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감정 포식자 (3)
"으극… 소, 손 좀 놓으세요!"
차마 반말은 할 수 없어 앙칼지게 소리쳤다. 탁! 머리칼을 움켜쥔 팔을 거칠게 때어낸다. 얼굴을 잔뜩 찡그린 나는 세 발자국 떨어져 숨을 몰아쉬었다. 당겨진 머리가 아직도 얼얼했다. 슈리엘은 뭐가 그리 분한지 아직도 이를 악물고 오만상을 찌푸렸다.
"하아… 도련님."
한숨을 푹 쉬며, 경멸을 조금 섞어 말한다. 이번엔 왜 또 지랄이냐― 라는 의미를 다분히 포함한 말이었다. 머리를 찢어버릴 기세로 당긴 건 건 나름 괜찮았다만, 나 끌고 가서 뭐 하게? 정말 탑 등반이라도 하려고? 칼버드도 없이?
차라리 날 때려눕히고 죽을 때까지 범하겠다 선언하면 몰라. 그런다면 기꺼이 받아주겠다. 내색은 안 하겠지만, 아무튼. 슈리엘은 날 별안간 노려보더니 갑자기 쭈그려 앉아 머리를 부여잡기 시작했다.
"도련님?"
"으윽…."
무언가를 꾹 참는 듯한 몸부림에 나도 모르게 다가갔다. 슈리엘의 정신상태는 굉장히 불안해 보였다. 설마, 아그네스 때처럼 머리에 이상이 생겼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그때는 어찌어찌 해결됐지만, 이번에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얘가 백치가 되거나, 혹은 죽어 나만 돌아간다면― 칼버드가 날 죽일 게 뻔했다.
움직이지 않는다면 억지로라도 데려가겠다. 그리 다짐할 때였다.
"도련님. 일어나세―"
- 꽈아아아악!!!
"케흑?!"
"넌… 항상 그런 식이었지."
눈을 시뻘겋게 빛내며 일어선 슈리엘은 내 목을 한 손으로 움켜쥐고 그대로 들어 올렸다. 나는 핑 돌아가 어지러운 시야 속에서,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떼놓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퍽, 퍽, 퍽. 다리를 앞뒤로 왕복하며 그의 몸을 가격한다. 하지만. 몸이 강철과 같은 오러 나이트의 신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계란으로 바위를 부수려는 그 가소로운 시도에 손아귀의 힘이 강해졌다.
"까, 까흐으, 윽…"
점점 어두워지는 세상. 나는 눈을 까뒤집고 팔다리를 부르르 떨었다. 동시에 뜨겁고 축축한 액체가 다리 사이를 노랗게 물들였다. 한동안의 평화에 안심하고 있던 몸이라 그런지, 오랜만에 찾아온 폭력에 더욱 강렬히 반응했다.
무심코, 흥분해버린다.
그가 왜 내 목을 조르는 것인지는 생각도 안 났다. 그저, 눈앞의 폭력을 갈망하며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
내심 오줌을 지린 게 다행이라 생각되었다. 지리지 않았다면 애액이 그 자리를 대신했을 테니까. 내게 경멸하는 슈리엘의 시선도 기대됐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그렇게 꿈 같은 몽롱함이 계속되어, 의식도 같이 저 멀리 날아가기 직전. 슈리엘은 경악을 하며 손을 놓았다.
"하, 하윽?"
쿵. 전원이 나간 인형처럼, 실없이 무너진다. 예고 없는 해방에 성대히 곤두박질친 나는 어떠한 방어 기제도 취하지 못하고 그대로 충격을 받아야 했다. 날카로운 돌조각이 피부를 찌른다. 그 아찔한 고통에 신음도 못 내고 바람 빠진 숨만 내쉬었다.
땅을 짚어 일어서려다, 그마저도 실패해 얼굴을 처박는다. 일어설 힘도 나지도 않았다. 결국 나는 일어서기를 포기하고 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채 가만히 숨만 쉬었다.
"유, 유진?!"
이런 나를 일으켜준 자는 다름 아닌 슈리엘이었다. 나를 공주님 안기로 안아 든 그는 무척 초조해 하면서 내가 눈을 뜨기를 기다렸다. 목구멍에 숨이 들어오고 정신이 맑아진다.
눈을 뜨자, 호숫가처럼 맑은 눈동자를 되찾은 귀공자가 보였다. 슈리엘의 얼굴이었다. 시발. 잘생기긴 또 엄청나게 잘생겼다. 저런 거에 뻑갈 정도로 내면까지 여자가 된 건 아니라 별 감흥은 없었다.
"괘, 괜찮은가?!"
그는 당혹과 죄책감에 물든 목소리로 말했다. 막 쾌락의 여운에서 빠져나온 나는 실눈을 뜨며, 압박에 수축한 목 근육을 풀며 입을 열었다.
"…덕분에요."
"미안…하다."
젠장. 속으로만 탄식한다.
미안할 필요도 없이, 조금만 더 해주지. 저열한 욕망이 끓었다. 안 그래도 쌓인 참이었는데… 그냥 다 포기하고 졸라볼까. 고민이 일었지만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쾌락을 위해 더러운 일을 자처해도, 끝에는 인간으로 살리라 다짐한 게 엊그제였잖아.
'그런 상황'을 유도하는 거랑 본인이 나서서 부탁하는 거랑 유의미한 차이가 있는지는 심도 있는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나를 안은 상태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그는 '왜 그랬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이건, 내 의지가 아니야."
네가 아니면 누가 그런 건데. 그 억울한 표정이 어이가 없었던 나는 콧방귀를 뀌며 비아냥거렸다.
"그러시겠죠. 할 말 끝났으면 내려가도 될까요?"
그의 가슴팍을 두 손으로 밀어 품에서 떨어진다. 슈리엘은 크게 놀라며 나를 잡으려 했지만 내가 더 빨랐다. 다시금 쿵, 하고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어깨부터 떨어진 나는 왼 어깨를 부여잡으며 지도를 꺼내들었다.
"돌아가요. 칼버드 경이 있다곤 하지만… 경은 무사할지 몰라도 나머지 둘은 아닐 걸요."
"…알겠다."
이번엔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칼버드에게 윽박질렀던 것과는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왜 보이질 않죠?"
내려가는 계단이 보이지 않았다.
"지도를 잘못 본 게 아닌가?"
"아니에요."
내가 기록했으니 내가 제일 잘 알았다. 틀릴 수가 없다. 기억 상으로도 일치했고. 헌데. 계단이… 없었다. 거기에 주변 구조도 살짝 바뀌었다. 오른쪽으로 꺾여야 할 곳엔 막다른 길이 있었고, 막힌 곳은 뚫려 있었다.
"그 짧은 사이에 구조가 바뀌었다고?"
슈리엘은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허탈해했다. 나는 짜증을 담아 슈리엘을 노려봤다. 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재차 사과했다. 꼴에 미안한 줄은 아나 보네. 사과를 대충 받아넘긴 나는 지도를 품에 넣고 말했다.
"어쩔 겁니까?"
"…계속 가봐야겠지."
"도련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되어서 참 다행입니다."
"나, 나는…!"
비아냥에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욱하는 슈리엘을 바라본다.
"왜요. 방금처럼 또 목이라도 조르실 생각입니까?"
내가 아무렇지 않게 행동해도―실제로도 아무렇지 않았지만―목에 남겨진 새빨간 손자국은 죄책감의 도화선이 되어 불타올랐다.
내 일갈에 벙어리가 된 슈리엘은 주먹만 꽉 쥐며 부들부들거렸다. 나는 그 꼴이 우스워 픽 하고 웃었다.
"농담입니다. 아무튼, 내려가는 길이 보이질 않으니… 일단은 다른 출구가 있는지 확인해 봐야겠죠."
"하. 그거 참 지독한 농담이로군…. 출구가 보이질 않으면 어떡할 거지?"
나는 말 없이 검지를 들어 위를 향했다.
"그야… 올라가 봐야하지 않겠습니까."
칼버드가 다시 올라올지는 모르겠다만. 자식까지 거들먹거리며 내쫓았는데 그럴 리 없겠지. 어지간히 충성스러운 거 아니면 기대하기 힘들 거다.
* * *
예상대로 내려가는 길은 없었다. 미궁 제작자가 대놓고 엿을 날린 상황. 슈리엘은 검을 시퍼렇게 빛내며 고블린과 오크의 혼종처럼 보이는 키메라를 배어 넘겼다.
"젠장…."
반면, 올라가는 길은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올라오라고 유혹하는 것처럼 떡하니 보이는데 못 찾을 수가 없지. 슈리엘은 노골적인 미궁 구조에 속만 태우며 검을 휘둘렀다.
괴물들의 목을 베고, 베고, 또 벤다.
층수는 어느덧 21층. 지도 작성은 실시간으로 바뀌는 미궁 탓에 무용지물이 되어 그냥 포기했다. 오로지 전진만 해야 하는 상황. 슈리엘은 점점 지쳐갔다. 어둡고 건조하고. 때로는 습하며. 누런 먼지는 끊임없이 날린다. 극한 상황은 사람의 정신을 좀먹었다. 슈리엘은 간헐적으로 과호흡이 의심될 정도로 숨을 몰아쉴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내가 말을 걸어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진정했다.
하지만 결국. 한계가 찾아왔다.
"으으… 아아아악!"
-쿵!
"……"
번쩍. 두 눈이 붉게 빛난다. 벽에 금이 갈 정도로 강력한 펀치를 날린 슈리엘은 눈을 붉게 빛내며 흥분했다.
'또 붉은 안광이야….'
내 목을 조를 때와 같은 현상.
슈리엘이 '내 의지가 아니야'라고 말한 것처럼, 갑자기 늘어난 폭력성은 저 붉은 눈과 관련이 있어 보였다. 나도 나 나름대로 조사해봤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일단 마법은 아니었다.
마법이 아니라고 확정 지어진 순간부터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이게 약물이나 아티팩트 쪽이라면 보여줘도 이해 못 한다.
나는 검을 빼 들고 다가오는 슈리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왜 나는 통하지 않지?'
왜 슈리엘만 그러는가. 칼버드도, 병사들도, 나도 있는데. 왜 슈리엘만? 여러 의문이 떠올랐지만―
-퍼억!
"아흑!"
날아드는 발길질에 넘어져 더이상의 사고가 불가능했다.
"그 빌어먹을 노인네랑 같이 있으니까, 기분은 좋았나? 대답해라 모험가 유진."
슈리엘은 이때가 되면 날 향한 증오심을 여과 없이 표출했다.
"처음 만났을 때 죽였어야 했는데. 내가 왜 이런 쓰레기 같은 년한테 마음을 줘서…."
"끄흐윽…."
꽈아악. 나를 때려눕힌 슈리엘은 전과 같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다만, 달라진 점이 있었다.
"응? 어차피 그 노인네한테도 벌렸을 거 아니야. 안 그래?"
폭력성과 더불어 성욕을 발산하기 시작했다는 점.
"더, 더려니임…."
개미굴마냥 좁아진 목구멍을 통해 애원해보지만, 통할 리가 만무. 슈리엘은 눈을 더 붉게 빛내며 킥킥거릴 뿐이었다.
-쫘아악!!!
옷 앞섬을 거칠게 뜯는다. 그 난폭한 손길에 새하얀 젖가슴이 흔들거리며 눈앞의 수컷을 유혹했다. 기나긴 미궁 탐사에도 바래지지 않은, 부드럽고 새하얀 피부. 슈리엘은 손을 펼쳐 가슴께를 스윽 내리 만지더니, 그대로 유방을 꽉 쥐었다.
"꺄흑?!"
손톱 채로 파고드는 아찔한 감각에 몸을 비튼다. 가슴을 터트릴 기세로 움켜쥔 슈리엘은 뜨거운 콧김을 내뱉곤 그대로 치마까지 찢어버렸다. 치마가 걸레짝이 되고 가터벨트의 끈이 끊어진다. 그 속에는 투명하고 끈적한 액체로 물든 순백색 속옷만이 남아있었다.
"이거 봐… 내 말이 맞잖아… 크큭.… 내가 이딴 창녀한테 혹했다니…."
속옷을 물들인 애액을 목격한 슈리엘은 경멸을 한껏 담아 힐난했다. 나는 벌레보는 듯한 슈리엘의 시선에 수치심과 비참함을 느끼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렇게 쳐다보면… 살짝 흥분해버릴지도….
나는 슈리엘이 미쳐 날뛰는 걸 막을 생각이 없었다. 폭력성? 사태 해결? 전부 나한테 쏟아부으면 원래대로 돌아가잖아. 나도 기분 좋고 슈리엘도 원상태로 돌아오는 상호승리 관계니 나쁠 거 없었다.
그렇다고 좋아라 당해주면 원상태로 돌아온 슈리엘이 의문을 품을 게 뻔하니… 적당히 싫은 척하면서 당해주는 게 필수불가결이다.
"제, 제바…."
"닥쳐."
투둑. 속옷을 뜯어내자, 애액으로 번들거리는 꽉 다문 보지가 서늘한 공기를 맞으며 움찔거렸다. 창녀의 보지치곤 과하게 깨끗했고, 또 꾹 다물어졌지만― 슈리엘의 머릿속의 나는 이미 수많은 손님을 받은 창녀로 굳혀진 지 오래였다.
한 손으로 바지를 내린 슈리엘은 항상 차고 지냈던 경갑까지 벗어던지며 자지를 꺼내 들었고 그대로 아랫배에 가져다 댔다.
나는 소리 없이 입만 벌리며 '그것'을 바라봤다. 뜨겁게 타오르는 육봉은 조금… 아니 과하게 컸다. 저런 걸 성기라 부를 수 있나…? 말 그대로의 흉기였다.
슈리엘의 자지는, 아니 인간의 자지는 저렇게 무식하게 클 수가 없었다. 분명 붉은 눈의 영향이겠지.
슈리엘은 비열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너도 이런 걸 원했을 거 아니야. 응? 처음부터 이럴려고 접근한 거였어. 내 말이 틀려?"
어떻게, 알았지.
"트, 틀려…"
반박할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한 나는 애써 부정하며 시선을 돌렸다. 살을 지져버릴 정도로 뜨거운 남성기를 바라본다. 하반신을 밀착해 자신의 성기를 들이댄 슈리엘의 자지는…
뿌리를 음부에 댔으니…
단순 길이만으로는… 배꼽 위로 반 뼘…?
이, 이런 게 다 들어가려나…?
그때.
침을 꿀꺽 삼킴과 동시에 벌어진 삽입.
-찌븝!
"흐야아앗?!"
흐르는 애액을 윤활유 삼아 질 내부로 당도한 자지는 절반 정도 들어가다 전진을 멈췄다. 당연히, 다 들어가지 못했다. 저 정도 길이를 어떻게 받아들인단 말인가. 길이만으로는 미노타우로스를 데려와도 꿀리지 않았다.
나는 살이 찢어지는 고통과 숨이 막힐듯한 꽉 찬 이물감에 숨도 못 쉬고 바닥만 긁어댔다. 손톱이 깨지고 숨을 쉬지 못해 시야가 흐려진다.
"처…녀 라고…?"
슈리엘은 살이 찢어져 나온 피와는 살짝 다른 종류의 피를 보며 입을 떡하니 벌렸다.
"흐, 흐윽…"
만들어진 눈물을 흘린다.
흐드러진 붉은 머리칼. 아담한 체구. 잡티 없는 새하얀 피부. 당장에라도 핥아먹고 싶은 눈물. 그리고― 슈리엘이 첫눈에 반한 아름다운 외모. 폭력과 강간에 익숙해져 타락해버린 뇌는 '이런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잘 알았고―
"제, 제성해여…."
그대로.
수컷의 파괴본능을 끌어 올렸다.
"자, 자못, 잘못해써여…."
그의 소유욕을 뒤흔드는 한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