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악마와 검은 소와 마법사 (5)
서리 동굴에 갇히고 하루가 지났다.
마나를 풀어 확인해본 결과, 옆옆 방에 있는 남자 모험가들은 잘 살아있었다. 산 제물로 바친 줄 알았더니 이상하게 조용했다. 미노타가 밥도 제때 주는 거 같았고.
여기사의 이름은 아그네스였다. 본인 말로는 기사단에서도 알아주는 기사라고 하는데…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그녀는 끊임없이 떠들어댔다. 자신을 구하러 지원군이 올 것이다, 저딴 놈들쯤은 내가 힘을 회복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등, 듣는 이도 짜증이 날 정도로 재잘재잘 입을 열었다.
당장에라도 입을 꿰매고 싶었지만―
얌전히 들어주기로 했다.
그녀가 쉴 새 없이 떠드는 건 불안을 감추기 위한 일종의 자기 보호다. 아그네스는 생각보다 훨씬 유약했다. 갑옷과 검을 빼앗기고, 오러도 제대로 뽑을 수 없자 공황 상태에 빠져버린 것이다. 내가 닥치라고 해봤자 아그네스의 불안증세만 심각해질 뿐이다.
"나는 여기서 죽을 수 없다. 기사가 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왔는데… 이, 이봐, 듣고 있는 건가?"
"…그럼요."
하아.
실없는 소리를 계속해서 듣다 보니 주목할만한 점이 하나 있었다. 아니, 걱정된다고 해야 하나. 분명 내가 미노타에게 오나홀처럼 따먹히는 걸 봤을 텐데, 이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다. 의도적으로 잊으려 하는 건지, 아니면 잘못 본 것으로 생각하는 건지…
미노타우로스가 오면 무슨 반응을 할까.
-쿵, 쿵.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아이스 트롤이 아닌 더 강한 존재가 산맥에 숨어들…"
"아그네스. 쉿."
여기사의 입을 닥치게 하고 귀를 기울인다.
―적발 암컷!!! 허락!!! 맡았다!!!!
눈을 옆으로 돌린다.
나를 따라 귀를 막은 여기사의 얼굴은 공포로 점칠 되어 있었다.
"아, 으. 그, 어어떻게, 하지? 서, 설마 나도 그, 그. 으, 으…."
나는 한숨을 쉬며 여기사의 뒷목을 감싸고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여기사는 아무 저항 없이 내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찰랑이는 금발은 가슴과 목덜미를 간질였다.
"하아…."
한숨을 쉰다. 여기사가 이런 유아적 행동을 하는 이유는 어젯밤에 있었던 일 때문이다.
어젯밤, 잠에서 깨어난 여기사가 발작을 하는 게 아닌가. 꼴을 보니 자살이라도 할 거 같아서 최대한 어르고 달래봤지만 공황만 심해질 뿐 소용없었다. 나는 고민 끝에 그녀를 억지로 껴안았다. 등을 토닥이며, 어린아이 다루듯 자애로운 말로 긴장을 덜어준다.
내게는 불행하게도, 아주 효과적이었다. 그녀는 공황을 멈추곤 품 안에서 잠들었다. 덕분에 불편한 자세로 몇 시간이나 있어야 했다.
"괜찮아요… 다 지나갈 거에요…"
"으… 우으…"
"아무도 당신을 해치지 않아요. 약속할게요. 모두 살아서 나갈 수 있다고…."
아그네스는 내 가슴에 머리를 파묻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내리 쓰는 내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나는 최대한 그녀를 자극하지 않게, 안심될만한 말들을 마구 내뱉었다.
'다 너 때문에 끌려온 거잖아 미친년아.'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녀의 정신상태는 정말로 심각했다. 보는 내가 안쓰러워질 정도로.
-쿵, 쿵.
미노타우로스의 발소리가 커질수록 떨림은 강해졌다.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부들부들 떠는 게 참으로 불쌍해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미노타우로스가 우리 앞에 당도했을 때.
―적발 암컷!! 가올리스 님에게 감사해라!!!!
여기사는 경련하며 내 몸을 끌어안았다. 무의식적으로 오러까지 끌어다 쓰면서 말이다.
마나 베리어가 없는 내 몸의 내구성은 평범한 소녀의 몸과 같았다. 오러를 두른 여기사의 손길을 버틸 리 없었다. 끌어안은 등허리가 두부 살처럼 찢겨나간다.
"으윽…."
손톱자국 그대로 깊게 파인 자상은… 뭐, 꽤 괜찮았다. 누군가 내게 의존한다는 것도 나름 신선했고. 그래도 다시 하라고 하면 안 할 거 같았다. 당하는 거라면 몰라도, 당한 사람을 보살피는 일은 내 성정에 맞지 않았다.
미노타우로스는 기쁜 얼굴로 소리쳤다.
―너!! 죽지 않는다!!!
나는 고개를 들어 미노타의 눈을 바라보았다. 흑색의 눈은 맑은 호수처럼 반짝였다. 잔뜩 흥분해 실핏줄이 돋은 어젯밤과 몹시 비교되었다. 또 행동거지도 바뀌었다. 날 좀 더 '배려' 해주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앞으로 나랑 산다!!! 고마워해라!!!
덕분에 대화도 시도해볼 수 있었다.
"미노타우로스… 라고 부르면 되나요?"
―그렇다!!!! 난 긍지 높은 지하 미궁의 대괴수!! 미노타우로스다!!!
"…죄송해요. 십 분만 기다려줄 수 있나요?"
미노타의 눈은 내려가 품에 안긴 아그네스에게 향했다. 나는 어젯밤처럼 막무가내로 팔을 휘두를까 싶어 그녀의 몸 위에 마나 장막을 전개했지만, 정말 놀랍게도 미노타우로스는 얌전히 나를 기다려주었다.
―난 인내심이 많다!!! 정확히 십 분!! 기다리겠다!!!!
시발놈아 좀…. 귀 터질 거 같네.
목소리 좀 줄여줬으면 좋겠다.
기회가 되면 부탁해보자.
그 전에 할 일이 있었다. 나는 품 안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여기사를 떼어놓, 아니 무슨 힘이 이리 세? 결국 떼어놓지 못했다. 한숨을 작게 쉰 나는 그녀를 끌어안은 체로 나지막이 말했다.
"아그네스."
"아, 으 나, 나는."
"아그, 네스."
"시, 싫다. 주죽기 시러…."
"…아그네스."
"으으……."
반복해서 그녀의 이름을 읊조리자 조금은 진정된 모양이다. 나는 앞을 떡하니 지키고 있는 미노타우로스에게 시선을 한 번 돌리곤, 다시 아그네스를 바라보았다.
"아그네스."
"으…."
"제가 사라져도 걱정하지 마세요."
아그네스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손이 내 옆구리를 파먹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작게 떨며 말했다.
"므, 므어라고? 어, 어째, 서. 그."
"다시 돌아온다고 약속할게요."
"……."
"약속이에요. 알겠죠?"
"나, 난…."
"대답해주세요."
"아, 알겠다…."
옆구리에 가해진 힘이 약해졌다.
나는 그녀를 살포시 밀어냈다.
'달래기 참 힘드네.'
빨리 생존자들 데리고 탈출해야겠다.
아그네스는 내 옆구리에 생긴 흉측한 상처들을 보고 한참을 뻐금거렸다.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입 밖으로 내진 못했다. 나는 벌벌 떨고 있는 그녀에게 눈웃음을 지어 인사한 뒤 미노타우로스에게 향했다.
―아직 사 분 남았다!!!!
이상한데서 융통성이 없는 미노타우로스 덕에 4분을 멍하니 서 있어야 했지만. 멍청한 소대가리 같으니라고.
나는 그를 따라가며 어젯밤의 계획을 생각했다.
권속이라면, 정신이 이어져 있다는 뜻.
그렇다면 역으로 끊을 수도 있지 않을까.
평범한 마법사라면 불가능하다고 일축하겠지만, 나는 아크메이지다. 타인의 마나에 간섭하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다. 마법진의 힘이 약해진 지금 시도해볼 가치는 넘쳤다.
―따라와라!!!
…그래도.
바로 그러면 재미없지.
조금, 즐기다 가보도록 할까.
* * *
미노타우로스는 나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다. 상당히 넓은 굴이었다. 구석에는 모험가들에게 빼앗은 것이라 추측되는 상당량의 돈과 무구, 그리고 비싸 보이는 옷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옆에 깔린 짚단들을 보아 보물방 겸 침소로 이용하는 듯 했다.
―기다려라!!!
그는 구석에 산처럼 쌓인 옷가지를 한참을 뒤적였다. 나는 허리까지 숙여가며 무언가를 찾는 미노타의 꼴이 조금 우스워 픽하고 웃었다.
그러나.
미노타우로스가 '그것'을 들고왔을 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입어라!!!!
"……네?"
미노타우로스가 들고 온 것은 옷이었다. 핏조각과 흙먼지가 조금 묻었지만, 상당히 깨끗한 백색의 드레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드레스? 그까짓 거 입어줄 수 있다. 남성성은 이미 증발한 지 오래다. 그렇다고 여성성이 생긴 건 아닌지라 복잡미묘한 그런 상태지만 아무튼.
내가 망설인 이유는 정말 별 거 없었다. 저 옷이 과연 의류로서 기능할 수 있을까- 하고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개량된 흔적이 보였지만 전체적으로 슈미즈 드레스 구조의 옷, 아니 천 쪼가리는―
반투명했다.
이런 걸 입어봤자 속살을 다 드러낼 뿐이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미노타우로스는 정말 친절하게도, 내게 속옷까지 건넸다. 나는 미약한 두통을 느끼며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이 역시 정상이 아니었다. 순백색의 속옷은 중요부위를 가리지 못했다. 면적이 작은 건 둘째 치고, 유두와 음부를 의도적으로 드러낸 디자인이었다.
창관행 마차라도 털었나.
이런 걸 어떻게 구한 거지.
아니 그보다 진짜 몬스터가 맞을까. 페티쉬가 있는 몬스터라니 들어본 적도 없다. 사실 미노타우로스 안에 멀쩡한 사람 영혼이 들어있는 거라면? 몬스터인 척 하고 성욕을 푸는 거라면?
모르겠다.
나는 멍하니 손에 들린 천 쪼가리를 바라보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미노타의 눈치를 보았지만 검은 소의 두 눈에는 강력한 의지가 깃들어있었다.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입힐 거라고.
"하아… 갈아입을 테니 잠시만…"
―눈앞에서 입어라!!!
미노타가 느낀 파괴 욕구가 이런 것이었을까.
당장에라도 저 검은 소의 골통을 부숴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몬스터도 인간과 같은 미美의 기준을 가졌는지는 모르겠다만, 저새끼 취향은 인간 기준으로도 정상은 아니었다.
'미친 소대가리….'
그, 그래도, 이걸 입으면, 분명.
으….
…한 번만 참자.
-스윽.
조신하게 벗기엔 '아직은' 제정신인지라 탈의가 급해졌다.
가터벨트에 달린 밴드 고리를 빼내고 스타킹을 벗는다. 재구축으로 인해 상처 하나 없는 매끈하고 새하얀 맨다리가 드러났다.
나는 부끄러움을 참고 본격적인 탈의를 시작했다. 새빨간 프릴치마를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고 속옷을 내린다. 어제 일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꽉 다문 음부는 깨끗하고, 순결했다.
―후우우우!!!
커다란 콧김.
고개를 살짝 돌려 미노타를 바라보니, 아니나 다를까 한계까지 발기했다.
앞으로 다가올 일을 애써 무시한 나는 끈적한 시선 속에서 옷을 벗었다. 이어 미노타가 건넨 속옷을 착용하고, 의류로서 기능이 의심되는 드레스를 껴입는다. 사이즈가 살짝 안 맞았지만 조이면 됐다.
그리하여 완성된 내 모습 창녀와 다름이 없었다.
서리 동굴의 가장 깊은 곳, 미노타우로스의 침소에서 치부를 드러낸 음란한 속옷을 입고 순백색의 투명한 드레스를 걸친 나는―
마치.
몬스터의 신부.
미노타우로스는 발기된 자지를 감출 생각도 하지 않고 내게 소리쳤다.
―엎드려라!!!!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한 나는, 피부에 마나 베리어를 두르고 미노타의 말을 순순히 따랐다.
무릎을 꿇고 상체를 숙인다. 두 손은 가지런히 모아 바닥을 짚고 머리를 내린다. 대상을 높이고, 나를 낮추는 일반적인 절의 형태였지만 그 강도가 달랐다.
존경이 아닌 순종.
순종이 아닌 복종.
복종이 아닌 굴종.
첫날밤의 신부나 입을 음란한 복장으로 행하는 굴종의 의식은 당장에라도 혀를 깨물어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다.
그러나.
새빨개진 얼굴과 다르게 몸은 무척이나 민감해졌다. 바닥과 밀착한 허벅지 사이로 애액이 흘렀고, 심장은 앞으로의 일의 기대감으로 미친 듯이 뛰었다.
어제 그랬던 것처럼 난폭하게.
두들겨 패 죽기 직전까지.
혼절 직전의 몽롱한…
내장이 짜부라지는…
야만적인 삽입에 숨조차 못 쉬는…
인간 이하의… 장난감처럼…
"흐으…."
아랫배가 뜨거워진다.
미노타는 개처럼 엎드린 내게 다가오더니 등에 발을 올렸고, 그대로 힘을 실었다.
-꾸우욱!!
"끄으읏…!!"
뼈가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나는 전신을 짓누르는 압력에 숨조차 쉬지 못하고 끅끅댔다. 미노타는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나를 벌레처럼 짓밟던 미노타우로스는, 내가 혼절 직전까지 갈 때가 돼서야 등에서 발을 뗐다.
-스르륵.
하의를 가린 천이 떨어지는 소리는, 암컷으로서의 본능을 자극했다. 나는 바닥에 시선을 고정하고 미노타의 그림자만 열심히 쫓았다. 그림자의 하반신은 무언가 길쭉하게 튀어나와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툭.
곧이어 뒤통수에 묵직한 무언가가 올려졌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암컷!! 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