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막간 - 하룻밤의 꿈
환상세계라고 음욕에 물든 핑크빛 세계만을 비추는 건 아니다. 오히려 건전한 것이 나올 수도 있고, 때로는 뜬금없는 것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생각하는 대로 변하기 때문에 환幻 이고 상想. 스스로가 생각하는 제일第一의 욕망이 음욕과 거리가 있다면 환상세계는 응당 그것을 비추어줄 것이다.
과거, 어느 남기사가 흑장미에 동료를 끌고왔던 적이 있었다. 남자는 동료를 '수 년 동안 수련만 하는 바보'라고 소개했다. 그는 정신 좀 차리라고 큰돈을 써가며 동료를 환상세계에 처넣었지만, 그는 그곳에서도 검을 휘둘렀다.
이렇듯 환상세계는 '가장 원하는 것'을 비춘다.
그러나, 창관이 내뿜는 막대한 음기淫氣는 무시하기 힘들기에 환상세계에 들어온 사람들은 대부분 음욕을택한다.
그런 의미에서 레일라는 애간장이 탔다.
환상세게를 함부로 사용해 다이나에게 대차게 혼난 그녀는, 아직도 환상에 빠져있는 유진을 생각하며 마른 입술을 핥았다.
'벌써 여섯 시간 째야. 대체 뭘보고 있는 거지?'
가끔 잃어버린 연인이나 가족을 환상세계에 투영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 그런 이들은 24시간이고 빠져있으려 하기에, 정신 보호 차원에서 강제로 연결을 끊는다.
마스터 다이나는 내버려두라고 말했지만 내심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고보니… 강간당했다고 했지.'
조금 더 고통스럽게 죽일 걸 그랬나. 쯧 하고 혀를 찬 레일라는 애써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냈다. 혹여 트라우마 따위에 걸려 스스로를 가둔 것이 아닐까. 이상하리만큼 의욕이 없던 것도 이해가 갔다.
'마스터를 찾아가야 해."
-똑똑.
"마스터?"
"응~ 들어와~."
다이나의 방은 6층 공동 주거 시설.
그녀는 흑장미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맡고 있지만, 말단 직원과 똑같은 방을 쓸 정도로 물욕이 없다.
레일라는 다이나의 이런 점이 좋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이나를 찬양하러 온 것이 아니다. 레일라는 문고리를 조심스럽게 잡아당기곤 기품있는 자세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야?"
레일라는 환상세계가 오랜 시간 가동 중이고, 그에 따라 유진의 정신 상태가 걱정된다. 라는 의견을 적절한 근거와 함께 전달했다.
"으음…."
다이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눈을 감고 턱을 괴었다.
"마스터라면,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왜? 내가 환상세계의 창시자라서?"
"……."
침묵.
긍정이었다.
"정답이야. 손님의 욕망을 투영하는 즉시 내게 전달되지."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하고 운을 땐 다이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레일라, 정말 알고 싶어?"
피로에 찌든 듯한 목소리.
레일라는 의문을 느꼈다.
'내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닌가?'
다이나의 목소리에는걱정도, 초조함도 없었다.
손님의 욕망을 엿보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궁금증은 더더욱 커졌다.
속을 알 수 없었던 손님 유진.
세상 만물에 흥미를 잃어버린 그녀의 '욕망'은 대체 무엇일까.
"곧 끝날 것 같으니 본인에게 직접 듣는 게 어때?"
"본인… 에게서 말입니까."
"응. 말해주지 않는다면 그걸로 끝. 우리는 더는 관여해선 안 돼."
"…알겠습니다."
레일라는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섰다.
환상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른 채.
* * *
-쩌저적.
모든 촉수가 몸에서 떨어져 나간다. 엉덩이를 관통해 입으로 나온 촉수도, 가슴과 등허리에붙어있던 촉수도 모두 내게 떨어져 거리를 벌렸다.
동시에 사람 한 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방이 넓어졌다.
나는 영혼이 빠지는 듯한 탈력감에곧바로 주저앉았다. 부푼 배때문에 그조차 힘들었다. 그렇게 겨우겨우 자세를 다잡으며 가쁜 숨을 내쉬고 있자, 알껍데기가 까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배가 진동했다.
-쩌적! 쩌저적!
"하으, 흐으?"
뱃속에 들어있는 '무언가'는 꿈틀거리는 모습이 피부 위로 드러날 정도로 세차게 움직였다.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나는 호흡 곤란에 뒤로 넘어져 팔다리를 경련했다.
-꿈틀.
"햐아아앗?!"
나온다.
나오고 있다.
알을 깨고 나온 그것들은 본능적인 움직임에 따라 자궁 밖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촉수로 인해 벌어진 음부에서 소름 끼치는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민달팽이처럼 생긴 그것들은 제 아비를 닮아 분홍색이었다.
"으긋, 으그흐으…!!"
하나하나 나왔으면 고통이 덜했을 텐데. 그것들은 경쟁하듯 밖으로 나왔다. 나는 게거품을 물며몸을 떨었다. 골반이 으스러지고 한계까지 벌려진 음부는 찢어졌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진작에 죽었을 테지만 내 몸은 멀쩡했다. 모든 고통을 맨정신으로 받아들였다. 뇌가 타는 기분이다. 크게 뜨인 눈은 시체처럼 흐리멍텅했으며 목은 쉬어버려 바닥을 긁는 쇳소리만이 튀어나왔다.
"하그윽…."
대충 스무 마리 정도 튀어나왔을까. 소름끼치는 거대 민달팽이들은 내 몸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말라 비틀어진 애액을 핥으며 위로 향한다. 스무 마리의 '촉수 아이'들은 허벅지와 배꼽을 지나 가슴에 당도했다.
나는 시선을 내려 가슴에 밀집한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경악을 금치 못했다.
'모, 모유?!'
작은가슴에서 흐르는 희멀건 한 액체.
"아흑, 흐긋."
나는 촉수들의 어머니가 되었다.
비참함이 더해진다.
내 몸은 씨받이 그 자체였다.
빨판이라도 있는지 가슴에 모여 착 달라붙은 민달팽이들은 힘차게 모유를 빨아들였다. 나는 형용할 수 없는 감각에 허리를 튕기며 발작했다.
-찌븝!
"하으윽?!"
성공적으로 출산했으니 다시 사용하겠다는 걸까. 으스러지고 찢어진 하반신은 촉수의 치유 효과로 인해 원상태로 돌아갔다. 재사용에 문제는 없었다. 털 하나 없는 매끄러운 음부는 부르르 떨며 촉수를 받아들였다.
-찌븝… 찌븝…
"제, 제바아... 그마아내…."
촉수 아이들은 가슴에 달라붙어 게걸스럽게 모유를 빨아들였고. 다른 촉수들은 입과 음부, 항문을 거칠게 유린했다.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은 다 쑤셔지고 있는 상태.
―하앗, 흐그읍…
살아있는 육벽에 갇힌 지 수 시간.
나는 끝없이 능욕당하며 정신을 잃었다.
* * *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촉수들에게 무자비하게범해지는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으으으?"
눈을 뜨면 낯선 천장.
눈꺼풀은 무쇠처럼 무거웠다. "하아아…." 달 뜬 숨. 촉수에게 벗어났음에도 숨은 아직 거칠었고, 다리 사이로 쑤셔지는 감각은 선명하게 남아 나를 괴롭혔다.
"일어나셨군요 손님."
눈을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보였다.
흑안흑발, 큰 키.
레일라였다.
나는 침대 난간을 잡고 힘겹게 허리를 세워 일어나려 했지만―
"햐아읏?!"
성대하게 실금하며 쓰러졌다. 아직도 촉수들에게 범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침대에무방비하게 쓰러져 노란 액체를 마구 뿜어냈다. 몸이 통제를 벗어났다. 기절한 사이 축적된 쾌락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소, 손님?"
아, 안 돼.
지금 만지면―
"히이이잇?!"
접촉만으로 또 한 번 절정.
일으켜 세운 레일라의 품에 안기며 푸르르 떨었다. 새빨개진 얼굴은 음란한 숨소리를 마구 내뱉었다. 레일라는 이런 내 모습에 심히 당황한 것 같았지만, 능숙하게 대처했다.
"연기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셨군요. 하기야 일곱 시간 동안 갇혀계셨으니 당연합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가니까요. 물론 곧바로 푸는 방법도 있습니다만…."
푸, 풀 수 있다고?
이 끔찍한 감각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나는 레일라의 옷자락을 쥐며 애원했다.
"제, 제바. 푸러져…."
"…알겠습니다."
작게 미소 지은 레일라는 웃을 벗기 시작했다.
잠깐, 옷은 왜 벗어?
"무, 무스은…?"
레일라는 신속하게 드레스를 벗어 던지곤 나체의 상태로 내게 다가왔다. 브래지어를 차지 않았음에도 늘어지지 않고 탱글거리는 유방은, 한차례 출렁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수줍게 달린 연분홍색 젖꼭지는 뾰족하게 튀어나와 고개를 들었다.
나는 멍하니 레일라의 고혹적인 자태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다가온다.
"하아아아읏?!"
"체내에 쌓인 연기는 절정과 함께 빠져나오기에 반복해서 가버린다면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손님께선 일곱 시간을 갇혀계셨으니… 대충 열세 번이면 되겠군요."
'여, 열세 번?'
나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 * *
"손님. 진정 되셨나요?"
진정 됐냐고?
아주 잘 되었다.
너무 잘 되어서 문제지.
"하아으…."
흑색의 드레스는 폼이 아니었다. 극에 달한 밤기술은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입을 맞출 때면 몸이 두둥실 뜨는 몽롱함에 정신이 날아갈 것만 같았고, 한 번 음부를 훑으면 벼락을 맞은 것처럼 떨며 애액을 뿜어냈다.
절정 열세 번.
그녀에겐 식은 죽 먹기였다.
침대는 물바다가 되었다.
모두 레일라와 나의 애액이었다.
"혹시 아직 부족한 것이라면…"
"그, 그만!"
"후후, 농담이랍니다."
진짜 식겁했다.
여기서 한 번 더 가버리면 망가질 것 같았다.
아주 미약하게 떨리긴 했지만, 체내에 쌓인 연기는 대부분 빠져나간 것 같았다. 나는 클린 마법으로 더러워진 옷과 침대를 깨끗하게 만들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일라는 깨끗해진 침대에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어머, 손님께서 수고하실 필요는 없었는데… 무척이나 상냥하시군요."
"고작 클린 마법이에요."
"저는 손님의 그런 점이 좋답니다."
레일라는 옷자락으로 퍼지는 미소를 반쯤 가린 채 후후, 하고 웃었다.
그녀는 내게 조용히 물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환상세계에서 보셨던 것들을 들을 수 있을까요?"
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이, 이걸 말해야 하나?
"꼭, 말해야 하나요?"
레일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 또한 손님의 자유."
입을 꽉 다물고 오랜 시간 고민했다. 레일라는 이런 나를 인내심 있게 기다려주었다.
나는 결국, 말하지 못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레일라는 아쉬운 표정을 최대한 숨기려 했지만, 서운함에 눈꼬리가 내려가는 찰나의 순간을 나는 포착했다. 왠지 모를 죄책감이 심장을 조였지만 이를 악물고 무시했다. 촉수한테 둘러싸여 수 시간 동안 범해진 이야기를 대체 누구한테 하겠냐고.
…빨리 나가야겠다.
"레일라, 출구는 어디죠?"
그녀는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밖이 무척이나 어둡습니다만… 괜찮겠습니까?'
나는 고민했다.
그녀의 말이 순수한 걱정에서 기인했음을 알아챘다.
'하룻밤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뭐라고 해야 할까, 이곳에 있으면 감정이 풍부해지는 느낌이다. 생각해보니 시체처럼 축 늘어져 길거리를 방황하는 것 보단 백배는나은 것 같았다.
여러모로 기분 좋기도 했고.
환상세계는… 두 번 다시 안 쓰기로 했다.
그곳은 죽음을 초월한 고통이 너무 많았다. 그런 곳을 계속해서 사용하다 보면 죽음에 무감정해질 위험이 있다.
"그, 그럼 묵고 갈게요…."
"잘하셨습니다."
물론 며칠만 지나도 무료함에 몸서리치면서 다시 팔이나 긋고 있겠지만, 그것은 나중의 이야기.
나는 지금의 감정을 즐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