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 황자에게 사로잡혔다-16화 (16/21)

제16장. 초대

피가 얼어붙는다는것이 이런 느낌일 것이다. 베아트리체는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타난 이를 바라보았다. 이자벨은 그런 베아트리체를 비웃듯 말했다.

"기쁜 얼굴이 아니구나. 오래간만에 언니를 봐서 반갑지 않니?"

"왜, 여기에…. 도망친 것이 아니었어?"

이자벨이 탈주한 이후 카룰리아스 가문의 사정은 더욱 안 좋아졌다. 친척들은 혹시라도 연관될까 봐 등을 돌렸고, 압수되었던 영지와 재산은 아주 일부분만이 돌아왔을 뿐이었다. 베아트리체는그나마도 빼앗길까 봐 서둘러 처분했다.

수도의 저택과 별장을 처분하고 나니, 후작가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영지에서 새 출발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자금은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베아트리체는그마저도 어려울 수 있다는사실을 인지했다.

아버지는여전히 감옥에 있었고, 아덴 공작가에 새로운 사건이 발생했다. 베아트리체는아닐 거라고 부인하고 싶었지만…, 이자벨의 소행일 거라는생각이 들었다.

만약 또다시 이자벨에 의해 아덴 공작가가 화를 입은 거라면, 이번에야말로 카룰리아스 가문 전체가 화를 피하지 못할 거라여겼다.

그래서 베아트리체는남동생 헨리를 데리고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문의 명맥을 보존하고, 하나 남은 혈육을 지킬 수 있는길은 그것뿐이었다.

헨리는이자벨이 잡혀 갔을 당시에는철없는소리를 했지만, 이자벨이 압송되고 난 이후로 사람들의 괴롭힘을 받고는현실을 깨닫게 된 것 같았다.

마침 기사 학교에서도 돌아와 집에 와 있기에 틈을 보던 참이었던 것이다.

그녀들이 서 있는집무실은 집안의 가주를 위한 것이었다. 베아트리체가 이사를 하며 후작을 위해 꾸몄지만, 지금은 아버지가 돌아오실 수 없다는것을 알았다.

황실은 이자벨이 돌아와 목을 내어줄 때까지 카룰리아스 후작을 내어줄 생각이 없는듯했다. 이자벨이 자수하지 않을 것임은 베아트리체도 잘 알았다.

그래서 이 집무실은 현재는베아트리체가 사용하고 있었다.

이자벨은 뒤적이던 서류를 내려놓고 베아트리체를 바라보았다.

"집과 땅을 팔았더구나. 후작가의 영지로 내려갈 생각이니?"

"그, 그럴 거야."

베아트리체는주춤거리며 답했다. 이자벨은 혼자 온 것이 아니었다. 만약 그녀가 혈혈단신으로 숨어든 것이었다면, 베아트리체는그 자리에서 이자벨을 붙잡아황실에 넘겼을 것이다. 그것만이 아버지를 구할 방법이었으니까!

그러나 이자벨은 열여섯 명이나 되는기사를 이끌고 있었다. 그들 중 몇몇은 낯이 익었지만, 베아트리체가 이름까지 알 정도는아니었다.

"뭐, 상관없겠지. 집을 비울 거라면 빨리 비워 다오. 여기에서 해야 할 일이 몇 가지 있거든…. 아, 가문의 물건도 내놓고 말이야."

그것은 헨리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었지만, 베아트리체는입을 다물었다. 이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해 봤자 소용없었다.

"뭐에 쓰려고?"

"알면 황실에 고해바치게? 붙잡지 않을 테니, 도망치려거든 얼른 떠나는 것이좋아. 사람을 붙여 수도를 떠날 때까지는 호위해 주마."

말이호위지, 죽이려 드는 것일지도 몰랐다. 베아트리체의 표정을 본 이자벨은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어리석기는. 내가 너를 죽일 리없잖니? 내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인데…. 너도 헨리도, 내가 하는 일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니 도망가게 놔두겠다는 말이야."

비릿하게 웃는 얼굴은 이자벨이그녀와 단둘이있을 때만 보였던 본성에 가까웠다. 대외적으로 드러내던 우아한 모습이아니라.

"그러니 마음이바뀌기 전에 떠나렴. 물론 혈육의 정을 저버렸을 때는, 내 자비는 바라지 않는 것이좋을 거야."

경비대에 고발이라도 한다면 죽이겠다는 말과 같았다. 베아트리체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 지금 떠나면 돼?"

"그래."

베아트리체는 이자벨의 눈치를 보며 커튼 뒤에 가려진 초상화로 다가갔다. 이자벨과 베아트리체의 할아버지가 그려진 그림이었다.

그 그림을 치우자 작은 금고가 나타났다. 베아트리체의 뒤에서 이자벨이멍청하다고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뻔한 위치라는 거였다.

베아트리체는 금고를 열어 가문의 인장과 가보가 들어 있는 창고의 열쇠를 건넸다.

"창고 위치는…."

"알고 있어."

이자벨은 자신이야말로 그것의 주인이라는 듯이낚아챘다. 베아트리체는 그런 이자벨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이가 소원하기는 했으나 언니였다. 그녀의 추악한 이면이만천하에 드러나기 전까지는 자랑스럽게 여긴 언니이기도 했다.

"출발하지 않니? 내일 아침에는 네 그 멍청한 얼굴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

베아트리체는 고개를 숙인 채로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사실, 상황이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도망칠 준비는 해 두고 있었다.

황제는 공작가의 영지와 광산, 농장, 예술품 등을 압수하기는 했으나, 저택에 있는 사사로운 물건까지 빼앗지는 않았다.

그래서 베아트리체의 보석과 드레스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헨리도 보석이달려 있는 귀중품을 가지고 있었고, 부친과 돌아가신 어머니 소유의 보석까지 더하면 상당한 액수의 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다만 덩어리가 큰 공작가의 저택을 팔기는 어려웠으나, 다행히 황실에서 사 주었다. 이자벨이나 공작이숨겨 둔 무언가를 찾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거기다 아직 후작가에 충성하고 있는 기사 몇몇이있었다. 가문의 기사인 그들을 데리고 다른 나라에 정착하면, 그럭저럭은 살 수 있을 것이다.

복도에 선 베아트리체는 마지막으로 집무실이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열린 문으로 환한 불빛이새어 나오고 있었지만, 이자벨은 베아트리체를 살피는 기색조차 없었다.

'이제 신경 쓸 필요 없어. 이제 내 의무는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인 헨리를 지키는 일이야.'

베아트리체의 바쁜 걸음이헨리가 있는 2층으로 향했다.

***

황제가 목숨은 건졌지만 결국 의식불명의 상태에 빠졌다는 소문이빠르게 확산되었다. 황비인 아네트는 공식적으로는 아무런 언질을 주지 않았지만, 많은 귀족들이미카엘 황자를 추대해야 하는 것이아니냐고 수군거렸다.

당분간은 황비인 아네트가 섭정을 맡는 것이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아네트는 최상위 정령사일 뿐, 출신 성분을 알 수 없는 이였다.

황제가 무탈했을 때에는 그녀에게 고개 숙여 왔지만, 황제의 회복을 장담할 수 없는 지금은 그녀에게 굽힐 수 없다는 귀족들이많았다.

"우리가 언제까지 그 평민 계집애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겠습니까! 응당 미카엘 황자를 섭정으로 추대해야 합니다!"

"하나…. 미카엘 황자에 대한 의혹은 풀리지 않은 채가 아닙니까? 폐하의 자식이있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것은 그저 소문일 뿐이요! 아직 세 집안 중 어느 곳도 스스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잖소!"

"황비가 아직 건재한데, 그것을 인정하기 쉽지 않겠지요. 황비는 벌써 미카엘 황자에게 붙은 듯하니…."

그들은 대놓고 얘기하고 있지 않기는 하나 '그 공작가'가 어느 집안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 집안에서 또한 그들에게 제의를 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현재 입지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고, 변화를 원치 않는 자들이었다.

궁지에 몰린 스물여섯 개의 가문이있기는 하나, 그들은 하나하나를 떼어 놓고 본다면 이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가문이었다.

"하면 미카엘 황자…, 아덴 공작께 힘을 싣는 것으로 합의가 된 것이겠지요?"

"당장은 그 수밖에는 없지 않겠소. 언제까지 황실의 핏줄이아닌 이가 라스탄을 다스리도록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

"허허. 선황 폐하에 이어 현 황제께도 이런 일이생기다니…."

교단의 대표가 이자리에 있었다면 불경하게도 현 황실에 신심이부족해서라고 말했겠으나, 여기 모인 귀족들은 책이잡힐 말은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험험. 미카엘 황자로 뜻이모인 것이라면 문제는 그 여자뿐이겠구려."

"그 여자라니요?"

"뻔하지 않습니까? 얼마 전에 아덴 공작부인이된 영애 말입니다. 황비가 될 사람의 신분이고작 백작가의 영애라니. 안 될 말이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우리후작가나…, 공작가의 공녀들 중에 황비 후보를 추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을 꺼낸 것은 현재 결혼 적령기에 든 여식들을 데리고 있는 집안들뿐이었다. 딸이없거나 이미 결혼시킨 집안에서는 못마땅하다는 기색을 드러냈다.

"정략혼도 아니고. 마음이맞아결혼한 것인데, 그리쉬이헤어지시겠습니까?"

"헤어지셔야지요. 이전까지는 모르나, 지금은 즉위를 위해 저희들의 힘이필요한 상황이아닙니까!"

아까까지만 해도 황제의 핏줄을 가진 공녀가 있다는 소문을, 그저 소문으로 치부하던 자들이입에 올릴 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억지로 끌어내리기까지는…. 후궁으로 삼으면 될 일 아닙니까?"

"아닙니다! 미카엘 황자께서 후궁에게만 눈길을 주고 황비를 냉대하신다면 어쩐단 말입니까? 휘르센 가문의 핏줄에서 다음 대황제가 나온다면, 제 어미를 끌어내린 저희를 가만두겠습니까?"

일리가 있는 말인 듯 귀족들의 시선이그에게로 모였다.

"그렇다면…."

"황자께서는 쉬이부인을 포기하지 않으려 하실 테니, 적당한 때를 노려…."

결국은 로제타를 죽이자는 말에 몇몇 귀족들은 당황했다. 이후에 미카엘 황자가 이사실을 알기라도 한다면 큰일이나는 것이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황자께서 가만있지 않으실 텐데…."

"휘르센 영애는 이미 한 번 위험한 일을 겪지 않았소! 그 카룰리아스 계집의 소행으로 덮어씌울 수만 있다면, 황자의 분노도 그 계집에게로 향할 것이오!"

이자벨 카룰리아스가 감옥에 갇혀 있다면, 어려운 일이겠지만. 현재 그녀는 모습을 감춘 채였다. 황자의 눈을 끌기에 그보다 좋은 미끼는 없었다.

"말은 좋지만…. 어찌 그것이가능하단 말입니까? 그 계집이도망을 다닌다 해도 황자께서 행적을 추적하고 있으니, 결국은 다 들통날 것이아닙니까?"

"아직 그 일당이수도에 남아있지 않소!"

"일당이라니…."

그들은 문득 수도에 남아있는 카룰리아스의 일가를 떠올렸다. 부친이감옥에 갇혀 있어 아직 영지로 떠나지 못하고 있는 남매였다. 어린 그들에게 덮어씌우자는 말에 몇몇 귀족들이석연치 않은 얼굴을 했다.

카룰리아스의 남매가 가여워서가 아니라, 미카엘이그것을 믿겠냐 싶은 것이다.

"감옥에 갇힌 라울 카룰리아스가 지시를 내린 것으로 하면 될 거외다. 그 아이들이가엽기는 하나…. 반역자인 누이를 둔 것이죄라면 죄겠지요."

목소리를 키웠던 귀족이결론을 내린 것에,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그들은 이상황을 빌미로 미카엘에게 목줄을 채울 수 있지 않을까로 기대를 걸고 있었다.

황제가 알렉시스로 바뀐 후부터 귀족들은 오랫동안 황제의 눈치를 봐 왔다. 알렉시스에 이어 미카엘이황제가 된다고 한다면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분명했다. 그들은 이기회에 라스탄의 분위기를 바꾸고 싶어 했다.

황제 중심이아닌 귀족 중심의 정치로…. 백성에게는 낮은 세율을 주고 귀족에게 높은 세율을 부과하는 차별적인 정치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그들이었다.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것입니다. 경들은 휘르센가의 계집이죽고 난 이후, 새로운 황비를 추대할 때에 힘을 실어 줄 준비나 하십시오!"

그들은 이미 모든 계획을 세운 후에 귀족 회의에 이안건을 내놓은 것으로 보였다. 그들의 기색에서 불온한 기미를 읽어 낸 귀족들이었지만, 황제에게 일부 불만을 가졌던 것은 사실인지라, 그들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반대의 뜻을 내비칠 친황제파의 귀족들은 지금 이자리에 없었다. 그러나 친황제파와 황제 측에서 붙여 놓은 첩자가 내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그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

미카엘과 같이보고를 받은 황제는 힐끗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미카엘의 표정은 태연했지만 으득…, 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흠. 누군가는 뼛조각도 찾기 힘들겠군.'

겉으로 유해 보일지는 모르나 미카엘의 성정은 차가운 불과 같았다. 그 불길 속으로 손을 집어넣겠다고 호언장담하는 그들이알렉시스는 그저 우스워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도 모르나?'

친황제파였다면 이용 가치가 사라질 때까지는 살려 두었겠지만, 상대는 반대성향을 가진 귀족이었다. 일이끝난 다음에 처리하든, '흑막'을 잡는 과정에 미끼로 사용해 죽이든 아무 상관이없는 자였다.

로제타는 미카엘의 사랑을 받아그의 부인이된 자였다.

감히 황족의 배우자를 자신들 마음대로 갈아치울 생각을 하다니…. 황실을 손아귀에 넣고 흔들겠다는 괘씸한 사고방식에는 쓴맛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어찌 생각하느냐?"

시종을 돌려보내고 알렉시스가 물었다.

알렉시스는 스스로 미끼가 되고 싶어 했다. 이번 아네트가 공녀들을 초대한 것이좋은 계기가 되리라 여겼다.

공녀들 중 하나가 황제의 자식을 가졌다는 것은 현재로서는 큰 도움이되지 못했다. 그 공작 가문이황제를 확보하고 있어야만, 명분이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위험이큽니다. 거기다 제 생각은 조금 다르고요."

미카엘은 흑막이직접 움직이리라 생각하는 것까지는 같았다. 흑막은 연달아실패한 것으로 보이지만, 가장 큰 일인 황제를 쓰러트렸으니 아직 실패하지 않았다 생각할 것이다.

거기다 아직 그에 대한 단서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으니 도리어 손을 떼지 않을 거라 보았다.

이미 일이너무 커졌으니까.

그가 직접 이만큼 판을 키웠으니 더 큰 욕심을 낼 것이분명했다.

황제를 쓰러트렸으니, 다음에는 아네트를, 미카엘을 차례차례로 베어 넘길 욕심을 부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자신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드러내 놓지 않았으니, 이정도쯤은 문제없다면서.

"…저는 이번 귀족들을 부추긴 자가 아무래도 그자일 것 같습니다."

"너를 흔들기 위해서?"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혹은…. 죽인다는 말과는 달리, 그혼란 틈에 로제타를 다시 납치하려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필요한 것은 황궁에 드나들 수 있는 귀족 가문을 설득하는 것뿐이었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 그들의 손을 빌리는 것도 중요했다.

"놈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저와 황비님일 테니. 황비님과 저의 발을 묶을 무언가를 준비할지도 모릅니다."

"흐흥~, 이래 봬도 이 몸이 황제인데. 나를 무시하고?"

"폐하가 폐하시기 때문입니다."

병중이라고는 하나, 황제는 황제였다. 암살 사건 이후로 엄중하게 보호를 받는 황제를 납치하는 것과 공작부인을 납치하는 것은 얘기가 달랐다.

이곳은 아덴 공작가의 성이 아니었고, 공작부인의 위치나 경호가 공작가보다 허술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공작가 북쪽 성에서 공작부인을 납치하려 했을 정도니…. 황궁에서도 그것이 가능하리라 생각하는 거로군."

"황비께서는 다과회 당일 로제타에게 저의 곁에 붙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귀족들은 거기까지는 생각지 못했을 겁니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평민 출신의 황비이니 귀족 출신인 로제타를 멀리하거나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라 보았다.

"아마도 폐하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확보하려는 것으로 눈길을 끌고 로제타에게 수를 쓰려고 할 것입니다."

자신이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사실 황제의 자식을 가졌다 주장하는 공녀는 이용 가치가 다하면 버려질 패였으니까. 곧 목숨이 끊어질 황제나 그녀보다는, 차기 황제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로제타 쪽이 쓸모가 많은 인질이었다.

"다만 그들 쪽에서도 그공녀는 아직 버리기 아쉬운 패일 테니, 일이 실패했다는 선에서 공녀를 데리고 도망치지 않을까 싶습니다."

"흠."

황궁을, 라스탄의 황실을 완전히 우습게 보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이미 황실 사냥대회의 개최지에 대한 정보가 빠져나갔고, 아덴 공작가의 무도회가 아수라장이 되기도 했다. 알렉시스는 자신의 황궁에 구멍이 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사실 알렉시스 또한 그러한 위협 때문에 오래도록 황비를 맞이하지 못한 채로, 미카엘 하나를 보호하기 위해 전전긍긍하기도 했다. 외부 인사들을 미카엘의 스승으로 둔 것도, 미카엘을 보호하기 위한 일환이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폐하스스로가 말씀하신 대로 미끼가 되어 주십시오."

이어지는 미카엘의 설명에 알렉시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로제타는 잠시 이들이 나 때문에 위험해지는 건 아닐까를 생각했다. 원작의 줄거리대로라면 그들은 딸을 잃지만, 양자인 제럴드 덕분에 가문은 유지하는 이들이었다.

진짜 로제타를 생각하면 그들이 싫어야 마땅하지만, 지금의 로제타는 그들이 싫지도 좋지도 않았다. 그녀 자신이 겪어 온 '부모'라는 존재보다는 차라리 나은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차피 이 사람들도 나와 특별히 가까워지는 것은 기대하고 있지 않기도 하고 말이야….'

"그래서 폐하께서는 일어나실 수 있으신 것이냐?"

"미카엘 님께서 노력하고 계세요."

현 황제에 대한 것이니 부정적인 것은 말할 수 없다는 뉘앙스로 충분했다. 엔디미온은 더 묻지 않았다. 그는 황비가 여전히 미카엘을 신뢰하고 있다는 것, 미카엘이 황제의 암살을 사주한 것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가진 것이 많은 자들에게 변화는 두려운 것이었다. 물론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자신에게 막대한 것을 가져다준다고 한다면 얘기가 다르기는 했다.

"이렇게라도 얼굴을 보니 좋구나. 황자께서 함께 와 주셨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하긴 오죽 바쁘시겠니?"

셀리나는 다른 기대를 하기 시작한 게 분명했다. 결코 입 밖에 내지 못할 말이었으나, 그녀의 머릿속은 이미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딸이 공작부인이 된 것만으로도 사교계에서 여왕 대우를 받고 있는 셀리나였다. 이 와중에 로제타가 황비가 되면 그대우가 어떠할지….

'로제타는 부족한 것이 많고, 모르는 것도 많은 아이이니 내가 가르쳐야 해!'

아네트 황비가 있지만, 그황비는 사실 형수일 뿐, 미카엘 황자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미카엘 황자가 즉위하게 되면, 병중인 황제를 모시고 시골 어디든 내려가서 살 것이 분명했다. 황실에 큰 어른 자리가 빈 것이니…. 그들이 그자리를 차지한들 뭐가 나쁜가 싶었다.

'이 궁전에서 계속 살 수 있을지도 몰라! 어쩌면…. 그래! 로제타의 신분을 높여 주려고 그이의 집안을 후작가나 공작가로 높여 줄 수도 있겠지!'

아덴 공작가가 비었으니 그대저택에 그들이 들어가 사는 것도 괜찮겠다 보았다. 그것이 무리라면 그괘씸한 카룰리아스 가문이 차지했던 영지를 주는 것도 좋을 것이고!

미카엘 황자가 로제타를 사랑하는 것이야 두말할 것도 없는 일이니, 로제타가 조금 조르기만 하면 충분히 성사될 일이라 보았다.

로제타는 셀리나의 속내까지는 몰랐으나, 답지 않게 생글생글 웃는 모습에 불안해졌다. 엔디미온도 비슷한 기분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황비께서도 황자님께 많은 도움을 구하시겠지?"

정치적인 일에는 흥미가 없던 셀리나가 이런 질문을 하자 로제타는 의아해졌다.

"글쎄요. 미카엘 님은 폐하의 치료에만 전념하고 계셔서 다른 일까지 있으신지는…."

"그래?"

아네트가 미카엘에게 정무 얘기를 하지 않는다는 말에 셀리나는 조금 샐쭉해졌다. 그녀가 생각하기로 황비가 주제도 모르고 전권을 쥐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곧 전 황비가 될 거면서!

"…네 엄마가 폐하의 소식으로 심란한 모양이구나. 너도 피곤할 텐데, 얼른 황자님의 곁으로 돌아가라. 그분의 힘이 되어 주어야지."

"네, 아버지."

엔디미온은 셀리나의 입에서 흰소리라도 나올까 얼른 로제타를 돌려보냈다. 여기가 백작저여도 문제가 될 판국인데, 황궁이었다. 욕심은 뱃속에서만 부리고 입 밖으로는 내보내지 않아야 몸이 편안한 법이었다.

로제타는 엔디미온이 보내준 김에 얼른 별궁을 나왔다. 셀리나의 묘한 분위기를 보니, 그녀가 실수하기 전에 황궁에서 내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3개의 공작 가문에서 모두 답신이 돌아왔다. 불참하는 이는 없었다. 모두가 황비의 초대에 응하겠다고 했다.

이에 아네트는 그들의 격에 맞는 다과회 장소를 준비했다. 황금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본궁의 응접실이었다.

물론 진짜 황금으로 만든 정원은 아니었다.

황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을 한 화원에 금가루를 뿌린 노란 장미로 만든 정원이었다. 흰 대리석과 황금이 어우러져 천박하지 않을 만큼 호사스러운 정원이기도 했다.

그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응접실은 황제가 기거하는 침실과 정원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었다. 다소 거리가 있기는 하나 황제의 침실에서도 그정원을 내려다볼 수 있으니, 정원으로 나간다면 황제에게 얼굴을 보일 수도 있었다.

병중인 황제가 침대에서 일어나 발코니로 나올 수만 있다면.

이 구조는 황궁을 자주 드나드는 이라 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황제의 침실이 있는 위치란 극비 중의 극비였으니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비 전하."

"어서 와요, 공녀."

다소 긴장한 듯한 낯빛이 황비의 웃음을 본다 해서 누그러지는 것은 아니었다. 황비가 그들에게 어떤 의심을 품고 있는지 알고 있어서였다.

불의 정령사인 황비는 이 라스탄 제국 내에서 내로라하는 강자였다. 설마 이 자리에서 황비가 황제의 핏줄을 가진 이를 해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또 모를 일이었다.

인간에게 질투만큼 사납고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은 없었으므로.

공녀들은 하나씩 황비에게 인사를 건네며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들에게는 각자에게 딸린 시녀가 있었고, 호위기사들 또한 대기하고 있었다.

예법에 따라 호위기사들은 방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문 앞에 지키고 섰다. 주인을 따라 들어온 것은 공녀들이 데려온 시녀들뿐이었다.

고위 귀족인 경우는 두 명에서 세 명, 상대가 황족일 경우는 다섯 명까지도 가능했다. 다만 이렇게 실내로 들어와 방까지 안내받았을 경우에는 한둘만이 따라 들어올 수 있었다.

여기 있는 공녀들의 시녀도 딱 둘까지만 방으로 들어왔다. 귀족은 고위 귀족이든, 일반 귀족이든지 간에 한 명만 가능하니, 특혜라 할 수 있었다.

"차를 내오도록."

황비의 지시에 시녀장이 휘하의 시녀들을 거느리고 들어왔다. 황실의 문양이 새겨진 식기에 한껏 힘을 준 것이 분명한 차와 케이크가 담겨 있었다. 공녀들은 다들 제 앞으로 놓이는 찻잔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로 황비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최근 사교계에 도는 불쾌한 소문에 대해서는 알고 있을 겁니다."

공녀들은 다들 긴장한 눈치였다. 한 명은 꼿꼿하게 고개를 세우고 있고, 한 명은 황비와 눈을 맞추지 못한 채로 그녀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머지 한 명은 마른침을 삼키며 다른 공녀들의 눈치를 살폈다.

"한낱 소문이라 무시할 수도 있겠지만, 적령기의 귀족 영애에게는 치명적일 수도 있는 소문인지라 이렇게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시녀가 소리도 없이 다가와 찻잔을 채웠다. 따스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갈색 액체를 바라보며 아네트가 눈을 빛냈다.

"열 마디 말보다 한 가지 행동이 사람들의 입을 막는 데 효과적일 터…."

황비의 시선이 찻잔으로 향하자 공녀들의 눈길도 돌아갔다.

"저 찻잔 속에는 라프니아 잎과 열매가 들어 있답니다. 젊은 영애들이 미용과 또 한 가지 목적으로 자주 마시는 차이지요."

모여 있는 공녀들 중 누군가가 헛숨을 들이켜는 것 같았다. 라프니아 잎과 열매가 가진 한 가지 효능은 분명했다.

피임과 유산.

아네트는 단순하게 젊은 영애들이 사용한다고 했으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약초는 귀족들의 정부 사이에서 유행하는 것이다. 지금은 젊은 영애들도 곧잘 마시지만, 고루한 귀족들은 이를 좋지 않게 생각하기도 했다.

"자, 드시지요."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침묵이 흘렀다. 아네트의 권유에 공녀 하나가 도전적인 시선으로 차를 바라보다가 찻잔을 집어 들었다. 다른 두 명의 공녀도 찻잔을 들었다.

'아, 정말…. 가 볼 수밖에 없는미끼를 만들어냈군.'

모습을 감춘 지 30여 년이 된 대륙 최고의 치유술사가 라스탄 밖에 있는변방의 소국에서 모습을 나타냈다는소문이었다.

하필이면 이때에 소문이 퍼진 것이 의심스러웠으나, 치유술사 자체가 그곳에 나타난 것만큼은 진짜인 듯싶었다.

황제에게 치유술사의 능력밖에는통하지 않는다는것은 꽤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 치유술사가 갑자기 모습을 감출 수도 있었기에 사람을 보내야 했다.

관리와 기사들을 보내 모셔 오는방법도 있으나, 과거에도 비슷한 방법을 시도했다가 놓쳤기에 이번에는미카엘이 직접 가기로 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불안한 듯 연신 뒤를 돌아보며 미카엘이 말했다. 그의 앞에는그가 불러낸 소환수가 기다리고있었다. 소환수는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목을 길게 빼고울고는제 등에 올라타는미카엘을 노려보았다.

로제타와 몇몇 호위기사들이 지켜보는가운데, 소환수가 날아올랐다. 금세 고도를 높여 황궁의 상공을 벗어나는소환수의 모습에 로제타는미련 없이 돌아섰다.

"돌아가자."

등을 돌려 계단을 내려오는로제타의 모습에는수심이 어려 있었다. 뒤따라 붙은 시녀가 조심스럽게 고했다.

"공작 각하께서는금방 돌아오실 겁니다."

"그래…."

현재로서는모든 것이 평화롭기만 했다. 로제타는불안한 낯으로 힐끗 미카엘이 날아간 방향을 바라보고는걸음을 서둘렀다.

***

알렉시스는꼼짝하지 않고침대에 누워 있었다. 미카엘이 준 변신 반지 덕분에 완벽하게 병자 노릇을 할 수 있었지만, 무료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빨리 좀 나타나라….'

미카엘이 읽어낸 대로 아덴 공작부인이 목적이라면, 시작은 이 방에서부터일 것이다. 감히 황제를 미끼로 사용하려 들 것이라고미카엘이 예언했으니.

알렉시스가 상처에서 회복되지 않았다면, 아네트는만사 제쳐 두고이쪽으로 달려올 것이다. 그녀의 몸은 하나뿐일 테니. 그사이, 아덴 공작부인을 납치한다는계획일 거라고…. 미카엘은 그렇게 추측했다.

공작가의 무도회장에서 그러했듯이.

이쪽으로 보내질 자들은 어차피 미끼로 쓰고버려질 자라 해도, 모든 정보가 완전히 차단되어있을 거라고는생각지 않았다. 그들도 아주 얄팍하게나마 정보가 있을 터였다.

아덴 공작가에 붙잡혀 있는납치범의 일당은 아직 살아 있었지만, 중요한 정보는얻지 못했다. 기껏해야 납치한 공작부인을 옮길 장소와 이전에 숨어있던 곳, 원래 하던 일…, 정도였다. 그들이 카룰리아스 공작가의 잔당이라는것은 이미 밝혀낸 사실이었다.

카룰리아스 공작가가 공작가의 권력을 이용해서 뒤로 범죄에 손을 대고있었다는것은 알렉시스도 짐작하는바였다. 다만, 두 세대 전의 일이었고, 이후로는거의 정보만을 긁어모으는조직으로서 이용하고있었기에 내버려 두고있었다.

'그걸 사용할 줄이야.'

아마도 황제인 그의 눈을 피해 거짓 보고를 올리는이가 있었던 것 같았다. 카룰리아스 공작 본인이 아닌, 대리인을 두어조직을 운영했던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게 카룰리아스 공녀는아닐 것 같단 말이지.'

만약 그녀가 그 조직을 운영하는것이었다면 더 일찍 감옥에서 빠져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모든 치욕을 당한 후에 귀양 가던 길에 도망칠 수 있었다.

물론 논리적으로야 그때 탈출하는것이 더 수월하기는했지만 말이다….

그저 고통스러운 듯이 한숨을 쉬는알렉시스의 곁으로 시종들이 들락거렸다. 몇몇을 제외하고는황제가 약에 취해 정신이 없다고알고있을 것이다.

그래서 한두 놈쯤은 불경스러운 짓을 저지르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직 그런 자는없었다. 아무래도 곁에서 모시는자들이다 보니, 아네트에게 들켰다가는잔혹하게 죽임을 당할까 싶어서 그러는것 같았다.

'심심한데.'

눈을 감은 채로 데구루루 눈을 굴리던 알렉시스는문득 익숙한 냄새를 맡고는공포를 느꼈다. 논리적인 공포는아니었다. 그러나 숲에서 겪었던 끔찍한 기억이 그를 순간적으로 두려움에 빠지게 했다.

알렉시스는그 사실에 수치심을 느꼈다.

'빌어먹을 새끼들!'

제 계획에 알렉시스를 이용하려는자들이 그의 사정 따위를 생각하며 작전을 펼칠 리가 없었다. 알렉시스는방 밖에서

'불이야!'

라고소리치는목소리를 듣고속으로 이를 갈았다. 어떤 놈인지 잡히기만 하라지!

***

로제타는본궁에서 빠져나와 휘르센 백작 일가가 머무는별궁으로 향하고있었다. 셀리나가 자주 얼굴 좀 보자며 사람을 보내서였다. 엔디미온의 사정하는편지까지 같이 온 것을 봐서는무언가의 문제로 셀리나가 골을 내고있는것이 분명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황궁 내에서 소란을 피워서는안 되기에, 로제타는걸음을 서두르고있었다.

작전을 짠 것은 미카엘이었지만, 여러모로 신경 쓰이는사항이 많았다. 그가 영리하다고는해도 모든 상황을 다 파악할 수 없는만큼 변수가 있을 것이다.

본궁과 별궁을 연결하는회랑으로 나와 정원을 가로지르려는찰나 병사들이 다급히 움직이는것이 보였다. 로제타는무슨 일인가 싶어시녀를 시켜 병사 하나를 붙잡게 했다.

"무슨 일입니까? 이분은 아덴 공작부인이십니다."

시녀가 로제타의 신분을 밝히며 병사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병사는다급한 얼굴로 말했다.

"폐, 폐하가 계신 곳에 불이 났다고합니다! 지금은 급하니…."

놀란 시녀가 병사를 놓아주었다. 병사는급한 와중에도 로제타에게 고개를 숙이고는황제의 거처를 향해 달려갔다.

'불이라고?'

로제타는낯을 찌푸렸다. 사냥대회에서 그를 덮쳤던 마법 또한 화염 계열이었으니, 불에 타는냄새만 맡아도 그는두려움을 느낄 터였다. 천성이 대범한 이이니, 이 정도로 무너지지 않을 것임은 당연했으나, 불을 사용한 것 자체에 분노를 느꼈다.

당장 황제가 있는곳으로 달려가고싶었으나, 지금 이 자리를 지키는것도 중요했다. 로제타는마음을 진정시키며 사랑하는이를 생각했다.

"저, 공작부인…? 위험하니 가셔서는안 됩니다. 지금쯤 황비 전하께 사람이 갔을 테고, 황비 전하께서 가셨다면 금방 끝날 것입니다."

불의 정령사인 아네트는계약한 정령들을 이용해 불을 일으키는것도 할 수 있지만, 반대로 불을 사그라들게 하는것도 가능했다. 정령왕인 자가 그 정도도 하지 못한다면, 모든 정령들이 그를 비웃을 것이다.

"그래, 그렇겠지."

로제타는떨어지지 않는걸음을 옮겨 별궁으로 향했다. 차갑게 굳은 그녀의 표정에 시녀들은 눈치를 보았다.

***

당당한 얼굴로 차를 마신 이는하나뿐이었다. 그러나 다음 공녀도 차를 마시기는했다. 찻잔에 담겨 있는차가 황비가 말한 그 차가 아닐까 봐 두려워했을 뿐이다.

그럼 나머지 한 사람은?

찻잔을 내려놓은 두 명의 공녀와 방 안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 마지막으로 황비가 그 공녀를 바라보았다.

"이그네시아 공녀."

황비의 말에 공녀는찻잔을 떨어트렸다. 쨍그랑! 하고바닥에 부딪힌 찻잔은 사람들의 생각과는달리 깨지지 않았다. 황실에 납품되는것이니만큼 최상급의 품질을 가지고있어서였다.

"괜찮습니다. 시녀들이 치울 테고…. 찻잔을 새로 가져올 테니, 그것으로 마시도록 해요."

벽 가까이에 서 있던 시녀들이 다가와 이그네시아 공녀의 치맛자락을 적신 찻물을 닦고, 찻잔을 치우기 시작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그녀들은 거의 1분도 안 되어서 자리를 치웠다. 시중드는시녀들이 다가와 다시 찻잔을 내려놓고차를 채우는것을 바라보며 아네트는우아한 얼굴로 말했다.

"들지요."

응접실의 벽 앞에 선 시녀들 중에는, 찻잔을 치울 때도 공녀들의 차 시중을 들 때도 움직이지 않는시녀가 있었지만,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공녀가 데리고온 시녀들도 그저 다른 업무가 맡겨져 있겠거니 했다.

황비가 직접 권하는차에 이그네시아 공녀는부들부들 떨리는손을 찻잔으로 뻗었다. 황비를 마주 보기가 두렵고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마실까? 마시지 말까.

어차피 이 배 속의 아이는원하던 아이가 아니었다. 그녀는아이 따위는원하지 않았다. 늪에 가라앉은 그 멍청한 작자도 아이를 원해서 그녀를 임신시킨 것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이그네시아 공녀는도저히 이 차를 마실 수 없었다. 아직은 태동도 느껴지지 않는단계였으나 저 차를 마시고벌어질 일이 두려웠다. 대외적으로 이 아이는황제의 아이였던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무엇이 말이죠? 찻잔을 떨어트린 정도로는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공작령이 있는공작 가문은, 오늘 온 세 명의 공녀 중에 둘뿐이었다. 아네트는이미 사람을 풀어소문의 공녀가 누구인지 알아보게 했으므로…. 그 공녀가 누군지 짐작하고있었다.

이들 세 명의 공녀를 모두 부른 것은 그들 모두 소문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나머지 두 공녀는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머지 한 사람을 쏘아볼 뿐이었다. 그 소문 때문에 사교계에 돈 소문을 생각하면, 꾸짖는것으로 끝내고싶지 않았다. 만약 그녀 배 속의 아이가 폐하의 자식이라는소문만 아니었다면 대놓고모멸감을 주었을 것이다.

'설마…. 아니겠지.'

'이 여자야? 사귀는남자가 있는줄은 알았지만.'

공녀들이 바라보는가운데 이그네시아 공녀는찻잔을 멀리 밀어냈다. 혹시라도 황비가 시녀들을 시켜 자신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차를 마시게 할까, 두려웠다.

"권하시는차를 마실 수 없어죄송하다는것입니다! 저, 저는…. 그 차를 마실 수 없습니다!"

이그네시아 공녀는왈칵 울음을 터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흡사 비련의 주인공처럼 응접실을 박차고나가려고했으나…, 아네트는단순히 공녀의 일탈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이 자리에 부른 것이 아니었다.

벽 앞에 서 있던 시종들이 재빨리 문 앞을 가로막은 것은 그래서였다.

"무, 무슨!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공녀."

아네트는제 앞에 놓였던 찻잔을 들어한 모금을 마시며 말했다.

"여기가 어디인지도 알고있겠지요?"

비스듬하게 몸을 기울인 아네트가 이그네시아 공녀가 앉아 있던 자리를 가리켰다.

"앉아요. 내가 더 물어볼 게 있으니."

이그네시아 공녀는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문 밖에서 소란스러운 기척이 느껴진 것은 그때였다.

"황비 전하! 큰일 났습니다."

문이 열리고도열한 기사들과 다급한 표정의 호위기사 한 명이 보였다. 아네트는호위기사를 알아보았다. 황제를 곁에서 모시는이였다.

"황궁에 불이 났습니다! 폐하를 모시는곳과 가깝습니다!!"

"폐하는어디 계시냐?"

"저희 호위기사들이 안전한 곳으로 모시고있습니다! 황비 전하께서도 빨리…."

이어지는말에 나머지 공녀들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그네시아 공녀는빠져나갈 기회만 살피듯 눈을 굴리고있었다.

"저 두 공녀들을 황실 밖으로 안내해라. 이그네시아 공녀는임신 중이라 하니, 적당히 데려가면 되겠지."

"네? 저, 전하, 저를 왜…."

공녀들은 눈치 빠르게도 제 시녀들과 같이황비에게 인사를 올리고 빠져나갔다. 아네트는 이미 다른 곳을보고 있었다. 벽 앞에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던 시녀였다.

"이리로."

시녀가 힐끗 이그네시아 공녀를 쳐다보고는 아네트 황비의 손을잡았다. 이그네시아 공녀는 그 평범한 얼굴이눈에익다는 생각을했다.

귀족들은, 특히나 고위 귀족들은 시녀나 시종을곁에두되 의식하지 않는 것이일반적이었다. 그들은 장식이나 가구처럼 늘 곁에있는 존재였으니까. 그래서 이제까지도 저 시녀가 일을하는지 마는지, 얼굴이어떻게 생겼는지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얼핏 보기에도 대단한 용모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저 사람은…. 저 사람이왜 여기에?'

무언가 이상한 상황이었다. 이그네시아는 자신이여기 와 있는 사이에황제를 확보하려는 움직임이있을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무시하고 황제의 거처로 달려갈 줄 알았던 황비는 시녀 하나를 곁에둔 채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황비가 떠나야 도망칠 수 있는데….'

이그네시아가 데려온 호위기사들은 고작 다섯이었지만, 데려온 시종과 시녀까지 합하면 총 열 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실상 시종이나 시녀인 체하는 기사였으므로, 아네트만 곁에없다면 여길 빠져나갈 수 있었을터였다.

"왜 그러지, 이그네시아 공녀? 낯빛이좋지 않은데."

"아, 아닙니다…."

시녀를 옆구리에끼다시피 제 곁으로 불러다 놓은 아네트가 불의 정령왕을부르자, 이그네시아의 얼굴은 더 어두워졌다.

어느새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황비의 기사들이안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까응접실 입구까지 달려와 소식을전한 호위기사도 태연한 얼굴이었다.

급히 황비를 데려가야 하는 것이아니었나? 공녀들과 그녀들의 사람들이복도 저편으로 사라진 이후로는 줄곧 저런 표정이었다.

참다못한 이그네시아 공녀가 입을열었다.

"폐, 폐하께 가 보셔야 하는 것이아닙니까?"

"아, 그래. 물론이지."

아네트는 시녀의 손을잡고는 응접실을빠져나갔다. 독수리 정도의 크기로 현신해 있는 불의 정령왕 또한 이그네시아에게 차가운 시선을던지고 아네트를 쫓았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은 이그네시아의 기사들도 느끼고 있는 듯했다. 황비의 기사들이그들을쏘아보고 있었으므로.

황비는 시녀와 같이유유히 응접실에서 멀어졌다. 그녀의 뒤를 따라 다른 시녀들까지도 그곳을빠져나갔다. 그들이충분히 멀어졌다 싶자, 기사들이일제히 칼을뽑아 들고 이그네시아 공녀를, 그녀의 기사들을겨누었다.

"황비 전하를 알현하는 장소에무기를 가져오다니! 그것만으로 반역이라는 것을알고 있을터! 무기를 버리고 순순히 투항하라!"

"무슨…!!"

'겉으로 보이는 무기'는 모두 입궁했을때황실의 병사들이맡아 두었다. 그러나 탈출할 때를 대비하여 몸에숨겨 둔 무기는 지니고 있는 상태였다.

이그네시아 공녀는 겁먹은 얼굴로 제 기사들을돌아보았다. 어떻게 좀 해 보라는 얼굴이었으나 기사들의 표정에는 낭패한 기색이실려 있었다.

'아, 안 돼!'

무언가 일이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

연기가 피어오르자 호위기사들이가장 먼저 할 일은 황제를 안전한 곳으로 모시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대처하는 매뉴얼은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 현 황제는 마음에들지 않는 신하가 있다면 없는 일도 만들어 내어 과로와 스트레스를 조장하는 이였다.

기사들은 신속하게 황제를 등에업고 침실을빠져나왔다.

알렉시스는 한순간 상처가 건드려졌으니 아픈 시늉을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으나, 몇 시간마다 진통제를 먹고 있다는 설정임을떠올렸다.

'사건이끝나면 진짜 아덴 공작부인에게 큰 상을내려야겠군.'

저주받은 체질에온몸이완전히 다 나았다는 것은 기적에가까운 것이아니라 진짜 기적이라고 할 만했다. 로제타가 미카엘과 결혼할 무렵에는 미카엘이왜 저렇게 빠지는 결혼을하나 한숨이앞섰지만, 지금 생각하니 미카엘이자신의 목숨을구한 것 같은 생각이들었다.

'나머지 소원두 개도 상당히 탐이나고 말이야.'

물론 미카엘을거쳐야 할 테니, 그 소원을받아 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소원권을가지고 있는 이가 곁에있다는 것만으로도 이점은 충분했다.

알렉시스가 이런저런 생각을하는 사이그 순간이왔다. 황제를 업은 기사를 둘러싸고 전진하던 호위기사들이일제히 칼을뽑아 들었다.

"뭐 하는 것이냐! 폐하를 안전한 곳으로 모시는 길이다! 당장 검을내리지 못할까!!"

호위기사 중 하나가 외치는 소리에알렉시스는 속으로 웃었다. 참으로 그럴듯한 말을술술 내뱉는다 싶었다.

"…폐하를 모시는 것은 저희가 할 것입니다. 폐하를 해한 반역자의 손아귀에서 폐하를 보호하기 위함이니, 이해해 주십시오."

"감히 무슨 망발을…. 폐하, 웃고 계시지만 마시고! 이제 내려오십시오!"

참으려 했지만 입꼬리가 씰룩씰룩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분명했다. 호위기사들의 수장인 지크가 벌컥 화를 내는 것에알렉시스는 킬킬거리며 웃었다.

"아니!"

호위기사들을둘러싸고 있는 기사들 중에…, 우두머리라 생각되는 자의 얼굴이희게 질리는 것이보였다. 알렉시스는 기사의 등에서 내려, 호위기사 중 하나가 정중하게 검을내미는 것을받아 들었다. 그리고 이빨로 손가락에끼워져 있던 마법 반지를 빼냈다.

"헉!"

"폐하!!"

감히 황제의 호위기사들에게 검을세웠던 일단의 무리에게서 신음이터져 나왔다. 저들의 입장은 모르나, 반응으로 보아 정말로 미카엘의 손아귀에서 황제를 구출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게 대마법사를 동생으로 두었을때의 이점이지."

그 귀한 반지를 퉤, 뱉어 버리고 알렉시스가 말했다. 떨어진 반지는 호위기사 중 하나가 투덜거리며 손수건으로 감싸 주머니에넣었다.

알렉시스는 유유히 검에검기를 불어넣으며 말했다.

"꿇어라, 반역자들아. 지금 투항한다면 네 가족들에게까지는 죄를 묻지 않을것이다."

어떻게 할 것이지? 하고 묻는 황제의 말에그들은 주춤 물러섰다.

***

흑태자는 유유한 걸음으로 정원을둘러보고 있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정원이었지만, 그가 바라는 것은 이정원이황폐해지는 것이었다.

황제가 죽고, 황비 또한 발광하다 목숨을잃으면 참 좋겠다 싶었다. 내전으로 엉망이된 나라에결국 황위에오른 미카엘 황자 또한,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으로 괴로워하다가 이나라를, 라스탄을망치기를 바랐다.

'그것을위해서는…, 이첫발을디뎌야 하지.'

공작부인을납치하는 일은 한 번 실패했었다. 그래서 흑태자는 자신이직접 나서기로 마음을먹었다.

하잘것없는 여자였지만, 그 여자의 역할만큼은 중요했기에. 자고로 졸이라 하더라도 킹이나 퀸이직접 나서서 없애야 할 때가 있지 않은가.

지금쯤 이그네시아 공작가의 기사들이황제의 납치를 시도하고 있을것이다. 황비가 다과회를 준비한 장소와 황제의 침실에는 거리가 있었다. 일단 층이다르기에, 정원을빙 돌아서 올라가는 것이가장 빠른 길이었다.

흑태자는 이그네시아 공작에게 그 경로에함정을놓겠다 약속했다. 황제를 의식불명 상태에이르게 한 것과 같은 마법이라고 그들을안심시켰다.

'그런 게 있다면 지난번 사냥터에서 사용했겠지.'

그 사냥대회에서 흑태자는 아네트와 황제를 둘 다 죽일 계획이었다. 아네트가 살아난 것은 그의 계획에없었다는 얘기다.

그날 동원했던 주문이가장 강력한 것이었으니…. 마법으로 놓은 덫으로는 아네트를 잡을수 없다는 것과 같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이그네시아 공작가와 그 일파들은 흑태자가 아네트를 죽여 줄 거라고 철석같이믿고 있었다.

'어리석은 놈들.'

아네트의 도움이없더라도 황실의 기사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암살 사건 이후로 황실의 기사들은 바짝 날을세우고 경계하고 있었다.

황제의 거처에서 불이났다는 소문만으로도 경계 태세에들어갔을것이다. 설사 그들이황제를 생포하는 데 성공했다 치더라도, 황제를 데리고 빠져나갈 수는 없다.

'그러나…. 이쪽은 얘기가 다르지.'

아덴 공작부인.

미카엘 황자가 귀히 여기고는 있다지만, 아직 미카엘 황자가 황위에오른다는 것이결정된 것도 아니었다. 이곳이아덴 공작저가 아니니 더더욱 그러했다.

심지어 황제의 거처에불이나고, 외부 병력이들이닥쳐 황제를 내놓으라 하고 있으니, 그녀에게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터였다.

정원을돌아보던 흑태자는 꽃 한 송이를 꺾어 향기를 맡고는 바닥에내던졌다. 그의 시선이닿은 곳에부하들이달려오고 있었다.

"전하, 확보했다고 합니다."

예상했던 보고에흑태자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는 얼굴에씌워진 가면을매만지고는 걸음을옮겼다.

"가자!"

***

정신을잃은 듯이보이는 로제타가 축 늘어져 있었다. 손이빠른 여기사가 로제타의 옷을벗기고 시녀의 옷으로 갈아입혔다. 그녀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단순히 여자가 여자 옷을더 잘 벗기고 입히리라는 판단에서였다.

흑태자의 부하들은 이미 황궁의 병사와 기사로 변장하고 있었다. 병사들 중 하나가 로제타를 등에업고 황궁의 관문을빠져나가는데도 저지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시녀가 연기를 마셔서 위중하다, 신관에게 보이라는 명령을받았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본궁 밖에는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마차의 좌석 아래 빈 공간에로제타를 태운 그들은 마차를 몰고 당당히 정문으로 빠져나갔다.

"위중한 자가 있소! 단장님의 명으로 신관을모셔 와야 하오!"

신전에도 마차가 있지만, 준비하는 데 시간이걸리고 느린 편이었다. 신전에서 신관이나 신녀를 모셔 올 때에는 마차를 보내는 것이일반적이었다.

황궁의 문지기들은 신분을확인하고 그들을보내 주었다.

들어올 때는 다섯 번이나 검문을받아야 했으나, 나갈 때는 두 번이전부였다. 그조차도 급하다고 하니 약식으로 넘어갔다.

마차는 황궁을빠져나가 다급히 수도의 대로를 달렸다. 신전은 수도 내부에있지 않고 외곽에있었다. 신전으로 간다는 핑계로 수도를 둘러싸고 있는 관문을통과하기도 좋았다.

'아네트 황비는 반역자들을벌하느라 아덴 공작부인이사라진 줄도 모를 것이다.'

그사이되도록 멀리 도망쳐야 했다.

미카엘도, 아네트도 아직은 무서운 상대였으므로.

'미카엘이이사실을안다면 피눈물을흘릴 테지.'

흑태자는 미카엘에게 악감정은 없었다. 악연이라고 한다면 그는 라스탄의 황자로 태어난 것이고, 자신은 그의 부모를 죽인 자하르 왕의 아들이라는 것뿐이었다.

자하르에게 있어 라스탄 제국은 덩치가 큰 거위와 같으니…, 범이거위를 잡아 죽이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싶었다.

'미카엘이결혼 후 보인 모습이연극이아니라면…. 이일로 크게 무너질 것이다.'

흑태자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길을서두르도록 지시를 내렸다.

알렉시스는 요며칠간 침대에서보낸 시간을 한풀이라도 하듯이 날뛰어댔다. 가차 없이 검을 휘둘러대는 황제의 서슬에, 이그네시아 공작가의 끄나풀들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무기를 버렸다.

남은 자들은 이 반란의 끝이 죽음뿐이라는 것을 예감한 자들뿐이었다. 그들은 이미 딸의 문제도 있고, 이번 일까지 더해져 목이 달아날 것이라 생각했다.

"저는, 큭! 억울합니다, 폐하!"

"저희는 폐하를 구하려고…. 으악!"

알렉시스는 검에 흐르는 핏물을 털어 내며 다음 적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런 말을 지껄이려거든, 내게 겨눈 검부터 거두거라!"

황제의 거처에서불이 났다는 소식에,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까지 들리자 황실을 지키는 수많은 기사들이 순식간에 들이닥쳤다.

반역자들이 수적인 우위를 점한 것은 10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들은 수많은 병사와 기사들에게 둘러싸이자 전의를 잃고 검을 떨어트렸다.

알렉시스는 빌렸던 검을 기사에게 돌려주고, 처음부터 투항했던 자를 찾았다. 그는 이그네시아 공작가에 붙기는 했으나 황제에 대한 충심마저 버린 자는 아니었다.

"나를 납치한 후에 어디로 데려갈 계획이었나?"

확인한 계획은 미카엘과황제가 추측한 것과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그네시아 공작령으로 황제를 모셔 가서, 그곳에서다른 귀족들과연합하여군사를 일으키겠다는 거였다. 이름하여반미카엘 일파를 조직하겠다는 거였다.

예상은 했다만,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치밀하지 못한 세부 계획에 알렉시스는 혀를 찼다.

"아네트는, 내 황비는 어떻게 할 작정이었지? 그녀가 나를 납치한 것을 두고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한 거냐?"

"그, 그것은…."

차마 이그네시아 공작에게 협력하는 자가 황비님을 죽여주기로 약속했다, 고는 말할 수 없어 눈을 피했다.

그는 힐끗 아네트 황비가 왔을 만한 길목을 돌아보았으나 영 잠잠했다. 지금쯤 소식이 오고도 남았을 터인데, 너무 조용한 것이다.

'설마 황제 폐하께서무사한 것을 보고 아네트 황비를 내버려 두고 도망친 것인가?'

황비가 죽었다면, 이그네시아 공녀가 자식도 가졌겠다, 황제가 그들의 일을 모른 척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귀족들 몇몇이 목을 빼고 그쪽을 쳐다보는 것에 알렉시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왜 자꾸 그쪽을 보는 거지?"

찜찜한 느낌에 알렉시스는 호위기사의 검을 뽑아 들어 아까의 귀족을 겨눴다.

"말해라!"

"그…."

주춤거리자 알렉시스는 주저 없이 그의 목을 베고 다음 귀족에게 검을 들이댔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귀족이 허둥지둥 입을 열었다.

"화, 황비님이 오시는 길목에, 지난번 사냥터에서와 같은 함정을 준비하겠다고…."

"뭐라?!"

알렉시스는 순간 당황했으나 이곳은 숲이 아닌 황궁이었다. 숲지기 몇몇을 속이거나 매수하는 것과황궁에 함정을 설치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으나, 자신이 당한 것이 있었으므로 알렉시스는 황비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보라 사람을 보냈다.

미카엘의 계획에 따라 움직이기로 했으므로, 아네트는 지금쯤 로제타와 같이 있어야만 했다.

***

마차는 숲을 지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의 한쪽으로 나아갔다. 온통 울퉁불퉁한 바위벽에도 속도를 줄이지 않더니그대로 벽을 통과하여안으로 들어갔다.

벽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은 환영이었고, 이 바위벽에는 터널이 뚫려 있었다. 바위 동굴을 통과해 밖으로 나오자 귀족의 은신처인 듯, 그럴듯한 저택 한 채가 세워져 있었다. 마차는 그 앞에서멈춰졌다.

마차에서내린 기사는 마차의 의자를 올려 그 안에 숨겨져 있던 로제타를 꺼냈다. 기절한 듯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으나 기사는 피식 웃었다.

"정신이 드신 것을 알고 있으니눈을 뜨셔도 좋습니다."

그 말에 기절한 체하는 것이 소용없다 느꼈는지, 로제타가 눈을 떴다. 로제타는 그 즉시 기사의 팔에서떨어져 물러섰다.

경계하는 눈초리로 주변을 돌아보는 것에, 모여있는 자들은 피식피식 웃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저항하시지만 않는다면 저희도 부인을 해치지 않을 것입니다."

기사가 여유로운 태도로 말하자 로제타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가 저택을 향하자 로제타도 주위의 눈치를 보며 그의 뒤를 쫓았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다소 방치된 듯한 느낌을 주는 낡은 저택이었지만, 안을 들여다보니오래 사용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곳에 가두어 둘 생각이었군.'

데리고 있다는 것만으로 이점이 있으니, 병사 서넛과기사 한둘을 붙여서감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중요한 인질이었으나 로제타가 자력으로 탈출할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할 수 있으니.

기사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몇몇 기사들이 호기심 어린 눈길로 이쪽을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꽤 단련된, 숙련된 자라는 것은 움직임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얼핏 용병 같은 풍모가 보였으나 저들은 분명 훈련을 받은 기사였다.

"이쪽으로."

계단으로 향하며 기사가 가볍게 턱짓했다. 무례한 취급이었으나 로제타는 가볍게 눈썹을 찌푸리는 것에만 그쳤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저들의 우두머리를 만나는 것이었다.

삐걱거리는 계단을 올라 안내된 곳은 앞에 문지기가 있는 방이었다. 기사가 로제타를 데리고 다가가자, 그 앞에 서있던 남자가 옆으로 비켜섰다.

기사가 문을 여니안에 침대 하나와 서랍장 하나가 놓인 단출한 침실이 나타났다.

로제타가 방으로 들어가자 문이 닫혔다. 밖에서걸어 잠그는 소리와, 제대로 지키고 있으라는 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로제타는 깊은 한숨을 쉬며 침대로 가서앉았다.

'언제 나타나는 거지?'

***

미리 방문할 것을 연락하고 허가를 받았기에 리리아스 왕국에서는 미카엘과그의 소환수를 환영해 주었다.

리리아스 왕국은 대대로 라스탄 제국과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리리아스의 왕녀가 라스탄의 고위 귀족과결혼하는 일도 적지 않아서분위기도 좋은 편이었다.

미카엘은 예의상 거절할 수 없어, 그들의 정찬을 제공받고 치유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분은 동쪽에 있는 해안가의 마을에 머무르고 계십니다. 필요로 하는 약재가 이틀 후에 배편으로 도착할 예정이기에, 그때까지는 머물러 계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까?"

그것은 다행한 일이었으나, 그런 사정이라면 이렇게 급하게 올 필요는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하긴. 황자님께서오늘 일이 벌어질 거라 예측하셨으니, 어느 쪽이든 내가 와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겠구나.'

그는 미카엘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미카엘이 아니었다. 미카엘의 지시를 받고 그의 모습으로 리리아스에 방문한 휘하의 마법사일 뿐이었다.

미카엘이 해야 할 역할.

유명한 치유술사인 라이트를 설득하고 그의 동향을 살피러 온 것은 맞지만, 궁극적인 역할은 미카엘인 척하는 것이었다.

'이분들이 미카엘 황자님을 만난 적 없으니망정이지….'

황궁 안에서미카엘 흉내를 내느라 얼굴에 쥐가 나는 줄 알았다. 왜 황자님은 공작부인만 곁에 계시지 않으면 표정이 딱 굳어서싸늘해지냔 말이다!

자주 곁에서모시는 분인지라, 흉내는 낼 수 있었지만 힘든 일이었다.

'잘 웃지도 못하고….'

덕분에 리리아스 왕국에서근사한 만찬을 대접받고는 있으나, 부담스러웠다. 절대 들킬 리는 없지만 들킬 때가 무서운 것이다.

'아아아~~~, 빨리 라스탄으로 돌아가고 싶어라!'

***

흑태자는 수도의 길목에서황실 기사단이 나오는 것을 보고 그대로 말머리를 돌렸다. 호기심에 시간을 끌었다가는 수도의 각 관문이 닫혀 꼼짝없이 갇힐 것이다.

'역시 오래 버티지 못하는군.'

관문부터 폐쇄하는 것이 아니라 이그네시아 공작가로 기사단을 보내는 것을 보면, 공작부인이 사라진 것은 모른다고 봐야 했다.

흑태자는 기사단의 선봉에 아네트 황비가 없는 것을 보고 혀를 찼다. 그 소란 중에 황제가 충격을 받아 죽어 주었으면 했건만, 아직은 목숨이 붙어 있는 모양이었다. 첩자에 따르면 눈도 뜨지 못한 채로 약에 취해 있다고 하더니, 명줄이 길었다.

아네트 황비가 기사단과같이 가는 것이 아니면 흥미가 없었다. 남편을 잃고 분노에 찬 황비가 이그네시아 공작가를 불태워 없애는 것을 보고 싶었으니까.

'아덴 공작부인은 어떤 여자일까….'

황실 무도회에서본 로제타는 평범한 인상이었다. 그럭저럭 봐 주지 못할 얼굴은 아니었으나 그의 기준에서결코 미인은 아니었다.

흑태자는 로제타가 평범했기에 오히려 미카엘이 거짓으로 결혼하는 게 아니라고 여겼다. 미끼로 쓸 여자라면 그 격에 맞는 좀 더 화려한 여자를 선택했을 테니까.

로제타 휘르센은 이자벨 카룰리아스에게 걸려 괴롭힘을 당한 것 외에는 특별할 것이 없는 여자였다.

'수수한 여자가 취향이었나?'

이전 약혼자를 떠올려 봤지만, 그녀는 미카엘이 원해서맺어진 게 아니니떠올리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여자는 당장은 죽일 수 없을 테지만, 결국은 죽이게 될 것이다. 어떻게 처리할까? 이자벨에게 자비를 베푸는 셈 치고 이자벨에게 넘겨줄까?

'안 될 일이지…. 이자벨은 내 대신에 미카엘 황자의 분노를 받을 역할인데.'

미카엘 황자는 아직 그의 존재를 몰라야만 했다. 아네트 황비가 죽고 라스탄 제국의 힘이 약해질 때까지, 미카엘이 그의 존재를 알면 곤란했다.

그의 모국인 자하르가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

자하르는 라스탄을 노리고 수십 년에 걸친 계획을 진행시켜 가고 있었다. 자하르의 왕은 주변 소국을 병합하여나라의 힘을 키우고 라스탄을 정복하여대륙을 통일한다는 원대한 야망을 품고 있었다.

그의 부친은 라스탄의 황제 부부를 죽이고도, 그 이상으로 일을 진행시키지 못해 자하르로 돌아왔지만, 그는 달랐다.

로제타를 미끼로 미카엘에게 아네트를 죽이게 할 작정이었다. 아직 숨통이 붙어 있다는 황제를 제 손으로 배신하게 만들고, 이그네시아 공작에게 명분을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아까 황비가 보낸 기사들이 이그네시아 공작가로 향하는 것을 봤지만, 공작가의 식솔들은 이미 거기에 없었다. 일을 벌이는 시점에서이미 수도를 빠져나가 이그네시아 공작가의 공작령으로 들어갔다.

이그네시아 공녀가 빠져나왔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미카엘을 협박한다면 그녀를 돌려보내는 것도 간단한 일이 될 터였다.

'미카엘 황자에게 그 여자가 그만큼 중요한 인질이어야 할 텐데…. 확인해 볼 겸, 손가락이라도 잘라서보내 볼까?'

손가락 정도야 신전으로 가면 다시 재생시켜 줄 수 있을 것이므로, 큰 상관 없을 것이다. 아덴 공작부인이 꽤나 겁먹고 비명을 질러대겠지만 필요한 절차였다.

'흐음…. 손가락을 자른 이후에는 날 보면 겁을 먹을 테니. 대화는 그 이전에 해야겠군.'

그 미카엘 황자가 사랑하는 여자이니 평범한 여자는 아닐 터였다.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특별한 재주가 있을지도 모르니 얘기는 해 봐야 했다.

위조한 신분패를보이고 수도의 관문을 빠져나간 흑태자는 은신처로 향했다. 그들은 수도를오가는 젊은 상인으로 위장하고 있었다.

수도를자주 드나들어도, 많은 호위를거느려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니 위장한 신분으로는 딱이었다.

숲을 지나 감춰진 동굴을 통과하여 은신처로 사용하고 있는 저택에 도착했다. 귀한 인질이기는 하나, 본디 이런 곳일수록 세간의 눈에 띄지 않는 법이었다.

"전하."

흑태자가 도착하자 기사들이 기쁜 듯이 마중을 나왔다. 이자벨은 실패했지만, 그의 주군은 늘 그러하듯 실패를모르는 이였다.

"물건은 방에 있나?"

"보기보다는 말귀를알아듣는 듯합니다."

"그래?"

어떤 의미에서는 재미없는 소식이었다. 흑태자는 말에서 내려 저택으로 향했다.

***

방 안에는 당연한 얘기겠지만 창문이 없었다. 지을 때부터 창이 달려 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덧문을 닫고 못질을 해 두어 창을 열지 못하게 만든 것이었다.

'설마 며칠씩 여기에 방치해 두는 건 아니겠지? 그래서는 실패한 셈인데.'

걱정되는 것도 많고, 이런 곳에서 며칠씩 썩고 있을 수는 없었다. 로제타는 지금이라도 황실로 돌아가고 싶었다.

달칵.

예고도 없이 문이 열렸으나 로제타는 놀라지 않았다. 문 앞에 누군가 다가와 감시역과 대화를하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기사는 방 안으로 돌아와 로제타를보았다. 로제타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그저 그를쳐다보고만 있었다.

"제 주인께서 공작부인을 만나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

듣던 중 반가운 말이었다. 로제타는 방문 앞에 선 기사와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들을 힐끗 바라보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납치되어 이곳으로 올 때와 마찬가지로, 결박되는 일은 없었다. 마차에 밀어 넣을 때는 야무지게 잘 기절시켰다는 자신이 있어선지, 아니면 시간이 촉박해서인지 없었고, 지금은 로제타가 소리를내도 도움을 줄 사람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로제타는 방 밖으로 나와 복도에 서 있는 자들을 바라보았다. 주인이 왔다고는 하지만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인지 날 선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다.

살피듯 복도에 선 기사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로제타는 앞선 자를따라갔다.

기사는 복도 끝에서 돌아 맞은편 복도의 입구에 자리한 방문 앞에 섰다. 그는 문을 두드린 후에 대답을 기다렸다.

"들어와라."

흑태자의 대답에 기사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흑태자는 창가에 서 있었다. 자신에게 배정된 방과는 달리 환한 햇살이 비쳐 드는 집무실을 보고 있노라니, 로제타는 배 속이 뒤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입가에 미소를띠고 로제타를바라보던 흑태자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이아손, 너 뭘 데리고 온 거냐!"

"네?! 어억…."

로제타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수십 개의 검은 칼날이 기사의 가슴을 꿰뚫었다. 검은 칼날에 관통된 기사는 피를쏟으며 절명했다. 흑태자는 이를갈며 풀어놓았던 장검으로 달려갔다.

"전하! 무슨 일입니…!"

검을 뽑아 들고 달려오던 기사들은 눈앞의 광경에 말을 잇지 못했다. 까만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갈색 눈의 평범한 용모를가진 여자가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다.

아담했던 키는 훤칠하게 커지고 새카맣던 머리카락이 짧아지고 밝아지며 찬란한 금빛 머리칼이 되었다. 여자를바라보던 기사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제 로제타의 모습이 아니게 된 미카엘이 서늘하게 웃어 보였다.

"직접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던가? 쥐새끼들."

돌아보며 웃는 미카엘의 안에서 폭발적인 마력이 느껴졌다. 로제타의 모습으로 변신해 있는 동안에는 이것을 숨기기 위해 꽤나 고생했다. 그의 등 뒤에 늘어트려져 있던 그림자가 팽창하며 주변을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불어났다.

"전하를보호하라!!"

손에 든 검에 마나를불어넣으며 앞선 기사가 소리쳤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기사들이 쇄도해 오고 있었다. 미카엘은 헛웃음을 흘렸다.

"전하?"

제 검을 움켜쥔 흑태자도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미카엘의 어둠은 2층 복도 전체를뒤덮을 듯 넓어지고 있었다.

"으아아악!"

"아악!"

"컥!"

수백, 수천 개의 검은 칼날이 바닥에서 솟구쳤다. 팔과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몸이 양단된 기사들이 복도에 쓰러졌다. 그들은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미카엘에게 검을 휘두르고 검기를날렸으나, 그의 옷자락 하나 베지 못한 채로 죽어 나갔다.

피 냄새가 복도에 진동했지만, 검은 어둠에 뒤덮여 핏자국도 보이지 않았다. 기사들의 시신 또한 금세 어둠에 뒤덮였다.

그러나…. 모든 기사들의 숨통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칼날이 아닌, 검은 촉수에 붙잡혀 생포된 자들도 있었다.

미카엘이 이 저택에 오면서부터 눈여겨본 자들이었다. '전하'라고 불린 자의 수족 중의 하나라고 추정되는, 행정 업무를봄 직한 자들.

황자로서 황궁에서 커 오며 관리들에게 익숙했기에, 기사에 사무직을 겸하고 있는 자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은 정보를얻기 위해 생포해야 했다. 그 서너 명의 기사는 제 몸을 타고 오는 수십 개의 촉수에도 검을 놓지 않으려 했으나, 휘감은 촉수에 힘이 더해졌다.

우드드드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울리며 처절한 비명이 복도를울렸다. 팔과 다리, 가슴과 어깨…. 어느 곳 하나 성하지 못한 채로 뼈가 부러진 자들이 정신을 잃었다. 당연히 그가 쥐고 있던 무기도 스르르 바닥으로 떨어졌다.

정신을 잃은 자들을 타고 어둠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갔다. 이내 어둠에 집어삼켜진 그들의 모습마저 사라지자 흑태자는 이를갈았다.

"이놈!! 비열하게 마법 뒤에 숨지 말고 나와 정정당당히 겨뤄라!"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자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미카엘이 픽 그를비웃으며 말했다. 흑태자 또한 한가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를붙잡으려는 수없이 많은 촉수를베어 넘기며 발악하고 있었다.

그 또한 소드마스터였으나, 대륙에 소드마스터가 그 하나뿐인 것도 아니고, 패트릭보다도 나은 실력도 아니었다. 로건보다는 강하지만 제럴드보다는 아래랄까?

"커헉!"

솟구친 검은 칼날이 흑태자의 허벅지를꿰뚫었다. 촉수를사용하기는 했으나 어차피 살려 줄 생각이 없었으니 곱게 다뤄 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는 감히 로제타를노리고, 알렉시스에게 죽음에 이를중상을 입힌 자였다.

심문을 위해 약간은 살려 둘 테지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맛보게 해 줄 작정이었다.

검은 칼날은 금방 사라졌으나 부상을 입은 흑태자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둔중해졌다. 그 몸을 노리고 이번에는 어깨가, 팔뚝이, 팔등과 반대쪽 허벅지가 차례로 꿰뚫렸다.

"끄으…. 헉, 으아아악!"

경련하는 몸에서 칼이 떨어지고, 촉수가 무너지는 그의 몸을 휘감아 들어 올렸다. 미카엘은 차가운 얼굴을 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출혈이 상당했으나, 당장 죽게 내버려 두는 것은 아까운 일이었다. 미카엘은 야릇한 미소를지으며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흑태자의 몸을 휘감은 촉수에서 붉은 불길이 일어났다.

"억! 끄아아아악!"

두 다리와 양팔, 가슴을 휘감은 촉수가 새빨갛게 물들며 흑태자의 몸을 태웠다. 인간의 살이 타들어 가는 끔찍한 냄새에 미카엘은 눈살을 찌푸렸다. 흑태자는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이 순간만큼은 아무생각도 할 수 없었다.

대륙을 정벌하겠다는 기개도, 라스탄을 삼키겠다는 욕망도, 그저 무지한 자의 오만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흐음…."

흑태자는 몰랐지만 방금의 그 마법으로 인해 출혈이 멎었다. 그러나 끔찍한 화상을 입은 몸에서 벌써 수포가 올라오고 있었다. 타들어 간 자리는 벌겋다 못해 까맣게 일그러지기까지 했으니, 흑태자가 느끼는 고통이란 엄청난 것이었다.

물론, 저 상태로 방치해도 죽기는 죽었다. 과다 출혈로 죽는 것이 더 빨라서 방법을 바꾼 것뿐이었다. 미카엘은 당장 흑태자를죽일 마음이 없기에 촉수의 불길을 거뒀다.

"그럼…. 그 역겨운 가면 뒤를확인해야겠군."

흑태자는 저항할 의지도 드러내지 못한 채로 식은땀만 흘리고 있었다. 가느다란 촉수 몇 개가 솟구쳐 올라 흑태자의 얼굴에서 가면을 벗겨 냈다.

'역시.'

"자하르의 로…, 드리고 왕자."

얼굴을 마주한 것은 두어 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언행이 묘하게 거슬렸기에 미카엘은 그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시신에 대해서는 걱정할 것 없을 거다. 네 머리통은 반드시 자하르의 왕에게 선물할 테니."

몸의 다른 부분은 뼛조각 하나 남지 않게 태워 버릴 생각이었다. 흑태자 로드리고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사납게 웃었다.

"부왕께서는, 죽은 아들에게는 관심도 없으실 거다."

"그건 널 죽인 뒤에 알아보도록 하지."

비웃음이 섞인 미카엘의 대꾸에 흑태자의 눈 속에 절박한 눈빛이 스쳤다. 그는 이를악물었다가 미카엘을 보았다. 미카엘이 단순히 그를고문하다가 죽이기 위해 시간을 끌고 있는지, 심문하기 위해 이러는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날 살려 두면…. 부왕과 거래할 수 있다."

그의 형인 알렉시스가 곧 죽을 거라 생각하고 있는 흑태자는 이 정도로는 자신을 살려 두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보다 더한 미끼가 필요했다.

"자하르를, 원하지 않나?"

"살기 위해 나라라도 팔겠다는 거냐?"

나라는 한번 무너져도 다시 세울 수 있지만, 자신의 목숨은 그렇지 못했다. 흑태자는 부왕이 실패한 자식에게 눈길도 주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알렉시, 스의 죽음을 원한 건…. 부, 부왕이셨다."

흑태자의 입에서 알렉시스의 이름이 나오자 그를휘감고 있던 촉수의 압력이 강해졌다. 흑태자는 통증을 참으며 말을 이어 갔다.

"나 정도가 아니라…. 자, 자하르를멸망…. 시키…. 려는, 것을…. 아, 안다…. 흡…."

몸을 옥죄어 오는 촉수에 흑태자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그는 죽음이 임박해 왔음을 깨닫고 안간힘을 썼다.

"부, 부모의 원…. 수를……. 커헉!"

기어이 갈비뼈가 부러져 나가는 느낌에 흑태자는 몸을 비틀었다. 공포에 발광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비웃음만 당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방금의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옥죄어 오던 촉수가 조금 느슨해졌다.

"방금 부모의 원수라고 했는가? 자하르가 배후에 있었다고?"

당시 자하르는 지금보다도 크기가 작았다. 지금의 크기가 된 것은 소국 하나를멸망시켜서이기도 했으나, 그 이전에 두 개의 나라를집어삼켜서이기도 했다.

변방의 국가도 아닌, 저 멀리 떨어진 나라이기에 자하르가 배후일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알렉시스만이 잠시 의심했을 뿐이다.

"쿨럭! 그래…."

자하르가 그 배후에 있었다면 흑태자만을 죽일 게 아니기는 했다. 자하르 왕을 죽이는 것은 물론 자하르까지도 지도상에서 지워 버려야만 했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나?"

"자하르를 보호하시는 모든 신들과 내 목숨을 걸고 맹세하겠다. 너희 부모의암살을 주도한 것은내 부친이자 자하르의왕인 일리야이시다."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에 온몸의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순간 분노가 치밀어 흑태자를 죽일 뻔했지만, 미카엘은냉정을 찾기로 했다.

"증거는?"

"증…. 증거라."

우습게도 흑태자는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 부왕이 그를 라스탄으로 보낼 때, 자부심을 가지라며 쥐여 준 것이었다.

라스탄의죽은황비가 가지고 있던 반지였다. 마차 전복 사고를 꾀한 암살자들이 황비의죽음을 증명할 물건으로 보내왔던 물건.

일리야가 반드시 그것을 가져오라 명했기에, 역으로 사고로 위장할 수 없게 만들었던 물건이기도 했다. 죽은이의손에서 쉽사리 반지가 빠지지 않아 손가락을 잘라야 했으니까.

죽은황비의손가락은그 자리에 던져 놓았으나 반지는 왕에게 전달되었다. 그녀가 결혼을 하면서 친정에서 받아 온 반지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증거는…. 있다!"

흑태자는 느릿하게 손을 움직여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냈다. 항시 지니고 다녔던 것은언젠가는 쓸모가 있겠다는 생각과 라스탄 황실을 조롱하는 의미에서였다.

움직이지 않는 미카엘의모습에 흑태자는 초조해졌다. 유품을 보고 분노하여 그 자리에서 자신을 죽일 수도 있는 것이다.

'저건….'

흑태자의손아귀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작은반지에 미카엘의얼굴이 일그러졌다. 너무 어릴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기에, 미카엘은그들의얼굴을 초상화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초상화마다 어머니가 끼고 계셨던 반지를 기억하고 있다. 외할아버지로부터 받은반지이며, 암살자들이 훔쳐 간 반지였다.

작은별이 양각되어 있는 백금 반지.

절대 잊을 수도, 잊어서도 안 되는 반지의형태에 미카엘의몸이 움직였다.

저것은저런 더러운 자의손아귀에 있어서는 안 되었다. 살인자들의손에 들어간 어머니의유품에 미카엘은끝없이 분노하며 흑태자에게 달려들었다.

"네놈들이!!!"

"으아아악!"

검은기운에 감싸인 미카엘의손이 흑태자의손을 으스러트렸다. 그는 반지를 되찾으며 나머지 손으로 흑태자의목을 틀어쥐었다.

"감히 네놈들 따위가! 윽…."

스치는 것만으로도 저주의효력이 미쳤을 것이다. 이번에는 미카엘이 꽤 가깝게 다가왔기에 깊숙이 찌를 수 있었다.

손가락도 안 되는 길이의날카롭고 작은단도였다. 상처는 결코 얕다고는 할 수 없지만, 치유 마법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미카엘에게는 별거 아닌 상처여야 했다. 그러나….

"흐…."

미카엘이 구사하는, 저택을 온통 뒤덮고 있던 검은마법이 풀렸다. 흑태자 또한 촉수가 사라지자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으윽…."

흑태자는 중상을 입은데다가 마지막 힘을 짜내 일격을 가한 거였다. 그는 이미 두 다리로 설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미카엘은옆구리에서 피를 흘리며 찔린 자리를 노려보았다. 손잡이 부분을 보니 짐승의뼈 같은것이었다.

저주. 마신의저주가 깊고도 빠르게 제몸에 퍼지는 것이 느껴졌다.

'마신의일곱 저주는 알렉시스가 모두 부쉈을 텐데?'

마신이 한때 지상에 강림했다는 증거로 남긴 유물은알렉시스가 모두 없앴다. 그것은지상에 남아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로 인해 알렉시스와 그의자손은영원토록 저주를 받게 되었다. 그래서 알렉시스가 자식을 낳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라스탄 황실의핏줄은미카엘로도 이을 수 있으니까. 어릴 때 나쁜 마법사의실험 제물이 되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인 아네트도 이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알렉시스와의결혼을 받아들였다.

"마신의유물은…. 네 빌어먹을 형이 없앴지만, 모든 게 사라진 건 아니지. 기뻐해라. 그것이 마지막이자 가장 치명적인 무기다. 무려 마신의피에 담갔던 단도이니!"

흑태자는 그렇게 말하며 품속에서 스크롤을 꺼내 들었다. 저주가 벌써 상처를 통해 미카엘의온몸으로 퍼지고 있었지만, 마법을 사용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과거에 누군가 마신의유물을 사용하여 사악한 짓을 저질렀었다. 그것이 자하르의왕이었음을 진작 알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미카엘은이를 갈며 마력을 끌어모았다. 덕분에 저주가 더욱 빠르게 진행되었지만, 흑태자를 살려서 보낼 수는 없었다.

"죽어라! 라스탄의괴물!!!"

마법이 풀린 덕분에 생포하려 했던 기사들 중 누군가가 기어서라도 온 것이 분명했다. 그 또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는지, 마력탄을 집어 던졌다.

"큭!"

미카엘은방어막을 펼치며 동시에 흑태자를 향해 마력의창을 쏘아 보냈다. 그러나 아주 약간의틈이 있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반으로 찢어진 스크롤에 의해 흑태자의모습이 새하얀 빛이 되어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흑태자의기사들만 남았다.

"크아아아아악!"

분노한 미카엘은자신을 방해했던 기사를 마법으로 갈가리 찢어 버리고, 남은두어 명의기사들만 생포했다.

알렉시스의저주를 풀어 주기 위해, 미카엘은다방면의저주에 대해 연구했다. 이 저주 또한 풀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아니었다.

바로 그 방법이 문제였다.

***

미카엘이 보낸 것은검은날개 끝에 황금 깃이 달린 까마귀였다. 그 어떤 새보다도 빨리 날아간 소환수는 황실의기사들을 흑태자의근거지까지 안내했다.

"전하!"

당황한 황실의기사들이 미카엘을 황실로 이송하고, 살아남은흑태자의기사들은자살하지 못하게 구속시킨 후에 수도의감옥으로 압송했다.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돌아올 것을 확신하고 있던 알렉시스는 크게 놀랐다. 아네트와 로제타가 기겁한 것은당연한 이치였다.

미카엘은침대에 누운 채 치료술사들의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는 들이닥친 황제부부와 로제타의모습에 미안한 듯 표정을 흐리며, 흑태자의단검과 전대 황비의반지를 보여 주었다.

"이것은…!!"

"자하르의로드리고가 이번 사건의주범이었습니다. 제입으로 전대 황제폐하와 황비 전하의죽음이 제아버지가 저지른 짓이라 말하더군요."

알렉시스는 떨리는 손으로 미카엘에게서 반지를 받아 갔다. 꿈에서도 잊지 못했던 어머니의반지였다. 시신을 확인했을 때, 그 손에 손가락이 잘린 것을 보고 얼마나 분노에 떨었던가!

"자하르의왕 일리야가 범인이었단 말인가!"

"로드리고 왕자는 그 자리에서 죽이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고개 숙여 보이는 미카엘의모습에 알렉시스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무사히 돌아온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뒷일은나에게 맡겨라."

치유술사들의치료는 거의다 끝나 가고 있었다. 미카엘은그들을 방 밖으로 내보내고 알렉시스를 쳐다보았다.

"전쟁을 벌이실 생각이십니까?"

"아직은.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황제부부가 사망한 지 이십여 년이 흘렀다. 그 아들들은그 죽음을 가슴에 품고 있지만, 귀족과 백성들에게는 기억 저편의먼 일일 것이다.

명분은있으되, 어려운 전쟁이 될 것이었다. 라스탄이 대륙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는 강대국임에도 그러했다. 두 개의나라를 건너 자하르를 치는 것은쉽지 않은일이었다.

"전쟁을 치르지 않아도…. 자하르를 멸망시키고, 자하르 왕을 궤멸시킬방법은있습니다. 형님께서는 충분히 그러하실 수 있는 분이란 걸알고 있습니다."

"……."

"자하르 왕과 그 아들은…. 터무니없는 것을 욕심내는 자들입니다. 저들에게…. 어떤, 것이 더……. 고통스러울지를 생각해 주십시오."

식은땀을 흘리는 미카엘의모습에 곁에 앉은로제타의얼굴에 수심이 어렸다. 옆구리를 칼에 찔렸다고 들었는데, 단순히 그것만이 아닌 것 같았다.

"으윽…."

"미카엘 님…. 여봐라!"

로제타가 고개를 돌려 치유술사를 다시 부르려는 것에 미카엘이 그녀의손을 잡았다. 미카엘의얼굴에는 괴로움이 가득했으나, 그것은상처나 저주의통증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부인께 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