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검은 장미 (2)
이 세계의 성씨는, 단순히 중세 유럽처럼 땅 있고 작위를 가진 부모의 피를 이었다고 만들어지지 않았다. 훨씬 까다롭다. 작위만 있는 거로는 부족했다.
자신을 증명하고 스스로를 영웅이라 칭한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것. 그래서 귀족들의 족보를 펼쳐 올라가다 보면 초대 가주의 이름은 성이 없는 걸 볼 수 있다.
그 이름 자체로 후손들의 성씨가 되었으니.
성姓은, 단순히 혈연관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이룩해낸 영광을 후손까지 전달하기 위한 횃불이었다.
"으음? 아, 성이 있어서 놀랐구나? 별거 아니야. 나는 방계 중의 방계니까."
프루카이스 가문…
들어본 적 있었다.
과거 마족과의 전쟁에서 보급로를 끊은 몬스터들을 무찌르고 동부지역을 구원한, 일개 병사로부터 시작한 가문.
프루카이스는 전투 도중 오러를 각성하고 혼자서 수천의 몬스터를 무찔렀다고 서술되어있다. 물론 후손들의 과장이 조금 들어가 있겠지만… 보급로 구원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위업이었다.
근데 그런 사람 후손이 왜 창녀 일을 할까. 방계라고 해도 기본적인 지위는 보장될 텐데.
"으음~ 본가에선 거의 버린 아이 취급이니 괜찮지 않을까? 이 일도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고…."
입술을 흐리며 말을 아낀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나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그녀는 본래 회계 담당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태생이 귀족이라 그런지 머리 하나는 잘 돌아가서 계산은 빠삭하단다.
문제는 일하면서 먹었던 게 술이 아니고 미약이었다나 뭐라나. 분위기를 타고 아무 남자나 잡고 바로 본방에 들어갔는데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홧김에 창녀 일을 시작했다는데…
…이게 귀족?
내가 알던 귀족은 대체….
아니, 일하면서 술은 왜 찾아? 하여튼 이상하리만큼 개방적인 여자였다.
"으음,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할 게. 이름은 원하지 않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 그래서, 흑장미에 올 거니? 아니면 돈? 이것도 아니면 남자? 물론 여자도 된단다! 너처럼 귀여운 아이는 앞다투어 가져가려 할 걸?"
물욕은 없는지라 필요한 만큼만 있으면 됐다. 털보를 찾으러 간 건 단순히 괘씸해서고.
돈은 지금 있는 5실버로도 충분하겠지.
남자는…
'꺼져버려.'
이미 두 번 당했다 해도 맨정신으론 다가가기 힘들었다.
"제 이름은 유진이에요."
"예쁜 이름이야!"
"흑장미는… 가보긴 할게요."
말을 흐린 이유는 거기서 뭘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렷다. 이세계에 오기 전에도 유흥가와는 인연이 없던 나였다.
"분명 후회하지 않을 거야."
끌려가는 모양새가 동정 때주러 가는 업소 직원 같았, 아니 업소 직원 맞잖아 시발.
'하아….'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그녀의 손길에 따라 움직였다.
* * *
문을 열고 들어가자 보이는 건 그저 빛.
찬란한 빛이었다.
금박으로 장식된 금장미는 벽 여기저기 장식되어 황금빛을 뽐내었고, 물방울처럼 늘어진 등은 은은한 주황빛을 내고 있었다. 매끈한 옥석 타일은 모든 빛을 반사하며 손님들의 길을 과시했다.
형형색색의 빛은 아름답게 녹아들어,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여자들이 몸을 파는 곳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흑장미에 온 걸 환영해!"
과연 서쪽 거리의 제일가는 가게다웠다.
"레일라! 여기 와서 손님 좀 받아!"
레일라, 라고 불린 여성은 다이나가 소리치자 곧바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날카로운 눈매와 오똑한 코.
왼 가슴에 검은 장미가 자수된, 가슴께가 훤히 드러나는 흑색의 드레스를 입고 있는 그녀는 드레스의 색만큼이나 눈동자와 머리칼도 검었다. 부드러운 생머리는 허리까지 닿았고, 170은 되어 보이는 무척 큰 키와 굴곡진 몸매의 미녀였다.
그야말로 독을 바른 흑장미.
옆에 있으니 땅꼬마가 된 느낌이다. 20cm는 차이 날까. 비율적으로는 꿀리지 않았지만, 압도적인 키 차이는 사람을 주눅이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부르셨습니까 마스터."
레일라는 절도있는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왼가슴에 손을 대고 45도로 굽혀 인사했다. 창녀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기품이었다.
"후후. 놀랐지? 다 내가 가르친 거야. 귀족 예법을 살짝 변형시킨 인사법, 그중에서도 레일라는 흑장미 예법의 정수라 부를만하단다. 내가 부재중이면 대신 가르치기도 하고."
"과찬입니다."
레일라는 싱긋 웃으며 자세를 풀었다.
어째 내 옆에서 멍청하게 웃고 있는 어느 귀족보다 몇 배는 더 귀족다웠다. 정작 가르친 쪽은 예법이고 뭐고 마이웨이였지만, 아무렴 어때.
"귀여운 손님이네요. 어디로 안내하면 될까요?"
"응접실로 안내해. 뭘 요구하면 대부분 들어주고. 비용은 내가 부담할게."
"수발이군요. 알겠습니다."
"나는 용무가 많아서 잠시 자리 좀 비울게. 미안, 유진!"
나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흑안흑발을 보는 건 이세계에 와서 처음이었기에 흥미가 동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당장 나만 해도 적발 적안에, 다이나는 주황 머리였다.
"손님. 이쪽으로."
응접실은 3층이었다.
벽에는 이름 모를 술병이 쭉 진열되었고, 방 안에는 기다란 원형 탁자와 푹신해 보이는 가죽 소파가 떡하니 자리잡았다. 무슨 재질인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매끄러웠다.
나는 엉덩이를 부드럽게 감싸는 소파의 감촉을 즐기며 자리에 앉았다.
레일라는 능숙하게 자리를 안내하더니 술들이 담긴 진열장으로 향했다.
"마실 걸 준비하겠습니다. 따로 원하시는 게 있으신가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거나 좋아요."
"알겠습니다."
그리하여 탁자에 올려진 진홍빛 액체.
"파이커스 자작령에서 재배되어 20년간 숙성된 적포도주입니다. 아무쪼록 즐겨주시길."
-쪼르륵.
포두주의 맛은 조금 떫고, 썼다. 파이커스 자작령이 어딘지도 모르겠고, 20년간 숙성되었다고 해도 내겐 그냥 술일 뿐이었다. 내가 와인 초보라 그런가.
레일라는 요망한 눈웃음을 지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감히 주제넘게 조언하자면, 천천히 음미하면서 마셔야 포도주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저 목구멍으로 흘려 넘기기만 한다면 쓰고, 떫은맛밖에 느끼지 못하겠지요. 혀의 모든 부위를 이용해 단맛과 쓴맛, 신맛까지 모두 느껴야 비로소 '마셨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눈을 감고 레일라의 조언대로 입안에 포도주를 흘려 넣곤 천천히 음미해보았다.
으음. 확실히 달라진 것 같기도. 복합적인 맛이 오묘하게 다가오는 게 썩 나쁜 기분은 아니다.
"잘하셨습니다. 손님께서도 포도주의 매력에 빠지셨으면 좋겠군요."
나는 잔을 조용히 내려놓고 레일라에게 물었다.
"그래서, 전 뭘 하면 될까요."
"그저 즐기시면 됩니다."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말해도…
정말 안타깝게도 이 몸뚱어리로는 뭘 즐기고 싶어도 즐기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서 너무 지루했다. 조금 전까지 팔다리 잘리고 강…간 당한 자극에 비하면 영 시원찮았다.
그렇게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자 레일라는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싱긋 웃었다.
"그러면, 흑장미를 둘러보는 게 어떨까요."
"관광이군요."
"예. 저희 흑장미는 서쪽 거리의 여왕을 자칭하는 만큼 그 규모와 질은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름난 귀족들조차 빈번하게 찾아올 정도지요.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나이를 말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스무 살이에요."
나는 모험가 카드를 건네었다
[F급, 마법사, 유진.]
그녀는 내가 마법사라는 걸 알자 살짝 놀란 눈치였지만 능숙하게 표정을 관리했다.
"성인을 훌쩍 넘겼다니…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문제없겠군요."
내가 미성년자인 줄 알았던 걸까.
참고로 이 세계의 성인식은, 적어도 제국에서는. 17살에 이루어진다. 물론 내 외형은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이세계에 떨어지기 전에는 스무살이었으니 아무튼 스무살이다.
레일라는 내게 카드를 돌려주곤 안내를 시작했다.
"손님, 따라와 주세요."
* * *
"1층은 접수를 맡고 있습니다. 약간의 선별작업을 거친 뒤, 자격이 충분하다고 판단되면 방 열쇠와 함께 비로소 2층으로 올라갈 권한을 부여받습니다. 손님께서는 마스터가 직접 데려온 귀빈. 자격은 충분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끄럽게도, 최근 잘못된 판단으로 사고가 있었지만요.
털보를 말하는 걸까.
어차피 다이나가 말해줄 게 분명했으니 말하는 게 나아보였다.
"그 남자, 이미 잡혔어요."
"예?"
오는 길에 다이나와 함께 털보를 때려잡은 이야기를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레일라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렇군요… 하린이 좋아하겠어요."
"하린?"
"폭행당한 아이입니다. 트라우마에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 아, 죄송합니다. 잡설이 길었군요."
"괜찮아요."
"배려, 감사드립니다."
전보다 가벼워진 발걸음.
그녀의 기분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하린은 저처럼 흑발에 흑안입니다. 흑발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그리 좋지 않아 늘 기죽어있던 아이였는데… 그래선지 머리칼색이 같은 제게 늘 의지하려더군요. 제겐 여동생 같은 존재랍니다."
검은 머리 차별이 심한 건 아니었지만, 종종 부당한 일을 당하기도 한다. 마족의 머리색이 대부분 회색~검은색에 분포한 탓도 있었다. 검은 머리만 보면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또 말이 길어졌군요. 2층은 식당입니다. 저희 흑장미의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기도 합니다. 순수하게 '맛'을 찾아서 이곳을 방문하는 자들은 절대로 적지 않으니까요. 이곳에서 조리되는 음식들은 귀족들마저 감탄할 정도입니다."
3층은 객실과 응접실. 이미 가봐서 안다. 4층은 특수 플레이를 위해 여러 가지가 준비되어있다는데, 딱히 들어가 보고 싶진 않았다. 5층은 도박장. 관심 없다. 6층부터는 창녀와 창남들을 위한 방이다. 놀랍게도 개인마다 방을 배정해준다고 한다.
건물 안내를 받고 있던 나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여기서 일하는 여직원들은 유니폼이라도 되는 듯 흑장미가 달린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레일라처럼 검은 드레스을 입은 직원은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레일라, 드레스 색에 의미가 있나요?"
"드레스 색은 일종의 등급. 가장 낮은 하얀색부터 시작해서 회색, 자색, 검은색 순으로 높아집니다. 그에 따라 품위와 가격도 높아지죠."
기품있는 자세. 흔들리지 않는 걸음. 빼어난 미모 등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져야 받을 수 있다는 검은 드레스.
"그럼…."
"예, 저는 감히 마스터께 흑색 드레스를 하사받았습니다."
그녀의 가격이 궁금해졌지만, 이 역시 입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몸값이 얼마냐 묻는 건 실례지 않은가.
"손님, 안내는 이걸로 끝입니다. 방문해보고 싶은 층이 있으신가요?"
모든 안내를 마친 레일라는 내게 만족스러웠냐고 물었다.
'글쎄.'
솔직히 말해서 휘황찬란한 건물과 맛있는 음식들은 내게 별 흥미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뭐라 말해야 할지 고민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레일라가 최대한 실망하지 않게 말을 고르고 고르던 도중.
열기에 젖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고개를 들고 레일라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그녀는 다소 가학적이게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손님의 잘못이 아닌, 충분한 여흥을 가져다주지 못한 흑장미의 탓이니까요. 돈과 음식, 육체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손님들은 익숙합니다."
그녀는 뱀처럼 입술을 핥았다. 동시에 미끈거리는 시선이 온몸을 기어올랐다. 레일라는 내 머리를 시작으로 다리 아래까지 끈적한 눈으로 훑어보았다.
"하지만 모두 '그곳'에 가면 굉장히 만족스러워하더군요."
거절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듯한 압박감.
"손님께서는 성인 될 나이를 훌쩍 넘기셨으니… 괜찮을 겁니다."
나는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튀어야 하나.'
아무래도 잘못 걸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