아온다. 그녀는 성물에서, 다시 인간으로 돌아왔다.  성스러운 자태에서, 나를 인간  인간으로 대해주겠다는 굳센 의지가 느껴졌다.


"저는 이곳에 배정받기  서부에서 일했습니다. 모험가들이 많은 도시였죠. 그들은 가난하고, 늘 상처를 달고 살며, 그러면서도 감당할 수 없는 위험을 좇곤 합니다. 손가락질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저도 압니다. 무릇 모험가란 위험을 좇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존재라는 걸요."


"……."


"저는 그곳에서 많은 이들을 보았습니다. 죽은 동료를 들고 제게 살려달라는 자도 있었고, 죽을병에 걸려 가망이 없는데도 매달려 애원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믿었던 동료에게 무참하게 강간당해, 어딘가 망가진 얼굴로 찾아온 여성 모험가도 있었지요."

"셰, 멜."

"하지만 자매님.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이 아팠던 건, 괴물에게 범해져 그것들의 아이를 품었음에도 포기하지 않는 이들이었습니다. 자신의 뱃속에 괴물의 씨가 있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 버티고 버티고 버티다가. 끝내 인간이 아닌 아이를 낳았을 때. 충격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여성 모험가들을 수도 없이 보았습니다."


"아니, 에요. 아니. 아니에요."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아 황급히 말을 끊는다. 서부. 외팔이. 모험가. 임신. 네 가지 키워드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오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디 외진 곳에서 몬스터에게 강간이라도 당한 것이라 생각한 걸까.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엔 슬픔이 가득했다. 아니 뭐, 몬스터한테 강간당한 적은 있지만… 지금 생긴 아이는 시간을 생각하면 무조건 슈리엘의 아이일 것이다.


"괴물의 아이라면 돈을 받지 않고 지워드리겠습니다."
"…그이는 괴물이 아니에요."

음. 슈리엘 자지가 괴물처럼 크긴 하지. 몸이 진정 되자 실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셰멜은 태연해 보이는 나를 조용히 응시하더니, 한쪽 눈을 찡그리며 재차 되물었다.


"다시 말하겠습니다. 괴물의 아이라면, 돈을 받지 않고 지워드리겠습니다. 신의 이름에 맹세코, 이를 발설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세멜은 묻고 있었다. '괴물'의 아이를 가진  아니냐고. 그녀는 덩치 크고 못생긴 고블린, 오크 따위를 말하는  아니었다. 인간을 말하고 있었다. 괴물보다 더 괴물 같은 인간들. 인간이기를 포기한 인간들. 그들은 일상 속에 녹아들어 그림자처럼 다가오니 더욱 위험했다.


"괜찮아요. 몬스터 따위도 아니고… 그리고 저도 좋아서 한 일이니 염려 마세요."
"……."
"프흐. 정말이에요."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온 나는 배시시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슈리엘은… 흐. 괴물 같긴 해도 보고 당하는 맛이 있어서 말이야. 곁에 있기만 해도 재밌는 인간이다. 오히려, 괴물이 될 때가 기대된다고 할까. 그의 얼굴을 생각하자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멍청해.

이런 나를.
마법사의 이성이 멍청하다며 비웃었다. 마법사답게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행동해라. 그깟 고깃덩어리, 그냥 지워버려라. 비이성적인 행동마저 합리적이지 못한 나를 비웃는다. 분명, 아이를 지우는 건 합리적인 선택일 것이다. 포기한다 해도 탓할 사람도 없었다. 슈리엘은 내가 피임을 확실하게  줄 안다. 마법사니까. 그러니 지금 없애버리면 셰멜을 제외한 누구도 알지 못한다.


"자매, 님."
"…괜찮아요."


그래도. 아이를 지울 생각은 없다. 멋대로 만들고 멋대로 죽이면 그게 살인자랑 뭐가 다르단 말인가. 그리고 아이를 낳게 된다면… 미안하다는  한 번 정도는 하고 싶었다.

"고마워요 셰멜. 돈은 얼마나 드리면 될까요?"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는 돈주머니를 꺼내어 셰멜에게 보여주었다. 슈리엘이 손수건과 함께 챙겨준 상당량의 돈이었다. 셰멜은 돈주머니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주머니 안의 돈은 못해도 50 실버는 되어 보였다. 일개 외팔이 모험가가 가지고 있는 돈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의 돈이었다.

"…원래라면 은화 열 개를 받아야 합니다만."
"받으세요. 사양하지는 마시고."
"…."


할  가득해 보이는 표정을 무시하고 돈을 쥐여준다. 사제보다는 전사가 생각나는 거친 손바닥 위로 동전을 차례차례 쌓아올린다. 그녀는 내 정체가 퍽 궁금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의 사정을 묻지 않았던 것처럼 셰멜도 나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돈을 쥐여주고 개운한 표정으로 주머니를 집어넣었다.


그런데. 그냥 가기가 조금 아쉬웠다. 임신 여부를 확인한다는 목표는 이뤘지만…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약속한 게 있었다. 그래, 선물. 선물을 가져가겠다고 했지. 슈리엘을 골탕먹일 선물을….

"셰멜."
"예?"
"혹시  부탁 좀 들어줄  있나요?"

나는 셰멜에게 부탁했다. 임신 사실을 종이에 기록해 도장을 찍어줄 수 있느냐고. 성류회의 상징인 푸른 물병. 맨입으로 하면 안 믿을 것 같아서다. 셰멜은 흔쾌히 청을 들어주었다. 대신, 도장이 아니라 신성력으로 각인시켜주겠단다. 아무래도 사적인 일로 도장까지 쓰기는 좀 그렇다나 뭐라나.


서랍에서 작은 종이  장을 꺼낸다. 종이를 꺼낸 셰멜은 손끝에 신성력을 모았다. 검지가 하얗게 빛이 난다. 그녀는 손가락을 연필처럼 휘갈겨 자신의 이름을 넣었다. '루셸리니 령 제 2지구 신전 부신관 셰멜. 탄생의 축복을 내림.' 살짝 빛이 바래 퍼석퍼석해 보이는 종이 위로 성스러운 빛이 새겨진다. 셰멜은 마지막으로, 기호 하나를 그렸다. 동그라미 안에 점 하나를 찍은 간단한 기호였다.

"이건…?"
"신전 공용 기호입니다."

셰멜은 동그라미 안에 점이 몇 개가 있는지에 따라 의미하는 바가 달라진다 한다. 점 하나는 정상적 임신, 점 두 개는 유산, 점 세 개는 인간이 아닌 것. 별개로 X를 새겨넣을 때도 있다고 하는데, 이는 낙태를 뜻했다. 나는 점이 하나였다.


"감사… 합니다."
"…앞으로도, 신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다. 종이를 받아 들고 신전을 나왔다. 저녁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기분이 몹시 싱숭생숭했다. 임테기에서 두 줄 나온 여자들이 이런 심정이려나. 얼떨떨하면서도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슈리엘이 이걸 보면 무슨 반응을 할까. 나도 이렇게나 놀랐는데….

'선물 가져갈 테니 기대하고 있어….'


종이가 구겨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품에 넣는다.














* * *

지난  달간 저택의 분위기는 밑바닥을 기었다. 하인들은 가주의 눈치를 보기 바빴고, 식사 시간이 되어 모든 가족이 한자리에 모일 때면 싸늘한 침묵만 흘렀다. 그리고 그 침묵은, 테이블의 한 자리가 비어 있어 유독 가깝게 느껴졌다. 슈리엘 루셸리니. 성황청과 게약한 루셀리니의 아홉 번째 대행자. 그가 탑에 고립되었다.

당연히 손가락만 빨고 있지만은 않았다. 슈리엘을 구하기 위해, 아니 시체라도 건지기 위해 탑에 여러 차례 구원대를 편성했다. 그러나 모두 대차게 실패했다. 가주는 크게 분노했다. 슈리엘의 호위 기사였던 칼버드는 목이 잘리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걸고 구해내겠습니다."라는   반복해야 했다.

그런데.

그런 놈이.


제 발로 살아 돌아와서 들어와서 하는 말이.


"탑을 조사하라는 임무는 완료했어. 보고서 사본은 집무실에 넣어놨으니 알아서 확인하도록 해."
"너는."
"…뭐가?"
"너는, 돌아와서 하는 말이. 고작…."


백작가 장남, 차기 가주, 철혈공자 등으로 불리는 하이라크 루셸리니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곤 타는 속을 진정시켰다. 실눈을 뜨고 칼버드에게 시선을 돌린다. 칼버드는 면목없다며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너 때문에 얼마나 큰 손해를 봤는지 알고는 있긴 한 것이냐?"
"난 구해달란  없었어."
"하아…."
"그리고 고작 이딴 말 하려고 부른  아니잖아. 아버지는 어디 가고?"
"…대회의에 출석하러 성황청으로 가셨다."

슈리엘이  보고서는 읽어보았다. 온갖 함정이 가득한 55층의 탑. 모든 마법을 무력화시키는 추방 진언. 오러를 찢어발기는 악마의 존재. 그중 하나만 있어도 성황청이 거품을 무는 것들이 세 개나 껴있는데, 심지어 악마가 두 마리라고 한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 돌아온 거냐.

각설한 하이라크는 본론을 꺼내 들었다.

"보고서는 읽어보았다."
"그래서?"
"조력자는 어디 있지? 같이 오지 않은 건가?"


칼버드는 공략 도중 내려왔다고 하니 보고서에 쓰인 '조력자'는 아닐 것이다. 헌데, 슈리엘은 아직 때가 아니라며 말하기를 거부했다. 하이라크는 미심쩍었지만  따지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회의에 출석한 아버지를 대신해 할 일이 많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삼 일 뒤, 아버님이 돌아오고 나서부터 하겠다."
"알겠어."


그렇게, 슈리엘이 대충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도련님. 손님이 왔습니다."
"누구야?"


시종 하나가 다가왔다. 그는 손에 익숙해 보이는 손수건 하나를 들고 있었다. 슈리엘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 루셸리니 가의 인장이 새겨져있는 손수건. 자신이 유진에게 건넸던 손수건이었다.


"왔구나."
"…누가?"
"알 필요 없어."

하이라크는 싹수없는 대답에 무어라 반응하지 않고 집무실로 발을 돌렸다. 이런 관계는 익숙하니까. 한  넘는  시간 만에 재회한 형제의 대화치고는 썩 달가워 보이진 않았다.

"이봐! 그만 물러나도록!"


슈리엘은 자기가 직접 가겠다며 칼버드를 포함한 모든 사용인을 물렸다.

"유진!"


저택을 나가 입구에 도달하자 너머에 멀뚱멀뚱 서 있는 유진을 발견했다. 슈리엘은 활짝 웃으며 한달음에 달려갔다. 하하…. 정말이지, 많이 늦었다. 돌아올 거라 확신하고 있으면서도 얼마나 애가 탔던지. 문을 열고 유진을 반긴다. 꼭 껴안고 싶은 충동을 겨우겨우 억누른다. 지금 해후를 풀기엔 아직 일렀다.

"자, 잠깐만요."


유진은 옆에 딱 붙어 떨어지지 않으려는 슈리엘을 밀어내고, 품속에서 밀랍으로 밀봉된 봉투 하나를 꺼내 들었다. 슈리엘의 고개가 기울어진다.


"이건?"

슈리엘이 종이봉투를 건네받자, 유진은 상기된 얼굴로 작게 속삭였다.

"선물이에요."
"…."


그때. 슈리엘의 본능이 소리쳤다. 불길했다.  봉투는 절대로 열면 안 된다고. 왜인지 모르게. 그렇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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