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기사단의 미친개 (1)
곧바로 산에서 내려가진 않았다. 목숨 걸고 탈출시켰는데 바로 나오면 뭔가 흑막 같잖아. 그래서 3일가량을 산맥에서 지냈다.
가올리스는 자살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얌전히 지냈다. 마나 파장을 확인해봤는데 잘 살아있더라.
"하아…."
흐르는 땀을 냉기 마법으로 식히고 전진한다.
내가 산맥을 내려왔을 땐, 바깥 풍경은 완전히 변해버린 후.
7월의 태양은 다시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고, 평원에 소복이 쌓인 눈은 모두 녹아 잡초들의 양분이 되었다.
추위에 몸을 숨겼던 몬스터들은 다시 얼굴을 비쳤다. 갑작스러운 혹한에 굶주렸던 몬스터들은 날 보는 족족 눈을 까뒤집고 달려들었다.
그런데… 너무 많잖아.
달려드는 그린 스킨을 향해 손을 뻗고, 낮게 읊조린다.
"타올라라―."
―키에에에엑!!!!!
주제를 모르는 잡몹이 너무 많다. 짜증이 날 정도다. 힘 있는 놈들은 격의 차이를 깨닫고 알아서 사리지만, 그럴 지능도 힘도 없는 고블린 같은 새끼들은 인간만 보면 막 달려든다.
재가 되어버린 고블린을 지나치고 방향을 잡는다.
`대충 두 시간 정도 전진하면 되겠네….`
하염없이 걷는다.
브리도니아에 가까워질수록 마찻길이 선명해졌다. 이대로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별문제 없이 도착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고민에 빠졌다.
`으음….`
너무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가도 의심받으려나.
흙 하나 묻지 않은 옷들은 이상할 정도로 깨끗했고, 토벌령에 참가한 모험가치곤 상처 하나 없다. 생각해보면 맨몸으로 평원을 가로지르는 것부터 말이 안 되긴 했다.
고작해야 F급 모험가를 신경 쓸 것 같진 않지만, 괜한 의심 안 받으려면 무언가 조치를 해야 하는 게 맞겠지.
`3일 동안 심심하기도 했고.`
사실 내 개인적인 욕망이 깔린 고민이었다.
3일 동안 뻐팅기면서 몇 번이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숨이 끊어지는 고통, 찍어누르는 압박감, 벌레 보는 듯한 시선… 맘 같아서는 다시 미노타를 찾아가 날이 새도록 당하고 싶지만… 그렇게 마무리를 지었는데 돌아간다니 자존심이 안 살잖아.
요컨대 지금의 난 욕구 불만 상태다.
자해는… 관두기로 했다. 인위적인 상처는 의심만 증폭시킬뿐더러 만족스럽지도 못하다. 마침 몬스터들이 굶주림에 흉포해지기도 했으니 적당히 싸우면서 구르면 될 것이다.
어찌 보면 이것도 자해겠지.
자신의 의지로 몸에 상처를 내는 것이니.
`누가 좋으려나….`
베스트는 미노타 수준의 거대종에게 엉망진창으로 당하는 거다만… 그런 몬스터가 평원에 있을 리 없지. 적당하게 강하고, 큰. 예를 들자면 오크나 늑대무리 정도가 좋겠다.
-취륵! 크르륵!
때마침 멀지 않은 곳에 들짐승을 잡아먹는 오크 무리가 보였다.
수는 세 마리 정도.
이탈 개체가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아무래도 좋았다.
`오크라…. 무난하고 좋네.`
손을 교차시키고 연성 수인을 맺는다. 교차 지점에 마나가 깃들고, 이어서 손을 펼치자 자그마한 토검 하나가 손 위에 올려진다. 가드가 없는 길쭉한 직도. 흙으로 만들었으나 절삭력과 강도만큼은 강철에 필적한다.
마법사인데 왜 검을 만들었냐고?
그야 붙어서 싸울 거니까.
그편이 더 흥분되잖아.
한 손에 검을 들고 오크들에게 다가간다.
-취르륵!!!
오크들은 고기를 뜯다 말고 날 바라봤다. 그들의 눈에는 호기심, 또 탐욕이 서려 있었다. 세 마리 중 딱 한 마리만이 불길함을 느끼고 이리저리 눈치를 봤다.
`이래서 눈치 빠른 몬스터는… `
저놈부터 죽여야겠네.
막무가내로 달려들면 처맞기만 할 뿐이다. 그러니, 선공은 이쪽에서 취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 타겟은 눈치 빠른 오크 녀석.
"흐읍!"
발밑에 마력을 집중시키고, 그대로 땅을 박차 높게 떠오른다. 윗 공기는 상당히 맑았다. 최고점에 다다른 나는 양 손바닥에 작은 마법진을 새겼다.
익스플로전, 그 축소판.
퍼엉! 손끝에 작은 폭발을 일으켜 방향을 바꾼다.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에 근육이 삐걱 거린다. 나는 미약하게 피어오르는 통증을 무시하고 오크에게 날아갔다.
-푸욱!!
"끄윽…!"
공중 기동이 겉보기엔 현란해 보일 순 있어도 실용성은 제로였다. 가속 충격량을 누가 부담한다고 생각하는가? 오크의 배때지를 꿰뚫은 건 좋았으나, 팔이 부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몸을 포기하고 달려든 공격인 만큼 효과는 확실했다.
-취르으으으읅!!!!!
배가 뚫린 오크는 창자가 끊기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나는 그 거친 몸짓에 나가떨어졌고, 나머지 오크들은 혼비백산하며 각자의 무기를 집어 들었다.
"흐으…."
대차게 구른 나는 피 섞인 침을 뱉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은 포기한다. 다시 만들면 되니까. 오크들은 예고도 없는 선빵에 적잖이 당황한 상태였다.
-취르르!!!
꼴에 동료가 당했다고 화를 낸다. 가장 선두에 있던 오크는 더러운 이빨을 세우고 내게 달려들었다. 그 흉측한 모습에 순간 죽여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애써 참아냈다. 목적을 망각하지 말자. 굳이 시간을 버려가며 싸우는 이유는 최대한 많은 상처를 내기 위함이다.
`적당히 놀아주다 세게 때려준다.`
생명 지장이 없는 한에서 맞을 수 있는 공격은 다 맞았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근육과 혈관이 터진다. 오른쪽 안구는 터졌는지 옆 시야가 보이질 않았다. 그러면서도 죽지는 않는다.
전투라기보다는 연극에 가까웠다.
-취히이익…?
이 정도면 아무리 멍청해도 눈치를 까기 마련. 오크들은 작위적인 전투에 공격을 멈추고 경계 서린 눈빛으로 날 응시했다.
`끝내야겠네.`
세게 때려줄 때가 왔다.
―솟아나라.
-콰앙!
내 머리통을 깨부수려던 오크는 갑자기 나타난 돌덩이를 처맞고 저 멀리 날아갔다. 옆에 있던 오크는 멍하니 날아간 동료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송장에 가까운 몸을 이끌고,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 나름 괜찮았어. 무기로 때리지만 말고 좀 더… 뭐라고 할까… 날붙이로 자른다거나, 목을 조른다거나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지성이 없는 놈들이라 아쉬울 뿐이다.
"그럼… 잘 가."
딱! 손가락을 팅기자 오크들이 불타기 시작했다.
영창을 할 필요도 없다.
살코기 타는 냄새가 평원을 가득 채웠다.
"하아…."
달 뜬 숨을 내뱉으며 바닥에 주저앉는다.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은 사람치고는 무척이나 달콤한 숨이었다.
`역시… 최고야.`
붉게 상기된 뺨에 핏방울이 주룩 흐른다.
혼절 직전의 몽롱한 기분은 늘 새롭고, 짜릿했다. 그냥 처맞는 건 서로의 감정이 고조되지 않아 취향은 아니지만… 한동안 너무 자극적인 것만 당해서 그런지 담백하고 좋았다.
"헤으, 흐…."
표정관리를 해야 하는데… 웃음이 멈추질 않는다.
그렇게 몇 분을 미친년처럼 웃어댔을까.
나는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만 재구축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부족하지만… 이 정도만 하고 슬슬 가볼까.`
* * *
브리도니아엔 예상보다 두어 시간 정도 늦게 도착했다. 가는 길에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해서다. 잔상처들이 늘어 오히려 좋긴 했다.
"멈춰라!"
보초가 소리친다.
시간은 늦어 오후 5시 정도. 땡볕 아래서 경계를 이어나가는 병사의 표정은 썩어있었다. 뭣 모르고 나간 모험가들은 대부분이 곤죽이 되어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지저분하고, 역겨운 피 냄새를 풍기기에 좋게 볼 수가 없었다.
모험가의 취급이 대충 이렇다.
냄새나고, 더러운. 꼴에 칼 찼다고 허세나 부리는 멍청이들.
"신분을 밝혀라!"
나도 그중 하나였다. 피투성이로 흐느적거리는 내 모습은 누가 봐도 언데드 그 자체였다.
나는 주머니를 뒤적이며 모험가 패를 찾으려…
…했으나 주머니는 텅 비어있었다.
어디서 흘린 거지.
기억을 천천히 되짚는다.
그러고 보니, 드레스 입고 강간당했을 때 벗어둔 옷을 찾지 않았구나.
하아… 이제 와서 돌아갈 수도 없는데 어쩌지.
"…죄송해요. 흘린 거 같아요."
병사의 얼굴이 찌그러진다.
"기본적인 신원을 밝혀라."
"모험가예요. 등급은 F급."
"뭘 하다 그렇게 다쳤지?"
"…토벌령에 참가했다가 고립됐어요."
"그런가―…잠깐, 뭐?"
토벌령 얘기가 나오자 병사의 눈이 크게 뜨였다.
"토벌령?!"
"네…?"
"1조, 1조인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1조의 마지막 생존자!"
보초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그는 내가 별천지 생물이라도 되는 듯 한참을 바라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는지 창을 내리고 내게 말했다.
"이럴 때가 아니지! 일단 들어오게나!"
"아윽…."
"음, 음?"
아쉽게도 누굴 따라갈 상태가 아니었다.
"아, 아파요…."
중간중간 재구축을 해서 그렇지 원래라면 십 분도 못 걷고 탈진해 버린다. 병사는 아차 싶었는지 손을 떼더니 고개 숙이며 사과했다. 이런 상황을 노렸던 나는 속으로 작게 미소 지었다.
오크들한테 처맞은 보람이 있기는 하네.
"미안하네! 곧바로 회복 스크롤을 준비할 테니 잠시만 기다리게나!"
"스크롤?"
…회복 스크롤까지?
"그분께서 준비한 상급 회복 스크롤만 다섯 장이야. 혹시 귀족인가? 가끔 뭣 모르는 영애들이 신분을 숨기고 모험가 일을 종종 하곤 하지."
상급 회복 스크롤이 개당 20실버 쯤 하니까… 미친 1골드? 개인이 쓰기엔 너무나 큰돈일 뿐더러 F급 모험가한테 쓰기엔 너무 과분했다.
"그분이 누구죠?"
보초는 끊임없이 떠들면서도 착실하게 일을 진행했다.
그의 손에 들린 스크롤은 멋들어진 용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승천하는 푸른 용… 마르나크 공방. 제국에서 손꼽히는 브랜드였다. 돈이 있어도 구하기 힘든 물건인데 어떻게 구한 거지.
"음, 모르나?"
-찌익!
신성력이 가미된 스크롤은 잠이 들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포근한 마나를 지니고 있었다. 자꾸만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뜬다. 몸에 들어오는 충만한 생명력은 죽어가는 몸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보초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내 모습을 흘깃 바라보더니 진절머리난다는 듯 말했다.
"아그네스라네. 기사단의 미친 늑대, 아그네스."
정신이 번쩍 든다.
누구라고?
"전에는 안 그랬는데 진짜 미친개가 되었더군. 오크 토벌을 실패한 게 그리도 충격인 모양이야. 시발련. 그걸 왜 우리 같은 말단 병사한테 화풀이― 아, 들었나?"
내가 괜찮다고 말하자 보초는 헛기침하며 말을 이어갔다.
"일단 들어와라. 안에서 천천히 얘기해 주지."
* * *
"그러니까, 아그네스가 절 찾고 있다고요?"
"보초란 보초들은 다 찾아가서 협박에 가깝게 말하더구나. 1조의 생존자를 찾으면 자신에게 말하라고. 눈을 혈귀처럼 빛내며 쏘아붙이는 게 어찌나 무섭던지…."
"직접 산맥에 가지는 않았나요?"
"병사들 소집해서 닥돌하려는 거 겨우 막았어. 영주님이 허락할 거 같지도 않았고…. 이변은 끝났고, 아이스 트롤들은 얌전해졌잖아? 굳이 소집할 이유가 없지."
보초는 "너 정말 귀족 딸이라도 되나?" 라고 묻더니 피식 웃었다.
"1조의 생존자라는 게 거짓말이라면, 팔다리 하나 잘릴 각오는 해야 할 거다. 지금 기사 나으리 상태가 좋지는 않으니까."
"…어떤데요?"
왠지 모르게 차오르는 불안감을 삼키며 묻는다.
그는 안 좋은 기억이라도 떠오르는 듯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말했잖아. 미친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