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얼어붙은 산맥 (1)
"굉장히… 즐거웠습니다. 아무쪼록 안녕히 가시길 바랍니다."
나는 레일라의 배웅을 받으며 흑장미를 나섰다. 아쉽게도 다이나는 없었다.나를 배웅하기엔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인간관계 미련을 가지는 타입은 아닌지라 별 아쉬움 없이 흑장미를 떠났다.
나는 거리 한복판에서 기지개를 켜곤 몸에 이상이 없는지 점검했다.
촉수에게 범해진 건 환상 속에서만 일어난 일. 당연히 몸에 지장은 없었다. 연기도 분석해본 결과 정말 무해했고. 재구축까지 가지 않아도 됐다.
그래도 찝찝하단 말이지.
촉수 생각만 하면 아랫배가 움찔하고 떨린다. 아무리 환상이라 해도 몬스터의 알을 품고 낳기까지 했으며, 엉덩이에서 입까지 뚫리는 등 겪고 싶어도 겪지 못하는 미친 짓거리를 당했다.
정신이 멀쩡하면 이상… 시발 멀쩡하네. 죽을까 그냥.
그럼에도 기분 좋음을 부정하진 않았다. 이제는 내 감정에 솔직해지기로 했다.
나 진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타락한 건가.
주머니에 손을 꽂고 꿀꿀한 표정으로 거리를 나선다. 높게 쳐도 열여섯은 겨우 넘겨 보이는 꼬맹이가 창관, 그것도 흑장미에서 나오니 몰려드는 시선이 곱진 않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시발.'
남자일 때 못 가본 창관을 여기서, 그것도 여자의 몸으로 가보다니.
나는 손에 5실버를 쥐고 근처 아무 여관 중 하나를 잡은 뒤 체크인했다.
* * *
처음 삼 일은 버틸만했다.
후드남에게 얻은 석화 물약을 연구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나름 보람찼다.
성분은 라이하스 나무뿌리와 살아있는 가고일의 발톱 가루, 그리고 하급 마나 포션 조금. 라이하스 뿌리에 가고일 발톱 가루를 섞은 마나 포션을 뿌리면 급속도로 경화하면서 주변환경을 돌로 바꿔버린다.
'신기하네.'
그걸로 끝이었다.
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돌조각들을 쓸며 한숨을 쉬었다. 당연히 내 몸에 실험해봤다. 몸이 굳어버릴 때 감각이 마비되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게조금 아쉬웠지만, 호기심을 해결했으니 아무래도 좋았다.
근데 이제 어쩌지.
팔이나 그을까.
벽에 기대어 팔목에 칼을 박아넣으려 했지만, 반만 넣고 관둬버렸다. 나는 흐르는 피를 닦아내곤 대자로 뻗었다. 지루했다. 무미건조한 파괴 행위는 지루함을 가속할 뿐이었다. 우울증이라도 생긴 걸까. 이미 있는데 알아차리지 못했을 수도 있다.
"……."
결국, 나는 구석에 처박혀 시체처럼 늘어졌다. 전신에 이불을 두르고 쥐죽은 듯 있었다. 가끔 자살 충동이 밀려왔지만, 자해하면서 참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갔다.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자극, 자극이 필요했다.
흑장미라도 다시 찾아가야 하나. 아니야,환상세계는 다신 안 가기로 했잖아. 그렇게 자문자답하며 손톱을 깨부쉈다.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며 일어난다. 몸을 감싼 이불이 주르륵 떨어지며 먼지를 뿜어냈다. 그러고 보니 일주일 동안 청소도 안 했네. 피 냄새랑 먼지 냄새가 진동했다. 여관 주인이 보면 기겁을 하겠다. 이걸 방치했다간백퍼 쫓겨난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창문으로 다가갔다. 얼마 만에 움직이는 건지 모르겠다. 몇십 분 두리번거리다 늘어져서 팔 긋고 이불 뒤집어쓰기를 일주일 동안 반복했던지라 팔다리가 움직이는 게 다소 생소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닫힌 커튼을 열어 재끼자―
"……눈?"
새하얀 마력의 결정.
밖에선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지금 7월 아니었던가.'
이 세계는 지구와 같은 365일12월, 그레고리력을 썼다. 여기선 그레고리가 아니라 다른 이름이었지만 아무튼.
제국은 북반구에 속했고, 그중에서도최남쪽에 있는 브리도니아는 7월만 되면 지옥을 방불케 하는 더위가 찾아온다. 이번 연도는 덜했지만 덥기는 더웠다. 그런데 눈이라니?
'뭐야 시발.'
내 눈이 이상한 건가. 하지만 눈송이 하나하나에 맺힌 마나 입자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설마설마 하는 마음에 창문을 열어보았지만, 몸이 떨릴 정도로 세게 불어오는 바람은 내게 엿을 선사해주었다.
'아… 그러고 보니….'
몸을 움직이고 현실을 마주 보니 잊고 있었던 문제가 떠올랐다.
나 지금 돈이 없다.
5실버는 석화 물약 연구에 지출하느라 거의 다 써버렸다. 지금 있는 돈으로는 고작해야 여관 2일 치. 돈을 벌어야 했다.
'슬슬 움직이긴 해야 하니… 나쁘진 않네.'
어차피 남은 돈을 생각하면 움직이긴 해야 했다. 7월에눈 내리는 기현상도 조사해볼 겸 나가는 것도 나쁘진 않을지도. 말라 굳어버린 핏조각을 뜯어내고 옷가지를 챙긴다. 평소에 입지 않았던 스타킹도 입어야 할 것 같았다.
전보다 두껍게 옷을 챙겨입고 로브를 두른다.
방 문을 연다.
오랜만의 외출이다.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 맑았다.
* * *
―제설 작업하실 모험가분 구합니다!! 하루 일당 20쿠퍼!
―여름잠에서 깬 얼음 나비 잡으러 가실 모험가!! 힐러 우대!!
모험가 길드는 때 이른 눈으로 굉장히 분주해져 있었다.
익숙한 얼굴도 보였다. 접수원 메리였다. 갈색 머리를 흩날리며 모험가 길드 중앙에 당당하게 선 메리는 고급스러운 양피지 양쪽 끝을 잡곤 펼쳤다. 서신이었다.
"자자~ 여러분!! 브리도니아 백작님께서 토벌령을 내리셨습니다!!"
―토벌?!
―보나 마나 아이스 트롤이 단체로 깨어난 거겠지. 이 근처 일대는 다 얼어버렸으니.
―일전에 대화재도 그렇고 불길한 일이 연달아 일어나는구만.
―마왕이라도 부활한 거 아녀?
―어허 입 조심해!! 성기사들이 들을 수도 있다고!
'토벌령.'
약간이지만 흥미가 동했다.
토벌령은 돈을 빠르게 벌 수 있는 수단 중 하나였다. 물론 능력이 된다면 말이다. 허접한 실력으로는 뼈도 못 추리는 게 토벌령이었다.
메리는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주변 일대의 아이스 트롤들이 여름잠에서 깨어나 흉포해졌다고 하니 참으로 위험하다! 나 파하르 슈발리에 폰 브리도니아가 명한다! 사병들을 이끌어 대대적 토벌에 나서니 너희 모험가들도 동참해주길 바란다!"
서신을 전달한 메리는 명랑한 목소리로 돌아왔다.
"자자! 보상은 머리 하나당 2실버!!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왼쪽 접수창구에서 서명하신 뒤 지정된 날짜와 위치에서 모여주세요!!"
―2실버!!
―아서라. 트롤이 괜히 트롤이겠냐.
―그래도 딱 한 마리만 잡으면…
2실버.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하루하루 벌어 먹고사는 모험가들에겐 눈이 돌아갈 만큼의 액수였다. 아이스 트롤. 그들의 피와 어금니는 귀중한 연금 재료였기에 부수입을 노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괜히 트롤이 트롤이겠는가. 그 크기와 힘은 둘째치고 무지막지한 재생력은 아이스 트롤을 당당히 포식자의 위치로 올려놓는 데 이바지했다. 1이 3을 능히 상대한다. 그것이 트롤이었다.
백작의 의도는 뻔했다. 먼저 모험가들을 밀어 넣은 뒤 체력을 빼내면 그제야 사병을 투입하겠지.
하지만 그 위험성에도 접수창구는 만원을 이루었다. 대부분이 일확천금을 노리는 D급 모험가들이었다. E-F급에서 한참을 구르다 승급한 그들은 과도한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있었다. 나는 달라. 약하고 멍청한 E~F급과는 달라. 아니다. 똑같았다. 저 중 반이 제대로 칼도 못 휘두르고 죽어나갈 것이다. 제 역량을 과대평가한 이들의 최후다.
'나도 참여해볼까.'
마침 돈 부족했는데 잘 됐다.
나는 뺨을 세차게 두드리고접수창구로 향했다.
"거기에 사인하면 신청 완료에요!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신청해놓고 오지 않는다 그러면 계약불이행으로 1실버를 내야 하니까 조심하세요!"
평범한 모험가가 1실버를 낼 능력이 있을 리 만무했기에 참여는 강제에 가까웠다
뭐 사인을 한 자기 잘못이지만.
계약서는 꼼꼼히 읽는 게 기본이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접수원이란 참 냉혹한 직업이다. 그들은 모험가가 사지로 향한다는 것을 알아도 항상 미소로 대한다. 보는 이로 하여금 용기가 생길 정도의 미소를 지어준단 말이다. 그 과정엔 어떠한 경고도 걱정도 없었다.
'어디 보자…'
나는 아이스 트롤 토벌 신청서를 손에 들고 꼼꼼히 읽어보았다. 신청서에는 글자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8번까지 적혀있었으나 그중에서 신경 써야 하는 조항들은 다음과 같았다.
[토벌령에 참여한 모든 모험가는 파하르 슈발리에 폰 브리도니아의 명령에 절대복종한다. 해당 신청서에 적힌 모든 글귀는 브리도니아와 같은 권한을 지님을 명시한다. 이는 다음과 같다.
1. 모든 모험가는 파이나르가 우는 시간, 브리도니아의 북서쪽에 있는 칸타라 평원에 집결한다.
2. 모든 모험가는 브리도니아가家에서 직접 지정한 기사의 휘하에 들어간다. 기사의 권한은 절대적이며, 토벌 과정에서 어떠한 불복종도 일어나선 안 된다.
5. 기사는 전장에서 이탈한 이들을 즉결 처분할 권리를 가진다.
8. 토벌령에 참가한 모든 모험가는 50쿠퍼의 보상금을 받으며 토벌 과정에서 얻은 부산품들의 권리를 가진다. 이 약속은 브리도니아의 이름 아래 어떠한 번복도 거짓도 없다. ]
여기서 파이나르가 우는 시간이란 오전 8시쯤을 말한다. 편차가 있었지만 대부분 6시에서 8시 사이를 파이나르가 우는 시간이라 부른다.
파이나르는 바다 넘어 하일리비 고원에 사는 전설적인 레드 드래곤이었는데, 그의 울음소리가 아침마다 들린다 하여 생긴 관용적 표현이었다. 물론 파이나르는 삼백 년에 가까운 긴 잠을 자고 있었고, 지금도 자고 있었기에 내가 들을 일은 없었다.
하여튼 불합리한 조건의 연속이었다. 명령 불복종은 둘째 치고 즉결 처분권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게다가 접수원은 이에 대해 일절 말하지 않았다. 모험가 중에서 글을 읽을 수 있는 자는 많지 않았다. 그냥 높으신 분 명령 들으면서 싸우면 되는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참나….
그 의도가 뻔히보였기에 더욱 씁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