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던전 어택 (2)
"이거야 원… 카할리아에 가도 또 허탕 치는 거 아니야?"
"그래도. 의무를 저버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것도 한두 번이어야지."
사건 해결을 위해 파견된 루셸리니 백작가의 차남― 슈리엘 루셸리니는 작금의 상황이 무척 마음에 안 들었다.
슈리엘은 연신 짜증을 내며 말했다.
"성황청에 뭐라고 보고해야 해? 삼일 밤낮 걸려서 브리도니아에 도착했더니 이미 다 끝난 상태라고? 형이랑 아버지가 날 뭐라 생각하겠어?"
브리도니아를 중심으로 연달아 일어난 재앙.
이것을 악마들의 움직임이라 판단한 성황청은 무작정 성기사를 파견하는 대신 악마 사냥으로 이름 높은 가문들의 '대행자'에게 서신을 보냈다. 조사 및 진위 확인에 대한 명령이었다.
과거 악마와의 전쟁에서 눈에 띄는 실적을 낸 세 가문.
프루카이스, 앙그리드, 루셸리니.
그들은 세대마다 한 명의 '대행자'를 뽑았고, 성황청과 계약해 그들의 종이 되기를 자처했다. 대외적으로는 인류를 위해서, 라는 거창한 신념이었다만. 성황청에서 내려오는 어마무시한 이권들을 보면 꼭 종과 주인의 관계로 볼 수만은 없었다. 거래에 가까웠지. 슈리엘은 백작가의 아홉 번째 대행자였다.
차남이라 대행자가 된 것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장남인 형을 향한 원망은 없었다.
승계권은 둘째 치고.
대행자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한다면 성황청은 그에 걸맞는, 아니 그 이상의 보상을 준다. 악마 관련해서는 누구보다 진지한 그들이었기에 따라오는 명예는 장남 못지 않았다.
당연히, 대행자들은 가문의 번영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일하려 했다. 그만큼 경쟁도 심했고.
그래서.
쟁쟁한 가문들을 뚫고.
루셸리니가 뽑혔는데.
"하아…."
아무리 조사를 해봐도 악마의 마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브리도니아에서 발생한 여름눈의 재앙은 한 달도 못 가서 끝을 맞이했다. 그뿐이랴. 그 전에 일어난 대화재도 원인을 모른 채 그대로 무마됐다고 한다. 사람들이 납치된다는 소식도 어느샌가 끊겼고. 마치 누군가 나서서 일을 해결하는 듯한, 그런 수상함이 느껴졌다.
남은 곳은 브리도니아에서 조금 떨어진 관광도시 카할리아.
그곳에 생긴 거대 미궁….
보고서에 적힌 크기가 사실이라면 적어도 허탕 칠 일은 없겠지만… 만에하나 이마저도 빈 손으로 돌아간다면 대행자의 이름이 무색해질 것이다.
―보고 이상 무.
양피지에 그 초라한 한 줄을 적어야 하나 싶었던 때였다.
-끼익! 쿵.
마차가 급정지한다.
슈리엘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마차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무슨 일이야?"
칼버드가 대답한다.
"앞 마차의 바퀴가 빠진 모양입니다. 고치는 데 조금 걸릴 듯 헌데… 무시하고 가겠습니까?"
슈리엘은 마차 시트에 등을 쭈욱 기대고 고개를 저었다. 덜컹거림에 속이 약간 안 좋았던 그는 칼버드에게 손짓하며 거절 의사를 표했다. 생각이 필요했다. 마침 마차도 멈췄으니 잠시 고요 속에 빠질 요량이었다.
"저는 경계를 서겠습니다."
칼버드가 내리고, 혼자 남겨진 슈리엘은 노곤한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잠시 잠을 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한 그는 망설임 없이 눈을 감았다. 어차피 미궁에 도착하면 또 몸이 부서져라 조사해야 한다. 체력을 보충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을까.
-터벅.
투박한 발 소리. 슈리엘은 잠이 든 사람이라곤 생각하지 못할 속도로 고개를 들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인자한 얼굴. 기다란 턱수염. 그곳엔 자신의 충직한 호위 기사, 칼버드 경이 서 있었다.
"아, 칼버드. 내 충직한 호위 기사. 어디 갔다 온 거야?"
"모험가를 발견했습니다."
"모험가?"
누군지 모르는 소녀를 데리고.
슈리엘은 눈앞의 소녀를 쓰윽 훑어봤다.
작은 키. 하지만 그것을 상쇄하는 완벽한 비율. 작열하는 붉은색의 머리는 양 갈래로 쭉 내려와 인형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오뚝한 코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또 어떠하리. 단점이 있다면 얼어붙은 것만 같은 무표정한 얼굴일까. 천상미모의 소녀를 본 슈리엘은 문득 그녀가 웃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홀린 듯 소녀를 바라볼 때였다.
"루셸리니 백작가의 긍지 높은 검, 대행자 슈리엘 루셸리니 님을 뵙습니다."
…목소리까지? 그건 반칙이지 않는가.
귀를 울리는 아름다운 목소리.
치맛자락을 조심스럽게 쥐고 고개를 숙이는 소녀의 모습은― 천사가 강림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슈리엘은 침을 꿀꺽 삼키고 소녀를 바라보았다. 동행한 시녀 중 저런 여자가 있었던가? 어느 가문이지? 소녀가 선보인 예법은 귀족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것이었다.
슈리엘은 저도 모르게 눈을 껌벅이곤, 칼버드에게 물었다.
"…칼버드?"
대체 어디서 저런 여자를 주워온 거냐. 라고 물었지만.
"저는 예법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는 건 엉뚱한 대답뿐. 바보 같을 정도로 내 체면을 중시해주는 나의 호위 기사였다.
"그래. 넌 항상 그런 식이었지."
잠시 후, 바퀴를 다 고쳤다는 마부의 눈치 없는 외침이 들리고. 슈리엘은 아쉬움을 느꼈다. 조금 더. 그림의 한 폭 같은 소녀를 눈에 담고 싶었는데. 하지만 미궁과 악마의 연관성을 조사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이상 더 시간을 지체할 순 없었다.
"고개 들어. 난 너같이 예의 바른 사람을 좋아하니까."
소녀가 정확히 3초 뒤 고개를 들었을 때.
슈리엘과 칼버드는 또 한 번 감탄했다.
"3초 예법 같은 꼰대들의 구닥다리 산물을 지키는 자가 칼버드 말고 더 있었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넌 누구지? 백작가에서 보낸 감시역? 아니면 첩자?"
솔직히, 첩자든 감시역이든 상관 없었다.
슈리엘은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저 소녀를 손에 넣어야겠다고.
* * *
실수를 인지하기까지는 단 몇 초에 불과했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내는 데는 엄청난 시간이 필요했다. 이 세계의 평균 교육 수준을 망각해버린 거다. 다른 평민들도 이와 같은 예의를 차릴 줄 알았다고 생각한 게 내 실수였다.
감시역이냐. 아니면 첩자냐. 슈리엘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슈리엘은 '너를 곱게 돌려보낼 생각이 없다' 라는 말을 다른 표현으로, 완강하게 표출했다.
"저는…."
말끝을 흐린다. 마법에 능통하다고 사회생활까지 능통할까. 내가 당당할 수 있는 까닭은 초월적 마법 행사에서 나오는 압도적 무력이지 사회적 위치 덕이 아니었다. 지식에 기반을 둔 예법이나 대답은 빠르게 도출할 수 있지만, 여러 이해관계가 얽힌 귀족 특유의 화법은 내가 감당하기엔 아직 일렀다.
"……."
저들의 입은 칼과 같으니 책 잡히지 않기 위해 천천히 말을 고른다.
슈리엘은 그런 나를 미소 지으며 바라볼 뿐이었다. 안절부절못하며 침만 꿀꺽 삼키는 모습이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싱글벙글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 내 모습만큼이나 칼버드와 다른 일행들의 표정도 참 가관이었다.
"주인."
침묵을 깬 건 호위 기사 칼버드였다. 그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듯 칼집을 툭툭 두드리며 아이를 다그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체통을 지키시지요. 보는 눈이 많습니다."
"아, 음. 그래. 그래야지. 바퀴도 고쳤으니."
"출발하겠습니까."
"아니. 기다려."
출발하시겠습니까. 칼버드는 평탄한 어조로 말했지만 어째서인지 엄청난 살기가 깃들어있었다. 정확히 나를 향해서. 나는 그 살기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지만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상시의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칼버드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제 주인을 바라봤다.
"제가 감히 조언하자면, 그녀와의 동행은 좋지 않은 선택이 될 겁니다."
"그런 것쯤은 나도 알아. 신원 미상의 마법사만큼 위험한 존재는 없지."
슈리엘은 한 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내 눈동자에서 눈을 떼지 않고 한 손으로 턱을 괴며 생각에 빠졌다. 무언가 좋은 생각이라도 있는 걸까. 칼버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그의 턱에서 손이 떨어졌을 때.
"모험가 유진."
무감정한 목소리.
"예."
"너도 잘 알 거야. 네 모습이 얼마나 수상한지."
"…."
나도 안다. 그래서 더 후회하는 중이고. 내가 이들을 죽이지 않은 건, 내게 미약하게나마 인간성이 남아있기 때문이겠지. 나는 그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속으로 한숨만 퍽퍽 쉬었다. 슈리엘 다시 웃으며 능구렁이처럼 말했다.
"감시역이 이렇게 허술하게 접근할 리는 없지만… 그래도. 의심을 받은 순간부터 너를 곱게 돌려보낼 수 없단 말이지. 네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야."
무지몽매한 평민들에게 귀족은 재앙과 같이 다가온다. 감히 쳐다보지도 못 할 신분의 차이.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지 잘 알기에, 그들은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다.
"죽기 전까지 정보를 내뱉거나. 결백을 증명하거나."
슈리엘은 마차벽에 몸을 기대어 내게 얼굴을 내밀었다.
"고작 마주친 걸로?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과한 처사라곤 생각 안 해. 오히려 네게 득이 되는 얘기야. 소속이 있다면 패를 보여주면 되잖아? 가령 마탑이라거나."
그럴 수 있다면 말이지. 하고 후후 웃는다.
"네 결백을 증명한다면 내가 범한 무례에 응하는 보상을 주겠어. 설마. 모험가 패 가지고 발을 뺄 생각은 아니지?"
죽기 전까지 정보를 내뱉거나, 라…. 고문이라도 당한다는 건가. 그 말에 잠시 혹했지만 손익을 계산하니 아무리 봐도 손해였다. 그렇다고 마땅한 증거도 없으니…. 시발 될 대로 돼라지. 고문받으면 고문받는 거고.
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말했다.
"제가 어찌 백작가에 칼을 들이대겠습니까.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 없지요. 저는 정말 무고한 모험가일 뿐입니다."
"무소속 마법사에, 내 아비뻘 되는 귀족들이나 지키는 예법을 고수하는 자가. 무고한 모험가라고?"
"사실이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이 또한 우연인 것을."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깨문다고 했나. 그게 딱 내 꼴이다. 슈리엘은 내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하자 어이가 날아간 듯 웃음을 지웠다. 칼버드 또한 내 뻔뻔한 모습에 기가 찬 듯 입술을 비틀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주눅들지 않고, 당당히 허리를 펴곤 저들을 바라봤다.
"…."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칼버드."
"예. 주인."
"나 저 여자가 마음에 드는데, 어떡하면 좋지?"
"제가 무슨 말을 하든 주인께서는-"
"응. 맞아. 동행할 거야. 목적지도 같은데 좋잖아?"
"하아…."
칼버드는 칼집만 두드리며 침통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제멋대로인 주인 섬기느라 고생이 많구나. 그가 내게 살기를 뿜은 것도 잊은 채, 괜스레 안쓰러운 감정을 품었다. 칼버드는 의기양양한 내 얼굴을 보더니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신분을 증명하지 못한 이상 네게 거부권은 없다. 만에 하나 불경한 생각을 품는다면… 내 칼이 너를 용서치 않을 거다."
그런가.
"…미천한 평민에게 관심을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칼버드는 내가 적당히 겁을 먹은 척하자 오러를 거두었다.
하아. 마차 얻어 탈 수 있는 거로 만족해야지 뭐. 백작가 마차인 만큼 탑승감도 좋을 테니까. 그렇게 나는 최후방에 있는 갈색 마차. 하녀들이 타고 있는 것으로로 추측되는 마차로 향했다.
"어디 가?"
그런 나를 막은 건 금발 머리 귀공자 슈리엘 루셸리니였다.
"넌 나랑 같이 타야지."
덜컥. 마차 문이 열린다. 딱 봐도 고급져 보이는 마차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남녀가 같은 마차에 타도 괜찮은 거 맞아?
…라고 생각하자 흠칫 몸이 떨렸다. 난 남자였잖아. 지금은 아니지만. 어쨌든. 왜 그런 생각부터 하는 거야. 남자끼리 같은 마차 타는 게 뭐가 이상하다고. 물론 여자 된 몸으로 이러는 게 정상은 아니지만….
문 앞에 서 복잡한 표정을 짓는다. 슈리엘은 이런 내 모습을 다른 무언가로 받아들였는지, 아차 하더니 쭈욱 손을 뻗었다.
"미안합니다 레이디 유진. 부디 제 손을 잡아주시겠습니까? 이러면 되나?"
에스코트.
그냥 닥치고 탈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나는 눈을 감고 그의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