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루셸리니 (3)
종소리를 따라 걸어간 루셸리니의 길은, 슈리엘이 장황하게 늘어놓은 가문의 이력이 결코 헛된 말이 아님을 증명해주었다. 쌓아올린 역사의 산물. 건물의 아름다움이나 도시 특유의 성스러움을 묘사하려면 입이 부족할 정도다. 특히나, 모험가의 부재가 크게 느껴졌다. 점심만 되면 침 찍찍 뱉으며 주점을 찾는 모험가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건 루셸리니 뿐만 아니라 동부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모험가가 없는 거리란, 이리도 순수한 것이었나.
바닥에 물을 뿌리는 빵집 아저씨. 꽃을 들고 호객 행위를 하는 아가씨. 얼굴에 흙 잔뜩 묻히고 대로를 뛰노니는 개구쟁이 아이들. 스쳐 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평온 그 자체였다. '모험가'라는 놈들이 빠진 것만으로 도시의 분위기가 이렇게나 차이가 났다.
조금 잔인한 말이지만, 이리 봐도 저리 봐도 모험가는 하등 쓸모가 없는 존재였다. 평범한 병사들로는 불가능한― 전문적 인력이 필요한 일은 C급 이상 모험가나 마탑, 용병을 쓰지 모험가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D~F급을 쓰진 않는다. 그들은 약초 채집, 혹은 하수구 처리나 쥐 떼 처리같은 '더러운 일'이 아니면 잘 불리지 않는다.
슬프게도, 동부는 이마저도 필요 없었다. 목숨 걸고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 살기 위해 '더러운 일'을 할 필요도 없다. 굳이 칼을 쥐지 않아도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동부다. 그리고 제국의 심장 탈레온과 마魔로부터 인류를 수호하는 성황청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누가 동부를 건들까. 당장 몬스터로 인한 피해를 비교해보면 동부가 압도적으로 적었다.
당연하게도.
이런 꿀 발린 땅을 모두가 쓸 수는 없다는 건 백치도 알 것이다. 평화. 평화가 가져다주는 심리적 만족감은 그 무엇과 비교해도 저울질할 수 없으니까.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지 못하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데. 한마디로, 동부는 물가가 미치도록 높았다. 임대료, 땅값은 물론이고 생필품마저도.
동부는 돈이 있는 자들을 위한 땅.
서부 사람들에겐 꿈처럼 다가오는 별천지 세계였다.
반대로.
외팔이 모험가인 나도 저들에게 별천지로 다가갔다. 한쪽 팔을 잃은 여자애라니? 장애인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동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종류는 아니었다. 왜? 상처를 이 지경이 될 정도로 내버려둔단 말인가? 아니면 몬스터에게 습격이라도 받은 건가? 이 동부에서? 가뜩이나 치료소도 널렸는데, 보호자는 뭘 하고 있단 말인가? 다치면 치료받는 게 당연한 저들에게 전투의 후유증은 어색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다만, 동정과 연민이 대다수일 뿐 경멸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모험가라고는 생각하진 못하는 걸까. 하기사 프릴치마랑 가터벨트를 입고 돌아다니는 모험가가 몇이나 된다고. 내가 생각해도 많이 컬트적인 복장이었다. 온갖 복장이 통용되는 판타지 세계라 다행이지, 지구였다면 코스프레 취급당할 거다.
로브 두르고 올 걸 그랬나.
나는 시선이 부담스럽기만 했다.
-대앵… 대앵…
그때. 크게 종소리가 울렸다. 오후 3시를 알리는 종소리였다. 40분을 내리 걸어서 그런지 꽤 가까이서 들렸다. 나는 종소리에 의지해 발을 바삐 놀렸다. 길이 명료하게 깔려 헤매는 일은 없었다.
* * *
높이 솟은 종탑의 주인은 예상대로 신전이 맞았다. 신전은 가톨릭 교회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모습이었다. 판타지답게 개조된 느낌이라고 할까. 부지 하나를 통째로 잡아먹은 신전은 땅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커다랗고, 웅장했다. 하지만, 웅장한 모습과 다르게 장식은 많지 않았다. 이곳은 성류회聖流會의 신전이었으니까. 그들에게 신을 섬기는 것은 물이 흐르는 것과 당연한 것. 고로 화려한 장식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기도할 땅과 신을 기릴 건물만 있으면 되었다. 그렇기에 성류聖流다.
"……."
성류고 자시고… 들어갈 수 있는 거 맞나. 신전 입구엔 수백이 넘는 인파가 몰려 줄을 서고 있었다. 하아. 근처 사람을 잡아 물어보니 예배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됐단다. 굳이 비집고 들어가기 싫었던 나는 근처 의자에 앉아 예배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어차피 슈리엘도 더 머물다 오라고 했으니…
두 시간 후. 예배는 끝이 났다. 사람이 더 빠지기를 기다리니 벌써 초저녁. 그렇게 사람이 빠지고, 촌놈처럼 입구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자니 신전 관계자로 보이는 여사제 한 명이 다가왔다. 펑퍼짐한 사제복을 입은 백발의 그녀는 나를 '자매님' 이라 부르더니 거리낌 없이 말을 걸었다.
"신전을 찾아오셨나요?"
"…."
심신을 안정시키는 고운 목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나는 반사적으로 주변에 듣는 사람이 있는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으음. 밖에서 말할 주제는 아닌 거 같은데. 여사제는 묘하게 불안해하는 내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텅 비어 옷자락만 나풀거리는 오른팔을 보자 충격을 받은 듯 화들짝 놀랐다.
"아…!"
상처를 보고 놀라는 게 무례하다는 것 정도는 아는 걸까. 황급히 고개를 숙인 그녀는 내게 수차례 사과를 건넸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상처에 익숙하지가 않아서…"
고개를 숙이고 식은땀만 뻘뻘 흘리던 여사제는 내가 괜찮다며 손짓하자 그제야 얼굴을 들었다. 이정도야 뭘. 곧바로 사과했다는 점에서 상위 1% 인성이다. 그녀는 내가 사과를 받자, 활짝 웃더니 손을 내밀었다. 손등에 푸른 물병이 새겨진 하얀 가죽 장갑이 보인다.
"성류회에 어서 오세요! 신도 등록을 하시려면 입구로 들어가셔서 오른쪽으로 빠지시면 된답니다!"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신도 등록 따위를 하려 이곳에 온 게 아니다. 축복을 받으러 왔다. 산부에게만 내려진다는 탄생의 축복. 축복이 내려지지 않는다면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돌아가면 된다. 하지만… 만약, 축복이 내려진다면…. 아니야. 지금 생각하지 말자. 그리 결심한 나는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애 가진 게 죄도 아니고. 애초에 축복이다. 축복받으면 좋은 거지 뭐.
"축복을… 받으러 왔습니다."
"아! 축복! 그렇군요! 혹시, 무슨 축복을…"
"…탄생의 축복입니다."
"네! 탄생의 축복… 므, 뭐… 네?"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녀의 눈은 쓸데없이 정직해 어디를 보고 있는지 훤히 보였다. 첫 번째 시선은 텅 빈 오른팔로, 두 번째 시선은 내 하복부에. 마지막 세 번째 시선은 둘 곳이 없는지 이리저리 흔들렸다. 탄생의 축복은 임산부에게만 적용되는 축복. 그래서인지 임신 여부를 확인하는 용도로도 많이 쓰였다. 축복 자체가 가격이 비싸서 자주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여기는 동부다. 아무래도 좋았다.
"저, 정말인가요?"
얼굴이 새하얗게 물든 그녀가 쥐꼬리만 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키 152cm의 조그마한 미소녀. 섹스가 뭔지도 모를 것처럼 순수하게 생긴 여자애가 탄생의 축복을 받으러 왔다니 놀란 것이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스레 미안해졌다. 내가 변태라서 그런가. 하긴 최근 보지를 헤프게 쓰긴 했지. 마차 이동 시간의 절반을 섹스하는 데 썼으니…. 하으. 생각하니 또 두근거리네. 복합적인 이유로 부끄러움을 느낀 나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축복은 신전 뒤편 세례의 장에서 받으실 수 있어요오…."
"고맙습니다."
"혹시, 나… 남편분은…."
"…."
근 한 달간 안에 싸지른 남자는 그놈밖에 없으니, 아이를 가진다면 남편은 분명 슈리엘… 씨발. 진짜 같이 살아야 하나. 육체와 정신을 하나 더 만들고 육아를 떠넘겨버리는 건? 기각한다. 카피 에고는 더 만들지 않으리라 맹세했다. 그리고… 그건 아이한테 너무 잔인한 처사잖아. 아, 음? 잠깐만. 내가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했더라. 나답지 않았다. 그렇게 말을 잇지 못하고 망설이기만 할 때였다.
"저, 저기!"
덥석! 차갑지만 너머로 온기가 느껴지는 가죽 장갑이 손을 감싼다. 그녀는 물기로 촉촉해진 눈망울을 들이대며 나를 이끌었다.
"제가 무슨 말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 아이를 낳기 전 수도원에 의탁하는 방법도 있어요. 저희 교구가 운영하는 수도원인데… 임신했다고 자매님을 내치진 않으니 염려하지 마세요."
나보고 수녀라 되라고…? 차라리 날 죽여라. 방에 처박혀 기도하며 빨래나 하는 삶을 살 바엔 죽는 게 나았다. 진심으로. 딱히 수녀수사님을 비하하는 게 아니다. 내 성격이랑 안 맞아서 그렇지.
"…됐습니다."
"그럼 안내라도오…."
순수한 호의. 역시 종교인인가. 성류회의 사람들은 교리에 따라 검소하게 살며 베풀기를 좋아한다 했는데, 어느 정도 맞는 말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내 겉모습만 보면 장애인 미혼모 문제라 종교인이 발작할 만 했다. 하아… 뭔가 그녀를 속이는 기분이 들어 속이 언짢아졌다. 그러니, 안내 정도는 괜찮았다. 내게 호의적인 인간을 억지로 떼놓는 것도 불편했고.
끄덕. 재차 고개를 끄덕인다.
"고마워요!"
뭐가 고맙단 건지….
그래도 웃으니 보기는 좋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사제의 이름은 하 테리알이었다. 성이 하고 이름이 테리알이다. 제국에서 인정한 성씨는 아니었다. 그녀는 귀족이 아니다. 테리알의 설명으로는 선조부터 내려오던 가짜 성씨로, 의미는 흐릿해져 지금 와서는 자기 어머니도 왜 쓰는지 모른다고 한다. 테리알은 수습 사제였다. 신전 청소나 신도들을 인솔하는 일을 주로하는 수습 사제. 아직 신성력을 각성하지 못한 수습이지만, 삼 년만 더 노력하면 교구장에게 은총을 받을 수 있다나 뭐라나.
"부신관니이이임!"
테리알은 내 손을 잡고 세례의 장으로 이끌었다. 세례의 장은 커다랗고 웅장한 예배소와 다르게 작고 초라한 건물이었다. 그녀는 손을 붙잡은 채 문을 두드렸다. 쿵쿵쿵! 몸에 힘이 실렸는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꽤 경박했다. 문을 두드린 테리알 본인도 이 정도로 세게 노크할 줄은 몰랐는지 헉, 소리를 내며 한 발자국 떨어졌다.
-끼익.
"누굽니까!"
180cm는 훌쩍 넘어 보이는 거구의 여성이 문을 열고 나온다. 아니, 190은 되려나. 문이 이상하게 커다랗더니 이 여자 때문이었어? 나는 압도적인 위용에 입을 떡 벌리며 뭣도 모르고 뒷걸음질 쳤다.
'부신관님'이라 불린 이 여자는 커다란 키만큼 가슴과 골반, 근육 또한 무시무시했다. 펑퍼짐한 사제복을 입었음에도 쭉 드러나는 가슴과 골반라인. 거기에 얼굴만 보면 사제가 아니라 기사라 해도 믿을 만큼 강인한 상이었다. 그렇다고 아름답지 않다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미인美人이었다.
"…시스터 테리알."
짧게 친 붉은 머리칼. 그녀의 머리색은 나보다 짙은 진홍색이었다. 탑에서 보았던 황혼의 색보다 짙은, 붉디붉은 진홍색.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사자를 맞닥뜨린 착각이 들었다. 입이 열리지 않는다. 테리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철저히 피식자였다.
"무슨 일이죠?"
사자의 울음소리.
우리는 그녀가 말을 허락하고 나서야 입을 틀 수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아…."
"사과하지 말고 용건부터 말하세요."
"그, 그게… 이분께서 축복을…."
"축복?"
"탄생의 축복, 입니다아…."
"…."
그녀의 시선이 내게 향한다. 테리알이 그랬듯 텅 빈 오른팔, 이어 하복부를 쓰윽 훑은 그녀는 몇 초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시스터 테리알. 이만 물러가세요."
"예, 예? 하지만…"
"하 테리알. 돌아가세요. 돌아가지 않는다면 화장실 청소를 시키겠습니다."
"히잉…."
테리알은 눈물을 글썽이더니 결국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발을 돌렸다.
나는 그녀에게 손만 작게 흔들어 주었다.
"들어오세요."
끼익. 문이 열린다. 열린 문 사이로 들어간다. '세례의 장'은 정말 기본적인 가구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건물 내부는 겉모습도 그렇고, 검소하게 살라는 성류회의 교리를 닮아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제 이름은 셰멜, 루셸리니 교구의 부신관을 맡고 있습니다."
"…유진입니다."
"반갑습니다."
"여기가 세례의 장인가요?"
"아니요."
"…?"
"제가 곧 세례의 장입니다."
순간, 셰멜의 오른눈이 하얗게 변했다. 눈동자 한가운데 검은 정십자를 그리며 하얗게, 그리고 천천히 물들어갔다. 동시에, 사람의 것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의 거대한 신성력이 느껴졌다. 나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 알 수 있었다.
"성물 개조를 받았군요."
"…맞습니다."
그녀의 육신은 성물 그 자체였다.
"죽음이 두렵지 않나요?"
"죽음 이후에도 영원히 성유물로 쓰일 텐데, 기뻐해야 함이 옳지 않겠습니까."
성물 개조를 받은 이들은 승천하지 못한다. 영혼이 신성력을 뚫고 육체를 빠져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원히. 이승에 머물러야 했다. 육체가 곧 성물이 되는 개조의 말로는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할 정도로 끔찍했다. 막대한 신성력과 순수한 영혼이 깃든 육체는 그 자체로 강력한 힘이 깃들어 있어, 조각조각 잘라내어 온갖 곳에 '재료'로 사용된다고 한다. 그럼에도 몸을 개조하는 이유는 신에 미쳐있거나, 혹은 그럴 수밖에 없었거나. 그녀의 사정을 구태여 캐내고 싶지는 않았다.
"…존중하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그보다 축복을 받으러 오셨다고요."
빙빙 돌아 드디어 본론으로.
나는 결국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탄생의 축…"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고 힘들게 내뱉은 말.
그러나, 내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2주째."
"……예?"
"임신 2주째입니다."
축복은
이미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