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장. 전쟁
제럴드의 곁에서 궁수가 활을 내렸다. 그들은 황제의 지시에 따라 능선을 타고 산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마법사가 까마귀 형의 마물로 감시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으므로, 황제의 기사단으로 시선을 끌게 한 후에 다른 군사를 움직이게 했다.
"마법사는 한 놈도 살려 둬서는 안 된다."
"예!"
사냥대회에서의 대규모 폭발 마법도 그렇고, 마물을 부리는 마법까지…. 이자벨과 흑태자가 데리고 있는 마법사는 위험했다.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한둘쯤은 생포해야 할 터지만, 마법사는 모두 죽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안에는 아이샤가 있지만, 황제가 황비에게 부탁하여 불의 정령왕을 함께 보냈다. 정령왕이아이샤를 보호할 것이므로 그들 군사는 성 밖으로 나오는 자들만을 처치하게 되어 있었다.
성안을 쓸어버리는 것은 조금 있으면 도착할 윌리엄 경과 그의 기사단이맡을 것이다.
그들이숲에 은신한 채 지켜보고 있는 사이, 무시무시한 숫자의 마물이성의 뒷문으로도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까의 마법사를 추적한다기보다는 무언가를 피해도망치는 모양새였다.
뭘 피해서?
그러나 궁금증은 이어지지 않았다. 성의 높은 담장 너머로 보일 만큼 시뻘건 불길이어른거렸던 탓이었다.
'아이샤는 무사한 거겠지?'
궁중 마법사가 안전을 부탁한 젊은 마법사를 떠올리며 제럴드는 혀를 찼다. 보아하니불의 정령왕이날뛰고 있는 모양이었다.
***
쾅!!
거대한 발굽이마물의 등을 내리찍자 마물이피를 토했다. 발굽이찍힌 곳에서는 새빨간 불길이타오르며 삽시간에 그 마물을 집어삼켰다.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는 마물을 뒤로하고, 불의 정령왕은 희희낙락 다음 희생양을 찾았다.
이자벨의 기사와 암살자들은 대부분은 마물과 싸우다가, 혹은 마물을 피해달아나다가 목숨을 잃었다. 얼마 남지 않은 자들은 부상을 입어 싸울 수 없는 자들뿐이었다.
아이샤는 유일하게 무사한 모습으로 홀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불의 정령왕은 아이샤를 중심으로 거대한 진지를 만들듯, 마물을 해치워 나가고 있었다. 이자벨의 잔당들은 이미 기가 질린 채로 그런 불의 정령왕을 지켜보고만있었다.
마물까지도 겁에 질려 슬금슬금 눈치만보고 있는 상황에서 부상당한 인간이야 오죽하겠는가.
덕분에 아이샤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모습으로 정령왕의 싸움을 지켜볼 수 있었다.
더는 로제타의 흉내를 낼 필요가 없었지만, 변신은 풀지 않았다. 만일의 혼선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로제타의 모습을 하고 있으라는 지시가 있었던 탓이다.
로제타는 아덴 공작부인으로 제법 얼굴이알려져 있었지만, 아이샤는 그녀의 동료 외에는 얼굴을 모르는 자가 많았다.
두두두두두!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아이샤는 환한 얼굴로 저택의 문가를 돌아보았다. 황제가 보낸 기사단이도착한 소리였다.
마물은 아직도 많았기에, 그들의 힘이필요했다.
***
상황은 날이저물기 전에 끝이났다. 살아남은 잔당들은 체포되었으며, 마물의 시체 대부분은 소각 처리되었다. 황송하게도 불의 정령왕이그것을 도와주었다.
불의 정령왕은 일을 마친 후에 아이샤가 목에 걸고 있는 초커의 루비 속으로 들어갔다. 미카엘이만든 그 초커는 계약자인 아네트와 장시간 떨어져 있어도 불의 정령왕이이쪽 세계에 있을 수 있게 했다.
제럴드는 아이샤의 말을 듣고 수도 외곽 부분을 뒤져 휘르센 백작부인과 시녀들을 구해냈다. 죽임을 당한 황실 기사들의 시체도 카페 건물의 창고에 숨겨져 있었다.
이일로 휘르센 백작부인은 큰 충격을 받았으므로 당분간 황궁에서 요양을 하기로 했다. 이번 사건으로 죽임을 당한 황실의 호위기사들은 국장으로 장례를 치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엔디미온은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부인 곁을 지키려 한동안 사업에서 손을 떼야 했다. 미카엘의 부관인 카일이소개시켜 준 남자를 자신의 자리에 앉히고 부인을 간병했다.
제럴드는 이자벨의 잔당들을 심문하고 수도에서 그들과 연계되어 있는 이들을 잡아들였다. 그림자들은 꽤 널리 퍼져 있었지만, 이자벨이라는 구심점을 잃은 그들은 이전처럼 매끄럽게 움직이지 못했다.
어수선했던 수도가 점점 정리되어 가는 분위기를 띠는 가운데, 황제 부부는 미카엘에게 연락하여 이자벨의 최후를 알렸다. 미카엘은 예상했던 것보다처참한 이자벨의 죽음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로제타에게 전부를 알리지는 않고 이자벨이제 수하에게 살해되었다는 것만을 가르쳐 주었다. 로제타는 이자벨이더는 그들을 해치지 못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묻지 않았다.
***
"오오! 마님!"
수도의 황제 부부로부터 이자벨이잡혔다는 소식이전해졌으므로, 로제타는 끼고 있던 변신 반지를 빼 버렸다. 아틴의 모습이사라지고 로제타의 본래 모습이드러나게 된 것에 고용인들은 기겁하며 비명인지 환호성인지 모를 소리를 질렀다.
오직 노아만이점잖은 시종의 모습을 지켰을 따름이었다. 고용인들은 미카엘과 지나치게 친밀한 모습을 보이는 아틴을 보고 적개심을 무럭무럭 피워 올리려던 시점이었으므로 안도했다.
그리고 노아에게 가슴속 깊이감사했다.
'위험했다….'
마님에 대한 충성하는 마음으로 아틴을 괴롭힐까 말까로 망설이던 찰나였다.
동성이란 부분은 문제가 안 된다하더라도, 미카엘 님은 유부남이아니던가! 그것은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아니, 왜 말씀해주지 않으신 거예요!"
야속해하는 시녀들에게 로제타는 웃으며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어디에 감시하는 눈이있을지 모르니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인과 시녀 몇몇이빠르게 이소식을 전하자 폴이가장 억울해했다.
"그러니까 내가 제대로 본 게 맞잖아!!"
아쉽게도, 패트릭은 황제 부부가 연락해오기 몇 시간 전에 아덴 공작저를 떠난 참이었다. 흑태자도 이자벨도 죽었으니더는 미카엘을 호위할 의미가 없어졌다. 그는 돌아오라는 상관의 부름에 주저 없이짐을 꾸렸다.
수도에는 로제타가 있으니까.
황제 폐하가 무사하시다고 하니로제타도 곧바로 내려올지도 모르지만, 휘르센 백작부인이아프시다고 들었으니또 모를 일이었다.
서두르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패트릭은 막연한 기대를 품고 서둘러 아덴 공작저를 떠났다. 공작가의 북쪽 성에 머물고 있던 다른 황실 기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하르의 잔당들도 이미 루긴의 경비대에게 넘겼다. 오늘 호송대가 루긴에 도착했다고 하니내일쯤이면 수도로 출발할 것이다.
하나의 쇳덩어리가 된 마검도 교단에 넘겨졌다. 교단 측에서는 이번 일을 교훈 삼아서 아예 그 마검을 새로 짓는 신전의 주춧돌로 삼을 모양인 듯했다.
겹겹으로 봉인되어 땅속 깊은 곳에 깔릴 것이니, 다시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없을 거라고 장담했다.
자하르의 잔당도, 이자벨까지도 처리되었으므로 더는숨길 필요가 없어졌다. 알렉시스는어전 회의 시간을 앞당기고 화려한 드레스를 걸친 아네트와 같이 어전으로 들어섰다.
"폐, 폐하!"
"폐하, 무사하셨군요!"
감격한 듯 머리를 조아리는자들과 혼란에 빠진 표정을 수습하는대신들을 바라보며 알렉시스는옥좌에 앉았다.
"다시 강녕하신 모습을 보게 되다니. 신…,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감격의 눈물까지 흘리는대신들을 보며 알렉시스는피식 웃었다. 저들의 말이 전부 진심이라고 생각할 순진함은 이제 그에게 남아있지 않았다. 즉위한 지가 벌써 10여 년이 넘었으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뿐이었다.
"이리도 건강하셨으면서 저희들에게는왜……?"
"그이유는최근에 잡아들인 반역자들이 있으니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묵직한 속내가 깔린 말에 친귀족파의 대신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최근 이자벨과 관련되어 상당수가 조사를 받고 있는중이었다.
"어찌하여 그중상에서 회복되실 수 있었는지 여쭈어보아도 되겠습니까?"
"아아…. 아덴 공작부인의 힘이 컸다."
알렉시스는요하네스나 다섯 개의 소원에 대해서는말하지 않고, 로제타에게 딱 한 번 사용할 수 있는유물이 있어 그것을 자신에게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로제타가 빛의 정령왕과 계약해서 라스탄에 새로운 경사가 생겼다는것도 공표했다.
"오오…. 빛의 정령왕이라니!"
"정녕 황실의 경사로군요!"
"두 분의 정령왕이 제국을 수호하게 되다니!"
각각의 정령왕은 제 계약자에만 관심이 있을 뿐, 라스탄의 운명에는하등 흥미가 없었지만 대신들은 그렇게 받아들였다.
이에 로제타의 자격에 의문을 품고 있던 자들의 눈빛이 시들해지는것이 보였다.
"그래서…. 아덴 공작부인의 지위도 있고, 이번의 공을 생각하여 작위를 줄까 하는데."
이미 그녀는아덴 공작부인이었지만, 정령왕의 계약자였으니 그에 마땅한 지위를 주는것이 당연하다 생각되었다. 거기다 황제를 살린 공도 무시할 수 없었다.
황비인 아네트는불의 정령왕과 계약했다는이유로 후작 작위를 받은 전례가 있었다. 알렉시스는로제타에게도 똑같은 지위를 줄 생각이었다.
귀족들은 그에 눈치 경쟁을 했다. 휘르센 백작가가 후작가가 되는거라면 막고 싶은 일이지만, 로제타는이미 아덴 공작부인이었다. 아덴 공작가에 후작 작위 하나가 넘어가는것은 깊은 호수에 물 한 양동이를 더하는것과 같았다.
"폐하께서 생각해 놓은 위치가 있으십니까?"
"빛의 정령왕은 수백 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더구나 그녀는이미 황족인 바. 그격에 맞는대우를 해 주어야 마땅하지."
하며 알렉시스는말을 이었다.
"아덴 공작부인은 새로운 영지와 후작 작위를 하사받을 것이다. 이에 이의가 있는자가 있느냐?"
엄한 목소리로 말하며 신하들을 내려다보자 그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렸다.
"폐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저희는모두 폐하의 뜻에 따를 것이옵니다!"
이견이 없다는것을 확인한 알렉시스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로제타에게 후작 작위를 주는것을 결정하고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반역자인 이그네시아공작가의 처우에 대한 것이었다.
***
"벌써 떠나셨단 말입니까?"
황실로 복귀하자마자 패트릭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로제타의 안부를 묻는것이었다. 대외적으로는마법사가 로제타의 모습으로 변신한 것을 알리지 않았으므로, 그녀는미카엘의 간호를 하기 위해 급히 아덴 공작령으로 돌아간 것으로 되어 있었다.
"네, 며칠 되었습니다만….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 아닙니다."
패트릭은 황급히 변명하며 돌아섰다. 유부녀인 로제타에게 자신이 용무가 있다고 알려져도 이상하게 여겨질 것이다.
'벌써 돌아가다니….'
그는미카엘에게 선언한 것이 있으니 로제타에게도 제 마음을 알릴 작정이었다. 처음에는거부하거나 거절당할 테지만, 그녀의 곁에 자신이라는남자가 힘이 되어 줄 거라는사실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그곳에서 로제타가 홀로 마음을 끓이는것은 아닌가?'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이런 마음의 통증 같은 것은 이전에는가져 보지 못한 것이었다. 아이리스를 연모할 때에도 화가 나고 마음이 아팠던 적은 있었지만, 로제타를 사랑할 때와는다른 감정이었다.
패트릭은 지금의 이 감정이야말로 진실한 자신의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리스를 생각하던 그마음이 서투른 풋사랑이라면, 지금은 한층 성숙된 마음이었다.
'그사람을 위해, 로제타를 위해 준비할 것이다!'
언젠가 로제타가 미카엘을 떠나 자신의 품으로 올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마칠 작정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사랑에 빠진 남자가 해야 할 최소한의 조건이라 생각했다.
***
신전으로 돌아와 미카엘이 불러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아이리스 또한 로제타가 빛의 정령왕과 계약한 정령사라는소식을 들었다. 그말에 당장 신녀들몇몇이 아이리스에게 속닥거렸다. 빛의 정령왕과 계약한 정령사라면 미카엘의 저주를 풀 수 있을 거라는내용이었다.
아이리스는그사실에 경악했다.
'이게, 이렇게 되면 안 되는데!'
그이벤트는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자신이 아이리스 리온이고, 이 로맨스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던가!
"어떻게 그런…. 로제타가 그런 힘을 가져서는안 되는거잖아! 걔는하찮은 악녀인데! 난 미카엘 때문에 위험한 일도 겪었는데! 그런 건 싫어!!!"
정확히는흑태자의 소행이었지만, 아이리스는미카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미카엘이나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무사했다 해도 부족했다. 아이리스는자신이 위험에 처했던 일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성녀님. 미카엘 님은 이미 결혼을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저주 문제도…. 부인과 같이 풀어 가실 모양이니, 그분에 대해서는마음을 접으시지요."
"듣기 싫어."
"네?"
"듣기 싫다고! 누가 그런 말을 듣고 싶다고 했어?! 내게 필요한 건 미카엘 님이란 말이야! 미카엘 님을 데려오라고!!"
소설의 내용 따위는아무래도 좋았다. 남자주인공이 미카엘이 아니라는것은 알았지만, 주인공인 자신이 원하지 않는가! 자신이 좋아하고 원하는이가 남자주인공이 되어야 마땅했다. 그건 미카엘이고, 미카엘은 자신을 사랑해야만 하는것이다.
상실감에 성질을 부리는아이리스의 모습에 시중을 들던 이들은 당황했다. 성녀가 제멋대로인 부분이 있다는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럴 줄은 몰랐다.
"성녀님, 상대는아덴 공작님이십니다. 저희 신전에서 마음대로 초대할 수는…. 엇!"
분노한 아이리스의 손에 물그릇이 내던져졌다.
울컥하여 수건과 물이 담긴 그릇을 내던지기는했으나, 자신의 행동에 놀란 듯 순간 굳어졌던 아이리스가 되레 뻔뻔하게 언성을 높였다.
"그게 뭐?! 나는성녀잖아! 라스탄의 유일한 성녀! 내가 보고 싶다는데! 내가 원한다는데, 얼굴 한번 비추는게 그렇게 어려워! 내 남자가 되라는것도 아니잖아!!"
흥분한 아이리스는제 체면도 잊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성녀님의 기분이 좋지 않은 듯하니…."
아이리스가 생떼를 부리기 시작하자 다른 나이 지긋한 신녀가 아까의 신녀에게 속삭였다. 말이 통하지 않을 듯하니 내버려 두라는얘기였다.
신녀들이 떨어진 그릇과 물을 대충 치우고 허둥지둥 방에서 나갔다. 탁, 하고 문이 닫히는소리가 매정하게만 느껴졌다.
홀로 방 안에 남은 아이리스는목 놓아울기 시작했다.
"어엉…. 흐아앙! 이게 뭐야! 내가 주인공인데…. 왜 이렇게 되는거야!"
너무 억울하고 원통한데, 하소연을 받아주는사람도 없었다. 아이리스는다시 간절히 아버지와 오빠가 그리워졌다.
***
이그네시아공작가와 그에 동조한 반역자들에 대한 처벌이 결정되었다. 여타의 반역이 그러하듯 전원 참수시키는것이 당연하다는반응이었다. 아이를 가진 이그네시아공녀 또한 똑같은 결론이 났다.
"하? 나는이그네시아공녀의 얼굴을 이번 사건으로 처음 기억하게 되었다. 정무 때문에 황비와 보내는시간이 줄어드는것도 아깝거늘. 다른 여인이 눈에 들어올 것 같은가?"
알렉시스는눈이 있으면 아네트를 보라는반응이었다. 그러나 그정도로는파다하게 퍼진 소문과 사람들의 머릿속에 담긴 의혹을 거둘 수 없었다. 황제는이그네시아공녀의 사생활을 철저히 파헤치도록 지시했다.
그로 인해 그녀의 전 애인과 그의 친구들이 자주 어울리던 술집의 주인까지 증인으로 불려 가게 되었다.
수도의 많은 사람들은 이그네시아공녀의 전 애인과 그친구들이 몇 주 전에 소문도 없이 실종되었다는사실에 집중했다.
자하르의 잔당들을 심문한 결과 흑태자 로드리고가 이그네시아공녀의 뒤를 봐주고 있었다는사실이 드러났다. 사람들은 공녀의 배 속에 있는아이가 흑태자의 아이가 아니냐는말까지 떠들어댔다.
배 속의 아이에게까지 죄를 묻는것은 잔혹한 일이었지만, 그아이는장차 라스탄에 혈겁을 가져올 아이였다.
알렉시스는자신이 이렇게 많은 증거를 들어 이그네시아공녀와의 연계를 부인한다 해도 의혹이 남을 거라는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악한 자들이 태어난 아이를 책동질하여 반역을 도모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에 휘말려 목숨을 잃을 것이다.
오랜 고심 끝에 그가 이그네시아공녀의 사형을 결정한 날. 공교롭게도 그녀가 그사이 유산했다는사실이 드러났다.
이그네시아공녀는임산부라는사실 때문에 심문도 제대로 받지 않은 몸이었다. 갇히기는했어도 감옥이 아닌, 깨끗한 방이었다.
날짜는공교롭게도 황제가 모든 상처에서 회복되어 무탈하다는것을 알게 된 날이었다.
이전까지는제대로 황궁의 의원에게 진찰을 받았지만, 연극을 할 필요가 없어진 후에는의례적인 진찰만 오갔을 뿐이다. 이그네시아공녀는유산한 사실을 들키면 제 목이 위태로워질까 봐 이제까지 숨기고 있었다고 했다.
이그네시아공녀는또다시 황실을 기만한 죄까지 더해져 가장 먼저 참수형에 처해졌다. 시신은 다른 반역자들과 같이 황야에 버려졌으며, 그녀의 이름이 적힌 귀족 연감까지도 불태우라는지시가 내려졌다.
이 소식이 멀리 타국에까지 전해지자 자하르의 왕 일리야는이그네시아공녀를 공공연하게 동정하며 알렉시스의 잔혹함을 비난했다.
라스탄을 달래는것이 통하지 않자 적대적으로 돌아선 것이다. 대답으로 돌아온 것은 자하르의 왕자인 흑태자 로드리고의 목이었다.
알렉시스는공개적으로자신의 암살미수 사건에 자하르의 왕 일리야가 배후에 있었다는사실을 드러내고 전쟁을 선포했다. 이미 선황제 부부의 암살에 자하르가 관련되어 있다는증거가 나온 상태였다.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이에 당혹감을 드러낸 것은 자하르와 인접하고 있는국가였다.
라스탄은 자하르에까지 도달하기에 두 개의 나라를 거쳐야 했다. 그들은 라스탄이 자하르를 빌미로자신들을 공격하지는않을까 두려워했다.
이에 알렉시스는각 나라로사신을 보내어 자하르의 만행을 고발했다.
알렉시스는이전부터 자하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다만 자하르가 라스탄에 관여하고 있다는정보만은 쉽게 얻을 수 없어 내버려 두고 있었던 것뿐이다.
자하르가 수작을 부린 것은 라스탄만이 아니었다.
일리야는모든 자식들에게 로드리고와 같은 것을 주문했고, 그들은 왕의 눈에 들기 위해 그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 각 나라의 주요 인사들과 왕족의 죽음에 자하르가 관련이 있다는것을 안 각국의 왕은 분노했다.
라스탄은 배가 부른 용이었으나 자하르는집 앞에 머무는배고픈 승냥이였다. 사신은 황제가 더는영토를 넓힐 의지가 없으시다는것을 천명하며 다른 것을 약속했다.
자하르의 영토였다.
라스탄은 어차피 거대한 산맥과 긴 거리에 가로막혀 자하르를 지배하기 어려웠다. 그러니 자하르의 땅덩어리는이 전쟁에 참여하는나라의 수만큼 나눌 것이라 했다.
각국의 왕들이 솔깃해할 만한 것이었다. 자하르는그들에게 위협적인 존재였고, 다음에는자신의 차례가 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면 라스탄은 무엇을 갖는단 말입니까? 아무런 대가 없이 자하르를 공격한다는것을 믿으란 말씀이오?"
"대신 라스탄은 '다시는라스탄의 황실을 건드려서는안 된다는명성'을 가져갈 것입니다."
"무슨…."
"저희 폐하께서 원하는것은 자하르의 완전한 멸망입니다."
알렉시스는자하르의 왕실에 대한 모든 흔적을 그 땅에서 지울 것을 요구했다. 살려 줄 가치가 있는이들은 자하르에게 침략당해 노예가 된 망국의 백성들뿐이었다. 자하르의 모든 백성까지 몰살시킬 것.
그것이 라스탄이 자하르의 영토를 받아 가지 않는조건이었다.
"물론 그 전에…. 이 나라에 있는자하르의 왕족부터 축출하여 처형하셔야겠지요."
무시무시한 제의였다. 그러나 자하르의 왕족들은 정략적으로혼인을 한다 해도 간자 짓을 한 것이 들통나서 대부분 가문 밖으로쫓겨나기 일쑤였다.
그 탓으로자하르 왕의 요구로정략혼을 하더라도 동침을 하지 않고 별거부터 들어가는것이 일반적이었다.
"거절한다면 저희는이 나라 또한 자하르의 동맹국이라 판단할 것입니다."
사신은 선봉에 서는건 라스탄의 군대일 것을 약속했다. 그들은 라스탄의 군대가 자하르를 쓸고 지나간 뒤에 살육하고 지배하면 그만이었다.
선택의 여지를 주는것 같았으나, 그렇지 못했다. 다만 연합군의 선봉에 설 필요가 없다는사실을 그들은 거듭 확인했다.
그렇게 반자하르 연합군이 완성되었다.
***
로제타와 미카엘은 휘르센 백작부인인 셀리나의 병문안을 가기 위해 수도로돌아온 참이었다. 로제타에게 해를 가한 집안의 영애들이, 대부분 반역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기에 재판은 하나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라로쉬 영애에 대한 재판이었다.
로제타는그녀에 대한 소식은 들었으나 재판을 참관하지는않았다. 그녀는여러 차례 사죄하는편지를 보냈었다.
그녀는달게 벌을 받을 것이며, 징역이 끝나면 라로쉬 백작가의 영지로내려가 남편과 결혼을 하고 조용히 살겠다고 약속하고 있었다.
자하르와의 전쟁으로나라가 어수선했으므로, 재판은 약식으로끝났다. 라로쉬 영애는1개월 징역형의 비교적 가벼운 선고를 받았다. 재판정에서는남편과 아들이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아덴 공작가의 심부름꾼은 라로쉬 영애가 선고를 받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것을 지켜보며 조용히 떠나갔다.
로제타는그 소식을 전해 듣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군의 선봉에 설 것을 명령받은 이는발레르 공작가의 소공작인 길버트였다. 발레르 공작은 이그네시아 공작가와의 어설픈 연계가 이것을 초래했음을 깨닫고 가슴을 치며 후회했다.
'발레르 공작가가 기꺼이 선봉에 나서 황실에 대한 충심을 증명해 내리라 본다.'
알렉시스의 서늘한 말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했다. 황제는발레르 공작이 잠시 마음이 흔들렸고, 이그네시아 공작가와 황실 사이에서 저울질했다는것을 아는듯했다.
"저도 형님과 같이 나가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로건이 말했으나 빌헬름은 완고하게 고개를 저었다.
"너는안 된다. 두 아들을 다 전장으로내몰 수는없어!"
"아버지!"
"안 된다면 안 되는줄 알아!"
빌헬름은 길버트에게 괴로운 듯한 눈길을 던지고는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빌헬름은 최근 길버트와의 사이가 틀어지고 있었다.
길버트의 약혼녀가 그에게 파혼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친구로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으나, 빌헬름이 다른 며느리를 원한다는사실을 눈치채자 약혼녀는결별을 요구했다.
그녀 또한 공작가의 공녀였으니, 그러한 대우를 받을 이유가 없었다.
제 감정을 표현한 적이 없었던 길버트는그 일로빌헬름을 원망하게 된 것 같았다.
"…내게는아무 일도 없을 거다. 내가 없는동안 아버지를 부탁한다."
"형님."
로건이 길버트를 보았으나 길버트는고개를 가로젓고는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정치적인 싸움보다는차라리 전장이 더 마음 편한 길버트였다.
처음부터 황실을 등지는선택을 하는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차라리 이번 일로황실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면 다행스러울 것이다. 길버트는자신이 공작이 된다면 결코 지난번과 같은 실수는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에 로제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원작1에는자하르와의 전쟁이 나오지 않지만 원작2에는나왔다.
원작2에는지금과는다른 방식으로암살 사건이 일어나고, 희생자는알렉시스였다. 미카엘이 손을 쓸 수 없는사이, 홀로전장에 나간 알렉시스는흑태자 로드리고의 손에 죽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흑태자가 이미 미카엘의 손에 죽은 상태였다.
원작2에서는권 결말 무렵에서야 죽었던 인물인데!
그리고 지금…. 미카엘은 자신 또한 출정해야 한다는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자하르가 오랫동안 라스탄을 괴롭혀 온 흑막이었습니다. 그들이 마신의 유물을 사용하고 있었으니, 어쩌면 폐하의 저주를 풀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로제타는왜 미카엘이어야 하느냐든지, 다른 사람을 보내면 안 되냐는말을 하지 못했다. 그는원작2의 남자주인공이었다.
'로드리고도 죽었으니까…. 괜찮을 거라는건 알지만.'
미카엘을 바라보는로제타의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많은 군사들이 출전하게 되는전장에서, 마법사가 가장 안전한 포지션을 가지고 있다는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는현실이 아닌가! 두려웠다.
"무, 무사히 다녀오셔야 해요? 어디든 다치는일 없이…."
다정한 손끝이 로제타의 눈물을 훔쳤다. 미카엘은 로제타의 양손을 감싸 쥐고는그 손바닥에 입 맞췄다.
"무사히 부인의 곁에 돌아올 겁니다. 돌아와서 그대를 영원히 사랑하고 아껴 줄 겁니다. 내 로제타…. 나의 로즈."
끝내 울음이 새어 나왔다. 미카엘은 그런 로제타를 품에 안으며 말없이 그녀가 울음을 멈출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로제타는자신도 같이 가면 안 되냐고 애원했지만, 미카엘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전쟁이 위험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전쟁의 참상은 로제타와 같이 다정한 사람이 보아서는안 되는광경이라고 생각했다.
"길게 끌 전쟁은 아닙니다. 반년 안에 끝이 날 테니…. 두고 보십시오."
***
출전전날에는자하르로떠나는자들을 위한 파티가 열렸다. 출전하는자들은 친귀족파의 귀족들과 신진 귀족들의 숫자가 많았다. 친황제파의 귀족들 중 일부도 황제의 눈에 들기 위해 전쟁에 참가하기로했다.
황제 알렉시스는이미 공공연하게, 반역자들로부터 압수한 영지와 작위를 그 전쟁으로공을 세운 자에게 나누어 주겠다 선언한 바가 있었다.
그래서 파티에 참석한 자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저 자하르를 벌하기 위해 나가는소모적인 전쟁이라고 인식되지 않아서였다. 거기다 미카엘의 존재가 있었다.
라스탄의 대부분은 미카엘의 마법이 얼마나 뛰어난지 소문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의 마법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는사실에 흥분하고 있는것이다.
'전부다…, 모였구나.'
미카엘과 같이 파티에 참석한 로제타는씁쓸하게 웃었다. 아이리스의 서브남 셋이 출전하지 않은 것은 원작2의 내용과 같았다.
모든 가문에서 차출한 것도 아니요. 급박한 전쟁도 아니었기에 몇몇의 가문을 제외하고는원하는이들만 참전하는전쟁이었다.
제럴드 또한 출전하고 싶어 했으나 엔디미온과 셀리나의 극렬한 반대로무산되었다. 특히나 셀리나는미카엘이 출전한다는사실에도 길길이 날뛰며 화를 내었었다.
'폐하께서는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니?! 그 귀한 동생을…!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는동생을 전쟁터에 보내다니! 세상에 이런 일이!!'
로제타는그 뒤는듣지 않았다. 황제를 원망하는마음이 없잖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원작2에서 그가 전쟁터에 나가 죽는다는걸 알기에 황제가 왜 직접 출전하지 않느냐고 비난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셀리나가 워낙 화를 냈기에 엔디미온은 이 파티에는참석하지 않기로했다. 셀리나가 황제에게 대들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제럴드만이 부모님을 대신하여 파티에 참석했다. 이번 전쟁의 사령관을 맡은 길버트 발레르의 동생인 로건은 당연히 참석했고, 패트릭 또한 자리를 지켰다. 그의 집안에서는사촌 남동생이 출전할 예정이라고 했다.
샴페인 잔을 든 패트릭이 이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지만, 로제타는오늘만큼은 그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일 미카엘이 떠나는것이다.
"로제타…. 그만하고 나갈까요? 이 정도 자리를 지켰으면 됐을 겁니다."
미카엘의 속삭임에 로제타는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와 황비 부부도 일찌감치 자리를 떠난 상태였다. 지금의 로제타는미카엘 말고는아무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아덴 공작 부부에게 조금이라도 말을 붙이려고 노력하는자들도 지겨웠다.
황제 부부가 어떤 표정으로자신을 쳐다보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미안한눈치였는지, 아니면 측은하다는 눈빛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미카엘의 손을 잡고 황궁의 복도를 걸으며 로제타는 울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내일 전쟁터로나가는 것은미카엘 님이야. 우는 건 아무 도움 안 돼….'
미카엘은전쟁이 길어지지 않을 것이라 장담했다. 그녀가 이 라스탄에서 할 수 있는 일은그저 미카엘을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최악의 경우가 벌어진다 해도, 미카엘이 살아 있기만 하면 하나 남은소원으로어떻게든 그를 구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니, 미카엘 님은무사히 돌아오실 거야.'
알고 있는데도 왜 이리 불안한지 모를 일이었다. 원작2의 줄거리가 새로운 희생자를 바랄까 두려웠다. 이제 이 세계가 소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로제타."
멍히 생각에잠긴 로제타의 손을 끌어당기며 미카엘이 그 손끝을 입에물었다. 가볍게 깨무는 것에로제타가 그를 쳐다보았다.
"제가 곁에있는데도 다른 생각을 하는 겁니까?"
"아…, 아니에요."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요?"
미카엘은조금 투덜거리며 로제타를 끌어안고 뺨에입 맞췄다. 로제타의 창백한얼굴에다소 혈색이 돌아오는 듯했다.
"란스필드가…. 부인을 지나칠 정도로쳐다보더군요. 닳으니 그만 보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그냥 미카엘 님을 끌어안고 싶었어요."
정확히는 그 가슴에머리를 기대고 울고 싶었다. 그러나 우는 것은미카엘이 전장으로떠난 이후에해도 될 것이었다. 미카엘에게는 좋은모습만을 보이고 싶다.
"많이 불안합니까?"
로제타는 고개를 저었다. 불안했지만 미카엘이 계속 걱정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미카엘은미안하다는 듯이 낯을 흐렸다.
"미안합니다. 이번 일이 끝나면…, 다시는 부인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 테니, 용서해 주세요."
"흡, 네…."
새어 나오는 눈물을 삼키며 로제타가 대답했다. 곁에는 시종도 시녀도 있었지만 미카엘은상관하지 않고 제 입술로로제타의 울음을 집어삼켰다. 서로의 혀가 뒤엉키고 끈적한소리가 울리는 대담한키스였지만, 오직 서로에게만 집중했다.
시중인들이 힐끗거리는 시선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미카엘의 숨결을 탐하며 로제타는 긴 한숨을 흘렸다.
쏟아지는 눈물에미카엘이 손끝으로그것을 훔치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눈물도 핥아먹고 싶었지만 다디단 입술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하아……, 로제타."
욕망으로이글거리는 목소리로중얼거리며 미카엘이 로제타를 안아 올렸다. 그는 거칠게 입술을 포개며 걸음을 서둘렀다. 곁을 지키고 있는 시종과 시녀들도 허둥지둥 두 사람을 지름길로인도했다.
***
무슨 정신으로새벽궁으로돌아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미카엘은새벽궁으로들어가기가 무섭게 로제타와 같이 침실에틀어박혔다.
군대와 같이 출발하는 것은늦은아침이었다. 초저녁인 지금은시간이 꽤 남았다고도 할 수 있었지만, 젊은연인들에게는 그저 시간이 부족하게만 여겨졌다.
옷이 벗겨지고 두 개의 나신이 한데 뒤엉켜 침대 위로떨어졌다. 미카엘은한시도 떨어진 적 없었다는 듯이 로제타의 입술을 탐하며 그녀의 다리 사이를 노닐었다. 음란하고 집요한손길에로제타는 몸을 비틀며 쾌락에신음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으나 그것이 그가 주는 쾌락으로인한것인지, 내일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로인한것인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였다.
마침내 하나가 되자 로제타는 감당할 수 없는 쾌락에허덕였다. 내일 떠난다는 사실이 감정에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모르나, 이전보다도 진한쾌감에삽입한것만으로도 가볍게 도달해 버린 것 같았다.
간신히 사정만은참아 낸 미카엘이 로제타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기억하겠다는 듯이 그녀의 안을 탐하였다. 손길로도 쉼 없이 로제타의 느끼는 모든 곳을 음미했다.
로제타는 미카엘의 강인한팔 안에서 신음하며 그에게 매달렸다. 내일이 되도, 날이 밝아도 미카엘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읏, 아앗……. 미카엘! 아앙……."
"로제타……. 으읏…."
살과 살이 부딪히며 마찰하는 소리도 어딘가 몽롱하게 느껴졌다. 로제타는 온몸으로그를 끌어안으며 내일이 되지 않기만을 바랐다.
"로제타, 로제타……. 사랑합니다. 사랑해요……."
속삭여지는 달콤한목소리에로제타는 눈물을 흘렸다. 잠깐의 이별임은알았지만 이제는 곁에있는 것이 너무나 당연해진 이였다.
"저도 사랑해요. 제발……. 무사히 돌아와야 해요."
미카엘의 실력을 아는 이라면 코웃음 칠 듯한애원도, 사랑하는 이의 입에서 흘러나오니 그저 달콤하기만 했다. 미카엘은황홀한감정에휩싸여 로제타를 바라보았다.
그에게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존귀한여인이었다. 자신의 인생을 전부 갈아 넣어서라도 행복하게 만들고 싶은사람.
"물론입니다. 로제타…. 돌아오면 더 가득 사랑해 주세요. 우리의 신혼여행지였던, 그 섬에서…, 휴가를 보내는 것도 좋을 겁니다."
지금의 로제타는 미카엘이 무엇을 부탁해도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로제타는 눈물 가득한얼굴로미카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사히만 돌아오면 뭐든요."
"뭐든…. 진심입니까?"
"으응…."
로제타는 울먹이며 끄덕였다. 제가 얼마나 위험한제의를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미카엘은사르르 녹을 듯한미소를 지으며 로제타의 입술에키스했다.
"그런 말을 들어 버렸으니…. 정말로머리카락 한올 다쳐서는 안 되겠군요."
미카엘은열심히 허릿짓하며 속삭였다. 로제타는 신음하며 미카엘의 어깨와 등줄기를 쓸어내렸다. 적어도 몇 개월간은그를 이 팔에안지 못할 터였다. 생각만으로도 자꾸 눈물이 터져 나오려고 해서 로제타는 울음과 신음을 삼켰다.
"빨리 돌아올 겁니다. 최대한빨리…. 그동안 로제타는 몸 상하지 않게, 제대로먹고 잠들도록 해요. 돌아오면 제가 또 못살게 굴 테니."
눈물 가득한로제타의 얼굴에키스를 쏟아 내며 미카엘이 속삭였다. 눈물 젖은두 뺨과 눈두덩이에, 반듯한이마와 콧날에, 가느다란 목과 어깨에도 입 맞추고 신음하는 입술에도 녹을 듯한키스를 떨어트렸다.
"사랑합니다, 로제타……. 평생 당신의 곁에머물러 있을 거예요. 그러니 안심하고 기다려 주세요. 반드시 당신의 곁으로돌아올 테니."
나의 로제타, 하고 미카엘이 속삭였다.
로제타의 지그시 감은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질척해지는 허릿짓에달콤한교성 또한높아졌다. 미카엘은새벽이 올 때까지도 로제타를 품에서 놓지 않고 사랑해 주었다.
***
출전하는 군대를 배웅하는 일은길고도 숨 막히는 일이었다. 로제타는 선두에서 길버트와 나란히 말을 탄 미카엘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주변에서 무어라 말을 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미카엘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더 사랑한다고 해 주어야 하는데.
그저 한번 더 건네지 못한말이 아쉬웠다.
미카엘의 모습이 완전히 멀어져 보이지 않게 되어 버리고, 행렬도 끝에다다랐을 즈음, 누군가 로제타의 팔을 건드렸다. 화들짝 놀라 쳐다보니 아네트였다.
"로제타."
황제는 먼저 들어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로제타의 곁에있던 휘르센 백작 부부는 황비의 등장에당황하고 있었다.
"그리 어려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휘르센 백작가는 이제 황실의 사돈이 아닙니까?"
"그, 그렇지만…."
힐끗 셀리나가 쳐다보는 시선에로제타는 아네트를 바라보았다. 아네트는 다정한얼굴로로제타의 손을 잡았다.
"며칠 황궁에머물 건가? 아니면 휘르센 백작가에있을 건가?"
황궁에거처가 마련되어 있다고는 해도 시댁이었다. 미카엘 없이는 불편할 테니, 아네트는 로제타가 백작가에머물기를 바라는 모양이었다. 엔디미온과 셀리나 또한그것을 바라는 눈치였으나 로제타는 고개를 저었다.
"공작가로갈 것입니다. 황실에머물러 있느라 집을 너무 오래 비워 둔 것 같으니까요."
로제타의 계획에휘르센 백작 부부는 당황한듯이 보였다. 그들은미카엘이 전장에나가 있는 동안 로제타가 백작저에머물 거라 생각한모양이었다.
그러나 지금보다 더 힘들고 어려울 때도 힘이 되어 주지 않았던 가족이었다. 로제타는 그들에게 기댈 마음이 없었다.
아네트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기 전에차 한잔은괜찮겠지?"
"누가 전하의 청을 거절하겠습니까?"
비꼬는 말 없이 로제타가 답하는 것에아네트는 웃었다. 그녀가 초대한것은로제타만이 아니었으므로휘르센 백작 부부와 제럴드도 자리에참석했다.
아네트가 상석에앉고 로제타와 셀리나, 엔디미온과 제럴드가 마주보는 위치에앉았다. 소리도 없이 다가온 궁인들이 다과를 날라 왔다.
"식욕은없겠지만…. 들게나."
"식욕이 없다니요. 전하께서 내려 주시는 것인데요."
셀리나는 기쁘게 잔을 들며 말했다. 그녀는 황궁에서 나온 이후로줄곧 이곳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나중에로제타가 황비가 되면 황궁의 한구석이라도 내어달라고 단단히 조를 계획까지 세운 모양이었다.
"계속 공작저에머물 생각인가?"
"별장도 한번 살펴보고…, 곧바로공작령으로내려갈 예정입니다. 여러 가지 일이 있어서 공작가의 가풍을 배우는 데도 늦어졌고요."
"바쁘게 사는 것은좋은일이지. 하나 몸이 상해서는 안 될 것이야."
"그래. 황비 전하께서도 말씀하셨잖니. 아덴 공작 각하께서도 걱정하실 텐데…. 백작저로돌아와서 편히 쉬는 것은어떠니?"
눈치를 보던 셀리나가 슬쩍 말을 꺼냈다. 로제타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배워야 할 일이니 늦추고 싶지 않아요."
미카엘은그저 로제타를 싸고돌고 싶어만 하니 어찌 보면 지금이 좋은기회이기도 했다. 거기다가 한껏 힘을 쏟는 와중에는 불안감이 덜할 것 같았다.
"이제 공작부인이 되었으니, 백작 영애일 때와는 책임이 다르겠지."
엔디미온이 인정한다는 듯이 끄덕이자 셀리나가 테이블 밑으로엔디미온의 발을 세게 밟는 것 같았다. 제럴드는 그 광경을 모르는 체하며 로제타를 보았다.
"돌아가는 일정은어찌 되지? 공작령까지만이라도 바래다주고 싶은데."
"그럴 필요는…."
로제타는 내키지 않는다는 투였으나 아네트는 금세 긍정했다.
"휘르센 경이 그리해 준다면 황실은걱정 하나를 더는 셈이지. 어차피 황실 기사단을 붙여 호위하려 생각하고 있었으니, 거절하지 말아다오. 로제타."
아네트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로제타는 힐끗 제럴드를 바라보았다. 여느 때와 같은진지한얼굴로제럴드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전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받아들이겠습니다."
하고 로제타가 대답했다.
***
라스탄을 비롯한각국의 연합군이 자하르를 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이 와중에발등에불이 떨어진 것은점령당한나라의 저항군들이었다. 그들은자하르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나라를 되찾기 위해, 혹은노예로끌려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이대로전쟁이 벌어지면, 이전의 왕국으로돌아가기는커녕 이웃한다른 나라에게 흡수되어 버리고 말 터였다.
그들은발 빠르게 라스탄의 사신단을 찾아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려 애썼다. 다른 나라보다도 라스탄의 인정을 받는다면, 제 나라를 되찾는 것이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러나 다른 나라의 군대에게 제 나라의 독립을 부탁하는 것은불가능한일이었다. 최소한동등하게 싸울 수 있는 군대가 형성되어 있음을 증명해야 협상이 가능했다.
점령당한 두 개의 나라에는 각각의 구심점이 있었다. 대부분의 왕족이 자하르에게 점령당하며 어린아이까지살해되었지만, 살아남은이는 있기 마련이었다.
이중 가장 빠르게 라스탄에게 사절단을 보낸 것은티르 왕녀 쪽이었다. 알렉시스는 그들이 내보인 정보에 어느 정도 과장이 끼어 있으리라 판단했지만, 수용해 주었다.
민간의 지지와 저항군을 형성한 지도력을 인정해 준 것이다.
반면 자하르의 멸망을 점치고새로운 나라에서 제 지위를 보장받으려는 다른 왕국의 생존자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시했다.
라스탄의 군대가 산맥을 넘고자하르의 국경까지육박하자 자하르의 왕 일리야는 보고를 받고이를 갈았다. 그는 라스탄의 군대가 산을 넘느라 지쳤을 거라 판단하고쉴 틈을 주지않으려 했다.
그러나 선제공격을 해 온 쪽은라스탄이었다. 하늘을 뒤덮은새빨간 마법이 자하르의 성벽과 군대를 지나 영주의 성으로 날아갔다.
마법이 발달한 시대였기에 대부분의 성에는 이를 대비한 보호 마법진과 마법진을 펼칠 수 있는 마법사가 상주하고있었다.
콰아아앙! 콰쾅!!
지축을 울리는 소리를 내며 수백 개의 유성이 성의 방어막을 두드렸다. 방어막이 마법을 막아 낸 것은딱 한 번뿐이었다. 유성우가 끝나자마자 방어막은산산조각 나서 무너졌다.
뒤이어 마법을 펼친 것은성에 있는 마법사들이었으나, 그들은유성우가 방어막을 때릴 때마다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마침내 유성우가 성에 내리꽂히고성안에 숨어 있던 영주는 무너진 성과 같이 유명을 달리하게 되었다.
이는 미카엘이 나선 것도 아니고, 휘하의 마법사들 중 일부가 나섰을 뿐이었다. 허무하게 무너지는 성을 본 자하르의 군대는 경악했다. 마법사들의 마법이 다음에 어디로 향할지는 뻔한 노릇이었다.
3차로 마법사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하늘에서부터 황금빛 빗줄기가 내리꽂혀 성문이 녹아내리는 것을 목격한 자하르의 지휘관은낮게 탄식했다.
자하르로서는 승산 없는 싸움이 시작되려 하고있었다.
***
셀리나의 끊임없는 설득 끝에 로제타는 백작가에서 하룻밤 머물기로 했다. 이게 다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었으나, 휘르센 백작가와 척을 졌다는 말이 나돌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대로 셀리나가 로제타에게 관심을 준 것은딱 마차 안에서까지였다. 공작가의 마차가 휘르센 백작가의 저택에 도착하자 셀리나는 자신의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살롱에서 마르타 후작부인이 떠들어대더구나! 자신이었다면 폐하의 바짓자락을 붙들어서라도 남편이 전장에 나가지않게 했을 거라고말이야. 그래서 내가 한마디 해 줬다."
귀부인들 앞에서 제 딸의 역성을 들어 주었다는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셀리나는 거듭 휘르센 백작가에 머무를 것을 요구했다.
"사람들이 무어라 생각하겠니? 공작부인으로서 제 역할을 다하는 것도 좋지만, 너는 결혼한 지1년도 안 된 아가씨야. 어엿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좋겠지만, 너무 그리 냉정히 대하면 휘르센 백작가의 꼴이 우스워지지않겠니?"
"어머니…."
묘하게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는 셀리나의 모습에 제럴드가 제동을 걸고싶은듯 마땅찮은표정을 지었다.
"휘르센 백작가는 네 친정이다. 네 친정이 바로 서야 공작가 내에서도 네가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야."
"제가 정령왕과 계약한 정령사라는 건 알고계시는 거죠?"
가만히 듣고있던 로제타가 묻자 셀리나는 흠칫 말을 멈췄다.
"다, 당연히 알지?"
"그걸로 후작 작위를 받은것도요."
"그야 알지만…."
이어지려는 셀리나의 잔소리에 로제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작가 내에서 절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은없어요. 제 눈치를 보면 모를까. 그런 걱정은하지않으셔도 돼요. 저도 이제 결혼했으니 친정에 폐는 그만끼쳐야죠."
휘르센 백작가의 이름에 흠집 내지말라며 고함을 지른 전적이 있는 셀리나가 멈칫하며 다른 말을 찾는 듯 눈을 깜박였다. 로제타는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저러다말겠지.'
원래도 셀리나는 한바탕 잔소리를 퍼붓고는 친구들을 만나러 외출해 버리는 사람이었다. 엔디미온은제 사업에 복귀하느라 정신이 없을 테고, 제럴드는 그의 일정이 있을 터였다.
차라리 더 가족같이 느껴지는 것은휘르센 백작가의 고용인들 쪽이었다.
'이 기회에 마리나 만나 보고가면 되겠네. 잘지내는지몰라.'
로제타는 마리와 친했던 시녀와 하녀들의 이름을 떠올리며 저택으로 들어갔다. 집사와 시녀들이 환하게 웃으며 로제타를 반겨 주었다.
***
자하르의 귀족들이 겁을 집어먹은것은당연한 이치였다. 지방 영주의 경우에는 벌써부터 재산을 빼돌리고타국으로 도망치고있다는 소문까지전해졌다.
반란군들은이 소문을 더욱 크게 키우며, 제 국민들을 대피시키는 일에 모든 힘을 쏟고있었다. 라스탄의 군대가 오기 전에 그들을 모두 대피시켜야만했다. 그 자리에 남아 있다가는 자하르의 군대와 같이 취급될 것이 뻔했다.
라스탄에 의해 자하르의 추악한 행각이 만천하에 드러난 터라, 주변국들 중 어느 누구도 중재에 나서지않았다. 군대를 보내주기는커녕 제 나라의 사신과 상인들에게 피해가 될까 봐 그들을 철수시키는 형국이었다.
자하르에도 마법사가 있고, 와이번을 길들여 그 위에 올라타 공격을 퍼붓는, 일종의 용기사가 있었으나 소용없었다.
라스탄의 마법사들을 만나면 그 자리에서 땅바닥으로 추락했으며, 와이번에 깔려 몸을 일으키지못하는 그들을 라스탄의 기사들이 도륙했다.
길버트가 이끄는 군대는 무서운 기세로 치고올라왔다. 최단 경로로 총독부의 성을 짓밟고그대로 자하르의 수도로 올라오는 것에, 자하르의 왕인 일리야는 수도를 버렸다.
단 8일 만에 자하르의 수도에 입성한 미카엘은길버트에게 휘하의 마법사단의 절반 이상을 맡기고자료 수집에 들어갔다. 자하르의 모든 유적을 남김없이 불태우라는 황제의 명이 있었으니, 자료 수집이 끝나면 자하르 성은무너트릴 예정이었다.
라스탄이 뚫어 놓은길로 각 나라의 연합군이 밀고들어왔다. 그들은며칠 만에 여섯 개 도시를 탈환했으며 반란군의 수장인 티르 왕녀가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녀는 자신들의 숫자가 얼마 되지않아, 각 나라들 사이에서 제 목소리를 내지못할까 우려하고있었다. 그래서 전면전보다는 암습을 가해 지휘관의 목을 베었으며, 라스탄과 정보를 교환하는 것에 힘을 쏟고있었다.
길버트는 각 관문을 빠르게 짓밟고길을 넓혀 가고있었기에 이동이 빨랐다. 반면 미카엘은요직에 있으면서도 수도를 점령하고정보를 모으는 중이었다.
티르 왕녀가 접근하기에는 미카엘 쪽이 수월하게 보였다. 라스탄과의 관계가 어느 정도 되는가에 따라 제 나라의 독립이 인정받을 수 있는가, 아닌가가 달려 있었기에 티르 왕녀는 필사적이었다.
그래서일까? 전쟁이 시작된 지한 달이 겨우 넘었을 뿐인데도, 티르 왕녀와 미카엘 황자 사이에 묘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
'돌겠네.'
로제타는 아덴 공작가에 머물며 떠나지않는 제럴드를 기이하게 쳐다보고있었다. 그는 로제타를 호위하기 위해 공작가의 성까지동행했다. 호적상으로는 오빠였으므로 여독이 풀릴 때까지며칠 머무르라고말하는 것은당연한 이치였다.
그러나 황궁의 기사단이 다떠나간 후에도 제럴드는 떠나지않고아덴 공작가의 성에 남아 있었다.
'…이유는 짐작 가지만.'
어처구니없게도 패트릭이 루긴으로 와 있었다. 친척 누군가를 방문하러 왔다면서 그의 저택에 머무르고있는 모양이었다.
제럴드는 로제타에게 온 편지중에서 패트릭의 초대장이 있는 것을 보고황당해했다.
어차피 매일 와서 쌓이는 것이 초대장인지라, 로제타는 읽어 보지도 않고불참으로 적어 되돌려 보내라고지시를 내렸었다.
그 초대장이 제럴드의 눈에 들어갔다는 건….
'노아나 시종들 중 누군가의 소행이겠지.'
그들 스스로 주인의 초대장을 빼돌려서, 제럴드 앞으로 온 것인 양 그의 우편물에 섞어 놓는 실수는 하지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미카엘이 시켰겠지.
로제타로서는 제럴드가 그 초대장을 읽고화가 나서 패트릭을 멱살잡이를 하든, 찢어 버리든 간에 하등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보다는 오늘 치의 업무를 끝내고통신용 수정구슬 앞에서 기다렸다가 미카엘의 연락을 받는 게 더 중요했다.
전장에서 도는 심상치 않은소문이 수도의 사교계에 파다하다는 것은알고있었다. 셀리나가 그 소문을 듣고화려하게도 졸도를 해서, '예전' 친구들 중 누군가가 전해 줬으니까.
그들은벌써 로제타가 미카엘에게 버림받기를 학수고대하는 모양이었다.
'티르 왕녀, 알지.'
원작2에서 아이리스의 라이벌이 되는 캐릭터였다. 다만그녀의 취향은미카엘이 아니라 길버트였다.
'차라리 오징어가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말을 믿지.'
로제타는 훈제 오징어를 먹고싶다는 생각을 하며 이쪽 세계는 왜 말린 오징어를 팔지않을까 하고고민했다. 버터구이 오징어도 괜찮은데.
***
미카엘은금단현상에 시달리고있었다. 반드시 꼭 잠자리를 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최소한 이 팔 안에 로제타를 안고싶었다.
만지고도 싶고키스하고도 싶고, 그 이상의 더한 것도…. 하고싶기는 한데, 거기까지가 아니어도 좋으니 곁에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내가 이렇게까지뒤지는데, 빌어먹을…. 폐하에게 도움 되는 게 없다면 자하르 왕을 쫓아가서 바로 죽여 버리고만다.'
마법을 연구하는 자로서 도움이 되는 자료는 꽤 많았다. 인간을 게이트로 활성화시키는 마법 같은것은어지간히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연구하지않는 자료였다.
이딴 걸 연구했다가는 마도의 탑에서 공공의 적으로 불려 사냥당할 것이 분명하니, 자하르는 어떤 의미에서는 마법사들의 적이기도 했다.
비인륜적인 연구는 폐기하고, 폐기하고, 또 폐기하고…. 쓸 만한 것은내용을 훑어보고휘하의 마법사들에게 맡겼다.
미카엘은아직 제자를 두지않았는데, 휘하의 마법사들은어떻게 해서든 미카엘의 제자가 되고싶어서 안달이었다. 심지어 2, 30살씩 연상인 자들도 그러했다.
그들이 눈을 번뜩이며 미카엘의 조수를 자청했으므로 자료 수집은순조로운 편이었다. 자료가 지나치게 방대해서 그렇지.
"미, 미카엘 님. 티르 왕녀께서 또 찾아오셨는데요?"
눈으로 빠르게 서류를 훑어 내려가던 미카엘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그에 언뜻 보아도 50대처럼 보이는 마법사가 시종에게 쫓아가 호통을 쳤다.
"공작님바쁘신 거 안 보이냐! 그 정도는 알아서 쫓아내면 되잖아!"
"그, 그래도 급한 용무시라고…."
"카일한테 말하라고그래."
미카엘이 뒤도 돌아보지않고대꾸했다. 티르 왕녀와 연관된 소문은미카엘도 알고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로제타 곁으로 돌아가려고잠자는 시간도 쪼개서 자료를 살피고있는데, 망국의 왕녀를 만나 줄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거기다왜 만나자고하는지도 뻔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라스탄의 보호를 요청하려는 것이겠지. 이 전쟁으로 자하르는 물론 자하르의 지배를 받고있던 영토도 쑥대밭이 될 테니까.
엉망이 되어 버린 국토를가지고 나라를회복시키는 데는 많은 물자와 노력,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그 시간 동안, 약해진 나라를주변국들이 내버려 둔다는 보장은 없다. 이를위해서 티르 왕녀는 라스탄과의 관계를돈독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무리였다.
라스탄은 이미 점령하지 않을 땅을 두고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자하르의 압제에서 구출하는 양상을 띠고 있기는 하나, 목적은 자하르를벌하는 것뿐이다.
저들을 도와줘야 하는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거기다 이쪽 지역은 상업적 교류 목적의 이점만 있을 뿐으로, 차후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는 한 라스탄이 군대를보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애초부터 무리인 요구였다.
'차라리 인접한 다른 나라의 왕족에게 찾아가야 하거늘.'
인접국은 자신들을 지켜 주기는커녕 속국으로 만들 거라 판단했을 거다. 정확한 판단이기는 했으나, 그나마 그 정도가 가능성이 있었다.
지나치게 먼 라스탄이 아니라.
거기다…. 이 이상으로 안 좋은 소문이 돌게 방치할 수는 없었다. 매일 밤 통신용 수정구슬로 연락하고 있으니, 로제타가 이 소문을 믿을 리는 없겠지만, 더러운 말을 매일 듣다 보면 신경이 닳기 마련이었다.
미카엘은 그런 여지를주고 싶지 않았다.
벌써 한 달이나 떨어져 있지 않은가! 태연한 척은 하고 있으나 로제타가 자신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식어 버릴까 봐 미카엘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미남도 곁에 있어야 미남이지, 멀리 떨어져 있으면 유리구슬 속에서 흔들리는 종이인형이나 다름없는 법이다.
'로제타가 바, 바람을 피울 리는 없겠지만….'
상상만으로도 세상을 멸망시키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놈을 죽이고 로제타에게는 애원하고 매달려서 어떻게 해서는 관계를회복시키고 말….
"고, 공작님 서류에 불이! 으악!"
화가 나서 저도 모르게 마법을 쓴 모양이었다. 미카엘은 머쓱해하며 서류를한쪽의 벽난로 속에 내던졌다.
"파기해도 되는 서류다."
"넵…."
조수가 의심스러운 시선을 보냈으나 미카엘은 모르는 척 다음 서류로 넘어갔다.
***
"…일단 베면서 시작해도 되겠나?"
제럴드가 온몸으로 짜증을 표현하며 검부터 뽑아 들었다. 스르렁 하고 검집에서 칼이 빠져나오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평소라면 기꺼이 상대해 주겠노라 말할 패트릭이었으나,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미래의 처남이 될 사람이니 되도록 척을 져서는 안 되었다.
"먼저, 내 말을 들어 줘!"
"무슨 말? 저열한 수작은 그때 마차 안에서의 것으로 충분하지 않나? 내가 이미 경고했을 텐데?"
로제타는 몰랐지만, 제럴드가 패트릭의 초대장을 본 그 직후부터 패트릭이 보낸 편지들은 빼돌려지고 있었다.
이는 미카엘의 사주를받은 노아와 시녀들의 협력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로제타는 제럴드와 패트릭이 뭘 하든 무관심했고.
초대장만 날아올 때는 불참을 적어 보내는 것으로 충분했으나, 패트릭이 어느 어느 장소로 나와 달라는 편지를보내기 시작하자 제럴드는 그냥 놔둘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 어느 어느 장소가 로맨틱한 카페나 전망이 좋은 레스토랑인지라, 패트릭 놈이 간사하게 입을 놀리기라도 하면 로제타의 평판에 누가 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제럴드가 칼을 들고 약속 장소로 나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이놈이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린 것이 보였다. 제럴드는 진심으로 패트릭을 베어 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아까의 상황으로 돌아와서,
"그때와는 다르다! 나는 진심으로 로…."
척, 내밀어진 검 끝이 패트릭의 입을 향했다.
"그 입으로 그 아이의 이름을 한마디라도 내뱉으면, 맹세코 네놈의 혀를잘라 버릴 것이다."
이 자리에는 레스토랑의 직원들이 와 있었다. 고작 한 테이블의 시중을 들어야 하는 상황이니 전부 나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로제타는 이곳 루긴의 공작부인이었다. 패트릭이 그녀의 이름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스캔들이 될 수 있었다.
"내 말을 먼저 들어 주게. 내가 이러는 데는 이유가 있어!"
패트릭은 그렇게 말하며, 그들을 흥미진진하게 훔쳐보고 있는, 제럴드가 검을 뽑은 시점에서 저만치로 도망친 급사들을 내보냈다.
문을 단단히 닫은 패트릭은 서슬 퍼런 눈길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제럴드를쳐다보았다.
"아덴 공작저를오가며…, 공작의 불륜을 목격했어."
"헛소리하지 마."
"진짜야. 로…, 그녀도 알고 있을 거야."
다시 검을 들어 올리는 제럴드에 패트릭이 말을 바꿨다. 제럴드는 아침에도 봤던 로제타의 표정을 떠올렸다.
로제타는 진지하게 제럴드가 왜 수도로 돌아가지 않나 짜증을 내는 표정이었다.
"……."
갑자기 제럴드가 의기소침해지자 패트릭은 의아하게 그를바라보았다. 뒤늦게 그의 시선을 의식한 듯 제럴드가 말을 이었다.
"그렇다 해도, 자네의 이 행동은 그 애를곤란하게 만들 뿐이야! 앞으로 이런 경거망동은 하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군! 편지도 초대장도 보내지 말라는 말일세!"
돌려 말하는 것 따위 저 뻔뻔한 녀석에게는 통하지 않을 것이라 보았다. 제럴드는 사납게 경고하고는 돌아서 레스토랑을 나왔다.
만약 반대의 경우였다면 패트릭은 식탁이라도 뒤집어엎었겠지만, 제럴드는 그 정도의 막무가내는 아니었다. 그보다 미카엘이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말이 신경 쓰였다. 그렇다고 보기에는 로제타의 반응이 시큰둥했다.
'전장에서의 소문을 듣고 그러는 것인가….'
미카엘 황자는 교활한 이였으니 만약 바람을 피운다 해도 들킬 것 같지 않았다. 거기다 그가 얼마나 로제타를애지중지하는지를몇 번이나 목격하지 않았는가. 패트릭의 말을 완전히 신뢰하기는 어려웠다.
'성미 급하고 단순(멍청)한 구석이 있으니…. 뭘 오해한 건 아닐지.'
친하지도 않으면서 꽤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제럴드였다.
***
길버트는 자하르 왕의 행적에 대한 보고서를읽으며 혀를찼다. 제 딴에는 꽤 잘 도망치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도망쳐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는 궁전에 많은 흔적과 물건을 두고 갔고, 미카엘은 그것만 있으면 그가 세상 반대편으로 도망쳤어도 저주를걸 수 있었다.
그것도 상당히 끔찍하고 잔혹한 저주를.
거기다 라스탄에게 잘 보이려는 목적으로 자하르 왕의 머리를노리는 나라들이 꽤 많았다. 이미 같은 정보를동맹국에도 뿌렸으니 그쪽에서 알아서 추적해 올 것이다.
황제가 명령한 것은 자하르의 기반을 완전히 부수는 것이었다.
자하르의 왕 일리야가 어떻게 목숨을 건진다 해도 나라의 형태도 되살리지 못할 것이다. 미카엘 황자 또한 이 전쟁에서 시간을 끌면 끌수록 라스탄에는 손해라고 경고했다.
그의 경우 다른 목적이 있어서도 그러는 것 같았지만…. 이 전쟁을 빨리 끝내야 하는 것만은 맞았다. 라스탄에게 있어서는 소모적인 전쟁이었으니까.
'그나마 황자께서 거느린 마법사들의 실력이 뛰어나 다행이로군.'
마법으로 초토화를시키고 군대로 밀어 버리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인 전술이지만, 마법사들의 실력이 갖춰져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라스탄이 보유한 마법사들의 실력은 그를웃도는 것이었다. 자하르 또한 대단한 마법사를보유했으나, 이쪽이 기본기가 더 강했다.
특이한 방식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해도, 그것은 허를찌를때만 유용한 법이었다. 지금처럼 전면전으로 가면 밀릴 수밖에 없었다.
자하르의 경우, 밀리다 못해 무너지고 있었지만.
'반년이 아니라…. 4개월 안에 전쟁을 종식시키는 것도 가능할지 모르겠군.'
길버트는 전략을 짜기 위해 만들어 놓은 지형도를살피며 생각했다.
***
제럴드는 아덴 공작가로 돌아왔으나 제럴드의 수행원은 전부 아덴 공작저 사람들이었다. 그 말인즉, 제럴드가 패트릭이 예약한 레스토랑까지 가서 무엇을 했는지, 그들이 전부 엿들었다는 말이었다.
그들은 아덴 공작저의 마법사를통해 미카엘의 부관인 카일에게 이를보고했다. 카일은 상황을 간략하게 정리해서 다시 미카엘에게 보고했고.
"이 개자식!!"
"그 말씀은 개한테 너무하신게 아닌지. 마님께서는 개를무척 좋아하십니다."
카일이 무어라 하는 말을 무시하고 미카엘은 이를갈았다.
"…3개월 안에 끝낸다."
"3개월 뒤에 전쟁이 끝난다고요? 그렇게 될 리가…."
어처구니없어 하는 카일에게 미카엘은 사나운 시선을 던졌다.
"지난 한 달까지 포함시켜서 3개월! 발레르 소공작은 어디까지 진군했지?!"
카일은 유능한 부관이었으므로 잽싸게 미카엘에게 그 답을 일러 주었다. 전쟁이 끝나면 카일에게도 좋은 일은 좋은 일이었다.
그는 고향에 호랑이 같은 부인과 여우 같은 자식을 셋 두고 있었으므로.
다만,
'앞으로 2개월이 걱정된다.'
눈에서 안광을 번뜩이고 있는 미카엘을 보고 있으려니, 카일은 오금이 저렸다.
***
수행원을 통해 미카엘의 서신을 받은 티르 왕녀는 긴장했다. 거기에는 그녀의 나라가 독립한 후에 라스탄의 보호를받을 수 있는 세 가지 조건이 적혀 있었다.
첫 번째는 도망친 자하르의 왕 일리야의 머리를가지고 올 것.
두 번째는 자하르의 고위 귀족이며 군단장인 자를셋 이상 암살할 것.
세 번째는 라스탄의 고위 귀족과 정략결혼을 할 것.
이 세 가지였다.
미카엘은 이것들 중 어느 한 가지라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라스탄이 그녀의 나라를도와주는 것은 불가능할 거라고 선을 그었다.
만약 이 셋을 이룬다면 황제인 알렉시스가 직접 나서서 그녀의 나라를동맹으로 인정하고 보호해 줄 것이라 했다.
다만 세 번째 것은 단기간에 이루기 어려우니, 알렉시스에게 말해서 청하는 것이 좋을 거라고 충고했다.
내용을 차근차근 세 번 다시 읽은 티르 왕녀는 납득했다.
첫 번째는 라스탄의 황제에게 그들을 도와줄 구실을 주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녀의 나라가 이번 전쟁에서 분명한 도움이 되었음을 보이는 것이었다. 세 번째는 라스탄과의 동맹을 견고하게 하는 필요 불가결한 것이었다.
이쯤은 각오한 바였다.
티르 왕녀는 미카엘에게서 받은 서신을 소중히 간직하고는 동료들과 같이 떠나갔다. 미카엘이 말한 처음의 두 가지를실행에 옮기기 위한 것이었다.
***
'왕녀가 해낼 수 있을까?'
자신이 제의한 세 가지를해낸다면 미카엘도 알렉시스에게 그녀의 얘기를해 줄 마음이었다. 전쟁을 3개월 내로 끝내기 위해서는 위의 두 가지가 필요했으니까.
또한 라스탄이 군대를보내지 않고 그녀의 나라를지켜 주기 위해서는, 미카엘의 힘이 필요하기는 했다.
자하르가 아닌, 주변의 인접 국가들에게 공포를심어 줘야 했으니까.
라스탄과 동맹을 맺었다고는 해도 군대가 이곳에 당도하기 전에 그녀의 나라가 완전히 멸망해 버리면, 군대를 보낸 의미가 없어졌다. 그러니 기동성이좋은 개인…, 즉 단 몇 명의 마법사가 자하르의 군대를 쓸어버리는 모습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미카엘과 그의 휘하의 마법사들이라면 단 며칠 만에 이곳까지오가는 것이가능했으니까.
그들이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위협이되어 그녀의 나라를 공격하지않을 것이다.
사실 미카엘은 전부터 이생각을 하기는 했으나, 티르 왕녀가 성공할 가능성이낮다고 판단하고 굳이말해 주지않았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그녀와 그녀의 동료들만 죽는 것으로끝이날 테니까.
지금도 그리 다른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필요했기에 티르 왕녀에게 그 방법을 가르쳐 주었을 뿐이다. 미카엘은 티르 왕녀가 그에 실패한다면 다른 방법을 써서 3개월 안에 전쟁을 끝낼 작정이었다.
전대 황제 부부의 원수를 갚는 것은 당연히 해야 마땅한 일이었으나, 그 과정에서 로제타를 잃을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란스필드…. 네놈만은 이전장으로끌고 왔어야 했는데!'
로제타가 전쟁 기간 동안 아덴 공작령에 머무르겠다고 해서 별일 없을 거라생각한 것이화근이었다. 누가 뻔뻔스럽게 거기까지따라내려올 줄 알았겠는가!
설사 로제타가 휘르센 백작 부부의 성화에 못 이겨 수도에 머문다고 해도, 아네트나 알렉시스가 막아 주리라생각했다. 황제 부부가 서슬이퍼런데, 감히 전쟁에 나가 있는 황제의 남동생 부인을 누가 유혹하리라여기겠는가, 미치지않고서야.
'사랑이면 다 용서될 줄 아느냐!'
그 사랑에 아주 튀겨 버리겠다고 생각하며 미카엘은 이를 갈았다. 로제타가 봤다면 이상한다고 속상해했을 만한 광경이었다.
***
미카엘이분해서 씩씩거리는 동안 로제타는 빛의 정령왕을 품에 안고 행복해하고 있었다. 미카엘이곁에 있을 때는 눈치가 보여서 마음껏 끌어안지못했으나, 미카엘이자리를 비운 사이폭신폭신하고 따끈한 감촉을 만끽하고 있었다.
'이건…. 이건 마치…….'
보송보송하고 포동포동한 새끼 닭 같은!
실제로닭을 안아 본 적은 없으나 폭신폭신한 닭 인형이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빛의 정령왕은 황금빛 깃털을 가졌지만.
거대 병아리보다는 좀 자란 것 같고, 흰 털을 가지고 되게 살찐…. 음, 이건 안 예쁠 것 같다. 아무튼 냄새도 안 나고 껴안은 느낌도 좋았다.
미카엘을 전장에 보내고 많이우울해했던 로제타의 기분이보통으로올라간 것도, 빛의 정령왕이보여 준 이모습의 효과가 컸다.
'동물 테라피!'
물론 이말을 빛의 정령왕 앞에서 했다가는 한 시간 동안 잔소리를 들었을 테지만 말이다.
【기분이좀 진정되느냐?】
빛의 정령왕이점잖은 목소리로물었다. 로제타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빛의 정령왕은 흡족한 듯 목을 울리며 고롱고롱 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가 묘하게 듣기 좋아서 시녀들도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네 응석을 들어 주는 것도 기쁘지만, 해야 할 일이있지않느냐. 이제 그만 일어나거라.】
"네에~."
조금만 더 이대로있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따가 저녁에 또 껴안을 수 있을 테니까. 로제타는 깊은 한숨을 쉬며 빛의 정령왕을 놓아주고 일어났다.
빛의 정령왕은 로제타의 몸속으로사라졌다.
이제 겨우 한 달이조금 넘었을 뿐이지만, 로제타는 제법 공작부인의 일에 익숙해졌다. 회사원 생활을 오래 한 것이도움이되었다. 현대의 교육을 배운 사람에게 이세계의 장부를 익히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남는 시간에는 정령사로서의 연습을 조금씩 해 나가고 있었다.
'또 보고 싶어졌다. 반년은 언제쯤 지나가려나….'
로제타는 조금 시무룩해져서 자신의 집무실로향했다.
***
로제타와의 관계를 진척시키겠다는 목적 하나로루긴에 내려온 패트릭이지만, 전혀 만날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이연 파티나 무도회에 참석해 봐도 로제타는 나타나지않는 것이다. 듣자 하니 남편이전쟁터에 가 있는데파티에 참석할 수는 없다고 거절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나마 아주 가끔 얼굴을 내미는 곳은 부인들의 차 모임 정도였다. 아무리 패트릭이라해도 그런 곳에 나타날 만큼 얼굴이두껍지는 못했다.
그 모임이자신이머물고 있는 저택에서 열린다면 모를까.
로제타는 패트릭이신세를 지고 있는 친척 집을 알고 있어서, 그곳의 다과회에는 참석해 주지않았다.
그나마 외출은 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때에 맞춰 나타나기란 쉽지않은 일이었다. 방대한 숲에 둘러싸여 있는 아덴 공작가의 성을 감시하는 일이만만치 않은 데다, 외출할 때마다 제럴드가 호위로나서 날을 세우고 있었다.
'저 자식은 왜 돌아가지않는 거냐고!'
분명 황궁 기사단의 소속이고 백작가의 후계자로서 하는 일이있었을 텐데, 벌써 한 달 넘게 아덴 공작가의 성에 머물고 있었다. 하는 꼴을 보아하니 휴가까지받아서 로제타를 지키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무턱대고 내 말을 믿어 줄 리가 없지.'
증거인 아틴을 제럴드 앞에 들이밀고 싶었지만, 루긴의 다른 귀족들은 아틴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애초에 공작가의 시종이라해도 시종에 관심을 두지않는 것이귀족들이었다.
패트릭이이렇듯 진전이없어 초조해하고 있는 사이, 시간은 유유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
전황에 대한 보고서를 읽던 알렉시스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삼키려 부들부들 떨었다. 그럴 보고서가 아님은 알았지만, 라스탄의 뛰어난 학자들조차 반년은 걸릴 거라고 예상했던 전쟁이불과 3개월 만에 끝이난 것이다.
알렉시스가 지시한 대로자하르의 모든 국민을 죽이는 일은 일어나지않았지만, 항복을 받은 것으로인정해 주기로했다.
일반 백성들은 일부 살았을지몰라도, 자하르의 귀족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남아 있는 자들도 노예가 된 적국의 백성들을 그나마 잘 대해 준 자들뿐이었다.
그렇지못한 자들은 망국의 백성들과 처지가 뒤바뀌었다. 이제 그들에 대한 처우는 그들이그렇게나 멸시하던 자들이결정할 것이다.
알렉시스는 군대가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을 읽으며 씩 웃었다. 미카엘은 그의 기대 이상으로잘해 주었다.
저주를 푸는 실마리는 발견하지못했다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기대하는 바가 없었다.
그 저주는 자하르의 왕이사주를 하여 건 것이아니라마신으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그 저주를 완화시킨 미카엘이대단한 거지, 풀 수 있는 종류가 아닌 것이다.
"티르 왕녀라…. 흐음~."
이번 전쟁으로북서쪽의 대륙은 많은 판도가 뒤바뀌었다. 남은 나라들은 더 많은 땅을 소유하기 위해 혈안이되어 있었다.
미카엘이도와줄 것을 부탁한 티르 왕녀의 나라는 애매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알렉시스는 자하르의 모든 백성을 죽이라지시했지만, 그 지시는 전쟁의 빠른 종결을 원한 미카엘에 의해 거부당한 상태였다.
알렉시스는 그것을 탓할 마음은 없었다. 다만 자하르와 같은 일이벌어지지않도록 북서쪽 나라들 사이에 라스탄의 영향을 받는 나라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자하르의 백성들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흡수할 만큼의 역량이있는 자라면, 알렉시스도 그녀의 손을 들어 줄 마음이있었다.
또한 직접적으로자하르 왕의 목을 벤 공이있으니, 이전쟁에서 꽤나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녀의 군대는 별동대 수준이었지만, 궁극적으로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라스탄이었다. 라스탄이요구한다면 그녀의 나라는 독립할 수 있었다.
미카엘은 자하르에서 발견한 마법 자료를 가지고 돌아오고 있었지만, 길버트는 사후 처리 문제가 남아서 일부 군사들과 같이대기하고 있었다. 알렉시스가 통신용 수정구슬을 통해 지시를 내린다면, 길버트가 황제를 대신하여 티르 왕녀의 손을 들어 줄 것이다.
'나쁘지않아.'
자하르의 왕 일리야는 라스탄은 물론 티르 왕녀의 나라에까지도 원수였다. 공통의 적을 가진 이는 친구가 될 수 있는 법이었다.
알렉시스는 미카엘의 부탁을 들어주기로마음먹었다.
***
승전했다는 소식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너무도 빨랐다. 3개월이라니! 어떤 이가 전쟁을 3개월 만에 끝낼 수 있단 말인가! 자하르는 소국이아니었다. 반년 안에 전쟁을 끝냈다 해도 천재적인 명장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전쟁이었다.
'로제타와는 아직 아무런 진전도 없는데….'
기회도 얼굴을 봐야 생기는 것이었다. 이미 공작의 업무와 공작부인의 업무, 둘 다를 살피고 있는 로제타는 너무 바빴다. 남는 시간에는 정령사로서의 공부를 하고 있으니, 외출은 기분 전환으로가끔 하는 수준이었다.
'공작저에 머무를 때에 어떻게 해서든 접근했어야 했는데….'
실례를 무릅쓰고 아덴 공작가와의 인척 관계를 주장하여 밀고 들어가 볼까도 했으나, 로제타의 단호한 거절을 받았다.
한때 사교계에 로제타가 그를 짝사랑한다는 악의적인 소문이돌았으니, 남편이부재중인데그를 집에 머물게 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이유였다.
맞는 말이었으나 억울했다. 지금은 로제타가 그에게 관심도 없지않은가.
로제타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알고 있는 지금, 패트릭은 로제타의 냉대가 야속하기만 했다. 그녀의 남편은 외도를 일삼고 있는 것이분명한데도, 홀로절개를 지키는 것이무엇이그리 중요한가 싶었다.
'아틴이공작저에서 보이지않는 것도, 분명 전쟁터로데려갔기 때문일 것이다.'
고위 귀족의 경우 전쟁터에 시종을 대동하는 것이가능했다. 많은 수의 하인까지데려가는 이도 있으니 시종 한둘쯤은 너끈히 데려갈 수 있을 것이다.
실제 미카엘도 시종을 데려가기는 했다. 로제타를 걱정하여 오히려 노아는 아덴 공작가의 성에 두고 갔지만.
'공작이돌아오기 전에 내 마음이라도 전해야 한다.'
오랜 고심 끝에 패트릭은 마음을 결정했다. 미카엘이자리를 비운 사이에 고백이라니…. 다소 비겁한 기분이들기는 했으나, 상대는 바람을 피우고 있는 자였다. 그쪽은 이미 가장 큰 잘못을 했는데, 이쪽도 룰을 지켜 줄 필요가 있을까?
'그건 너무 뻔뻔한 생각이다. 저는 최악의 짓을 저지르면서 저쪽은 부부의 의무를 다하라고 요구하다니….'
로제타가 홀로외로이아틴과 미카엘 황자가 같이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때, 그녀의 곁에 누군가 있어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했다.
그래서 패트릭은 약속도 잡지않고 아덴 공작가로찾아갔다.
그는 란스필드 후작가의 후계자였고 미카엘과는 사촌 관계였기에, 로제타는 그를 문 앞에 세워 두라고 할 수 없었다.
아덴 공작저의 고용인들은 패트릭을 안으로는 들였으나 본성이아닌, 서쪽 성에 있는 응접실로안내했다.
"…란스필드 경. 저희 마님께서는 경을 만날 의향이없으시다고 하셨습니다."
"기다리겠다. 부인의 마음이변할 때까지."
대문 밖에서 기다릴 생각도 있었는데, 이렇게 응접실까지들어올 수 있었으니, 패트릭은 몇 날 며칠이고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종이차를 드시겠냐고 물었으나 패트릭은 거절했다. 어차피 초조해서 차가 목구멍으로넘어갈 것 같지도 않았다.
로제타는 오전 시간을 공작의 업무를 대신하는 것으로보내고 있었다. 원래도 공작의 업무 대행이있었으나, 로제타는 모든 것을 확인하고 배우고 싶어 했다.
미카엘의 고용인들은 기꺼이그녀의 청을 들어주었다.
대행을 하고 있다고는 해도 공작의 역할을 완전히 대신할 수는 없었으므로, 로제타의 존재는 가뭄 속의 단비 같았다.
"…아직도 기다리고 계신다고?"
점심때를 훌쩍 넘기고 슬슬 해가 넘어갈 시간이었다. 이미 점심 식사를 마친 로제타는 패트릭이 점심도 굶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참이었다.
11시쯤에 나타나서 지금이 6시가 다 되어 가니 근 7시간을 기다린 셈이었다. 공작가의 소파가 푹신하다고는 해도 꽤나 긴 시간이었을 것이다.
로제타는 고민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패트릭이 한밤중에까지 이 저택에 머물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당연히 나타나리라고 생각했던 제럴드는 보이지 않았다. 공작가의 고용인에게 물어보니 어제수도로 돌아갔다고 했다.
'공작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겠지.'
패트릭은 초조하게 제무릎에 올린 손을 바라보았다. 그저 기다리기만 하는데도 손에 땀이 찼다. 그의 인생에 이렇게까지 긴장한 일은 없을 것이다.
"란스필드 경. 저희 마님께서 만나시겠다 하셨습니다."
"그, 그래?"
"지금 이쪽으로 오고 계십니다."
시녀가 사무적인 어투로 고하고 물러섰다. 패트릭은 자리에서 일어나 로제타가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시녀를 거느리고 응접실로 들어오는 그녀는 제법 안주인 티가 났다.
"란스필드 경."
"오래…, 간만입니다. 부인."
패트릭은 복잡한 감정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로제타는 찌푸린 낯으로 패트릭을 쳐다보고는 자리로 다가갔다.
"앉으시지요."
로제타가 자리에 앉자 패트릭또한 자리에 앉았다. 힐끗 쳐다보는 시선에 긴장한 기색이 묻어나는지라, 로제타는 거북해졌다.
아틴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에 그가 선언한 것도 생각날 듯 말 듯 하고….
'뭐라고 그랬더라?'
그날 밤, 미카엘이 패트릭의 발언이나 모습을 로제타의 기억 속에서 지우려 그랬는지, 워낙 야한 장난을 쳐서 기억이 싹 다 날아가 버렸다.
"제게 하실 말씀이 있다고요."
"네."
패트릭의 진지한 표정에 로제타는 불안해졌다. 설마 근처에 다른 시녀들도 있는데, 그런 건 안 하겠지, 싶었으나 여간 진지한 얼굴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패트릭도 힐끗 시녀들을 쳐다보기는 보았다. 다만 각오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을 따름이다.
털썩.
자신의 발치에 무릎을 꿇는 패트릭의 모습에 로제타는 화들짝 놀랐다.
"제가…, 씻지 못할 죄를 지었습니다."
"란스필드 경. 일어나세요."
로제타는 바로 옆자리로 몸을 움직이며 말했다. 패트릭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은 채로 간절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때의 저는 어리석었고, 눈이 가려져 있었습니다. 사죄의 말 몇 마디로…, 부인의 상처가 지워지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만, 부인을 생각하는 제마음까지 모르는 척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무슨…."
당황하여 얼굴이 달아올랐던 로제타의 안색이 다시 새하얗게 물들었다.
"그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경!"
경악한 로제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패트릭이 그와 비슷한 발언을 한 적은 있으나 한때의 기우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걸 실제로 말할 줄은 몰랐다. 그들은 아무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저는 유부녀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마음을 억누를 수는 없었습니다…. 공작께는 다른 연인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러니?"
소리를 지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차가운 한마디에 응접실 내가 찬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패트릭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고, 로제타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미카엘 님!!"
상황이 상황이 아니었으나, 무려 3개월 만에 만나는 거였다. 로제타는 금세 눈에 눈물이 가득해져서 몸을 돌렸다.
로제타가 응접실에 들어오면서 열린 문은 닫히지 않은 상태였다. 시녀들도 시종도 있었지만, 껄끄러운 느낌에 로제타가 미리 닫아 놓지 말라고 해서였다.
로제타를 놀라게 해 줄 마음으로 알리지 않고 일정을 서둘렀던 미카엘은 아득바득 이를 가는 상황에도, 로제타를 보고는 스르르 녹아내렸다.
"로제타…."
와락 안기는 로제타를 마주 부둥켜안으며 미카엘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너무 긴 시간 떨어져 있었다.
"하아…. 그리웠습니다. 보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어요."
매일밤 통신용 수정구슬을 통해 연락을 했어도 그러했다. 작은 수정구슬을 통해 로제타를 보아도 매일부족했다.
아까의 그 자리에 굳은 듯 얼어붙어 있었던 패트릭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정적인 순간에까지 방해를 하는 미카엘을 도저히 용서하기 힘들었다.
"아덴 공작! 로제타를 기만하는 것은 그만두시지!"
"뭐라고?!"
분노한 미카엘이 그를 노려보았으나 품에 안긴 로제타가 그를 놔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착 달라붙어서 올려다보는 로제타에 미카엘의 가슴이 절로 두근거렸다.
"로제타, 지금은 좀…."
로제타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더 꼬옥 미카엘의 허리를 끌어안고 애원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졸랐다.
"3개월 만에 만났는데…."
"그, 그건 저도 그렇습니다만, 지금은 저자가…."
"으으응~, 다른 사람 보지 말고요."
로제타가 절대 안 떨어지겠다는 듯이 꽉 끌어안자 미카엘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패트릭에 대한 분노는 별개로 정말로 행복했다.
'젠장! 너무 귀여워….'
참지 못하고 미카엘이 다시 로제타를 끌어안자 분노한 것은 패트릭이었다.
"지금 뭘 하는…. 로제타! 당장 그자에게서 떨어지십시오! 그는 당신의 애정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입니다!"
그 말에 로제타가 고개를 돌려 힐끗 패트릭을 보았다.
"무언가 오해하신 모양입니다."
"오해가 아닙니다! 그자는 부인과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따로 애인을 두고 있었습니다! 바로 곁에서 부인을 기만하고 있었는데도, 그자의 편을 드실 생각이십니까?!"
미카엘은 진심으로 패트릭을 죽여 버리고 싶어졌다. 로제타는 잠시 상황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여기고 미카엘을 끌어안았던 팔을 풀었다. 미카엘은 그것이 못내 아쉬운 듯 로제타의 손을 양손으로 쥐고 그 손등에 입 맞췄다.
"제남편이 누구를 애인으로 두고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아틴이라는 이름의 시종이었습니다. 제가 부득이하게 둘의 밀회 장면을 보기까지 했으니 공작께서도 부인하지는 못하실 겁니다."
패트릭은 차마 들킨 후에도 두 사람이 키스까지 하더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로제타는 잠시 고민했다. 패트릭으로서는 농락당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부분이었다.
"우선은…, 오해하게 만든 점에 대해서 사과드리겠습니다."
"무슨 말씀을…. 부인께서 그것을 왜 사과하신단 말입니까?"
"제남편이 마법사라는 것은 알고 계시겠지요."
설명하는 로제타의 뒤로 미카엘이 다가와 끌어안았다. 너무 오래간만이기도 했으나, 패트릭의 앞이라서 더더욱 로제타가 제것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때의 그 시종은 제가 마도구로 변신한 모습이었습니다."
"네?"
"흑태자와 이자벨의 잔당 등…, 많은 자들이 저를 노리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나, 오해하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해명치 않았던 점은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리 말하며 로제타는 패트릭에게 고개를 숙였다. 미카엘은 로제타가 패트릭에게 사과하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내버려 두었다. 이 또한 로제타의 성품이었으니.
"그, 그 말씀은…."
"내가 물고 빨고 한 자는 내 부인이었다는 말이 되지."
미카엘은 날카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로 로제타의 뺨에 입 맞췄다. 패트릭은 그 모습을 보고 흙빛이 되었다.
"미카엘 님!"
"사실이잖습니까? 귀여운 로제타."
좌절하다 못해 절망하고 있는 패트릭을 내버려 둔 채로 로제타와 미카엘은 속닥거렸다. 로제타는 미카엘을 응접실 밖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제대답은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멀리 배웅은 않겠습니다."
로제타가 미카엘을 데리고 응접실을 나가는 동안에도 패트릭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한 오해와 삽질을 생각하니 수치심에 소파의 쿠션에 얼굴을 박고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오해하게 둔 거냐며, 로제타를 원망하고 싶은 마음도 몽글몽글 솟아났으나, 로제타의 입장에서는 그가 뭐가 이뻐서 오해를 풀어 줄까 싶었다.
그녀 스스로도 패트릭을 싫어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말도 붙이기 싫은 상대가 멋대로 무슨 망상을 펼치든 말든,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그녀의 속내였을 것이다.
패트릭은 스르르 무너지듯 소파에 주저앉았다.
공작가의 시녀들도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가고 응접실의 문도 닫혔다. 남아 있는 것은 공작가의 시종들뿐이었다.
패트릭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 올리다가 씁쓸하게 고개를 돌렸다.
"내 마차를…, 불러다오. 돌아가겠다."
완벽한 패배였다.
***
통신용 수정구슬 너머로 알렉시스와 면담한 티르 왕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라스탄의 황제는 교활하고 무서운 자이기는 했으나, 지금의 라스탄에 만족하는 것 같았다. 그 이상의 욕심을 내어 타국을 괴롭히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에 안심할 수 있었다.
알렉시스가 티르 왕녀에게 요구한 것은 미카엘이 얘기했던 것과 같았다. 그녀가 여왕으로 즉위하되, 반드시 라스탄의 귀족이 그녀의 배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쯤이야 들어줄 수 있는 요구인지라 티르 왕녀는 정략혼을 받아들였다. 알렉시스는 티르 왕녀의 나라인 율리아의 독립을 인정하며, 라스탄으로 초대해 왔다.
표면적으로는 몇 주 뒤에 열릴 승전 무도회에 참석해 달라는 얘기였다. 티르 왕녀는 그 자리에 많은 라스탄의 귀족들이 참석하고, 그중에 자신의 배우자를 골라야 함을 눈치챘다.
이번 전쟁에 참여한 많은 다른 나라의 왕족들도 참석할 것이라고 했다.
면담을 끝낸 티르 왕녀는 고심했다.
'잠깐은 미카엘이라는 자도 노렸었지만…. 그자는 유부남인 데다가, 지나치게 영리한 자다. 이번에는 지혜를 빌렸지만, 그는 라스탄의 황제가 될 수도 있는 자니 후보에서 제외해야 해.'
자신의 결혼 상대는 충분히 지위가 높아야 했다. 그래야만 자신의 나라인 율리아의 격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나라가 자하르의 지배를 받기 전이라면 모르되, 막 지배에서 벗어났으니 자신의 나라에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가문의 남자여야 했다.
스으윽 시선을 돌린 티르 왕녀의 눈길에 이번 전쟁의 사령관인 길버트가 눈에 들어왔다.
'발레르 공작가의 소공작이라 했던가?'
지위는 충분히 높으나 지나치게 높은 감도 있었다. 그러나 율리아의 격을 떨어트리지 않기 위해서라면 공작도 괜찮을 것 같았다.
'문제는 소공작이라는 점이야. 율리아로 장가를 올려면 공작가의 후계는 포기해야 할 터인데, 그걸 해 줄지…. 성격은 딱인데 말이야.'
여왕으로 나라를 다스릴 것은 자신이니, 조신하게 내조를 해 줄 남자가 필요했다. 과묵하고 말보다는 행동으로 먼저 보여 준다는 점에서 길버트가 딱이기는 했다.
신분이 지나치게 높지만 않으면.
곁에서 보내는 노골적인 시선에 길버트는 불편해졌다. 그의 딱딱한 머리로는 설마 티르 왕녀가 자신을 신랑감 후보 중의 하나로보리라고는 생각하지못하고 있었다.
'정말 성격하고 외모는 딱 마음에 드는데….'
미카엘 황자는 만나 보지못했으나 음험하고 머리 회전이 빠른 것이 딱 경계해야 하는 타입의 남자였다. 반면 길버트는 사람이 참 진득해 보였다.
'꼬셔서 공작가를 한번 포기하게 만들어 봐?'
그가 보인 무위며, 공작가의 혈통이라는 것도 나라에 도움이 되면 됐지, 손해가 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거기다 그다지야망이 큰 사람으로보이지도 않고.
이제는 거의 레이저를 뿜어내는 듯한 티르 왕녀의 눈빛에 길버트는 많이 불편해졌다.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커흠흠…. 경은 참 키가 크시군요. 약혼녀께서는 경을 올려다보는 것을 힘들다 하지않으십니까?"
티르 왕녀가 넌지시 묻는 말의 속내를 길버트는 알아차리지못했다. 그는 약혼녀에 대해서 말을 꺼내는 것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약혼녀는 없으니, 불편하다 말하는 여인 또한 없습니다."
"그래요?"
약혼녀가 없다는 말에 반색하는 것이 또 기분 나빴다. 그가 파혼당했다는 것을 알지는 못할 테지만, 왜인지그것을 기뻐하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용건이 없으시다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 집무실은 길버트가 당분간 사용할 곳이었으나, 티르 왕녀를 피해 길버트가 먼저 발길을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티르 왕녀는 눈을 반짝이며 즐거워했다.
'숫기없기는…. 그것도 마음에 들어!'
길버트의 괴로움이 결정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