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얼어붙은 산맥 (3)
"…뭐야? 자세히 보니 인간이잖아?"
그녀의 붉은 눈이 빛난다. 푸른 머리칼과 대비되어 더욱 선명해 보였다. 가올리스는 내가 멀쩡히 서 있자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멋대로 착각하게냅뒀다.
실시간으로분석해본 결과 해당 마법진은 정신 구속과 함께 마나를 빨아들여, 마력 행사를 억제하는 효과를 지녔음을 확인했다. 아마 6클래스 마법사까지 손도 못 쓰고 픽 쓰러질 것이다.
내가 무너지지 않은 건 단순히 철옹성에 가까운 정신과, 방대한 마나를 지녔기 때문이다.
"진짜 인간이라고? 어떻게 버틴 거지?"
"……."
나는 섣불리 답하지 않았다. 최대한 정보를 아낀다. 마나를 숨기고, 힘을 감춘다. 가올리스는 그리 격이 높은 악마는 아닌지 간단한 속임수에도 손쉽게 넘어갔다.
"뭐 됐어. 멍청이들! 모여!"
그녀가 앙칼지게 소리치자 트롤들이 주위를 둘러쌌다.
수는 못해도 열 마리.
트롤들은 이상하리만큼 가올리스의말을 잘 따랐다.
―가옳!
―가옳옳!
"소름 끼치니까 조용히 말해!"
―가옳…!
"죽이진 말고 전부 굴에 넣어 놔. 나중에 산 제물로 써먹어야 하니까."
―가옳! 가옳!
"가지고 노는 건 상관없는데, 죽기라도 하면 너희 목 다 날려버릴 거야! 산 제물 모으기가 그리 쉬운 줄 알아?! 탈출해도 마찬가지니까 알아서 잘 지켜."
트롤들은 뜨거운 콧김을 뿜어내며 쓰러진 이들을 들쳐멨다.
―가오옳…?
트롤 하나가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느낌상 "저 새끼는요?" 하고 묻는 것 같았다.
"응? 당연히 저년도 가둬야지! 이걸 하나하나 설명해줘야 돼?!"
정답이었다.
트롤몇 마리가 내게 다가오자,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악마는 예상 못 했어. 그냥 전부 죽이고 탈출할까?'
죽이는 것 자체는 쉬웠다.
아예 입도 뻥긋 못하게 도륙을 낼 수 있다.
다만 그러기엔 마력을 빨아들이는 마법진이 너무 거슬렸다. 소규모의 위력의 마법은 가올리스의 마법진에 먹혀버린다.
마법을 쓰려면 마법진이 잡아먹는 마력 그 이상의 출력을 내야 하는데, 산맥 전체를 덮는 규모를 보아 이걸 무시하고 쓸 수 있는 마법은…
메테오.
어스퀘이크.
프로즌 템페스트.
썬더스톰.
'시발.'
용이나 쓸 법한 마법들이다.
저새끼들 죽여버리자고 산맥을 다 깨부술 수는 없었다. 당연히 여기사와 모험가들도 전부죽어버릴 테고. 인제 와서 살인에 거부감을 느끼는 건 아니지만, 무고한 이들을 죽이기는 싫었다.
물론 여기사는 죽어도 쌌다. 시발련.
차라리 도망칠까.
도망친다 해도 두둔할 이는 없었다.
악마를 만났는데 안 도망치는 게 이상하지.
'죽이진 않는다고 했어. 일단… 따라가 보자.'
산 제물로 쓴다고 했으니 목숨은 붙여주겠지. 그전까지 기회를 엿보자. 정 안 되면 나도 어쩔 수 없다.
다 죽이고 탈출하는 수밖에.
그리고 저들이 약속과 다르게 먼저 인질을 죽여도 나는 칼을 뽑아들 것이다.
'그리고… 나쁘지만은 않을지도.'
그래. 좋게 생각하자.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게 과연 '좋은 것'인지 의문이 들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나는 내게 다가오는 트롤에게 양손을 벌리고 저항할 의지가 없음을 밝혔다.
트롤은 낮은 톤으로 그르륵 거리더니 손을 높이 들었고―
-퍼억!
―그대로 처맞았다.
"꺼, 꺼으…?"
배에 가해지는 충격. 나는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경련하며 꼴사납게 쓰러졌다. 갈비뼈 몇 개가 부러진 거 같았다. 몸이 덜덜 떨렸다. 트롤은 만족스러운 콧김을 뿜으며 날 짐짝처럼 들쳐멨다. …맞다 이 새끼들 트롤이었지. 인간과 의사소통이 될 리가 없었다. 트롤과 대화 한 가올리스는 악마였다.
"흐으으…."
고통에 찬 신음은 뜨거운 입김을 뿜어냈다. 추워서 나온 김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로 나온 김일까. 나는 내 처지를 비관하면서도 올라간 입꼬리를 내리지 못했다.
* * *
"그오옳!!"
나를 포함한 여기사와 일행은 깊숙한 곳에 있는 서리 동굴에 내던져졌다. 상당히 깊숙한 곳이었다. 내려가는 데만 십 분이 넘게 걸렸다.
멍청하게도 눈을 가리지 않은 탓에 일차적인 탈출로는 전부 기억했지만… 올라가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나가려면 다른 탈출로가 필요했다.
게다가 이 트롤 놈들, 여자와 남자를 따로 가둬났다.
일행 중에서 여자는 나랑 여기사밖에 없는데… 순간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설마. 설마 진짜 아니겠지.
불행하게도 내가 이리 생각하면 대부분은 현실이 됐다. 후드남과 촉수를 통해 경험해봐서 안다. 현실은 늘 상상을 초월한다. 시발 내가 사지절단 되면서까지 강간당할 줄 알았느냐고.
물론 싫다는 건 아니지만. 아니, 그러니까. 하아.
그런데 정말놀랍게도, 트롤들은 가만히 있었다. 문지기처럼 굴 앞을 지키고 있을 뿐,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얼굴이 붉어진다.
이상한 상상을 한 나만 변태가 됐다.
이쯤되면 진지하게 고찰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 진짜 마조인가?'
이세계에 떨어지고 나서 마조가 되었는가, 아니면 원래 내가 마조였는가. 그것도 아니면 그냥 내가 변태인 건가. 이렇게 고뇌하는 것도 참으로 비참하고 한심했다.
자조하며 머리를 감싼다.
"윽…."
부러진 갈비뼈의 통증은 썩 괜찮았다. 숨도 잘 안 쉬어지는 게 묘하게 만족스러웠고.
'…마조 맞네.'
그래도, 그래도오. 기분 좋은 걸 어떡해. 죽기 직전까지 몰릴 때의 감각이란, 정말이지 황홀하다는 말밖에 안 나온다. 숨이 막힐 때의 몽롱함, 의식이 날아가기 직전의 탈력감, 살이 찢어질 때 뇌가 타들어 가는 듯한 착각. 전부 사랑스러웠다.
"하아……."
한숨을 쉬며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여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 빼앗겼고, 갑주는 벗겨졌다. 다행히 천으로 된 내갑의는 벗기지 않아 보온적인 측면에서는 문제가 없었다. 얼어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 깨어날까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봤지만 눈을 뜰 낌새조차 보이지 않았다.
기사란 놈이 마력 저항이 왜 이리 낮아?
내가 비정상적으로 높은 건가….
다행히 가두기만 하고 따로 구속하진 않았기에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나는 굴 앞을 떡하니 지키고 있는 트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놈을 죽였다간 전부 몰려올 테고….'
아직까진 별다른 수가 없나. 마법진은 아직도 가동 중이었다. 다행히 재구축까지는 막지 못했다. 시험 삼아 팔을 긋고 재생시켜보았는데 잘만 되었다. 속도는 느려졌지만, 되기는 된다.
'진짜 죽치고 앉아있어야 하나.'
확 우울해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다간 진짜 미쳐버릴 거 같아 방구석을 탈출한 나다.
그런데 또 가만히 있으라고?
'그냥 다 죽이고 탈출할까―'
-쿵! 쿵!
―라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자, 커다란 발소리가 들렸다. 굴 앞을 지키고 있던 트롤이 바짝 긴장하며 몸을 떨었다. 무언가 오고 있었다.
가올리스는 아니다. 팔다리 멀쩡히 달린 그녀가 굳이 이런 발소리를 내면서 올 리 없었다.
"미오롫! 미오옳!"
가옳에 이어서 미오옳?
트롤의 언어는 난해했다.
-쿵! 쿵!
또 한 번 울려 퍼지는 난폭한 발소리.
"그옳, 미오옳!"
또 한 번 미옳! 하고 소리친 트롤은 급기야 도망가기 시작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곤 앞으로 다가올 존재를 대비했다.
마력을 끌어모으고 연성 수인을 맺는다. 가올리스의 마법진 때문에 출력을 과도하게 올린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개죽음보단 낫지. 고통스럽게 죽는 거면 몰라… 즉사는 취향이 아니다.
그런데…
―인간!!!
"대체 무슨…"
땅을 뒤집을 각오까지 하며 연성 수인 맺었건만, 눈앞의 존재를 마주 보자 무용지물이 되었다. 무력화됐다거나 그런 게 아니다. 어이가 없어서 쓸 생각조차 안 났다고 해야 함이 옳을 것이다.
-쿠우웅!!
―인간 여자!! 만났다!!!
검은 소머리에 인간의 몸을 가진 거대 괴수.
"미, 미노타우로스?"
형이 거기서 왜 나와?
―맞다! 난!! 미노타우르스다!! 가올리스님의!! 충실한 부하!! 서리 동굴의 간수!!!
미노타우로스는 자랑스럽다는 듯 자신의 직위를 소개했다. 귀가 먹을 정도로 크게 소리치는 것만 아니면 들어줄 만 했을 텐데.
나는 터질듯한 귀를 막고 소대가리를 올려다봤다. 키가 3미터는 되는 것 같았다. 온몸이 근육질이라 그런지 3미터보다 좀 더 커 보였다.
조금 띨띨해 보이는 소대가리는 근처에서 떨고 있는 트롤 하나를 '들어 올리곤' 말했다.
―가올리스님!! 명령!! 말해라!!!
"가오옳!! 그옳 크르릃, 하오옳!!!"
트롤의 키도 만만치 않게 컸지만, 미노타우르스 앞에선 그저 땅꼬마였다. 아이스 트롤은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떨어댔다. 미노타우르스는 트롤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아알겠다아!!" 라고 소리치며 그대로 '집어던졌다.'
-카오옳…
트롤은 벽에 부딪히자마자 즉사했다.
'미친.'
이새끼는 미친 소였다.
말 그대로 광우狂牛.
―허락!! 맡았다!! 너!! 내 장난감이다!!
자, 장난감?
트롤은 가올리스가 말한, '가지고 놀아도 되지만, 죽이지는 마라.' 라는 명령을 그대로 전달한 것 같았다.
―가지고!! 놀 거다!!!
미노타우르스는 허리를 숙여 내 두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 내뿜는 콧김을 온몸으로 느낄 정도로 가까웠다. 소대가리의 검은 눈동자가 내 몸을 끈적하게 훑었다. 나는 기묘한 감각에 몸을 움찔하고 떨었다.
-콰드드득!!
미노타우르스는 쇠창살을 거칠게 뜯어 던졌다.
미친 소는 쓰러져있는 여기사에게 한 번 눈길을 주었지만, 이내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의식 없는 인형보단 살아있는 쪽이 좋다 이건가. 미노타의 관심은 오로지 내게만 집중됐다.
소대가리의 거대한 체구는 하체만으로 내 몸을 전부 가릴 정도였다. 분명 허리를 숙여 같은 높이에서 나를 보고 있었지만, 왜인지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굽힌다고 덩치까지 작아지는 건아니었으니까.
―죽지 마라!!! 함부로!! 죽으면!! 나한테 죽는다!!!
그와 나의 키 차이는 두 배 이상.
덩치로만 따지면, 세 배 이상.
"아, 으…."
감히 올려다보기도 겁이 나는 체급차이.
나는 눈을 내리깔고 바들바들 떨었다.
굴종.
그리고 굴복.
이 압도적인크기 앞에서 나는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생각은 생각일 뿐이었지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무척이나 부끄러웠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곤, 양손으로 치맛단을 꾹 눌렀다.
"흐, 흐으…."
내가 흥분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