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검은 장미 (3)
흑장미 최상층에 위치한 환상세계幻想世界는, 레일라가 유진을 설득했을 때 말했던 것처럼 자극에 둔한 이들을 위한 곳이었다. 본인도 모르는 가장 깊은 곳의 욕망을 콕 집어 보여주는 만큼, 어떠한 이라도 만족하며 나가게 되어있다.
만족도 백퍼센트.
이는 흑장미가 단순 창관에서, 제국인이라면 한 번쯤은 가기를 원하는 '명소'로 탈바꿈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환상세계의 창시자는 다이나 프루카이스
그녀는 대외적으로는 회계 담당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그녀는 음마공淫魔功의 달인이자 뒷골목의 지엄한 여신이었다. 비록 마魔의 기운을 다룬 죄로 본가에서 추방되었지만 레일라가 품은 존경심을 무너뜨리기엔 부족했다.
그녀 덕분에 창관의 여성들이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남성들의 정기를 흡수하면 흡수할수록 젊음과 힘을 얻는 음마공.
'예절 교육'을 빙자한 음마공 수련은 여직원들의 정사 만족도를 높여주었고, 튼튼한 육체와 늙지 않는 외모를 선사해주었다. 자기도 모르게 남자들을 홀리는 요물이 되어가는 것이다. 당연히 다른 창관보다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담 매달 지급해주는 약물은 도대체 무엇이냐?
아무 효능 없다.
노화 방지약이라고 주는 것들은 다 색소만 탄 맹물이다.
'무척… 귀여운 손님이었어요…'
레일라는 수십년 동안 흑장미에서 일하면서 수많은 기술을 터득했다. 대부분 남자를 홀리는 기술이었지만 정사 전 요긴하게 쓰이는 기술을 꼽자면 동정, 처녀 유무를 판별할 수 있는 눈썰미 정도일까.
그런 의미에서 유진이라는 이름의 손님은 굉장히 특별하게 다가왔다.
분명 처녀였다.
하지만 내뿜는 아우라는 호되게 당한 여성의 것이었다.
희고 잡티 하나 없는 부드러운 피부는 음마공을 익힌 레일라도 부러울 정도였다. 그런 피부는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남자를 안았다면 더더욱. 오직 색욕을 멀리한 순결한 처녀만이 가질 수 있는 피부였다.
그런데 눈빛도 그렇고 걸음걸이도 그렇고 강간이라도 당한 것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아닌가. 레일라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저건 절대로 처녀의 걸음걸이가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혼란스러웠다.
유진은 모르겠지만, 다이나가 유진을 데려오고 레일라를 불렀을 때부터 일종의 대화가 오갔다. 눈짓뿐인 대화였지만 서로 의미는 통했으리라.
―마스터, 신입인가요?
―나도 잘 모르겠어.
―모르다뇨?
―직접 확인해보면 알 거야.
과연. 마스터가 말한 대로였다.
그녀는 미스테리 그자체였다.
그래서 알아보려 했다.
하지만 유진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남색도, 여색도 없다. 술에도 흥미가 없는 것 같았다. 식당에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걸 보면 먹는 것에도 욕심은 없던 것 같았다. 설령 같은 여자라도 십분만에 홀려 가버리게 하는 레일라로선 자존심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여동생처럼 아끼는 하린을 폭행하고 도주한 남자를 잡았다고 했을 때 가슴 속으로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흑장미는 은인을 잊지 않는다. 그런데 무엇을 보여줘도 흥미가 동하지 않으니… 레일라는 답답했다.
그래서 비장의 카드로 꺼낸 것이 바로 흑장미 최상층,
환상세계幻想世界.
"하아아……."
레일라는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을 되새기며 흐트러진 옷을 가다듬었다.마스터께 사용 허락을 맡지 않아 호되게 혼날 운명이었지만, 유진의 입술을 생각하니 그리 후회되진 않았다.
비록 유진의 환상세계에선 레일라 자신은 빠져버렸지만…
'저로는, 부족한 것이겠죠.'
유진이 환상세계에 돌입한 이상 레일라는 저 방에 들어갈 수도, 간섭할 수도 없다. 오롯이 그녀의 공간으로 지배되는 절대 성역. 타인의 욕망을엿보는 건 예의가 아니었기에 더더욱.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어요.'
유진의 살결은 만지면 부서질까 걱정될 정도로 부드럽고, 가녀렸다. 솔직히 말해서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될 수만 있다면 옆에서 기르며 키우고 싶을 정도. 레일라는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부디, 행복한 시간을 보내시길.'
하지만 아쉬움은 아쉬움으로 끝내야 했다. 미련을 가지는 것만큼 흑장미에서 멍청한 짓은 없었으니. 음마공을 익힌 이상 한 남자, 한 여자로는 살아갈 수 없는 몸이다. 그녀는 그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흑장미의 꽃말은 이별.
수많은 만남과 이별을 겪어왔다.
이번 만남도 수많은 이별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렇게 등을 돌린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었지만, 점심만 되어도 사람들이 몰릴 게 분명했다. 흑색의 드레스는 절대 폼이 아니니 모두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됐다.
"레일라 언니?"
"프리히시드, 왼발이 어긋났어요."
"아앗, 죄송해요. 그보다 어디 계셨어요?"
회색 드레스를 입은 프리히시드는 레일라에게 자세를 지적받으며 헤헤 웃었다.
레일라는 '손님 한 명을 환상세계에 데려다 주고 왔다' 라고 말할 수 없었다. 환상세계는 자색 드레스 이상에게만 알려지는 기밀 정보였기 때문이다.
레일라는 말을 흐렸다.
"잠시 급한 용무가 있었어요. 그보다 프리히시드, 마스터는 어디 있죠?"
"어,그게. 지하에 잠시 내려가셨는데…."
레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심문실….'
지하에 위치한 심문실.
그 존재를 아는 직원 사이에선 감옥, 고문실, 진실의 방 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그곳은, 흑장미에서 난동을 부린 멍청한 작자들을 가두고 심문하기 위한 곳이다. 술을 변명으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발뺌하는 파렴치한이 종종 있기에 심문실의 존재는 필수적이었다.
SM 플레이를 위해 찾는 손님들도 여럿 있지만, 그것은 따로 준비된 공간.
레일라는 유진에게 들었던 남자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 남자….'
레일라는 이를악 물었다.
찢어죽여도 시원찮을 놈이었다.
'하린을 건든 죗값은, 결코 가볍지 않아.'
자신에겐 엄격하고, 타인에겐 관대하지만, 선을 넘는 순간 용처럼 분노하는 그녀였다. 검은 눈에 붉은 안광이 서렸다. 음마기가 역류한 것이다. 레일라는 화를 억누르고 지하실로 향했다.
* * *
SM플레이로 제공되는 심문실은 청결했지만, 손님용 방이 아닌 '진짜' 심문실은 벽에 걸린 날붙이는 둘째 치고, 어두운 조명에 온갖 곳에 습기가 서려 있어 다소 소름이 끼쳐 보일 수 있다.
레일라는 구석진 곳에 있는 숨겨진 레버를 당기곤, 진짜 심문실 안으로 향했다.
-쿠구구...
"제, 제발. 물 좀 줘."
"닥쳐. 한 시간이라도 살고 싶으면."
마스터의 목소리.
동시에 낯선 남자의 목소리.
"마스터, 여기 계십니까?"
"아, 레일라? 어떻게 알고 왔어?"
"프리히시드가 말해주었습니다. 도주한 남자를 잡았다고 들었습니다만…."
레일라의 눈에 들어온 남자의 모습은 정상이 아니었다. 발견 당시에는 무척이나 뚱뚱하고 기름진 것이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올 정도였지만, 지금은 보는 이도 탄성이 나올 정도로 수척해져 있었다. 고문으로 찢겨나간 몸은 그렇다 치고…
남자의 오른 옆구리는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이상했다.
레일라는 환상세계에 대한 일은 뒤로 미루기로 했다. 지금은 급하지 않았다. 벌이라면 나중에 받으면 된다.
"마스터? 설명이 필요합니다."
"몸이 돌이 됐어. 아슬아슬하게 심장까지 닿진 않았지만, 오른 허벅지와 갈비뼈를비롯한 몇 개의 장기들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지."
석화.
레일라는 입을 가리며 조용히 물었다.
"붙잡기 전에 당한 건가요?"
"아니."
다이나 프루카이스는 묶여있는 주황머리를 거칠게 풀어 재끼곤 겉옷을 벗어던졌다. "후우,역시 벗는 게 최고라니까." 라고 혼잣말을 한 그녀는 평상시의 네글리제를 입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유진 알지? 그 아이가 한 거야."
"손님께서 말입니까?"
"응. 엄청 수상해. 석화 물약은 뒷골목에서도 가장 질 낮은 놈들이 파는 물건인데…."
레일라는 혼란스러웠다.
'뒷골목과 연관이 있어 보이진 않았어. 우연히 얻은거겠지.'
다이나는 레일라의 생각을 읽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우연 같아. 석화 물약을 취급하는 곳은 극히 소수거든."
그렇게 유진의 잘못이 아니다, 라고 판단될 즈음, 남자가 발작하며 소리쳤다.
"물약! 물야아악!"
"물약이 뭐?"
"그새끼야, 그새끼이이!!"
장기 손상에 호흡도 성하지 않을 텐데 어찌 저리 기운을 내는 건지. 당장 죽지 않는 게 기적일 정도였던 남자는마지막 힘을 쥐어짜듯 소리쳤다.
"내가 알아. 그러니까 제발, 제발 좀 살려줘. 난 죽고 싶지 않아…."
"…얘기해 봐."
"그, 그럼 살려줄 건가?"
"거짓 없이, 전부 말하면 생각해보지."
털보는 젖먹던 힘까지 쥐어짜며 사건의 전말을 얘기하였다.
유진이 쥐 떼 처리 파티를 모집하던 도중 돈과 몸을 노리고 접근, 그 후 팔을 자르는 등 무참히 강간하고 돈을 빼앗은 이야기. 그런데 어째서인지 몸 성히 돌아왔다. 자신이 맞은 석화 물약은 동료가 구매한 것. 어째서 유진이 가졌는지는 모른다.
……라며 전부 털어놓았지만.
레일라와 다이나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다.
"씨발, 다 말했잖아!! 살려준다며!!"
"생각해본다고 했지, 살려준다는 말은 없었어. 레일라, 처리해."
"예 마스터."
"으아아!으아아아아!!!"
다이나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몸을 돌렸다. 한시라도 빨리 빠져나가고 싶다는 표정을 지은 그녀는 아주 드물게 인상을 쓰며 심문실을 빠져나갔다. 늘 여유를잃지 않던 다이나인 만큼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레일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몸에서 느릿하게 흘러나오는 음마기淫魔氣에서 절제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
사람이 분노의 끝에 다다르면 어떤 표정을 짓나.
찡그리지도, 일그러트리며 화를 내지도 않는다.
지독한 무표정.
그리고 침묵.
때로는 침묵이 분노를 대변한다.
털보는 레일라의 몸에서 샘솟는 살의를 단 하나도 흘리지 않고 온몸으로 느꼈다.
"자아… 어떻게 죽여 드릴까요… 그래요, 그게 좋겠네요."
레일라는 벽면에 걸린 수많은 날붙이 중, 기다란 편삼각형 구조의 날이 인상적인 단검을 하나 들어 올렸다.
지구식으로 말하자면,
회칼.
"간단하게 오백 포 정도만 뜰게요. 걱정하지 마요. 전부 뜰 때까지 죽이지 않는다고 약속할 테니까."
그리고 몇 시간 뒤.
레일라는 약속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