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던전 어택 (3)
―덜컹… 덜컹…
어지간한 마차보다, 아니 현대 자동차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편안한 탑승감. 나는 백작가 마차에 들이부은 자본과 기술력에 감탄하며 들키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왜 그리 울상이야?"
내 바로 옆자리.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재수없는 금발머리 귀공자 슈리엘 루셸리니.
그리고 그런 우리에게서 조금 떨어져, 눈을 감은 채 꼼짝 않는 호위 기사 칼버드.
귀족과 기사…. 흠 잡을 데 없는 무척 정석적인 조합이었지만― 그 둘 사이에 한낱 모험가인 내가 껴있으니 죽을 맛이었다.
나는 어깨를 살짝살짝 부딪치는, 되도않는 스킨십을 시도하는 슈리엘을 무시하곤 가능한 한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도련님. 저는―"
"내 이름은 '도련님'이 아니야."
"…어떻게 모험가 따위가 백작가의 이름을 함부로 읊겠습니까."
"보는 눈도 없는데 어때? 나는 기본적인 예의만 벗어나지 않는다면 되려 자유로움을 강조하는 편이야. 너라면 특별히 '루셸리니' 라고 불러도 괜찮다만."
"경께서 보고 계십니다."
"칼버드? 저 양반은 무시해도 돼. 세속 계약으로 묶였는데 어쩌겠어?"
그리 말하자 미동도 하지 않던 칼버드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나는 저 노구가 뿜은 살기가 얼마나 흉악한지 몸소 겪은 바가 있었기에 속으로 폭발하지 않기만을 빌었다. 다행히 기사는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그게 다였다. 나는 슈리엘이 내뿜는 부담스러운 시선을 한몸에 받아야 했다. 그의 눈동자가 달밤 아래 호숫가처럼 빛난다. 그 시선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명확했기에,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루셸리니 님."
"음음."
셸과 셀의 차이를 유독 신경 쓰는 그는 내가 정확히 '셸'이라 발음할 때 묘하게 얼굴을 붉혔다. 그 꼬락서니를 보고 있자니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아 황급히 주제를 돌렸다.
"고매하신 백작가의 영식께서 저처럼 천한 계집과 말을 섞다 이상한 소문이라도 날까 두렵습니다. 하물며 목패가 아니면 신분조차 증명하지 못하는 비루한 모험가라면요."
"아, 네 신분?"
슈리엘은 별거 아니라는 듯 웃음을 지었다.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네가 정말 첩자나 감시역이라면 당장 자결했지 이렇게 눈치 봐가면서 맞춰줄 이유가 없거든. 그리고, 어떤 감시역이 그렇게 대놓고 다가와?"
"……."
민폐도 이런 민폐가 따로 없다. 대체 어쩌자는 거야? 그럼 알면서 마차에 태운 거란 소리잖아. 이건 납치였다. 눈앞이 아찔해졌다. 나는 땡기는 뒷목을 애써 무시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저 같은 여식에게 관심을 주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대충 예상은 가긴 하다만… 어울려줄 생각은 없다. 귀족과 함께 있으면 사람들이 쉽사리 다가오지 못한다. 비참하고 나락으로 떨어질수록 흥분하는 내게 있어, 귀족과의 연은 인생역전의 기회가 아닌 민폐 덩어리일 뿐이었다.
이런 속마음을 알 리 없던 슈리엘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몸을 늘어트리며 말했다.
"내 유희에 잠시 어울려 준다고 생각하면 돼. 그간 파견 나간 일이 다 허탕이라 좀 짜증 나던 참이었거든. 때마침 재밌어 보이는 상대가 너였고."
"…파견이요?"
"음. 너라면 말해도 되겠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칼버드의 눈이 뜨였다. 젠장. 이놈의 입 하고는. 그냥 닥치고 있으면 될 걸 괜히 물어서 자극해버렸다. 하기야 나 같은 외부인이 속사정을 물으니 속이 뒤틀린 만도 하지. 주인을 보필하는 호위 기사라면 더욱이.
칼버드는 제 주인에게 무어라 말하려는 듯했지만, 슈리엘이 더 빨랐다. 그는 이미 한 손을 들어 노기사의 입을 막아버렸다.
"칼버드. 명령이야. 닥쳐."
그 살벌함에 나도 모르게 위축된다.
"하하… 노인네가 워낙 충직해야지. 괜찮아. 늘 있는 일이니까. 그래그래. 파견이 궁금하다고 했지."
'아니 안 궁금해.' 라고 내뱉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었지만 감히 그럴 수 없었다. 지금 나는 칼버드의 눈치를 보느라 바빴다.
"대행자를 알고 있다면 얘기가 빠르겠지. 맞아. 나는 악마의 흔적을 조사하기 위해 성황청을 대리해서 나왔어. 직접적인 무력 행사 전 정찰 같은 거로 생각하면 편하려나."
그는 한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브리도니아… 어떤 악마새끼가 장난친 건진 모르겠다만 참 악질이야. 지하수로에 불을 내고 여름에 눈을 내리다니? 뭐, 얼마 안 가서 끝났다고 하니 다행이다만, 대행자인 내겐 '다행'이 아니거든. 삼일 밤낮을 내려와 기껏 조사하려 했는데 이게 뭐야? 누굴 놀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 군요."
이번엔 다른 의미로 속이 탔다.
나는 이 충격적인 사실에, 충분히 심사숙고한 다음 결론을 냈다.
좆됐다.
그냥 귀족도 아니고 악마 사냥꾼이라니.
"카할리아. 알아? 호수 가운데 대미궁이 솟아났다고 했던가. 너도 그것 때문에 카할리아에 향하던 거 아니었던가?"
"예… 뭐. 일단은."
"일단은? 그래. 말을 좀 바꿔볼까. 넌 무엇을 위해 미궁으로 향하지?"
찔리고, 잘리고, 처맞고, 강간당하고. 끝없는 심연의 밑바닥을 엿볼 때까지. 그리하여 저주스런 권태를 완전히 지워버릴 때까지. …물론. 이런 변태 같은 목표를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으니 조금 변형시켜서 말했다.
"…아직 제 경험이 미천하여, 부족한 견식을 넓히기 위해섭니다."
"진정한 의미의 모험가로군. 야만스러운 놈들과는 달라. 마음에 들어."
그는 예의 바르면서도 소극적으로 나오는 태도가 썩 마음에 들었는지 조금씩, 조금씩 몸을 가까이하였다. 그렇게 한 뼘 사이의 거리를 두고 말을 주고받기를 수십 분. 대화의 주제는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슈리엘은 나와 말을 섞을수록 흥분하는 기색이었는데,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단순히 아름다워서 그렇다기엔 무언가 본질적으로 다른 열망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뭐라고 할까. 처음엔 그냥 창부를 바라보는 느낌었다면 지금은 보석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나는 그 시선에 의아해하면서도 입술이 바짝 말랐다.
그리고 그 이유는, 정확히 여섯 번째 대화가 끝이 났을 때 드러났다.
"그거 아나? 난 지금까지 언어를 달리해서 네게 말을 했는데… 어째선지 전부 능숙하게 대답하더군."
"예…?"
"공용 제국어를 시작으로 서부 프론트어, 북동부 가드리슈어까지. 어법이 다른 비교적 어려운 언어 위주로 말했다만… 대체 어디서 배운 거지?"
"…."
아. 시발. 자동 번역.
돌겠네.
모든 원소 마법을 완전히 이해함과 동시에 덤으로 딸려온 기능. 지금까진 공용 제국어만 쓰는 놈만 상대하다 보니 이걸 의식하는 일이 없었는데…
"……."
침묵이 길어진다.
"응? 유진. 말해봐."
결국, 백기를 든 쪽은 또 나였다.
"도련님."
"나는 도련님이 아니라 슈리엘―"
"저는 제가 얼마나 주제넘은 짓을 하고 있는지 압니다."
그러나 순순히 항복하지는 않았다. 나는 다소 건방져 보일 수 있는 되바라진 태도로 응수했다. 내게 호감을 품은 자에게 말로써 칼을 들이밀어야 한다는 상황이 그리 달갑진 않았지만, 사실이 그런데 어떡하리. 여기서 선을 긋지 않는다면 끝없이 달려들 게 뻔했다.
"한낱 모험가의 몸으로 백작가의 마차를 얻어타는 것도 모자라, 경망스러운 입을 놀려 루셸리니의 영식과 말을 섞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경께서 제 목을 쳐도 모자랄 판인데, 심지어 그것에 족하지 않고 너머를 바라보고 있지요. 안 될 일입니다."
"……."
"저와의 만남이 유희라고 하셨나요. 저와 동행하고 싶으니다니 그 쯤이야 어울려줄 수는 있습니다. 제가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저는 천한 평민인데."
"나는."
"하지만 도련님."
말을 끊는다.
"제게 다가와서 좋을 게 없습니다. 그러니 부디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무시하는 게 아닙니다. 누가 감히 도련님을 무시하겠습니까. 도련님은 긍지 높은 루셸리니 백작가의 대행자인데요."
칼 맞을 각오로 내뱉은 말이다. 이대로라면 저들의 페이스에 휘말릴 것 같아서였다. 약점이라도 잡히면 사실상의 노예로 살아야 했으니까. 물론 그렇게 되기 전에 힘으로 빠져나갈 테지만 아무튼. 귀족가 애완동물이 되는 건 사절이다. 차라리 칼 맞고 죽은 척하지. 그게 더 좋기도 하고. 장난감처럼 다뤄준다면 살짝 고려해볼 만도 하다만… 아니. 뭘 고민하고 있는 거야. 나는 목울대를 찌르르 떨곤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런 내 예상과 다르게, 그들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슈리엘이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가운 표정을 지은 것만 빼면 말이다.
"…그런가. 내가 무례를 범했군. 사과하지."
정적.
이 이후로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단 한 번도.
* * *
싸늘한 침묵만이 흐르는 마차 안.
나는 그런 침묵을 동반자 삼아 무료함을 달랬다. 긴장을 풀 겨를이 없었거든. 팔다리가 아찔아찔하고 목덜미가 섬찟한 기분은 생각보다 짜릿했다. 그런 한심한 스릴을 만끽하고 있자니 바퀴 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마차의 속도가 느려질 때, 나는 창밖에 시선을 두었다. 아담한 크기의 성벽이 눈에 들어왔다. 제국에 몇 없는 관광 도시이지자 계획 도시인 카할리아에 도착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성문에는 모험가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미궁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떼거리로 몰려온 것이리라.
-끼익.
"도착했습니다!"
말을 진정시키는 마부의 외침.
칼버드는 외침이 들리기 무섭게 마차서 내려갔고, 슈리엘은 뚱한 표정으로 날 흘깃 바라보더니 이내 시선을 거두고 칼버드를 따라 나갔다. 에스코트는 없었다. 뒷끝 하고는. 그를 속으로 비웃은 나는 열린 문을 잡고 살포시 내려갔다. 그러자 새롭게 느껴지는 흙과 풀 내음이 나를 반겼다. 브리도니아의 공기가 텁텁했다면, 이쪽의 공기는 살짝 더 청량했다.
대기열은 없었다. 백작가의 일행인데 누가 막으리. 덕분에 나는 일사천리로 카할리아 내부로 진입할 수 있었다.
성문이 열리고, 병사들은 자세를 다잡아 백작가에 경의를 표했다. 하나같이 긴장한 표정이었다. 여기까지 날 동행할 줄은 몰랐다만, 슈리엘의 얼굴을 보니 흑심은 없어 보였다. 그냥, 이게 예의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때였다.
"유진."
나를 부르는 중후한 목소리. 칼버드였다.
나는 그의 목소리가 전보다 온화해졌음을 깨달았다. 그는 앞으로 똑바로 걸으며, 내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말했다.
"잘했다."
느닷없는 칭찬.
"널 바라보는 주인의 눈이 곱지 않음을 너도 느꼈을 거다."
"…."
"하지만. 너는 선을 넘지 않았지."
"…당연한 일입니다."
내가 미쳤다고 귀족과 어울리겠나.
"잘했다. 아주 잘했어. 아직 널 향한 의심을 거둘 순 없지만, 적어도. 안심할 수는 있겠구나."
"저는 정말 무고한 모험가입니다."
"그래. 각기 다른 세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며 백작가의 대행자를 상대로 주눅들지 않는, 그런 무고한 모험가지."
"하아…."
"걱정하지는 말아라. 네 신분에 대해 더는 왈가왈부 하지 않을 테니. 그보다 여기서 얼마나 머무를 생각이지?"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다. 더이상 관여하지 않겠다니? 나도 모르게 기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보름 정도입니다. 아마, 미궁 탐사가 끝날 즈음에 돌아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이후엔 브리도니아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보름, 보름이라."
그는 더 묻고 싶은 기색이었지만 슈리엘이 칼버드를 찾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등을 돌렸다. 그는 내게 등을 보이기 직전,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낱 무소속 모험가로 있기엔 너무나 아까운 인재야. 곤란한 일이 있다면 나를 찾아라. 보초들에게 내 이름을 댄다면―"
"칼버드!"
"어쩔 수 없군. 그만 헤어져야 할 시간이니…. 만나서 반가웠다."
제발. 다신 만나지 맙시다.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갈림길. 그들은 귀빈실로 추측되는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문앞에 서 있던 병사가 내게 눈길을 주었으나 나는 아무 관계도 아니라는 말을 내뱉곤 반대편 길로 빠졌다. 병사밖에 없는 삭막한 초소를 지나자 사람 다니는 길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다소 싱겁게 끝나버린 귀족과의 만남.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날 덮칠 기세로 바라봤는데… 뭔가 좀 많이 싸했지만 나서서 뭘 할 수도 없으니 그냥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나는 양 뺨을 착! 때리곤 본래 목적을 상기했다. 악마를 찾아 카할리아에 온 김에, 미궁을 뒤적이자는 막연한 목표.
그래도. 막무가내로 들어갈 수는 없겠지.
미궁이라 함은 어떤 존재인가. 어둡고 건조한 굴, 날리는 먼지, 몰려드는 몬스터. 마법사는 좁은 공간에서 함부로 마법을 쓰지 못하고 먼지 탓에 검사는 쉽사리 숨을 쉬지 못한다.
직접 가본 적은 없지만 미궁엔 보통 이상한 가루들이 굉장히 많이 날린다고 한다. 들이마신다고 몸이 망가지는 건 아닌데 숨이 좀 가빠지는 정도? 게다가 그거 가연성이라 불도 함부로 못 피운덴다. 분진 폭발이 그리 쉽게 일어나는 건 아니지만… 끽하면 다 좆 되는 지라 준비해야 할 게 많았다.
문제는 저 귀족놈과 만나는 건데… 최대한 동선이 안 겹치게 노력은 해봐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