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 황자에게 사로잡혔다-15화 (15/21)

제15장. 황실 사냥대회

아네트는 요즘 묘한 기류를 느끼고 있었다. 귀족들의 시선에서 무언가 불온한 기색이 느껴지는 탓이었다. 저들도 머리가 있고 두려움이 있으니 아네트나 황제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는 못할 터였다.

'또 무슨 문제지?'

스물일곱 개의 가문에서 스물일곱 명의 영애가 재판을받게 되었으니, 수도의 귀족들이 어수선한 것이야 당연했다. 그러나 오늘의 시선은 좀 다르게 느껴졌다.

소문의 대상이 그녀들이 아닌, 아네트 자신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설마 그 소문이 아직도 가라앉지않은 건가?'

불쾌한 소문에 대해서 들은 것은 열흘쯤 전의 일이었다. 공작가의 영애들 중 하나가 황제의 자식을가졌다는 얼토당토않은 얘기였다.

알렉시스는 여전히 그녀에게 열렬했고, 아네트와 함께 있는 시간 외에는 늘 국사로 바빴기에 바람은 생각지도 못했다. 더더군다나 알렉시스에게는 아이를 원치 않는 이유가 있었다. 그런 그가 다른 여인과 자식을보다니,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소문의 내용이 심상치 않았으니, 가만히 있을수는 없었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소문인지, 소문의 대상이 누구인지알아보거라.'

황제에 대한 소문은 늘 있어 왔다. 황제가 되어서 여러 여인을탐하지않고, 자식도 보지않는 것이 그토록 문제가 되는 일인 모양이었다.

알렉시스에게는 미카엘이라는 남동생이 있어 후계 문제에 대해서는 걱정이 없다 여겼다. 미카엘은 필요한 것 이상으로 유능한 이였으니까. 또한 알렉시스와의 사이가 좋기도 했다. 아네트도 알렉시스의 친동생이라기보다는 아들 같은 기분으로 미카엘을아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에는 그것이 부자연스럽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세상에 그보다 깨지기 쉬운 관계는 없다는 양 수시로 그 사이에 틈을만들려 애썼다.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되었던 알렉시스는 그럴수록 타인을믿지 못하게되었다. 그가 세상에서 신뢰하는 이는 딱 두 사람뿐이었다.

부인인 아네트와 동생인 미카엘.

특히나미카엘은 제 목숨을내어줘도 아깝지 않다고여길 만큼 아꼈다.

'헛소문에 불과한데 가라앉지 않는다는 것은…, 소문의 근거가 되는 누군가가 그 소문을퍼트리고있기 때문일 것이다.'

당연히 그 주인공은 알렉시스가 아니었다. 알렉시스는 미카엘과 로제타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난다면, 그 아이에게황위를 물려주는 게어떨까 하고생각하고있었으니까.

아네트는 그 소문이 짜증스럽다고생각했다. 귀족들은 자신들의 기준에서 아네트를 재단하고판단하고있었다.

만약 그 소문이 사실일 수 있으려면, 알렉시스에게약을먹여서 잠시 잠재운 후에 관계했다는 것이 된다. 아니라면 알렉시스가 그 사실을모를 수가 없으니까.

즉, 아네트의 남편을강간했다는 얘기인데….

'내가 내 남편에게그런 짓을한 여자를 살려 둘 거라 생각하나?'

백보 양보해서 그 아이를 낳게한다 해도 그 집안과 여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다. 귀족들의 예상과는 달리 그 공녀를 후궁으로 들이게두지도, 알렉시스를 떠날 생각도 없는 것이다.

아네트는 쯧, 하고혀를 차고는 성큼성큼 걸었다. 그녀는 오늘의 사냥대회에 그저 귀부인 자격으로 참석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늘 황제의 곁에서 나란히 사냥을즐겼다.

"황비."

마찬가지로 승마복을차려입은 알렉시스가 아네트를 발견하고는 씩 웃었다. 그 눈빛이며 미소는 그가 처음 아네트에게사랑을고백했을당시와 크게달라지지 않았다. 본디 자유로운 영혼을지닌 그녀가 황비가 되어 이 나라에 정착한 것도 그의 사랑 때문이었다.

만약 황제의 마음이 변했다면 아네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황비 자리를 던져 버린 후에 알렉시스를 떠났을것이다.

"준비되셨습니까, 폐하?"

"나야 늘 준비되어 있지."

황제와 황비는 각자 준비된 말에 올라탔다. 해마다 열리는 사냥대회였다. 미카엘 또한 빠지지 않고참석하던 대회였으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공작가의 성에서 발생한 안타까운 사건에 대해서는 황제도 보고를 받은 바 있었다. 미카엘은 사고수습을위해 사냥대회에 불참했다. 공작부인인 로제타또한 마찬가지였다.

"미카엘 녀석이 오지 않은 것이 아쉽군. 결혼하고나서의 첫 사냥대회이니, 부인에게멋진 모습을보일 기회였을텐데 말이야."

역시 이자벨 카룰리아스를 죽였어야 했다는 말은 삼켰다. 이곳에는 보는 눈이며, 엿듣고있는 귀가 많으니.

"지금쯤 부인의 곁에서 잘 위로해 주고있을테지요."

제법 근사한 무도회를 열어서 아덴 공작가의 격에 맞는다는 평가를 들은 로제타였다.

아네트는 로제타가 연 첫 무도회가 그런 방식으로 망쳐진 것이 안타깝게느껴졌다. 심지어 그 와중에 납치까지 당하였으니, 많은 충격을받았을터였다.

황제에 가까운 자리란 그렇게나위험했다. 아네트는 새삼 그 사실을되새기며 눈으로 알렉시스의 차림새를 훑었다.

"…폐하, 아덴 공작이 선물한 물건은 지니고계신 거겠지요?"

"아무렴."

한 손으로 말을몰던 알렉시스가 옷소매를 올려 손목을보여 주었다. 목걸이는 쉬이 잃어버릴 수가 있다면서 미카엘은 반지 아니면 팔찌 형태의 마도구를 선물해 주었다.

비슷한 형태의 마도구가 아네트에게도 있었다. 그녀도 늘 미카엘이 선물해 준 것을지니고다녔다.

알렉시스가 즉위한 이후 암살 위협은 거의 사라졌지만, 선대 황제 부부를 암살한 자들을밝혀내지 못했기에 방심할 수 없었다. 알렉시스가 미카엘과 아네트를 제외한 누구도 믿지 못하는 것도 그래서였다.

사냥은 늘 그렇듯 수월하고즐거웠다. 미카엘이 빠진 것이 아쉬웠지만, 황제 부부는 마음 놓고이 행사를 즐겼다.

이 행사의 이면에는 귀족들의 마음을규합하고, 각 가문의 귀족들이 어떤 파벌을형성하고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었지만, 사냥을하는 동안에는 그런 것까지는 생각지 못하는 것이다.

사냥의 점수는 사냥감의 위험도에 따라 달랐다.

늑대나코요테 따위는 2점, 마물은 기본적으로 3점이지만, 그 위험도가 높은 마물의 경우 5점이나6점을받기도 했다.

황제는 활시위를 당겨 겨누었다가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뿔을발견하고활을내려놓았다.

"또 사슴인가?"

"여긴 황실의 사냥터에 가까우니까요."

아네트가 황제와 나란히 말을걷게하며 답했다. 두 사람이 맹수나마물을제외하고는 사냥하지 않아서인지, 황실의 사냥터에는 초식동물이 넘쳐났다.

두 사람은 수행원들을이끌고더 안쪽까지 나아갔다. 마물은 사람은 물론 초식동물까지 해하고있으니, 근처에 있을지도 몰랐다.

숲에서 길잡이를 두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사냥대회라고는 해도 결국 황제를 기쁘게해야 하는 것이니, 숲을제공한 가문은 황제를 사냥감이 많은 지역으로 안내하고는 했다.

【아네트!!】

묵직하면서도 어딘가 화가 난 듯한 음성은 그녀의 계약자인 불의 정령왕이었다.

【아네트, 이 근방은 무언가 이상하다! 피해라!】

항시 그녀의 몸에 깃들어 있던 정령왕이 이상을느낀 듯 아네트에게소리쳤다. 아네트는 반사적으로 황제가 있는 방향을돌아보았다. 나란히 말을달리던 그들이었으나, 장애물을피해 말을움직이다 보니 다소 거리가 있게되었다.

"폐하! 이곳은 위험합니다! 빨리…."

순간 검붉은 화염이 터져 나왔다. 아네트의 몸에 깃들어 있던 정령왕이 밖으로 튀어나오며 그 화염을막아 냈으나, 정령왕의 영역 바깥에 있던 자들은 순식간에 타들어 갔다.

"알렉스!!!"

용암과도 같은 마법의 불꽃에 휩싸인 황제의 모습에 아네트는 비명을질렀다. 그녀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악몽이 실현되고있었다.

***

로제타를 끌어안은 채로 느긋하게침대에 누워 있던 미카엘이 벌떡 몸을일으켰다. 창백해지는 그의 안색에 로제타는 당황했다.

"미카엘 님?"

"이 무슨…."

미카엘은 자신이 얼마나강한지 알았다. 자신이 만들어 내고있는 마도구에 어느 정도 강력한 주문이 담길 수 있는지도.

그는 늘 아끼는 두 사람에게몸을보호하는 마도구를 선물하고있었다. 주변에 알려지면 모양만 같은 쓰레기와 바꿔치기 당할 수 있기에, 주기적으로 선물했다.

그 마도구 중 하나가 부서지는 느낌을받았다. 그 말은 알렉시스나아네트 중 누군가가 중상을입거나사망했다는 의미였다.

"지금 당장, 황궁에 가야 합니다! 폐하나황비님께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미카엘의 다급한 외침에 로제타는 허둥지둥 일어났다. 그런 일이 생긴 이후였으니 미카엘은 로제타를 놔두고떠나지 않을것이다. 같이 가야 했다.

***

숲에는 커다란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발동한 마법에 의해 모든 것이 녹아 버린 탓이었다. 이 숲을제공했던 후작가와 그 후계자까지 휘말려 같이 녹아 버렸으니, 책임자를 문초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 구덩이 속에서 살아남은 이는 아네트 황비와 그녀와 가까이 있던 두 사람뿐이었다. 불의 정령왕이 제 힘을남김없이 쏟아부었음에도 그 정도가 한계였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마법이 이 일대를 덮쳤던 것이다.

마법진을깔고여러 날 마력을부어 덫을설치했을거라는 황실마법사의 설명이 있었으나아네트는 귓등으로 듣고있었다.

황제는, 알렉시스는 살아남았다. 미카엘이 선물한 마도구 덕분이었다.

그러나무사하지 못했다.

미카엘과 같은 아름다운 황금 머리카락은 타버렸으며 몸 대부분에 엄청난 화상을입었다. 황실소속의 치유술사들이 붙어서 힘을쏟아붓고있기에, 간신히 목숨을유지하고있는 수준이었다.

아네트는 핏발이 선 눈으로 눈물을흘리며 이를 갈고있었다.

누가 범인이든 간에, 살려 두지 않을것이다. 저이가 입은 고통 이상의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하겠다고다짐하고맹세했다.

그러나사랑하는 이의 상처 앞에 아네트는 상처 입은 짐승과도 같았다. 그녀는 미카엘 황자를 불러오라며 미친 사람처럼 고함을질렀다.

미카엘이라면, 그라면 이 사람을살릴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이 들었던 것이다. 아주 얕은 희망이었지만….

【아네트….】

"듣기 싫어."

치유술사는 최악의 상황을대비하여야 한다는 말을했다가 아네트에게죽을뻔했다. 황실의 마법사들도 같은 견해였다. 이 정도 부상을입은 채로는 미카엘 황자가 와도, 교단의 법황이 와도 무리일 거라고했다.

알렉시스에게는 저주가 걸려 있었다. 그래서 치유술사의 능력만이 간신히 통할 뿐, 강력한 치유 마법이나성력을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방법이, 방법이 있을거야. 알렉시스를 이대로 보낼 수는…."

눈물을흘리며 중얼거리던 아네트의 입에서 다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언젠가 죽는 날이 있을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빨리, 이런 방식은 아니었다.

【그런 말을하려는 게아니다! 그 여자, 미카엘과 결혼했다던 그 여자가 필요하다!】

'로제타가 왜?'

소매로 눈물을닦으며 아네트는 알렉시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 약에 취해서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였다. 고통이 극심할 것이니 그렇게해야 한다고황실의원이 간언해서 아네트가 허락한 상태였다.

【인간의 마법과 신의 성력은 저주로 인해 튕겨질 테지만, 그 여자가 계약한 정령이라면 황제를 살릴 수 있을거다!】

"로제…!"

순간 입 밖으로 낼 뻔했던 아네트는 황급히 입을다물었다. 그리고머릿속으로 정령왕과의 대화를 이어 나갔다.

'로제타가 정령사라고?'

【아니. 정령과 계약은 맺었지만, 그런 계약은 아닐 것이다. 그 여자가 계약한 것은 아무래도 사물의 정령 같은데…. 꽤 강력한 정령이었다.】

정령은 크게자연계에 존재하는 물, 불, 바람과 같은 정령과 사물에 깃드는 정령으로 나뉘어졌다. 로제타가 계약을맺은 정령은 사물에 깃드는 정령이었다.

인간사에 끼어들어 좋게도 나쁘게도 만드는 존재.

이런 정령이야말로 인간계에 해를 끼치는 경우가 있어 정령왕이나대마법사, 아주 흔치 않게는 신에게벌을받아 유폐되고는 했다.

불의 정령왕은 평소에 아네트의 몸에 깃들어 잠들어 있었지만, 다른 정령의 기운을느끼고주위를 살펴보았었다.

그리고로제타의 뺨에 그려져 있는 다섯 개의 꽃봉오리를 알아본 것이다.

정령이나계약한 본인이 아니면 살펴볼 수 없는 흔적이라 아무도 모르는 듯하여 굳이 참견하지 않았었다.

【그 여자는 사물의 정령과 계약해서 소원 다섯 개를 받은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봤을때 소원 다섯 개가 그대로 있었으니, 별일이 없다면 그 소원을다 쓰지 않았을거다! 그러니….】

로제타에게별일이 없었다고는 말하기 어려웠다. 공작저에 마물이 침입하고그녀 자신은 납치되었으니까, 그러나소원이 남아 있을수도 있었다.

아네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에서 대기하고있던 시녀와 시종이 아네트와 눈이 마주치고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미카엘 황자는?! 로제타와 같이 온다고했나?"

"같이 오신다고하셨습니다! 오늘 중으로 온다고하셨으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다시 연락을…!!"

다급한 아네트의 입에서 비명 같은 고함이 터져 나올 찰나예고도 없이 방문이 열렸다. 미카엘과 로제타가 뛰어 들어오는 것을보고아네트는 다시 눈물이 흐르는 것을느꼈다.

"미카엘!!"

"스승…. 황비전하."

달려온 미카엘의 시선이 침대에 눕혀져 있는 알렉시스의 모습에 닿았다. 그 참혹한 모습에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화, 황비전하를 뵙습니다."

미카엘을 쫓아 달린 로제타가 황급히 인사를 전했다. 아네트는 눈물을 흘리며 로제타에게로 달려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어?'

당황한 것은 로제타뿐만이 아니었다. 미카엘도 놀라서 아네트를 보았다. 아네트 안에 깃들어 있는 불꽃의 정령왕이 쾌재를 불렀다.

【다행이다! 소원이 아직 네 개나 남았어! 그녀에게 부탁해!】

불과 몇 초 전만 해도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던 아네트였기에, 문을 박차고 들어온 동아줄이 그저 반갑기만 했다.

"어흐, 흐으어어! 소원, 끕…."

미카엘은 아네트의 입에서 그 한 단어를 듣는 것만으로도 사정을 충분히 알아차렸다. 그렇잖아도 정령 문제로 아네트의 도움을 받으려던 참이었다. 미카엘은 준비해 온 마도구를 꺼내 알렉시스의 곁에 늘어놓고 마법약을 꺼냈다.

그는 저주 때문에 치유술사의 치유력말고는 받지 못하는 알렉시스 때문에, 치유술사의 치유력을 응축시킨 마법약을 만들고 있었다.

황궁에서 많이 만들어 놓았지만, 그날의 일로 거의 다소진해 버린 듯했다.

미카엘은 일단 두 병 정도를 알렉시스의 입에 흘려 넣었다. 이미 사용한 약이기에 황궁 의원 중 누구도 미카엘을 저지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도구를 작동시키자 마도구가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며 작동했다.

"…폐하는 당분간은 괜찮으실 거다. 잠시 방 밖에서 대기하고 있거라."

미카엘의 지시에 치유술사와 의원들이 조심스럽게 방 밖으로 나갔다. 아네트는 얼른 눈물을 닦으며 시녀와 시종, 호위기사들도 나가게 했다.

방 안에 알렉시스와 아네트, 미카엘과 로제타만 남자 아네트의 몸속에 깃들어 있던 불의 정령왕이 튀어나왔다.

불꽃으로 만든 날개 달린 작은 말 형상을 한 존재에 로제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인간이여. 너와 계약한 정령은 어찌 된 것이냐? 왜 네 곁에 없는 것이지?】

"어. 저한테 나쁜 짓을 하고 도망쳐서요?"

로제타의 대답에 정령왕과 아네트는 당황한 것 같았다.

미카엘은 그런 한 사람과 정령왕에게 이제까지의 일을 설명해 주었다. 로제타가 빙의자라는 사실만 빼고, 정령이 그녀에게 잘못을 저질러 소원 다섯 개를 들어주기로 했지만, 제대로 소원을 들어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계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려 한단 말인가! 계약의 맹세를 해 놓고!!】

그것은 꽤 큰 죄인 듯 정령왕은 노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미카엘은 알렉시스의 모습을 수시로 살피며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건방진 것! 정령왕인 나조차 계약의 맹세를 어겼던 적이 없거늘…. 하나 계약의 맹세를 했다면 계약자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데. 어찌 그것이 가능한 거지? 혹 그놈이 이름을 알려 주지 않았는가?】

"알려 줬지만…. 그것만으로는 소원을 들어주게 할 수 없어서."

【소원을 빌 때에 사용해야 하는 말이 있다! 정령계의 비석에는, 모든 물질계 정령의 문구가 새겨져 있지! 내가 정령계로 돌아가 그 문구를 알아올 테니, 그 정령의 이름을 말해다오! 내가 제대로 소원을 비는 방법을 찾아와 주마!】

정령이 절대 아무에게도 말해서는 안 된다고 했던 이름이었다. 그러나 로제타는 이미 미카엘에게 가르쳐 주었던 데다가, 제게 해만 끼치는 존재인지라 거리낌이 없었다.

"요하네스, 예요."

【요하네스?】

놀란 듯한 정령왕의 반응에 아네트는 불안해졌다.

"아는 정령이야?"

【수천 년 전에 인간들에게 해를 끼쳤다가 어느 마법사에게 붙잡힌 정령이라 들었다. 그때 벌을 받아서 인간을 해칠 수 없게 되고, 거짓말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들었는데…. 허, 그놈이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단 말인가!】

요하네스는 고대 신전에서 사용되던 성배에 깃든 정령이었다. 전쟁이 터져 그 성배에는 피와 포도주가 담겼고, 결국에는 성배가 부서져 쉴 곳을 잃고 인간계에 해를 끼쳐 왔다.

이에 화가 난 고대의 마법사가 정령을 붙잡아 혼을 내 주고 '요하네스'라는 이름을 주어 금제를 걸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아무튼 나는 이 길로 정령계로 돌아가 비석을 확인하고 오겠다!】

불의 정령왕은 그렇게 말하고는 사라졌다. 마음이 급해 정령왕부터 보내기는 했으나 아네트는 가장 중요한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로, 로제타…. 네가 그 네 가지 소원으로 무엇을 이루려는 것인지는 모르나, 내 힘이 닿는 대로 내가 전부 들어주마. 그러니…."

다시 새어 나오는 눈물에 아네트는 울음을 삼켰다.

"네 소원 하나를 폐하를 살리는 데 써 주지 않겠니? 내가 이렇게 빌겠다."

금방이라도 무릎을 꿇을 듯한 태세에 로제타는 기겁했다.

"그, 그럴게요! 무릎 꿇지 마세요!"

소원이 네 개가 아니라 하나만 남았더라도 들어주었을 것이다. 남도 아니고 미카엘의 형이 아니던가!

"당연한 일인 걸요. 미카엘 님의 형님이시잖아요."

"그래…."

아네트는 안도의 눈물을 흘리며 로제타의 손을 잡았다. 이렇게 잡고 있지 않으면 기회가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미카엘은 생각이 많은 얼굴로 그런 그녀들을 바라보다가 알렉시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정령왕이 방법을 가지고 돌아온다고 해도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 일의 원흉을 잡아야 했다.

***

미카엘이 알렉시스의 상태를 살피는 동안, 황제의 업무는 아네트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그동안 황비로서 일하던 것이 있으니 늘어난 업무량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알렉시스는 모든 일을 아네트에게 이야기했고, 진행되고 있던 국책 사업 대부분을 아네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폐하의 암살 미수에 아덴 공작이 관여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가!"

"하나…. 이 제국 내에 그 정도의 마법을 사용하실 수 있는 분은 아덴 공작 각하뿐이십니다!"

이전이었다면 미카엘이 황실의 유일한 핏줄이었기에 감히 그런 의심을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공작가의 한 영애가 황제의 자식을 품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 공작가에서는 이미 많은 가문을 포섭한 상태였다. 특히나 로제타와 관련된 일로 재판을 앞두고 있는 스물일곱 개의 가문은 앞다투어 그의 힘이 되어 주었다.

옥좌에 앉아 대신들의 말을 듣고 있던 아네트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제야 판이 어떻게 짜였는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가 정리되었다.

'그런 거였군!'

암살자들의 계획이 성공했다면 로제타는 납치되고, 황제와 아네트까지도 그 마법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아마도 미카엘은 알렉시스와 아네트를 잃은 충격에 휘청이며, 미친 듯이 로제타를 찾아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놈들은 그 틈을 타서 미카엘을 황제 시해범으로 몰고, 황위를 차지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미 27개의 가문이 미카엘의 적이었고, 그들의 인맥을 생각한다면 더 많은 가문이 그에게 등을 돌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공작부인 납치는 실패했지만, 황실 사냥대회는 예정대로 개최되었기에, 그들은 일을 벌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같은 기회가 다시 오리라는 보장이 없었으므로.

사냥대회가 개최되는 숲은 매년 아네트나 알렉시스의 기분에 따라 결정되었다. 이번의 사냥 장소는 아네트가 선택한 것이었다.

"감히…."

아네트는 바르르 떨며 옥좌에서 일어났다.

미카엘이 황위에 관심이 없는 것은 그녀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알렉시스가 세상에 자신의 편은 미카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시절, 미카엘 또한 형이 세상의 전부였다.

알렉시스의 저주를 풀어 주려 마법을 배우고 대마법사의 칭호까지 얻은 미카엘이었다.

"경들은 폐하의 죽음을 점치는가! 그래서 이리도 오만 방자하고 어리석게 구는가!!"

아네트의 몸에서 새어 나오는 마력과 살기에 대신들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는 라스탄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이기에 앞서 대륙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최고의 정령사였다. 그것도 가장 강력하다일컬어지는 불의 정령왕과 계약한 이였다.

당장이라도 세 치 혀를 놀린 대신의 머리통을 부숴 버릴 듯한 기개에 그들은 황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덴 공작은 지금의 폐하를 살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자들 중 하나이며, 폐하께서 가장 아끼는 동생이다! 감히 아덴 공작을 모함하여 폐하를 위태롭게 하려는 것인가!!!"

"그, 그렇지 않사옵니다! 불측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아덴 공작을 폐하의 곁에 두어, 또다시 폐하를 위태롭게…."

쾅!

옥좌 앞의 계단을 내려온 아네트가 발을 구르자 대리석이 쩍 하고 갈렸다. 황비전하가 전장에서 군림하셨던 때가 있다는 얘기는 들었으나, 그 실력을 보는 것은 처음인지라 신하들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아니면, 자네들이 폐하를 살릴 방법을 가져와 보도록 해라. 방법이 있는가?"

알렉시스의 저주에 대한 것은 대외적으로 비밀이었으나, 알렉시스에게 치유 마법이나 신성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대신들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단지 그것이 황제의 특이 체질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교단의 법황께 급히 연락을 드리는 편이…."

"법황이 폐하를 치료할 수 있었다면 내가 이미 그분을 찾아갔을 것이다!"

필요하다면 납치해서라도 데리고 왔을 아네트였다. 아네트는 무시무시한 눈길로 신하들을 쏘아보았다. 저들이 무엇을 믿고 저리도 방자하게 구는지 눈치채었으니, 이쪽에서도 반격을 시작할 때였다.

"폐하를 살릴 방법을 가져와라! 아니라면 공작에 대한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을 것이다!"

나가 보라는 황비의 축객령에 대신들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

공작부인에 대한 납치 실패는 계산 가능한 범위였다. 그러나 황비인 아네트의 생존은 그들의 계산 범위 밖이었다. 황제와 황비는 반드시 죽었어야만 했다. 황제야 중상을 입은 데다가 그 특이 체질 때문에 살아남지 못할 터지만, 황비가 문제였다.

황비가 미카엘의 편을 들기 시작한다면, 미카엘을 반역자로 몰기 어려워졌다.

귀족들 또한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배 속의 아이보다는 이미 황위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던 미카엘 편을 들 것이 뻔했다.

'이래서야….'

고대했던 내전까지는 가지도 않은 채로 제국이 잠시 혼란해질 뿐이다. 흑태자는 혀를 차며 벽에 걸린 지도를 바라보았다.

라스탄 제국.

이 제국은 지나치게 컸다. 주변 세력을 잡아먹고 자라난 나라는 이미 주변국으로서는 상대도 되지 않을 만큼 덩치를 키운 것이다.

그는 이 제국이 균열되기를 바랐다. 수십 개의 세력으로 나뉘고 찢기어 제국이라는 이름을 버리게 되기를 바랐다.

자신이 삼킬 수 있도록.

지금 그가 가진 나라로는이 제국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전쟁을 벌일 수는있을 테지만, 끝이 보이는전쟁이었다. 그가 이 라스탄 제국을 가지기 위해서는좀 더 잘게 부서져야 했다.

내란은 라스탄을 집어삼키기 위한 첫 번째 단계였을 뿐이다.

'바로여기에서 일이 걸리다니.'

황제인 알렉시스나 그 남동생인 미카엘, 황비인 아네트는반드시 죽여야 하는적이었다. 그들이야말로제국을 지탱하고 있는세 개의 기둥이었다. 그중 비중이 가장 크다할 수 있는알렉시스는곧 죽을 예정이었지만, 나머지 둘이 문제였다.

'하긴. 알렉시스 놈이야 쉬울 거라 생각했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이 둘이었지.'

정치적으로야 알렉시스가 가장 골치 아픈 상대였지만, 물리적으로는이 둘이었다. 그렇기에아네트의 생존 사실이 알려지자, 그 암살에대한 의혹을 아네트에게 심어 주려고 했다.

아네트로하여금 미카엘을 상대하게 하려고.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아네트는미카엘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약간의 의심 정도는심어 놓을 수 있는상황일 텐데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심지어는황제가 회복될 거라고 믿는듯한 태도였다.

'…이상한 일이지.'

치유술사들의 치료 정도로는살아남지 못할 상처였다. 현 상태를 유지해 나가다가 조금씩 상태가 악화되어 결국 죽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아네트로하여금 미카엘이 황제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믿게 하는수밖에없었다. 아네트와 미카엘. 이 두 사람이 힘을 합친다면 나머지 세력들로는상대가 되지 않으므로.

***

현재 로제타는철통같은 보호를 받고 있었다. 미카엘이 알렉시스를 치료하고 있어서 로제타에게 많이 신경을 써 줄 수 없어서도 그랬지만, 유일한 치료 방법이기에더욱 그랬다. 로제타가 잘못되어 버리면 황제를 살릴 방법도 없는것이다.

'생각 같아서는내가 끼고 돌아다니고 싶지만….'

아네트는애정 가득한 눈으로로제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도 일이 바쁘니….'

원래 황비로서 처리하던 업무에알렉시스의 일, 거기다암살자에대한 수색에들어가고 있으니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랐다. 그나마 미카엘이 곁에와 주어 이 정도로버틸 수 있었던 것이지, 아니면 힘들었을 것이다.

하다못해 로제타라는희망이 없었더라면, 마음이 약해져 대신들의 말에놀아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황비 전하."

"불러만 놓고 제대로신경 써 주지 못해서 미안해."

아네트가 정신없이 국사를 보고 있는동안, 로제타가 황궁의 내부 문제를 조금씩 살피고 있다는것은 알고 있었다. 그저 공작부인의 지위만으로는어려운 일이었지만, 미카엘의 부인이었기에그것이 가능했다.

"그렇지 않아요. 그보다업무가 과중하시다고 들었는데…."

"폐하가 회복하실 때까지는당분간은 이래야겠지. 그보다…, 재판에대한 것 때문인데…."

가주를 잃은 다섯 개 가문은 슬픔에젖어 있기는했으나, 그 가문까지 포함한 스물일곱 개의 가문…, 아니 가주인 라로쉬 백작이 갇혀 있는라로쉬 백작가는예외였다. 스물여섯 개 가문이 등을 돌린 것만은 사실이었다.

아네트는그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노력할 마음은 없었다. 흑과 백이 분명한 일에고작 이 한 고비를 넘겠다고 황실이 굽힐 수는없는노릇이었다.

상황을 봐 가며 헤쳐 나가야 할 터이지만, 정치적으로로제타의 그 소송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재판이 미뤄지거나 약식으로처리되는일이 생길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겠나? 따로중하게 처벌하고 싶은 가문이 있다면 지금 말해도 좋아."

"황비 전하의 뜻대로하십시오. 지금은 폐하의 일이 우선이니까요."

"그래…."

로제타는그리 말했지만, 설사 아네트가 그들을 풀어 주려 한다해도 미카엘이 그들을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었다. 아네트의 뜻도 같았다.

마치 기회를 노렸다는듯이 황실에반기를 든 자들을 내버려 둘 수는없는법이었다.

아네트는그들을 풀어 주지 않을 거라는말은 하지 않았다. 아직 황실 사냥대회의 정보를 빼돌린 첩자를 잡아내지 못한 탓이었다. 누군가 엿듣고 있을지도 모르는어전에서 속내를 드러낼 수는없었다.

"미카엘은, 그 애는어쩌고 있지? 식사는…."

"드시게 하고 있습니다. 황비님은 제대로식사하고 계시는거겠지요?"

"하고 있어. 먹어야 버티지."

미카엘은 알렉시스 곁에붙어서 마법약을 만들고 마도구를 살피는일에몰두하고 있었다. 또한 치유술사들의 힘을 빼내어 정제하고 있으나, 황제의 상태가 너무 빨리 나빠졌다. 불의 정령왕이 한시바삐 돌아와 주지 않으면 곤란할 정도였다.

아네트는계속 황제의 곁에붙어 있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알렉시스의 빈자리를 채워야 했다. 알렉시스를 해친 자들에게 틈을 만들어 주고 싶지 않았다.

"…닷새 뒤에황궁으로사람을 초대할 거야. 만약의 경우라는것이 있으니, 미카엘 곁에붙어서 떨어지지 말도록 해."

"알겠습니다, 전하."

로제타는그들이 누구인지는묻지 않았다. 아네트가 알아서 할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아네트는원작 내에서 유일하게 미카엘과 비견될 수 있는실력자였다.

"그런데 정령왕님께서는…."

조심스럽게 묻자 아네트는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자신도 알고 싶은 일이었다.

"아직이야. 돌아오면 너부터 찾을 테니까…."

"네."

로제타는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모든 정령의 이름과 그들을 금제할 수 있는'언어'가 적혀 있는석판은 생명의 나무 깊숙한 곳에자리 잡고 있었다. 세상을 어지럽게 만드는정령이 있었기에, 신께서 벌로그와 같은 비석을 세웠다고 전해졌다.

생명의 나무 깊숙한 곳에는근원의 빛이 자리하고 있기에, 일반적인 정령은 가까이 다가가지조차 못했다.

갈 수 있는것은 그와 같은 정령왕이나 신에게 선택받은 이뿐이었다.

【이것도 아니고….】

문제는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정령이 세상에존재하는지라, 석판의 숫자도 어마어마하게 많다는것이었다.

석판에다가갈 수 있는이는정령왕뿐인데, 대부분의 정령왕은 다른 세계에가 있거나 자신의 거처에서 쉬고 있었다. 거기다불의 정령왕이 도움을 요청한다하더라도, 이런 하잘것없는일은 도우려 들지 않았다.

【젠장! 여기도 없고….】

불의 정령왕은 비석을 발굽으로깨부수고 싶다는얼굴로다음비석으로날아갔다. 이곳은 오색빛깔의 안개에뒤덮인 신비한 공간이었지만, 며칠째 비석의 글자만 읽고 있는불의 정령왕으로서는다없애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대체 어디에있는거냐!!】

분노에찬 정령왕의 외침에나무 동굴이 쩌르릉 하고 울렸지만, 그뿐이었다. 불의 정령은 투덜거리면서 다음석판의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

그들의 계획으로는황비까지 죽었어야 했다. 황비가 죽으면 공녀는스스로황제의 자식을 가졌다고 공표하고 황궁으로들어갈 작정이었다.

아이를 가졌다주장하는이가 일반 귀족가의 평범한 영애였다면 비웃음만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공작가의 여식이었다.

황제와는팔촌 간이었고, 황위 계승권은 좀 멀다지만 9순위 안에는들었다. 거기다그녀는황제가 주었다주장할 징표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 징표는가짜였고, 그 징표를 증명해 줄 사람도 매수해 놓은 자에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여겼다.

미카엘 황자를 황제 암살의 배후로지목할 예정이었으니까. 공작부인이 납치당한 뒤라면, 명석한 미카엘 황자도 대응할 방법을 찾지도 못한 채로, 부인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사이 제 목에사형수의 올가미가 씌워질 줄도 모르고.

그러나 공작부인의 납치는실패했으며, 황비 또한 살아나고 말았다. 황제는오늘내일하고 있다지만,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상황이었다.

'이제 어쩐다?'

계획과는달리 그녀와 그녀의 집안은 여전히 소문으로만 머물고 있었다. 고위 귀족들을 암암리에자신의 편으로끌어들이려고는하고 있으나, 생각보다쉽지 않았다. 스물여섯 개의 가문을 끌어들였다고는해도 그들 중 고위 귀족 가문은 몇 되지 않았다.

제국의 유서 깊은 귀족가는백여 개의 가문에달했다. 그들 대부분은 전 지역에고루 자리 잡고 있으며, 수도에모여 있는가문만도 육십여 개에달했다.

그중 스물여섯 가문이라고 하면 적은 것 같지만…, 대부분이 중립을 지키고 있는만큼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숫자였다. 거기다귀족 가문의 혈연과 지연은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그래서 그들 또한 아직 자신만만했으나…. 초대했다.

황비인 아네트가.

모든 공작가의 영애들을 황궁으로불러들인 것이다.

소문에따르면 황제의 자식을 가진 이는공녀라 했으니, 공녀들을 모아다가 임신했는지 여부를 확인하면 될 일이었다.

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게 하면 될 일이기는하나…, 상대는공작가의 여식이었다. 아무리 황비라 해도 함부로그것을 명령하기는어려웠다.

그러나 방법은 만들면 될 일이었다. 황비가 평범한 귀부인과 다름은 고위 귀족들이 더 잘 알고 있기에, 그들은 걱정이 태산 같았다.

"어쩐다? 널 보낼 수도 없고…. 안 보낼 수도 없고!"

안절부절못하며 서성이는공작과 같이 네리아도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아이를 가졌지만 아직은 초기라 겉으로티도 나지 않았다. 맞은편에앉은 소공작이 기회라 여겼는지 눈을 빛내며 말을 꺼냈다.

"차라리 보내시는것이 어떻겠습니까, 아버지. 가도, 가지 않아도 네리아의 존재는결국 드러날 것입니다. 차라리 황궁으로들어가 제 권리를 주장하면…."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해라! 황비가 네리아를 살려 두겠느냐?! 황제의 목숨이 위태로운 틈을 타, 네리아를 해칠 것이다!"

고함 소리에네리아는어깨를 움츠렸다.

공작은 네리아의 배 속에있는아기가 황제의 자식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네리아가 가짜 증표와 가면을 쓴 채로그의 침실을 드나든 남자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 남자는단순히 황제와 같은 머리색과 눈 색깔을 가진 흑태자의 측근이었지만, 마법으로변장한 모습 때문에공작은 철석같이 믿게 되었다.

네리아는죄책감을 느꼈으나 애써 당당하게 행동했다.

그녀는자신이 하는짓이 반역이라는것을 알았지만, 이미 궁지에몰렸기에어쩔 수 없었다. 가문이며 가족들을 속이는것쯤은, 사실이 들통났을 때 아버지나 오빠들에게 당할 수모를 생각하니 쉽게 저지를 수 있었다.

사실을 모르는네리아의 아버지와 오빠들은 네리아의 자식이 태어나면 섭정이 될 수 있을 거라 믿고 기뻐하고 있었다.

황제는곧 죽을 테고, 미카엘 황자가 그 황제를 암살한 것이라 믿고 있으니 그러했다. 흑태자가 만들어 준 '미카엘 황자가 황제를 죽였다는증거'를 진짜라 철석같이 믿고 있는것이다.

"어찌 되었든 황비를 우리 편으로만들어야 합니다. 저희들이 아무리 힘을 모은다한들 미카엘 황자에게는대항할 수 없다는것을 알고 계시잖습니까?"

오라버니들과 아버지가 상의하는 말을 들으며 네리아는 몸을 움츠렸다. 배 속의 아기가 여전히 족쇄처럼 느껴졌다.

'이 일은 들키지 않을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황비와 미카엘 황자는 죽을 것이고…. 흑태자님이 도와주신다면 적당히 넘길 수 있다.'

네리아의 배 속에 있는 아이는 그녀의 전 남자친구의 자식이었다. 그 배신자 놈은 네리아가 임신한 것을 알게 되자 차 버렸다.

그것만으로도 충격이었는데, 그놈은 그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임신 사실이 약점이랍시고, 대리인을 통해 네리아를 협박, 돈을 뜯어내다가 들통난 것이다.

이래서 몰락 귀족 따위사귀지 않는 거였는데.

정체를 알았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아이는 생겨 버린 뒤였고…. 복수할 기회를 엿보았던 네리아는 흑태자가 내민 손을 덜컥 잡아 버리고 말았다.

네리아는 사실을 고했을 때에 아버지와 형제들이 어떻게 나올지를 알고 있었다. 자신의 삶이 어느 정도 비참해질지도. 어차피 큰오라버니의 출세를 위해 팔아 치워지듯 결혼하게 될 운명이었기도 했다.

그래서 흑태자의 커다란 음모를 듣고 난 뒤에도 가담했다. 거절하면 자신과 배 속의 아이만 죽을 거라는 사실을 눈치채서이기도 했다.

그 결과 네리아를 속였던 전 애인과 협박꾼은 죽어서 늪에 가라앉았고, 그녀는 흑태자의 뜻에 따라 움직이게 되었다.

모든 일이 제대로 끝난다면…. 그녀는 라스탄 왕가의 혈통을 가진 어머니로 인정받아서, 흑태자의 가신으로 살게 될 것이다. 아마도 길고 무서운 싸움 끝에 간신히 얻을 지위일 테지만, 네리아는 거기에 희망을 품고 있었다.

'제발…. 마지막까지 들키지 않기를.'

네리아는 배를 쓰다듬으며 간절히 빌었다.

***

휘르센 백작 부부는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고 생각했다.

황궁에서 궁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사는 것까지는 좋았다. 황실 기사들의 보호를 받는 것도, 친구나 친척들을 황궁으로 초대하는 것까지도 정말 행복했다. 이런 삶이 계속되어도 좋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폐하께서 폭발에 휘말렸다는 말인가?!"

황실의 사돈이라는 이유로 황실 사냥대회까지 참석했던 그들은 무서운 소식을 듣고 황실로 돌아가게 되었다. 황실은 정신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유능한 치유술사들이 불려 왔고, 궁인들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오고 가고 있었다.

그들이 거하고 있는 궁전은 귀빈을 모시는 궁이라 본궁에서는 다소 떨어져 있었으나, 황궁 안의 분위기를 읽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황제께서 위중한 상황인지라 모든 무도회와 연회, 다과회까지도 중지되었다. 어수선한 상황에 황실 기사들을 끌고 외출하기도 눈치가 보여 휘르센 백작 부부는 바깥으로 나가는 횟수도 최소한도로 줄였다.

물론 그래도 궁전이 충분히 넓어서 여전히 좋기는 했다. 그보다신경이 쓰이는 것은 주변의 소문이었다.

"그, 그런 소문이 있다는 말인가?"

사업차 황궁 밖으로 나갔던 엔디미온은 미카엘이 황제 암살미수 사건의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에 기겁했다.

'그것은 반역이 아닌가! 대체 왜….'

최근 귀족들 사이에 암암리로 황제의 혼외 자식 얘기가 돌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그것을 사실로 생각하기에는 황제 부부 사이는 매우 좋았다.

다른 귀족들이 넌지시 물어볼 때도 엔디미온은 화를 벌컥 내며 그런 일은 없다고 부인했던 것이다. 폐하는 그러실 분이 아니라며….

그러나 미카엘 황자가 황제를 암살하려 했다면, 그 소문이 사실이란 말이 아닌가!

'정말 폐하께 숨겨 놓은 애인이 있나? 그래서 미카엘 황자가 황제를 암살하려 한 것이라면….'

엔디미온은 상상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미카엘 황자와 같이 있는 로제타는 어떻게 도망이라도 칠지 모르지만, 자신들 부부는 꼼짝없이 반역으로 죽게 생겼다싶었다. 어찌어찌 미카엘 황자의 반역이 성공한다쳐도, 그 과정에서 자신들은 죽을 것 같았다.

'이를 어쩐다?'

생각 같아서는 셀리나를 빼내어 냉큼 도망치고 싶었지만, 지금도 황실 기사들이 그를 경호하기 위해 따라온 참이었다. 저들을 따돌리고 도망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다죽어 가는 심정으로 황궁으로 돌아왔는데…. 셀리나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미카엘 황자가 황궁에 있다는 것이다!

'아니, 언제?'

거기다장인 장모인 그들에게는 왜 알리지 않았단 말인가?

심지어 로제타도 같이 왔다고 하는데, 두 사람 다본궁의 황제 곁에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미카엘 황자야 대마법사고, 황제가 워낙 위중하시니 어쩔 수 없다고는 쳐도, 로제타는 인사 한 번 않는 것이 퍽 섭섭했다.

'아니지. 미카엘 황자가 제 발로 왔다면….'

역시 그 소문은 헛소문이다싶어 엔디미온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황제를 사위로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으나, 그 과정에서 새우 등 터지는 것은 사양하고 싶은 일이었다.

"죄인들이 빨리 잡혀야 여기서 나갈 텐데…."

불평하는 엔디미온과는 달리 셀리나는 여기가 뭐가 나쁘냐면서 핀잔을 주었다. 평생 황궁에 살 일이 어디 있겠냐면서. 속 편한 그녀의 말에 엔디미온은 소문을 전해 주려다가 말았다. 괜히 그녀까지 걱정시킬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답답한 마음에 엔디미온은 괜한 제 가슴만 두드렸다.

***

황비의 초청장에 대한 보고를 듣고 흑태자는 혀를 찼다. 확실히 각 공작가의 공녀들을 불러 확인하는 것이 소문을 불식시킬 가장 빠른 방법이기는 했다.

역시 황제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최소한 황제라도 확보했어야 했다. 황제를 확보했다면 정통성을 주장하기 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황제는 손에 넣지 못했고, 가장 문제가 될 아네트 역시 살아남았다. 아네트와 반목시키려 했던 미카엘은 황제 곁에 붙어서 그를 살리려 노력하고 있는 중이었다.

'남은 패는….'

로제타 아덴.

아무 힘도 없으면서 미카엘 황자를 휘어잡기에 좋은 패였다. 그랬기에 산 채로 확보하려고 했건만 알 수 없는 방해가 있었다.

이대로 일을 진행하기에는 너무 많은 부분이 어그러져 있었다. 벌인 일은 많았지만, 제국을 혼란스럽게만 했을 뿐, 귀족들은 아직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을 흔들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미카엘 황자가 황실 사냥대회의 암살을 준비했다는 증거는 힘주어 움켜쥐기만 해도 바스러질 가벼운 것이었다. 이미 승기를 잡고 있었다면, 권력이 곧 증거요, 증인이었으므로 미카엘 황자에게 뒤집어씌우기 수월했을 것이다.

'하나….'

이대로 손을 놓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그가 풀어놓은 말들은 꽤 멀리까지 왔다. 애초에 그의 나라와 연관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언제라도 발을 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를 좀 더 이 일에 관여할 수 있게 했다.

어차피 황제인 알렉시스는 죽을 테고, 황위는 미카엘에게 넘어갈 것이다.

이 상태로라면.

'미카엘을 무너트리고 싶은데….'

아네트는 알렉시스를 죽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녀라면 미카엘을 황제 자리에 올리고 라스탄을 떠날 것이다.

라스탄을 유지하는 세 개의 기둥 중의 두 개를 쓰러트린 셈이니…. 이미 많은 것을 이룬 셈이었지만, 흑태자는 좀 더 나아가고 싶었다.

이를테면 미카엘 황자에게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안긴다든가.

흑태자는 떠오른 계획에 미소를 지었다. 그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

***

로제타는 그의 등장이 극적인 것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무언가 벌어지고 있을 때, 요컨대마물이 침입했다든가 하는 때에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궁인들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리고 황제의 침실로 돌아왔을 때 그가 나타났다.

【인간이여!】

솔직히 그가 로제타보다는 아네트 황비에게 먼저 돌아올 거라 생각했기에, 그 만남은 뜻밖의 것이기는 했다. 불꽃의 말은 실제 말과 비슷한 크기로 돌아왔으므로, 황제의 침실에서 대기 중이던 호위기사들이 기겁했다.

"괜찮다. 황비 전하의 정령이다."

검을 뽑아 들려는 것을 만류하며 미카엘이 그렇게 말했다. 정령왕의 입에는 반투명한 어린아이 모습의 정령이 물려 있었다. 로제타는 바로 그를 알아보았다.

"너…."

【이, 이거 놔! 이거 놔!】

버둥거리며 몸부림치자 정령왕이 쯧, 하고 혀를 차며 더 단단히 무는 것 같았다. 보이는 것만큼 아픈지 요하네스는 으아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얼이 빠진 시종에게 미카엘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황비 전하를 모셔 와라."

"네!"

시종이 허둥지둥 방을 빠져나가고 미카엘이 서늘하게 웃으며 정령왕에게 다가갔다. 미카엘은 이미 정령왕이 요하네스를 잡아 오면 가둘 마도구를 준비해 둔 참이었다.

【안 돼에에에에에! 으악!】

미카엘은 일부러인 듯 새끼손가락만 한 유리병으로 요하네스를 빨아들였다. 은으로 된 마개가 유리병의 입구를 막자 요하네스의 고함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내가 너무 늦지 않게 온 거겠지?】

불의 정령왕은 알렉시스가 아네트에게 얼마나 중요한 자인지 알고 있었다. 미카엘은 유리병을 가볍게 흔들며 답했다.

"제때에 오셨습니다."

콰앙!

문이 벌컥 열리고 아네트가 뛰어 들어왔다. 아네트의 모습이 보이자 정령왕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몸을 축소시켰다. 아네트는 환하게 웃으며 방 안에 모인 자들에게 명령했다.

"다들 밖으로 나가라!"

***

【생각보다간단한 문구더군.

'요하네스야, 내 소원을 들어다오.'

하고 말한 이후에 소원을 빌면 될 것이다.】

정령왕은 팔랑팔랑 날아다니며 로제타에게 말해 주었다. 로제타는 근심스러운 듯이 미카엘의 손에 들린 유리병을 쳐다보았다.

"…요하네스가 제 말을 곡해해서 소원을 들어주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요?"

지금 표정으로 보건대충분히 앙심을 품은 것 같았다.

【괜찮다. 그런 것은 우스갯소리에서나 나오는 말이니. 소원은 소원 자체로 이루어지는 것일 뿐. 비석에 새겨진 계약의 말을 했음에도 그 소원을 거짓으로 이루어 주는 일 따위는 불가능하다.】

그 말에 로제타는 안도한 얼굴로 미카엘을 보았다. 미카엘은 진지한 얼굴로 로제타를 마주 보았다.

"준비됐습니까?"

"네. 요하네스를 놔주셔도 될 것 같아요."

로제타가 허락하자 미카엘은 유리병의 마개를 뽑았다. 요하네스는 푸른 연기로 변해 유리병에서 튀어나왔다.

【이거 뭐야! 너무 좁잖아!!!】

"요하네스야, 내 소원을 들어다오."

【뭐?!】

순간 로제타를 보는 요하네스의 얼굴이얼어붙었다. 저 유리병 안에서는 바깥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분명했다. 로제타는 알렉시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알렉시스 폐하를 다시 이전과 같이건강하게 만들어 줘."

【으악! 어떻게 안 거야?!!】

억울하다는 표정을 한 채로 요하네스의 몸이움직였다. 그 작은 몸뚱이가 홱 알렉시스를 향하더니 손가락에서 빛이뿜어져 나와 알렉시스의 몸을 뒤덮었다.

얇은 실내복을 입고 있는 알렉시스의 몸이순식간에 아물기 시작했다. 화상을 입어 일그러지고 진물이흐르던 피부에서 새살이돋아나고 화상의 흉터가 사라져 갔다. 몸에 담겨 있던 약 기운까지 정화시켜 주었는지 약에 취해 정신이없었던 황제가 눈을 깜박이는 것이보였다.

"아아!"

아네트는 감격한 얼굴로 알렉시스의 옷자락을 들춰 보았다. 알렉시스의 눈썹이며 머리카락도 다시 돋아나기는 했으나, 막 아문 참이라 길이가 매우 짧았다.

기쁨에 왈칵 눈물을 흘린 아네트가 조심스럽게 알렉시스를 보듬었다. 알렉시스는 푸른 눈동자를 깜박이며 아네트를, 다시 미카엘을 쳐다보았다.

"아네트…. 미카엘. 내게 무슨 일이생겼던 거지?"

"제가, 제가 다 설명해 드릴게요, 폐하!"

미카엘도 알렉시스를 살피고 싶었지만, 당장은 요하네스의 존재가 위협이라 여겨졌다. 요하네스는 로제타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고도 떠나지 못하고 불퉁한 얼굴로 그 자리에 있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로제타가 불의 정령왕에게 물었다. 정령왕은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네가 제대로 된 계약의 말을 했으니, 이제 네 나머지 소원을 다 들어줄 때까지 네 곁에 있어야 할 것이다.】

"엑."

【뭐야! 나도 너 싫거든?! 이렇게 된 거, 빨리빨리 나머지 소원 세 개도 다 빌라고!】

요하네스는 정신 사납게 로제타의 주변을 돌아다니며 소리쳤다. 미카엘은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더니 유리병을 내밀었다.

【앗?! 싫어어어어어어!】

화가 나서 방심하고 있었던 것이분명했다. 요하네스는 순식간에 아까의 유리병으로 빨려들어 갔다. 미카엘은 다시 마개로 단단히 밀봉하고는 작은 보석함에 집어넣고 열쇠로 그것을 잠가 버렸다.

【잘했다. 드디어 조용해졌군!】

불의 정령왕이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미카엘은 그 보석함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정령왕을 보았다.

"더 주의해야 할 점은 없습니까?"

【사람을 다치게 하는 소원을 빌면 안 된다는 것과 죽은 사람을 살리거나…. 아네트의 저 황제에게 걸린 저주를 푸는 것과 같은 소원은 불가능하다는 것뿐이다.】

"…안 되는 거군요."

슬쩍 그 소원을 빌어 볼까 했던 로제타는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정령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카엘은 보석함을 바라보며 말했다.

"위험한 정령이니 당분간은 황궁의 보물창고에 넣는 것이좋을 듯합니다만…. 로제타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저도 좋아요. 저나 다른 사람들에게 한 짓이있으니까요."

【말해 두지만, 저 녀석이내어 준 나머지 세 개의 소원 중에 마지막 한 가지는 녀석을 봉인하는 데에 써야 할 것이다. 너희들이말한 대로 위험한 녀석이니.】

"…로제타의 소원으로 영원히 황실의 종으로 살게 만들면 안 되는 것입니까?"

【현명한 자라면 녀석을 제대로 부릴 테지만, 그렇지 못한 자는 파멸하게 될 거다. 후손에게 그 위험성을 물려줄 필요는 없지.】

정령왕의 말에 로제타는 소원이두 개 남았음을 인식했다. 마지막 한 개는 요하네스로 하여금 영영 인간이사는 세계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는 데 사용할 생각이었다.

이러는 와중에도 아네트가 알렉시스에게 찰싹 달라붙어 이제까지의 일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귀족들 사이에서 돌던 공녀에 대한 소문을 말하자 알렉시스의 두 눈이짓궂게 빛나는 것 같았다.

"내가 쓰러져 있는 사이…. 그런 일이있었다는 말이지?"

"어떻게 하실지 결정하셨습니까?"

미카엘이알렉시스를 돌아보며 물었다. 알렉시스는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공작부인의 납치도, 내 암살도, 공녀에 관한 소문까지도…. 뒤에서 조종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아직 그자가 수면 위로 나오지 않았으니, 나오게 만들어야지."

그러며 알렉시스는 진지한 눈빛으로 미카엘을 보았다.

"네 도움이많이필요할 것 같다, 미카엘. 나를 도와주겠느냐?"

"제 대답은 아시잖습니까?"

회복한 형의 모습에 미카엘의 얼굴에 드디어 미소가 떠올랐다.

"영광입니다, 폐하."

***

성의 지하로 끌고 내려간 납치범의 일당들은 집요하게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은 고문받는 도중에 자살을 시도했고, 그들 중 셋은 그것에 성공하기까지 했다. 나머지 자들은 고문 기술자로부터 모진 심문을 받았다.

고문과 약물을 병행한 심문 끝에 그들은 입을 열었다. 기사들은 그들이공작부인을 수도 근교에 위치한 저택에 끌고 가려 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아덴 공작가의 제2기사단장과 제럴드가 급히 그곳으로 향했지만, 범인들은 모두 도망친 뒤였다. 그들은 소득 없는 수색을 마친 채로 미카엘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다.

통신용 수정구슬 너머로 보고를 듣는 미카엘의 표정은 그저 담담하기만했다. 어느 정도는 예상한 바인 듯했다.

"납치를 실행했던 자들은 어떻게 됐지? 그쪽에서는 연락이없었나?"

-…헌트 경께서 그들과 조우하여 격전을 벌이셨으나 생포는 불가능했고, 일부는 기사단의 손에, 나머지는 폭사했다고 합니다.

황제가 보내 준 기사단장의 성이헌트였다. 범인들이폭사했다고는 하나 황실기사들 중에 다친 이는 없는 듯했다.

미카엘은 패트릭이끼어 있었으면서 영 쓸모없다는 생각을 했다.

-바로 아덴 공작저로 돌아오겠다는 연통을 보내왔습니다만…. 어떻게 할까요? 공작님께서 황궁에 계시니 수도로 올라가라 해야 할까요?

"그게 좋겠지."

수도 근교의 저택에 로제타를 끌고 가려 했던 것 자체가 수상했다. 아마도 흑막은 지금 수도에 있는 것일 터….

'카룰리아스 후작가가 신경 쓰이는군.'

이자벨이인제 와서 가문으로 돌아갈까 싶었으나, 그녀가 부리는 자들은 결국 가문에서 보유하고 있던 사람들일 것이다. 아마도 카룰리아스가가 뒤에서 부리던 자들을 움직이는 것으로 보였다.

황제에 대한 암살 시도가 있던 이때에 수도 근처에 머물고 있었다니, 알렉시스나 아네트의 생각대로 그 둘이한통속일 거라는 생각이들었다.

'가짜 후계자를 내세워 어쩔 셈이었지?'

소문의 공녀가 설사 알렉시스의 진짜 자식을 가졌다고 해도, 미카엘을 누르고 황위에 오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지나치게 어리니까. 결국 그 모친이섭정을 해야 한다는 말인데…. 그 자체가 이미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이가 어리니 삼촌인 미카엘이즉위하는 것이옳다는 말이나올 것이다. 아무리 미카엘에게 황제 암살에 대한 누명을 씌운다 해도.

결국 대신들이양측으로 나뉘어 긴 소모전을 해야 할 터였다. 최악의 경우 내전으로 번질 가능성도 있다. 상대가 공작령을 가진 공작 가문이라면 그러했다.

그리고, 그렇게 긴 시간을 들인다 해도 결국 승기는 미카엘이잡게 될 것이다.

아네트의 도움 없이도 그러했다.

미카엘은 그 정도로 강했으니까. 굳이군대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도 반대파를 척살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미카엘은 이러한 상황을 벌이는 자들이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사람들이그 정도로 어리석다는 것은 안다. 눈앞에 보이는 이득에 취해 빤히 보이는 결말을 무시하는 이가 있다는 것도.

'그 공작가는…. 공녀의 거짓말에 놀아났다는 것이맞다.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될 테니까. 감히 공녀에게 그와 같은 거짓말을 지시한 이가 있을 것이다.'

왜? 무엇 때문에? 황실을 뒤흔들고, 내전이일어난다 한들 좋은 일이무엇이란 말인가?

라스탄은 이미 수천 년 전에 현 형태의 제국이되었다. 수천 년 전에는 이보다 더 작은 크기의 나라이기는 했으나, 그들은 정복 전쟁보다는 결혼이나 작위를 주는 형태로 상대적으로 작은 나라를 흡수했다.

서로 비슷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유화 정책을 펼쳤기에, 역사적으로도 큰 문제는 없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는 곡창지대가 중앙에 몰려 있고, 주변으로 갈수록 식량 자급량이떨어지는 지형적인 특성과도 맞물린 것이었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라스탄의 주변에는 크고 작은 나라들이드문드문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법 땅덩어리가 큰 것이중소국인 자하르였다. 전대 황제 부부가 암살당했을 당시, 알렉시스가 잠시나마 의심했던 나라이기도 했다.

라스탄과 자하르 사이에는 세 개의 작은 왕국이자리하고 있었다. 최근 자하르가 인접한 왕국 하나를 무력으로 침공하여 점령했다는 소문은 들었다. 얼마 전까지 전쟁 중이었으니, 라스탄에까지 손을 뻗었을까 싶지만….

'터무니없는 생각이기는 하나 거슬리는구나.'

자하르는 라스탄과 비교한다면 터무니없이작은 나라였다. 라스탄과 자하르 사이에 낀 다른 두 개의 나라를 흡수한다 해도 라스탄의 절반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것이반드시 나라의 크기만으로 승패가 좌우되는 것이아님은 알고 있었다. 아네트와 같은 상급 정령사의 존재가 있으니 더욱 그러했다.

알렉시스와 아네트, 미카엘이있는 한 라스탄이넘어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조금 더 고민을 해 봐야겠군.'

미카엘은 테이블 위에 펼쳐 놓은 지도를 정리하며 생각했다. 이제 슬슬 로제타가 욕실에서 나올 시간이되었다.

***

"휴우~."

마물의 침입에, 납치 사건만으로도 혼이나갈 일인데, 황제까지 그렇게 되었다가 간신히 회복되었으니…. 참으로 다사다난했다.

로제타는 겨우 한숨을 돌린다는 생각을 하며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잠옷을 입었다.

알렉시스는 대신들의 반응을 살펴야겠으니 당분간은 아픈 척을 하겠다고 주장했다. 미카엘에게서 변신 반지를 받아 화상 입은 상처를 재현하고, 주변에는 적당히 둘러댔다.

또한, 주변에 사람이많으면 들통날 수도 있었으므로. 미카엘의 새로운 치료법이효과가 있어 그것을 하는 척 방해가 되는 사람들을 치웠다.

지금쯤 아네트와 알렉시스는 그동안의 회포를 풀고 있을 것이다. 아네트는 그동안 보기에도 딱할 만큼 알렉시스를 걱정하고 있었다.

'이제 각 사건들의 범인만잡으면 되는데….'

사고 뒷수습은 했다지만, 범인을 잡는 것도 그만큼 중요했다. 이와 같은 일이또다시 반복되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소원이무한정 있는 것도 아니고….'

로제타는 요하네스가 심상치 않은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것을 기억했다. 소원 두 개를 더 빌고 나면, 정령왕의 말대로 그를 봉인하든 이쪽 세계로 오지 못하게 하든, 수를 써야 할 것 같았다.

마침 황궁으로 왔으니 황실서고를 뒤져 요하네스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시녀들이가벼운 단장을 도와주고 물러났다. 로제타는 조금 가벼운 기분으로 미카엘이기다리고 있을 침실로 들어갔다.

그동안은 황제와 황제를 걱정하고 있을 미카엘이 신경 쓰여 제대로 웃을 수도 없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로제타."

로제타가 욕실에서 나오자 미카엘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그도 잠자리에 들기 위해 가벼운 잠옷 차림이었다.

"후후, 좋은 냄새가 나네요. 향유를 바꿨습니까?"

"피곤할 때 좋은 향이라고 해서요."

시녀들이 추천한 것이었다. 황제를 간병하는 데에 몰두하고 있는 미카엘과 그런 미카엘을 살피는 로제타를 배려한 것이리라.

미카엘은 로제타를 끌어안으며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로제타의 살내음이 좋아서…. 무슨 향유를 써도 향기롭군요."

잠옷 위로 더듬는 손길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간 여러 가지 일들이 있어서 격조했었기에 로제타도 밀어내지 않았다. 스르륵 잠옷이 벗겨지고 속옷 속으로 미카엘의 손이 들어갔다. 남은 것은 엉덩이를 감싼 팬티 한 장뿐이었다.

"아흑…."

오래간만이라선지 미카엘의 손길이 더욱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팬티 속으로 들어와 엉덩이를 스윽 쓰다듬었을 뿐인데도 다리가 오므려졌다. 미카엘은 약하게 웃으며 로제타의 속옷을 그녀의 허벅지 아래로 끌어 내렸다.

"지금 굉장히 사랑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귀여워요."

달아오른 뺨에 입 맞추며 미카엘은 로제타를 안아 들었다. 마주자신을 끌어안는 팔이 사랑스러웠다. 미카엘은 연신 키스를 퍼부으며 로제타와 같이 침대로 올라갔다.

이곳은 원래 그들이 머무는 궁이 아니었고, 침실도 황제의 침실 근처에 마련된 곳이었다. 유사시에 미카엘을 빨리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

알렉시스가 여전히 병중이라면 할 수 없는 짓이지만, 오늘은 그가 완치된 날이었다. 로제타의 덕분인 만큼 미카엘은 그녀를 마음껏 사랑해 주고 싶었다.

침대 한가운데에 로제타를 눕히고, 미카엘은 제 몸에 걸친 잠옷을 벗었다. 침실에 밝혀 놓은 어렴풋한 등불에 근육질인 그의 나신이 훤히 드러나 보였다. 로제타는 오래간만에 보는 그 몸에 괜히 부끄러워졌다.

미카엘은 고개를 돌리는 로제타의 뺨에 입 맞추며 속살거렸다.

"오늘은…, 간만이니 공들여 풀어 줘야 할 겁니다. 그래서 말인데, 좀 특별한 걸 해 봐도 되겠습니까?"

"특별한 거요?"

주춤거리며 미카엘을 바라보자 미카엘이 안심하라는 듯이 웃었다.

"이상한 건 아니니까요."

아니, 절대 이상한 것일 것 같은데? 그러나 미카엘이 하는 일이었다. 정말 한참 만에 그의 여유로운 모습을 보는 것이라 로제타는 뭐든 허락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응. 대신 아픈 거면 안 돼요."

"절대 아프게 하지 않을 겁니다."

말하며 미카엘은 제 아랫배, 라고는 하지만 복근이 훌륭한 곳으로 손바닥을 대고는 배 위에 마법의 문자를 그리는 것 같았다. 로제타는 순간 당황했다.

이미지나칠 정도로 정력이 좋은 미카엘이, 설마 계속 서게 한다든가 하는 마법을 걸려는 건 아니겠지?

"저…!"

멈칫하는 사이 미카엘의 옆으로 흰 빛이 흘러넘쳐 고이더니 사람의 형상이 되었다. 미카엘과 똑같이 닮은 모습이었다.

"어?"

"제 분신입니다. 오늘은 처음이니까…, 하나만 만들어 내는 걸로 하지요."

속삭이며 미카엘은 로제타의 오른편으로 달라붙었다. 분신은 로제타의 왼쪽으로 달라붙어 그녀의 뺨에 입 맞췄다. 당황스러워 쳐다보자 분신이 싱긋 웃으며 로제타의 입술에 키스했다.

'앗!'

입술 감촉도 전해지는 온기도 미카엘의 것과 똑같았다. 거부감이 들 줄 알았건만 미카엘과 똑같이 달콤하기만 하여 순간 멍해질 뻔했다.

"음…."

겨우 빨리던 입술이 놓여지고 미카엘과 눈이 마주치자 로제타는 확 붉어졌다. 미카엘 눈앞에서 바람을 피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표정을 짓지 않아도 됩니다."

손바닥으로 로제타의 뺨을 감싼 미카엘이 로제타에게 깊이 입 맞췄다. 뒤엉키는 혀는 아까의 것과 같았지만 더 끈적하고 음란하게 로제타의 혀에 휘감겼다.

"그도…. 으음, 저의…. 일부니까요. 그렇지만…. 질투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네요."

"하아…."

미카엘이 로제타에게 키스하는 사이 분신은 로제타의 몸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을 양손에 쥐고 주물러대는 손길이 탐욕스러웠다.

"그러니…. 삽입하는 것은 제 것으로만 할 겁니다. 제 일부라 해도…. 참을 수 없을 것 같거든요."

"아흣, 네에……. 으응…."

로제타도 그것이 좋았다. 미카엘의 일부라 해도, 미카엘이 보는 앞에서 분신의 페니스까지 받아들이는 건 거부감이 들었다. 이러는 와중에도 분신의 손가락이 로제타의 유두를 야릇하게 괴롭히고 있었다.

금세 빳빳하게 선 그것을 가볍게 꼬집기도 하고 주무르고, 당기고 비벼대는 손길에 로제타는 몸을 비틀었다.

"하우, 응…. 으음……. 아흑…."

"제 손길보다도 기분좋습니까, 로제타?"

속삭이는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으나 묘한 음색이 실려 있었다. 그것이 질투심임을 로제타는 모르지 않았다.

"아, 아니에요. 아앗?!"

가슴의 정점을 꼬집히는 느낌에 로제타는 가느다란 어깨를 비틀었다. 로제타의 입술에 키스한 미카엘이 아래쪽으로 내려와 주물리고 있는 유두를 핥는 것이 느껴졌다.

"으흥, 아흐……. 으으음!"

분신 쪽도 경쟁하듯 나머지 유두를 물었다. 입술로 물고 혀로 집요하게 핥아대는 것에 로제타는 머리가 핑핑 돌 것만 같았다.

"아…. 아아……. 으읏, 하으응…."

어둑한 불빛이 퍼져 있는 방 안으로 로제타의 나긋한 신음 소리와 쪽쪽거리며 열심히 핥아대는 두 남자의 외설스러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좌우의 민감한 돌기를 핥아대는 미카엘과 분신에 로제타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하나는 미카엘이고, 다른 하나 또한 미카엘의 분신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기분이 묘한 것이다.

'두, 두 사람 다 미카엘이야. 그러니까….'

"흐으……. 아앗!"

로제타가 쾌락에 집중하지 않는 것을 알아서인지, 강하게 들이마셔졌다. 가볍게 이빨을 세우고 쪼옥 빨아들이는 것에 로제타는 파르르 떨며 신음했다.

"하으, 하아…."

어느새 온몸을 매만지던 손이 로제타의 허벅지에 와닿고 있었다. 서서히 벌어지는 다리에 로제타가 주춤하려던 찰나, 미카엘이 먼저 흠뻑 젖은 음부를 손끝으로 훑었다.

"후후…. 씰룩거리는 게 느껴지네요. 기대됩니까?"

부인할 수는 없었다. 이미미카엘에게 안기는 것에 익숙해진 몸인 것이다. 두 남자는 타액에 범벅이 된 유두를 놓아주고는 로제타의 다리 사이로 몸을 움직였다.

"으읏…."

로제타의 다리 밑으로 자리를 옮긴 두 남자는 활짝 벌어진 다리 사이를 음미하는 듯한 시선으로 들여다보았다.

"어느 곳부터 맛볼까…. 어디부터 빨아 드릴까요?"

은밀한 손길이 허벅지 안쪽의 민감한 피부를 쓸었다. 로제타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돌렸다. 미카엘은 그런 로제타에게 달콤한 시선을 보내고는 분신을 움직였다.

뜨겁고 축축한 입술이 덥석 꽃술을 물자 로제타는 움찔 제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미카엘도 질세라 그 아래쪽으로 얼굴을 묻어 갈라진 틈새에 혀를 밀어 넣었다.

"아앗?!"

핥을 것을 알았지만, 그렇다 해도 자극적인 유희였다. 뜨겁고 능란한 혀가 꽃술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덧쓰는 느낌에 로제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탐욕스럽게 안으로 파고든 혀 또한 마찬가지였다.

요 며칠 사이 사랑해 주지 않아서 좁아진 그곳을 꾸역꾸역 파고들어 와 집요하게 빨아댔다.

"후아, 으…. 아아……. 앙, 으으음…."

그곳으로 전해지는 음란한 감촉에 로제타는 참지 못하고 허리를 비틀었다. 그러나 두 남자들에 의해 허벅지며 허리를 붙들렸고, 집요하게 점막을 빨리기 시작했다.

두 개의 입술과 혀가 주는 쾌감이란, 감당하기 버거운 것이었다. 미카엘 하나만으로도 마법으로 인해 녹을 듯이 느끼건만, 분신 또한 미카엘인 것은 맞는지, 그에게도 몸이 똑같이 반응하고 있었다.

"아, 싫어…. 더는! 미카, 미카엘, 님! 아앙…. 그만 빨…. 후아, 으앙!"

버둥거리며 음란한 자극에서 달아나려 했건만 두 남자들은 기교가 부족했다 판단했는지, 더욱 맹렬하게 핥아대기 시작했다. 눈앞이 온통 핑크색으로 물들 것 같은 야릇한 자극에 로제타는 기겁하며 발버둥 쳤다.

"흐앙! 응, 아앙! 아앗, 아아아아……. 거기가 녹을 듯! 하우우…. 아아앗!"

도달한 로제타의 몸이 활처럼 휘어지며 경련했으나, 로제타의 음부를 맛보는 미카엘과 분신이 멈춰지는 일은 없었다. 점막으로 가해지는 음탕한 애무에 로제타는 녹을 듯한 쾌락을 맛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아앙…. 계속 이런 걸 하면…….'

"아아, 아아아아앗! 후으……. 아아앙!!"

넋을 잃은 듯 바르르 경련하는 로제타에 미카엘이 혀를 뽑으며 고개를 들었다. 분신은 그의 지시에 따라 여전히 쪽쪽거리며 로제타의 꽃술을 빨고 있었다.

미카엘은 입맛을 다시며 로제타의 비부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역시 여전히 좁았다. 그의 것이 보통이 아닌 크기인지라 조금 더 공을 들여야 할 것 같았다.

"밤은 기니까요. 그렇지요, 로제타?"

속삭이는 목소리에도 로제타는 그저 신음할 뿐이었다. 미카엘은 미소를 지으며 로제타의 다리 사이로 다시 얼굴을 묻었다.

***

"히익…."

뒤에서부터 삽입한 미카엘이 로제타의 몸을 끌어안았다. 엎드려 있던 그녀를 일으켜 자신의 허벅지에 앉힌 미카엘이, 로제타의 두 다리를 자신의 무릎에 걸쳤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분신이 다가왔다.

"아…. 미, 미카엘 님……. 우응…."

이어지는 키스에 로제타가 잠시 멈칫할 찰나 분신이 그녀의 다리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깊숙이 미카엘의 것을 물고 있는 틈새 위에 방치되어 있는 꽃술로 혀를 움직였다.

"으흑! 지금…. 아앙!"

분신이 정성스럽게 꽃눈을 핥기 시작하자 미카엘이 느리게 추삽하기 시작했다. 하는 도중에 꽃눈을 애무받은 적이야 많았지만, 빨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흐아, 으…. 앗! 아아…."

팔과 다리, 온몸이 아래위로 흔들렸다. 미카엘의 무지막지하게 큰 페니스가 로제타의 속살로 쑥쑥 들어오며 안을 헤집는 것이 느껴졌다. 보통이라면 이것에 고통을 느낄 테지만, 로제타의 몸에는 마법이 걸려 있었다.

매일 자라난 그에 대한 감정이 이제는 사랑이라 칭해도 될 정도로 커졌기에, 느껴지는 쾌락이란 엄청난 것이었다. 마치 쾌락 덩어리에 범해지듯 쑤욱쑥 밀고 들어오는 페니스가 그저 기분좋기만 했다.

"아! 아아아, 아흐……. 으응, 아앗!"

어느새 미카엘의 페니스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즐기자, 분신이 지지 않겠다는 듯이 로제타의 꽃눈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혀로 집요하게 빨고 입술로 물어 자극하는 것에 로제타는 버둥거리며 흐느꼈다.

출렁출렁 음란하게 흔들리는 유방에 미카엘은 그것을 쥐고 정점을 괴롭혀 주기 시작했다. 분신도 버둥거리는 로제타의 다리를 매만지며 그녀의 발끝까지 자극했다.

온몸의 느끼는 곳이란 곳은 모두 사랑받는 느낌에 로제타는 달게 신음하며 눈물을 흘렸다. 넘쳐흐르는 쾌락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졌다.

구불거리며 속살을 문질러대던 페니스가 로제타의 가장 깊은 곳까지 농락하고, 굵직한 줄기에 민감한 입구가 한계까지 벌어졌다.

로제타는절정을 맛보며 두 남자 사이에서 몸부림쳤다.

한계 이상의 쾌락에 머릿속이 이상해질 것만 같았다. 안을 쑤셔대는미카엘의 페니스와 꽃술을 핥아대는혀, 가슴의 정점과 온몸을 만지고 자극하는손길에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하아아, 아! 아아앗……. 아아……!"

요염하게 몸부림치며 신음하는로제타를, 미카엘은 그 밤에도 끊임없이 사랑해 주었다. 늘 그러했듯이 밤을 지나 새벽이 올 때까지.

***

"……."

로제타는창피한 생각에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무리 기분이 좋았어도 그렇지, 넋을 잃고 즐겼던 것 같았다. 미카엘도 꽤 오래간만이라선지, 로제타가 중간에 한 번 기절했었는데도 기다렸다가 또 하지를 않나….

종국에는미카엘이 분신을 둘이나 더 꺼내서 로제타를 애무하는것에 그저 넋을 잃고 즐기고 말았다.

'으음…. 로제타는…. 느낄수록 조임이 더 좋아지는군요……. 하아….'

황홀한 듯 속삭이던 미카엘의 얼굴이 떠올라로제타는손부채질을 했다. 이불킥을 했다가는저를 끌어안고 잠든 미카엘이 깰 것 같았다.

다행히 잠드는사이에 미카엘이 분신을 사라지게 한 것 같았다. 로제타가 축 늘어져도 지치지도 않고 애무하던 분신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체력도 좋지.'

분신들과 같이 했다고는해도 삽입한 것은 미카엘뿐이었다. 처음부터 넣고 나서는거의 빼지를 않았으니 확신할 수 있었다. 사정하여 뽑고서도 곧바로 다시 삽입했으니까.

미카엘과 보낸 열락의 밤에 로제타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어려졌다. 너무느껴 창피하다는생각이 들긴 했어도 기분 좋았다.

"내 사랑…. 일어났습니까?"

속삭이며 미카엘이 로제타의 목덜미에 입 맞췄다. 그가 로제타를 뒤에서 끌어안고 있었기에 로제타는몸을 뒤집어 그와 마주 보았다.

"그렇게 하면…. 또 하고 싶어진다니까요."

웃으며 미카엘이 로제타의 입술에 키스했다. 로제타는그의 품으로 파고들며 문지르듯 그의 가슴에, 제 가슴을 눌렀다. 이미 참고 있었던 미카엘의 페니스가 그것만으로도 무섭게 달아오르는것이 느껴졌다.

"해도 되는데…."

끈적해지는입술 사이로 로제타가 속살거리자 미카엘의 목울대가 크게 꿀렁였다. 그의 탐욕스러운 손길이 로제타의 다리 사이를 더듬었다.

새벽을 지나서까지도 사랑을 나누었으니 로제타의 그곳은 아직 부드러웠다. 손가락을 넣어 그것을 확인한 미카엘은 낮게 신음했다. 로제타가 허락까지 해 주었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미카엘은 그대로 로제타의 다리를 벌리고 제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제가 있을 곳은 여기라는듯이 빳빳하게 성을 내는것이 여린 속살을 벌리고 가득 메우는것이 느껴졌다.

그 음탕한 열기에 로제타가 탄성을 흘리자 미카엘이 키스로 그 탄성마저 집어삼켰다. 이어지는추삽질은 그야말로 파렴치하기 그지없는것이라, 로제타는키스 받으며 뺨을 물들였다.

움직이는것은 미카엘인데 부끄러운 것은 로제타였으니, 무언가 맞지 않는다는생각이 들었다.

"하앙, 응! 아아앙…."

"하아……. 로제타…."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딱 한 번만 하고 황제에게 보낼 계획이었는데…. 미카엘이 움직이기 시작하니 아무생각도 할 수 없어졌다.

***

"신혼인데, 내가 너무눈치가 없었나?"

황제의 침실 안에 있는것은 미카엘뿐이었다. 로제타가 같이 왔다면 알렉시스는그런 말은 입도 벙긋하지 못했을 것이다. 미카엘이 몰래 보복해 왔을 테니까.

"아주, 많이, 완전히 없으시죠."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알렉시스는피식 웃었다. 그도 오래간만에 아네트와 회포를 풀었으니, 피차일반이기는했다.

"어쩔 수 없잖아. 표면적으로 내가 아픈 채로 있어야만 놈들을 끌어내기가 수월하고, 그 연극을 위해서는네가 필요하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각은 오늘까지만으로 해 줘. 네가 나를 아끼는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데, 며칠씩 지각한다는건 말이 안 되지."

"……."

로제타와의 달콤한 시간을 보내느라점심때가 다 되어서 황제의 침실로 돌아왔던 것이다. 황제가 아픈 상황에서 말도 안 되는행동이기는했다. 그래도 한 번 정도는실수라고 생각할 것이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야. 공작부인의 그 소원이라는거…."

"안 됩니다."

"아직 말도 안 꺼냈는데."

알렉시스는탐욕스러운 이는아니었지만 권력욕이 없는이는아니었다. 그는제 주변 사람들에게 해가 될 것 같은 것들을 치우는것에는적극적이었다. 그가 보기에 로제타가 가진 정령과의 계약은 매우 먹음직스러운 것이었을 터였다.

"공작부인이 원하는것과 교환하면 되는거 아닌가? 그 정도라면 공작부인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제 부인은 욕심도 많지 않은 데다가, 웬만한 것은 제가 다 해 줘서 따로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로제타가 들었다면 오해라고 할 법한 생각이었다. 그저 로제타가 욕심내는것들이, 미카엘의 기준에는매우 소박한 것이라그리 생각되고 있는것뿐이었다.

"끄응~, 그렇기는하지. 아덴 공작부인이니…. 이미 돈은 넘치도록 많을 테고."

정확히는미카엘의 돈이었지만 알렉시스는쩨쩨하게 그런 것을 구분하지 않았다. 그는이미 미카엘이 골수까지 로제타의 노예라는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로제타가 원하기만 한다면, 공작가의 돈이며 땅, 농장과 광산에, 섬과 도시까지도 선물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섬과 성은 네가 결혼 선물로 주었었고…. 혹시 보석 좋아하나? 나한테 바쳐진 귀한 보석이 몇 개 있는데."

"그런 게 있으면 황비님을 주셔야지요."

"아네트는내가 준 보석을 자꾸 말이나 농장이랑 바꿔 버린단 말이다."

투덜거리는것이, 내색은 못 했지만 꽤 섭섭했던 모양이었다. 미카엘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제 아내의 몸에 제가 아닌 남자가 준 보석이 걸쳐지는것은 원치 않습니다."

"…질투가 지나치면 미움받는다?"

"티 안 내고 있으니까 괜찮습니다."

미카엘이 말하자 알렉시스는고민했다. 로제타의 힘을 빌어서 이루고 싶은 소원이 꽤 간절한 모양이었다.

"정령에게 뭘 빌고 싶으시기에 그러시는겁니까?"

"음…."

부모님을 죽인 원수가 누구인지 알아내고 싶었다. 아직은 미약한 단서만 손에 쥐고 있을 뿐, 이십여 년 전에도 지금도 발전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 사실을 미카엘에게 말할 수는없었다. 미카엘에게도, 제 동생이 사랑하는여인에게도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저 로제타에게 갖고 싶은 것이 있어 가벼운 마음으로 소원을 넘겨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일단은 비밀인데."

"그럼 저도 협조해 드릴 수 없습니다."

미카엘의 완강한 반응에도 알렉시스는섭섭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계속 미카엘의 곁에 있어 줄 수 없기에, 미카엘이 마음을 붙일 수 있는누군가가 나타난 것이 진심으로 기뻤다.

"이런, 좀 더 고민해 봐야겠군."

킬킬거리며 알렉시스는웃음을 흘렸다. 소원이 당장 급하지는않았다. 마음은 절박했지만 그들에게는당면한 문제가 있었고…. 그 문제가 과거의 일들과 이어져 있을 거라는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그 소원이라는것 또한, 지금처럼 남겨 두는것도 좋을 거라는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어찌할 수 없을 만큼의 시련이 닥쳤을 때를 대비하기 위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