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장. 이용하는 자, 이용당하는 자
황제가 무사히 회복되었다는 소문이돌았지만, 어전 회의를 진행하는 것은 여전히 황비인 아네트였다. 신하들이황제의 소식을 물으면, 아네트는 회복 중이시라고만 답했다.
서너 명에 불과했지만, 황궁에서 자하르의 첩자가 나온 탓에 황실의 분위기는 매우 날카로웠다. 이그네시아 공작가의 반역에, 자하르의 일까지 있으니 그러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귀족가에서는 섣불리 황실에 세작을 밀어 넣지 못한 채로 흘러나오는 얘기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황실에서는 말을 완전히 막는 것보다는 혼란스럽게 하는 게 유효하다고 판단한 듯했다. 어떤 이는 황제가 거짓말처럼 나아서 검을 휘둘렀다고 했고, 어떤 이는 끔찍한 상처에서 회복되지 못한 채 겨우 숨만 붙어 있다고 했다.
고위 귀족들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못한 채로 고민하고 있었다.
"이그네시아 공작이그 꼴이나는 것이야 당연하다고 쳐도…. 저희의 계획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대로 진행해야 할까요?"
귀족들 중 누군가 조심스럽게 꺼낸 말에 다들 침묵했다.
아덴 공작부인을 죽인다는 것은 위험이큰 일이었다. 미카엘 황자가 제 부인을 아끼는 듯이보여 더욱 그러했다.
"…들려오는 말에 따르면 이그네시아 공녀가 여전히 황궁에 머물러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황비 전하께서 부인하신 일이아닙니까?"
"황비 전하의 입장에서는 부인하고 싶은 일이시겠지요. 하지만…, 병환 중인 폐하가 공녀의 방을 드나드신다는 말이있습니다. 황궁의 의원도 하루에 한 번씩 들러 상태를 살피신다 합니다."
그 말에 귀족들 사이로 웅성거림이퍼져 나갔다. 황제가 아픈 몸을 이끌고 공녀를 살피는 데다가, 황비가 그것을 묵인한다면…. 아네트 황비가 그 아이를 양자로 삼아 키우려는 것이아닌가 하는 생각이들었다.
"이것이사실이라면, 미카엘 황자께는 곤란한 상황이겠군요."
"아무래도 그렇지요. 다 되어 가는 일이었지 않습니까? 곤혹스러우실 겁니다."
"지금 보니, 황궁에서 갑자기 나오신 것도 그것 때문이아닐까 싶군요. 병환 중이신 폐하와 싸우신 것은 아닐는지…."
"공작부인이남아 황비 전하의 곁을 지키는 것도 비 전하를 설득해 보려는 움직임이아니겠습니까?"
이그네시아 공작이반역을 저질렀으니, 그들은 아마도 이그네시아 공녀가 아이를 낳자마자애를 빼앗기고 쫓겨나거나 죽임을 당할 것이라 여겼다.
아이는 황비의 소생으로 둔갑하여 황비 밑에서 크겠지. 황비에게 자식이없었기에, 그녀가 섭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이가 필요했다.
"이거이거…, 황비 전하와 미카엘 황자께서 서로에게 등을 돌리게 되시는 것이아닌가 걱정스럽군요."
이제까지 황비는 황위 계승 문제에 대해 아무런 입장 표명도 하지 않았다. 입에 올리면 반드시 아이를 낳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으로 이야기가 몰렸기 때문이다.
"폐하의 소생이라 해도 반역자의 혈통이아닙니까? 황실의 귀한 핏줄이기는 하나…. 미카엘 황자전하가 계신데요. 설마 폐하가 그러시기야 하겠습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눈은 웃고 있었다. 그들은 미카엘 황자가 온건하게 황위를 물려받는 일이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미카엘 황자의 세력이굳건하다면, 미카엘은 굳이그들의 손을 잡으려 들지 않을 터였다.
"…친황제파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미카엘 황자를 지지한다는 이들이다수이기는 합니다만…. 황제 폐하께핏줄이있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이그네시아 공작가가 멸문을 당할 것이지만, 그 친척들까지 모조리 죽임을 당할 예정은 아니었다. 몇 안 되는 공작가인 탓에, 그 혈연이황실에도 닿아 있는 탓이었다.
그들은 다급히 황비인 아네트에게로 찾아가 자신들의 무고함을 호소하고 충성을 맹세했다.
아마도 아네트 황비가 그 아이를 양자로 맞이한다면, 그들은 미카엘보다는 그 아이쪽의 손을 들어 줄 것이다.
이그네시아 공작가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훗날 그 아이를 이용하여 제 원한을 갚을 수 있다 여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에이이…. 어차피 다음 대의 황제는 미카엘 황자님이되셔야 하거늘. 감히 무엇을 고민한단 말입니까? 무도한 자들 같으니라고…."
아직 살아 있는 황제를 놔두고 다음 대를 논하는 것이더 무례한 짓이었으나, 이자리에는 황제도 황비도 없었다. 그들은 다음 대 황제를 자신들이선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흥분하고 있었다.
"미카엘 황자전하가 걱정이로군요. 힘이될 집안의 여식을 부인으로 맞이해도 힘을 모아야 할 판국에…, 휘르센이라니!"
혀를 끌끌 차며 그들은 힐끗 모여 있는 귀족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대부분 반신반의하고 있었으나, 황실의 소식을 물어다 주는 몇몇 귀족의 말에 기대를 품게 된 모양이었다.
"커흠. 그럼…, 일을 진행시키기로 하시는 겁니까?"
"언제 폐하께서 다시 쓰러지실지 모르니…. 미리 일을 도모하는 것이좋겠지요. 미카엘 황자께서 빨리 슬픔에서 벗어나야 일이될 것이아닙니까?"
미카엘이아덴 공작령으로 내려가 있고, 로제타가 홀로 황궁에 남은 지금이기회라면 기회였다.
저들은 미카엘이공식적인 자리에서 여러 차례 황위에 뜻이없음을 말했는데도, 그에 대한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이생각하기로, 황위라는 것은 거절할 리가 없는 것이었으므로.
미카엘 황자또한 단순히 황제를 흡족하게 할 생각으로 그렇게 말했다 여기는 것이다.
"하나…. 확인되지 않은 소문으로 일을 도모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자리에 황제 및 미카엘의 첩자가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그들은, 이그네시아 공녀와 황제의 관계를 확인할 방법을 궁리했다.
첩자의 보고에 알렉시스는 일이잘되어가고 있다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귀족들이그런 자들임을 알고 있었으나 그 무도함이거슬린 탓이었다.
'이놈들은 세월이지나도 발전이없군.'
그들의 아버지세대가 알렉시스가 황위에 오르던 시절, 불손한 움직임을 보여 두어차례 짓밟혔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훈을 얻지못한 것인지, 그다음 세대가 또 저러고 있다.
잔잔한 어항 속의 물고기가 세상을 모르듯, 귀족 생활의 안온함이그들에게 어리석음을 가져다준 것 같았다.
'카룰리아스…, 이그네시아에 이어서 또…. 보전하기에는 싹수가 노란 것이보이니, 신흥 세력을 키워 주어야겠구나.'
해마다 젊은 귀족들이쏟아져 들어오는 수도였다. 마물 토벌이나 국경에서의 분쟁으로 인해 크고 작은 공을 세우는 자들이명성을 얻거나, 작위를 받았다.
그런 젊은이들에게 적당히 힘을 실어주어세력으로 만드는 것은 알렉시스에게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이미 통치한 지십여 년이넘었으니.
그러나 이짓을 또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에 기가 찰 노릇이었다. 저것들은 돌대가리인가. 그나마 올해에는 제법 괜찮은 인재 몇을 얻고, 남동생을 결혼까지시켰으니,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터였다.
'그래…. 제럴드 휘르센이우직하니 쓸 만했다. 정치적으로야 별 눈치가 없는 것 같았지만, 이런 자들은 요모조모 쓸모가 있는 편이지.'
그의 양부인 엔디미온도 사업적인 감은 있는 편이니 적당히 중용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장차 황제의 외가가 될 집안이힘이없어서는 안될 터이니 말이다.
***
흑태자가 당했다는 소식에 시릴은 당장 그의 곁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를 막은 것 또한 흑태자였다.
'너는 그 여자의 곁에 있어라.'
이자벨은 미카엘이저주에 당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알았다면 곧 버려지게 될 로제타가 아닌 아이리스를 노렸을 것이다. 시릴 또한 동료에게 들은 이정보를 이자벨에게 전달할 마음이없었다.
'곁에서 기회를 노리다가 황비를 쳐라. 황제의 목숨이경각에 달렸으니…, 황비가 쓰러진다면 부왕께서도 마음을 바꾸실 것이다.'
그들은 황제에 대한 두 가지다른 소문 중에 당연히,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지못했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그들이행한 마법은 쉬이치유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고, 라스탄의 황제는 신성력이나 마법으로 치료받을 수 없는 자였다.
그러나 자하르의 왕인 일리야는 크게 겁을 먹고 있었다. 황비가 황제인 알렉시스의 이름을 빌려 일을 행하였는데도 그랬다.
미카엘이황위에 올라 자하르를 침략할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서둘러 흑태자에 대한 지원을 끊고 공공연하게 그를 버린 자식이라 칭하는 것이.
시릴은 이사실에 분노를 느꼈다.
'내전을 일으키는 일에는 실패했을지모르지만, 황제를 쓰러트렸으니 황비인 아네트는 결국 라스탄을 떠날 것이다. 이제 겨우 미카엘 하나만을 치면 되는 상황에 이르렀는데도, 폐하께서는….'
자하르의 왕 일리야는 제 자식들에게 가혹한 자였다. 그는 열여섯이나 되는 자식들 중에 딸셋은 나라의 이득을 위해 팔아 버렸고, 아들 다섯은 임무 도중에 죽거나 실종됐다.
남은 자식은 여덟.
로드리고를 제외하면 대부분 어린아이들이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아이가 열여섯이었으나, 딸이었다. 곧 가장 높은 값을 부르는 자에게 팔리듯 결혼하게 될 터였다.
'이번 일이성공한다면….'
그래서 미카엘도 죽고 아네트 황비도 죽게 된다면 자하르는 물론 주변국들까지도 라스탄을 나누어먹고 싶어안달을 할 것이다.
흑태자인 로드리고 또한 그러할 것이며, 자하르 왕인 일리야는 다른 나라에게 선수를 빼앗길까 봐 재빨리 군대를 일으킬 것이다. 일리야의 성정상 그제야 로드리고의 공을 치하하며 군대의 지휘를 맡기겠지.
흑태자는 그때 부왕인 일리야를 죽일 생각이었다. 전군의 통솔권을 가진 후, 부왕의 죽음은 늦게 알리면 된다.
어차피 부왕은 뒤에 앉아 있고, 실질적으로 군대를 지휘하는 이는 흑태자일 것이므로.
전쟁이끝날 즈음에는 흑태자가 이미 그들의 왕일 것이고, 일리야의 죽음을 안다 해도 크게 동요치 않으리라 보았다.
흑태자와 뜻을 함께하는 젊은 귀족들 또한 같은 마음이었다.
탐욕스러운 주제에 중요한 순간에 발을 빼는 자는 그들의 왕으로 자격이없었다. 그들이모실 분은 오직 하나, 흑태자뿐이라고 맹세했다.
'그것을 위해서는….'
시릴은 표정을 감춘 채로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이자벨을 바라보았다. 이자벨은 친귀족파의 동향에 대한 보고를 듣고 있었다. 황제가 쓰러진 지금 귀족들의 세가 어느 쪽으로 갈리는지가 중요했으므로.
'이여자를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
다행히 이자벨은 시릴을 사용하기 편리한 도구 이상으로 보지않았다. 그에게 숨겨진 의도가 있다는 생각은 하지못할 것이다. 그것은 휘두르는 칼에 의지가 있다는 말과 같았으므로.
시릴은 이자벨의 수하들이하는 말을 경청하며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누구의 주의도 그에게 닿지않도록.
***
'벌써 지방 영지로 내려간것은 아니겠지?'
작위가 후작으로 떨어졌다고는 하나 카룰리아스 가문은 여전히 거대했다. 많은 재산을 빼앗겼음에도 다른 작위들은 놓치지않았다. 그러니 가만히 웅크리고만 있다면 이전만은 못해도 고위 귀족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이자벨 카룰리아스가 또 다른 죄를 저지르지않는다면.
'어차피 망할 집안이다.'
젊은 영애의 몸으로 잔학한 짓을 저지른 이자벨 카룰리아스는, 호송 중에 도망친 이후로도 죄를 저지르고 있었다. 아직 그녀가 붙잡히지않아 명확히 죄를 묻지는 못했으나, 아덴 공작령에서 벌어진 공작부인 납치 사건도 이자벨이사주한 듯싶었다.
이자벨이이후 잡혀 들어오고 여죄를 추궁받는다면, 카룰리아스 가문은 후작 작위는 물론 다른 작위 또한 유지하지못할 터였다.
이미 카룰리아스 공작가의 가신 가문들은 모두 빠져나간뒤였고, 가문의 실력 있는 마법사와 기사들 또한 그러했다.
남은 자들은 카룰리아스가의 은혜를 받은 충성스러운 자들뿐이었다.
'그나마도 몰락한 가문을 견디지못하고 나갔을 터다.'
최후의 최후까지남은 자들은 진짜 충성스러운 자들이거나, 나갈 형편이되지않는 자들뿐일 터였다.
주인이원하는 이는 나갈 형편이되지않는 기사들이었다.
불만이가득 쌓인 어리석은 자들.
그런 자들이이계획에 필요했다.
'황제와 이그네시아 공녀의 관계를 확인하기 전이기는 하다만…. 미리미리 살펴 두어야 일을 시작하기 좋겠지.'
마르케즈 후작으로부터 명을 받은 휴이는 조심스레 후작저를 살폈다. 카를리아스 가문은 수도 외곽에 있는 조용한 저택으로 거처를 옮겼다.
당연한 일이었다. 감옥에 갇힌 아버지의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수도에 남은 것이었으니.
베아트리체가 아무리 노력을 한들, 카룰리아스 후작이바깥으로 나올 일은 없었으나, 그녀는 곧바로 후작가의 영지로 내려가지않았다.
친귀족파나 마르케즈 후작을 위해서는 좋은 일이었다.
'지나치게 잠잠하다.'
귀족 가문이라 해도 사람이사는 집이었다. 고용인이며 기사의 숫자까지합치면 상당한 숫자가 되므로 식재료를 나르는 자들이오고 가기 마련이었다.
그것도 없이꽤 조용해졌다. 고용인들 몇몇이쫓겨난 것 같다는 소문은 있었으나 그 후로는 잠잠해진 터였다.
'설마 야반도주하듯 영지로 내려간것인가?'
닫혀 있는 후작가의 문 앞에서 휴이는 목을 빼고 기웃거렸다. 문은 잠겨 있었지만, 창살문인지라 정원이고스란히 엿보였다.
정원사를 자르기라도 했는지잡초가 무성하고 정원수가 웃자랐다.
휴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있는지살피다가 훌쩍 담을 넘었다. 고위 귀족의 저택에 침입하는 일이란 위험하기 짝이없었으나, 들키지만 않으면 될 일이었다.
그는 어느 모로 보아 평범한 하인이나 시종이입을 법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여차하면 적당히 둘러대고 기회를 틈타 달아나면 되는 일이었다.
'기사들은 어느 쪽에 있을까?'
카룰리아스의 형편에 기사를 몇이나 유지하고 있을지가 걱정스러웠다. 이자벨에게 직접적인 명령을 받던 자들은 달아났고, 라울 카룰리아스의 사업에 대해 알고 있는 자들 또한 잡혀 들어갔다고 알고 있었다.
남아 있는 자들은 양쪽에 속하지않는 쭉정이들일 터였다.
뭐, 꼭 쭉정이라는 확신은 없지만 휴이의 생각은 그러했다. 가문의 가주와 영향력이큰 공녀에게 차출되지않았다는 건 그런 거니까.
창문에서 바라보이는 위치를 피해 건물로 접근한 휴이는 기사들의 숙소가 있을 만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느 저택이든 기사들의 숙소는 비슷한 곳에 위치하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낮 시간에는 근무를 가거나, 훈련을 하므로 숙소는 대부분 비어있었다.
'흐으음~, 지나치게 사람이없는데? 나야 좋지만….'
역시 도망간것 같다는 쪽으로 생각이기울기 시작했다. 옥바라지를 아무리 열심히 한들 라울 카룰리아스가 풀려날 리 없으니, 그 딸이포기했을지도 모르고.
기사들의 숙소에 낮 시간동안하인이드나들 일은 거의 없을 터였다.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이의 시중을 든다면 또 모를까.
확실하게 하기 위해 마구간을 확인하려 휴이는 걸음을 옮겼다. 아직은 저택이빈집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이렇게까지조용하니 이상한 노릇이었다.
카룰리아스가가 몰락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정도까지는 아니기에 머물러 있다면 이렇게까지사용인들의 숫자를 줄일 리가 없었다.
'뭔가 이상한….'
"헉!"
뒤를 잡힌 줄도 몰랐다. 제 목줄기에 대어진 칼날에 휴이는 숨 한 번 크게 쉬는 것으로 놀라움을 대신했다. 그 탓으로 시퍼렇게 날이세워진 칼날에 목이스쳐 붉은 실선이그어졌다.
무장한 남자들이제 어깨를 움켜쥐는 것을 보고 휴이의 얼굴이새파랗게 질렸다. 갑옷을 입은 자들은 당연히 그 기척이클 수밖에 없다. 그들을 눈치채지못했다는 것은 그만큼 상회하는 실력을 의미하고 있었다.
'왜 이런 실력자들이이저택에….'
그러나 의문이너무 늦었다. 휴이는 찍소리도 하지못한 채로 기사들의 손아귀에 끌려갔다.
공작으로서의 업무는 꽤 쌓여 있었다. 황실에 가있는 동안황제의 병세에만 집중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이치였다.
미카엘은 옷을 갈아입고 즉시 업무에 몰두했다. 로제타는 표면적으로는 마님의 명령을 받고 공작님을 감시하러 온 처지라, 그의 곁에 서서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다.
표면적으로는.
"이리와 주십시오."
산처럼 쌓여 있는 서류 앞에서 미카엘이 손짓했다. 긴 마차 여행으로 피곤했을 법도 한데, 미카엘은 그런기색이 없었다. 지금 방 안에 있는 것은 노아뿐인지라, 숨길 필요도 없다는 투였다.
꼭 끌어안고 이마에 키스하고 연이어 입술에 키스가떨어졌다. 노아는 점잖게 등을 돌리고 있는 터였지만 로제타는 그래도 민망했다.
"미카엘, 님…. 으흣…."
말하는 입술 사이로 미카엘의 혀가들어와 유혹하듯 그녀의 안을 맛보았다. 가신들이 드나드는 동안로제타가곁에 있는데도 손대지 못한 것이 꽤 억울했던 모양이었다.
"하아…, 음…. 오래… 일했으니까요. 부인께서…, 이 하인에게 상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말하며 미카엘은 로제타의 입술을 부드럽게 빨아들였다. 미카엘의 키스는 달콤했으나, 방 안에 둘만 있는 것이 아닌 게 문제였다.
"미, 미카엘 님…."
로제타가불편해하는 기색이 보이자 미카엘이 옆으로 손짓했다. 눈치 빠른 시종인 노아는 후다닥 옆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나갔다. 옆방은 공작가에 고용된 직원들이 일하는 방이었으나, 현재는 모두 퇴근한 상태였다.
집무실의 문이 닫히자마자 미카엘의 손이 로제타의 허리에서 엉덩이로 내려왔다. 그 노골적인 손길에 로제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전에는 공작부인의 신분이니 저택 안의 어디여도, 비교적 괜찮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괜, 찮습니다…. 지금은 키스만 할 테니까요."
품 안에 쏙 들어오는 가냘픈 몸을 만끽하는 것은 당장은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피곤할 테니 오늘은.
미카엘은 한 번 더 로제타의 입술을 부드럽게 빨아들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 앞의 의자를 치우고는 옆으로 긴 소파를 책상 앞으로 끌어왔다.
그리고 자리에 앉은 후에….
"일이 늦게까지 끝나지 않을 것 같으니, 주무십시오."
제 허벅지를 베고 누우라는 듯이 자리에 앉아서 쿠션까지 깔아 주는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로제타는 슬쩍 집무실 문을 돌아보았다.
아까부터 계속 선 채로 지켜보기만 해서 지루하기도 했고, 피곤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다리도 아프고.
"그, 그럼 문부터 잠그고…."
쪼르르 문으로 다가가두 개의 문 모두 잠그는 것을 미카엘은 굳이 만류하지 않았다. 문을 잠그지 않아도 마법으로 막아 두면 그만이지만, 이편이 로제타의 마음이 편할 터였다.
남편이니 허벅지를 빌려주겠다는 것을 굳이 거부할 이유도 없다. 다만 미카엘이 일하는데 혼자 자는 것이 미안할 뿐이었다.
"…제가자면 미카엘 님도 주무시고 싶지 않을까요?"
이미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누울 준비를 하면서 이런말을 하는 게, 로제타는 염치없다 느끼면서도 이렇게 물어보았다. 그에 미카엘은 피식 웃었다.
"저를 위해서라도 쉬시라는 겁니다. 오늘 밤도 부인의 정기가필요할 테니까요."
그 말에 로제타는 거절하지 않고 미카엘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마법사인 주제에 몸은 튼실해서 베개가좀 높았지만, 쿠션이 그럭저럭 제 역할을 해 주고 있었다.
피곤했는지 로제타가금세 잠들었다. 미카엘은 잠든 로제타가깨지 않도록 살금살금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애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조금쯤은 용서해 주시겠지.'
잠든 로제타를 귀찮게 하는 것은 미안한 일이었지만 역시 만지고 싶었다. 미카엘은 슬쩍 잠든 로제타의 입술에 키스하고는 싱긋 웃었다.
***
서쪽 성에 있는 제 방으로 돌아온 아이리스는 설레는 마음에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미카엘은 여전히 그녀에게 냉랭하기만 했지만, 그게 또 꺾는 맛이 있는 게 아닌가! 자신에게 모질게 해댔던 남주가무릎 꿇고 후회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또 한 재미였다.
'미카엘은 그리쉬이 꺾일 리없을 테지만 말이야.'
마침 신경 쓰이는 로제타도 공작저에 없었고, 기회라면 이때가기회였다. 이 순간을 위해 아이리스도 몇 가지 준비를 한 터였다.
'우선은….'
아이리스는 산책을 한다는 핑계로 방을 나서 주변을 기웃거렸다.
신전에서 보내 준 성기사는 다섯이었고, 공작저에서는 여섯 명이나되는 기사를 차출해서 호위기사로 붙였다. 원래 아이리스의 호위기사로 있던 성기사가둘이었으니, 열세 명이나되는 기사가그녀를 살피는 셈이었다.
2교대라고는 하나꽤나엄중해서 어떻게 빠져나가느냐가고민스러웠다.
'하필이면 다른 성에 방을 내주어서!'
본성과 서쪽 성과는 거리가꽤 있었다. 차라리북쪽 성과 남쪽 성이라면 오가기 수월할지 모르나, 본성으로 들어가는 것은 또 다른 얘기였다.
구름다리가있다는 것은 알지만, 원작의 내용을 알기에 그곳에는 여러 명의 병사들이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서 포기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호위기사들이 외부를 경계하는 거지, 날 감시하는 건 아니라는 거야.'
성기사들도, 공작가의 기사들도 아이리스가성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에 대해서는 집요하게 쫓아다니거나하지는 않았다. 일단 방 안으로 들어가면 그 문 앞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공작가에서는 처음에는 침실 서너 개만을 내어주었으나이후로는 방 몇 개를 더 내어줬다. 신전에서 온 다른 자들이 지내기 위함이었다.
아이리스는 산책을 핑계로 서쪽 성에서 본성 쪽으로 가는 경로를 확인하고 돌아왔다. 서로 정원이 맞닿아 있으므로 침입이 가능할 것 같기도 했다.
'들키면 망신이니까 조심해야 해.'
저주라니! 미카엘이 얼마나고통스러울까 싶었다. 저주 같은 건 원작에는 없는 내용이었는데, 하기야 미카엘이 로제타와 결혼한 시점에서 원작의 줄거리는 의미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여러 판타지 로맨스 소설을 섭렵한 아이리스는 이 상황을 제 입맛대로 망상하고 있었다.
부인도 없이 홀로 침실에서, 저주의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을 미카엘을 자신이 보듬어 준다는 그런내용이었다.
미카엘은 부인의 이름을 부르며 아이리스를 안아 그녀를 상처 주고는, 다음 날 정신을 차려 아이리스를 보고는 기겁하겠지.
그리고 저열한 말로 아이리스를 모욕하고는 저주의 고통에 또다시 아이리스를 찾게 되는 것이다. 그사이 미카엘의 마음은 점점 아이리스에게 기울어져 가고….
'우흣, 상상만으로도 배가부르다!'
미카엘이 저주에 걸린 것을 뻔히 아는데도, 그를 홀로 보낸 로제타의 냉정함이 일을 키웠다고밖에는 할 수 없었다. 아이리스에 빙의된 진풀잎은 자신이라면 절대 미카엘을 혼자 보내지 않았을 거라고 자신했다.
'어차피 로제타에 빙의된 아이리스가맺어져야 할 상대는 패트릭이잖아. 그러니 미카엘은 당연히 내가주워 가야지!'
아이리스는 잘 것이라고 말하고는 옷을 갈아입었다. 그녀는 제 시중을 드는 신녀가옆방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는 숨겨 두었던 겉옷을 꺼내 왔다.
'중간에 누군가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민망하니까….'
겉에는 평범해 보이는 드레스를 입고 속에는 청순한 듯 야한 속옷을 걸쳤다. 물론 드레스도 겉만 평범해 보일 뿐, 벗기기 쉬운 디자인이었다.
'자아, 드디어 간다!'
***
마지막 서류 작업을 마친 미카엘은 깊이 잠이 든 로제타의 이마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이대로 침실로 데려가고 싶었지만, 일개 시종을 공작이 안고 간다면 이상하게 여겨질 터였다.
"로제타."
간질간질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르며 미카엘은 그녀의 이마에 입 맞췄다.
"내 사랑, 이제 우리의 보금자리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아쉽게도 그들의 원래 침실은 사용할 수 없었다. 그 방에는 하인들이 사용하는 작은 쪽방이 붙어 있지 않아서였다. 애초에 그런방을 로제타에게 사용할 생각은 없지만, 바깥에서는 그 방에 로제타가자는 것처럼 해 두어야 할 터였다.
그래서 미카엘은 본성 안의 다른 침실을 비우게 했다. 시종이 사용해야 할 쪽방이 붙어 있는 넓은 침실이었다.
"우응…."
아직도 피곤한지 잠에 허덕이는 모습까지도 사랑스러웠다. 미카엘은 로제타의 이마에 거듭 입술을 비비며 속살거렸다.
"그렇게 졸리면 그냥여기서 잘까요? 저는 부인께서 여기서 제게 정기를 주셔도 상관없습니다만…."
정기를 주어야 한다는 말에 로제타는 정신이 들었다. 제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손가락을 잡으며 눈을 뜨자 미카엘의 짙은 녹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로제타와 시선이 맞닿자마자 사르르 휘어지는 눈꼬리에 가슴이 뛰었다.
"불편하지는 않으셨습니까?"
다정하게 어루만지는 손길에 녹아 불편한 줄도 몰랐다. 말을 하는 내내 사랑스럽다는 듯이 그녀의 뺨과 입술을 만지작거리는 미카엘이 좋았다.
'아…. 더 좋아지면 안되는데.'
여기서 더 미카엘을 사랑하게 된다면 밤이 더욱 달콤해질 것이다. 진득하게 녹아 헤어나지 못할 만큼.
"전혀요."
미카엘의 손을 잡아 그 손바닥에 얼굴을 묻자 미카엘의 얼굴도 달아올랐다. 이 순간이 못 견디게 행복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빨리, 방으로 올라갈까요?"
로제타를 번쩍 안아 올려 침실로 데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나마 강제 주말 부부가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
"그 전에…, 키스해 주세요."
조르는 듯한 시선으로 그리말하는 것에 조급한 키스가쏟아진 것은 절대 자신의 탓이 아니라고 미카엘은 생각했다.
***
아이리스가배정받은 침실은 2층에 있었다. 본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1층으로 내려가야 했으므로 아이리스는 다소의 모험을 해야만 했다.
'나무를 탈 줄 알아서 다행이었다.'
발코니로 나와 넓게 가지가드리워진 나무를 잡고 천천히 아래쪽으로 내려왔다. 이미 그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켰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눈치였다.
'호위 없이 저택 밖으로 나가려는 것이 아닌 한은 제지할 필요 없다.'
호위 일을 맡기 전에 기사단장님께 들은 지시였다. 호위기사는 이 오밤중에 무슨 용무시냐고 묻지도 못한 채로 지켜보기만 했다.
나무에서 내려온 아이리스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본성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설마 신전 측에서 성녀님께 첩자 일을 지시했단 말인가?'
말도 안되는 추측이었으나, 실제 아이리스의 모양새가괴이했다. 아이리스를 따라온 수행원이 있으므로, 이런종류의 일은 그 수행원이 실행해야 마땅함에도.
아이리스는 딴에는 기척을 죽인답시고 조용조용히 정원을 가로질렀다. 정원을 순찰하는 병사들이 있었으므로 기사는 그런자들이 보일 때마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신호를 보냈다.
이쪽으로 올 필요 없다, 혹은 모른 척해라.
아덴 공작저에 그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둔감한 이는 없었다.
아이리스는 호위기사 두 명이 제 뒤를 쫓으며 이렇게 해 주는 줄도 모르고, 제가제법 병사들을 잘 피한다고 착각하는 듯했다.
부지런히 걷고 있자니 본성의 저택이 보였다. 맞닿아 있는 정원의 병사들이 많은 구간을 통과해서였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어느 창문 앞에 멈춰 서서는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대로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에 기사들은 아차 싶었다.
저걸 불러 세워야 하나?
수상쩍기 짝이 없는 움직임인 것은 맞다. 그러나공작저는 본성이라고 한들 만만치 않은 장소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공작가에 있는 다섯 개의 성 전부가마물의 침입에 대비하여 만든 건물이었다. 침입이 용이한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왜 저 방 창문이 열려 있는 거야?'
그 방 창문은 낮에 아이리스가본성에서 미카엘을 기다렸을 때에 잠시 화장실을 사용하고 싶다면서 들른 방이었다. 성녀가침실에 딸린 화장실 좀 쓴다는데, 따라 들어와 감시하고 있을 고용인은 없었다. 아이리스는 그때 슬쩍 방 창문을 열어 두었다.
'우후후후…. 추리소설을 읽은 게 이렇게 도움이되네!'
본성은 그나마 정원과 맞닿아 있는 방이나창문이손닿을 곳에 있었다. 그 외에는 아예 창문이없거나천장에 붙어 있는 게 아닌가싶을 정도로 높은 위치에 창문이달린 방뿐이었다.
'병사들이나를 보지 못했으니 망정이지.'
정원 저 끝에서 병사들이이쪽을 향해 오는 것을 몇 번이나마주했던가. 하나같이몸을 돌려 가는 게 좀 이상하기는 했지만, 이것도 여주인공 버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들었다.
아이리스는 조용히 창문을 걸어 잠그고 방문으로 다가갔다. 이방도 상당히 호사스러웠다. 공작가의 다른 방과 마찬가지로.
'아…. 빨리 여기서 살고 싶어.'
리온가의 저택도 나쁘지는 않지만 아덴 공작가의 성과는 비교 자체가불가능했다. 신전에서 내어준 방과도 그랬다.
그래도 오래간만의 성녀라고 꽤 신경 써서 방을 만들어 준 것임에도 불구하고!
방문 앞에서 잠시 귀를 기울인 아이리스는 문 앞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이있는지 확인했다. 늦은 시간인지라 현재로서는 조용했다.
'하긴. 이런 시간에 누가돌아다니겠어. 미카엘이불렀다면 또 모를까.'
아이리스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미카엘의 침실 위치는 그녀의 시중을 드는 신녀가, 본성에서 일하는 하녀를 구슬려 알아낸 뒤였다.
물론 그 하녀는 신녀가그런 것을 묻는 게 수상쩍어서 사용하지 않는 손님방의 위치를 가르쳐 주었다. 심지어 집사한테 가서 신녀가그런 것을 묻더라고 까발리기까지 했다.
집사인 허버트는 일단 그 하녀에게 잘했다고 칭찬하고 입단속을 한 참이었다.
신녀가그런 것을 묻고 다니더라는 게 주변에 알려져서 좋을 것은 없었다. 수상쩍게 여기고 신녀를 추궁하려 해도, 그녀가그런 적이없었다, 딱 잡아떼면 그만이기도 했고.
이런 사실을 모르는 아이리스는 긴장 반, 설렘 반으로 두툼한 카펫 위를 걷고 있었다. 비어 있는 방으로 향하느라 복도에 병사들이없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으음~, 음~, 여기 같은데?'
쪽지에 적어 놓은 공작의 방 위치를 확인하며 복도에 나있는 문 개수를 확인한 아이리스가눈을 반짝였다. 드디어 미카엘이자고 있는 방으로 입성! 하려고 했으나.
철컥, 철컥철컥.
하녀로부터 그런 보고를 들은 허버트가잠가놓은 상태였다. 아이리스는 문이잠긴 것을 보고 당황했다.
'어? 어어?'
귀족의 방문은 대개가잠겨 있지 않았다. 설렁줄을 당기고 방문으로 가서 잠가놓은 문을 열려면 귀찮으니까. 거기다하인이와서 깨워 주기까지 하니 더더욱 그랬다.
'이상하다, 왜? 아!'
저주에 걸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들킬까봐 그러는구나! 하는 깨달음이아이리스를 스쳤다.
'안 돼! 이러면 내 계획이….'
미카엘이고통스러워하는 틈을 타서 그와 정을 통하고, 차차 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갈 커다란 계획의 시작 단계부터 실패할 수는 없었다.
노크를 한다든가, 안에 있는 미카엘에게 문을 열어 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부숴? 부숴도 될까?'
아이리스가된 지 몇 년밖에 안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녀는 성녀로서 신성력을 사용하는 데 제법 능숙해진 편이었다. 거기다치유 계열의 신성 마법에만 집중할 뿐, 공격 계열의 신성 마법에는 무지한 원작1의 아이리스와는 달리 그쪽으로도 배움을 넓혔다.
'미카엘이좋기는 하지만 감금될 수는 없으니까! 또, 내 마음이바뀔 수도 있고!'
원작 아이리스는 공격 계열 신성 마법에는 재능이없었지만, 빙의된 진풀잎은 쭉쭉 진도를 뽑았으므로 이쪽은 자신 있었다.
그래 봤자 빙의된 지 십 년도 안 되었으므로 대단한 마법은 사용할 수 없었지만.
"좋아, 해 보자!"
방문의 자물쇠만 부술 생각으로 아이리스는 소음이아예 없는 신성 주문을 외웠다. 신성 주문은 대부분이고대 마법이라 주문을 외우는 데 상당히 긴 시간이걸렸다.
손바닥에 빛이차오르자 아이리스는 그 손바닥으로 방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손잡이로 흰 빛이옮겨 가면서 손잡이는 물론 문의 일부와 자물쇠가있는 부분까지 녹였다.
'됐다!'
매캐하게 탄 냄새라도 나면 어쩌나싶었으나, 문제가된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삐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익!!!
온 복도를 뒤흔드는 듯한 시끄러운 소음에 아이리스는 기겁했다.
'경보 마법!'
화들짝 놀라 그 자리에서 도망치려 했으나이미 복도로 기사들이올라오고 있었다. 아이리스의 얼굴이새하얗게 질렸다.
***
날카로운 소음은 당연히 미카엘과 로제타가머물고 있는 침실에까지도 전달됐다. 저주를 핑계로 로제타의 몸을 한껏 탐하고 있던 미카엘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집사인 허버트가공작가에 계약되어 있는 하급 마법사를 동원하여 사용하는 경보 마법은 두 가지가있었다.
두 경보 마법은 소리가전혀 달랐다. 미카엘 또한 그 소리로 급한 일인지, 무시해도 되는 일인지를 구분하고 있었다.
"아아…, 무슨 소리…. 하으응……!"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허버트가하인들 중 누군가를 벌주려는 모양이군요."
음탕한 허릿짓으로 로제타의 안을 탐하며 미카엘이속삭였다. 반쯤 벌어진 입술에 녹진한 키스를 떨어트려 로제타의 위쪽도 듬뿍 맛보자, 흐트러졌던 주의는 금세 그에게 돌아왔다.
저주가풀리지 않았다는 핑계는 그리 오래 유지할 수 있는 것이아닌지라, 미카엘은 이기회를 마음껏 이용하리라 마음먹은 참이었다.
아직 저주가다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사실이기도 했고.
"하으…. 아응, 앙! 아하아아앙!"
배 속 가득 차오르는 야릇한 쾌락에 허리를 비트는 로제타를 부둥켜안은 채로 미카엘은 짙은 미소를 지었다.
행복한 시간을 만끽하고 있는 미카엘과는 달리, 공작가의 본성에 근무하고 있는 기사들과 맞닥뜨린 아이리스는 난감한 상황에 처한 참이었다.
'공작님이돌아오신 바로 그날에 일을 저지를 줄이야!'
잠옷 위에 겉옷을 걸친 허버트가경멸 어린 시선을 감추며 한숨을 쉬었다. 상대가단순한 귀족 영애였다면, 방으로 돌려보내고 날이밝는 대로 가문에 통보를 넣을 것이었다. 그러나지금 이자리에 있는 여인은 성녀였다. 그것도 라스탄에 하나밖에 없는 성녀.
신녀가찾아왔더라도 곤란할 판국에 성녀가떡하니 여기에 나타나다니.
"지, 집사…."
아이리스가수치심으로 뺨을 물들인 채로 허버트의 눈치를 살폈다. 그 와중에 몇 번 마주친 적이없는 그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성녀님께서 이한밤중에, 본성으로 들어오신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허버트는 성녀답지 못한 행동임을 지적할 생각은 없었다. 그것은 성녀가몸담고 있는 교단에서 해야 할 일이었다.
그는 이사실을 공작에게 보고할 뿐이었다. 처리는 공작의 몫이었다.
"기, 길을 잃어서?"
"우연히도 잠겨 있는 현관문을 열고 말입니까? 저 침실문은 왜 망가트리신 겁니까? 길을 잃으셨다면 사람을 부르셨으면 되었을 일일 텐데요?"
"……."
할 말이없는지라 아이리스는 눈을 피했다. 아이리스가신성 마법을 걸었던 문은 문고리 부분이었던 자리가아예 휑하게 구멍이뚫린 상태였다.
"밤이늦었으니 숙소로 돌아가시지요. 저들이모실 겁니다."
허버트가손짓하자 기사들 서넛이아이리스에게 다가왔다. 아이리스는 수치심에 고개를 들지 못한 채로 힐끗 기사들을 쳐다보았다. 기사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모시겠습니다, 성녀님."
어쩐지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차가운 것 같았다. 아이리스는 문이부서졌음에도 나오지 않는 미카엘이야속했다. 경보 마법이그리도 크게 울렸으니, 무슨 일인지도 알 법한데.
'가만.'
"성녀님?"
아이리스가돌연 부서진 문을 열고 안을 쳐다보자 기사들이얼굴을 찌푸렸다. 허버트는 짐작하는 것이있는지라 한숨을 푹푹 쉴 뿐이었다.
'없어?! 이방이아니었던 거야?!!'
널찍하고 부드러운 풍모의 침실은 안락해 보이는 것이었지만, 손님방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소설에서 읽었던 공작의 침실 묘사와 전혀 다르기도 했고.
어차피 미카엘이방을 옮겨서 실제 공작의 침실로 왔다한들, 미카엘을 만나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이제 다보셨습니까?"
뒤에서 들려오는 허버트의 목소리에 아이리스는 정신을 차렸다. 돌아보니 기사들은 물론 허버트와 하인들까지도 냉랭한 시선으로 아이리스를 보고 있었다.
그런 눈초리를 받을 일이거의 없는 아이리스인지라 찔끔한 기분이들었다.
"이제 돌아가시지요."
아이리스는 억울한 얼굴로 기사들을 따라 본성을 빠져나갔다.
***
가슴이따끔거린 것 같았다. 휴이는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뭐, 뭐지? 뭐야?!"
그는 카룰리아스 후작저의 창살문 앞에 누워 있었다. 저택 안이아니라 밖이다.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난 휴이는 심한 두통에 머리를 싸안았다.
"왜…. 내가여기에."
그의 기억은 마르케즈 후작의 지시를 받고 저택을 염탐하러 온 부분에서 끊어져 있었다. 분명 담을 넘어 저택 안으로 들어간 기억은 있지만, 그 후의 기억이없었다.
'무슨 일이있었던 건가?'
아니라면 그가정신을 잃은 채로 여기 누워 있을 리가없었다. 확인하러 안으로 들어가보아야 할 테지만, 덜컥 두려움이났다.
'왜 이리 가슴이아프지?'
가슴 속이아픈 것이아니라 표면이따끔거렸다. 한두 군데 가볍게 아픈 정도가아니라 가슴 전체가시큰거렸다. 칼로 저민 듯한 고통이그러할 것 같았다.
"음?"
문득 바닥을 굴러다니는 구겨진 쪽지가휴이의 눈에 들어왔다. 아까정신을 차리며 손아귀에 쥐어져 있던 무언가를 떨어트린 것 같았다.
휴이는 얼른 그것을 집어 들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가슴 표면의 시큰한 통증과 머리를 두들겨 맞은 듯한 둔통이이어졌다.
쪽지를 펼쳤지만 완전한 밤이된 터라 내용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휴이는 그것을 들고 불빛이있는 민가가까이로 자리를 옮겼다.
어느 창문 앞에 자리를 잡고 쪽지를 펼치자….
[오늘 내로 네 주인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면 저주가발동할 것이다.]
쪽지 안의 내용에 휴이의 눈이커졌다. 짚이는 구석이있었던지라, 휴이는 셔츠의 옷깃을 벌려 안을 확인했다.
'젠장!'
흉터 몇 개가있는 것이전부였던 그의 가슴에, 커다란 마법진이새겨져 있었다. 칼로 한 짓인 듯 아직 아물지 않아 가늘게 피가흐르는 것이흉물스러웠다.
휴이는 다급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이떠올랐으나아직 중천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저주가그저 위협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들었으나, 가슴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마법진은 정교한 것이라 그럴 확률은 적은 것 같았다.
"마, 마법사!"
마법사를 찾아서 이상처를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들었다. 휴이는 아는 마법사가있는 곳으로 달리려 했으나가슴에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시작되었다.
"헉!"
하늘을 올려다보니 달은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들이 정한 시간이, 달이 중천에 떠오른 시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마르케즈 후작가에도 마법사는 있었으므로, 휴이는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미행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가슴의 통증이 점점 번져 가고 있었다.
"으아악!"
휴이는 거리를 내달려 마르케즈 후작가로 돌아갔다. 식은땀을 흘리며 나타난 휴이의 모습에 후작가의 문지기들은서둘러 문을 열어 주었다. 휴이는 문지기들을 지나쳐 저택으로 들어갔다. 집사가놀란 듯 그를 맞이했다.
"휴이 님?! 무슨 일이십니까?"
"주, 주인님은! 후작님은어디 계십니까?"
다급한 휴이의 표정에 집사는 큰일이라도 터졌다고 판단한 듯싶었다. 그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돌아보며 말했다.
"2층 집무실에…. 휴이 님!"
휴이는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가슴의 열기가점점 주변으로 번져 가고 있었다.
***
쾅!
거세게 문이 열리며 휴이가뛰어 들어왔다. 제 측근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마르케즈 후작은놀란 듯 그런 휴이를 노려보았다.
"무슨 짓이냐?"
"후작님…. 으아악!"
안에서 새어 나온 열기가휴이의 옷자락을 태우며 그의 전신에 불꽃이 붙었다. 마르케즈 후작은놀라며 뒤로 물러섰고, 호위기사가검을 빼어 들고 그의 앞을 막았다.
"으윽, 끄아아악!!"
고통 어린 비명을 지르며 휴이가무릎을 꿇었다. 그의 몸이 집무실 바닥으로 무너지자 그곳을 중심으로 작은마법진이 퍼져 나왔다.
"이, 무슨…."
마법진 위로 은빛 실이 뽑혀져 나오듯 모이더니 타원형의 길쭉한 원반을 만들었다. 흡사 거울같은모습이었다. 표면이 잠시 흐려지더니 그것은곧 누군가의 모습을 비춰 냈다.
붉은빛이 도는 검은드레스를 입은여인의 모습을 마르케즈 후작은바로 알아보았다.
"너는…."
-이런. 제 집에 사람을 보낸 것이 누구인가했더니, 마르케즈 후작이었군요?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했을 때와 다름이 없는 높고도 우아한 목소리에 마르케즈 후작의 안색은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그의 눈길이 마법진 위에 쓰러져 있는 휴이에게로 와 닿았다. 마법이 펼쳐지는 형태로 보건대, 휴이는 살아나기 어려울것 같았다.
"무슨 짓을 한 거냐? 이 마녀야."
-아쉽게도. 제게는 마법을 다루는 힘은없답니다. 유능한 부하들이 있을 뿐이지요.
유능한 부하? 카룰리아스에 그런 것이 남아 있단 말인가?
그러나 마르케즈 후작도 들은것이 있었다. 이자벨의 옛 부하들이 그녀를 탈출시켰다고 하는…. 카룰리아스가를 칠 때에 이자벨의 부하들 대부분이 도망쳤다는 정보도 있었다.
-제 주인을 위험에 빠트리는 쓸모없는 부하보다는…, 신경 써야 할 것이 있으실 텐데요? 무슨 일로 제 집에 사람을 보내신 거죠?
이자벨 카룰리아스가그 저택에 숨어 있었단 말인가? 수도에서 멀리 도망쳐야 할 그녀가수도에 숨어 있었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덴 공작령의 그 사건으로 귀족 여럿이 목숨을 잃었다. 다섯 명의 귀족이 그녀의 꾐에 넘어가내장이 모두 녹아내린 끔찍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그도 알고 있었다.
베아트리체 카룰리아스나 그 휘하의 기사들을 이용하는 것과, 이자벨 카룰리아스와 연관되는 것은전혀 달랐다.
"네년이 알 것 없는 일이지."
-이런. 후작께서는 생각보다겁이 많으시군요. 이 마법의 거울너머에서 제가후작께 해라도 끼칠까 두려우신가요? 어쩌나.
짙은미소가이자벨의 아름다운 얼굴 위로 떠올랐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오싹한 웃음이었다.
-후작께서는 이미 저와 손을 잡으셨는데.
"뭐라?"
-이 마법이 끝나면…, 그곳의 바닥에는 저희 카룰리아스의 문장이 새겨질 거랍니다. 카룰리아스 공작가의 문양과…, 카룰리아스의 그림자를 뜻하는 두 개의 문장이지요.
그것은그곳이 카룰리아스의 소유임을 의미하는 문장이었다. 카룰리아스의 그림자에 속하는 건물이라는 흔적.
-제 청을 거절하신다면 제 수하는 이 길로 마르케즈 후작가를 고발할 거랍니다. 당신이 카룰리아스의 그림자와 연관이 있다고 말이지요. 그곳의 바닥을 뜯어내고 돌을 파헤쳐도 흔적은남을 거랍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르케즈 후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
집사 허버트의 보고를 받는 자리에는 로제타도 있었다. 그녀는 대외적으로 미카엘의 감시역을 맡은시종이었으니까.
"…성녀님은그길로 서쪽 성의 숙소로 데려다드리게 했습니다만. 이 일은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이리스가파손한 문은벌써 새것으로 갈아 끼운 지 오래였다. 아이리스는 어젯밤 일이 부끄럽기는 했던지, 현재 침실 밖으로 나오지 않은채로 조용히 있다고 했다.
어제라면 미카엘과 로제타가뒤엉켜서 한참 여러 가지 일을 했던 그 밤일 것이다. 로제타는 그제야 어젯밤의 그 경보음 소리의 정체가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화도 났지만, 어이가없었다.
'미친 거 아냐?! 너 여주인공이잖아!'
여주인공이 불륜이라니! 그것도 로맨스 소설의 여주인공이 말이다! 사랑에는 죄가없다지만, 사랑에도 격이 있는 법이었다!
미카엘도 확 갖다버릴 수도 없고 짜증스러운 모양이었다.
'변신술이 가능한 수하를 불러다가미끼 역할을 시키는 게 나을까?'
지난번 사건 때에 꽁꽁 묶여 숲에 버려져 있었다는 것도 그렇고…. 신성 마법을 익혔다는 것치고는 그리 강할 것 같지 않았다. 신성 마법이 공격 마법보다치유 계열의 마법에 특화되어 있어 더 그럴 것이다.
어차피 공작저에 붙어 있다고 하고, 흑태자도 마음이 급해서 얼른 덤벼들 거라 생각하고 내버려 둔 것이었다. 성기사들과 공작저의 기사들까지 성녀를 보호한다면, 만에 하나의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물론 그게 아니라 해도, 묘하게 로제타를 무시하는 듯한 성녀가거슬려서 어떻게 되든 상관하고 싶지 않았던 마음도 있었다.
지금도 로제타가허락만 한다면 낚싯대 줄에 걸린 미끼처럼 꽁꽁 묶어 흑태자 앞에 흔들고 싶은마음이 굴뚝같았다.
"…내가직접 신전에 편지를 쓰도록 하지."
고민하던 미카엘이 이렇게 말하자, 허버트는 만족한 얼굴로 집무실을 나갔다. 노아 또한 식사 준비를 위하여 밖으로 나가고 집무실에는 로제타와 미카엘만이 남았다.
"어떻게 하시려고요?"
"공작저 안에서도 이렇게 사고만 치니, 신전 측에 사정을 설명하고 보내는 편이 낫겠습니다."
"하지만…. 위험하지 않을까요?"
요새와 같은형태를 지닌 아덴 공작가의 성보다마차로 이동 중인 것이 수십 배는 더 위험한 것은당연한 이치였다.
미카엘도 이 점을 노리고 있었다. 흑태자를 유인하려면 미끼인 성녀가안전한 곳을 벗어나야 할 테니까 말이다.
물론 이런 사실은로제타에게 가르쳐 줄 생각이 없었다. 로제타는 성녀가저런 기만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음에도 보호하고 싶어 하는 듯했으니까.
"당장은괜찮을 겁니다. 제게 걸린 저주도 당장 목숨을 잃는 것은아니었으니…. 아마도 시간이 있을 거라 생각할 겁니다. 상대가성녀인 만큼."
황제의 동생이고 아덴 공작령의 공작이라 해도, 성녀는 마음대로 취할 수 있는 이가아니었다. 교단과 등을 돌리게 된다면 황실로서도 여러모로 곤란했다. 거기다신전 측에서도 사정을 알게 되면 여러 가지 이유와 핑계를 대며 황실의 진을 빼려 들 것이 뻔했다.
'어느 정도는 눈치챈 것 같지만.'
성녀의 안전을 위해 성기사들을 보내 줄 것을 청하자, 여러 말 하지 않고 성기사들을 보내 준 것이 그러했다.
겉으로는 성녀의 안전을 위해서라지만, 실상은공작이 몰래 성녀에게 접근하지 않을까 경계하는 기색이 보였다.
"거기다…. 흑태자도 제가곁에 붙어 있는 공작저보다는 교단 쪽에 있는 성녀를 해치기 수월할 거라 판단할 겁니다."
"어려운 일이네요. 성녀님께 전부를 말할 수도 없고…."
헛된 욕심을 부리고 있는 여자니, 전부를 알게 되면 이상한 방향으로 튈지도 모른다.
로제타는 거기까지는 생각지 않는 것 같지만, 미카엘은아이리스가할 수만 있다면 내부 정보를 흑태자에게 팔아서라도 로제타를 해칠 여자라고 생각했다.
"흑태자가노리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말해야겠지요. 거기다유능한 기사도 붙여 줄 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
'그게 나라고?'
미카엘의 선택으로 수도에서 아덴 공작령까지 다시 내려온 패트릭은까드득 이를 갈았다. 미카엘이 수도를 떠나서 이제야 드디어 로제타에게 접근해 볼 수 있겠다싶었는데, 미카엘이 황비에게 연락해 그를 내려 보내게 한 것이다.
패트릭은분통 터져 했으나 미카엘로서는 당연했다. 성녀의 호위를 맡길 만한 이가딱 셋이 있었는데, 그 셋이 패트릭, 제럴드, 로건이었다.
로건은이그네시아 공작가의 일 때문에 제 가문의 안위를 살피느라 바빴고, 제럴드는 이자벨의 잔당을 추적하느라 지방 도시에 가있는 상태였다.
자연히 남아 있는 자는 단 하나, 패트릭이었다.
진짜 로제타는 수도가아닌, 아덴 공작령의 루긴에 있었지만, 패트릭은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황비의 명을 받고 아덴 공작령으로 내려오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로제타에게 간다는 말도 전하지 못하고!'
물론 그가인사를 한답시고 찾아가봤자 만나 줄 리 만무했으나, 패트릭의 심정은그러했다.
'설마 내 마음을 눈치채고 내가로제타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수작을 부린 것은아니겠지?'
의심스러웠으나 남편이 제 아내에게 접근하는 이를 미리 차단하겠다는데, 거기에 뭐라 할 수 없는 법이었다. 자신의 부적절한 마음을 굳이 미카엘에게 들이댈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패트릭은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루긴으로 다시 입성했다.
다른 지역보다마법이 발달한 루긴은, 수도와 오고 가기가참 편리한 도시였다. 수도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 하루밖에 걸리지 않았으니. 순간이동 마법진을 사용하지 못했다면 훨씬 많은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집사인 허버트가반겨 주는 것에도 패트릭은의례적인 웃음조차 보일 수 없었다. 그가루긴으로 오고 있다는 사실은아이리스에게도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마법진을 이용하여 전령보다도 빨리 왔으니, 굳이 편지를 보낼 이유가없었다. 최근 그녀에게 편지를 쓰는 일이 뜸해지기도 했고.
"공작께서는 어디 계시지?"
"서재에 계실 겁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허버트가앞장을 서며 시종에게 눈짓했다. 한발 먼저 가서 공작에게 알리라는 것일 터다. 패트릭은약간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가 후작가의 후계자이기는 했으나, 설사 후작 작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공작보다는 아랫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미리 시종을 보내 언질을 주어야 할 정도의 이는 아니라는 의미였다.
'공작이날 기다리고 있나? 아니면…, 누구에게 보여서는 안 될 모습이라도 하고 있다는 건가?'
허버트가 그렇게 나온 것은 미카엘의 지시를 받아서였다. 그도 미카엘이왜 그런 지시를 내렸는지는 알지못했다.
순간 묘한 예감을 느낀 패트릭의 걸음이빨라졌다. 앞서 빠르게 걸어가던 시종을 쫓는 그의 모습에 허버트가 당황하는 것 같았다.
"란스필드 경! 무슨…."
그러나 허버트의 그런 목소리를 시종은 듣지못한 듯했다. 그는 패트릭이소리 없이자신의 뒤를 쫓는다는 것도 모르는 채로 공작의 서재까지향했다.
서재의 문 앞에 도착한 시종은 정중히 문을 두드리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공작 각하. 패트릭 란스필드 경이──…. 어?!"
"인사는 내가 직접 드리도록 하지."
패트릭은 시종을 밀치고는 문고리로 손을 뻗었다. 문고리에 손이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서자 방문에 마법이걸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 안에서 뭘 하기에?
사람의 기척까지도 느껴지지않는 것을 봐서는 방음 마법까지건 모양이었다. 방어막에 방음 마법까지건다고? 여기는 공작 본인의 집이아니던가!
순간적인 판단이든 패트릭은 그 자리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밀쳐졌던 시종이히익! 하는 소리를 내며 물러섰지만 패트릭은 눈길도 주지않았다. 저 방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제두 눈으로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들었다.
"허억! 라, 란스필드 경!"
숨이머리끝까지차오르도록 달린 허버트가 비명을 질렀으나, 패트릭은 그대로 검으로 문을 갈랐다. 그가 내뻗은 검기에 미카엘이이중으로 쳐 놓은 방어막이부서졌다.
콰직!
갈라진 문을 부수며 안으로 들어간 패트릭은 원했던 장면을 보고 이를 갈았다. 소파 위에 결이좋은 은빛 머리칼에 황금빛 눈동자를 지닌 예쁘장한 청년이누워 있고, 미카엘의 손은 망측하게도 그 바지속에 들어가 있었다.
그 상태로 한창 키스 중이었던 듯 놀란 연인들이그를 쳐다보았다. 특히나 미카엘 아래에 깔린 청년 쪽은 얼굴이새하얗게 물들었다가, 다시 새빨갛게 물들었다.
"네놈이!! 감히 로제타를 두고!"
…왜 저래?
변신 반지를 낀 채로 미카엘과 밀회를 즐기고 있던 로제타는 어이가 없었다. 제럴드라면 화를 내는 것이이해는 갔다. 로제타에 대한 신뢰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도 제럴드는, 마지막 선은 넘지않으려 했으니까. 그는 어찌 되었든 로제타를 몇 번 지켜 주려고 했었다.
그러나 패트릭은 로제타의 뭣도 아니었다. 친구였던 적도 없고, 지인은 더더욱 아니었다. 제럴드의 지인까지는 되는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제럴드의 친구는 아니었던 것이다.
패트릭은 그래도 마지막 이성은 남아 있었는지, 검은 집어넣고 미카엘의 멱살을 잡으려고 들었다.
예의를 지키지않은 이에게는 상식적으로 대해 줄 필요도 없는 법.
"컥!"
미카엘이날린 공격 마법에 패트릭은 저만치 날아가 처박혔다. 뇌전을 두른 손바닥만 한 마력탄이었다.
책장을 부수며 처박힌 패트릭에게는 눈길도 주지않고, 미카엘은 로제타를 보았다. 미카엘은 로제타의 바지속에 집어넣었던 제손부터 빼내고는 그녀에게 상냥한 시선을 보냈다.
'괜찮습니다.'
입 모양으로 말하는 것을 보며 로제타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괜찮지가 않았다. 하필이면 패트릭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로제타는 손에 잡히는 쿠션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사이미카엘은 입구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집사와 시종, 그리고 소란에 달려온 기사들을 보았다.
"정리되면 부를 터이니 너희들은 물러가라."
"괘,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다."
미카엘은 답하고는 소파에서 내려와 바로 섰다. 그의 옷매무새도, 로제타만큼은 아니지만 흐트러져 있었다.
"큭…."
패트릭은 피가 섞인 침을 뱉어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미카엘을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상대는 공작이었다.
"란스필드 경. 무례가 지나친 것은 아닌가?"
미카엘의 꾸짖음에 패트릭은 답하지않고 아직 소파에 누워 있는 청년을 노려보았다. 그에게서는 전혀 로제타를 떠올릴 구석이없었으나, 왜인지로제타가 떠올라 더 화가 났다.
"공작께서는, 이런 취향을 가지고 계셨습니까?!"
분노에 찬 패트릭의 목소리에 미카엘은 단박에 패트릭이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지를 눈치챘다. 뭐, 그럴 만한 상황에 들어오기는 했다.
"이런 취향을 가지고 있어서, 휘르센 영애와 결혼하신 것인지묻고 있습니다!!"
"도를 넘어서는군. 그녀는 이미 영애가 아니라 부인이다. 아덴 공작부인! 그대가 참견할 일이아니야!"
그 공격을 받고도 바로 일어선 것은 칭찬해 줄 만한 일이었지만, 지금 미카엘의 눈에는 패트릭의 그런 점이들어오지않았다. 그렇잖아도 거슬리던 놈이었다.
이제그가 로제타의 첫사랑이아니라는 것은 알았으나, 몇몇 무도회에서 보인, 로제타를 향한 경멸 어린 눈빛만으로도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성녀를 보호하는 일에 굳이그를 차출한 것도, 그가 유능해서이기도 했지만, 흑태자 손에 죽었으면 하는 마음이있어서기도 했다.
로제타에게 말할 수는 없었지만.
싸움이심각하게 번져 가는 듯한 양상에 당황한 것은 로제타였다. 쿠션으로 얼굴을 가린 채 두 사람을 힐끗거리고 있던 로제타는 패트릭의 반응에 기가 막혔다.
도덕적이지못하다고 비난이야 할 수 있겠지만, 대놓고 저렇게 화를 내는 건 미카엘이말했듯이지나친 일이었다.
그러나 패트릭은 이미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린 듯했다.
"이런 속셈이셨다면 저도 더는 참지않을 생각입니다!"
"참지않겠다면?"
미카엘로서도 황당했으나 저 속내가 뭔지들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들었다. 패트릭은 당당한 얼굴로 선언했다.
"공작 각하로부터 로제타를 되찾겠습니다!!!"
뒤통수를 발로 차인 듯한 불쾌감과 충격에 휩싸인 로제타와는 달리, 미카엘은 순수한 분노로 차오르고 있었다.
"누굴…. 누구에게서 되찾겠다고?"
뿜어져 나오는 살기와 마력이엄청났다. 복도 끝에서 숨죽이고 있는 하인들이다 살이떨릴 지경이었으나, 패트릭은 역시 원작1의 남주다웠다. 눈썹 하나 까딱하지않고 제사망증명서에 서명을 했다.
"공작에게서 공작부인을 빼앗겠다 말했습니다!"
"하!"
차디찬 웃음이미카엘의 얼굴에서 피어올랐다.
"경이더는 살고 싶지않은 모양이야?"
그의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파란 마력의 불꽃에 패트릭은 다시금 검을 뽑아 들었다. 그는 온몸의 마나를 끌어모으며 말했다.
"로제타와 더불어 해로할 생각인데, 오늘 죽을 수야 있겠습니까?"
"네놈이!!!"
"미, 미카엘 님!"
후다닥 소파에서 일어난 로제타가 미카엘의 손을 잡자, 그녀가 잡은 쪽 손의 마력이서둘러 거두어졌다.
"…아틴."
로제타에게로 시선이향하자마자 미카엘의 녹색 눈동자에서 이글거리던 분노가 삽시간에 녹아내렸다. 로제타는 미카엘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입 모양으로 말하는 것에 미카엘은 힐끗 눈길을 돌려 패트릭을 노려보았다. 패트릭은 검을 뽑아 든 채로 미카엘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와중에도 패트릭은 로제타의 자리를 꿰찬 아틴의 존재가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감히 시종 따위가! 더러운 몸뚱이를 굴리듯, 네 주제도 모르느냐!!"
패트릭의 그 말에 미카엘은 폭발한 것 같았다. 당장에 그가 살기가 실린 마법을 날리려는 것에 로제타는 기겁하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분노한 와중에도 착실하게 로제타에게 반응한 미카엘은 한 팔로 로제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럼에도 가시지않는 살기에, 로제타는 눈을 질끈 감고 그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헉!'
남자끼리 연애 감정을 가질 수도 있다는 사실은 패트릭도 소문으로 들어서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주변에는 그 사실을 밝힌 이도 없거니와 실제로 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아까의 그 상황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남자 두 사람이서 키스하는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
패트릭은 검을 든 채로 굳어 버렸고, 미카엘은 다른 의미에서 얼어붙었다.
그는 이성적으로는 패트릭이로제타에게 그런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감정적으로는 그를 상당히 경계하고 있었다.
아마도 패트릭 란스필드가 로제타의 첫사랑이라는 인식이굳어서일 것이다.
미카엘의 첫사랑은 로제타지만, 로제타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니 어쨌든 그와는 전혀 다른 타입의 남자일 것이분명했다.
그래서인지, 미카엘은 로제타가 '그' 패트릭 앞에서 제게 키스하는 지금의 상황이굉장히 기분 좋았다.
패트릭을 찢어 죽여야겠다는 계획도 뒤로 미룰 수 있을 만큼.
'앗, 잠깐….'
미카엘을 멈추겠다는 일념 하나로 감행한 키스이기는 했으나, 공격 마법을 풀어 버린 미카엘이본격적으로 키스해 오자 당황했다.
둘만 있는 것도 아니고, 패트릭이보는 앞에서인 것이다.
'나중에 어쩌려고….'
패트릭이계속 오해하게 둘 수는 없으니, 흑태자를 쓰러트린 뒤에는 그가 로제타임을 밝혀야 할 터였다.
"흐, 흡…. 응음……. 후읏…."
쪼옥, 하며 입술을 빨아들이는 걸로 모자라 본격적으로 혀를 밀어 넣는 미카엘에, 로제타는 당황했으나 밀어낼 수도 없었다.
패트릭은 경멸스러운 것을 넘어서 기가 막혔다. 사내들끼리 엉겨 붙은 거야 그럴 수 있다고는 쳐도, 그는 유부남이아닌가!
사나운 눈길로 아틴이라는 자를 노려보던 패트릭은 문득 어딘가 낯이익다는 생각을 했다.
'뭔가….'
로제타를 생각나게 하는 얼굴이었다. 키나 체격 외에는 비슷한 구석이한 군데도 없는 얼굴이건만.
"하아, 하읏…."
겨우 미카엘의 입술에서 놓여진 로제타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로 힐끗 패트릭을 훔쳐보았다. 그 시선까지도 묘하게 로제타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있어, 패트릭의 가슴이쿵! 하고 내려앉았다.
'왜지? 로제타는 수도에 있을 텐데….'
그러나 패트릭은 반대로 생각했다. 저 아틴이라는 시종과 닮은 구석이있어서 미카엘이로제타를 선택한 것으로.
그의 망상 속에서 이미 아틴은 미카엘의 숨겨 놓은 애인이었다.
패트릭은 저런 자들과 더 말을 섞지않는 게 낫겠다 싶어 검을 검집에 꽂아 넣었다. 그는 서재를 나서며 말했다.
"아무튼 이일은 로제타에게 말할 것입니다!"
왜인지저를 보는 미카엘의 얼굴에 이겼다는 표정이담겨 있는 것도 화가 났다. 물론 그가 다시 로제타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 분노했지만 말이다.
그 분노도, 품에 있는 아틴이미카엘의 옷자락을 잡아당기자 금세 사그라들었다.
패트릭은 그런 그들을 어이없다는 듯이쏘아보고는 자리를 떠났다. 로제타는 겨우 둘만 남게 되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많이놀랐습니까?"
로제타의 뺨을 보듬으며 미카엘이속삭였다. 로제타는 빨갛게 물든 얼굴로 미카엘을 타박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안 된다고 했잖아요! 나중에 어떻게 설명하려고…."
"꼭 설명할 필요가 있겠…."
단단히 토라진 로제타의 표정에 미카엘은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제가, 일이다 끝난 후에 설명하도록 하지요. 저자와 싸우지도 않겠습니다."
"약속하시는 거지요?"
"아틴께서 원하신다면…. 노력해 보겠습니다."
미카엘이깊은 한숨을 쉬며 말하자 로제타는 기쁜 듯 그의 뺨에 입 맞추어 주었다.
패트릭은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질렀다. 분노가 사라지지 않고 그의 안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분명 치명적인 장면을 그에게 들켰음에도 미카엘의 그 당당한 태도는 무엇이며…. 왜 그 두 사람이 입 맞춘 장면이 계속 머리에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것으로 되었다. 이 정도라면 로제타도 미카엘에게 충분히 이혼을 요구할 수 있을 터….'
황실에서도 이 추문이 불거지지 않도록 조용히 이혼시켜 줄지 모른다. 그저 로제타만 알고 있는 사실이라면, 그녀를 붙잡고 늘어질지 모르지만, 란스필드 후작가의 후계자인 그가 알았으니 그러지 못할 것이다.
공작가의 본성을 빠져나오며 패트릭은 어깨를 폈다. 순간으로는 분노하여 머리가 제대로 돌지 않았으나 지금은 많이 차가워졌다.
'미카엘 황자가 저리도 당당하다는 것은, 로제타도 모든 것을 알고 결혼했다는 의미인가?'
거기다저런 취향이라면 로제타와 잠자리를 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시녀나 하녀들이 말한 그 흔적이며 소리는, 지금의 애인과 벌인 행각일 것이다. 부부의 침실은 대개가 남편의 방과 부인의 방이 붙어 있는 형태이니, 로제타는 옆방에있었겠지.
형식적인 부부 사이라 해도 그 소리를 로제타가 다들었을 거라 생각하니 참담해졌다. 왜 그녀는 결혼을 해서도 행복해지지 못한단 말인가.
바라던 상황이기는 했으나 마음은 씁쓸했다. 로제타가 그렇게 결혼으로 도망칠 수밖에없는 상황을 자신이 만든 것 같기도 했다.
사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아니. 앞으로 내가 행복하게 해 주면 된다.'
후작가에서반대가 극심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쯤은 각오하고 있었다. 한 번 지켜 주지 못한 여인이니 이번에야말로 지켜 줄 작정이었다.
그러니…. 로제타의 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라도, 아이리스를 노린다는 그자들을 한시라도 빨리 처리해야만 했다.
아이리스가 머물고 있다는 서쪽 성으로 향하는 패트릭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
겨우 미카엘을 달랜 로제타였으나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패트릭이 왜? 심지어 그는 미카엘에게서로제타를 되찾아 오겠다고까지 선언했다.
누가 들으면 전에그녀와 패트릭이 연인 사이인 줄 알겠다.
로제타는 그와의 대화에서자신이 여지를 준 적이 있나 싶어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보려 했다. 그러나 싫은 기억이라선지,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 전부 떠오르지는 않았다.
'울었고…. 엄청 싫어한다는 요지의 말을 한 것 같은데?'
아니. 한 번 짝사랑해서연서좀 많이 보낸 게 그렇게 잘못된 일이야? 무슨 낙인찍힐 만한 일인 거냐고?
심지어 그 편지는 지금의 로제타가 아닌, 이전의 로제타가 보낸 것이었다. 자신의 몸과 인생을 훔쳐 간 간악한 계집애가 한 짓이었다. 로제타는 그 일에대해서는 정말이지 눈곱만큼도 책임지고 싶지 않았다.
'예전에좋아했던 게 평생 가는 것도 아니고…. 자뻑이 지나친 거 아닌가.'
무슨 짝사랑을 천년만년 하겠는가. 친구도 아니었고 동료는 더더욱 아니며, 단 한 번도 잘 대해 준 적이 없으면서!
'아, 몰라!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마음대로 하라지! 나는 미카엘 님 기분만 신경 쓸 거야.'
나중에망신을 당하든 말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겼다. 배려란 자고로 그렇게 해 줄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 해 줘야 하는 법이었다. 자신을 쓰레기 취급했던 사람한테가 아니라.
로제타는 패트릭에대한 생각을 휘휘 지우고 미카엘이 쓰는 편지에관심을 가졌다. 내용이 내용이라선지, 패트릭에대한 생각이 싹 달아났다.
***
"이, 이것만은 아니 되오! 당신들도 화를 면치 못할…. 아악!"
막아서는 신전 병사들을 베어 넘기며 갑옷을 입은 남자들은 전진했다. 그들의 목적지가 아덴 공작령에서그리 멀지 않은 곳에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루긴에보낸 첩자에의하면 미카엘 황자는 아직 성녀를 제 침실로 끌어들이지 않은 것 같았다.
"저주가 제 힘을 발휘할 때까지 시간이 남았다여기는 것이겠지. 오만한 놈…."
보고를 받은 흑태자는 이를 갈았다. 그는 꾸준히 치료를 받고 있었으나 아직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혼자 걸을 수는 있어도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웠다.
흑태자가 느리게 걸어가는 사이, 그의 기사들이 신전 병사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복도에는 수십의 시체들이 쓰러져 있었지만, 그중에자하르의 기사는 없었다.
이미 수백 년 전에봉인된 '그것'을 찾는 이가 아무도 없을 것이라 간과한 교단의 실책이었다.
죄를 지어 좌천된 자나, 교단의 눈 밖에난 이가 부임하여 시간을 죽이는 곳이었으니, 그 병사나 기사들의 실력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이따금씩 제 실력을 발휘하는 성기사도 있었으나, 그런 자들도 검은 갑옷을 입은 흑태자의 기사들에게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전하. 길을 열었나이다."
그것이 봉인되어 있는 방까지, 길을 튼 기사들이 흑태자에게로 돌아와 무릎을 꿇었다.
피로 물든 길이었다.
흑태자 로드리고는 그것이 자하르의 왕이 걸어야 하는 길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는 느리지만 분명한 걸음걸이로 나아갔다. 앞선 기사들이 쇠사슬과 신성 마법으로 봉인된 자물쇠를 부수고 문을 여는 것이 보였다.
금속으로 된 문은 오랫동안 열리지 않아 녹이 슬어 있었다. 수십의 기사들이 매달려 용을 쓰고 나서야 겨우 문이 열렸다.
끼이이이이이익!
귀에거슬리는 소음에도 흑태자는 서늘한 낯을 하고 문 틈새로 새어 나오는 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흑태자의 기사들이 신전에침입하기 전까지는 미동도 하지 않았던 방이었다. 그것이, 신전 병사들의 피를 보고, 봉인된 방문이 부서지기 시작하자 붉은 빛이 새어 나왔다.
기사들은 경계 어린 눈빛을 보내며 문을 밀어젖혔다.
방 안에서는 붉은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신성 마법의 사슬로 묶여 있는 기괴하게 생긴 한 자루의 검이 박혀 있었다.
마신의 첫 번째 종속이 살아 있는 용의 뼈를 뽑아서만든 검이었다. 원혼의 힘을 키우기 위해 산 자 99명의 목숨을 제물로 바쳐 그 영혼이 갇혀 있다는 검.
100번째 제물을 만들지 않은 것은 그래야만 원한이 강해져 검이 피를 원한다고 했다.
'첫 번째 혼은 뼈의 주인이었던 드래곤이라고 했던가?'
그 혼이 다른 제물 98개의 혼을 집어삼킨 채로 분노하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검에서풀려나지 못한 지금까지도.
흑태자는 비틀거리며 검을 향해 나아갔다.
저 검은 마신의 첫 번째 종속이 자신을 위해 만든 검이었으나, 거기에담긴 원혼들은 그의 파멸을 원하였다. 그래서용사의 손에주인의 목을 기꺼이 내어주었다.
이후에는 그를 쓰러트린 용사의 손에쥐어졌으나, 용사는 이 검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아보고 왕실에서파견을 나왔던 기사에게 맡겼다.
기사는 이 검에취해 용사의 목을 베고, 나아가 자신이 몸담고 있던 나라의 왕족을 모두 죽이고 그 자신이 왕이 되었다.
'나 또한 그리할 수 있다…….'
활짝 열린 방문에서검게 물든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방문이 있는 곳까지 올라가는 계단을 그 빛이 붉게 물들였다.
흑태자는 그 계단을 올라가며 빛 한가운데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검게 변하기 시작한 붉은 빛이 검신 전체를 뒤덮고 타오르듯 일렁이고 있었다.
검의 힘으로 왕이 되었던 자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나오지 않았다. 이 전설은 너무나 오래되었고, 전설을 기록한 비석은 밑 부분이 파괴되어 있었다.
흑태자는 그의 말년이 좋지 않았을 거라 짐작했지만, 자신은 다를 거라고 여겼다. 고귀한 몸으로 태어나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자신이었다.
그는 자신이 대륙을 통일시킬 첫 번째 황제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자였다. 라스탄도 자하르도 결국 자신의 것이 될 터이며, 미카엘과 알렉시스 또한 결국 자신의 발밑에무릎을 꿇게 될 것이라고 여겼다.
이것은 그 시작이 될 뿐이었다.
모든 것이 그의 손아귀에들어올 첫 번째 관문.
그 관문을 통과했다는 결과물은…, 라스탄에서가장 강하다일컬어지는 미카엘 황자의 목일 것이다.
계단 끝에선 흑태자의 몸이 이끌리듯 방 안으로 들어갔다. 기사들은 이미 방문의 입구에서떨어져 있었건만, 그 거대한 철문이 기이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끼이이이이이이….
"전하!!"
당황한 기사들이 문을 붙잡으려 했으나 문은 쾅! 하는 거대한 울림을 남겨 두고 굳게 닫혔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붉은 빛을 바라보며 기사들이 문에매달렸으나, 문은 아까와는 달리 꿈쩍도 하지 않았다.
***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대신관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물들었다. 오래도록 그의 얼굴 위를 차지했던 코안경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식은땀 때문이었다.
"대체 성녀라는 자가!"
법황으로부터 아이리스의 보호자가 되어 줄 것을 명령받은 그 순간부터 이런 날이 올 줄은 알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교단에대한 애정이나 신에대한 믿음은 희박했으니까. 교리의 대부분을 외우고 있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여겨질 뿐이었다.
그것은 진짜 아이리스가 신실했고, 교리를 모두 외우고 있었던 탓이지만, 지금의 대신관이 그런 사정까지 알 리 없었다. 그는 골치가 아팠다.
'거기다대체 이 흑태자라는 자는 뭐란 말인가? 교단의 적? 왜 성녀를 노린다는 거지?'
아덴 공작은 흑태자라는 자가 성녀를 노린다는 사실만 가르쳐 주고, 그 이유에대해서는 함구하고 있었다. 대신관은 아덴 공작을 치료한 적이 있는 신관들의 보고에따라 아덴 공작에게 걸린 저주와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 정도 저주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성녀님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겁니다….'
신관은 아덴 공작에게도 같은 말을 했다고 했다. 과연 저주의 진행을 늦추기 위해서인지 황실에서도 성물을 빌려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제법 괜찮은 성의 표시를 보였기에교단에서도 흔쾌히 성물을 빌려주었다.
이는 훗날 발생하게 될지도 모르는, 교단과 라스탄 제국과의 새로운 관계를 생각한 행동이기도 했다.
'치료라고는 하지만…, 그 방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다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이리스 님은 제국 유일의 성녀…. 아무리 아덴 공작님의 목숨이 위험하다고는 하나…… 그런 일을 허락하는 것은….'
물론 황실에서는 아직까지 아무런 요청도 해 오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미카엘 황자가 개인적으로 교단에요청할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돌았다.
'당연히 성녀님과 정식으로 결혼을 해야겠지요! 성녀님이 아닙니까? 그분을 그렇게 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교단의 명예도 있고….'
그러나 미카엘 황자는 아쉽게도 몇 개월 전에결혼을 한 상태였다. 그러니 이쪽의 체면을 생각하여 그 전에미카엘 황자가 자신의 결혼생활을 정리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 나왔다.
미카엘 황자가 황위를 물려받게 되면, 후궁을 둘 수 있으니 성녀를 후궁이라는 방식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쉽게 성녀님과의 결혼을 허락해서는 아니 됩니다! 교단의 체면이있지….'
다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아이리스를미카엘과 결혼시켜서 생길 이득에 대해주판알을 튕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라스탄 제국에는 그들 교단 외에도 두세 개의 교단이더 있었다. 그들 교단이가장 세를떨치고 있기는 하지만, 국교로 추앙받는 것은 아니었다.
법황은 아이리스와 미카엘과의 결혼으로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
라스탄 제국의 국교가되는 것.
만약 그것만 성사될 수 있다면 아이리스를내어주어도 아깝지 않다는 계산이었다. 그래서 법황은 아이리스와 미카엘이이전에 관계를맺지 않도록 감시까지 붙이라고 지시를내렸다.
아이리스의 호위를충원해달라는 아덴 공작가의 요청에 흔쾌히 성기사들을 보낸 것은 그런 의미에서였다.
그런데….
'한밤중에 아덴 공작의 침소에 숨어들려다가잘못 찾아들다니! 이일이소문이라도 나면…!'
이미 성녀의 행태는 알음알음 사람들의 입을 타고 있었다. 특히나 아덴 공작령인 루긴에서는 사람들이성녀를좋지 않게 보는 듯했다. 어떻게 변명해도 유부남을 쫓아다니는 행동이좋게 보일리 만무하니까.
'일단은 공작의 요청대로 성녀를신전으로 불러들여 주의를주는 것이옳겠다. 미카엘 황자와 결혼을 시키더라도 신전에서 성녀를보호하고 있다가보내는 것이, 세간의 눈으로 보기에도 보기가좋을 테니….'
그러나 그는 여전히 성녀를미카엘 황자와 결혼시키는 것이탐탁지 않았다.
저주를풀기 위해그렇게 한다고는 해도 그 부인은 어쩐단 말인가? 미카엘 황자가황제가된 이후에 후궁으로 들이라는 건가? 그것은 말도 되지 않는 얘기였다.
'거기다 우리 교단이국교가된다면 아이리스와 이혼하기도 어려울 터…. 미카엘 황자가그 청을 들어줄 리 없다.'
미카엘 황자가제 부인을 아낀다는 소문은 꽤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루긴의 대신관은 그 소문이거짓일거라고 생각지 않았다.
미카엘 황자는 제 부인을 포기하려고 들지 않을 것이다. 거기다 황실 또한 미카엘 황자가죽게 내버려두지만은 않겠지.
그 틈바구니에서 아이리스와 교단만이망신을 당하고 끝이날까, 대신관은 그것이두려웠다.
그는 깊은 한숨을 쉬고 아덴 공작에게 보낼 답장을 써 내려갔다. 그리고 성녀를데려오기 위한 일정을 잡도록 지시를내렸다.
***
'아이리스.'
패트릭의 마음이변하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렇게나 빠를줄은 몰랐다.
그의 편지에 성실히 답장해주지 못한 것이나 찾아가지 않은 것도 맞지만, 그건 서로 마찬가지 아니었나? 어떻게 저렇게 갑자기 마음이변할 수 있지?
'서브남이면서!'
원작의 줄거리보다도 빨리 그의 마음을 얻었으므로, 자신이차갑게 외면해도 패트릭의 마음은 그대로일줄 알았다. 원작에서 그랬으니까.
아덴 공작저로 돌아왔다며 찾아온 패트릭은 정중하고 친절했다. 그것 또한 그의 혈육이아닌 한은 받기 힘든 친절이었으나, 아이리스에게는 부족하다고 여겨졌다.
여기는 역하렘이보장되어 있는 소설 속이아니냔 말이다. 이세계 속의 모든 남자들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마땅하고, 이제까지는 그래 왔었다. 현실과는 다르게!
'기껏 소설 속으로 들어왔는데….'
현실에서 진풀잎은 아빠와 오빠로부터 듬뿍 사랑을 받고 자라 왔다. 엄마도 있었지만, 엄마는 진풀잎이너무 버릇이없다며 걱정하는 쪽이었다. 엄마는 진풀잎의 응석을 받아 주지 않고 자주 야단을 쳤다.
그래서일까? 진풀잎은 여자아이들보다는 남자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이편했다. 친하게 지내는 애들이전부 남학생인 것도 그래서였다.
그러나 그와 같은 관계는 나이가들고 학년이올라갈수록 유지되지 않았다.
남자친구들은 점점 진풀잎과 거리를두게 되었고, 각자 여자친구를사귀어 멀어져 갔다. 진풀잎도 때로 누군가를좋아하게 되었지만, 잘되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매번 풀잎의 요구 사항이너무 많다며 불평을 늘어놓고 헤어지고는 했다.
왜? 내가뭘 잘못해서? 나는 그저 사랑받고 싶었을 뿐인데….
그러다 갑자기 차에 치었고, 깨어나 보니 아이리스 리온이되어 있었다. 진풀잎은 이것이기회라고 여겼다. 현실에서는 단 한 번도 이룬 적이없는 사랑받을 수 있는 기회!
'소설 속인데…. 이건 전부 진짜가아닌데, 진짜가되고 있는 것 같아.'
그녀가막 빙의되었을 무렵에는 뭐든 잘 풀리기만 했던 것 같았다.
성녀인 그녀를다들 아껴 주었고, 자신을 미워하는 무리가있었지만 멋진 남자들이알아서 보호해주었다.
누군가나타나 구해줄 거라는 걸 알았기에, 두려움도 어려움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이리스는 새삼 알 수 없는 무리에 속아서 마차를빼앗겼던 것을 떠올렸다. 다행히 그들은 그녀의 일행 중 누구도 죽이지 않고 지나쳤다.
아마도 그녀가성녀이기에, 교단을 끌어들이지 않으려고 해를끼치지 않고 묶어만 둔 것 같았다.
'그때도 누군가와 줄 줄은 알았지만….'
뭔가느낌이달랐다. 아덴 공작저의 기사들이나타나 결박을 풀어 주었을 때도, 주연급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자신이주연이아닌 엑스트라가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패트릭의 경우도 그러했다. 사실 그가로제타에게 빙의된 아이리스를유혹해주기를바란 건 사실이었지만, 이렇게 빨리 마음이변할 줄은 몰랐다.
'어째서? 로제타에게 빙의된 게 아이리스여서 그런 거야?'
주인공의 몸은 자신이가지고 있지만, 그 영혼은 아이리스여서, 진짜 주인공이어서 그런 것이라면 큰일이었다.
고민하던 진풀잎, 아이리스는 고개를흔들었다. 때마침 상황은 그녀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미카엘은 저주에 걸렸고, 그 저주를풀어 줄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었다. 이상황이야말로 자신이주인공이아니면 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 패트릭의 마음이정리된 건…. 아이리스가빙의된 로제타와 진전이있기 때문인지도 몰라. 차라리 잘됐어!'
자신이소설 내용을 구석구석까지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자신이모르는 사이패트릭과 로제타가가까워졌을지도 모른다.
때마침 패트릭은 수도에 남아 있지 않았던가. 겨우 며칠에 불과할지는 모르나, 그사이무슨 일이생겨서 두 사람이가까워질 수도 있었다.
'그래도 뭔가섭섭하네…. 전에는 그렇게 뜨거운 눈빛으로 쳐다봐 놓고는, 인제 와 그런 눈빛이라니….'
뭔가씁쓸한 듯하면서도 시원한, 말끔한 눈빛이거슬렸다. 꼭 사고를많이치는 친한 동급생을 바라보는 눈빛 같다고나 할까?
'어차피 패트릭은 버리기로 한 패니까…. 제럴드도 있고, 아직 로건도…. 내가섭섭하게 한 것이있어서 그렇지, 아직은 날 좋아하고 있을 거야!'
이렇게 생각한 아이리스는 자신이굉장히 이기적으로 보이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난 주인공이고…. 주인공이서브남들의 사랑을 받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사랑받고 싶은 건 누구나 마찬가지였고, 아이리스는 많은 남자들의 헌신적인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지금의 상황을 놓치고 싶지 않은 것뿐이었다.
이런 일은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생에 한 번뿐일테니, 용서받아도 되는 것이아닌가싶었다.
'그러니까…. 난 마지막까지 욕심을 부려도 돼! 이세계에서는 내가주인공이니까!'
***
공작저는 충격에 휩싸였다. 미카엘이로제타를얼마나 싸고돌았는지 알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우리 공작님이그러실 리 없다고 마지막까지 믿지 않는 자들이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소식을 전하려했던 시종이패트릭과 같이그 광경을 본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공작님의 손이…."
"거짓말하지 마! 제대로 본 거 맞아?!"
여자와 바람이났다고 해도 기함할 판국에 남자라니! 그것도 아틴은 공작부인께서 직접 붙여 준 시종이아니던가!
시종 일은 처음이라며 어색한 미소를보이던 아틴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던 시녀들도 있었기에 반발의 불길은 거셌다.
"진짜라니까!"
문제는 집사 허버트며 호위기사와 다른 하인들이왔을 즈음에는 미카엘과 로제타가옷을 정돈한 뒤였다는 것이다. 결정적인 장면을 본 것은 패트릭과 그 하나뿐인지라 그의 말을 증명해줄 다른 이가없었다.
"그래, 노아! 노아한테 물어봐! 노아는 주인님의 시종이니까…."
"노아!"
노아는 공작의 전속 시종이라는, 공작저 안에서는 제법 높은 위치를가지고 있었지만, 다른 고용인들에게 까다롭지 않은 이였다. 미카엘도 그 점을 높이사서 노아를자신의 전속 시종으로 부리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노아, 공작님께서 새로 온 시종이랑…. 아니지?"
한 무리의 시녀와 하인들과 같이진상을 물으러 온 시종의 모습에 노아는 질책 어린 눈길을 보냈다. 본디 시종이란 주인의 일에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하기에 시종은 찔끔했다.
"어, 어차피 란스필드 경이보셨잖아!"
"란스필드 경이뭘 보셨는데?"
노아는 그 소식을 듣고 생각해둔 것이있었다. 다정하고 연약한 마님과는 달리 공작님은 음험한 분이었다. 공작저의 식구들은 마님에 대한 호감으로 충성도가높았는데, 만약 아틴의 일을 안다면 은밀하게 그를괴롭히려들 것이다.
이후 사정이밝혀지고 나면 사라질 괴롭힘이지만, 공작님은 이를절대 용서하실 분이아니셨다. 마님이용서해주신다 해도 공작님은 용서치 않으리라. 마님 몰래 처리하실 게 분명했다.
공작저를나가거나 죽거나. 거의 이둘 중의 하나였다.
공작저에서 쫓겨나는 것만도 큰일인데, 공작저의 식구들이마님께 충성스럽다는 이유로 죽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노아의 딱딱한 표정에 상대 시종은 노아가주인을 위해시치미를떼려고 한다고 생각하고 당황했다. 그래서 시종은 패트릭이미카엘과 아틴이같이있던 상황을 목격했다는 얘기를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너는 공작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니까, 알고 있을 거 아냐!"
미카엘의 침실은 미카엘이마법으로 청소해버리기에, 정사의 흔적이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설사 그런 것이있다고 해도 그것을 치우는 것은 이미 노아의 몫이되어 버린 뒤였다.
"무슨 소리를하는 거야? 공작님께는 마님 한 분뿐이야."
노아의 당당한 선언에 많은 고용인들이눈에 띄게 안심했다. 반발한 것은 노아의 말로 졸지에 거짓말쟁이가되어 버린 시종뿐이었다.
"그럼 란스필드 경이본 것은 뭐라고 설명할 건데?! 어? 나만 본 거 아니라고!!"
"란스필드 경이뭔가착각을 했거나 오해하는 거겠지. 공작님이오해를하신 것도 아닌데, 그걸 왜 신경 써야 해?"
패트릭을 불러다가삼자대면을 하면 될 일이지만, 공작을 모시는 일개 시종이진실을 밝히겠다고 후작가의 후계자를불러들일수 있을 리 없다.
노아의 이대답에 시종은 억울하여 펄펄 뛰었지만, 고용인들은 이미 흥미를잃은 듯 흩어지고 있었다.
아직도 분이풀리지 않은 듯 따지고 들려는 시종에 노아는 그의 귀를잡았다. 주변에는 이미 다른 고용인이하나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적당히 해. 주인님께서 결혼으로 부드러워지시기는 했어도, 결국 우리 주인님이라는 사실을 잊었어? 주인의 일을 여기저기 떠들어대서 어쩌자는 거야?"
"하지만! 이건 주인마님께도…."
"폴."
노아가 싸늘한얼굴로 그를 부르자 폴이 찔끔하여 입을 다물었다. 노아가 고용인들을 허물없이 대해 주고는있다지만, 집사나 시녀장이 없는자리에서는노아가 월등히 높은 위치였다.
"주인님이 네 값싸게 떠들고 다니는입을 알고 널 쫓아내신다고 해도, 나는말리지 않을 거야. 내 말 알아들었어?"
더 이상 그에 대한소문을 만들어 내고 다닌다면 쫓겨날 수도 있다는경고였다. 폴은 억울했으나 노아의 정색한얼굴을 보고는입을 다물었다.
"알아드…, 들었어."
"그래."
노아는당기고 있던 폴의 귀를 놓아주고는그를 째려보았다. 폴은 찔리는구석이 있어선지 허둥지둥 자리를 피했다. 노아는한숨을 쉬었다.
이걸로 일단 공작가 식구들의 목은 보호한셈이 되었다.
***
노아가 일찌감치 폴의 입을 다물게 한탓에, 아이리스에게는미카엘과 아틴의 소문이 닿지 않은 참이었다. 아이리스는패트릭의 친구나 동료를 대하는듯한태도에 매우 실망했지만, 지금은 그를 구슬릴 때가 아니라고 여겼다.
'미카엘! 몸은 괜찮을까?'
그날 그렇게 실패한이후로 한동안 부끄러워서 방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지금 이렇게 나오는것은 패트릭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기도 했지만, 신녀로부터 대신관의 메시지를 전달받아서였다.
'공작저에서 어처구니없는행동을 하셨더군요. 아덴 공작으로부터 정식으로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돌아오시지요!'
미카엘이 그런 요청을 했다는데는놀랐지만, 아이리스는화가 나지 않았다. 미카엘로서는아직 갈등을 겪고 있을 터였다.
'저주에 지지 않으려 하는데, 내가 곁에 있는것이 힘든 거겠지.'
자신이 미카엘에게 그 정도로 유혹적인 존재라는생각이 들자 아이리스는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미카엘은 결국 저주에 굴복해서 자신에게 안기게 될 터였다. 이제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일단 신전으로 돌아가기 전에 한번은 해야 해. 그래야 더 몸이 달겠지….'
꿀도 먹어 본 사람이 더 달다는것을 안다. 한번 저주에 해방된 느낌을 가져야지만, 더 안달이 나서 자신을 찾아올 것이다.
시간만 끌어 봤자 미카엘이 더 위험해질 뿐이었으므로, 아이리스는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문제는….
"어디로 가시려는겁니까?"
"산책 좀 하려고요. 너무 답답해서…. 정원을 돌아볼 거예요."
아이리스는어디까지나 웃는낯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딱딱했다.
"본성의 정원과 맞닿아 있는쪽으로는가지 않으시는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
그곳을 통해 다시 본성에 접근하려 했던 아이리스는당황했다. 아무래도 지난번 침입으로 자신의 평판이 꽤 나빠진 모양이었다. 성기사들도 탐탁지 않다는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고….
"그, 그리로는안 갈 거예요!"
무안한마음에 빽 소리를 지른 아이리스였으나 난감해졌다. 그녀는본성으로 접근하여 미카엘의 새로운 시종을 만나 볼 작정이었던 것이다.
'아틴이라고 했던가?'
노아는원작의 내용을 기억했기에 털끝 하나 들어가지 않을 이라는걸 알았다. 그러나 아틴이라는이름은 처음 들었다.
아틴이 공작부인이 붙인 시종이라는사실은 아이리스나 신전의 일행은 몰랐다. 공작가의 고용인들이 그들을 경계하여, 그런 정보까지는전달해 주지 않은 탓이었다.
다만, 아이리스들은 최근 공작의 곁에 붙어 시중을 드는시종이 있고, 그 이름이 아틴이라는것만 알고 있었다.
'하녀들의 말을 듣자 하니 꽤 예쁘게 생겼다던데…. 어떻게 불러내지?'
아이리스는미카엘과 몰래 만나는데에 그 아틴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아이리스는궁리 끝에 신녀를 통해 아틴을 불러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때의 아이리스는알지 못했을 것이다. 아틴에게 접근하는것이, 미카엘에게 접근하는것보다 더 어렵다는것을.
***
"그 아틴이라는시종 말이야. 서쪽성으로 데려와 주겠어?"
"왜 그러시는데요?"
신녀 세실리아의 부탁에 하녀는어딘가 뾰족하게 날이 선 목소리로 대꾸했다. 세실리아는언짢아졌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여기서 화를 내 봤자 망신당하는것은 그녀였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공작가에 손님으로 와 있었다.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러지."
세실리아는다정한목소리로 말하며 하녀에게 은화 하나를 쥐여 주었다. 하녀는제 손에 쥐어진 은화를 쳐다보았으나 되돌려 주지는않았다. 세실리아는힐끗 하녀의 눈치를 살폈다.
'돈이 부족해서 그러나?'
하녀는내색하지는않았으나 짜증스러웠다.
아덴 공작가는고용인들에게 박하지 않은 곳이었다. 일은 어렵고 높은 수준의 업무 성과를 요구하기는하나 대우도 좋고 봉급도 높다. 그래서 나름의 자부심도 가지고 있었다.
뭐니 뭐니 해도 다음 대 황제는이 아덴 공작가에서 나올 가능성이 컸다. 미카엘 황자님이 황제가 되시든, 공작 내외에서 나온 아이가 그렇게 되든지 간에 그렇게 될 거라는소문이었다. 당연히 고용인들의 콧대도 높았다.
'사람을 어떻게 보고….'
은화가 아니라 금화를 주어도 들어줄 수 없는청이었다. 보아하니 공작님의 전속 시종 중에 아틴이 새 시종이라고 우습게 여기는모양이었다. 꾀어내서 공작님에 대한정보를 하나라도 더 얻으려는모양이겠지.
문제는이 아틴에게 접근하는것이 쉽지 않다는사실이었다.
일단 일하는성이 달랐고, 아틴은 제법 얼굴이 괜찮은 뉴페이스라는이유에서 본성의 시녀와 하녀들이 독점하고 있는처지였다. 거기다 그녀들을 뚫고 다가가려 한데도, 왜인지 노아가 철통같이 방어하고 있는것이다.
그 노아를 물리쳐도 가장 무시무시한존재인 미카엘이 아틴을 보내 줄 리 없지만. 하녀는거기까지는알지 못했다. 대개 노아를 뚫지 못했던 탓이다.
하녀는공작저에 머물고 있는손님을 언짢게 할 수는없는노릇이라 점잖게 말을 꺼냈다.
"아틴 님은 24시간 공작님의 시중을 들어야 하는일을 맡고 계신 터라 시간을 내기 어려우신 분이에요. 저와 개인적으로 아는사이도 아니고…. 근무지도 다른 터라 제가 들어드리기 어려운 일인 것 같네요. 이건 돌려드리겠습니다."
은화를 돌려준 하녀가 재빨리 자리를 피하고 세실리아는난처해졌다. 그녀는타깃을 다른 하녀나 시녀에게 돌려 보았으나 마찬가지인 대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이미 아이리스에게 불러내 오겠다고 호언장담했던 세실리아는손톱을 깨물었다.
'이것들이! 돌아가는상황을 보면 모르는건가?! 결국 우리 성녀님께서 미카엘 황자님의 부인이 되실 텐데!'
아이리스와 미카엘이 결혼만 한다면 너희들은 다 죽었다고 생각하며 세실리아는아틴을 불러낼 방법을 골몰했다.
세실리아가 보기에도 아이리스가 아틴을 부르려는이유는뻔했다. 공작님과 만나게 해 달라는거겠지. 미카엘 황자가 워낙 철벽이라 저번에 본성에서 인사를 한것 외에는그림자도 보지 못한아이리스였다.
미카엘 황자뿐일까? 경호 업무를 맡게 된 패트릭도 어쩐지 아이리스에게 데면데면했다.
'이상하단 말이지. 전에는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분명 흘러가는상황은 성녀에게 유리해 보이는데도, 변방으로 밀려나고 있다는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도 세실리아는열심히 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이리스가 미카엘과 결혼하여, 장차 공작부인이 되고 황비가 되었을 때, 이렇게 고생한자신에게 무언가라도 떨어질 거라는생각에서였다.
'잘보여서 나쁠 것은 없어! 이즈음에서 내가 제대로 기억에 박힐 만한역할 하나를 해내면, 성녀님도 반드시 날 기억해 주실 거야!'
세실리아는머리를 굴리기로 했다. 평범한방법이 안 되면 우회로를 찾으면 그만이었다!
***
"이것을 아틴 님께 전해 달라더군요."
미카엘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하인이 다가와 말했다. 방 안에 있는것은 공작가의 고용인들뿐이었다.
"요즘 쿠키를 많이 굽나 보네."
분홍색 종이에 싸인 것은 척 보기에도 쿠키가 담긴 꾸러미였다. 로제타는공작저로 돌아온 이후 시녀나 하녀로부터 쿠키를 많이 선물받았으므로, 또 그런 일인가 싶었다.
"그…. 세실리아 신녀님께서 보내신 겁니다."
"세실리아 신녀님?"
하인의 말에 로제타는갸웃했다. 모르는이름이었다. 공작부인이 되고 나서 신녀는몇 번 인사를 받은 적 있지만, 그런 이름을 들은 기억은 없다.
"성녀님의 시중을 드는분입니다."
아틴의 반응에 호위기사들 중 하나가 가르쳐 주었다.
이들은 아틴이 로제타의 먼 친척인 몰락 귀족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일단 귀족이라고 알고 있는지라 대하는것이 매우 정중했다. 로제타도 그들에게 나쁘게 대하지 않았고.
'그런 사람이 왜?'
로제타는쿠키를 받는대로 사용인들과 같이 나누어 먹었었다. 성의 시녀나 하녀가 보낸 것은 안심할 수 있지만, 아이리스의 시중을 드는신녀가 보낸 쿠키라….
"껄끄러우시면 제가 먹을까요?"
점심을 부실하게 먹었는지, 아니면 일을 많이 해서 배가 고파졌는지 하인이 물었다. 로제타는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괜찮겠어?"
"뭐 나쁜 게 있겠습니까?"
그들은 세실리아도 아틴에게 다른 마음이 있어 쿠키를 준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요 며칠 아틴에게 온 쿠키는다 그런 의미였으니까. 정작 본인은 눈치도 채지 못하는것 같았지만.
하인이 얼른 쿠키를 받아 들자, 다른 시종도 거들었다. 그게 꽤 맛있어 보이는지 뻗어 오는손이 많았다.
수상쩍게 생각한로제타와 노아만은 예외였다.
"…공작님께 보이면 안 되니, 그 전에 치우도록."
"넵!"
노아의 말에 벌써쿠키를 다 해치운 이들이 대답했다. 그런데 그중 한명의 표정이 묘했다. 우물거리더니 뭔가를 손바닥에 뱉어 냈다.
"뭐야?"
하얀 덩어리는얼핏 종이 뭉치 같이도 보였다. 그걸 우물거렸던 시종이 당황한눈치로 아틴을 쳐다보았다.
"쪽지가 있었던 모양인데, 어쩌죠?"
참 열심히도 씹었는지, 침 범벅이었다. 딱히 받아 들고 싶어 하지 않는로제타의 표정에 노아가 나섰다.
"침 묻은 걸 누구한테 내밀어! 그냥 버려!"
"그래도 내용은 봐야…."
눈치를 보는시종의 모습에 로제타는고개를 끄덕였다. 시종이 쪽지를 펼치기는했으나, 잉크가 침에 번져서 내용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이, 이걸 어쩌죠?"
"그냥 쿠키를 다 같이 나누어 먹었다고 전해 줘. 누구 위장에 들어갔다고 생각하겠지."
속셈이 뭔지 물어보기도 귀찮았으므로 로제타는 그냥 무시하기로 결정했다.
온몸이 불타는 것 같았다. 미카엘이 사용했던 그마법처럼 고통스러웠으나, 그것은이렇게 전신을 불태우는 것이 아니었다. 머릿속은물론 눈동자까지 시뻘건 불꽃에 지져지는 듯한 고통에 흑태자는 비명을 질렀다.
문밖에서는 그의 기사들이 어떻게 해서든 주군을 구해 내려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다.
상대는 99개의 영혼을 삼킨 마검이니 말을 걸어올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가잡은검의 자루로 느껴지는 의지는 단 하나, 증오뿐이었다.
세상을 불태우고 모든 자들을 죽이라 명령하는 증오!
아아아아아아아악!
흑태자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버텼다. 이미 검의 손잡이는 그의 손바닥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을 듯이 보였지만, 흑태자 자체도 검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검을 놓으려는 그시도 자체가패배를 의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포기할 수 없다! 나는 라스탄을! 이 세계를 갖고야 말겠다!!'
욕심이 집착이 되고, 집착이 증오와 분노를 이끌어 냈다. 그는 자신의 눈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증오했다.
미카엘을 증오했고, 알렉시스와 아네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가라스탄을 집어삼키기 위해서는 그들 세 사람을 죽여야만 했다.
나아가부왕인 일리야도.
그는 녹슨 족쇄처럼 성가시고 고통스러운 존재였다. 언젠가는 짓밟고 나아가야만 하는 장애물인 것이다.
부왕과 다른 형제들조차도…. 서로가서로를 짓밟아 위로 올라가려 하는 존재에 불과했다. 모두가적이고 이용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래……. 그렇게 모든 걸 증오하는 거다.]
문득 들려온 목소리가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서로 다른 목소리였다. 제각기 다른 억양을 지닌 자들이 하나의 의지로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만 한다면…….]
[…나는 너일 것이고….]
[너는 곧…….]
나일 수 있을 것이다!!!
붉고 새카만 기운이 그의 눈으로, 코로, 입으로 빨려들어 갔다.
흑태자는 본능적인 거부감에 그것을 떨쳐 내려 했으나, 그것은이미 그의 몸속으로 빨려들어 가그의 내부로 파고들고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자들의 원한이 하나의 의지를 가지고 그의 몸에서 들끓었다.
"으아아아아아아!"
수많은원혼을 따라 아마도 가장 처음, 이 검을 위한 제물로 바쳐졌을 드래곤의 힘이 흑태자의 몸으로 파고들었다. 흑태자는 힘을 제 것으로 만들지 못한 채 고통스러워하며 몸부림쳤다.
뼈마디가굵게 불거지고, 어깨와 팔에서 용의 날카로운 뿔과 돌기가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온몸의 뼈가뒤틀리고 재조립되는 듯한 통증에 흑태자는 비명을 질렀다.
"으으으……."
수십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온몸에서 튀어나온 뿔과 울퉁불퉁해진 몸은마치, 드래곤이 억지로 인간의 몸으로 비집고 들어간 것을 연상케 했다.
비틀거리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던 흑태자는 어떻게 해서든 이 기운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용을 썼다.
"전하!! 어억……."
기어이 봉인된 방의 문을 다시 연 기사들이 흠칫 걸음을 멈추었다. 방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자는 분명 그들의 주인이었으나, 마치 마물을 받아들인 듯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흑태자 로드리고는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길게 늘어진 용의 꼬리가그의 움직임에 따라 꿈틀거렸다.
"곧…. 괜찮아질 것이다."
기사들의 경계하는 듯한 시선에 흑태자는 제 기운을 갈무리하려 했다.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으나, 뜻밖에도 뼈가뒤틀리는 느낌이 들더니 삐죽 튀어나왔던 뿔과 돌기가가라앉았다.
"시간이 지체되었습니다. 전하…. 다른 곳으로 옮기셔야 합니다."
방치된 것이나 다름없는 신전이라 해도 사람이 오가지 않는다는 것은아니었다. 누군가이 신전의 병사들이 살해되고 봉인된 마검이 탈취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도 있었다.
"그래…."
흑태자는 비틀거리며 방에서 나왔다. 이제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어선지 양쪽에서 기사들이 튀어나와 그를 부축했다.
몸에서는 여전히 마검의 기운이 들끓고 있었으나, 이곳을 떠나야 했다. 그의 부관이 말한 대로 너무 지체되었으므로.
흑태자는 힐끗 텅 비어 버린 방 안을 돌아보고 걸음을 옮겼다. 수많은의지가말한 대로 검은그와 한 몸이 되어 버린 듯, 방 안 어디에서도 마검은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