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 황자에게 사로잡혔다-19화 (19/21)

제19장. 마지막 불꽃

아이리스가공작저에서 출발하는 날까지는 저주를 풀고 싶었다. 흑태자가걸어 놓은저주는 미카엘이 마법을 쓰면 쓸수록 독처럼 퍼져 나가는 것이었다.

마법을 사용하기 어렵게 했고, 그의 몸 상태를 나쁘게 만들어 종국에는 목숨을 빼앗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래서 미카엘은흑태자를 꾀어낼 그날까지 저주를 제 몸에서 몰아내고 싶었다.

그것은로제타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철퍽! 철퍽! 철퍽!

"흣, 읏! 아앗, 아! 아! 아! 앙!"

그와 결혼한 이후로 요염하게 변한 허리가음란하게 흔들렸다. 미카엘은로제타의 탐스러운 엉덩이를 움켜쥐고는 미친 듯이 허릿짓을 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정기를 받으면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응음, 아앙! 너무 세! 앗, 아아아……. 제발! 아앗!"

지나친 자극에 튕겨지는 몸을 붙잡고 품으로 끌어당겼다. 쉴 새 없이 제 안을 쑤셔대는 미카엘의 페니스에 로제타가죽는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으흐…. 아흐앙! 이제 가기 싫…. 아학! 앗! 아아아아아…."

활처럼 휘어진 몸이 바들바들 경련했다. 쾌락으로 부푼 속살이 구불거리며 제 것을 탐욕스레 빨아들이는 느낌에 미카엘의 표정도 흐려졌다.

"크으……. 로제타…."

"으흐응, 아앙! 지금 움직이면……. 아앗! 아아, 아흐흑!"

넘쳐흐르는 쾌락이 감당이 되지 않는지 로제타가몸부림쳤다. 미카엘은파르르 떨리는 로제타의 엉덩이를 주무르며 가차 없이 허릿짓을 했다. 로제타에게는 미안했지만, 그녀는 느끼면 느낄수록 더 기를 방출하는 것 같았다.

반사적으로 흘리는 빛의 정령왕의 기운이 미카엘의 몸에서 저주를 몰아내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습니다. 로제타…. 그러니……."

"하으, 으응! 거기가녹아 버려…. 으흑! 아흐흐…. 아앗!"

그의 허벅지에 마주 보는 형태로 걸터앉아 있는 로제타의 몸이 늘어졌다. 그러면서도 비부는 쉼 없이 경련하며 그를 집어삼켜 미칠 듯한 쾌락을 선사하고 있었다.

녹아 버릴 것 같은것은자신이라고 속삭이며, 미카엘은가늘게 떨리는 로제타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흡! 읏, 으으응……. 으응!"

키스하면서 아랫입을 가득 채워 주는 것도 로제타가좋아하는 것이었다. 미카엘은더 깊은삽입을 위해 로제타의 엉덩이를 끌어당기며 허리를 좌우 아래위로 흔들었다. 품에 안긴 가냘픈 몸이 파르르 떨리며 경련하는 것이 사랑스러웠다.

"후아, 아……. 아아아, 앗! 그만…. 제발……. 아아……."

너무 느껴서 미칠 것 같았다. 배 속이 온통 쾌락으로 가득 차 이대로 미카엘의 품에서 기절할 것만 같았다.

'나 얼마나 미카엘을 좋아하게 된 거야. 전보다 더……. 기분 좋아졌어!'

거듭된 절정에 휘어진 몸을 미카엘이 사랑스럽다는 듯이 어루만졌다. 그손길에도 전부 느껴 버린 로제타는 울고 싶어졌다.

그저 유두를 쓸어 올리는 것만으로도 미카엘의 페니스를 조여 버리고 만다. 한층 집요해진 손길 속에서 로제타는 농염한 신음을 울리며 거듭 도달했다.

"아, 아아아아아!"

드디어 맛보게 된 크나큰 절정에 미카엘은남아 있는 저주의 잔재마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축 늘어진 몸을 끌어안고 뜨거운 키스를 퍼부은그였지만, 욕심이 생겼다.

'혹시 내가감지하지 못한 저주의 파편이라도 남아 있을지 모르니….'

확실하게 해 두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도, 그를 걱정해 주는 로제타를 위해서도 좋을 것이다. 그러니 좀 더….

"아앙, 또! 아앗, 앗…. 미카엘……."

"이제 조금만 하면 되니까요. 이제 조금만 더…."

쾌락에 젖은로제타의 눈을 들여다보며 미카엘은황홀한 듯 속삭이는 것이다.

***

미카엘과 키스는커녕 손목 한 번 잡아 보지 못한 채로 돌아가야 하는 날이 돌아왔다. 그래서인지 아이리스는 아침부터 잔뜩 골이 나 있었다.

'뭐가그렇게 비싸냐고!'

먼저 와서 빌어도 부족할 판국에 그의 근처로는 접근하지도 못하게 하다니! 정말이지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 대마법사라면 눈치도 빠르고 똑똑한 사람 아니었던가?!

미카엘 곁으로 가지 못하게 한 것은, 비단 공작저의 고용인들뿐만이 아니라 신전의 성기사들도 한몫했지만, 아이리스는 그들은계산에 넣지 않았다. 그들이 그렇게 포진해 있다고는 해도, 미카엘이라면 그들을 물리치고 접근하는 것이 간단했을 터였다.

대마법사였으니까. 이 소설의 공식 흑막이자 최강의 악역이었으니까.

그러니 미카엘을 만날 수 없었다는 것은그가그것을 원했다는 말이 되었다. 미카엘은신전으로 돌아가는 아이리스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너무해. 내가도와주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는데….'

실상 미카엘은아이리스가아닌 다른 대신관이나 성기사와 관계를 맺을 작정이었지만, 아이리스는 그점은떠올리지도 못했다. 이 소설은BL이 아닌 로판이었으니까. 응당 자신밖에는 상대가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시종도! 비싸게 굴기나 하고!'

시녀나 하녀의 평에 따르면 굉장히 예쁘장하다던데. 그래 봐야 주요 인물이 아니니 얼마나 잘생겼겠느냐 싶었지만, 그래도 보고 싶었다. 잘생기거나 예쁘다는 말을 들으면 궁금해지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닌가.

"나중에 두고 보라지…."

애가달다 못해 마음이 타들어 가도록 괴롭혀 줄 테다. 오늘의 수모를 두고두고 넣어 두었다가나중에 배로 받아 낼 작정이었다.

'그아틴이라는 시종도…. 내 시종으로 만들어 달라고 하면, 미카엘이 나중에라도 질투해 줄까?'

어렴풋한 확신이기는 했지만 나중에는 틀림없이 그러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 사건이 지나면 미카엘은로제타가아닌 나를 좋아해 줄 테니까.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전진을 위한 후퇴야. 다시 돌아오지 못할 곳에서 나가는 게 아니라고!'

아이리스는 아쉬움이 가득 담긴 얼굴로 제게 배정된 방을 돌아보았다.

성녀라고 특별히 좋은방을 내어준 것 같지 않은데도, 아덴 공작가의 방은대단했다. 리온가에 있는 그녀의 침실은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아…. 빨리 여기서 살고 싶어. 성가신 성녀의 의무도 벗어 버리고…. 공작부인으로 활개 치면서 살 수 있을 텐데!'

그러면 우선은잘생긴 호위기사부터 잔뜩 거느릴 생각이었다. 밤에는 미카엘이 그녀를 놔주지 않을 테지만, 미카엘이 공작으로서의 업무를 보는 동안 눈요기할 사람들은필요한 거니까.

제럴드나 패트릭, 로건을 스카우트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할 것이다. 미카엘이 많이 질투할 테니까.

아이리스는 오지도 않은미래를 생각하며 혼자 키득거렸다. 문득 노크 소리가울렸다. 아이리스는 정신을 차리며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지?"

"신전에서 마차가도착했습니다. 나오시지요."

신전에서 붙여 준 성기사들 중 하나였다. 그들은요 며칠 사이에 본성으로 숨어들려는 아이리스를 봐서인지, 그녀에 대한 호감도가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아, 알았어."

아이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든 이 침실과 헤어지는 것은아쉽지만, 어차피 여기는 그녀의 방이 아니었다. 그녀의 진정한 보금자리는 공작부인의 방이 될 터이니, 이곳은얼마든지 떠나 줄 수 있었다.

'미카엘이 빨리 정신 차려야 할 텐데….'

아이리스는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방을 떠났다.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아직도 그대로예요?"

걱정 가득한 로제타의 눈빛이 좋아서 미카엘은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에힘을 주었다. 그는 로제타의 이마에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그래도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이 정도면 마법을 사용하는 데도 자유롭고…. 혹시 오늘 흑태자가습격해 오더라도 문제없이 대응할 수 있을 겁니다."

실은 어젯밤의 정사로 저주는 완전히 떨쳐 냈지만, 미카엘은 그 사실을 로제타에게 말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 핑계로 로제타를 듬뿍 느끼게 할 수 있는데, 그것을 왜 말하겠는가!

어젯밤에도 남은 시간 동안 로제타를 절정에몰아넣으며 희열을 느꼈다. 더 느끼면 죽을 것 같다며 제발 살려 달라고 앙탈하는 로제타를 밤새 탐하며, 미카엘은 다시없는 행복에젖어 있었다.

오늘 아이리스가신전으로 돌아가는 길에흑태자가나오건 나오지 않든간에그는 로제타를 안을 계획이었다.

마법을 써서 저주를 다시 억눌러 줘야겠다고 설명한다면 로제타는 부끄러워하면서도 그를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수십 차례 절정을 맛봐 한껏 민감해진 로제타를 만지작거릴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아랫도리에힘이 들어갈 것 같았다. 로제타는 이런 미카엘의 시커먼 속내를 모르는 채로 그를 걱정하고만 있었다.

미카엘은 찔리는 구석이 아주 없지는 않은지 헛기침을 했다.

"흠흠…. 로제타가걱정하는 것과 같은 일은 없을 테니까요. 무사히 돌아올 테니 걱정 말고 기다려 주십시오."

그는 아이리스가신전으로 가는 행렬에호위기사로 변장하여 합류할 생각이었다. 신전에서 붙여 준 성기사들이 있었지만, 아덴 공작가에서도 따로 호위기사를 붙이겠다 말하였으니 문제는 없었다.

아이리스를 덮칠 거라 의심되는 이는 자하르의 흑태자였다. 그가상대라면 중무장을 하는 것이 당연했다. 공작가의 기사들에게도 그렇게 일러두었다.

본래는 투구 없이 갑옷을 입는 정도로 무장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공작이 미리 언질을 주었으니 투구까지 걸칠 터였다. 미카엘은 그 일행에공작이 차출한 기사들중 하나로 들어가기로 이미 얘기가되어 있었다.

투구를 쓸 수 있는 상황이니 따로 마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변장이 가능했다. 아마 아이리스라 하더라도 미카엘을 알아보지는 못할 터였다.

"그래도…. 조심하셔야 해요?"

걱정 어린 로제타의 말에미카엘은 빙그레 웃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부인."

***

아이리스는 마차에오르기까지 상당한 시간을 끌었다. 혹시라도 미카엘이 쫓아 나와서 그녀를 붙잡아 주지 않을까, 기대한 것 같았다.

'그럴 리가있나.'

오히려 오늘 신전으로 출발해 주지 않으면 곤란했다. 그녀는 흑태자를 유인하기 위한 먹음직스러운 미끼였으니까.

성기사들은 마차에바짝 붙어 서는 위치에, 공작가의 호위기사들은 그 옆이나 뒤쪽으로 따라붙게 되어 있었다. 미카엘은 뒤쪽으로 따라붙는 기사들에합류했다.

그도 약간은 검을 쓸 수 있지만, 여차할 경우 사용하는 것은 결국 마법일 것이다. 습격이 들어오면 그는 성녀가있는 마차 쪽으로 위치를 옮기도록 얘기가되어 있었다.

한참을 미적거리며 마차 앞에서 머뭇거리던 아이리스가이내 입술을 깨물었다. 성기사의 손을 잡고 마차에오르는 그의 얼굴에는 심통 난 표정이 가득했다.

"이제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성기사들중 하나가묻자 아이리스의 작은 목소리가들렸다. 출발해도 된다고 말한 것 같았다. 앞선 성기사들이 말을 출발시키자, 성녀가탄 마차의 마부도 마차를 움직였다. 공작가의 기사들도 서서히 말을 움직였다.

미카엘은 말 위에서 흔들리며 주위를 경계했다. 습격이 올 만한 장소는 두 군데였다. 아덴 공작가에서 다소 떨어진 위치의 숲과 루긴 바깥으로 나 있는 길 쪽이었다.

대신전은 도시의 땅값과 부지의 규모 때문에대부분 도시 외곽에위치하고 있었다. 루긴의 대신전도 그러했다.

마차가루긴을 통과하여 대신전으로 가는 동안에는, 자칫 잘못하면 루긴의 경비병까지도 상대해야 할 수 있으니 습격하기 좋지 않았다.

'아마도 곧…. 습격이 있지 않을까?'

어디까지나 흑태자가그가입힌 부상에서 회복했을 때의 얘기였다. 그가마법으로 입힌 부상은 쉬이 회복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으나, 또 모를 일이었다.

알렉시스조차도 로제타와 계약한 정령으로 되살아났을 정도였으니까.

생각이 제 부인인 로제타에게로 옮겨 가자 투구 속에숨겨진 얼굴에미소가어렸다. 방에서 나오기 전에도 로제타를 한 번 더 끌어안고 키스하고 왔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여겨졌다.

사랑스러운 얼굴을 한 번 더 보듬고 입 맞췄으면 좋았을 것을. 아직도 품에남아 있는 그녀의 향기와 온기가그리웠다. 얼른 돌아가서 한 번 더 그녀를 껴안고 싶었다.

'집중하자. 흑태자를 죽이는 것은 로제타의 안전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 오늘 놈이 나타나면 놓쳐서는 안 된다.'

지난번 흑태자를 죽이지 못한 것은 뼈아픈 실책이었다.

부모님의 죽음에대해서는 알렉시스만큼 슬퍼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도, 막상 그 유품이 나오자 집중이 흐트러지고 말았다.

자하르와 그 왕족들.

거머리처럼 불쾌하고 음습한 자들이었다. 강자에게는 꼬리를 내린 채로 뒤로 칼을 갈고, 그가길을 잃고 쓰러지기만을 기다리는 간악한 자들.

제 자식과 제 백성들의 목숨을 땅바닥에떨어트리고, 기어 올라오면 그것을 착취하고, 올라오지 못한 채 죽어 나자빠지면 제 것이 아니라 외면하는 자들이었다.

왕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들.

알렉시스는 자하르의 왕족에대해 그렇게 평가를 내렸었다.

이번의 일이 발각되었으니, 흑태자를 비롯하여 자하르의 잔당들모두 이 나라에뿌리내리게 두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자하르 자체도 지도상에서 지워 버릴 판국인데, 당연했다.

미카엘이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마차가공작가의 정원을 빠져나와 숲에들어섰다. 루긴과 공작가사이에존재하는 숲은 꽤 깊고도 넓었다.

도시 안에거하게 성을 지을 수 없어서 그 외곽에지은 것이 아덴 공작가의 성이었다. 아무데나 성을 지을 만한 자리가있을 리 만무하고, 당연히 그 주변에는 숲이 있었다.

길은 꽤 잘 닦아 두었지만, 덕분에숲 사이에나 있는 길은 습격하기 딱 좋은 지형적인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루긴의 치안을 생각한다면 이 근처에서 도적이 나올 리는 없을 테지만….'

상대가흑태자의 잔당이라면 얘기가달라졌다.

미카엘이 사방으로 주의를 기울이며 말을 몰 찰나, 전방에서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

"으아아악!"

마부의 비명이 긴장된 공기를 갈랐다. 바닥에서부터 불기둥이 솟구쳐 오르며 선두에서 움직이고 있던 두어 명의 성기사들이 불길에휩싸였다.

이히이이힝!

성녀가탄 마차의 말들이 당황한 듯 날뛰며 경로에서 이탈하려 했다. 성기사들은 각자 칼을 뽑아 들며 습격에대비했다.

루긴의 대신전에서 나온 성기사들의 갑옷에는 보호 주문이 새겨져 있어, 그 정도 불꽃으로는 약간의 열기를 느끼는 것이 전부였다. 말은 그대로 타 죽었지만.

"대열을 이탈하지 마라! 성녀님을 보호하라!!"

혼란 속에서 아이리스는 겁을 먹고 있었다. 물론 마차 안의 그녀는 혼자가아니었다. 신녀인 세실리아도 있고, 그녀에게 붙여진 두 명의 성기사들도 있었다. 그들은 일이 터지자마자 아이리스의 곁에바짝 붙어서 그녀를 지키고 있었다.

마차가이리저리 흔들리고, 말이 날뛰는 소리, 기사들의 고함과 병장기가부딪히는 소리가울렸다.

"마법!!"

'마법이라고?'

미카엘이 저주를 받아서 칩거하고 있다지만, 미카엘의 휘하에는 여러 유능한 마법사들이 있었다. 당연히 그들이 손을 쓴 것일 테지만, 아이리스는 마법을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성녀로서, 신전에머물면서 보호만 받다 보니 위험한 일에끼어들게 되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화려한 공격 마법은 단 한 번도 눈으로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성녀님, 창가로 가시면 위험합니다!"

성기사가주의 주며 앞을 가로막던 그때, 마차의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아악!"

순식간에마차의 구석으로 자리를 옮긴 아이리스가세실리아의 품에서 비명을 질렀다. 청동빛의 거인이 마차의 문을 종잇장처럼 으스러트리는 것이 보였다. 성기사들이 이를 악물고 아이리스의 앞을 가로막는 순간, 붉은 마법이 거인의 가슴을 관통했다.

붉은 창은 거인을 관통하며 다섯 갈래로 갈라지더니, 거인의 가슴을 찢듯 사방으로 움직였다. 청동빛 금속으로 만든것 같은 거인은 산산조각 나며 그 파편이 부서져 내렸다.

성기사는 제 신성력을 발휘하여 방어막을 쳤다. 사실 신성력만은 아이리스 쪽이 월등히 강하니 그녀가방어막을 치는 것이 나았지만, 아이리스는 패닉에빠진 상태였다.

"아…. 아아……."

실제 본 전장은 그녀가소설로만 읽고 접했던 것과는 달랐다. 거기다 이 상황은 소설 속에는 나와 있지 않은 장면이었다.

'이거 괜찮은 건가?'

신전 측에서 보내 준 성기사가아이리스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아덴 공작부인을 납치하려 했던 자하르의 잔당이 성녀인 그녀 또한 노린다고 했다.

그 수장이 흑태자라는 별명을 가진 자하르의 왕자라는 얘기를 듣고, 아이리스는 그가새로운 서브남이 아닌가의심했다.

'나 결국 납치되는 거야?! 새로운 서브남은 좋지만 굴려지는 건 싫어!'

그러나 아이리스의 걱정과는 달리 승기는 그들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기사들사이에숨어 있던 마법사들의 역할이 주효했다. 패트릭은 능숙하게 기사들을 지휘하며 그런 마법사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습격자들속에도 빼어난 마법사가있었으나, 미카엘의 휘하에있는 마법사의 실력에는 미치지 못했다.

제 기사와 마법사들이 하나둘 쓰러지는 광경을 흑태자 로드리고는 숲의 한구석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마차와 그를 둘러싼 기사와 마법사들의 싸움이 한눈에내려다보이는, 높은 위치였다.

"주군. 저희의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피하셔야 합니다!"

성녀를 납치하는 것. 납치하지 못한다면 최소한 죽이는 것이 그들의 마지노선이었다. 자하르의 용맹한 기사라면 기꺼이 제 목숨을 바쳤을 테지만, 성녀에게 접근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지금으로서는 성녀를 죽이는 게 불가능했다.

'빌어먹을…!'

흑태자는 제 몸에서 날뛰고 있는 마검의 기운을 억누르며 핏발 선 눈으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황제 알렉시스를 쓰러트렸다지만, 이래서는 미카엘에게 라스탄의 황제가되는 길을 열어 준 것에불과하지 않은가!

흑태자는 새삼 미카엘의 모든것이 질투가났다. 그를 믿고 든든하게 뒤를 받쳐 주는 형과 타고난 고귀한 혈통, 대륙 최고의 마법사라 칭호를 받는 능력에, 그를 믿고 따르는 기사와 마법사들까지….

그 또한 그의 한마디에죽는 시늉이라도 하는 부하들이 있었으나,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이 모든것은 그에게도 주어져야 마땅한 것이었다.

"도망, 치지 않아…. 여기서……. 여기서 성녀를 죽여야 한다!"

마검에서 피어오르는 불길한 기운을 누르기위해 혼자서는 걷지도 못하는 흑태자였으나, 흑태자는 그것만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잠시만, 아주 잠시만 그것에게 제 통제권을 내어주면…. 저들이 알아서 해 줄 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증오하고 있으니까. 모든 것을 증오하고 질투하며…, 이 땅이 업화의 불길에 휩싸일 때까지 결코 만족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아주 조금만 몸을 내어주고……, 모든 것이 끝났을 때에 이 몸의 통제권을 되찾으면 그만인 일이었다.

그것은 아주 위험천만한 일이었으나, 시도해 볼 만한 가치 있는 일로 여겨졌다.

성녀가미카엘의 마지막 목숨 줄이 아니었던가! 그를 죽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자신에게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래서 흑태자 로드리고는 마음을 결정했다.

최소한…. 그래, 아주 최소한.

저 미카엘의 손에 라스탄을 빼앗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최소한 미카엘을 자신의 저승길 길동무로 삼을 수는 있겠지.

흑태자는 입가에 야비한 미소가떠올랐다. 그는 이미 무너지기시작한 자신의 통제력을 놓아 버렸다.

"저, 전하……?"

곁을 지키던 데스몬드가주춤거리며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흑태자는 기대어 있던 나무에서 떨어지며 저 아래로, 전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비틀거리는 걸음이었으나, 힘이 없이 늘어지던 몸에서 검은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에 따라 그의 피부가울룩불룩하게 튀어나오며 뼈마디가불거지는 것이 보였다. 흑태자의 이마에서 크고 흉측한 뿔이 자라나는 것을 보고 데스몬드는 기어이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 움직임에 흑태자가홱 고개를 돌려 데스몬드를 바라보았다.

흑태자의 눈동자가가로로 찢어지며 누런빛으로 번들거리는 것이 보였다.

'히익!'

그의 허리 아래로 파충류의 그것과 닮은 꼬리가튀어나와 늘어졌다. 언뜻 용의 그것을 연상시킬 법도 했지만,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온 시커먼 뼈가그것과 다름을 드러냈다.

그 옆면에 날카로운 비늘이 달린 꼬리가넘실거리며 위로 치켜 올려졌다. 데스몬드는 제 머리가있는 위치까지 올라온 흑태자의 꼬리에 마른침을 삼켰다.

"저, 전하…. 이 무슨……. 커헉!"

그러나 그가말을 잇기도 전에 꼬리의 옆 날이 데스몬드의 목을 베었다. 피가분수처럼 쏟아지며 데스몬드는 제 몸을 움켜쥔 채로 흑태자를 노려보았다. 흑태자는 파충류 같은 눈으로 데스몬드를 바라보며 머리를 기울였다.

[겁쟁이는…. 내 군대에 필요 없지.]

"그런…. 끄윽……."

꼬리가재차 데스몬드의 가슴을 꿰뚫었다. 흑태자는 제가생각한 것 이상으로 제대로 움직여지는 그것에 흡족한 듯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더는 미카엘의 마법으로 인한 부상의 여파가느껴지지 않았다. 통증은커녕 온몸이 힘으로 넘치는 것 같았다.

[미카엘….]

흑태자의 주변에는 그저 데스몬드 하나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를 보호하기위해 대여섯 명의 기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흑태자의 행동에 어찌할 바를 몰라 그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흑태자는 수려한 얼굴로 웃었다.

[왜 그러지? 너희들의 왕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냐?]

왕…. 그는 왕자일 뿐, 왕이 되지 못한 이였다.

여기모인 자들은 기꺼이 흑태자를 자신들의 왕으로 추대할 뜻이 있었으나, 흑태자 스스로 그렇게 칭한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그렇, 그렇지 않사옵니다…. 전하……."

앞선 기사 하나가그리 말하며 스스로 무릎을 꿇자 흑태자는 흡족하게 웃었다. 그의 흰자가검게 물들고 있었다.

그는 마찬가지로 시커먼 비늘이 덮이기시작한 손으로 저 아래쪽을 가리켰다.

[성녀를 죽여라. 미카엘이 살아날 마지막 방도이니. 성녀가살아서 이 숲을 빠져나가게 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며, 명을 받들겠나이다."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난 기사가검을 뽑아 들고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들보다도 빨리 흑태자 로드리고가숲을 헤치며 저 아래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미카엘! 봐라, 미카엘!]

[내가널 죽이고 있다! 네 마지막 명줄이 내 손아귀 안에서 끊어지는 것을 잘 지켜봐라!]

환희에 찬 흑태자가귀기어린 웃음을 흘리며 길 가장자리에 있던 성기사를 베어 넘겼다. 그가쥔 검날이 넘실거리는 검은 기운에 휘감겨 검붉게 물드는 것이 보였다.

***

'나타났군!'

미카엘은 마차 옆으로 물러서 전황을 살피고 있었다. 패트릭이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활약해 주어 그가나설 필요조차 없을 것으로 보였다. 미카엘의 마법사들은 그가예상한 것만큼의 실력을 보였다.

화려하게 공기를 가르는 공격 마법을 바라보며 미카엘은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청동의 거인이 마차의 문을 부술 때는 나설까 말까 망설였지만, 그마저도 그의 사제가손을 써 금세 상황이 무마되었다. 그리고….

[성녀!!!]

기이한 웃음소리가피어오르는 귀기어린 검은 마력에 미카엘은 흠칫 고개를 돌렸다. 그들을 둘러싼 공기마저 한순간 얼어붙는 듯했다.

"저 모습은…."

패트릭이 말을 진정시키며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투구를 쓴 것이 아니었다. 이마에서부터 길게 자라난 뿔은 악마라기보다는 마물을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어깨와 팔의 라인을 따라 검게 변색된 뼈가튀어나온 것이, 한눈에도 정상이 아님을 눈치챌 수 있었다.

"네놈…. 무슨 짓을 한 거냐!"

두려움에 울부짖으며 뒤로 물러나려는 말을 진정시키며 패트릭이 소리쳤다. 흑태자는 그의 마력을 둘러거대하게 변한 태도(太刀)를 고쳐 쥐며 낮은 웃음을 흘렸다.

[더 강해지기위한 힘을 손에 넣었을 뿐이다!]

흑태자는 칼을 크게 휘두르며 패트릭에게 달려들었다. 패트릭은 전장을 돌아다니며 가장 강한 자와 맞붙고 있었다. 막 자하르의 기사 하나를 쓰러트렸기에, 그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없었다. 곧 두 개의 날붙이가충돌하며 서로의 기운이 뒤엉켰다.

패트릭은 흑태자의 움직임을 보았기에 이 정도로 힘에 차이가날 줄은 몰랐다.

마치 거인에게 대항하는 꼬마가된 기분이었다. 무시무시한 악력에 하마터면 쥐고 있던 검을 놓칠 뻔했다. 패트릭이 흑태자의 칼을 흘리며 뒤로 물러서려 했으나, 흑태자는 미친 듯이 웃으며 그에게 칼을 휘둘렀다.

히히히힝!

말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피를 뿜었다. 가까스로 말에서 뛰어내린 패트릭은 재차 이어지는 공격을 방어하며 뒤로 물러섰다. 마법사들이 그를 엄호하기위해 발한 마법이 공기를 붉게 물들였다.

[으아아악! 으흐흐, 하하하!]

사방으로 번지는 불꽃과 뇌격 속에서도 흑태자는 무사했다. 그가입고 있는 옷은 넝마가되었으나 처음에는 놀라 비명을 질렀던 그도, 마법이 제게 아무런 효과가없음을 깨닫고 저열한 웃음을 흘렸다.

"이 미치광이 놈!!"

마법의 효과가사라지는 때를 노려 달려든 것은 패트릭이었다. 갈란트 또한 그에 합세하여 검을 찔러넣었다.

푸르고 흰 검기에 뒤덮인 칼날이 한순간 흑태자의 몸을 가르는 듯이 보였다.

[큭, 크흐흐흐흐….]

두 개의 칼날이 제 가슴을 꿰뚫었으나, 흑태자는 용의 비늘에 뒤덮인 손가락으로 그 검날을 움켜쥔 채로 웃기만 했다.

갈란트는 무언가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검을 뽑으려 했다. 그러나 흑태자의 손아귀에 잡힌 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패트릭 또한 검을 비틀었으나 흑태자의 노란 눈이 춤추듯 그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펄럭.

흑태자의 뼈마디가불거지며 울퉁불퉁하게 변한 등줄기를 가르고 한 쌍의 피막 날개가튀어나왔다. 크게 펼쳐진 그것은 그의 육체를 다 뒤덮고도 남는 거대한 것이었다.

우득, 우드득…!

뼈가부러지는 것이 아닌가싶은 소리가울리더니, 흑태자의 몸이 부피를 늘려 가기시작했다. 그의 팔과 다리가크게 벌어지고 거대해지며, 뼈가튀어나왔다.

"으으…. 괴, 괴물이!"

흑태자의 잘생긴 얼굴마저 검은 비늘에 뒤덮이며 흉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이미 검을 놓아 버린 패트릭과 갈란트가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고작 하나의 인간에 불과했던 흑태자의 몸이 이미 와이번만큼 커지고 있었다. 아니, 그 이상으로 자라나는 것에 미카엘이 목소리를 높였다.

"뭘 보고만 있는 거지?! 공격해!"

미카엘의 외침에 마법사들이 정신을 차렸다. 불덩어리와 바람과 뇌전의 창이 어지러이 흑태자의 위로 쏟아졌다. 아덴 공작가의 기사들이 외치는 소리에 앞서서 싸우고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뭘 하는 거지?'

패트릭 또한 기사단장이 아니라 일개 기사의 형태로 대열에 합류하고 있던 터라, 지시에 따라 뒤로 물러났다. 수적으로도 이미 궁지에 몰려 있었던 자하르의 기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그들을 추적하는 양상을 보이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한순간뿐이었다. 느끼기로는 공기가무거워진 것 같았다.

쿠우웅!

무시무시한 힘이, 무형의 압력이, 다가오던 자하르의 기사들을 짓밟았다. 마치 거대한 거인의 손이 그들을 짓누르기라도 한 듯 무릎을 꿇기무섭게 바닥에 떨구어졌다.

그것은 뼈와 뿔이 불거진 괴이한 형태의 용으로 변한 흑태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짓누르는 힘에 흑태자의 거대해진 눈동자가처음으로 당황한 듯 아덴 공작가의 진영을 훑었다.

[이 힘은…….]

마차 가까이에서 대기하고 있던 어느 기사가말에서 내렸다. 그는 머리끝까지 투구를 눌러쓰고 있어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이 힘을 알고 있었다.

[이 정도로…. 크아아아악!!]

무형의 힘을 떨치며 일어서려던 흑태자의 위로 수십 개의 창이 내리꽂혔다. 빛으로 만든 듯한 마법의 창이었다.

기사가걸어 나옴에 따라 아덴 공작가의 기사들이 좌우로 물러났다. 그러나 결코 멀리 떨어지지는 않았다. 제 주군을 지키는 듯한 모양새로 자하르의 기사들과 흑태자를 노려보았다.

"마지막까지 성가시게 하는 쥐새끼로구나, 너는. 내게 이런 연극까지 하게 만들다니."

[크으으으……. 미카엘! 으아아악!]

우두둑 하는 소리를 내며 흑태자의 등에 있던 날개 한쪽이 뜯겨져 나갔다. 거대한 날개가바닥에 떨어지며 뭉클거리는 검은 기운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상처 부위에서도 흐르는 것은 피가아닌 검고 진득거리는 액체였다.

"무슨 꼬락서니인가했더니…. 로드리고, 네 꼴을 봐라. 왕족으로 태어난 이가지금 무슨 꼴을 하고 있는지."

[크아아아아아! 이것을 놔라! 아악!]

날개 한쪽이 다시 뜯겨져 나갔다. 패트릭은 미카엘 곁에서 칼끝을 자하르의 기사들에게 향한 채로 힐끗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실로 무시무시한 마력이었다.

그들은 마력의 여파 안에 들어 있지 않음에도, 미카엘의 주변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바짝 긴장이 될 정도였다. 털이 곤두섰음은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그놈들이뭐라고 속닥거렸을지 몰라도…. 로드리고, 너는 다시 네 몸의 주인이되지 못할 것이다. 그놈들이인정하는 주인은 최초로 희생된 용인 길리어스밖에는 없으니."

흑태자가 손에 넣은 마검에 대해서는 미카엘도 알고 있었다. 한때 부모를 죽인 원수를 잡는 데 눈이불거졌던 알렉시스가 봉인을 풀까로 망설였던 검이었으니까.

그러나 알렉시스는 마검을 뽑아 봤자 검에 먹힐 뿐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그만두었었다.

[닥쳐라!!!]

흑태자의 날카로운 고함 소리에 주변의 공기가 쩌르릉 우는 것 같았다. 그가 마지막 발악을 하는 듯 미카엘의 마법에 저항하여 몸을 일으키는 것이보였다. 미카엘을 둘러싼 기사들이긴장한 듯 검을 고쳐 잡는 것이보였으나, 미카엘은 여유로웠다.

미카엘이두려워한 것은 저들이제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거였다. 그의 주변으로 섞여 들어 그가 아끼는 자들을 해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드러난 지금, 두려울 것은 없었다.

"내가 왜 대마법사인지…. 대륙 최강의 칭호를 가지게 되었는지를 가르쳐 주마."

흑태자의 등에서 다시금 거대한 날갯죽지가 튀어나왔다. 펼쳐지는 피막 날개에 누군가 헉하고 헛숨을 들이쉬었지만.

그뿐이었다.

바람을 일으키며 날아오른 몸은 삽시간에 다시 대로 한복판으로 추락했다. 추락하는 힘과 더불어 가해진 힘이흑태자의 몸을 짓뭉개고 수십, 수백 가닥의 빛의 창이그의 몸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으윽, 끄아아아악! 소용없, 다! 나는….]

부러지고 깨지고 찢겨진 상처가 넘실거리는 검은 기운에 휩싸여 회복되는 것이보였다. 난도질하는 것보다도 빠른 속도였지만, 그럼에도 일어나지 못했다.

문득 바닥이녹아내리며 그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연옥의 용암과도 같은 불길에 흑태자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안 돼! 안 돼, 이대로는…. 아아아아악!]

푸른 빛에 휩싸인 칼날이흑태자의 몸을 관통하고 힘겹게 뛰고 있던 그의 심장을 갈랐다. 흑태자는 거대한 머리를 비틀며 마법에서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쳤다.

그러나 또 한 자루의, 그리고 연이은 여섯 개의 칼날이그의 몸을 관통하자 그대로 숨이멎어 버리고 말았다.

"헉!"

마치 이제까지의 일은 모두 악몽이었다는 듯이, 흑태자의 거대한 몸이시커먼 덩어리로 변하며 흩어졌다.

부스스 무너져 내리는 검은 기운이가라앉자 남은 것은 초라한 육체뿐이었다.

한때 흑태자라 불리며 자하르 최고의 왕자라 칭송받던 이의 시신이거기에 있었다. 몸이거대해지며 입고 있던 옷이모두 찢어진 터라, 아무것도 걸치지 못한 채였다.

이전에 미카엘에게 당한 부상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시신의 등에는 시커먼 한 자루의 검이꽂혀 있었다.

"같이부서졌다면 좋았을 것을."

미카엘은 혀를 차며 휘하의 마법사들에게 저것의 봉인을 맡기고 돌아섰다. 답답했던 투구를 벗자 곁에 있던 기사하나가 미카엘에게서 그것을 받아 들었다.

"미, 미카엘 님!"

시체가 사방에 늘어져 있고, 파괴의 흔적이역력한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높고 낭랑한 목소리였다. 어느 틈에 마차에서 내린 아이리스가 미카엘을 보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내키지 않는 상대이기에 미카엘의 표정이반사적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나 그것이보이지 않는 듯, 아이리스는 발걸음도 가볍게 미카엘을 향해 달려왔다.

미쳤나?

지켜보고 있던 아덴 공작가의 기사들이한 생각은 그것 하나였다. 달려오는 기세로 보건대 뛰어올라 미카엘에게 안기려는 것이분명해 보였으므로.

"미카엘 님!!"

사르르 녹을 듯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리스가 뛰어오른 순간 미카엘의 얼굴이얼어붙었다. 그도 설마설마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

붕 뛰어오른 몸이허공에서 그대로 멈췄으므로 아이리스는 당황했다. 미카엘은 마법을 써서 아이리스를 멈추고는 근처의 성기사를 보았다.

"성녀를 모시도록!"

"네, 넵!"

성기사가 양쪽에서 한쪽씩 아이리스의 팔을 잡자, 그녀를 붙잡고 있던 마력이사라졌다. 아이리스는 두 명의 성기사에게 붙잡힌 채로 애타게 손을 뻗었다.

"미, 미카엘 님!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대로 인사하게…. 아앗! 어디로 가는 거야! 미카엘 님께 인사하는 도중이잖아!"

아이리스가 발버둥 치며 소리쳤지만 성기사는 묵묵히 그녀를 마차로 데려갈 뿐이었다. 미카엘은 아이리스가 쫓아올까 두려운지 서둘러 자신의 말로 돌아갔다.

***

무서운 소리가 숲에 울려 퍼졌다. 그들은 숲에서 미카엘이예견했던 습격이일어났고, 마법이사용되었음을 깨달았다. 예정대로 아덴 공작가의 기사단이파견되었으나, 그때에는 이미 모든 것이수습된 뒤였다.

미카엘은 현장에 있던 기사들을 쉬게 하고, 뒤늦게 출동한 기사단에게 시신의 수습이며 뒷정리를 하게 했다.

아이리스는 다시 아덴 공작가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공작가에서 새로운 마차를 여러 대 내어줬으므로, 아이리스는 입이댓 발은 나온 채로 그 마차를 타고 돌아갔다.

"미카엘 님!"

그리운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미카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미카엘은 얼른 말에서 내려 제가 먼저 그에게 달려갔다. 여전히 아틴의 모습인 로제타가 달려오고 있었다. 미카엘은 그대로 로제타를 번쩍 안아 올리며, 그녀의 뺨에 입 맞췄다.

주변의 사람들이충격에 빠지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 태도였다.

패트릭 또한 이광경을 보았으니 기가 막히다 못해 분노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미카엘은 당연하다는 듯이로제타만 보고 있었다.

'제정신인 건가!'

아덴 공작저 내에서 저렇게 대놓고…. 이러면 로제타의 체면이며 위엄은 뭐가 되느냔 말이다!

그러나 이제 갓 결혼한 젊은 연인들은 눈앞에 서로밖에 비치지 않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미카엘은 로제타를 번쩍 안아 든 채로 저택으로 걸어가고 있었고, 로제타는 미카엘이무사히 돌아온 것이기뻐 그에게 키스를 퍼붓고 있는 중이었다.

둘 중 누구도 주변으로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노아는 재빨리 다가와 다른 고용인들에게 제각기 할 일이있음을 주의시켰다. 굳어 있던 기사들이모두 흩어지고, 패트릭 또한 말을 움직여 북쪽 성으로 향할 뿐이었다.

패트릭은 말을 몰아 멀어지며 힐끗 두 사람이지나간 곳을 돌아보았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지만 미카엘이부럽다는 생각이들었다.

'로제타….'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하게 로제타가 보고 싶었다.

***

기사들이돌아다니며 목숨이붙어 있는 자가 없는지 살폈다. 미카엘이흑태자를 공격하기 위해 펼친 대단위의 마법에 걸려 큰 부상을 입은 자가 대부분이었다. 몇몇은 목숨을 건졌지만, 전신의 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여기 이자도 목숨이붙어 있군! 치유사!"

부상당한 아군은 벌써 아덴 공작저로 옮겨졌다. 남아 있는 자는 자하르의 기사와 마법사들뿐이었다. 마법사의 경우 마력 제어 팔찌를 채워 옮겨지고, 기사는 손목과 발목에 무거운 족쇄를 매달게 했다.

그나마도 대부분 목숨을 잃었기에 살아남은 자들은 채 열 명이되지 못했다.

줄줄이밧줄에 묶여 호송용 마차에 태워지는 모습을, 근처 나무에 앉은 까마귀 한 마리가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까마귀는 마법사들이흑태자의 시신으로 다가가는 것을 보자 눈도 깜박이지 않고 주시했다. 마법사들은 흑태자의 시신에 흥미가 있어 다가간 것이아니었다. 그들은 미카엘의 명으로 마검을 처분하기 위해 온 자들이었다.

마법사들은 준비해 놓은 금속 궤짝을 열고 장갑을 낀 손으로 마검을 뽑았다. 장갑의 마법이발동하여 검사가 아닌 이의 손에도 수월하게 마검이뽑혔다.

그러나 금세 장갑이타들어 갔으므로, 마법사는 얼른 마검을 궤짝 안에 집어넣고 장갑을 벗었다.

치이이익….

장갑 위에 새겨진 마법이소리를 내며 소멸되었다. 그와 동시에 장갑에 화르륵 불이붙어 까만 재만 남기고 사라졌다.

마법사들은 무어라 주문을 거듭 걸고는 궤짝의 뚜껑을 닫았다. 궤짝 뚜껑에는 작은 구멍이나 있었는데, 나중에 그 구멍으로 쇳물을 부어 마검이다시 세상에 나오지 않도록, 커다란 금속 덩어리로 만들것이라고 했다.

흑태자의 시신에서 마검이뽑히자 다가온 것은 공작가의 일꾼들이었다. 그들은 어느 기사에게 부탁하여 흑태자의 목을 베었다.

황제인 알렉시스에게 보내기 위한 것이었다.

까마귀는 그 모습을 보고 항의하듯 크게 까악까악 울어댔다. 일꾼들이화들짝 놀라자 기사들이의심스러운 듯 시선을 보냈다. 거슬리는지, 기사들중 하나가 활을 꺼내는 것에 까마귀는 푸드득 나뭇가지에서 날아올라 하늘 저편으로 사라졌다.

"재수 없게, 퉤!"

바닥에 침을 뱉은 기사가 까마귀가 날아간 쪽의 하늘을 노려보았다.

***

'전하께서 돌아가시다니!'

좀비화한 까마귀의 눈을 통해 뒤늦게 상황을 확인한 시릴은 침음을 삼켰다. 흑태자 로드리고가 죽다니,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미카엘은 세상에 알려져 있는 것보다도 강한 마법사였다. 황제인 알렉시스를 황좌에서 끌어내리고 제가 황제를 하지 않는 것이이상하게 여겨질 만큼!

'왜 그런 자가 황좌에 욕심을 내지 않았단 말인가….'

비통한 마음에 시릴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흑태자의 시신이치욕스럽게 목이잘리는 것을 보고도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자신 있는 것은 공격 마법이아닌 마물을 소환하고 부리는 것이었기에….

'미카엘!'

분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미카엘을 해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다. 그가 펼치는 마법의 일부만 보았을 뿐이지만, 그 막강한 힘에는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었다.

흑태자가 아니라, 대륙에 사는 그 어떤 존재라도 미카엘을 쓰러트리지는 못할 것이다.

라스탄뿐만 아니라 대륙을, 어쩌면 바다 건너에 있다는 몇 개의 나라까지도 집어삼키는 것이가능한 힘이었다.

'어리석어, 어리석도다…. 그런 힘을 가진 자가 공작의 지위에 만족하고 그렇게 살다니.'

흑태자는 야망은 있었으나 그에 걸맞은 힘을 가지지 못했고, 미카엘은 세상을 지배할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땅한 야망을 갖추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그가 그러한 야망을 가지지 못했기에 그런 힘을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무엇이든 무슨 상관이냐. 나는 주인을 잃었다.'

다시 자하르로 돌아가 자하르의 왕 일리야를 섬길 수도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릴은 그렇게 하기 싫었다. 일리야는 인간을 제가 다루는 장기 말쯤으로 여기는 자였다. 제 자식들에게도그러한데, 신하에대한 처우가 어떨지는 뻔히 보이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이자벨의 곁에계속 남아 있는 것도어리석은 짓이었다.

이미 카룰리아스의 그림자들은 이자벨에게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그들은 암살과 정보 수집을 전문으로 하는 집단이었다. 그들 개개인은 강했으나, 뭉치지 않으면 그리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정치를 읽어 낼 두뇌도없었고, 각 도시에흩어져 있는 지부를 통솔하여 하나로 이끌 힘이 부족했다. 또한 찾아낸 정보를 어떻게 활용하거나 팔아야 하는지에대해서도알지 못했다.

암살 의뢰에대한 것도카룰리아스 가문을 통해받았기에, 카룰리아스 가문의 비호 없이는 유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랬기에이자벨을 탈출시키고 그들의 수장으로 올린 거였는데, 이자벨은 '카룰리아스의 그림자'에대해서는 흥미가 없었다. 그녀의 목적은 오직 로제타를 죽이고 미카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뿐이었다.

마르케즈 후작을 끌어들인 것과 비슷한 방법으로, 친귀족파 성향의 귀족들 몇몇을 제 편으로 만들기는 했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

이그네시아 공작가의 반란으로 황실이 경직되어 있는 탓이었다. 있던 세작도모두 쫓겨나거나 감옥에갇힌 판국인데, 인제 와 새로운 세작을 밀어 넣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로제타를 죽이는 것에집착하고 있는 이자벨은 조직에방해만 되는 존재로 보였다.

'저 여자 또한 미카엘에게 당하고 말겠지. 그녀의 곁에서는 미래가 없다. 차라리 다른 대륙으로 건너가 새로운 주인을 찾아보는 게 낫겠지.'

라스탄 제국의 황제인 알렉시스 밑으로 들어가 볼까도고려해보았으나, 일단 미카엘을 섬길 수 없는 데다가, 리디아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자신을 살려 줄 것 같지 않았다. 거기다….

'떠날 때 떠나더라도흑태자 전하에대한 복수는….'

물론 그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할 자신은 없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미카엘의 추적을 받아 뼈도추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흑태자 전하가 지시했던 대로 그 여자를 이용하면 어떨까?

시릴은 이자벨을 떠올렸다.

어리석고 오만하며 터무니없는 욕심을 망상으로 키워 간 여자였다. 저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 미카엘의 가장 큰 죄이며, 그 대가로 지금의 부인을 망가트려 미카엘에게 보이겠다고 복수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저런 저열한 여자이니 마음껏 이용해도되겠다 싶었다. 어차피 그의 주군은 흑태자였고, 이자벨을 제 주인으로 여긴 적은 단 한 번도없었다.

그동안 무료로 봉사해준 대가로 그녀와 '카룰리아스의 그림자'들의 목숨을 받아 가는 것도나쁘지 않겠다 여겼다.

'미카엘 황자를 죽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 그래. 그 여자의 욕심대로 로제타, 그 여자를 죽일까?'

미카엘을 죽이지 못하는 것은 아쉬우나 흑태자 전하의 복수로 그 정도면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그 여자를 꽤 아끼는 모양이었으니.

'그러면 우선….'

무엇으로 유인해내야 할까?

***

까악!

창가에서 시끄럽게 울어대는 까마귀에시녀들이 기겁하며 달려왔다. 까마귀를 창틀에서 쫓아내기 위해서였다. 까마귀가 제법 크고 부리도매서웠지만 빗자루를 손에든 시녀는 제법 용감하게 그것을 휘둘렀다.

"어휴, 무슨 냄새가 이렇게 고약해!"

까마귀의 움직임이 좀 이상하기는 했으나, 시녀는 그 까마귀가 좀비일 거라고는 조금도생각하지 못했다. 로제타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아이샤만이 묘한 낌새에눈살을 찌푸렸을 뿐이다.

"환기 좀 시켜야겠어요."

시녀는 서둘러 커튼을 완전히 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그 시녀를 따라 움직이던 다른 시녀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아이샤에게로 다가갔다.

"공작부인, 이것 좀 보세요!"

새하얀 편지봉투가 장미 무늬의 꽃병 앞에세워져 있었다. 아까의 까마귀가 반쯤 열려 있던 창문으로 날아들어 이것을 내려놓은 것이 분명했다.

봉투의 겉면에는 분명히 로제타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이름 아래쪽에작은 글씨로

'혼자만 읽으시오.'

라고 되어 있기에아이샤는 시녀들을 물러가게 하고 봉투를 뜯었다.

'역시.'

수상한 까마귀이다 싶었다. 이자벨의 수하에있는 마법사 중에마물을 부리는 자가 있다고 들었으니, 그 까마귀 또한 마물이었을 것이다.

봉투 안에는 한 장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네 어머니의 목숨을 살리고 싶으면….]

휘르센 백작부인을 인질로 잡고 있다는 내용에아이샤는 얼어붙었다.

***

"…협박장이라고?"

황제가 누워 있는 침실이었다. 아네트 또한 간호를 핑계로 업무 시간을 제외하고는 늘 붙어 있기에회의를 하기에좋았다.

시녀 복장으로 위장한 관리가 황제 부부의 곁으로 다가갔다.

"네. 이것을…."

아네트가 받아 들고는 황제인 알렉시스에게 내밀었다. 알렉시스는 찌푸린 얼굴로 그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다른 사람에게 알릴 경우 휘르센 백작부인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는 내용이 두서없이 적혀 있었다.

물론 이 편지를 받아 본 사람은 로제타가 아니었으므로, 즉각 자신의 동료에게 이를 알렸다.

"휘르센 백작부인의 위치는 확인되었느냐?"

아네트의 물음에관리는 송구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살롱으로 떠나신 것까지는 목격되었으나 호위기사들도, 휘르센 백작부인이 타고 나간 마차도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공작부인의 얼굴을 볼 낯이 없어지는군."

휘르센 백작부인은 정치적으로는 하등 이용할 가치가 없는 이였으나 로제타의 어머니였다. 겨우 행복해진 미카엘의 결혼에찬물을 뿌려서는 안 될 일이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폐하?"

아네트의 말에알렉시스는 깊은 고민에잠긴 표정을 지었다.

"그들도휘르센 백작부인을 그리 가치 있게 치지는 않을 테지. 그녀는 공작부인을 유인할 미끼에불과하니, 공작부인을 유인한 그 장소에있을 거야."

협박장에적힌 장소는 수도밖에위치한 버려진 고성이었다. 장소의 특성상, 알렉시스는 그들이 로제타를 납치하려고 협박장을 보낸 것이 아니라 판단했다.

납치라면 길거리에서 접선하여 마차에태우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무사한 백작부인을 보여 주며, 그녀가 마차에오르는 동시에마차 밖으로 내려 주겠다고 약속한다면, 로제타의 성정상 기꺼이 백작부인 대신에납치되었을 것이다.

"…아이샤는 각오가 되어 있나?"

알렉시스의 말에관리는 눈을 빛내며 그렇다고 답했다.

아이샤는 이런 임무를 위해황실에서 특별히 훈련시킨 마법사였다. 마법은 변신 마법 외에몇 가지 잔재주밖에는 부리지 못하지만, 체술과 암살 기술을 익혀서 위급한 상황에서도알아서 빠져나갈 수 있는 이였다.

"휘르센 백작부인의 신변에무슨 일이 생겨서는 안 될 것이다. 제럴드 경에게 비밀리에이 사실을 알리고…. 아이샤를 준비시키도록 해라."

알렉시스는 그렇게 말하며 아네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도움이 필요했다.

***

황제 폐하의 쾌유를 빌기 위해신전으로 향한다는 이유로 충분했다. 아이샤는 움직이기 편한 옷 위에드레스를 걸치고는 외출을 서둘렀다. 신전으로 간다는 명목으로, 호위기사도시녀들의 숫자도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다.

진짜처럼 보이기 위해, 아이샤는 지시받은 대로 호위기사나 시녀에게도사정을 설명하지 않았다.

마법사가 까마귀를 보내 살피는 것처럼 어디서 엿듣고 있을지 모른다고 판단한 것이다.

마차가 수도를 벗어나기 직전, 아이샤는 화장실을 쓰고 싶다는 핑계로 고급 레스토랑 앞에서 마차를 멈추도록 했다.

호위기사들을 레스토랑의 입구에세우고, 아이샤는 시녀 하나만 대동하여 들어갔다. 화장실 입구에서 시녀에게 심부름을 시켜 돌려보낸 그녀는 재빨리 화장실을 빠져나가 레스토랑의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에는 직원들이 사용하는 전용 출입구가 있었다. 그곳으로 빠져나간 아이샤는 큰길로 나와서 마차를 잡았다.

마차를 타고 향한 곳은 말을 거래하는 업소였다. 상설 시장이 열리는 때가 아니어서 다소 바가지를 쓰기는 했으나, 말과 안장을 그 자리에서 구입할 수 있었다.

말 위에오른 아이샤는 로제타가 말을 잘 타지 못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말을 몰아 수도밖으로 향했다. 관문을 통과할 때 병사가 다소 의아하게 생각하기는 했으나, 큰 무리 없이 빠져나갈 수 있었다.

아이샤는 그대로 협박장에쓰여 있는 장소로 향했다. 협박장에는 작은 지도가 동봉되어 있었다.

수도밖에존재하는 버려진 고성이었다. 몇 세대 전의 영주가 살던 곳이었으나, 영지의 규모가 달라지면서 다른 곳에저택을 지어 살게 되어 버려진 곳이었다.

'이곳은 제법 조용하군.'

수도에서 한참 떨어진, 숲이 막 시작되는 위치에자리 잡고 있는 성이었다. 관리가 되지 않아 잡초가 무성하고 담쟁이덩굴에싸여 있지만, 성 자체는 크게 훼손되지 않은 듯했다.

성의 입구에도착한 아이샤는 말에서 내렸다. 그녀는 기사가 아니었기에, 말 위에서 싸우는 법은 알지 못했다. 불시에습격을 받는다 해도말에서 내리는 편이 대응하기 유용할 것이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아이샤는 고삐를 쥐지 않은 손으로 목에걸린 초커를 만지작거렸다. 초커의 한가운데에는 검은 줄에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루비가 달려 있었다.

성문은 오랜 세월을 이기지 못한 채 문이 주저앉은 것처럼 보였다. 성문을 매달고 있던 경첩이 녹이 슬면서 약해져 문을 떨어트린 것이다.

주변에는 원래 농지였기 때문인지 해자를 파놓지 않은 성이었다. 다만 높은 성벽을 쌓아 마물과 적을 경계했던 듯했다.

아이샤는 말고삐를 쥔 채로 성문으로 들어갔다. 바닥에깔린 성문은 이미 썩어서 말의 무게를 이기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아이샤는 말이 성문을 밟지 않도록 곁으로 돌며 성의 앞마당으로 들어갔다.

안은 당연하겠지만 잡초와 수풀로 무성했다. 오랜 시간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듯했다.

'아무도없는 건가? 설마…. 잘못 온 건 아니겠지?'

까악!

난데없는 까마귀 소리에아이샤는 흠칫 놀라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까마귀가 여기라는 듯이 가볍게 선회하며 본관의 문으로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저것도마물이겠지.'

황궁의 방에서 맡았던 썩은 내를 떠올리며 아이샤는 어깨를 움츠렸다. 역시 기분나쁜 마법사였다.

부서진 스테인드글라스의 유리창이 오묘한 빛을 던지고 있었다. 그 빛이 저택 내의 더러운 먼지와 무너진 지붕조차 연극 무대의 한 장면처럼 보이게 했다.

아이샤는 2층으로 올라가는 넓은 계단의 한가운데에선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왜 이곳을 만남의 장소로 선택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곳에서의 그녀는 저택의 주인처럼 보였다. 사교계의 여왕이라 불리며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던 카룰리아스의 장미…. 그 모습 그대로인 것처럼.

"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넌 네 어머니를 수다스럽고 덜떨어졌다고 경멸했잖아."

"……."

아이샤는 이자벨을 노려보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이자벨은 잠시 동안이지만 아덴 공작부인과 교우 관계를 가졌던 것 같으니까. 그녀는 완전히 로제타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목소리까지 흉내 낼 수 있었지만, 지인은 그 민감한 차이를 눈치챌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덴 공작부인의 말투가 어땠더라?'

"…어머니는 어디 계시지?"

"염려 마. 그 아둔한 여자한테는 볼일이 없으니까."

황제가 병중이고, 이그네시아 공작가가 반란으로 붙잡혀 고초를 겪는 와중에도 귀부인들의 모임을 포기하지 못한 어리석은 여자였다. 귀족가의 여인네들이 차기 황비의 어머니라며추켜세워 주는 것이 기뻤던 모양이었다.

주변의 시선을 끌지 않고 황실 기사들을 처리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암살이 전문인 그들이었다. 모임의 장소가 바뀌었다며다른 카페로 유인하고, 휘르센 백작부인과 시녀들에게는 수면제가 들어 있는 차나 음식을 먹게 했다.

황실 기사들은 모조리 죽였지만, 휘르센 백작부인과 시녀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정신을 잃은 채로 묶어서 문제의 그 카페에가둬 두었다. 황실의 마차는 검은 칠을 하여 근처의 창고에숨겨 두었고.

"네가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근처를 수색하다보면 네 어머니도 결국 발견되겠지."

휘르센 백작부인의 존재는 그리 중요치 않았기에여기까지 데려올 필요도 없었다는 얘기였다. 아이샤는 차라리 안도했다. 지켜야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안심하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너 정말로 내가 시킨 대로 이곳에혼자 왔잖아. 지난번에세웠던 계획이 다무색해질 정도야! 겨우 이 정도 수작에걸려들다니…."

당연한 얘기겠지만 이자벨은 혼자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홀 이쪽저쪽으로 나 있는 문에서 이자벨의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샤가 흠칫 뒤를 돌아보자 저택의 입구에도 지키는 자가 있었다.

"이렇게 간단히 손에들어오다니! 너같이 멍청한 계집에게는 오래 머리를 굴릴 필요가 없는 거였는데 말이야."

지금 움직여야 할까? 아니면 나중에? 아이샤는 점점 좁혀져 오는 기사들을 돌아보며머리를 굴렸다. 계단 위쪽에선 이자벨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하필이면 너같이 멍청한 계집이 미카엘 님의 사랑을 받다니…. 그분은 결국 너를 선택한 것을 후회하게 될 거야!"

이자벨은 로제타를 이용하여 미카엘을 휘두를 생각이지만, 그 전에로제타를 멀쩡하게 놔둘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상처받은 것 이상으로 로제타가 처참하게 망가지고 무너지는 꼴을 보고 싶었다.

"잡아다가 우선은…, 죄인들 사이에풀어놓도록 해. 여자에굶주린 놈들이니 저런 것도 계집으로 대해 주겠지."

"당장 죽이지 않으시는 겁니까?"

불쑥 튀어나온 목소리에아이샤의 손이 멈췄다. 계단 위에선 이자벨도, 서서히 아이샤에게 접근하고 있던 기사들도 놀란 것 같았다.

그만큼 말수가 적은 시릴이었다. 물어보지 않는 한 먼저 말하는 일이 없는 그가 먼저 이자벨에게 말을 건 것이다.

"저 계집이 있어야지만 미카엘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어. 알아들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미카엘 황자가 돌아온다면 결국 저 여자를 빼앗길 뿐입니다. 지금 죽이셔야 합니다."

거듭 주장하며시릴은 이자벨 곁으로 내려왔다. 그는 2층에숨어서 이자벨과 아이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이번 로제타를 납치하는 일에그가 가장 큰 공을 세웠다는 것은 알지만, 이런 식의 참견은 불쾌한 일이었다.

"누구한테 명령하는 거지?! 내가 네 주인이야!"

이자벨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시릴을 꾸짖었다. 시릴은 대답하지 않은 채로 묵묵한 시선으로 로제타의 모습으로 변신한 아이샤를 쳐다보았다.

아이샤는 본능적으로 이자벨 카룰리아스보다시릴이라는 저 마법사가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굴 보는 거야?!"

이자벨은 시릴이 자신을 무시하고 로제타에게 집중한다는 사실에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미 로제타에게 미카엘을 빼앗겼다생각하는 이자벨이었다.

그녀가 시릴에게 별다른 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제 수하조차 자신을 무시하고 로제타에게 신경을 쓴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 없었다.

철썩!

이자벨이 휘두른 손에따귀를 얻어맞은 시릴의 입꼬리가 기묘하게 올라갔다.

"…멍청한 년. 저 계집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나? 지금 이 성으로 기사단이 올라오고 있다."

추적자가 있을 것쯤은 예상했던 바였다. 이자벨은 로제타를 납치해서 성 뒤편으로 뻗어 있는 산을 넘을 계획이었다.

"시릴! 아가씨께 무슨 말버릇이냐!"

기사들 중 한 사람이 목소리를 키웠으나 시릴은 그들에게 집중하지 않았다. 그는 소매에서 단검을 뽑아 들어 이자벨에게 겨누었다. 이자벨은 흠칫 시릴을 노려보았다.

"무슨 멍청한! 이제 다된 일이야! 저 계집을 잡았으니, 다된 거라고!"

"멍청한 건 너다. 인질을 잡아 두는 것 정도로는 미카엘 황자를 어찌할 수 없다는 걸 모르는 거냐? 그자의 강함은…, 너나 나 같은 범인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범인? 누가 평범한 사람이라는 거지?! 나는 이자벨 카룰리아스…. 아."

저택의 홀이 다울리도록 고함을 지르던 이자벨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이자벨의 고함을 듣기 싫었던 시릴이 그녀의 가슴에단검을 꽂아 넣은 탓이었다.

모두가 그 광경을 보고 있었으면서도 아무도 반응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시릴은 몇 년간 동고동락한 동지였기에, 단검을 뽑아 들었다해도 찌르지 않을 거라 착각했던 것이다.

"아…. 아아……."

가슴으로 파고드는 섬뜩한 통증에이자벨은 고통과 두려움이 밀려왔다. 시릴은 경악하는 이자벨의 눈을 들여다보며말했다.

"복수는…. 내가 할 수 있게 해 주지. 이게 미카엘 황자에게 복수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 거다."

"시릴!!!"

분노한 이자벨의 기사들이 계단으로 달려왔다. 시릴은 이자벨의 가슴에서 단검을 뽑더니, 주머니에서 꺼낸 무언가를 그녀의 상처 자리에밀어 넣었다.

"어, 아악!"

아직 숨이 붙어 있었던 이자벨은 상처가 벌어지는 통증에비명을 질렀다. 단단한 씨앗 같은 것이 가슴속으로 파고들더니 가느다란 촉수 같은 것이 뻗어 오는 것이 느껴졌다.

"으악, 싫어! 아아악! 아악!"

촉수는 이자벨의 상처를 헤집으며그녀의 피를 마시고 순식간에자라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거리를 좁힌 기사들이 이자벨을 부축했으나 소용없었다. 이미 자라난 줄기가 이자벨의 입을 통해 튀어나왔다.

'허억….'

그 광경을 홀 한가운데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아이샤는 어깨를 움츠렸다. 지금이야말로 신호를 보내기 위한 순간인 것 같았다.

"시릴! 아가씨께 무슨 짓을 한 거냐!!"

시릴은 벌써 2층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무장한 기사들 중 일부가 시릴을 쫓아 2층으로 올라가고, 나머지는 이자벨의 몸을 감싸는 줄기를 뿌리치려 애쓰고 있었다.

줄기는 마치 고치처럼 이자벨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하나를 뽑아내면 네 가닥, 다섯 가닥씩 솟아나오는 줄기에기사들은 당황하며손을 휘둘렀다.

그러다기사들 중 한 사람까지 그 줄기에휘감기기 시작하자, 그들은 이자벨을 놔 버리고 뒤로 물러났다.

휘리릭….

금세 이자벨의 몸이 짙은 갈색의 줄기에휩싸여 보이지 않게 되었다. 커다란 갈색 고치의 모습에기사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아이샤가 뒤를 돌아보자니, 그들은 로제타라도 붙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아이샤를 잡으러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샤는 주변으로 걸음을 옮기며손끝으로 초커의 루비를 두드렸다.

"정령왕님! 지금이에요!"

【오냐!】

루비에서 가느다란 불꽃이 피어오르는 듯싶더니 순식간에거대한 붉은 말이 나타났다. 날개가 달린 붉은 말은 다가오는 기사들에게 새빨간 불꽃을 뿜어냈다.

"으아아악!"

"신호! 신호요!"

【그래그래.】

불꽃의 정령왕은 기분이 좋은지 크게 투레질을 하며고개를 하늘로 쳐들어 올렸다. 그가 가볍게 불꽃을 뿜자, 가늘고 높은 불꽃이 하늘로 치솟았다.

스테인드글라스의 유리 천장이 부서져 내리는 것에아이샤는 머리를 감쌌다. 불꽃의 정령왕이 날개를 넓게 펼쳐서 그녀의 머리 위를 보호해 주었으므로, 파편에다친 것은 이자벨의 기사들뿐이었다.

【그 계집은?】

"저기…."

아이샤가 가리킨 끝에는 점점 더 많은 줄기에둘러싸여 거대해지는 갈색 고치가 있었다. 기사들은 검을 뽑아 든 채로 주춤거리며물러나고만 있었다.

【아이고, 맘보를 곱게 쓰더니…. 꼴좋구만!】

"네?"

알아듣지 못한 사이, 점점 커지는 고치에불길함을 느낀 기사들 중 하나가 검을 휘둘렀다. 아무래도 고치에서 무언가 튀어나오기 전에해치워야겠다판단한 듯싶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검에찢긴 부분에서부터 고치가 길게 갈라지며거대한 거미 마물이 튀어나왔던 것이다.

그 거미의 머리 위쪽에는 이자벨의 머리가 장식처럼 달려 있었다. 그녀의 긴 머리채가 거미 마물이 움직일 때마다흔들리는 것이 그로테스크했다.

놀란 기사들이 검을 휘두르자 거미 마물은 다리를 움직여 그것을 피하고는 기사들 중 하나의 몸통을 물어뜯었다. 갑옷을 입고 있음에도 허리부터 반으로 잘렸다. 기사들은 분노와 두려움에휩싸인 채로 거미 마물을 공격했다.

【흉측하기는! 하기야 저 본성에는 걸맞은 모습일지도 모르겠구나!】

불의 정령왕은 아이샤의 앞으로 나서며제 몸을 둘러싸고 있는 불꽃의 크기를 키웠다.

【그러나! 거미는 불꽃에약하지!! 오래간만의 전장이구나! 마구 날뛰어 주겠다!!】

불꽃으로 만들어진 발굽이 땅을 박찼다. 거미 마물로 변해 이성을 잃은 이자벨이었으나, 로제타에대한 증오심만은 남은 것인지 계단을 마구 내려오고 있었다.

불의 정령왕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새빨간 불꽃을 뿜어냈다. 아이샤는 방어 마법을 외며뒤로 물러났다.

저 위쪽에서도 또 다른 마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해냈다! 드디어….'

시릴은 허둥지둥 밧줄을 타고 내려왔다. 그는 성의 뒷문 쪽에 이미 말을 숨겨 놓은 상태였다. 이자벨의 기사와 암살자들이그를 죽이려 할 테지만, 시간은 마물이끌어 줄 것이다.

그는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여 2, 3층에 마물을 잔뜩 소환할 준비를 해둔 참이었다.

설사 살아남는다해도 이곳까지 밀고 들어온 황실의 기사단들이그들을 해치울 거라 믿었다.

'그 여자는 죽었겠지?'

아무런 능력도 없는 평범한 여자였다. 심지어 말도 잘 탈 줄 모른다는 정보였기에, 시릴은 로제타가 도망에 실패한 채로 그 자리에서 죽었을 거라 보았다.

그가 이자벨을 변신시킨 거미 마물은 소드마스터가 아니면 죽일 수 없는 상급 마물이었다. 그가 2층으로 올라간 뒤로 좀 이상한 소음이들리기는 했으나, 로제타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치에 맞지 않으니까.

'이제 나는 이나라와는 끝이다. 이대륙을 떠나서 새로운 나라에서…, 새 출발 하고 말겠어!'

다행히 카룰리아스 가문은 시릴에게 박하게 굴지 않았다. 그는 늘 필요한 것 이상의 보수를 받았으며, 그것을 전부 마법 주머니에 보관하고 있었다.

시릴은 라스탄에서 있을 수 없게 됐을 때를 대비하며 되도록이면 보수를 보석으로 받았다. 아니면 반드시 금화로 지불받도록 했다.

그러니자금도 풍족하고 다른 나라로 건너가도 어떻게 해서든 정착할 수 있을 것이다.

시릴은 성의 뒷문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말은 숨겨 놓은 그 자리에 있었다. 시릴은 서둘러 나뭇가지에서 말의 고삐를 풀고 말에 올라탔다.

그가 도망쳐 나온 곳에서 기사들의 고함과 비명 소리가 들렸다.

몇 년간 시릴을 동료로 데리고 있으며 마물을 부리기만했으므로, 자신들이그 마물에게 공격당하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을 터였다.

"모두 죽어라."

시릴은 눈을 빛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자벨을 비롯하여 카룰리아스의 그림자들 중 다수가 시릴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혹시 라스탄에서 추적자를 보낼지도 모르니, 그의 얼굴을 알고 있는 '카룰리아스의 그림자'의 모두를 죽여야 했다.

성의 뒷문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시릴은 말을 진정시켜 뒷문을 빠져나갔다. 멀지 않은 곳에서 느껴지는 마물의 기척에 말이겁먹은 것이보였다.

시릴은 마물은 물론 짐승도 잘 다룰 수 있었다. 다만그의 취향이동물보다는 마물에 더 기울어져 있었을 뿐이다.

무사히 뒷문을 빠져나온 시릴은 이자벨이처음 말했던 대로 산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가 말에 박차를 가하며 달리게 하려는데,

푹!

화살 한 대가 정확히 그의 등에 꽂혔다.

'어?'

벌써 왔을 리가 없다. 성의 뒷문까지 황제의 군사들이진입했을 리 없었다. 그가 분명 좀비 까마귀로 위치를 확인했으니분명했다.

그러나 두 발, 세 발째의 화살이시릴의 몸을 꿰뚫었다. 두 발째에는 어깨에 맞았으나 세 발째는 정확히 두개골을 꿰뚫었다.

생명이빠져나간 육신이말의 등자 위에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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