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 황자에게 사로잡혔다-14화 (14/21)

제14장. 비밀은약점을 만든다

그들은성녀를죽이지도 않았고, 아덴 공작저에 들어갈 때도 성녀를제외한 모두가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의 임무는 로제타를아덴 공작저에서 납치해 오는 것까지였고, 로제타를운반하는 것은다른 이들이 맡을 예정이었다.

그래서 그들은정해진 장소에 로제타를가두고 물러났다.

공작가에서 추적자들이 따라붙을 테니, 그들을 꽁무니에 매달고 다른 곳으로 유인하지않으면 안 되었다.

'아파….'

또다시 어두운 곳에서 눈을 뜬 로제타는 낮은신음을 삼켰다. 말에서 떨어질 때의 충격 때문인지아직도 머리가 울리고 있었다. 팔은금이 가기라도 했는지부어오르기 시작했고, 어깨와 골반, 가슴도 욱신거렸다.

【로제타….】

로제타는 저를부르는 목소리에 이를악물었다. 이곳으로 와서 미카엘을 만났다고는 해도, 그녀의 모든 불행의 원인은저 정령이었다.

그런데도 또다시 그녀를위기에 빠트리고 있었다. 그 소원 다섯 개를소모하기 위해 자신을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것을 생각하니 이가 갈렸다.

"왜? 또 풀어 주고 다시 잡히게 하려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 타이밍에 가짜 성기사들이 깨어난 건, 정령이 마법을 거두었기에 생긴 일 같았다. 로제타의 말에 정령은찔리는 구석이 있는 듯했지만 시치미를뗐다.

【내, 내가 뭐? 네가 말에서 떨어진 건 그자들 탓이지, 내 탓은아니잖아!】

"네가 그들을 잠에서 깨웠잖아. 아니야?"

【그건….】

정령은양심은있는지, 아니면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되어 있는지부인하지못했다. 로제타는 정령이 거짓말을 하지못하는 쪽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거짓말을 할 수 있다면 더 쉽게 로제타에게 준 다섯 개의 소원을 소모했을 것이다. 아니면 거짓말로둘러대어 처음부터 소원 다섯 개를주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성의 기사와 병사들을 잠재운 것도 너잖아. 내가 눈치채지 못할 줄 알았어? 그래놓고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아……. 닌 건, 아닌데….】

아니라고 부인하고 싶었지만. 로제타가 짐작한 대로이 정령은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순수하거나 선량해서 거짓말을 할 생각을 하지 않는 다른 정령들과는 다른 이유였다.

"내 첫 번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어. 첫 번째 소원이 제대로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네게 아무 소원도 빌지 않을 거야."

【그럼 이대로여기에 있겠다고?!】

"내가 빠져나가도, 네가 다시 방해할 거 아냐? 이번에는 어디를다치게 될까? 다리? 갈비뼈? 욱신거리기는 해도 아직 부러진 건 아닌 것 같거든."

로제타가 비아냥거리자 정령은 거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는 듯했다.

【그게 내 탓은 아니잖아.】

"네 탓이야! 누구 때문에 내가 납치된 건데!!!"

지금도 로제타는 상자에 갇힌 채로수갑과 족쇄를차고 있었다. 아까 밧줄을 감쪽같이 풀었기 때문인지, 아예 손목에 수갑을 채운 것이다.

사실 입에도 재갈이 물려 있었지만. 정령이 일말의 양심이 찔려, 로제타가 기절한 사이 그것은 끄집어 내놓은 참이었다.

【그, 그래도 말에서 떨어진 건….】

"네 탓이야. 오늘 내가 다친 건 하나부터 열까지 다 네 소행이야!"

정령은 불만이 많은 듯했지만 로제타가 눈을 부라리자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튀어나온 입만큼은 감출수 없는 듯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할 수 없지!】

힐끗 로제타의 표정을 살피던 정령이 사라졌다. 이렇게 잠시 자리를비우면 겁이 난 로제타가 자신이 시키는 대로할 것이라고 생각해서였다.

홀로남은 로제타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저 정령이 나타나 자신을 방해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하기야 이 빙의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기는 했다.

그녀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미카엘이 그녀를찾아다니고 있을 테지만, 로제타는 자신이 주인공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미카엘이 도착할 때는 너무 늦을지도 모르지.'

이곳은 로맨스 소설 속일지는 몰라도 주인공이 아닌 그녀는 끔찍한 일을 당할 수 있었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자신을 납치한 것인 줄은 모르나 그 목적에 따라 취급이 달라질 것이다.

'이자벨이라면…. 나와 자신이 연결되어 있는 줄도 모르고 고문을 지시할지도 몰라. 그 외에 미카엘을 노리는 사람이 날 납치한 것일 수도 있겠지.'

어느 쪽이든 암울했다. 미카엘이 남자주인공과 비슷한 위치인 만큼 그 부인인 자신은 방해물에 불과하니 일찌감치 치워질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원작1과 원작2의 로제타가 형장의 이슬로사라진 것처럼.

눈물이 날 것 같았으나 로제타는 고개를저었다. 그녀에게는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를곤경에 빠트리기는 했으나 정령의 존재가 있었다.

지금까지 하는 짓을 보니 설득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러니 정령을 속여야만 했다.

'하지만 어떻게?'

침입한 자들이 가짜 성녀에 가짜 성기사인 것을 알고 있었던 정령이었다. 곁에서 지켜보며 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전부를아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정령이 내게 부탁한 것이 뭐가 있지?'

이름. 정령은 계약 때문에 로제타에게 이름을 가르쳐 주며, 그 이름을 아무에게도 말해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그걸로정령이 내 말을 따르게 할 수 있을까?'

불안했지만 당장은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로제타는 초조하게 정령이 돌아오기를기다렸다. 납치범들이 돌아오기 전에 정령이 와야만 했다.

***

마찻길의 흙바닥에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졌다. 마법진 한가운데에는 오각형의 작은 유리병이 놓여졌다. 마법진 위로올라선 것은 로제타의 호위를맡았던 호위기사와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죄지은 자의 얼굴로줄지어 마법진 위에 섰다.

"…너희들 중 마법이 걸린 물건을 몸에 지니고 있는 자가 있느냐?"

미카엘이 낮게 깔린 분노를거둘 생각도 하지 못한 채로물었다. 음울한 목소리가 주변 사람들을 두렵게 하기에 충분했다.

호위기사와 병사들은 허둥지둥 고개를저었다. 이곳으로오기 전에 병사로부터 그런 물건을 지니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주의를들은 참이었다.

"모, 모두 두고 나왔습니다!"

"제게는 그런 물건이 없습니다!"

마도구는 재력이 있는 자들이나 지닐 수 있는 물건이었다. 혹은 누군가에게 선물 받거나, 마법사에게 친분이 있는 사람이나 겨우 소유할 수 있었다.

아덴 공작가에서 근무하는 자들은 간혹미카엘로부터 지급받아서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었다. 미카엘은 그들에게 마법이 걸린 물건이 없음을 확인하고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우우우웅!

마법진이 빛을 뿜어내며 그들 사이에 공통적으로남아있는 마력의 잔재를추출해 내기 시작했다.

'마법에 걸린 자들이 많아서 다행이로군.'

술수에 걸려 잠들었다는 기사를살펴본 미카엘은 정령이 개입되어 있음을 깨닫고 당황했다. 그의 적중에서 이런 정령을 부릴 수 있는 마법사에 대해서는 들어 보지 못했다.

마법의 잠에서 깨어났다고는 하나 몸이 완전히 회복한 것은 아니었다. 한번 주문에 걸린 만큼 몸에는 그 정령의 마력이 남아있을 수 있었다.

한 사람이었다면 많이 남아있지 않을 테지만, 수십 명에 달하니 충분한 양을 뽑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정령도 그 마법사도 죽여 버릴 테다….'

마법사는 마력을 모두 뽑아낸 이후에 고문하여 죽이고, 정령은 소멸시켜 버릴 작정이었다. 정령은 마법사와 계약한 것뿐이지 않으냐는 소리를듣는다 해도 상관없었다. 로제타의 납치에 관여한 것이야말로대죄요, 죽어 마땅하다 못해 영원히 고통받아야 할 죄목이었다.

미카엘이 이를갈며 노려보는 사이, 마법진 한가운데에 놓여 있던 유리병으로보라색 마력이 고이기 시작했다. 각각의 기사와 병사들로부터 뿌연 보랏빛 안개 같은 것이 흘러나와 유리병으로빨려들어 갔다.

처음에는 겨우 한두 방울 맺히기 시작하던 것이 병에 점점 차올랐다.

유리병을 지켜보는 미카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 마력은 정령을 부리는 마법사가 아닌, 정령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 정령이 있는 곳에는 마법사도 있을 터….

'정령의 위력이 대단하니, 그것부터 붙잡아가둬야겠다.'

정령과 계약이 되어 있다면, 그 정령으로계약되어 있는 마법사를추적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다만, 추적을 거듭하는 사이 시간이 지체되는 것이 초조할 뿐이다.

'로제타….'

이러는 와중에도 로제타가 겪을지도 모르는 일을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솟는 듯했다. 누구든 로제타를건드리는 자가 있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때늦은 후회에 미카엘은 이를갈았다.

***

정령은 산기슭을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납치범들의 대화를엿들었으니, 그들이 로제타를버려두고 떠나는 것을 알았다. 납치범의 다른 일행들이 찾아와 로제타를데려갈 것이다. 이자벨이라는 여자에게로데려간다는 것 같았다.

'얼마쯤 와 있는 거지?'

어느 방면으로오는지를확인할 수 없으니 넓게 돌아보아야만 했다. 정령은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날아다니다가 산밑까지 내려갈 수 있었다.

벌써 아덴 공작가의 기사들이 보이는 것에 정령은 당황했다.

'여기까지 오다니! 빠르다!'

공작가의 추적자 중에는 미카엘이 있을 것이다. 정령은 여전히 그가 두려웠다. 미카엘은 정령을 붙잡아종으로부렸던 마법사보다도 강력한 이였다. 경험은 그보다 부족한지 몰라도 마력도, 마법 실력도 그 마법사보다 위인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면 안 돼!'

정령은 두려움에 몸을 떨며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멀찍한 곳에서 미카엘을 엿볼 참이었다. 그가 벌써 로제타에 대한 단서를얻은 것이라면 빨리, 로제타를데리고 도망쳐야 했다.

미카엘은 손에 보랏빛 마력이 담겨 있는 유리병을 띄운 채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정령은 저게 뭐지? 하고 유심히 살피다가 얼어붙었다.

'내, 내 마력…. 저걸 어떻게?!'

정령은 혼비백산하여 그대로등을 돌려 달아났다. 만약 그 자리에서 더 미카엘을 엿보았다면 미카엘에게 발각되고, 그대로사로잡힐 수도 있었을 테지만, 미카엘이 정령이 있던 위치를확인했을 때는 이미 도망친 뒤였다.

허공을 바라보는 미카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말을 가져와!"

***

로제타가 있는 방향으로날아오며 정령은 몸을 움츠렸다.

왜 자신의 마력이 미카엘에게 있는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로제타가 주었나? 아니. 로제타는 아무 능력도 없는 일반인에 불과했다. 정령의 마력을 뽑아다가 미카엘에게 주는 것은 불가능했다.

거기다 로제타는 지금 미카엘의 곁에 없었다. 로제타가 정령에 대해 미카엘에게 말한 적도 없는 것 같으니 저 마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불가능했다.

'왜 나를추적하는 거야! 내가 아니라 로제타를찾아야지!'

언뜻 보이는 미카엘의 얼굴은 무시무시했다. 그는 정령이 보기에도 아름다웠으나 그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보는 이를얼어붙게 만드는 싸늘함을 가지고 있었다.

화가 많이 난 것이다.

'어쩌지? 로제타도 자신을 납치한 게 나라고 말하고 있잖아! 내가 한 짓인 걸 알면 미카엘이 날 가만두지 않을 거야!'

정령은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로제타를죽이고 싶었지만, 그것은 큰 벌을 받게 되는 일이었다. 정령은 로제타를죽일 수 없었다.

미카엘이 아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정령은 우왕좌왕하다가 일단은 도망치기로마음먹었다. 문제는 미카엘이 가지고 있는 그의 마력이었다.

'그것만 빼앗으면….'

로제타에게 제대로소원 하나를들어주겠다고 하고 살살 달래그 마력을 훔쳐오라고 하고 싶지만…. 지금 로제타는 미카엘 곁에 없었다.

'미카엘도 로제타가 곁에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화를내지는 않았을 텐데.'

그래, 그래. 로제타가 있었어!

정령은 고민하다가 로제타를미카엘에게 돌려보내자고 마음먹었다. 미카엘이 자신을 추적하는 것은 결국 로제타를찾기 위함이었다. 무슨 수를쓴 것인지는 모르나, 로제타를추적하려 자신의 마력을 찾아낸 것이 분명했다.

'로제타의 입을 다물게 해야 하는데….'

어떻게 약속을 받아 낼까?

정령은 다른 이를 이용해 로제타를 해치는 방법을 생각했지만, 아직 들어주지 못한 소원 4개가 있었다. 또한 노골적으로로제타의 죽음을 조장하는 것도 그의 죄로돌아올 터였다.

'일단은 약속부터 받아 내야 해!'

미카엘은 로제타를 찾으면 일단 정령에 대한 것은 뒤로미룰 것이다. 로제타가 입은 부상이 있으니 그녀를 회복시키는 것만생각하겠지. 약간이라도 틈을 보이는 때에 미카엘이 가진 자신의 마력을 되찾으면 되는 일이다.

'하지만예전에도 마법사의 방을 뒤지다가 붙잡혔었는데….'

차라리 로제타를 돌려주고도망치기나 할까? 로제타는 노리는 이가 많은 것 같으니, 미카엘은 로제타를 지키는 데 정신이 팔려 자신을 잡는 데 집중하지 못할 것 같았다.

정령은 이도 저도 마음을 다잡지 못하다가 일단 로제타가 갇혀 있는 곳으로날아갔다.

로제타는 커다란 궤짝에 갇힌 채로땅에 묻혀 있었다. 질식해 죽어버린다면 아무 소용 없으므로여러 개의 가느다란 관이 궤짝과 연결되어공기가 들어왔다.

【로제타!】

여러 개의 관이 연결되어있다고는 해도 공기가 잘 순환되지는 않았다. 마도구를 이용해 공기를 순환시키면 될 일이지만, 궤짝의 위치가 발각될까 봐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납치범들의 입장에서 로제타가 저산소증으로고생하든 말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왜?"

잠깐 사이 부쩍 지친 듯한 로제타의 모습에 정령은 악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이제 소원을 빌 마음은 든 거야?】

속살거리는 말에 로제타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누구 때문에 내가 이런 상황에 처했는데! 분이 차올라서 일단은 '그렇다'고말하기 어려웠다.

정령은 초조하게 주변을 경계했다. 금방이라도 미카엘이 자신을 추적해서 이곳까지 나타날까 봐 두려웠다. 만약 로제타를 미카엘에게 돌려주지 않고, 자신만달아난다면…. 미카엘은 지옥 끝까지라도 그를 추적할 것 같았다.

【아까는 내가 잘못했어. 이, 일단은 수갑부터 풀어줄게.】

궤짝은 자물쇠로잠겨 있어서 수갑과 족쇄를 풀어준다고해도 빠져나갈 수 없었다. 정령은 마법을 사용해서 로제타의 수갑과 족쇄를 풀었다. 겨우 결박하고있던 것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자, 로제타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밧줄에 쓸리고쇠에 조여졌던 자리가 아팠다.

【소원을 빌면 이번에야말로미카엘에게 데려다줄게.】

"정말이야?"

로제타는 의심스럽게 정령을 보았다. 정령은 자신에게 나쁜 마음은 없다는 듯이 무해한 표정으로활짝 웃어보였다. 로제타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증거를 보여 봐."

【무, 무슨 증거?】

"글쎄. 일단 이 상자에서 나가는 것도 좋겠지. 물론 이건 소원과는 관계없는 일이야."

이어지는 로제타의 말에 정령은 이를 갈았으나, 그는 로제타에게 부탁할 것이 있었다. 거기다미카엘이 오고있었다. 시간을 끌면 안 되었다.

【알았어!】

묻혀 있던 자리의 흙이 분출되며 상자의 뚜껑이 떨어져 나와 흙 바깥으로튕겨졌다. 로제타는 훤하게 뚫린 자리로쏟아지는 흙먼지에, 소매로입과 코를 막았다.

그녀가 묻혀 있던 곳은 그리 깊지 않은 동굴인 것 같았다. 로제타는 얼른 제가 묻혀 있었던 구덩이에서 기어나왔다.

정령이 대놓고일을 벌였으니, 자신을 납치한 이는 잠들어있거나 동굴에 없을 것이라고판단했다. 로제타는 얼른 동굴 밖으로향했다. 정령은 그런 로제타를 뒤따라갔다.

【로제타! 소원은? 소원을 빌어야지!】

"날 납치한 사람들은 어떻게 됐어?"

【그자들은 떠났어! 대신에 다른 자들이 돌아와서 널 데려갈 거야!】

그들은 공작가의 수색이 물러갈 즈음에서야 돌아올 계획이었다. 로제타를 데리고공작가의 포위망을 뚫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가짜 성녀와 성기사가 충분히 그들의 주의를 돌리면, 그때 로제타를 확보할 속셈이었다.

'떠났다고….'

로제타는 당장 여기서 도망쳐야겠다고생각했다. 팔의 부어오른 자리가 아프고, 온몸이 욱신거렸지만떠나야 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로제타는 안도했다. 이 상황에서도 아덴 공작가의 성에 있는 여러 개의 첨탑이 아주 잘 보였다. 로제타는 드레스의 찢어진 부분을 뜯어내 긴 천을 만들었다. 그리고그것으로신발이 없는 쪽 발을 둘둘 감았다.

'달리기는 어렵겠지만…. 맨발보다는 낫겠지.'

초여름이라 얇은 드레스이기는 했으나, 여러 겹 감싸니 걸을 만했다. 로제타는 그 상태로절뚝거리며 성이 있는 방향으로걷기 시작했다.

【로제타, 그대로가려고! 여긴 숲이야! 마물이나 짐승이 나올 수도 있어! 멧돼지나…. 그래, 늑대! 늑대가 나타나면 어쩌려고? 소원을 빌어!】

로제타는 정령이 전처럼 시간을 끌지 않고바로행동했다는 것이 수상했다. 아까 기분이 상해서 모습을 숨겼던 때와는 달리 비위를 맞추려는 것도…. 분명 미카엘 일행이 이 근처까지 온 것이 분명했다.

납치범들의 계획을 모르는 로제타는, 그놈들의 일당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 몰랐다.

그들의 계획에 따라서는 내일 저녁 무렵이나 모레에 이곳에 도착할 테지만, 로제타는 그들이 이 근처까지 와 있을지도 모른다고여겼다.

'큰 소리를 내서 부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미카엘과 공작가의 기사들을 부른다는 것이 납치범들을 끌어들일 수도 있었다.

【정말 이럴 거야?! 아까와는 약속이 다르잖아!】

화가 난 정령의 목소리에 로제타는 홱 고개를 돌려 정령을 노려보았다.

"너는? 너는 매번 약속을 어기면서 나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거야?"

【내가 뭘?】

"나를 구해 준다고했잖아! 그것도 네가 빠트린 궁지에서 말야! 소원 하나를 빌어서 구해 준다고해 놓고는, 나를 다시 그자들에게 잡히게 했잖아! 그런데 네 말에 따라 나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그건 네가 터무니없는 욕심을 부려서잖아! 소원 다섯 개라니! 어떻게 그런 욕심을 부릴 수가 있어?! 진짜 로제타에게도 그렇게 해 주지 않았어!】

분노한 정령의 말에 지금의 로제타는 기가 막혔다.

"내 인생, 내 몸, 내가 가진 경력과 꿈을 모두 훔쳐가 놓고그게 나한테 하는 소리야?! 내가 이 세계로데려와 달라고했어?!!!"

로제타에게 이 세계는 끔찍한 곳일 뿐이었다. 미카엘을 사랑했지만…. 지금이라도 원래 세계로돌아갈 수 있다면 갔을 것이다.

그곳에서의 그녀는 지독한 폭력과 미움에 노출되어있지도 않았고, 긴 시간을 들여 힘겹게 개척한 자신의 경력과 능력으로살 수 있었다. 부유하지는 않아도 자신의 힘으로그럭저럭은 살 수 있는 삶이었다.

그러나 정령은 언성을 높였다.

【지금 너를 봐! 너는 공작부인이 됐잖아!! 네가 무슨 손해를 봤어? 지난번 네 인생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것들을 가졌잖아! 그런데도 네가 피해를 입었다고할 수 있어?】

"…이 모든 걸 네가 가져다주었다는 것처럼 말한다?"

진심 어린 분노와 원한이 담긴 로제타의 눈빛에 정령은 찔끔했다. 로제타의 갈색 눈동자가 횃불처럼 타오르고있었다.

"네가 날 도왔어? 네가 2년간 날 모르는 체하는 동안 내가 노력한 거야! 내가 살아남으려고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미카엘과 사랑에 빠졌던 거야!"

【내가 이 세계로데려오지 않았다면…!】

"그랬으면 더 잘 살았겠지!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나는 수십 년간 노력해서 내 힘으로아주 잘 살고있었어! 부자는 아니었더라도 내 힘으로살고있었다고! 그런데….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준 부가…. 니가 준 행운이라고? 그 사람이 준 게 아니라?"

【나 때문에 미카엘과 만난 건 사실이잖아!!!】

"네가 그 미카엘과 떨어트려 놓았잖아! 미카엘이 내게 준 모든 것을 망치려는 게 너야! 이전의 나에게도, 지금의 나에게도! 너는 그저 해만끼치고있어! 네가 내게 은혜를 베풀었다고말하지 마!!!"

로제타가 악을 썼지만정령은 그래도 납득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는 이전의 그녀가 지금보다잘 살았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 윤승아는 지금의 공작부인이 사용하는 침실보다도 작은 집에서 살고있었다. 부리는 사람 하나도 없이.

'진짜 로제타는 그쪽 세계로가서 고생하고있을 텐데….'

여기의 로제타가 훨씬 잘되는 것을 보니 정령은 배가 아프다는 생각도 들었다. 누구 덕분에 잘 살고있는 건데, 그 은혜도 모르고자신을 괄시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나머지 소원이 전부 사라지기만하면…. 어디 두고보자.'

계약을 맺으면서 제대로소원을 비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만약 그 방법을 알았다면 정령은 꼼짝없이 로제타의 소원을 들어주어야만했던 것이다.

정령은 뒤늦게 아덴 공작가의 기사들이 가까워진 것을 깨닫고마음이 급해졌다. 얼른 로제타에게 자신에 대한 것을 미카엘에게 말하지 말란 소리를 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의 로제타를 보니 자신이 무슨 부탁을 해도 들어주지 않을 것 같았다. 단단히 화가 났으니.

'그게 내 탓이냐고!'

상황을 만들었다고는 해도 실제로납치한 것은 자신이 아니니 자신은 죄가 없다고여겼다. 정령은 입을 삐죽거렸으나, 점점 좁혀지는 거리에 당황했다. 미카엘이 궁극적으로찾는 것은 로제타였지만, 당장 추적하는 것은 자신이었다.

【그, 그 마법사에게 나에 대해서 말하지 마! 나에 대해서 떠들면 나도 네가 진짜 로제타가 아니라는 것을 털어놓을 거야!】

"뭐라고?"

기막혀하는 로제타에게 정령은 빙글빙글 웃었다.

【미카엘은 자신이 어떤 로제타와 사랑에 빠졌는지 모르니까~. 나는 미카엘이 사랑에 빠진 것이 진짜 로제타가 아니라고말해 줄 거야! 그럼 너는 미카엘에게 금세 거부당하겠지!】

홱 소리를 지른 정령이 로제타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로제타는 화가 나기도 하고, 어이가 없어서 제자리에서 숨을 고르는데,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뭐지?'

로제타는 얼른 절뚝거리며 커다란 수풀 뒤에 숨어서 그 너머를 엿보았다. 말을 탄 기사와 병사들이 숲을 수색하며 다가오고있었다. 로제타는 기사와 병사의 옷에 수놓아져 있는 아덴 공작가의 문장을 알아보았다.

"하아아…."

겨우 긴장이 풀리다못해 눈물이 났다. 로제타는 수풀 뒤에서 나오며 소리쳤다.

"여기야!"

"마님!! 마님이 여기 계시다! 찾았다!!"

기사와 병사들이 뒤를 향해 소리 지르는 것을 보며 로제타는 털썩 주저앉았다. 드디어참았던 눈물이 새어나오는 것 같았다.

"흐어어엉! 미카엘 님!"

미카엘이 달려오는 것을보고, 로제타는 기사들 중 누군가가 덮어 주었던 망토가 떨어지는 것도 잊고 그에게 안겼다. 로제타의 발에는 병사들 중 하나가 벗어 준 신발이 신겨져 있었다.

공작부인으로서의 체통이나, 공작으로서의 체면 같은 건 하나도 중요치 않았다. 미카엘은 로제타를 다시 이 팔로 안게 되자 눈물을흘렸다. 1초가 하루 같았던 시간이었다. 로제타마저 잃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던가!

"로제타! 로제타…."

미카엘은 눈물 젖은 뺨을보듬고 그녀의 입술에 입 맞췄다. 주변에는 아직 기사와병사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망토가 벗겨져 로제타의 금이 가서 부어오르기 시작한 팔이며 엉망이 된 드레스가 드러났다.

분노한 미카엘이었으나 로제타를 일단 아까의 자리에 다시 앉히고 그녀의 상처부터 치료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당신을납치했던 자들은 어떻게 하고…."

"그자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저도 몰라요. 저를 동굴에다 두고 떠났는데…."

말을하던 로제타는 멈칫했다. 정령에 대한 것을빼놓고 설명하기 어려워서였다. 만약 정령에 대한 말을꺼내면….

'내가 빙의자라는 걸 털어놓는다고 했어.'

그 사실에 덜컥 겁이 났다. 사실 내가 로제타가 아니라는 사실을안다면 미카엘은 어떻게 나올까? 지금까지 주었던 애정을모두 거둬 가고 속았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사실을털어놓아도 무조건적인 애정을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기대일 것이다.

두려웠으나 한편으로는 걱정스럽기도 했다. 도대체 왜, 정령이 자신의 존재를 미카엘에게 숨기라 한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였다.

'절대 좋은 의도에서는 아닐 거야.'

자신이 모르는, 미카엘에 대한 음모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령은 로제타에게 있어 결코 좋은 존재가 아니었으니…. 미카엘에게도 그럴지 모른다.

오늘 정령이 해놓은 짓을생각해볼 때, 숨기고 있을수만은 없었다. 앞으로 그 정령에게 계속 협박당하며 살기도 싫었다. 오늘의 일을숨긴다면, 정령은 그 사실이 로제타의 약점이라 생각하고 그것으로 계속 압박할 터였다.

"…로제타?"

다시 눈물을흘리는 로제타의 모습에 미카엘은 당황했다. 치유 마법이 제대로 들어 팔의 붓기가 빠지고 멍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우니, 무언가 잘못되었나 싶었다.

"어디, 다른 곳도 아픕니까?"

"아, 아니에요."

로제타는 울면서 미카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사실을말한다면 미카엘은 다시 이 품을허락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눈물이 멎지 않았다.

"로제타…."

미카엘은 당황하면서도 로제타를 마주 끌어안았다. 그 조심스러운 손길에 로제타의 입에서는 서러운 울음이 새어 나왔다.

카일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훔쳐보고는 얼른 말을가져오게 했다. 위치가 위치인지라, 마차를 가져오기는 어렵고 말을타고 내려가야 했다.

***

동굴 속에 있는 궤짝에, 그것도 땅에 파묻혀 있었다는 얘기에 미카엘의 얼굴이 굳었다. 미카엘은 일단 공작부인을찾았다는 소식을함구하도록 하고, 기사들을반으로 나눠 반은 추적하게 하고, 반은 이 근방을수색하는 척하게 했다.

또한 병사들에게 동굴을정돈하게 하고, 십여 명의 기사들에게 동굴 안에서 잠복해있을것을명했다.

미카엘은 로제타가 해준 얼마 되지 않는 얘기를 듣고, 납치범들이 양측이라 추측했다. 한쪽은 로제타를 납치한 후에 소란을피우며 달아나는 미끼였고, 나머지는 이 동굴로 찾아와묻혀 있던 로제타를 데려갈 자들이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거라 믿겠다."

잠복을맡긴 것은 로제타의 호위를 맡았던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호위 대상인 공작부인을남겨 두고 모두 잠이 든 중죄가 있었기에, 조용히 머리를 숙였다. 그들로서는 공작님이 다시 기회를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었다.

미카엘은 자신의 망토로 로제타를 감싸 같이 말에 올랐다. 말을타고 산을내려가니, 공작가의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기사들은 주변을경계하며 마차의 문을열었다. 지켜보는 이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미카엘은 로제타를 안은 채로 같이 마차에 올랐다.

마차의 문이 닫히고 다급히 아덴 공작가로 향했다.

***

서쪽 성의 한 방에 숙소가 잡힌 아이리스는 불안한 듯 낯을흐렸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별 내용이 아닐 거라고 여기기는 했으나…. 중요한 사실을숨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이것 때문에 로제타가, 아니! 아이리스가 죽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진짜 아이리스는 진풀잎에게 몸을빼앗기고, 그녀의 침묵으로 인해목숨까지 잃게 된다. 진풀잎은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가 들은 게 무슨 중요한 말이라고….'

그보다는 본성이 아닌 서쪽 성에 숙소가 잡힌 것이 불안했다. 서쪽 성에서 마물이 나왔다는 소식을들었는데, 일부러 서쪽 성의 손님방을배정해주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만 가!'

라는 집사의 암묵적인 의사 표시 같았다.

아이리스의 꾀병을눈치채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안 나갈 거지만 말이야.'

어떻게 밀고 들어온 아덴 공작가인데, 그냥 돌아가겠는가! 때마침 일어난 강도 사건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그녀에게 도움을주고 있었다.

우선 아덴 공작가에서 머물 구실을만들어 주었고, 둘째로는….

'으음~. 이건 인정하면 안 될 것 같은데. 완전 악녀의 사고방식이야.'

거기다 공작부인의 납치에 신전의 마차가 사용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아덴 공작가에서 신전 측에 책임을물을수도 있었다. 물론 신전 측에서도 피해자일 뿐이었지만, 성녀의 경호를 소홀히 했다는 비난은 면치 못할 것이다.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지! 옷을벗으라고 했을때는 무서웠지만, 이렇게 아덴 공작가의 성에 들어올 수도 있었고!'

이 성에는 패트릭도, 제럴드도 있었다. 미카엘이 그녀에게 냉랭한 것은 슬픈 일이지만, 로제타가 죽게 된다면 달라질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다. 이런 생각은 너무 사악하잖아. 좋은 생각 하자~. 이런 생각 하면 안 돼."

그러나 생각이 자꾸만 그리로 기울었다. 로제타 휘르센은 원래 죽을운명이었으니까. 그러니 죽게 되어도 자신의 탓이 아닌 것은 아닐까? 모든 운명이 제자리를 찾을뿐이었다.

"으음~, 아니지. 그럼 미카엘도…."

진풀잎이 아는 원작은 원작1뿐이었다. 원작1에서는 미카엘도 죽었다. 권의 말미이기는 했으나 진풀잎은 그 미래를 바꿀 생각이었다. 그녀의 최애는 미카엘이었으니까.

'나는 미카엘을구원해주려는 것뿐인데. 왜 얘기가 이렇게까지 변해버린 거지?'

심지어 자신이 아닌 로제타를 사랑하고, 그녀와결혼까지 해버렸다. 원작에서도 미카엘은 아이리스와결혼까지는 가지 못했다. 그저 아이리스를 감금하고 그녀의 사랑을바랐을뿐이다.

'아이리스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아이리스이고, 그녀는 로제타였다. 로제타는 사랑받지 못한 채, 이자벨의 음모에 휘말려 죽을운명이었다. 그렇다면…, 그 운명에 따르는 게 좋지 않을까? 어차피 그녀는 엑스트라니까 말이다.

'미카엘은 주요 등장인물이니까, 달라! 마지막에 미카엘이 죽고 패트릭과 이어지기는 했지만, 80% 이상의 지분을차지하는 미카엘이 남자주인공이라고! 그러니 미카엘은 살아야 해!'

진풀잎, 지금은 아이리스인 그녀는 제멋대로 결론을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제타가 죽으면 미카엘도 원래대로 돌아오리라…. 그녀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

마차는 공작가의 정문을지나 본성으로 향했다. 본성은 다른 성과 구름다리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는 해도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곳이었다. 들어가는 방법 또한 복잡하기에, 로제타와호위기사들 또한 본성이 아닌 북쪽 성을향했었다.

물론 북쪽 성이 많은 기사들이 포진하고 있는 역할적 특성이 있어서이기도 했다. 미카엘은 뒤늦은 생각이었지만, 북쪽 성에서 기다리라고 했던 결정을후회하고 있었다.

마차가 본성의 또 다른 입구를 통과하자 육중한 철문이 닫혔다. 미카엘은 망토로 로제타의 모습을머리끝까지 감싸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로제타를 안아 든 채로 본성의 저택으로 들어갔다.

본성에는 매우 충성심이 깊은 하인들만이 남아 있었다. 카일이 집사와시녀장에게 미리 연락하여 준비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로제타가 무사하다는 사실을듣고, 모든 준비를 마친 채 기다리고 있었다.

"로제타, 저들을따라가서…. 쉬고 있어요. 저도 금방 올라가겠습니다."

미카엘의 말에 로제타는 떨어지기 싫으면서도 그의 팔에서 내려왔다. 미카엘도 이대로 로제타를 데려가 시중을들어 주고 싶었지만, 그녀의 안전을위해해야 할 일이 있었다.

로제타가 시녀들에게 둘러싸여 위층으로 올라가는 것을보고, 미카엘은 제 휘하의 마법사들을불렀다. 그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정령의 마력이 든 유리병을내밀었다.

기사와병사들에게서 추출한 정령의 마력은 총 세 병이었다.

"정령과 계약한 마법사가 있다. 마법사는 찾는 즉시 혀를 뽑아 버리고, 정령은 봉인해라. 내가 직접 소멸시켜 버릴 것이다."

"알겠습니다, 각하."

마법사들을보낸 미카엘은 부관과 같이 지하로 내려갔다. 아덴 공작가의 성에는 강력한 마법진이 깔려 있지만, 평소에는 사용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대개는 저주를 방비하는 목적으로만 사용되고 있었다.

수많은 기사와마법사들로 지켜지고 있었기에 그러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그들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꼴을보고 있자니 부아가 치밀었다.

'원흉이 밝혀질 때까지 로제타를 섬으로 대피시킬까?'

당장 로제타가 무사한 사실을밝힐 수 없으니 그러는 것도 좋은 생각일 수 있었다. 미카엘은 일단 마법진에 마력을불어넣어 작동시켰다.

바깥에서는 마법진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감지할 수 없지만, 안에서는 공기가 달라진 것이 느껴졌다. 이로써 기사들을잠재웠던 정령과 같은 존재는 침입할 수 없게 되었다.

'로제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녀가 험한 취급을당했다는 것은 차림새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겉만 보아서는 생매장이라도 당한 것 같았다. 거기다 로제타는 전부를 말하지 못했다. 곁에 다른 사람이 있어서일 수도 있고….

'아니,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다.'

그 짧은 사이, 그와같은 일이 벌어졌을거라고 상상하기는 어려웠다. 거기다 로제타는 순순히 시녀들을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로제타는 미카엘이 안아 드는 것조차 싫어했을수도 있었다.

'로제타가 내게 무언가 얘기하고 싶은 표정이었으니…. 올라가면 얘기를 들을수 있을것이다.'

미카엘은 얼른 지하 석실에서 나와걸음을서둘렀다. 한시라도 빨리 로제타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자신이 아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 이렇게 안심이 되는 줄은 몰랐다. 시녀들은 로제타를 위로하며 목욕탕으로 데려갔다. 엉망이 된 드레스를 벗기고 몸을 씻는 동안 로제타는 자꾸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미카엘이 날 쫓아내면…, 이 사람들과 만날 일도 없겠지.'

미카엘의 마음이 여전할 거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미카엘이 그녀가 모르는 어떤 모습을 보일까 봐. 사실을 털어놓으면 자신을 미워할까 봐.

'불안해.'

따스한 물로 목욕을 하고 머리를 감고…, 준비되어 있는 실내복으로 갈아입었다. 욕실 바깥으로 나와 머리 손질을 받고 있자니 미카엘이 방으로 들어왔다.

"마님의 나머지시중은 내가 들 것이다. 너희들은 이만 돌아가 봐도 된다."

마물이 나타났던 것이 한밤중이었다. 밤을 꼬박 새우고 아침이 되었을 무렵에 로제타가 납치되고, 그녀를 찾느라 한시도 쉬지못했다.

로제타를 막 찾았을 무렵에는 미카엘도 차림이 형편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로제타가 씻는 사이 그도 위층으로 올라와 재빨리 씻고 옷을 갈아입은 참이었다.

미카엘은 얼른 로제타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이마에 입 맞추고 꼬옥 끌어안았다.

"로제타…. 정말 많이 걱정했습니다."

제 심장을 잃어버렸다해도 이렇게 두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다시 찾았으니 다시는 잃어버리지않을 거라고 맹세하며 미카엘은 로제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로제타는 그런 미카엘의 모습에 왈칵 눈물이 흘렀다.

"로제…타? 왜 그럽니까? 어디 아픕니까?"

"해야 할 말이 있어요."

처연한 로제타의 표정에 미카엘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자벨은 끔찍하고도 잔인한 여자였다. 미카엘과 로제타를 상처 입히기 위해 무슨 일이든 벌였을지모른다는 생각에, 미카엘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로제타에 대한 마음은 티끌만큼도 변하지않을 테지만, 로제타가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겨지는 것 같았다.

"말씀해 주십시오."

미카엘은 가능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로제타에게 물었다. 로제타가 눈물을 떨구며 하는 말은 미카엘이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제가 미쳤다고 생각하지말아 주세요. 저는 사실, 다른 세계에서 왔고…, 제 이름은 로제타가 아니라 윤승아예요. 진짜 로제타에게 몸을 빼앗긴."

이어지는 이야기에 미카엘은 그저 멍해졌다.

***

집 안에서 쉬고 있다가 별안간 몸을 빼앗긴 것과 정령과의 만남…, 그리고 로제타 휘르센으로서 살았던 삶에 대한 설명에 미카엘은 그저 듣기만 했다. 그러나 멍한 표정과는 달리 그는 머릿속으로 자신이 아는 로제타의 모습과 그녀가 빙의한 때를 계산하고 있었다.

미카엘은 데뷔탕트까지는 경솔한 반응을 보였던 로제타의 태도가 변한 것을, 단순히 그녀가 철이 들었던 것으로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설명을 듣고 나니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그녀는 철이 든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된 거였다.

패트릭 란스필드에 대한 반응이나, 사람들에 대한 달라진 태도…. 전부 그녀가 다른 사람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로제타는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정령이 기사들을 잠재우고 납치범에게 협력한 것이며, 구해 주었다가 다시 배신한 일까지도.

동굴에서 흙이 분출된 것처럼 흩어져 있던 광경을 떠올리자 납득이 되었다.

자연계의 정령은 대부분 정령사들과 계약을 맺지않으면 인간에게 관여하지않았다. 윤승아가 겪었던 일과 같은 마법을 부릴 수 있는 정령은 매우 특별한 존재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당신은 언젠가는 당신의 세계로 돌아가는 겁니까?"

"아, 아니요. 다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정령이 말했어요. 거짓말은 할 수 없는 것 같으니까 사실일 거예요."

로제타의 대답을 들은 미카엘은 그제야 안도했다. 로제타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생각이라고 하면 미카엘은 어떻게 해서든 저지할 생각이었다.

그는 로제타의 외모를 보고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사랑에 빠진 이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윤승아였다. 만약 그녀가 기어이 원래 세계로 돌아가려고 한다면, 미카엘 또한 그녀의 세계로 쫓아갈 생각이었다.

"돌아가고…. 싶지는 않습니까?"

미카엘은 물으면서도 망설였다. 로제타의 표정이 모든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돌아갈 수 없는 것을 아는걸요. 돌아갈 수 있다면…, 미카엘 님과 결혼하지않았을 거예요."

"제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삼키며 미카엘은 로제타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제가 정말 잘하겠습니다. 원래 세계의 그리움을 전부 채울 수는 없을 테지만…. 이곳에서 더 행복할 수 있도록……. 그러니…."

제발이라는 말은 차마 튀어나오지않았다. 재난에 가까운 방식으로 이쪽 세계에 빙의된 로제타에게 너무 염치없다는 생각이 들어 꺼내지못했다.

그런 거친 방법으로 몸을 빼앗긴 로제타가, 또다시 자신의 부인이 되어 이런 일에 휘말린 것이다.

로제타의 납치가 성공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정령의 탓이었지만, 미카엘은 지키는 데 실패한 것은 마찬가지라 여겼다.

"제 말을 믿으세요?"

"당신이 제게 이런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증거가 있으니까요."

미카엘은 기사들에게서 정령의 마력을 추출해 낸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지금 이 저택에 마법을 발동시켜서 정령이 출입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까지도 말했다. 로제타는 놀란 눈치였다.

"그런 게 가능해요?"

"정령을 부리는 정령사의 존재가 수천 년 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마법도 그에 따라 발달되었지요."

이 세계에서는 상식적인 얘기였지만, 지금의 그녀는 모를 수도 있었다. 로제타의 몸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모든 지식을 완전히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으므로.

저를 불쾌하게 생각하기는커녕 살짝 안도한 듯한 미카엘의 태도에 로제타는 조심스럽게 그를 살폈다.

"제가 기분 나쁘지는 않으세요?"

"로제, 아니…."

"그냥 로제타라고 부르세요. 이 몸을 가지고 있고…. 앞으로도 이 몸으로 생활해야 하니까. 로제타라고 불리는 게 편해요."

"불쾌하지는 않습니까? 그 로제타는 당신의 육체와 인생을 빼앗은 적일 텐데."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미카엘은 결코 용서하지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의 로제타는 진짜 로제타의 가족에게도 친절하게 대해 주고 있었다.

"밉지만…. 미카엘 님이 다정하게 불러 주시는 게 좋았으니까요. 그 이름도 이제 싫지않아요."

로제타가 뺨을 물들이며 말하자 미카엘의 얼굴도 붉어졌다. 로제타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소리를 하자마자 떠오른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돌아간다고 하면 어쩌나.

내가 따라가는 것은 가능한 세계일까?

로제타가 자신을 버리고 갈까 두려웠으나, 로제타는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해 주었다. 로제타에게는 미안했지만, 미카엘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뛸 듯이 기뻤다.

이제 그녀 없이는 안 되는 것이다. 로제타에게는 너무나도 미안했지만, 그녀가 계속 곁에 있어 주기를 바랐다.

"그래도…. 이쪽이 진짜 이름이잖습니까. 스아…."

미카엘의 발음에 로제타는 피식 웃었다. 받침이 힘든 모양이었다. 로제타의 웃음에 미카엘은 다시 연습해 보는 모양이었으나 제대로 된 발음은 듣기 어려웠다.

"괜찮으니까요. 저는 로제타라는 이름도 좋아해요. 이제 이 몸도 완전히 제 것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점점 로제타의 기억이 섞여 들어와 타인이라는 의식도 사라져 갔다. 거기다미카엘에게 사랑받으면 사랑받을수록, 온몸의 감각이 깨어나서인지더더욱 자신의 몸이란 생각이 들었다.

"미카엘 님이 로제타라고 불러 주는 목소리를 좋아하거든요. 그러니까…."

"알겠습니다, 로제타…."

미카엘은 로제타의 이마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그래도 내 로제타는 당신뿐일 겁니다. 온 우주에서 오직 당신 하나뿐이에요. 제가 사랑하는 로제타는…."

"저도,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뿐이에요."

강제로 이쪽 세계에 살게 되면서, 그저 살아남는 것만 생각했다. 이자벨이 줄곧 그녀를 노려 괴롭혀 왔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휘말려 원작의 줄거리대로 사형을 당하게 될까, 얼마나 노심초사했던가!

그 와중에 이 세계에 정을 붙이는 것은 무리였다. 누구에게도 마음 붙이지못한 채로, 외로웠던 로제타의 힘이 되어 준 것은 미카엘이었다.

그전에 마리나 몇몇 사람들이 있었지만, 로제타의 마음은 그들에게 닿지못했다. 그들이 결국 보호하려고 하는 것은 '진짜 로제타'라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카엘은…. 처음부터 끝까지그녀만을 알고 있었다.

여기, 지금 있는. 바로 이 로제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것을 해 주었던 것이다.

"사랑해요, 미카엘 님. 저도 온 우주에서 당신 하나뿐이에요. 계속 그럴 거예요."

다시 떠올리자면 오글거릴 순간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 말이 어색하지않았다. 미카엘은 로제타의 입술에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고, 로제타는 눈을 감았다.

드디어 진짜 자신이 받아들여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

패트릭은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시간이 많다고 여겼다. 이자벨이 하루아침에 잡히는 것도 아니니, 시간을 두고 로제타와의 거리를 좁히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이 터지고 말았다.

아덴 공작부인은 납치되었고, 패트릭은 기사단장인 윌리엄과 같이 납치범들을 추적하는 무리에 합류했다.

당연히 미카엘이 로제타를 보호했으리라 생각했으므로…. 패트릭은 분노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 둔단 말인가! 이자벨 카룰리아스가 로제타에게 해코지하려 했음은 모두가 알고 있었던 사실인데!

패트릭은 끝없는 분노에 사로잡힌 채로 추적하는 것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황제가 아덴 공작가에 기사단을 보낸 것은 이유가 있어서였던 것이다. 황제가 아끼는 기사단장 중의 하나인 윌리엄은 추적에도 능한 이였다.

아덴 공작인 미카엘이 윌리엄에게 지시한 것은 납치범들의 생포였다. 1차적으로 공작부인의 안전을 명령하지않은 것을 윌리엄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윌리엄이 판단하기로, 미카엘이 로제타에게 보인 감정은 진심이었다. 미카엘은 로제타가 허락하기만 한다면 그녀의 그림자에도 입을 맞출 이였다.

'벌써 공작부인을 확보한 것인가?'

아니라면 공작이 그렇게 지시했을 리 없었다. 공작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공작부인의 안전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윌리엄은 아직 그 추측을 기사단에게 말하지않았다. 그저 추측일 뿐, 공작이 그에게 말해 준 것은 아니니 입을 다물고 있어야 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이 쫓는 쪽은 미끼일 테지만.

미끼라 해도 잡아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말을 갈아탄 것 같습니다."

앞서 흔적을 확인하라 보낸 병사가 돌아와 보고했다. 윌리엄은 고개를 끄덕이고 추적하라고 일렀다. 그들에게는 마법사가 있었고, 마법사가 기사들이 탄 말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저들이 무슨 속셈으로 미끼를 붙인 것인지는 모르나, 결국 실패하고 말 것이다. 황가에 대항했던 모든 자들이 그러했듯이.

윌리엄은 한시라도 빨리 아덴 공작가로 복귀하기 위해 추적을 재촉했다.

사촌 여동생이 보낸 편지이기는 했으나 내용물은 부친인 빌헬름 발레르가 보낸 것이었다. 급히 수도로 돌아오라는 내용이었다.

로건은 아이리스가 신경 쓰이기는 했으나 일단 루긴을 떠났다. 어차피 위험한 것은 아덴 공작부인과 공작이었다. 아이리스는 무사할 터였다.

발레르 공작가는 부유했기에 로건은 순간이동 마법진을 사용하여 하루 만에 수도에 있는 발레르 공작가에 돌아갈 수 있었다. 가장 먼저 그를 반긴 것은 데뷔탕트 후, 공작가의 후원을 받고 있는 사촌 여동생이었다.

"오라버니, 오셨어요?"

활짝 웃는 그녀를 보며 로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촌 여동생은 최근 마음이 맞는 이와약혼을 해서 행복해 보였다.

"그래. 지금 막 도착했다. 아버님은?"

"공작님은 집무실에 계세요. 큰오라버니와함께요."

사촌 여동생의 말에 로건은 집무실로 향했다. 출발하기 전에 루긴의 마법사에게 들러 돌아가겠다는 소식을 전했으니, 그가 올 것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공작저의 집무실은 2층에 있었다. 노크를 하자 곧바로 들어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로건."

집무실에는 빌헬름과 공작가의 후계자이자 로건의 형인 길버트와몇몇 가신들이 회의를 하고 있었다. 심각한 분위기에 로건은 낯을 굳혔다. 자신이 잠시 수도를 떠나 있는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아버님. 돌아왔습니다."

"잘 돌아왔다, 로건."

빌헬름이 가신들을 쳐다보자 그들은 서류를 가지고 흩어졌다. 남아 있는 것은 길버트와빌헬름뿐이었다. 우직한 길버트는 나무랄 데 없는 기사였으나 정치적인 감각은 다소 부족한 편이었다. 로건은 빌헬름이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문이 닫히는 것을 지켜본 로건이 아버지와형에게 물었다. 빌헬름과 길버트는 근심스러운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고는 말을 시작했다. 민망한 사안인지 입을 연 것은 길버트였다.

"공작가의 영애들 중에 황제의 아이를 가진 자가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황제가 황비를 총애하고 있다는 것은 딱히 비밀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내사랑이 각별한 듯 보였던 자들도 바람을 피우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단지 소문 때문이라면 저를 부르실 리가 없겠지요. 그 공녀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로건의 물음에 빌헬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님께서는 그 공녀가 황제의 아이를 가졌다고 확신하시는군요."

"확신을 하는 자는 내가 아니라, 그 공녀의 부친이다. 그는 자신의 딸이 가진 아이가 차기 황제가 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어.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으냐?"

황제가 왜 자식을 가지지 않으려 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도 황비도 육체적으로는 건강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사람들은 단순히 황제가 제 동생인 미카엘 황자에게 황위를 물려줄 생각으로 그러한 것 같다고만 여기고 있었다.

미카엘 황자가 황위를 물려받든, 그 자식이 물려받든지 간에 황제의 관이 아덴가의 핏줄로 넘어갈 것임은 모두가 예견하고 있는 바였다. 그런데….

"사실이라 해도 폐하가 알게 되신다면 낳게 두지 않으실 겁니다."

알렉시스는 잔혹한 면이 있는 황제였다. 거기다 미카엘에 대한 총애가 비정상적인 구석이 있었다. 그 아이가 태어나 제 동생을 위협하는 존재가 된다고 여기면…. 태어나지도 못하게 만들 가능성이 컸다.

"그 공작도 그럴 거라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공녀를 보호하기 위해 우리 가문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고."

"……."

로건은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죽이는 것과 태어난 아이를 죽이는 것은, 안타깝게도 그 무게가 달랐다. 거기다 황제가 아무리 잔혹한 자라 한들, 태어난 제 자식을 쉽게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

"아버님은 어떻게 하고 싶으십니까?"

"가장 안전한 길은 황제 부부의 굳건한 총애를 받고 있는 미카엘 황자를 지지하는 것일 게다. 그러나…. 알렉시스 황제는 미카엘 황자가 어렸을 때 무척이나 그를 아꼈었다. 태어난 아이를 본다면 마음이 바뀔 수도 있어."

"그건 아이가 무사히 태어났을 때의 얘기입니다. 또한 그 공작 또한 자신의 딸에게 속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제 자식을 제대로 보는 부모란 거의 없으니까요."

"황제의 자식이 아닐 거라 생각하는 거냐?"

길버트의 질문에 로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그저 황비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생기지 않는 정도가 아니었다. 아이를 만들려고 하지 않는 것에 가까웠다.

그러니실수로 다른 여자와관계하여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정치적인 성향이 강하고 날카로운 황제의 성정에 맞지 않는다 여겼다.

"혹여 그 공녀가 일부러 황제에게 접근하여 자식을 만들었다 해도 힘든 일입니다."

"하나…. 공작은 확신하고 있었다. 황제와자신의 딸이 황비의 눈을 피해 몇 차례 관계를 가졌다고 말이다."

빌헬름이 말하는 투로 보아 그는 그 공작에게 줄을 대고 싶은 모양이었다. 로건은 반대하고 싶은 입장이었다.

발레르 공작가는 이미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었다.

설사 그 공녀가 무사히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황제의 자식이 된다 할지라도 후궁 이상의 자리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더더군다나 그런 방식으로 자식이 생긴다면 황제 부부가 마음을 바꿔 자신들 사이에서 아이를 가지려 할 수도 있었다.

"아버님. 폐하께서는 매우 건재하시고 황위 승계는 먼 훗날의 일일 것입니다. 황비 전하께서 매우 건강하시니…, 그 공녀의 말이 사실이라 해도 황비 전하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다마는…. 나는 두 분 사이에서 자식이 태어나지 않은 것이 황비 전하 때문인 것 같다. 황비 전하께서 그리도 아이를 좋아하시는데, 왜 자식이 없으시겠느냐?"

아네트가 미카엘 황자의 스승이던 시절에 그를 매우 아꼈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로건은 빌헬름의 마음이 기울어져 있는 것을 눈치채고 눈살을 찌푸렸다.

"하면, 그 공작가를 보호함으로써 우리 집안이 얻는 이익은 무엇입니까?"

"그 가문의 장녀가 길버트와혼인하기로 했다. 또한 공녀가 낳은 자식이 아들이라면, 우리 집안의 여식과 혼인하기로 약조했다."

빌헬름의 대답에 로건은 길버트를 바라보았다. 길버트는 공작가의 후계자이기에 이미 약혼녀가 있었다. 약혼녀와의 사이는 온건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길버트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약혼을 깨고 다른 집안의 여식과 결혼하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기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약속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혹여 그 공녀의 자식이 황제가 된다 한들, 말을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공녀에게 증거를 서류로 남기게 할 것이다. 아들이든 딸이든 우리 발레르 공작가와연을 맺기로 말이다. 혹여 그러한 결혼이 성사되지 못한다 해도, 그 서류를 빌미로 많은 것을 받아 낼 수 있을 것이다."

로건은 머리를 굴렸다. 그는 이 소문이 결국 황제의 귀에 들어갈 것임을 알고 있었다. 황제는 그들의 달콤한 꿈을 산산조각 내고도 남을 자였다.

거기다 황비인 아네트가 있었다.

그녀는 평범한 여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지금은 황비의 관을 쓰고 있어 체면을 지키고는 있지만, 불의 정령왕과 계약한 만큼 불같은 성정을 지닌 여인이었다.

"미카엘 황자는 황위에 관심이 없는 자다. 그는 휘르센 백작가의 영애와결혼을 함으로써 그것을 증명해 보였다."

"…아버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일단은 그 영애로부터 서류만 받아 놓으셔야 합니다. 하나 저희 쪽에서 그 집안에 도움을 주고 있다는 증거는 무엇이든 남겨 놓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업적인 연계만을 허락하십시오."

"어쩌자는 것이냐?"

빌헬름의 물음에 로건은 표정을 굳혔다.

"당장은 결론을 내기 어렵습니다. 그쪽에서 재촉을 한들 아무것도 약속해 주시면 안 됩니다. 자칫 저희 집안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클 수 있습니다. 형님의 약혼 또한 그때까지 깨서는 안 됩니다."

길버트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그는 자신의 약혼녀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굳건한 우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녀와좋은 결혼생활을 유지해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직 정보가 많이 부족하고…. 무엇보다 황비님께서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가 걱정스럽습니다. 만약 그 일이 사실이고 황비께서 그 사실을 아신다면, 폐하와의 사이가 틀어질 수도 있습니다."

알렉시스가 황제이기는 하나 아네트를 강제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원한다면 라스탄의 황궁을 모조리 불태워서라도 황비의 자리를 버리고 떠나 버릴 이였다.

그 말에는 빌헬름도 골몰하는 눈치였다.

그대로 그 공녀를 후궁으로 들이고 자식을 받아들인다면 그 패가 쓸모가 있을 테지만…. 황제가 다른 여자를 들여 자식을 본다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사랑하는 아내와헤어지게 만든 자식을 황제가 총애할지도 의문이었다.

로건은 갑자기 이런 일이 터지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고 여겼다. 알렉시스가 여색을 즐기는 이였다면 모를까, 그는 황비인 아네트 이외에는 흥미가 없었던 이였다.

황비를 들이기 전에도 여인들과 매우 담백했던 그가 갑자기 이런 사고를 친다? 거기다 소문이 나돌고, 그 공작가에서는 벌써부터 세력을 모으고 있다니….

'좋지 않은 느낌이 든다.'

기이하게도 이 상황에서 로건은 로제타가 생각났다. 수도에 있지도 않은 여인이었지만, 왜인지 그녀가 이 상황에 휘말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로제타의 전 호위기사들은 어둠 속에서 기척을 숨기고 있었다. 그들은 호위기사의 임무를 맡았었지만 잠복과 매복도 가능한 이였다. 단지 잠시 직책이 호위로 옮겨졌을 뿐이다.

미카엘이 그들에게 아무런 정보도 내어주지 않았기에, 그들은 자신들이 정령의 마법에 걸렸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저 적 중에 마법사가 있어 자신들에게 마법을 걸어서 잠이 들었거니생각할 뿐이다.

그래서 이번 그들은 아덴 공작가에서 지급받은 마도구를 하나씩 몸에 걸치고 있었다. 마법에 내성을 가지게 하는 마도구였다.

그들은 다시 한번 기회를 준 공작에게 감사하며 칼을 갈고 있었다. 눈 뜨고 코를 베인 것보다도 뼈아팠다. 검집에서 검을 빼 보지도 못한 채로 호위 대상을 잃었으므로.

'마법사로 보이는 자는 일단 베고, 자결하지 못하도록 기절시켜야 한다. 사지가 멀쩡히 붙어 있을 필요는 없으니, 곱게 생포할 필요는 없다.'

미카엘의 부관인 카일이 지시한 내용이었다. 아마도 그들의 심문은 미카엘이 직접 하려고 들지 모른다.

기사들은 살기를 억누른 채로 때가 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들이 입은 수치가 큰 만큼, 커다란 몸을 구긴 채로 몇십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데도 불만의 목소리 없이 조용했다.

그들의 의지는 조용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사실 그들은 공작과 공작부인에 연관된 소문에도 로제타에게 호의적인 마음을 가진 자들은 아니었다.

그 소문을 시녀들은 로맨틱하다고 좋아했지만, 기사들이 보기에 공작부인은 공작님의 곁을 지키기에는 다소…, 솔직하게 말하자면 꽤 부족하다 여겼다.

특히 용모 쪽이.

그래서 임무를 받고 시들한 마음이 있었다.

물론 그들은 아덴 공작가에 충실한 자들이었다. 기사의 맹세를 지키고, 공작의 명을 받들어, 공작부인을 지키다가 목숨을 잃을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가짐이었으므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의 각오가 어딘가 부족하여 그런 마법에 진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심지어 병사들 중 하나가 마법에 저항이 있는 체질이어서 먼저 눈을 떠 공작에게 알리러 갔으므로, 수치심은 더 커졌다.

이번에야말로….'

이미 공을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 수치에 대한 설욕을해야 했다. 공작가의 누구도 '아직은' 그들을책망하지않았지만, 이 일을제대로 처리하지못한다면 기사로서 두고두고 한이 생길 것 같았다.

바스락.

하루가 지나고 밤이 되어 달이 떠올랐을무렵.

풀숲을헤치고 다가오는 기척이 있었다.

길이 있는 곳이라면 모를까, 이 근방에는 제대로 되어 있는 길은 없었다. 수색을하며 병사들이 만들어 놓은 길은 있었으나, 그 길을지나친다 해도 기색 없이 돌아다니는 것은 불가능했을것이다.

달빛이 들어오는 동굴의 입구로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기사들은 몸을숨긴 채로 숨소리조차 내지않았다. 고개를 들어 입구를 살펴보는 우도 범하지않았다.

밤이라 해도 인광이 있는 법이었다. 기사들은 이미 기척만으로 그들의 숫자와 대략적인 체중, 그리고 무장 상태를 가늠하고 있었다.

동굴로 들어온 자들은 모두 여덟 명이나 되었다. 매복하고 있는 아덴 공작가의 기사들은 열아홉이었으니 승패는 뻔한 것이었다.

기사들은 형형히 눈을빛내며 그들이 더 안으로 들어가기를 바랐다. 적의 누군가가 등불을켜서 바위 위에 올려놓고, 동굴을둘러보기 시작했다.

저들의 일당은 감히 그들이 보호했던 분을궤짝에 넣어 땅에 묻었다고 했다. 연약한 공작부인께서 어떻게 나오신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병사들은 공작부인께서 궤짝을부수고 땅을판 것이 아니냐고 수군거렸었다.

그렇게 말할 만큼 궤짝은 허술한 것이었기에, 흙의 무게를 겨우 견딜 만한 장식도 없는 것이었다.

마법사들은 공작부인께 마도구가 있었을것이라 추측했다. 아니라면 그녀가 홀로 탈출한 상황이 말이 되지않으니까.

어느 쪽이든 기사들의 입장에서는 송구스러운 일이었다. 생매장당하는 상황도 끔찍한데, 구해 주러 오는 이는 한참 늦었다.

공작부인께서 스스로 탈출하지않았더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만으로도 두려운 일이었다.

"이쪽이다."

그르렁거리는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적들은 한 방향으로 모여들었다. 숨겨져 있던 삽을찾아서 땅을파헤치는 듯했다.

조금만더….

저들이 땅을파헤치는 데 몰두하여 주의가 흩어졌을무렵, 공작가의 기사들이 숨어 있던 장소에서 빠져나와 그들을포위했다.

으악! 아아악!

망을보는 자는 동굴 밖에 있었다. 그들은 동굴 안에서의 기습은 예상치 못했던 것이 분명했다.

수십 명의 기사들이 일제히 몰아치자 망을보던 자는 힐끗 안을살피고는 그대로 등을돌렸다. 뒤따른 것은 안쪽의 기사들이었다.

두 명의 기사가 뒤를 쫓아 검기를 날리고 석궁을쐈다. 망을보던 자는 다리를 맞고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동굴 안의 싸움은 무차별적인 살육에 가까웠으나, 실제로 죽은 이는 없었다. 기사들은 그들이 쇼크로 죽지않도록 응급처치를 하고 약을먹였다. 습격에 끼지않고 뒤에 서서 상황을살피던 마법사가 수정구를 꺼내 아덴 공작가에 연락했다.

납치범의 일당을잡은 것 같다고.

***

보고를 받은 미카엘은 그 즉시 돌아올 것을명령했다. 그러며 마법사 쪽을추적하게 했던 휘하의 마법사들과 연락했다.

로제타와 계약한 그 정령은 마법사가 없이 자유로운 정령일 것이다. 로제타로부터 그 정령이 해 온 소행을들은 미카엘은 큰 기대는 하지않았다.

무려 다른 세계에 있는 인간의 육신을빼앗을정도의 마법을구사할 정도이니, 쉬이 붙잡히리라는 생각은 들지않아서였다.

-…죄송합니다. 정령의 마법에 속아…, 마력이 담긴 유리병 두 개를 잃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마력은 하나인가?"

-네…. 죄송합니다.

거듭 사과하는 마법사들에게 미카엘은 돌아올 것을명령했다. 휘하의 마법사들로서는 정령을잡을수 없을듯하니, 직접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남은 것은 패트릭을데리고 간 윌리엄 쪽인데….

'부르고 싶지않군.'

황제가 황실 기사단을붙여 준 것은 공작과 공작부인을지키기 위함이었으니, 너무 멀리 떨어지게 하는 것은 좋지않을것 같았다. 거기다 납치범 쪽은 미끼 역할까지겸하고 있으니 중요한 정보를 알고 있지는 않을것이다.

잡아 죽여야 하는 놈들이라는 것은 여전하지만.

이번의 사건으로 제법 명확해졌다고 생각했다. 로제타를 납치하려는 이는, 리디아를 죽인 자와 동일인일 것이다.

다만, 이번에는 죽이는 것이 아닌 납치를 하려고 했다.

왜? 어째서….

미카엘은 한 가지결론을내렸다. 가해자가 궁극적인 목적인 '그'와 더 이상은 맺어질 수 없는 신분을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테면 '도망자' 같은.

'이자벨 카룰리아스….'

그녀가 리디아를 죽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미카엘을이용하기 위해 그의 아내인 로제타를 납치하려 들고 있었다.

이자벨을죽여야 하는 이유가 수십 가지는 더 늘어난 셈이었다. 누구보다도 이 소식을기다리고 있던 아네트에게만알려 준다 해도, 그녀가 두 발 벗고 나서서 이자벨을죽이려 할 터였다.

그녀는 죽은 리디아를 자매처럼, 딸처럼 사랑했으니.

미카엘은 통신용 수정구슬에서 마력을거두고 완성된 팔찌를 들어 보였다. 그것은 로제타에게 선물하기 위해 만들던 것이었다. 미카엘은 이번 일을겪으면서 팔찌에 다른 마법을추가했다.

'감히…. 로제타의 인생과 몸을빼앗고도, 죄를 인정하지않고 또 다른 죄를 범했으니……. 대가를 치르게 해 주겠다.'

로제타가 소원에 대한 말을했으므로, 미카엘 또한 마력이 담긴 손으로 로제타의 뺨을쓰다듬어 그 소원의 계약이 남긴 흔적을확인했다.

네 개의 꽃봉오리.

아마도 황궁에 있는 서고를 뒤진다면 그 정령에 대한 정보를 얻을수 있을것이다. 거기다 아네트와 계약한 정령왕의 존재도 있었다.

그 정령은 불의 정령왕이 다스리는 정령들과는 계열이 다르지만, 정령의 왕이니만큼 어느 정도 영향력을행사할 수 있을거라고 보았다.

아마도 아네트는 흥미로워하며 도움을줄 것이다.

남은 것은 놀랐을로제타를 진정시켜 주고 그의 곁에서 마음 붙이게 해 주는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 온 것도 아니고, 다른 세계라니….

'좀 더 신경을써야겠다.'

미카엘은 단단히 다짐하며 팔찌를 매만졌다. 로제타가 기뻐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곳은 안전해.

제 곁에서 얌전히 시중을들고 있는 시녀들을바라보며 로제타는 되뇌었다. 아직 납치의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갑자기 사람들이 잠들고, 정신을차렸을때는 마차의 짐칸에 갇혀 있었으니 아직 두려웠다.

로제타는 책상으로 눈길을돌려 편지의 나머지부분을적어 내려갔다.

무도회에 초청이 되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가문으로 돌아갔다. 돌아가지못한 자들은 마물의 게이트가 되었던 귀족과 관련된 사람들뿐이었다.

미르세 후작과 그 딸도, 수도 귀족이라는 이유로 잠시 심문을받기는 했다.

'나, 나는 몰라! 수상한 자들이 접근해 오긴 했지만…, 몸에 주문을그려야 한다고 해서 거절했다고!'

이번 사건의 피해자는 로제타만이 아니었다. 부상자도 속출했고 사망자도 있었다. 그저 공작가의 기사와 황실 기사들의 대응이 빨라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뿐이다.

로제타가 보내는 것은 그 유가족이나 부상자에 대한 위로 편지였다. 그녀 자신도 피해를 입었지만, 아덴 공작가의 이름이 있으니 가만히 있을수만은 없었다. 공작가 내에서 발생한 일인 만큼 완전히 책임을피하기도 어려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귀족가에서도 로제타를 위로하는 분위기라는 것이다. 사망자의 숫자가 극히 적은 데다가, 참석한 다섯 명의 귀족이 마물의 게이트 노릇을했다는 사실이 알려져서 더욱 그러했다.

그 탓으로 루긴에 머물고 있던 수도 귀족들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게 되었다. 미르세 후작과 그 딸의 경우는 저택에서 쫓겨났을정도였다. 호텔에서도 받아 주지않아서, 감옥에 갇힌 자들을제외하고는 모두 수도로 돌아갈 판국이었다.

'그자들까지내가 신경 써 줘야 할 이유는 없지.'

로제타가 걱정하는 것은 이번 사건으로 인해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을잃은 자들이었다. 이자벨은 결국 잡히겠지만, 죽은 자들은 돌아오지않았다.

공작가에서도 손실은 있었다. 손님들을대피시키다가, 혹은 마물과 싸우다가 부상을입거나 죽은 이가 있었다.

살아남은 자는 공작가에서 치료해 주겠지만, 죽은 자들이 안타까웠다.

로제타는 이 한 통의 편지로 얼마나 위로가 되겠나, 싶으면서도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써 내려갔다.

물질적인 것은 당연히 지원할 것이고, 범인도 결국 잡을것이다. 그저 남은 사람들이 더는 상처받지않기만을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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