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감정 포식자 (1)
저들이 내 무엇을 보고 하나밖에 남지 않은 공격대의 자리를 내어주었는진 모르겠다만― 적어도 무력을 원하는 것 같진 않았다. 파티에 마법사가 있으면 여러모로 편해지니까. 흔히들 파티의 안정성은 마법사의 지능에 비례한다고 한다.
지도 작성과 글자 해독은 둘째 치고, 식수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만으로 마법사의 가치는 충분했다. 마나로부터 실체를 뽑아내는 기적, 마법. 오러만이 가능한 기사와 달리 활용가치가 무궁무진하다. 깨끗한 물 하나만으로 날 데려갈 이유는 차고 넘친다는 소리다.
물론, 그 이유만 있지는 않겠지. 난 어디까지나 외부인이니.
다 먹지 못한 스튜를 내버려 두고 발을 옮긴 곳은 성문 근처에서 봤던 경비 초소였다. 참고로 스튜값은 칼버드가 내주었다.
슈리엘은 병사들의 묵례를 받으며 건물 안으로 당당히 들어갔다. 그는 따라오라는 손짓과 함께 고개를 까딱거렸는데, 순간 사람이 달리 보일 정도로 분위기가 급변했다. 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년의 모습은 사라지고, '대행자'에 걸맞은 위엄을 사방으로 퍼트렸다.
역시, 귀족은 귀족이었다. 그는 의자를 끌어 아무렇게나 앉았다. 귀티 나는 몸과 비교되는 경박한 자세였지만, 테이블 위에 널브러진 서류의 양을 보면 감히 지적할 수가 없었다.
산더미라는 말이 아니면 무어라 표현할까. 슈리엘은 엄청난 양의 서류 속에서 딱 필요한 것을 찾아내었고, 뭔지 모를 종이 두 장을 내게 건네주었다.
"받아라."
"이건…?"
"설마, 맨몸으로 가겠다고? 미궁 어떻게 되먹었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어?"
슈리엘의 말을 듣자마자 종이를 펼쳐보았다. 선발 모험가들이 탐험하고 보고한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 돈을 노리고 안을 헤집은 탓에 쓸모있는 정보는 보이지 않았으나, 두 눈을 사로잡는 정보가 몇 개 있었다.
"미궁이… 위로 솟았다고요?"
미궁은 보통 지하에 생기지 않던가. 내가 아는 상식선에는 그랬다. 미궁에 관련된 서적도 모두 지하의 것만을 서술했고. 그런데 위로 솟아나다니? 그런 걸 미궁이라 부를 수 있나? 슈리엘은 황당해 하는 내 모습을 익숙하다는 듯 받아쳤다.
"나도 당황스럽긴 매한가지야. 평범한 미궁이었다면 우리도 건들지 않았겠지. 미궁은 그 자체로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니까."
슈리엘은 미궁의 악마는 미궁을 지었다는 사실 자체에 만족하기에 굳이 토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내버려두면 아무 짓도 안 하니까. 몬스터가 넘쳐흐르는 경우도 있다만, 돈을 원하는 모험가들이 끊임없이 투입되니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모험가들이 더는 미궁을 찾지 않거나, 무언가의 이유로 기능이 정지됐을 때. 그때가 되면 핵심 코어를 목표로 한 본격적인 토벌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코어를 부수면 미궁은 무너진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역사상 처음이라서 말야. 위로 솟은 미궁이라니? 감시탑도 아니고. 게다가 이상할 정도로 사망률이 높아. C급 이하로는 생환율이 절반을 못 넘겨."
이번 경우엔 선례가 없었다. 선례가 없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곤란한 문제였다. 보고 배울 게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어찌 됐든.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탑이라며? 보고서에 적혀있는 높이대로라면 여기서도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미궁의 위험성은 뒤로하고 당장의 의문을 물어봤다.
"그런데, 보고서에 적힌 대로의 크기와 높이라면 이곳에서도 보여야 합니다."
슈리엘은 타당한 질문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서는 보이지 않는 구조야. 입구에 다가가야만 비로소 보이지."
결계인가. 아니면 위장 술식일 수도 있겠다. 고민이 이어진다. 슈리엘은 마법사의 고민을 막지 않았다. 정확히 5분하고 21초가 흘렀을 때, 나는 입을 열었다.
이거… 미궁 맞나?
"단순 미궁이라기엔 별도의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응. 그래서 성황청이 나를 파견한 거고."
슈리엘의 말마따나 감시, 혹은 정보 수집을 위해 지어진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악마의 취향일 뿐이거나. 조금 우스운 주장이지만 악마를 셋이나 잡아 족친 나로선 '아니다' 라고 확정 지을 수 없었다. 진짜 악마 좆대로 지은 거일 수도 있다.
"그 때문에 우리도 섣불리 진입하지 못하는 상황이야. 아마 핵심 코어는 최정상에 있겠지."
슈리엘은 테이블을 짚고 쿵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그의 시선은 정확히 나를 향했다.
"칼버드가 권유할 정도라면 기본은 갖춘 놈이라는 뜻일 터. 저 양반이 팔불출 같아도 아무한테나 그러진 않으니까."
마지막 확인.
"다시 물어볼게. 정말로 공격대에 들어올 거야? 원래라면 소수정예로 진입할 예정이었다만… 마법사가 온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네게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아끼도록 하지. 아무튼. 정확히 내일 오전 다섯 시. 초소 입구에 모인다. 알겠어?"
칼버드와 나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해산이야. 각자 할 일 보도록 해."
* * *
5시에 해가 뜨기 시작하는 여름의 태양. 나는 솔솔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나머지 인원을 기다렸다.
여관을 잡을 돈이 없었던 나는 접대용 방에서 밤을 지내야 했다. 접대용, 그곳에서 밤을 지낸다 하니 조금 묘했지만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성욕이 쌓인 병사가 한밤중에 목을 조르면서 강간한다거나, 그런 일들 밀이다.
나로서는 조금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악마 둘을 족친 뒤로 아무것도 하지 못해 약간 애가 탔다.
가장 먼저 도착한 이는 칼버드였다. 이후 몇 분의 간격을 두고 슈리엘이 도착했고, 이름 모를 병사 둘이 뒤를 이었다. 슈리엘은 다섯이 모두 모이자 별도의 설명 없이 곧바로 미궁으로 향했다. 나는 도중에 공격대 수가 너무 적지 않느냐고 물었는데, 굳이 소수 정예로 공략하는 이유는 좁은 통로와 광역 함정의 존재 때문이란다.
"앞으로 오십 보만 더 걸으면 미궁 입구다. 다들 준비해."
대호수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다리. 하지만 가운데 솟아난 미궁 때문에 교차로가 무너져 아름답던 외형은 어디 가고 군데군데 금이 간 흉측한 모습만이 남았다. 이는 미궁에 가까워질수록 심해졌고, 초입을 넘어 중심부에 도달했을 땐 무너지지 않은 게 용할 정도로 망가진 다리가 우리를 반겼다.
그 상태로 열 걸음. 주변 공간이 일그러진다. 동시에 하얀 안개가 우리를 감쌌다. 병사들이 흠칫했지만 슈리엘은 손을 들어 혼란을 막았다.
"결계 안으로 들어온 거니까 놀라지 마."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선두에 있던 칼버드가 발을 멈추었다.
"잠깐."
칼버드의 제지에 뒤따라가던 나와 병사들도 덩달아 발을 멈추었고,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천막… 임시 거점이군."
그러자 줄지어 설치된 천막들이 보였다. 먼저 도착한 모험가들의 베이스 캠프였다. 몇 개의 천막은 이미 주인을 잃어버려 쓸쓸히 남겨진 채였다. 우리는 숨죽인 채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건…."
"하아… 보고보다 훨씬 크잖아…."
안개에 휩싸였던 미궁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커다란 대호수의 중심, 그 한가운데에서 당당히 솟아오른 거대한 기둥. 감히 크기를 가늠하기도 어려워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허연 안개와 대비되는 칠흑의 탑은, 허리에 안개를 두르고 모든 빛을 빨아들였다. 분명 아침일 터인데 주변은 밤과 같이 어두웠다. 모두가 그 고압적인 모습에 잠식되어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때였다.
"모두! 고개를 들어라!"
슈리엘은 검을 빼 들고 소리쳤다.
"C급 생환율 39.8퍼센트다! 정신 똑바로 차려!"
C급 모험가가 10명중 6명이 이곳을 묘지로 삼았다는 말. C급은 일반인이 오러나 마법 없이 칼 한 자루로 도달할 수 있는 최대치였기에― 병사들은 허리를 바짝 세우고 긴장했다. 칼버드와 슈리엘이 오러 나이트라 해도 제 몸은 자기가 지켜야 했기에 더욱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나와 칼버드는 더없이 편안해 보였다.
'허접한 결계야.'
사실, 다리 초입에 발을 올리자마자 술식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었다. 실로 비효율적인 마나 운용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굳이 공간을 일그러트리거나 하얀 안개를 뿜을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의미가 있을까 싶어 최대한 노력해봤다만 별다른 이유를 찾지 못했다. 내 생각이 맞다면 단순 꾸미기용이나 기선제압용 같았다. 심리적 위축은 실력 행사에 큰 영향을 미치니까.
칼버드는 흔들림 없는 내 모습을 보고 의외라는 듯 입을 열었다.
"이런 데 많이 와봤나?"
"…들어서 좋은 얘기는 아닙니다."
"뭐, 각자의 사정이 있는 거겠지. 실례가 됐다면 사과하겠네."
"괜찮습니다."
눈을 뽑고 목에 칼을 들이대도 별로 놀라진 않을 거다. 흥분하면 했지. 나는 그 참담한 사실에 자조하며 피식 웃었다.
"그럼, 들어가겠네."
가장 선두에 있던 칼버드가 대검을 쥐고 입구 앞에 섰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투박한 흑색의 문. 갈라진 틈새만이 이곳을 문이라 증명했다. 칼버드는 가볍게 미는 것으로 문을 열었다.
문은 압도적인 크기가 무색하게 손쉽게 열렸다. 아니, 열려주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까. 사자가 아가리를 벌리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쿵!
문은 일행이 모두 들어오자마자 사납게 닫혔다. 병사 하나가 크게 놀라 문을 밀었으나 꿈쩍도 안 했다. 패닉. 슈리엘은 병사의 뒤통수를 빠악! 소리 나게 때리곤 짜증을 냈다.
"당황하지 마! 입구랑 출구는 공유되지 않는다고 쓰여있었잖아! 너, 내가 준 보고서 읽은 거 맞아? 그럴 시간에 출구나 찾아!"
칼버드는 쓰게 웃었고, 나는 미궁 특유의 건조한 공기에 눈을 찡그렸다. 누런 먼지가 눈앞을 지나간다. 슈리엘이 소리쳤다.
"마스크 써! 공략 시작이다!"
우리는 살아서 돌아갈 것이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