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8화 〉던전 어택 (1) (48/193)



〈 48화 〉던전 어택 (1)

두 악마의 뿔을 꺾고 새로운 여정을 위해 발을 뗀 지 어언 세 시간. 악마에게 납치당하고 얼마나 지났는진 잘 모르겠다만 밖은 밝았다.

나는 뻘뻘 흐르는 땀을 냉기 마법으로 식히며 투덜거렸다. 어그로만 안 끌린다면 땅을 뒤집으며 폭발하듯 날아갔을 텐데. 어디 근처에 지나가는 마차 없으려나.  나온 악질 포주가 끄는 노예상이면 더 좋고.

"하아…."

걸어도 걸어도 풀과 흙내음 천지.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 카할리아. '가장 가깝다'라는 건 상대적인 의미일 뿐 맨발로 걸어가는 내겐 전혀 가깝지 않은 거리였다.


그래도. 전처럼 언데드마냥 흐물흐물하진 않았다. 나름의 목표가 생겼으니까. 악마 사냥이라는 터무니 없는 목표가. 인류를 위해 이 한 몸 바치겠다는 숭고한 신념… 이라면 좋겠다만.  본심은 그저 악마들의 가학심에 어울리고 싶을 뿐이었다.


그게 어디야.
자해하면서 처박혀 있는 것보단 낫지.
아니 그게  나으려나.
모르겠네.

중요한  내가 무언갈 '원한다는' 것이다. 비록 폭력과 고통으로 가득 찬 망가진 이상향이라 할지라도. 이 사실 하나만으로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데 어찌 기쁘지 않으리.


그러나 막연한 목표인 건 변하지 않았다. 악마를 조진다고 말은 해도 그 새끼들이 어디서 뭘 하는지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내가 연달아 악마를 만난 건 정말 운이 좋아서다. 인간이 대악마를 연속으로 만나는 게 과연 운이 좋은 것일지는 생각해 봐야 할 문제지만 아무튼.

늪지대를 지나 숲으로. 숲을 지나 초원으로. 방위도 모른 채 오로지 마나의 흐름에만 의존하며 발을 바삐 움직인다.

방위를 모른다는  꽤 큰 단점이었다. 마나의 흐름을 따라가면 언젠가 도착할 수 있겠지만 거리가 거리인지라 일정하게 흐르지 않았다. 이리저리 꼬인 채로 갈 수 있단 말이다. 당연히 시간은 배로 늘어나겠고.


사방을 둘러봐도 몬스터와 사람 그림자 하나 없는 들판뿐이니, 눈을 떠도 장님과 다름없는 상태.

이런 내 불안을 해결해준 건 바퀴 자국이 깊게 파인 비포장도로였다.


마나의 흐름과도 일치했기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적어도, 이 길을 따라가기만 한다면 길을 잃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것이다.

특이 사항이 있다면 밟혀 꺾인 풀 사이로 드문드문 새 풀이 돋아난  정도일까. 사용 안 한 지 조금 됐다는 소리였다. 여러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단순 다른 교역로의 발견으로 도태된 길일 수도 있었다. 내가 이상할 정도로 부정적인 거일 수도 있고.

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도 된다고 하니 별문제는 없을 것이다. 나는 별걱정 없이 길을 따라나섰다. 몬스터들은 내 기세에 쫄아 쉽사리 다가오지 못했고, 아직 날은 밝다. 높게 뻗어있는 나무들이 중간중간 햇빛을 가려주니 움직이기엔 더없이 쾌적했다.


편안한 마음으로 발을 놀리자 잡생각에 가려져 들리지 않았던 모든 소리가 다시금 고개를 내밀어 귀를 간지럽혔다. 미약한 바람 소리,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 8월을 바라보는 따사로운 햇볕 아래서 힘차게 맥동하는 대자연의 울음소리였다.


밝고도 밝은 색채.

나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조용히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평화롭네.'

지금까지 너무 어둡게 살아서 그런지 영 적응이 안 됐다. 물론 카할리아에 다다르면 다시 피폐한 삶으로 돌아가겠지만….


그렇게 붉은 머리를 흩날리며 바람을 쐬고 있을 때였다.


-아니… 잘 좀…


웅성거리는 소리. 몬스터가 아닌 사람의 목소리였다. 마나를 풀어 확인하니 마차를 필두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정체 모를 집단의 형상이 드리워졌다. 나는 바싹 마른 입술을 요염하게 핥고 손을 쥐었다 폈다.

마차를 노획한 도적? 아니면 노예상? 평화로운 풍경에 살짝 질려버린 나는 멋대로 변태적인 망상을 하기 시작했다. 몸이 이따위로 타락하고 난 뒤 겪는 불편함 중 하나였다. 사람을 만나면  망가뜨릴 수 있는지 없는지부터 생각하니 원….

발소리를 죽이고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도적이든 포주든 아무래도 좋았다. 아니면 마차  얻어 타는 거고. 나는 심드렁한 표정을 연기하며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그리하여 그들의 전체적인 윤곽이 눈에 들어왔을 때.

나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직인가?"
"죄송합니다! 힘이 더 필요할  같습니다!"


마차는 총 세 대였다. 흰 바탕에 고풍스러운 금박 장식이 달린 커다란 마차. 그리고 그 뒤를 잇는  대의 작은 갈색 마차. 행상인이라 하기엔 특유의 짐 마차가 없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의 마차를 바라봤다. 저건 사람을 태우기 위한 마차였다. 세 개 전부다.

그중 가장 선두에 있던 갈색 마차 하나가 바퀴가 빠져 제구실을 못 하던 상태였다. 뒤따라오던  마차와 다른 갈색 마차도 덩달아 움직임을 멈췄고. 여러모로 귀찮은 일이 아닐  없었다.

평소라면 도와줬겠지만, 좋지 않은 기류가 느껴졌다.

정확히는, 걸리면 굉장히 귀찮아질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내가 원하는 방향과는 정반대로 향할  같은 그런 예감이. 나는 오십  사이의 거리를 두고 침착하게 뒷걸음질 쳤다. 일행에 마법사가 껴있을 수 있다. 방위 아티펙트가 있을 수도 있고. 쓸데없이 위장 마법을 했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도루묵이다.


나는 최대한 시선을 피하고 주변 소음에 묻혀 몸을 움직였다.  상태로 정확히 열두 걸음 걸었을 때였다.

"누구지?"

중후한 목소리가 울리자 웅성거림이 커졌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걸음을 멈췄다.
내가 저들을 피하려는 이유는 하나였다.
귀족이라서.
그것도 상당히 높은 직급의 귀족 같아서.

흰 마차는 백작가의 상징인데… 저딴 게 왜 여길 지나가는지 모르겠다. 나는 귀족과 엮이기 싫었다. 저들의 혀는 능구렁이와 같으니 상종하지 않는  상책이다.


내가 귀족을 꺼려하는덴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나와 닮아서이다. 동족은 서로를 혐오한다고 했나. 철저히 이득만을 위해 움직이는 게 마법사와 닮아 있었다. 어쩌면. 마법사보다도 더 심할지도.


또 제국의 귀족은 수가 많지 않았다. 대중매체에서 질리도록 나오는 게 공후백작이긴 하다만… 그렇게 가볍게 볼 놈들이 아니다. 적어도 이 세상의 귀족들은 직위에 걸맞는 권리와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니까, 수가 적고 능력도 출중하니 선민사상이 생기기 쉬웠다.

악의가 실체가 되어 전인류를 위협하는 이 세상에서 귀족이 되려면 칼과 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하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브리도니아의 영주가 백작이니… 그에 준하거나 이상인 인물이 저 마차에 타 있다는 소리다. 내가 저들을 꺼림은 당연한 일이었다. 격식 차리긴 영 성질에 안 맞는다.


"무장을 해제하고 항복 의사를 표해라! 그러지 않는다면 적으로 간주하겠다!"

한숨을 쉬고 등을 돌린다. 등을 돌리자 보이는 건 전신경갑의 기사였다. 그래. 기사다. 기사를 호위로 부릴 정도니 마차의 주인이 귀족임은 확정이었다. 입안에 씁쓸함이 퍼진다. 무장은 없었기에 빈손을 어깨 위로 올리며 항복 의사를 표했다.

"신원을 밝혀라."

그새 뒤따라온 병사가 둘. 하나같이 살의를 거두지 않아 흉흉했다. 나는 최대한 표정이 망가지지 않게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모험가입니다."
"모험가?"

아그네스와의 만남 이후 재발급받은 모험가 패. 이번엔 잃어버리지 않게 신경을 썼던지라 아직 가지고 있었다. 나는 갈색 목패를 꺼내어 저들에게 보여줬다. F급 모험가. 유진. 그러자 저들의 눈이 뱀처럼 휘었다.


"F급 모험자가 여기서  하는 거지? 그것도 맨몸으로?"

역시나. 똑같은 의문을 품는다. 나는 다음부터 커다란 배낭이라도 메야겠다 생각하며, 저들에게 대답했다.

"마법을 쓸 줄 압니다."
"마법사! F급 마법사가 인적 하나 없는 교역로에서 뭘 하는 거지?"


질문은 그대로였다. 눈앞의 기사는 교묘하게 흘린 말을 정확히 걸러냈고,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저들의 칼날이 흉흉하게 빛난다. 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말했다.

"…카할리아로 가고 있었습니다."
"이곳에 있는 이유는?"
"길을 잃었습니다."

다만. 정보는 숨긴다.
그리고 연기한다.


"마차를 타고 가던 도중 말이 습격에 죽어버려서…"
"도적인가?"
"예."
"일행은?"
"저 혼자입니다. 마부는…"
"죽었겠군."


비단 마부뿐만 아니라 도적들도 죽었겠지. 마법사는 그런 존재니까.
고작 모험가 등급으로는 측정할  없는 존재.
내 몸에 피는 없었지만 장거리에서 요격하는 마법사 특성상 깔끔한 건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흐음…."


눈 앞의 기사는 어린 소녀가 자신의 말에 따박따박 대답하는  신기한 모양이었나 보다. 하긴. 겉의 비주얼만 보면 아빠와 딸이었다. 날 바라보는 눈빛이 경계에서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그 변화에 안심하던 찰나.

"네가  방향은 케탈리아 늪지대인데… 맞나?"
"예."

늪지대를 지난 건 맞았으니… 숨기진 않았다.

"마차가 끊긴 지 2개월이 넘은 그곳을?"
"…."


아차.


"농담이다."


시발.


잠시 머리가 굳었다. 상대는 긴 턱수염만큼이나 노련한 기사였다. 그는 찰나의 시간동안 굳은 내 얼굴을 놓치지 않았고, 쓴웃음을 지으며 칼을 거둠과 동시에 팔을 들어 병사들의 경계를 풀었다.

"그만.  묻진 않겠다. 네게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으니. 그리고 늙은이의 충고다만, 거짓말을  거면 조금의 어리숙함도 섞도록. 너처럼 무감정한 사람들은 역으로 파고들기가 쉬우니 말이다."
"…충고 감사합니다. 그럼-"
"어딜 가지?"
"…."
"따라와라."

…이래서 귀족 놈들은. 속이 뒤틀린다. 귀족을 호위하는 기사인 만큼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그네스가 머리를 다치지 않았다면 이랬을까. 나도 그렇고 눈앞의 기사도 그렇고. 사람이 완벽해도 꼭 좋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기사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모험가여."
"예."
"따라 해라. 루셸리니 백작가의 긍지 높은 검, 대행자 슈리엘 루셸리니 님을 뵙습니다."
"…그걸 왜 제게 말하죠?"
"빨리."
"…루셀리니 백작가의 긍지 높은 검, 대행자 슈리엘 루셀리니 님을 뵙습니다."
"셀이 아니라 셸. 그래도 잘했다."


갑자기 이런  시키니 혼란이 더해졌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그에게 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내 주인은 자신을 못 알아보는  가장 싫어하니까."
"배려… 감사합니다."
"무얼. 그냥  딸이 생각나서 해본 말이야."


별 이상한 이유에서였다. 그래도 이런 배려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기사를 따라가 도착한 곳은, '주인'이 있는 것으로 추측되는 커다란 흰색 마차였다.


"아, 칼버드. 내 충직한 호위 기사. 어디 갔다 온 거야?"
"모험가를 발견했습니다."
"모험가?"

마차에 작게 뚫려 있는 창 너머로, 금발 머리의 귀공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반듯한 콧대와 사뭇 남자다운 얼굴선을 지닌 그는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내게 시선을 돌렸다.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진다. 평범한 여자라면 한 번에 반해버릴 정도의 미모였으나 내겐 통하지 않았다.

멍하니 그 웃음을 분석하고 있자니 기사의 따끔한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인사를 시작했다.


나를 낮추고 허리를 숙인다.
저들이 부르기 전까진 감히 고개를 들지 않는다.
두 손과 발은 다소곳하게.
그리고 최대한 예의 바르게.


"루셸리니 백작가의 긍지 높은 검, 대행자 슈리엘 루셸리니 님을 뵙습니다."


한 치의 실수 없이. 각도까지 완벽하게. 평민이 행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였다. 칼버드와 슈리엘은 내 군더더기 없는 예법에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평민의 예법은 언젠가 도서관에서 읽어본 적이 있었다. 그땐 이세계에 떨어진 지 얼마 안 됐던지라 돈이 생기는 대로 책을 빌려 읽었었지.  추억이다. 그리고 그때 깨달은 건데, 나는 만화 캐릭터처럼 책을 휘리릭 넘기며 3초 만에 다 읽는 등의 짓을  수 있었다. 그때 쌓은 지식의 양이란… 차마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런 것 따위. 식은 죽 먹기지.

"…칼버드?"
"저는 예법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래. 넌 항상 그런 식이었지."

그때였다.

-바퀴 다 고쳤습니다!!!

살짝 당황한 슈리엘은 마부의 외침을 듣곤 표정을 다잡고 내게 말했다.


"고개 들어. 난 너같이 예의 바른 사람을 좋아하니까."

호수처럼 맑은 목소리가 내 귀를 맴돈다. 나는 그의 허락이 떨어지고 정확히 3초 뒤 고개를 들었다. 또 한  들리는 감탄. 슈리엘은 내 얼굴과 몸을 순식간에 훑더니 기가 차다는 듯이 말했다.

"3초 예법 같은 꼰대들의 구닥다리 산물을 지키는 자가 칼버드 말고 더 있었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넌 누구지? 백작가에서 보낸 감시역? 아니면 첩자?"

내가 말했나.


"…."

사람이 지나치게 완벽해도 꼭 좋지만은 않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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