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아덴 공작가의 무도회
그날은 일찍부터 루긴의 모든 거리가 들썩거렸다. 무도회에 참석하는 것은 귀족 나리들뿐이었지만, 그 귀족 나리들의 시중을 드는 하인들이 바빠졌기 때문이었다.
무도회장에 가서 귀족들의 시중을 들면 하인들은 거의 식사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미리 든든하게 배를 채워 두기에 각 저택의 주방이 바쁘게 돌아갔다.
심부름꾼들은 주방 하녀의 지시를 받아 필요한 식재료를 사 나르기 바쁘고, 마님과 영애의 시중을 드는 시녀들도 마사지 준비를 하느라 분주했다.
가문의 비법이라며 꿀과 버터로 팩을 하는 귀부인이 있는가 하면, 시내의 마사지사를 큰돈을 주고 불러내어 아침부터 몸을 푸는 귀부인도 있었다.
완성된 정장과 드레스가 속속들이 귀족가의 저택으로 배달되기도 했다.
공작가의 파티에 참석할 때에는 당연히 시종이나 시녀의 차림새도 중요했기에, 그들의 옷도 말끔하게 다림질되어 준비되었다.
주문한 모자와 구두를 든 심부름꾼들이 저택으로 달려가고, 리본이 부족하다, 보석이 떨어졌다면서 실과 바늘을 든 하녀가 달려가기도 했다.
귀족가의 활기가 거리에까지 번져 나온 듯, 시장의 상인들은 모두 활기찬 모습이었다. 그들은 모두 공작가에서 열리는 무도회를 입에 올렸다.
"홀이 그렇게화려하다면서요?"
"천장에서부터 붉은 빛이 쏟아지는 것처럼…."
"마그너스 자작부인이 벼르고 있다나 봐요. 아무래도 남편이…."
"남작께서 이번에 공작부인의 마음을사로잡으려고…."
각 귀족이 사들인 선물과귀부인과영애들의 드레스, 그들이 걸치고 있는 보석과구두, 모자가 화제가 되었다. 거리에 잠깐 물건을사러 온 이들 중에는 이번 무도회에 마부의 조수로 참석하게되었다고 뽐내는 애송이가 있을정도였다.
이 거리에서도 아덴 공작가의 성이 보였다. 저 성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평민들 사이에서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일부 상인들은 아덴 공작가에 납품하는 것을긍지로 여기기도 했다.
"이제 내일이 되면 이번 무도회에서 누가 이득을보고, 실패했는지 알게되겠지! 나는 마그너스 자작부인에게걸겠어!"
한상인이 큰 목소리로 낄낄거리며 호언장담했다.
***
마차가 줄지어 아덴 공작가의 숲을지나가고 있었다. 노을이 지고 어스름이 깔릴 시간이었다. 길을따라 마법의 등불이 늘어서 전혀 어둡지 않았다. 마차에 탄 귀족들은 이곳도 수도의 대로 못지않다면서 가슴을펴고 지나쳐 가는 풍경에 눈길을돌렸다.
공작성의 육중한철문이 열려 있고 수많은 마차들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마부들은 인도를 받아 저택의 입구에 귀족들을내려 주고 정원 한쪽에 마차를 세워 두었다.
시종들이 기나긴 명부에서 귀족의 이름을확인하고 그 가족과친구를 들여보냈다. 초대장을가지고 있는 사람은 파트너 외에도 두 사람을더 데려올 수 있었다.
본래는 초대받은 이의 아들딸들을데려올 수 있게배려한것이지만, 이때만큼은 그들 대신에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백작부인과그 가족분들이라고요?"
시종은 물으며 백작의 뒤에 선 미르세 후작과그의 딸을쳐다보았다.
백작은 사실 딸 내외를 데려오고 싶었으나, 미르세 후작이 큰돈을건네주며 압박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뭘 꼬치꼬치 캐물어! 먼 친척이니 한가족인 셈이지. 들어가세나!"
미르세 후작은 벌컥 화를 내고는 앞장서라는 듯이 손짓했다.
백작이 한숨을쉬고 싶은 얼굴로 시종을쳐다보았다. 시종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구를 지키고 있는 병사들을돌아보았다.
"확인되었습니다. 들어가십시오."
"커흠!"
마치 제가 부당한취급을받았지만 참아 준다는 태도로 미르세 후작이 턱을세우고 계단을올라갔다.
그 모습이 흡사 볏을빳빳하게세운 닭 같다는 생각을하며 시종은 고개를 돌렸다. 백작은 미르세 후작과거리를 벌리고 싶은지 부인과다소 느리게그 뒤를 쫓아갔다.
미르세 후작의 딸이 아직 지나가지 않았으므로 시종은 의아한듯 그녀를 보았다. 요한나는 뺨을설핏 물들이며 말했다.
"고, 공작님은 어디 계시지?"
"본성에 계실 겁니다."
파티가 열리는 홀은 서쪽 성이었다. 아직 한창 손님이 올 시간이니 공작 부부 내외는 파티장으로 오지 않았다. 공작은 업무를 처리하고 있을것이고, 공작부인은 서쪽 성의 어딘가에서 나머지 일을지시하고 있을지 몰랐다.
시종의 대답에 요한나는 금세 시무룩해져서 부채를 든 손을늘어트렸다.
"그럼 언제쯤 오시느냐?"
"모든 귀빈이 참석하셨을때에 오실 겁니다."
애매한대답에 요한나는 벌컥 성을냈다.
"그건 나도 알아! 그 시간이 언제쯤이냐는 거지!"
시종은 뒤에 늘어선 귀족들의 줄을슥 쳐다보고는 요한나에게로 시선을돌렸다. 이럴 때는 적당히 대답해 주는 것이 나았다.
"달이 떠오를 시간쯤일 겁니다. 영애, 뒤에 다른 분들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말에 요한나는 힐끗 돌아보았다가 나이 지긋한귀족의 사나운 눈초리를 받았다. 요한나도 눈치는 있는지라 쌜쭉한얼굴로 파티장으로 향했다.
***
무도회장 안에서는 벌써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직 공작과공작부인이 나오기 전인지라 술은 돌려지지 않았지만, 모든 테이블에 화려한음식들이 가득 차 있었다. 장식은 훌륭하고 아름다웠으며, 푸른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과완벽한조화를 이루었다.
부인들에게맞춰 검은색이나 푸른색, 혹은 흰색 연미복을입은 그녀들의 파트너까지, 파티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일부 노란색이나 빨간색 드레스를 입은 영애들을제외하면.
그녀들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눈의 요정처럼 보이는 귀부인들과그 남편들을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실내 장식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푸르고 흰 불빛과크리스털 장식까지 더해져무도회장은 얼음과눈송이로 만든 성 같았다.
그 안에서 푸른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들은 벌써 파티 분위기에 취한듯 가볍게돌아다니며 춤을추거나 수다를 떨고 있었다. 분위기에 민감한영애들은 조화로운 그림 속에서 그녀들만이 도드라지는 존재임을눈치챘다.
그녀 혼자만이 주인공인 것처럼 튀는 것이 아니라, 잘 그려진 유화에 잘못 찍어 놓은 점 같은 꼴이었다.
그나마 연한노란색 드레스를 입은 영애는 봐 줄 만했으나, 빨간색이나 황금색 드레스를 입은 영애는 그 빛이 바랜 듯한느낌이 들었다.
"저런…. 한껏 힘을준 모양인데, 초대장을꼼꼼히 읽지 않은 모양이지요?"
"어느 집 영애일까요? 뻔히 초대장의 문구를 보았을텐데도, 저런 드레스를 고르다니…."
"자만심이 하늘을찌르는군요. 한번 혼쭐이 나야 해요. 어떤 자리인 줄 알고…."
이런 자리에서 눈에 띄려는 영애들의 속셈을귀부인들은 모르지 않았다. 그들도 한때 황제인 알렉시스를 노리고 드레스를 골랐을때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때의 알렉시스는 미혼이었고 약혼자조차 없었다. 저 영애들과는 엄연히 격이 다른 것이다.
귀부인들이 수군거렸으나 그 정도쯤은 예상한바였다. 빨갛거나 황금빛인 드레스를 걸친 영애들은 빳빳이 고개를 세웠다. 이럴 때 비굴하게굴면 사람들은 더 조롱할 뿐이었다.
'공작님은 언제 오시는 거지? 공작부인은?'
그들은 음료로 목을축이며 안쪽의 통로를 눈이 빠지라 힐끗거렸다.
그녀들과는 달리 순수하게무도회를 즐길 목적으로 초대에 응한영애들도 있었다. 물론 그녀들의 부모님은 딸을공작 부부에게인사시킨다는 목적이 있었으나, 그녀들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저기 봐, 저기!"
"정말 잘생겼지?"
영애들이 가리킨 자리에는 패트릭과제럴드가 있었다. 기사단장의 부름을받고 기사로서 파티에 참석한것이므로 일찌감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와 같은 신세인 몇몇 기사들은 영애들의 춤 신청을받고 플로어로 나가기도 했다.
'지루하군.'
패트릭은 따분하다는 얼굴로 핑거푸드를 입에 넣었다. 술을마시고 싶지만 아직 나오지도 않았다. 어차피 근무 중이라 마시지도 못할 테지만.
밖에서는 공작가의 기사들과같이 그의 동료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서 있을것이다.
이런 공작가의 파티에 무언가 이변이 일어날까? 이자벨 카룰리아스에게머리가 있다면 로제타나 미카엘 황자에게해코지를 하는 것보다 도망치는 데 열중할 것이다.
'추적자들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그 여자를 잡아야지만 일이 끝날 텐데…. 아니지, 아직은 잡지 못해야 계속 공작저에 머무를 수 있나?'
공작저에 머무른다 한들 아무런 진전이 없지만 말이다. 패트릭은 몇 주간 로제타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음을떠올리고는 긴 한숨을쉬었다.
그녀는 겉으로 보인 태도와 같이 그에게아무 흥미도 없어 보였다. 경멸과미움이 관심의 또 한가지 표현이라면 좋으련만. 로제타는 그 감정을표현하기 위한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으니, 패트릭은 그저 초조하기만 했다.
로제타가 자신에게화를 냈을때는 절망스러웠으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때는 로제타의 얼굴을볼 수라도 있었으니, 화를 내는 게차라리 나을것 같았다.
"말 좀 걸어 봐!"
"네가 먼저 해~."
서로를 밀며 투닥이던 영애들의 무리에서 한영애가 밀쳐져기사들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빨갛게물든 얼굴로 기사들을쳐다보고는, 고개를 돌려 제 친구들을흘겨보았다.
"얼른 가 봐."
속살거리는 말에 영애는 마지못한얼굴로 기사들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녀는 힐끗 패트릭을훔쳐보고는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다가갔다. 옆구리를 툭 치는 누군가의 행동에 패트릭도 그 영애를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당황하는 모습에 패트릭은 묘한웃음을머금으며…, 자리를 피했다.
당황한영애는 순간 걸음을멈추었으나, 그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영애의 시선이 제럴드에게로 향하자 제럴드는 음료수를 마시며 눈을돌렸다.
비교적 부드러운 거절에 속했기에 영애는 용기를 많이 잃지는 않았다. 그녀는 긴장한낯으로 가장 가까운 기사에게로 걸음을옮겼다.
제럴드는 잔을내려놓으며 그 친절한기사가 영애의 춤 신청을받아들이는 것을지켜보았다.
***
침실 앞에 서서 기다리는 것은 그리 로맨틱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미카엘은 자신이 첫 데이트를 하기 전, 여자친구를 기다리는 애인 같다는 생각을했다.
'무도회장 앞에서 만날 수는 없지.'
그것은 로제타의 드레스 차림을보고 감탄하는 첫 번째 남자가 되지 못함을의미했다. 물론 시종이나 호위기사가 먼저 봤을수도 있지만, 미카엘은 그 경우의 수는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마지막까지 무도회의 모든 것을세심하게살핀 로제타는, 마지막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본성으로 돌아가 드레스를 갈아입었다.
이날을위해 준비한물빛의 아름다운 드레스였다. 드레스 자락에는 별을뿌린 것과같은 장식이 수놓아져있었다. 밤하늘의 한자락을베어다 옮겨 놓은 듯한장식과청초한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다.
로제타는 제 얼굴이 평범하여 드레스가 너무 화려하면 자신이 묻힌다는 것을알고 있었다. 이 드레스는 레이스나 리본을덧대지 않아도 필요한만큼 화려했다.
"공작님."
시녀가 먼저 방에서 빠져나오며 침실 문을활짝 열었다. 미카엘은 로제타가 사뿐사뿐 걸어오는 것을보고 한걸음에 그녀에게다가갔다.
눈으로 먼저 그 모습을음미하고 로제타의 손을들어 그 손등에 입술을눌렀다.
"이 모습을다른 이들에게도 보여 주어야 한다는 사실이 분하군요."
"그렇게생각하시는 건 미카엘 님뿐이세요."
"절대 그렇지 않을겁니다."
미카엘은 진지하게답하며 로제타의 뺨에도 입을맞췄다. 오늘을위해 화장을하기는 했지만, 로제타에게는 짙은 화장은 어울리지 않았다. 이번 화장 역시도 옅은 것이었다.
"갈까요? 오늘은 제가 에스코트해 드릴게요."
로제타가 먼저 팔을내밀자 미카엘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팔을잡았다.
"영광입니다, 부인."
'실제로 들어와 보니 더 크구나….'
그동안은 그깟 계집애라고 무시하고 있었지만, 아덴공작가의 성은 과연 달랐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미카엘 황자는 왜 그딴 것에게 마음을빼앗겨서!
훈트 자작은 손수건을꺼내 제이마를훔쳤다. 그에게는 막대한돈은 있었지만, 아덴공작령의 귀족들과 친분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 무도회까지 들어오는 데 힘이 들었다. 물론 많은 돈을사용해서 겨우 끼어들 수 있었다.
'일이 제대로 이루어질까? 이건 정말 무서운 일인데…. 아니다! 아니야! 이건 귀여운 레이나를위해서다!'
미카엘 황자와 결혼했다고 주제도 모르고 콧대만 높아진 로제타 휘르센이었다. 저 콧대를꺾어 놓지 않는다면, 그의 딸 레이나를구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너무 큰일인데…. 만약 이 일이 틀어진다면 우리 레이나는 물론이거니와 우리 집안도 멀쩡하지는 못할 게야….'
그러나 그의 딸 레이나는 너무나 심약한아이였다. 그 몸도 마음도 약한아이가, 정말로 감옥에라도 가게 된다면, 수치심과 공포로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
'안 돼! 그럴 수는 없다! 얼마나 귀하게 자란 내 딸인데….'
로제타 휘르센이 고생한거야 그 자신이 공녀 앞에서 무언가 처신을잘못했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지금은 공작 남편을만나 잘 살고 있지 않은가!
'어차피 험한일을많이 겪어 봤으니, 이것 한가지가 더 추가된다고 달라질 것도 없다.'
무수히 많은 상처 위에 상처 하나 더한다고 무슨 티가 나겠는가! 훈트 자작은 뻔뻔스럽게도 그런 생각을하며 마음을다잡았다.
지금 남의 자식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이렇게 좋은 성과 저택을가지고 있는 미카엘 황자의 안주인을그가 왜 걱정해 줘야 한단 말인가.
'일이 끝나면 미카엘 황자가 잘 다독여 주겠지.'
주제에 맞지도 않는 대단한남편을둔 여자였다. 그런 남편을두었으니 좀 당해도 된다는 생각을하며 훈트 자작은 무도회장의 실내를느릿하게 돌아보았다. 겉으로는 화려한장식을구경하는 듯한모습이었다.
'용서를한다는 편지에 사인을받고 나면…, 이 일에 가담했던 놈들은 모두 죽여서 흔적을지워야 한다. 공작가를건드린 것이니, 들통나면 목을보전하기 어려울 것이야.'
훈트 자작은 두려웠으나, 그 두려움 기저에는 로제타를우습게 여기는 마음이 깔려 있었다. 그가 두려워하는 상대는 미카엘이지 로제타가 아닌 것이다. 상대가 로제타라면 쉽게 범행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안쪽 통로에 서 있던 시종들이 가느다란 나팔을불었다. 그리고 그들 곁에 선 시종이 가볍게 목을가다듬고는 우렁찬 목소리로 알렸다.
"아덴공작님과 공작부인이 들어오십니다!"
무도회장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단숨에 통로 입구로 향했다. 커튼이 드리워져 있던 입구가 열려 있고, 기사들이 그 앞에 도열해 있었다.
자리에 모인 귀족들은 미카엘의 손을잡고 나타난 로제타의 모습을보고 숨을삼켰다.
아덴공작령의 내로라하는 가신들은 여러 차례 수도를오가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드물지 않게 파티에 참석했고, 거기서 로제타에 대한소문을들은 적이 있었다. 실제로 먼발치에서 로제타를본 자도 있었다.
'소문보다도 더….'
아름다웠다. 외모 자체는 평범했지만 사랑하는 이의 손을잡고 무도회장에 들어서는 모습만으로도 좌중을휘어잡기 충분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을괜히 예뻐진다표현하는 게 아니었다. 사랑은 사람을특별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옅은 미소를띠고 미카엘을바라보는 로제타는 그 누구보다도 더 그의 옆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보였다.
이날을위해 황금빛 드레스를준비했던 샬럿은 그 모습에 할 말을잃었다. 미카엘의 흰 연미복과 어울리는 물빛의 푸른 드레스를입은 로제타는 완벽한한쌍으로 보였다. 제부인을바라보는 미카엘의 시선에서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었다.
'맙소사….'
그들은 미카엘이 평소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고 있었다. 이 무도회장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이 미카엘과 로제타가 같이 있는 것을보는 게 이번이 처음이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샬럿은 들고 있던 포크를떨어트려 버렸다. 제법 소리가 났지만 무도회장 안의 누구도 샬럿을쳐다보지 않았다.
샬럿은 치마에 얼룩이 지지 않은 것을확인하고 안도했다.
그녀는 낭패한얼굴이었다. 사실 샬럿은 로제타가 주제에 맞지도 않는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드레스를입고 나와서 드레스 속에 파묻히기를바랐다.
벼락부자가 된 집안의 영애들이 곧잘 하는 실수였다. 로제타는 아직젊고 경험이 없는 데다가 갑자기 얻게 된 아덴공작가의 부에 정신을차리지 못할 거라 기대했던 것이다.
심지어 이번 무도회의 장식으로 어마어마한돈을썼다는 소문을듣고 쾌재를불렀었다.
그러나…. 무도회 장식은 황실을웃도는 수준으로 멋있었던 데다가, 드레스까지도 그녀의 예상을벗어났다.
'아니야! 아직늦지 않았어!'
미카엘의 꿀에 절인 듯한눈빛을보기는 했으나 샬럿은 아직인정할 수 없었다. 사실 수도의 많은 영애들도 보고도 못 본 척했었다.
미르세 후작가의 영애인 요한나도 여전했고.
'크으윽!'
분해서 이미 부채를반으로 쪼갰기에, 시녀로부터 새 부채를받은 참이었다. 요한나는 절대 로제타를인정할 수 없었다.
'저건 저 계집애가 예쁜 게 아냐! 미카엘 황자 곁에 있다면, 누구라도 저 정도쯤은….'
되레 주꾸미가 될 가능성이 컸지만, 요한나는 그 가능성을무시했다. 미카엘 황자가 저런 사랑에 빠진 눈으로 쳐다본다면 누구라도 특별해지는 법이었다.
'나도 그런 눈길을받으면….'
모든 영애들이 부러워 미치겠지. 아마도 귀부인들조차도 그럴 거라고 요한나는 확신했다. 순간 자신감이 조금 흔들리기는 했지만, 굳건한자기 확신으로 로제타보다는 자신이 가능성이 크다고 여겼다.
아이리스 리온이 상대도 아니고, 로제타 휘르센이었다! 젊은 휘르센 경이 아니라면 별 볼 일도 없는 그 휘르센! 자신이 절대 로제타에게 질 리 없다고 여겼다.
이미 로제타에게 용서를받기 위해 무도회에 참석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은 요한나였지만, 그녀를말릴 미르세 후작이 자리에 없었다. 미르세 후작을창피해한요한나가 그와 멀찍이 떨어진 위치로 옮겼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물러선다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야! 무도회장에 왔으니, 푸딩이라도 썰어야겠어!'
콧김을거세게 뿜어낸 요한나가 기세등등한얼굴로 공작 부부를향해 걸음을옮겼다.
***
다가오는 귀족 부부들의 인사를받고 인사를건네는 것은 생각보다고된 일이었다. 로제타는 그들의 얼굴을하나하나 머릿속에 새겨 두려 애쓰며 인사를받았다. 로제타가 걱정했던 것보다도 미카엘의 가신들은 정중했다.
로제타가 모르는 사이 미카엘이 냉기 어린 시선을보내고 있다는 것은 그들만 알고 있었다. 로제타가 미카엘을쳐다볼 때면 봄날에 녹은 눈처럼 스르륵 표정이 풀어지기 때문이었다.
'귀신!'
입은 찢어져도 차마 말할 수 없는 진실에 그들은 매우 조심스럽게 공작부인에게 자신의 소개를할 뿐이었다.
이미 시녀들이
'공작부인에게 무례를저지르면 공작께서 친히 목을베신다고 하더라.'
는 소문을사방팔방으로 퍼트렸기에 긴장하고 있었다.
설마 공작 각하께서 그렇게까지 할까 싶었지만, 손 놓고 있지 않으시겠다는 무시무시한기색이 느껴졌다.
'조심해야겠다.'
반면 귀부인들은 미카엘을직접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어서 오히려 부드러웠다. 물론 그 부드러움 속에 무시무시한결의가 담겨 있기는 했지만.
'어떻게 말을붙인다?'
'공작부인께서 좋아하시는 게 뭐지?'
'어떤 농담을좋아하실까!'
미카엘과는 다른 의미로 열렬하고 형형한시선에 로제타는 묘한기분을느꼈다. 자신에게 한마디라도 더 말을걸려고 노력하는 귀부인들을보고 있자니, 새삼 달라진 위치가 실감이 났다.
'조심해야지.'
많은 권력을가진다는 것은 그만큼의 책임이 뒤따른다는 말과 같았다. 로제타는 그 사실을상기하며 귀부인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려고 노력했다.
다행스럽게도 귀부인들에게 로제타의 이미지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우선 처음으로 여는 파티가 공작가의 위세와 힘을드러낼 수 있을만큼 화려하면서도 천박하지 않았고, 푸른색과 흰색의 드레스를권하는 속내며, 차려입은 것까지도 공작부인의 자리에 어울린다싶었다.
젊지만 그 젊음에 치우쳐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을것 같은 이였다. 조심스럽게 그들을대해 주는 것 자체로도 만족스러웠다.
미묘한드레스 코드를권하는 것으로, 이미 귀부인들은 로제타가 녹록지 않은 공작부인이 될 거라는 사실을알고 있었다.
어차피 상전으로 모셔야 할 사람이라면, 어리석은 이보다는 현명한이가 좋았다. 그를기만하고 등쳐 먹을속셈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뭐 하는 거죠?"
낮지만 다소 날카로운 목소리에 주변의 시선이 쏠렸다. 아직공작 부부 곁으로 다가오지 못한영애가 한귀부인과 마찰이 생긴 것이다.
로제타와 미카엘 주변으로는 꽤 많은 사람이 몰리고 있었다. 차례를기다리려 해도, 틈을노려 새로운 이들이 자꾸만 다가오는 데다가, 신분에 따라 자꾸만 차례가 밀려서 마음이 급했다.
그래서 요한나는 무심코 곁에 있던 귀부인의 가슴을팔꿈치로 치고 말았다. 사람들 틈으로 빠져나가려다가 한일이었다. 그녀도 실수한것을알았지만, 사람도 많겠다얼른 자리를피하는 것으로 무마하려고 했던 것이다.
만약 요한나의 드레스가 이 자리에서 가장 눈에 띄는 빨간 드레스가 아니었다면, 그것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젊은 영애라 해도 지켜야 할 예의가 있는 법이에요! 사람을치고도 그렇게 모르는 척 등을돌리다니, 무슨 예절이죠?!"
"사람잘못 보신 것 같은데요?"
이쪽으로 쏠리는 공작 부부의 시선을느끼며 요한나가 나지막한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러나 귀부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다.
"잘못 보다니요! 이런 천박한색깔의 드레스를입은 영애는 영애 하나뿐이라, 착각을하려 해도 할 수가 없군요!!"
'뭐?!'
뒤늦게 자신의 드레스를떠올린 요한나였으나, 인제와서 잘못을빌기도 싫었다. 사람이 많으면 몸이 부딪힐 수도 있는 거지, 누가 그런 걸 일일이 사과한단 말인가!
'쪼잔하게.'
"천박하다니! 말씀이 너무 지나치신 것 아니에요?! 부인이야말로 다른 영애와 부딪히신 것을눈에 띄는 제게 뒤집어씌우시는 것 같네요!"
"뭐라고요?"
그녀는 기가 막혔다. 저 영애가 무례하게도 가슴을팔꿈치로 쳐 놓고는, 저와 눈이 마주치고도 저러는 것이다.
눈이 마주쳤을때, 저 영애의 입에서 당연히 사과의 말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저 영애는 얼른 몸을돌리고는 바삐 자리를뜨는 것이다.
이에 불쾌감이 모락모락 피어올랐으나, 다른 귀부인이 저 영애가 '그 무리' 중 하나라는 것을귀띔해 주어 불쾌감은 배로 더 커졌다.
저 어리고 건방진 것이 감히 그랬단 말인가? 심지어 초대장에서 권한색상도 아닌, 대치되는 색깔의 드레스를입은 것으로 보아 반성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공작가에서 연 무도회이니 웬만하면 참으려 했지만, 저 영애가 초대받지 않은 객임을알아선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래. 실수일 수도있어. 이 무도회도공작부인에게 사과하려고 참석한 것일 테니, 당황스러워서 그랬을지도모르지.'
그래서 기회를 한 번 더 준다는 생각으로 그 부인은 요한나를 뒤쫓았다. 모르는 척하는 요한나의 팔을 가볍게 건드리며….
"영애, 내게 할 말 있지않나요?"
하고 부드럽게 물었던 것이다.
요한나는 새초롬한 얼굴로 눈을 흘겼다. 뭘 그 정도가지고 쫓아왔냐는 얼굴이었다.
그 순간 그녀는 더 이상참지않았다.
***
"영애, 말이 지나치군요!"
높아지는 요한나의 목소리에 다른 귀부인이 다가왔다. 그녀는 요한나가 '그 무리' 중 하나임을 가르쳐 준 귀부인이었다.
그에 요한나는 쌍심지를 키우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말이 지나친 건 이분이겠지요. 어울리지도않게 그 드레스는 뭐야? 칙칙하게…."
요한나가 지적하자 그녀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초대장에 쓰인흰색과 파란색을 그녀도보았지만, 그녀가 입은 것은 푸른색이 많이 섞인보라색 드레스였다.
그녀도다른 귀부인들처럼 새 드레스를 맞추고 싶었지만, 모든 귀족이 그렇게 부유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새 드레스 앞에서 그것을 맞추지않으면 살 수 있는 집 안의 물건들을 생각했다.
가문이 아주 못살 정도는 아니었지만, 한 번도넉넉하지못했던 것이다.
수치심에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을 보고 요한나는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가난한 귀족들을 귀신같이 알아보는 재주가 있었다.
"설마 공작가의 파티에 참석하면서 돈이 아깝다고 한 번 입었던 드레스를 꺼내, 고쳐서 입은 것은 아니겠지요?"
사실이 그러했기에 귀부인은 제대로 대답하지도못하고 파르르 떨었다. 젊은 혈기에 나설 만큼 그녀 또한 나이가 어렸던 것이다.
"대답해 보세요. 그 촌스러운 드레스, 어디서 맞추셨어요?"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귀부인이 고개를 든 순간, 기사들을 대동한 시종이 나타났다. 그는 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부인. 영애. 공작부인께서…. 초대하지않은 객이 여기 있는 듯하니 초대장을 확인해 달라시는군요."
시종은 말하며 요한나를 쳐다보았다. 요한나는 순간 수치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감히 무슨 말을! 나는 정당한 초대장을 받고 왔어!"
"그렇다면 초대장을 보여 주십시오."
이어지는 시종의 말에 요한나는 다급하게 제 일행을 찾았다. 먼발치에서 이 소란을 지켜보고 있던 백작이 혀를 차며 가까이로 다가왔다.
그는 모욕을 받고 있던 귀부인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부인. 이 영애의 무례는 제가 대신 사과하겠습니다."
백작은 그렇게 말하며 품속에서 초대장을 꺼내 시종에게 보여 주었다. 그 모습에 요한나는 기세등등해져서 시종과 아까의 귀부인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소란에 인파를 헤치고 다가오는 미르세 후작의 모습을 발견하고 일그러졌다.
'창피하게 왜!'
"무엇을 사과하나! 사과를 받아야 할 것은 내 딸이야!"
미르세 후작이 딸이라 칭하자 묘한 수군거림이 사람들 사이로 퍼져 나갔다. 요한나의 얼굴이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달아올랐다.
"세상에…. 저 미르세 후작의?"
"그 아버지에, 그 딸이구먼. 오르카 남작부인만 안됐지…."
"수치스러운 것도모르고…."
"공작부인도저런 식으로 모함했을 거야."
작은 목소리이기는 했으나 작다 해도들리는 말이 있었다. 요한나는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미르세 후작을 노려보았다.
"뭐 하시는 거예요? 왜 갑자기 나타나서!"
"아버지한테 그 말버릇은 뭐냐, 요한나!"
"백작님. 이 두 분은 백작님의 자제나 손위의 친척은 아닐 듯한데…. 실례지만 촌수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이 초대장으로 동반하여 들어오실 수 있는 분은 사촌이나 조카까지입니다."
시종의 정중한 말이 두 부녀의 대화를 끊었다. 정말 섞이기 싫다는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백작은 가만히 미르세 후작과 요한나를 보았다. 미르세 후작은 필사적인시선으로 백작을 쳐다보았다.
'말해, 사촌이라고! 이 순간만큼은 자네 허접한 집안을 미르세 후작가와 연관 짓는 것을 허락해 주지!'
그러나 백작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여기 있는 오르카 남작부인에게 미안해서라도.
"공작가의 파티에서 거짓을 고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우리 집안은 미르세 후작 가문과는 한 방울의 피도섞이지않았다네."
다행스럽게도말이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사들이 미르세 후작과 요한나 곁으로 다가섰다. 시종은 정중한 태도로 백작에게 초대장을 돌려주었다.
백작이 그것을 갈무리하는 사이, 미르세 후작이 목소리를 키웠다.
"내, 내 몸에 손대지마! 내 발로 나갈 거다!"
"그러시지요."
부디, 라고 말하듯 기사가 손짓했다. 미르세 후작은 쏟아지는 사람들의 경멸 어린 시선을 무시하고 빳빳하게 고개를 세웠다. 요한나는 애타는 눈길로 미카엘을 돌아보았다.
"공작님, 저는 아버지의 일을 공작님께 사죄하려던 것뿐이에요!"
애처로운 목소리로 호소하는 요한나의 말에 미카엘은 짜증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허락받지않은 파티에 숨어들어서 말인가?"
미카엘은 요한나 곁에 있는 기사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저 영애가 또 입을 열거든, 입에 재갈을 물려서 쫓아내도록 해라."
"그런…!"
당황한 요한나가 입을 벌렸으나 기사의 표정을 보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입에 재갈을 문 채로 질질 끌려 나간다면, 평생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터였다.
미르세 후작은 미카엘의 말에 경악하며 그를 노려보았지만, 서릿발 같은 미카엘의 표정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그들은 '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디 두고 보자!'
재판 일정까지빠듯했으나 이대로 물러설 수 없는 부녀였다.
***
"부인, 많이 놀라지않으셨습니까?"
위로의 말을 전해 온 상대에 달리아는 놀랐다. 공작부인이 사람들 사이로 빠져나와 그녀에게 말을 붙인것이다. 당황하여 오르카 남작부인의 얼굴이 빨개지자 로제타는 시녀를 돌아보았다.
"잠시 쉬시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방을 준비해 놓겠습니다."
시녀가 얼른 걸음을 서두르고 로제타는 부드럽게 남작부인의 팔을 잡았다.
"제 휴게실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잠시 쉬시지요."
그러며 로제타는 남작부인의 근처에 있는 그녀의 친구를 바라보았다. 시종의 등장으로 화를 낼 타이밍을 놓친 마그너스 자작부인이었다.
"아무래도친구분이 같이 와 주시는 편이 부인의 마음이 편하겠지요. 와 주시겠습니까?"
"아, 네!"
마그너스 자작부인은 이게 웬 떡인가 싶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아까 그 건방진 영애가 말도안 되는 소리를 지껄였을 때 코를 납작하게 해 줄 것을. 공작부인이 연 파티에서 소란을 피우는 것이 신경 쓰여 제대로 말하지못한 것이 아쉬웠다.
"마님. 방이 준비되었습니다."
준비라고는 하나 공작 부부전용 휴게실의 문을 열어 놓고, 음료를 가져오도록 지시를 전달하는 것 정도였다. 이미 준비는 다 되어 있었다.
"이쪽입니다."
로제타가 이끄는 것에 남작부인은 꿈을 꾸는 듯한 기분으로 나란히 걸었다. 마그너스 자작부인도재빨리 그들의 곁을 지켰다.
다른 귀부인들도그들의 친구라고 나서며 끼어들고 싶었지만, 마그너스 자작부인의 눈빛이 하도살벌해서 그러지못했다.
'이편이 낫겠지.'
아까 요한나가 대놓고 모욕을 주어 잠시 자리를 떠나게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거기다 자신이 대놓고 배려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이 부인의 드레스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이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로제타가 미카엘의 곁을 비우자 눈을 빛낸 것은 다른 영애들이었다. 그야말로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의 눈빛으로 미카엘을 쳐다보았으나,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북풍한설보다도싸늘한 시선이 돌아온 탓이었다.
'왜?! 어째서! 공작부인이 곁에 있을 때는 그리도다정한 모습이었으면서!'
그러나 그 표정은 로제타가 있을 때, 한정으로 나오는 표정이었다. 미카엘은 로제타의 다정함은 기뻤지만, 그 다정함이 다른 이를 향하는 것은 그리 달갑지않았다.
'미르세 후작가…. 여러 가지로 거슬리는군.'
***
공작부인이 그녀들을 휴게실로 데려가 주고 다정한 말로 위로해 준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녀가 머문 시간은 그리 길지않았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의 파티장에서 무례를 당해 놀란 귀부인을 위로해 주는 것은 있을 수 있어도, 계속 붙어 있을 이유는 없었다. 로제타 또한 다과를 내어 오고 시중을 들어 줄 것을 지시하고는 그들 두 사람을 남겨 놓고 자리를 떠났다.
"세상에!"
로제타가 휴게실을 나가자 마그너스 자작부인은 눈을 반짝이며 휴게실을 돌아보았다.
귀부인과 영애들을 위한 휴게실이 몇 개나 준비되어 있지만, 여기는 공작과 공작부인을 위한 방이었다. 당연히 장식부터가 달랐다.
"달리아, 나는 항상내가 더 다혈질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도내 자신에게 깜짝 놀라고 있는 중이야."
요한나에게 모욕받은 것에 대한 충격은 호사스러운 휴게실을 보자 사라지는 것 같았다. 드레스로 인한 수치심은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던 공작부인의 말과 표정, 그리고 공작부인의 안내를 받아 휴게실로 가는 동안 받았던 부러움이 뒤섞인눈빛들에 사그라들었다.
달리아 오르카에게 다가간 마그너스 자작부인은 미안하다는 듯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내가 너를 위해 좀 더 화를 냈어야 했는데…. 그러지못해서 미안해."
"오, 아니야. 나도이 실내장식을 보고 주눅 들었으니까…."
실은 초대장을 받고 굉장히 들떠 있었다. 그 들뜬 마음은 공작가의 파티홀에 들어가게 되자 더 커졌다.
물론 들뜬 마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른 귀족 부인들의 화려한 드레스와 거대하고 우아한 마차, 그들의 아름다운 모습에 조금씩 자신감을 잃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곁에는 친구인마그너스 부인이 있었고, 그녀의 자신에 찬 눈빛에 제 목소리를 내려고 애썼다.
마그너스 자작부인이 영지없이 작위를 물려받은 가문의 안주인이라 한다면, 달리아 또한 비슷한 위치였다. 다만 마그너스 자작부인의 남편은 기사였고, 달리아의 남편은 공작가에 고용된 귀족이었다.
다만 달리아의 남편에게는 영지가 있었다. 워낙 척박한 땅이라 소출도적고 영지민의 숫자도턱없이 부족한…, 마을 수준의 영지였다. 매년 황제가 세금을 감면해 줄 정도의 땅인지라, 일거리만 있고 영지에서의 수입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아마 폐하께서 세금을 내라 하신다면…, 그이는 영지를 폐하께 반납하려 하겠지.'
마그너스 자작부인도, 달리아도 남편이 공작가에 고용된 상태라 각자의 일로 이 파티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그러나 초대장만은 날아왔기에 부인들은 참석한 것이다.
자작부인의 남편은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극단적으로 말수가 적은 이였다. 번번이 상사에게 공을 빼앗기는 터라 마그너스 자작부인은 이를 갈고 있었다.
그 결의가 지나쳐서 친구에게 제때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이 파티장에서 큰소리를 냈다가 공작부인이 언짢아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생겼던 것이다.
다행히 공작부인은 소동이 생기지 않는 방향으로 일을 처리했다. 달리아에게 무례하게 굴었던 영애는 쫓겨났고, 그들은 귀빈 대접을 받으며 휴게실에서 쉬고 있었다.
"이런 일이 있었는데, 공작부인이 우리를 모른 척하지는 않겠지? 응? 인사를 할 때 말이야."
물론 마그너스 자작부인은 이 정도 일로, 남편들에게 무언가 이득이 생길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공작부인과의 관계에 첫 삽을 뜬 것과 같은 일인지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친절하신 분인 것만은 확실하지만…. 이번에 그 친절을 많은 이들이 보았으니, 다들 앞다투어 공작부인의 친절을 받아 내려 할 거야."
"그래도, 나는 네가 공작부인의 첫 번째 연회나 다과회에 초대받을 거라고 확신해!"
마그너스 부인은 차마 입에 올리지는 못했지만, 요한나가 무례를 저지른 상대가 달리아가 아닌 자신이었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자신이라 해도 달리아와 똑같이 행동했을지는 의문이었다.
"초대장을 받으면 나한테도 꼭 알려 주는 거야?"
"그건 당연하잖아."
달리아는 웃으며 답했다. 그녀는 이 일로 초대장까지 날아오지는 않을 거라고 여겼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앞다투어 공작부인 앞에서 모욕을 당하는 장면을 연출할 테니 말이다.
***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작부인은 다시 무도회장으로 돌아왔고, 첫 춤이 시작되었다. 공작부인과 공작은 춤을 추지 않고 가신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훈트 자작을 비롯한 수도의 귀족 무리들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방금 미르세 후작이 쫓겨난 것으로 확실해졌다. 그들 중 누군가가 소란을 피운다거나 눈에 띈다면 주저 없이 파티장에서 쫓겨날 것 같았다.
초대장에 대해 묻는다면 그들은 제대로 대답할 수 없는 처지였다. 온갖 연줄을 동원하여 아덴 공작령의 귀족에게 신세 지고는 있으나, 사촌이나 친척인 자는 없었으니까.
더더군다나 그들이 데려온 딸들은 요한나가 그랬듯, 초대장에 적힌 색깔과 대치되는 색상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아둔하기 짝이 없는 것들!'
그들은 딸들을 꾸짖었지만 때늦은 일이었다. 그들도 딸들이 붉은색이나 노란색 계통의 드레스를 입는 것을 보고도 모르는 척했다. 흰색이나 푸른색 드레스를 입는다는 것 자체가 아덴 공작가의 가신임을 자처하는 것처럼느껴졌던 것이다.
만약 로제타가 적과 아군을 구별하기 위해 이것을 정했다면, 제법 머리를 굴렸다고도 할 수 있었다.
'흥! 그럴 리가 없지! 저깟 계집이 무슨….'
근심스러운 것은 이 탓으로 공작부인의 곁으로 접근하는 것조차 어려워졌다는 것이었다. 조금만 곁으로 다가가도 주위의 힐끗거리는 시선이 모여들었다.
수도의 귀족 사회도 그러했지만, 아덴 공작령의 귀족들도 그러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가까운 귀족들과 알고 지내는 사이였고,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새로운 귀족이 오면 그 지방의 유지가 파티를 열어 그를 소개하는 자리를 갖는 것도 그래서였다.
그들이 수도에서 왔다는 것을, 여기 모인 대부분의 귀족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이유까지도 짐작할 거라는 사실에 그들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푸대접이라면 여기, 루긴에 오는 동안 충분히 겪었다고 생각했다. 온갖 악재가 겹쳐져 그들에게 있어 아덴 공작령은 저주받은 것 같은 땅이었다.
음식도, 침대도, 길도 최악 중의 최악이었다. 사람들조차 어딘지 모르게 살벌한 시선을 던지는 것이, 지금 이 무도회장 안의 분위기와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요한나가 소리 높여, 어느 귀부인에게 모욕을 준 다음부터 더 강해졌다.
그들이 가까이 오기만 해도 말소리가 뚝 끊기며 싸늘한 시선을 주는 것은,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들기 충분했다.
'멍청한 촌뜨기들 같으니! 주제도 모르고…. 여기는 저희들 사교계라 이거지?'
수도로 돌아가면 두고 보자는 심정이었으나 돌아가면 재판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어떻게 해서든 기회를 노려 로제타에게 접근하려는데,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어머, 실례."
공작과 공작부인이 있는 자리로 다가가려고만 해도 우연인 척 누군가 앞을 가로막았다. 은근슬쩍 드레스 자락이나 발을 밟는 것은 예사였다.
벌컥 화를 내기도 전에 상대가 사과를 하는 데다가, 소란을 피운다면 아까의 미르세 후작 꼴이 날 것이다.
'설마 이 귀족들에게 다 저렇게 행동하도록 시킨 것은 아니겠지?'
부르르 떨며 그들은 로제타가 있는 방향을 노려보았다.
***
'핀볼 같네.'
어느 후작부인과 대화를 나누며 슬쩍 그들을 바라본 로제타의 감상은 그러했다.
나름대로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무도회에 참석했건만, 실질적으로 그들과 말을 섞을 일은 없었다. 아까 요한나가 벌인 일로 단단히 미운털이 박혔는지, 노골적인 방해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탓이다.
남자는 남자가, 여자는 여자가 괴롭히는 식이어서 구경하기에도 불편하지 않았다. 로제타는 제가 당했던 것들을 떠올리며 저 정도는 귀여운 수준이라 생각했다.
겨우 저 정도로도 참 많이도 화가 난 표정이었다. 고작 이자벨 카룰리아스의 눈 밖에 났다는 이유로 그보다 더한 취급을 당한 사람도 있는데.
그나마 여기 귀족들은 선을 넘는 괴롭힘은 하지 않았다. 이 파티가 공작가에서 주최하는 파티라 몸을 사리는 것이다.
황실의 파티든, 황족의 파티든 간에 주최자들은 대개 소란을 피우는 것 자체를 꺼리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신분이 높은 사람이 여는 파티일수록 그 초대객들은 괜한 분란을 만들지 않기 위해 조심했다.
미르세 후작이 쉽게 화를 낼 수 있는 것도 로제타를 우습게 보는 마음이 있어서였다. 로제타가 미카엘과 결혼을 했다 해도 '그의 딸에게 괴롭힘을 당해 울었던 영애'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훈트 자작 또한 그러했으나 그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로제타를 붙잡아 그녀의 용서를 받아 내는 일이 끝끝내 실패하면, 자신이 벌일 일 때문에 그러했다.
'파티가 무르익을 즈음 인적이 없는 발코니에서 하면 될 겁니다.'
'파티가 무르익을 즈음이라니!'
남자가 하는 말에 훈트 자작은 벌컥 화를 냈다.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이어서 그러했다. 감히 아덴 공작부인을 납치하는 일인데, 그렇게 대놓고 신호를 보낸단 말인가!
수도에서 황실 기사단이 내려오고, 아덴 공작령의 정예들이 지키고 있는 공작저였다. 그 공작저에 침입하여 공작부인을 납치할 계획이었다.
물론 진짜로 공작부인을 저택 밖으로 끌고 갈 작정은 아니었다. 그것은 너무도 위험한 일이다. 공작부인이 납치되는 것을 훈트 자작이 목격하고, 공작부인을 온몸으로 보호하는 상황을 연출한다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었다.
사실 훈트 자작은 공작부인의 암살 시도를 저지하는 쪽으로 계획의 가닥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건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았다.
암살자가 나타나면 공작부인은 기사들에게 둘러싸일 텐데, 그 틈바구니에 끼어들어 공을 세우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 계획만 성공하면 우리 레이나가 무사한 것은 물론, 아덴 공작의 환심을 살 수도 있다!'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는 미카엘 황자는 차기 황제가 되지 않을까 싶은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가 뒤를 든든하게 받쳐 주면 한껏 잘나가고 있는 그의 사업에 날개를 달 수도 있었다.
'그래. 좋은 생각만 하는 거다!'
훈트 자작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귀족들을 찾아다니며 방도가 없는지를 묻고 있었다.
그는 작위는 그리 높지 않았으나 거액의 돈을 지닌 인물이었다. 돈은 귀족 사회라 할지라도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했다.
'그놈들이 좀 의심스럽지만…. 선금은 조금밖에 주지 않았으니.'
용병단까지 찾아가 공작저에 접근할 방법을 찾던 훈트 자작은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고급 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때 그에게 접근한 것이 그들이었다.
훈트 자작은 한눈에 그들이 범상치 않은 실력을 가진 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는 인품은 그리 좋지 못해도 장사꾼으로서의 능력은 탁월한 이였다.
'물론 꽤 많은 돈이 들 겁니다….'
그들이 제시한 금액은 눈이 튀어나올 만한 것이었다. 훈트 자작은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받아들였다. 차라리 그들이 터무니없이 적은 액수를 제시했다면 도리어 실력을 의심했을 것이다.
'나는 자네들을 알지 못해. 실력에 대해서도 믿을 수가 없지…. 그러니 착수금은 얼마 줄 수 없네. 또한 자네들도 선불 조로 내게 일을 해 줘야 할 것이야.'
훈트 자작이 제의한 것은 꽤 까다로운 인물의 암살이었다. 그의 집안이 사실은 별 볼 일 없는 천민 출신임을 아는 마법사를 죽이는 것. 대수롭지 않은 인물이었으나, 늘 마탑에 처박혀 있어서 좀처럼죽일 기회를 찾지 못한 이였다.
그들은 실력을 증명하라는 훈트 자작의 말에 단 며칠 만에 그 늙은이를 해치우고 그의 손을 잘라 가지고 왔다.
그래서 훈트 자작은 그들을 신뢰할 수 있었다.
'이 일이 끝나고 이것으로 평생 날 협박할 셈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아덴 공작가는 쉽지 않은 곳입니다…. 저희 쪽에서도 최대한 저희가 한 짓이라는 사실을 감춰야 하는 판국에 그럴 수는 없지요.'
그러며 그들은 한 가지를 도와달라고 했다.
'내, 내 몸에 주문을 새기라고?! 그런 위험한 짓을 하라는 건가!'
'새기는 게 아니라 그리는 것입니다. 거기다 중요한 의뢰인에게 해가 가게 할 리가 없지요. 아직 돈을 전부 받기 전이지 않습니까?'
남자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훈트 자작은 터무니없는 액수, 거의 성 두 채 값을 주기로 되어 있었고, 착수금은 오두막 한 채 값 정도였다.
아직 의심스러웠지만, 훈트 자작은 그 돈을 생각하고 안심하기로 했다.
그가 잘못되면 그 돈은 받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니, 그들이 자신에게 해를 가할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의심 많은 훈트 자작을 위해 그들은 자신들의 거처로 훈트 자작을 안내하여 그 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보여 주기까지 했다. 몸에 주문이 새겨진 자의 마력을 빨아들여 일종의 게이트를 여는 마법진이었다.
마법사가 아닌 자라 할지라도 드나드는 통로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마법이라고했다.
'이 때문에 저희가 어려운 상대라 할지라도 암살에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러며, 이것이 자신들의 중요한 비밀이니 절대 발설하지 말라 경고했다. 훈트 자작의 입에서 자신들의 정보가 새어나간다면 반드시 쫓아가 죽일 거라 하기도 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가족에게도….'
그에게 정보를 들은 자도 죽일 거라 했으니, 부인이든 딸에게든 간에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어차피 지금 그들이 곁에 없어서 털어놓을 수 없기도 했다.
훈트 자작은 드디어돌리기 시작한 술잔을 받아 들고단번에 입에 털어넣었다. 귀족답지 못한 행동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 이 짓을 시작하려고하니 피가 바싹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웨이터는 훈트 자작의 눈치를 보았으나 술을 더 권하지 않고다른 귀족들에게로 가 버렸다. 훈트 자작은 눈살을 찌푸렸으나, 공작과 로제타가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내 탓이 아냐.
이건 전부 너희들이 오만한 탓이라고. 훈트 자작은 몇 번이고되뇌었다.
***
나이 지긋한 귀족들은 적당한 시간이 지나자 무도회장을 빠져나갔다. 무도회는 늦은 밤까지 계속되는 것이었고, 그들은 늦은 시간까지 춤을 추거나 선 채로 대화를 나누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귀부인들은 휴게실이나 그녀들을 위해 마련된 살롱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돌아갔다. 신사분들도 마찬가지였다.
훈트 자작은 로제타가 자리를 뜰까 조마조마했다. 그는 적당히 사람들의 숫자가 줄어들었을 때를 노려 게이트를 열 생각이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는 곤란했다. 모두가 적당히 취했을 때.
혹시라도 누군가 자신이 마법을 부리는 것을 목격해도, 술에 취해 잘못 본 것이라고우길 수 있을 만큼의 때를 노렸다.
북적거리던 인파가 절반으로 줄었고파장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항시 가득 차 있던 발코니로도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고있었다. 훈트 자작은 칵테일을 마시며 공작과 공작부인의 동태를 살폈다.
그들도 슬슬 파티 뒷정리를 다른 이에게 맡기고돌아갈 분위기였다.
'지금이다!'
훈트 자작은 얼른 비어있는 발코니를 찾았다. 손님으로 파티홀이 가득 찼을 때와는 달리 비어있는 발코니가 여럿이었다. 훈트 자작은 발코니로 들어가며, 시종에게 혼자 있고싶다며 팁을 쥐여 주었다. 시종은 다른 이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팁을 챙기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코니에는 은은한 마법의 불빛이 밝혀져있었다. 미카엘 황자가 마법사이기에 마법과 관련된 것이 많았다.
'그 모든 게 다소용없을 거다!'
그는 이미 적당한 발코니를 확인해 둔 뒤였다. 이 발코니의 안쪽에서라면 바깥의 경비병에게 들키지 않고게이트를 열 수 있었다. 아까의 시종이 자신의 얼굴을 기억하면 어쩌나 싶었으나, 게이트로 나온 암살자들에게 아까의 시종을 죽이라고지시하면 그만이었다.
'아니지. 설마 이쪽으로 나가겠어?'
발코니와 발코니 사이로 오갈 수도 있고, 암살자이니 자신으로서는 알 수 없는 방법으로 공작저 내를 돌아다닐 것이라고보았다.
훈트 자작은 셔츠의 단추를 풀고맨 가슴을 드러냈다. 초여름이라지만 긴장해서인지 밤공기가 선뜩하게 느껴졌다.
'주문, 주문이 뭐였더라?'
그의 가슴에 새겨진 네모난 마법진은 그가 흥건하게 흘린 땀에도 흐트러지거나, 번지지 않은 모양새였다.
"크, 크라우다스…. 리비파…? 니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외운 구절을 더듬더듬 중얼거리며 훈트 자작은 눈을 굴렸다. 이게 제대로 하는 것이 맞나 싶었다.
"어, 오오!"
과연 제대로 한 것이 맞는지, 그의 가슴에 그려진 마법진이 칠흑 같은 빛을 흘리기 시작했다.
'어?'
뭔가 이상했다. 그들의 거처로 가서 이 마법을 선보이고연습시켰을 때는 분명 황금색에 가까운 흰빛이 새어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흐억!"
마법진 한가운데에서부터 까맣게 타들어가는 그것에 훈트 자작은 경악했다. 그저 눈으로 보이는 것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피부가 타들어가고있었다. 점점 넓어지는 검은 빛이 그의 가슴 전체로 퍼져나가고있었다.
동시에 그의 몸에 있는 마력이 쥐어짜 내어져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이 모습을 다른 이에게 들켜서는 안 되었지만, 참은 것은 한순간뿐이었다.
"으아아아악!"
속았다는 생각마저 들지 않는 무시무시한 통증이 훈트 자작을 촛농처럼 녹이고있었다. 그의 내장이 까맣게 타들어가고검은빛으로 물든 가슴으로 균열이 생기며 공간이 열렸다.
"무슨 일입니까?!"
발코니 문 바깥에서 기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훈트 자작은 분명 그들이 마법을 펼치는 장면을 보았다고생각했다. 똑같은 주문을 외자 시전자에게서 두어발자국 떨어진 위치에 거울 같은 형상을 한 문이 나타났었다.
'마법진이 뭔가…. 달랐던…….'
"아악! 아아아아아아아."
몸이 길게 찢어지며 튀어나온 것은 훈트 자작이 예상하고있던 이가 아니었다. 날카로운 발톱에 비늘에 감싸인 몸, 누런 눈알을 굴리고있는 마물이 연달아 튀어나왔다. 훈트 자작의 몸에 나타난 게이트를 통로로 삼아!
쾅!
발코니 쪽에서 잠긴 문을 부수고기사들이 들이닥쳤다. 고통에 혀를 깨물었던 훈트 자작이 도와달라는 듯이 기사들을 바라보았으나…. 이미 그의 상반신은 게이트화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검을 뽑아 든 기사들의 판단은 빨랐다. 그들을 작동하고있는 게이트를 닫기 위해 훈트 자작의 목부터 날려 버렸다.
날아든 검기에 훈트 자작의 머리가 달아났으나, 몸뚱이는 여전히 게이트 노릇을 하고있었다.
"전부 막아! 한 놈도 무도회장 안으로 들여보내서는 안 된다!"
기사단장의 고함 소리에 기사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
꺄아아아아!
발코니와 휴게실, 심지어끽연실에도 마물 떼가 밀어닥쳤다. 경비를 위해 기사들에게 무장을 허용했다고는 해도 엄청난 숫자였다.
그나마 황제가 보내 준 황실 기사단과 아덴 공작가의 정예들이 대기하고있었기에, 한순간이나마 버틸 수 있었다.
"각하!! 안전한 곳으로 피하셔야 합니다!"
호위기사들의 외침에 미카엘은 사납게 인상을 구겼다.
"저기에 내 가신들이 모여 있는데, 나더러 도망을 치라는 거냐? 로제타를, 공작부인을 안전한 곳으로 모셔라!"
미카엘은 곁에 있었던 로제타의 손을 한번 쥐어주고는 무도회장 쪽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막 무도회장에서 나와 본성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로제타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미카엘을 돌아보았다. 그가 뛰어난 마법사임을 알지만 걱정스러웠다.
'괜찮을 거야. 원작에서 미카엘이 죽었던 건…. 그가 사랑했던 아이리스가 음식에 독을 탔기 때문이었어! 그러니….'
심지어이번은 패트릭과 제럴드 또한 미카엘을 돕고있을 테니, 그는 안전할 것이다. 로제타는 재촉하는 호위기사들을 따라 복도를 달렸다.
장시간 사람들을 상대해야 할 것을 감안하여 굽이 낮은 구두를 신고온 것이 다행이었다. 로제타는 치맛자락을 들고기사들의 뒤를 따랐다. 순간 앞선 기사 하나가 걸음을 멈추며 주변으로 눈길을 돌렸다.
"왜…?"
크르륵, 크르…. 키기기긱…….
서로 다른 마물의 숨소리가 뒤섞이고있었다. 로제타는 이곳에서 또한 마물이 나타났음을 깨닫고새하얗게 질렸다. 기사들은 이미 로제타를 데리고본성으로 향한 시점에서 검을 뽑아 들고경계하고있었다.
"마님, 제 뒤에서 떨어지시면 안 됩니다."
말하지 않아도 그럴 작정이었다. 로제타는 자신이 이 상황에서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로제타를 지키면서 싸우기에는 마물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기사들은 서너 명이 남아 마물을 상대하기로 하고, 고작 세 명의 기사가 로제타를 호위하며 복도를 통과했다.
공작가의 성은 다섯 개의 성으로 이루어져있지만, 본성을 둘러싸고있는 형태로 건설되어각각의 성과 이어져있었다. 서쪽 성은 본성과 남쪽 성, 북쪽 성과 각각의 구름다리로 건너갈 수 있었다.
이들이 향한 곳도 북쪽 성과 이어진 구름다리였다.
앞뒤로 방어하고있는 기사들 사이에서, 로제타는 치맛자락을 움켜쥔 채로 계단을 달렸다. 구름다리 앞에는 안쪽과 바깥쪽에 각각 네 명의 병사들이 대기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들은 소란에도 아래층으로 내려와 보지 않고경계하고있었다.
달려오는 기사들과 그 사이에서 보호받고있는 로제타를 보고병사들은 눈을 크게 떴다. 두 명은 자리를 지키고두 명이 달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마물이 침입했다! 문을 열어라!"
기사의 외침에 철문 앞에 선 병사들이 다급히 문을 열었다. 그들의 외침이 구름다리 건너편에 있는 병사들에게까지 닿았다.
육중한 철문이 열리고로제타와 기사들이 통과했다. 병사들 또한 문 안쪽으로 들어오며 철문을 걸어잠갔다.
"이 안은 안전할 겁니다. 하지만 아직은 안심할 수 없으니, 북쪽 성으로 가시지요."
로제타는 불안한 듯 문을 바라보았다. 뒤에 남은 호위기사들이 걱정되었다.
"남은 사람들은…."
"무사할 겁니다. 염려 마십시오."
기사들은 여전히 주변을 경계한 채로 로제타와 같이 구름다리를 건넜다. 구름다리는 단순한 다리가 아닌, 천장과 벽을 가진 통로였다. 아치형의 창문을 통해 바깥의 풍경이 내려다보였으므로 로제타는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귀족들이 양떼처럼 쏟아져나오고있었다. 그 뒤를 몇몇의 마물이 뒤쫓는 듯싶었으나 뒤따라 나온 기사들이 그 마물을 도륙했다. 로제타는 계단을 뛰어내려오던 영애 하나가 치맛자락에 걸려 넘어지는 것을 보고숨을 삼켰다.
다행히 기사들이 늦지 않게 마물을 사냥하여 그 영애는 무사할 수 있었다. 기사들은 넘어진 영애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남은 마물을 찾아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쓰러진 영애에게 달려온 것은 공작가의 병사들이었다.
"너무 가까이 서시면 위험합니다."
구름다리와 북쪽 성을 연결하는 입구의 철문이 열렸다. 로제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사들을 따라 구름다리를 빠져나갔다.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듯했던 마물들은 미카엘의 등장으로 기세가 꺾였다. 대륙 최고의 마법사라는 평이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듯, 그가 뚜벅뚜벅 걸어가는 자리마다 수십의 마물이 산산조각 나거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로 쓰러졌다.
불꽃으로 만든 수백의 거대한 창이 마물을 꿰뚫고 휘몰아친 바람이 마물의 몸을 찢었다. 공작가의 기사들은 한시름 놓은 표정으로 마물을 베어 넘겼다. 공작가의 기사들은 능히 마물 떼를 상대할 수 있었지만, 수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패트릭은 미카엘의 실력에 감탄하면서도 질시 어린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일대일로 붙는다면 자신이 지지 않는다, 단언할 수 있지만. 이 상황에서 결국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은 역시 마법사였으므로.
무도회장에 나타난 마물들은 마물 토벌에서도 보기 힘든 강한 것들이었다. 공작가의 단련된 기사들이나 황실 기사들이 아니었다면 피해가 컸을 것이다.
"어떻게 마물이 침입한 거지? 보고하라."
미카엘 황자가 돌아온 지 십 분도 되지 않아 장내가 진정되었다. 부상을 입어 잠시 주저앉아 있었던 윌리엄은 다른 기사의 부축을 받고 일어섰다.
"인간의 몸을 게이트로 사용한 것같습니다."
월리엄은 흔적이 남은 시신으로 미카엘을 안내했다. 이 음모를 꾸민 자들은, 충분히 마물들이 빠져나오고 나면, 마물들이 그 게이트가 된 인간을 갈기갈기 찢어 흔적이 남지 않을 것이라 예상한 듯했다.
실제로 다른 사건에서는 그렇게 됐었다. 다만 이번의 경우, 아덴 공작가 측의 대응이 빨라서 그렇게까지 번지지 못했을 뿐이다.
미카엘은 차가운 얼굴로 목이 베인 시신을 확인했다.
게이트로 사용된 인간은 모두 다섯 명이었고, 전부 수도에서 내려온 귀족들이었다. 다른 귀족의 수행원으로 온 한 명을 제외하면, 나머지 넷은 죄인의 부친들이었다.
모두 초대장을 받지 않고 참석한 수도의 귀족임이 확인되자 기사들의 얼굴이 떨떠름하게 굳었다.
"…조사가 필요할 것같군. 카일."
"부르셨습니까!"
무장을 하기는 했으나 검술 실력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편인 카일이 나타났다. 그는 현장까지 오기는 했으나 미카엘을 응원하는 쪽이었다.
"대피소에 살아남은 수도의 귀족이 있을 거다. 초대장을 받지 못한 자들은 모조리 잡아들여라."
"네."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불평의 말은 새어 나오지 않을 것이다. 기사들 틈에서 제럴드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왔다.
"공작님. 부인께서는…."
"마님께서는 무사히 대피하셨습니다."
미카엘이 대답해 주기 전에 카일이 대꾸했다. 제럴드는 안도한 듯했으나 할 말이 남은 듯한 표정으로 미카엘을 보았다.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로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제럴드. 무슨 일이지?"
낮은 목소리에 제럴드는 움찔했다. 미카엘이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러서였다. 하기야 처남이니 다른 사람들 앞에서 휘르센 경이라 부르는 것도 부자연스러울 터였다.
"그…. 성녀님께서 도착하지 않으셨습니다. 기우일 수도 있으나 이런 상황이니 한번 알아보시는 게…."
그제야 패트릭 또한 아이리스의 부재를 알아차렸다. 서신으로 이번 무도회에 참석한다는 얘기는 들었으나 늦어지기에 루긴의 대신관이 허락해 주지 않았나 보다 했던 것이다.
제럴드는 아이리스가 이 무도회에 빠질 리 없다고 생각했다. 지난번에 그런 망신을 당하기는 했으나, 미카엘의 얼굴을 보기 위해 이 루긴의 신전으로 부임한 그녀였다.
그저 루긴에 산다는 것만으로는 아덴 공작을 볼 수 없으니, 이번 기회를 놓칠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미카엘은 카일에게 고개를 돌렸다. 카일이 여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람을 보내 알아보겠습니다."
***
신전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가 대문을 통과하자 병사들은 아무 제지 없이 들여보냈다. 지금 공작가의 서쪽 성안은 마물이 습격해 난리였다. 이 와중에 찾아온 신관들은 부상을 입은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새하얗게 칠해지고 금빛으로 여신의 문장을 새긴 마차였다. 마차는 대피소가 있는 방향으로 꺾어지는 듯싶더니 정원을 크게 돌아서 북쪽 성으로 향했다.
북쪽 성은 많은 기사들이 머물고 방어하는 성이었다. 화려한 맛은 없지만 빽빽하게 솟은 지붕과 첨탑이 날카로운 느낌을 주었다.
신전의 마차가 성의 입구에 서자 기사와 병사들은 의아한 낯을 했다. 대피소는 서쪽 성의 오른쪽에 있었고, 북쪽 성에는 치료를 받아야 할 이가 없는 탓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덴 공작가의 기사가 묻는 와중에도, 말에서 내린 시종은 바쁘게 마차의 문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말을 탄 성기사들도 등자에서 내려왔다.
"공작저로 향하다가 쏟아져 나오는 마물과 조우했소. 가까스로 성녀님을 보호할 수는 있었으나, 많이 놀라신 듯하여 안전한 곳에서 쉬게 하고 싶소."
"그렇다면 잘못 찾아오셨습니다. 서쪽 성의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시면 거기에, 많은 귀족분들이 쉬고 계실 겁니다."
기사가 긴장을 풀지 않은 채로 대꾸했다. 그러며 그의 눈길은 마차의 상태며, 성기사들의 갑주로 향하고 있었다.
과연 그들의 말대로 망토에 찢어진 부분이 보였으며, 갑옷의 이곳저곳에 마물의 피가 묻어 있었다.
"서쪽 성이라면 마물이 발생한 곳이 아닌가! 성녀님을 그런 위험한 곳에 모시란 말인가!"
성기사가 버럭 화를 냈으나 기사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이미지시받은 것이 있었고, 그에 따를 뿐이었다.
"이 성은 기사들이 쉬고 훈련을 받는 곳입니다. 성녀님이 쉬시기에는 적합지 않으니, 정 그러하시다면 동쪽 성으로 가 보십시오. 문지기에게 사정을 설명하면 들여보낼 것입니다."
"북쪽 성이든, 동쪽 성이든지 간에 무엇이 다르다고 이러는 건가? 성녀님께서는 많이 놀라셨고 빨리 쉬셔야 한다네."
"그러시다면 길을 서두르시면 될 것입니다."
기사는 완고했다. 그는 이미성에 도는 성녀의 소문을 알고 있었고, 공작님이 계시는 서쪽 성이 아닌 북쪽 성에 와서 이렇게 나오는 것을 수상하다 여기고 있었다.
거기다 지금 마차에서 내리는 이까지, 보이는 성기사만 다섯이었다.
성녀가 교단에서 중요한 위치라고는 하나 여기는 루긴이었고, 루긴은 수도보다도 치안이 좋은 곳이었다. 아무리 늦은 시간에 출발했다고는 해도 호위로 성기사를 다섯이나 데리고 온단 말인가? 무도회장에?
심지어 성기사와 내리는 이는 성녀 하나뿐, 신녀나 성녀의 시중을 들 이가 보이지 않았다.
'수상하다.'
처음 공작께 인사를 하겠다고 나타났을 때는 훤히 얼굴을 보이고 나타났으면서, 심지어 지금은 얼굴에 베일까지 쓰고 있었다.
"로완 경…. 저, 저분의 말…. 대로……. 해 주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성기사의 부축을 받아 겨우 마차에서 내린 성녀가 말했다. 긴 베일을 뒤집어쓰고 있으나 가늘게 몸을 떨고 있는 것이 보기에도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공작가의 기사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애써 태세를 유지했다. 로완이라 불린 남자는 할 말이 많은 얼굴로 성녀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성녀님! 엇!"
로완이 언성을 높이자마자 성녀의 다리가 풀리며 그대로 몸이 늘어졌다. 계속된 긴장을 이기지 못하고 기절한 모양이었다.
순간 성의 입구를 지키고 섰던 기사와 병사들 모두 당황했다. 로완은 아까의 성기사와 같이 성녀를 부축하며 언성을 높였다.
"뭘 하는 건가! 당장 문을 열지 않고!!"
문을 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기사는 곁에 있던 병사 하나에게 마님께 이 상황을 알리라고 지시했다. 성녀가 성의 입구에서 기절한 것을 공작부인께서 알고 계셔야 했다.
병사가 허둥지둥 문을 열자 성기사 두 명이 기절한 성녀를 안고 성으로 들어갔다. 공작가의 기사는 다른 성기사들은 바깥에 있으라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성기사들은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
힘을 모으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정말로 그는 대부분의 힘을 소모해 버렸다. 인간의 소원은 대부분 터무니없는 것이기에 로제타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는 마력을 모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 힘을 다 모은 후에도 정령은 로제타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많은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었지만, 많은 제약이 따랐던 탓이다. 가장 무거운 벌이 뒤따르는 제약은 '인간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만약 이 제약이 없었더라면 정령은 더 자유로웠을 것이다. 그의 마법으로 인간을 죽일 수는 있지만, 인간을 죽인다면 큰 벌이 뒤따르게 된다.
그래서 이전 로제타의 소원을 들어주려 승아와 몸을 바꿨을 때도, 그녀가 그 과정에서 죽을까 봐 노심초사했던 것이다.
'지금은 곁으로 갈 수 없어. 저렇게 괴롭힘을 당하는데…. 저를 괴롭힌 인간들을 죽여 달라는 소원을 빌면 어떻게 해?'
이전 로제타에게는 큰 은혜를 입었지만, 정령은 지금 로제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급한 나머지 소원을 다섯 개나 들어주기로 한 것도 거슬렸다.
'교활한 것이 꼭 나를 가두었던 마법사가 생각나!'
정령은 로제타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로제타가 죽을 때까지 몸을 숨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 또한 죄를 짓는 것이었다. 무려 계약의 맹세까지 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니…. 인간을 죽이는 것만큼까지는 아니라 해도 무거운 벌을 받게 된다.
고민하던 정령은 로제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 나타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사악한 이의 눈에 띄었고, 그의 악의를 받고 있었다. 곧 위험에 처하리라.
그러나 로제타는 정령의 예상보다도 빨리 사악한 자의 마수에서 도망쳤다. 대항할 수 있는 힘도 능력도 없으니 제법 정확한 판단이었다.
정령은 좀처럼 소원을 소모할 상황이 발생하지 않자 고민했다. 이러다가는 평생 저 인간의 주변에서 얼쩡거려야 할 것같았다.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차라리 내가 저 인간을 위험에 빠트릴까?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 거잖아….'
문제는 그랬다가 자칫 소원 빌 타이밍을 잃어 로제타가 죽기라도 한다면 고스란히 그의 죄가 된다는 점이었다.
정령은 고민 끝에 잠시 로제타의 곁을 떠나 이자벨의 동태를 살피기로 했다. 이자벨을 적당히 부추겨 로제타를 해치게 만들면…, 소원을 소모할 기회가 생길 것같았다.
그러나 그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로제타가 미카엘과 결혼해 버렸다.
미카엘이라니! 그는 이전에 정령을 붙잡아 노예로 부렸던 마법사보다도 더 강한 마력을 지닌 자였다. 로제타를 아끼는 그는, 정령이 수작을 부리는 것을 발견한다면 가만두지 않을 터였다.
정령은 미카엘이 무서워서 로제타에게 술수를 부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대신에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엿보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정령이 고대하던, 그 순간이 오려던 참이었다.
성기사들은 현관홀 가까이에 있는 응접실의 소파에 성녀를 눕혔다. 뒤따라 들어온 기사와 병사들, 그리고 무슨 소란인가 싶어서 내려온 기사들까지 모두 여덟 명이 그들을 살피고 있었다.
그는 아덴 공작가의 기사들이 꽤나높은 수준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거기다성안에는 아직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기사들이 있을 터였다.
그들까지 합세한다면 성공을 확신할 수 없는 터라 가짜 성기사들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가능하면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죽여야만 했다. 하나라도 비명이 새어 나간다면, 이 일은 성공하지 못할 터였다.
이 모습을 정령은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북쪽 성에 들어온 성기사와 성녀는 가짜였다. 진짜 성기사는 둘밖에 오지 않았고, 저들이 입고 있는 갑옷도 모양만 흉내 낸 가짜였다.
진짜 성녀와 그 수행원들은 꽁꽁 묶인 채로 숲 어딘가에 버려져 있었다.
【저들로는 로제타를 납치할 수 없을 텐데?】
정령은 저들의 대화를 엿들었기에 그들이 로제타를 납치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침 딱 좋은 상황이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돼.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생길지 알 수 없어!】
그러나불행하게도 위층에는 더 뛰어난 기사들이 로제타를 보호하고 있었다. 그녀와 같이 응접실에서 대기하고 있는 기사만도 여덟 명이었다. 방 앞에는 여섯 명의 기사가 있었고, 여기까지 오는 복도와 입구에도 기사나병사들이 포진해 있었다.
【내가 좀 도와줘 볼까?】
저들은 납치가 목적이니 소란을 피우지 않고 빠져나가려 할 것이다. 정령은 조심스럽게 기회를 엿보다가 아덴 공작가의 기사와 병사들에게 마법을 걸었다.
마나를 단련시킨 자들에게 마법을 걸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정령은 그것이 가능한 능력이 있었다.
【잠들어라….】
기회만 노리고 있던 가짜 성기사와 성녀는 갑자기기사와 병사들이 풀썩 쓰러지자 놀랐다. 가짜 성녀는 여전히 기절한 척하고 있었으나, 성기사는 쓰러진 자들에게 다가가 살펴보았다.
'잠들었잖아?'
미심쩍었으나연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함정인가?'
그들은 당황하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의심스러운 상황이기는 했으나맡은 임무를 저버리고 이대로 후퇴할 수는 없었다. 일단 움직여야만 했다.
혹시 몰라 가짜 성녀는 1층에서 대기하도록 하고, 가짜 성기사 다섯만이 올라갔다. 그들은 복도에 쓰러져 있는 병사와 기사들을 발견하고 혀를 찼다.
예상보다많은 인원이었다. 누구의 수작인지는 모르나, 도와주는 이가 없었더라면 공작부인 납치는 실패했을 것 같았다.
공작부인을 부르러 올라갔던 병사는 3층에 쓰러져 있었다. 그 또한 잠든 것뿐, 몸 어디에도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가짜 성기사들은 손쉽게 로제타가 있는 방을 알아냈다. 그 방문 앞에 많은 기사와 병사들이 잠들어 있었던 탓이다.
문은 잠겨 있었으나, 그들은 검기로 자물쇠를 자르고 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더 많은 기사들이 잠들어 있었다. 그들은 그 한가운데에 곤히 잠든 로제타를 발견하고 다가갔다.
정령은 로제타까지 재울 필요가 있을까 고민했지만, 재우는 것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로제타의 소원을 들어주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마음은 없었다.
이미 미카엘의 존재가 있으니, 그보다는 못하더라도 자신을 가둘 수 있는 마법사가 있을까 두려웠다.
가짜 성기사들은 깊이 잠이 든 로제타를 둘러메고 1층으로 내려왔다. 누군가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듯한 두려움은 있었으나, 일이 수월해지자 서서히 긴장이 풀렸다.
성의 저택 앞에는 여전히 그들의 마차가 세워져 있었다. 아이리스가 타고 왔던 진짜 신전의 마차를 강탈한 것이었다.
그들은 마차에 로제타를 싣고 각자 말에 올랐다. 이제 조용히 빠져나가기만 하면 되었다.
***
'뭐지? 뭔가 흔들려….'
바닥이 딱딱한 데다가 좁은 공간에 갇혀 있는 듯했다. 연신 이곳저곳으로 몸이 부딪히는 느낌에 로제타는 눈살을 찌푸렸다.
신전의 마차에도 당연히 짐을 싣는 공간이 있었고, 로제타는 그 공간에 갇혀 있었다. 혹시라도 정신을 차렸을 때를 대비하여 재갈을 물리고 손목과 발목을 결박한 상태였다.
'어? 어어어어!'
순간적으로 이상한 꿈을 꾸는 것인가 생각했으나, 바로 정신이 들었다. 입구 틈새로 약한 빛이 들어오는 것을 제외하면 완전히 캄캄한 공간이었다.
'뭐야? 왜….'
설마 아덴 공작가의 기사들 중 누군가가 배신한 것인가 싶었으나, 자신은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음이 떠올랐다. 갑자기기사들이 차례로 잠이 들고, 자신마저 잠이 든 것이 떠오르자 몸서리가 쳐졌다.
마법 외에는 생각나는 것이 없었으나, 또 모를 일이었다.
【드디어 정신을 차렸구나!】
좁은 공간에서 불쑥 나타난 정령의 모습에 로제타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여전히 투명한 작은 소년 같은 모습이었다. 몸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났으므로 로제타는 어둠 속에서도 그임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약속이니까, 소원을 들어줄게! 말해 봐!】
어딘가 상대를 깔보는 듯한 어조로 정령은 거만하게 말했다. 다급한 상황이었으나로제타는 무슨 소원을 빌어야 할지 망설였다.
'미카엘 님에게 보내 줘!'
그러나말을 하려고 해도 재갈이 물린 상태였다. 짐칸 밖으로 소리가 새어 나가는 것도 신경 쓰였다. 로제타가 우물거리며 말을 건네자 정령이 갸웃했다.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어. 일단 여기서 구해 달라는 거지?】
원래 생각한 소원과 달랐지만 이 위기에서는 벗어나야 했다. 로제타가 급히 고개를 끄덕이자 정령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그럼 첫 번째 소원은 그거다?】
로제타는 동의한다는 의미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소원 한 개를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까웠지만, 나머지 네 개의 소원이 있었다.
【좋았어! 네 첫 번째 소원을 들어줄게!】
신이 난 듯 지껄이던 정령은 갑자기홱, 사라졌다. 로제타는 정령이 이대로 달아나버린 것은 아닐까 불안해졌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덜컹거리며 나아가던 마차가 세워졌다. 손목과 발목을 결박하고 있던 밧줄이 풀렸으므로 로제타는 얼른 제 입에 채워진 재갈을 풀었다.
'뭐지? 바깥이 조용해….'
로제타가 묶였던 손목을 매만지며 기다리고 있자니 다시 정령이 불쑥 나타났다. 저는 아니라고 하지만 로제타의 입장에서는 유령처럼 보였다.
【뭘 기다리고 있어! 얼른 나와!】
쾅! 소리를 내며 짐칸의 뚜껑이 열렸다. 로제타는 얼른 짐칸에서 빠져나왔다. 꽤 오랫동안 짐칸에 갇혀 있었는지 온몸이 다찌뿌둥했다.
'여기가 어디지?'
돌아보던 로제타는 마차에 매어 있는 말은 물론, 성기사들을 싣고 있는 말과 그 위에 탄 자들까지도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심지어 두어 명은 말에서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곯아떨어져 있었다.
'이건….'
순식간에 아까의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로제타는 이 모든 상황이 정령의 수작임을 깨닫고 분노에 찬 시선을 던졌다.
정령도 로제타가 눈치챈 것을 안 모양이었다. 정령은 빙글빙글 웃었다.
【그렇게 넋 놓고 있어도 되겠어? 저들은 계속 잠들어 있지 않을 거야. 도망쳐!】
로제타는 그대로 달아나려다가 비어 있는 말 두 필을 발견하고 그리로 달려갔다. 말을 타려고 했으나, 저들이 정신이 들면 금방 쫓아올 것이 생각났다.
'해야 할 일은 해야지!'
쓰러진 기사의 허리춤에서 단도를 빼 든 로제타는 얼른 마차에 매어 있는 말에게 달려가, 마차와 연결된 줄을 끊었다. 다른 세 마리의 말안장에 걸려 있는 줄도 잘라 냈다.
【뭐 하는 거야! 시간이 없어!】
로제타가 도망치다가 저들에게 잡히면, 다시 소원 하나를 소모시킬 생각이었던 정령이 안달을 하며 소리쳤다. 로제타의 뺨에 그려진 꽃봉오리는 피어나기전이었다.
아직 저들에게서 달아나기전이니 소원을 들어준 것으로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마지막 남은 안장의 끈까지 끊어 버린 로제타가 급히 말로 향했다. 가짜 성기사며 성녀는 아직도 자고 있었다.
말은 선 채로 자고 있었다. 얘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로제타는 말이 놀랄까 두려워하며 말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을 두드려 깨웠다.
로제타가 안장에 올라탈 때까지도 깨지 않았던 말은 그제야 눈을 떴다. 로제타는 말머리를 공작가의 성이 보이는 방향으로 돌렸다.
"이, 이랴!"
혼자서 말을 타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귀족가의 아가씨였고, 늘 수행원이 따라붙었던 것이다. 로제타가 말을 출발시키는 것을 보고 정령은 초조하게 따라붙었다.
로제타의 뺨에 그려진 꽃봉오리가 서서히 피어나는 것이 보였다.
'됐다!'
활짝 핀 꽃이 하나둘씩 꽃잎이 사그라들더니, 줄기의 일부분이 사라져 버렸다. 남은 꽃봉오리는 4개뿐이었다. 정령은 기뻐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정신을 잃은 듯이 잠들어 있던 가짜 성기사들이 눈을 떴다. 그들은 말이 달리는 소리에 당장 로제타가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거기서!"
로제타는 말에게 바싹 붙은 채로 말의 배를 걷어찼다. 솔직히 승마는 이 세계에 온 뒤로 처음 해 보는 데다가, 원래 로제타도 그리 승마를 잘하지는 못했던 모양이었다.
경력 2년. 그것도 한 달에 두어 번 탄 것이 전부였기에, 로제타는 겁에 질린 채로 말을 달렸다.
'이러다말에서 떨어져 죽으면! 네 녀석을 저주하는 데 소원을 다쓸 거야!!!'
물론 그 '네 녀석'은 곁에서 농간을 부리고 있는 정령이었다.
***
사람을 보내 문지기에게 성녀 일행이 도착했는지를 확인했던 카일은 당황했다.
"성녀 일행이 도착했다가 떠났다고?"
"네. 이런 위험한 상황에 성녀를 모실 수 없다면서 급히…. 돌아가신 지 20분쯤 됐다고 했습니다."
신전에서 온 자들이라면 그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다친 자들을 살펴야 했다. 카일은 그 사실에 불쾌감을 느꼈으나, 신전의 처우에 불평할 수는 없었다. 이번 요청은 단순히 무도회에 참석해 달라는 것이지, 치료를 목적으로 초대한 것은 아니기때문이었다.
"카일 님!"
서쪽 성의 홀에 서 있던 카일을 알아보고 기사가 다급히 달려왔다. 로제타의 곁에서 그녀를 호위해야 할 기사들 중 하나였으므로 카일의 표정은 굳었다.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공작님께서 되었다할 때까지 마님 곁에서 대기하라는 명령이었을 텐데!"
"그, 마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기사의 다급한 외침에 카일을 비롯한 모두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그, 그게 무슨 말인가! 제대로 설명해!"
"갑자기졸음이 와서 정신을 잃고 깨어나보니…. 아래층에 성녀와 성기사들이 와 있었는데, 그들도 사라졌습니다! 그들이 마님을 납치한 것이 분명하니…."
방금 부하로부터 신전의 마차가 공작저의 대문을 빠져나갔다는 소식을 들은 참이었다. 카일의 판단은 빨랐다.
"아직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당장 각하께 알리고 말을 가져와! 갈 수 있는 자들은 모두 간다!!"
범인들이 마차를 바꾸기전에 잡아야만 했다. 반드시.
【소원 하나 더 빌고 싶지않아?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
정령은로제타의 주변을 날아다니며 속삭였다. 로제타는 겁먹은얼굴로 뒤를돌아보았다. 말안장에 달린 끈을 잘라 놓으면 쫓아오지못할 줄 알았더니, 가짜 성기사들은안장 없이 말을 타고 쫓아오는 중이었다.
점점 좁혀지는 거리에 로제타는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아덴 공작가로 돌아가게 해 줘!"
로제타가 말했지만 정령은얼른 소원을 들어주지않았다. 이대로 로제타가 아덴 공작가로 돌아가 버리면, 소원을 한 개 더 소모하고 끝나 버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번 같은기회가 언제다시 올지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정령은로제타를한계까지몰아붙여서 나머지4개의 소원도 전부 소모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그건 안 돼. 다른 소원이면 들어줄게. 저 납치범들과의 거리를벌려 주는 건 어때?】
뭐라고?
이미 정령이 농간을 부려 자신이 저들에게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로제타였다. 로제타는 정령이 자신을 도와줄 생각 없이 소원을 소모시킬 속셈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 식이라면 소원이 순식간에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아덴 공작가의 누군가가 알아차리고 추적자를보낼 때까지버텨야만 했다.
"저 납치범들이 탄 말의 다리를부러트리는 건?"
말에게는 미안했지만, 이쪽도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로제타의 물음에 정령은당황한 얼굴로 고개를흔들었다.
【안 돼! 그런 건 절대 안 돼! 말에서 떨어졌다가 목이라도 부러지면 어쩌라고!】
왜 그걸 걱정한단 말인가? 차라리 말을 걱정하면 또 모를까.
로제타는 문득 정령과 처음 만났을 때를떠올렸다. 그때도 정령은그녀의 혼이 육신으로 들어가지못해 죽을 것을 걱정했었다.
'하지만 날 계속 위험한 상황에 노출시키려는 것을 보면 나를걱정하는 건 아니야.'
자신이 행한 술수로 인간이 죽으면 무언가 패널티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큰 벌을 받든가.
좋은사실 한 가지를알아냈지만, 당장 그것만으로는 정령에게 제대로 소원을 들어주게 만들 수 없었다.
"그럼 저들을 한 시간 이상 잠들게 해 줘!"
【그건….】
이번 소원 역시도 로제타가 이 궁지에서 완전히 빠져나가게 되는 것이라 정령은들어주기 싫었다. 그러나 이미 로제타가 눈을 홉뜨며 그를힐끗 째려보고 있었다.
【달리는 말 위에서 갑자기 잠들면 위험하지않을까? 떨어질 수도 있고….】
"말도 같이 재우면 되잖아!"
그사이 가짜 성기사들은부쩍 로제타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겨우 조금, 조금만 더 좁혀지면 그들이 로제타가 탄 말의 꼬리라도 붙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정령은제모습을 들킬까 봐 두려웠는지, 로제타가 하고 있는 브로치 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안 돼!'
바로 뒤까지말을 몰아온 성기사들이 로제타를낚아채려 손을 뻗었다. 로제타는 한 손으로 고삐를쥐고, 나머지손으로는 아까 들고 나온 단검을 쥐고 휘둘렀다.
성기사들이 단검을 피하는 듯싶었으나 로제타 또한 균형을 잡지못하고 말 위에서 크게 비틀거렸다.
【로제타!】
이쪽의 로제타는 로제타라는 이름으로 불러도 가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정령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악!"
로제타는 말에서 떨어져 마찻길 위로 나뒹굴었다. 뒤쫓아오던 자들은말로 로제타를깔아뭉개지않기 위해서 급히 고삐를잡아당겨야만 했다.
***
꺄아아아아악!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통증에 이자벨은비명을 질렀다. 처음 저주에 걸렸을 때를제외하고는 거의 느끼지못했던 통증이었다. 마치 무거운 바윗돌이 그녀의 온몸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을 내려는 듯 무시무시한 통증이 잇따랐다.
"아가씨!"
이자벨의 충직한 시녀가 당황하여 이자벨의 상태를살폈다. 여러 군데 뼈가 부러진 것을 비롯하여 장기 손상까지온 것 같았다. 거기다온몸에 시퍼렇게 멍이 들고, 얼굴에는 심하게 찢어진 상처마저 있었다.
마치 마차에라도 깔린 듯한 상처였다. 이 정도 상처라면 정신을 잃는 게 당연했지만, 저주의 영향으로 이자벨은기절할 수도 없었다. 이자벨은통증에 벌벌 떨면서 마법사와 치유술사를부르라고 고함을 질렀다.
부름을 받고 급하게 달려온 마법사는 시릴이었다. 그는 치유술사가 이자벨의 상처를살피는 동안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이자벨의 상태를살폈다.
"왜, 내 몸에…. 상처가 생긴 거지?"
시릴은흥미롭다는 눈빛을 숨기며 이자벨을 쳐다보았다. 사납기 그지없는 눈빛에 시릴은움츠러드는 척 고개를숙였다.
"짐작하시는 대로입니다. 공녀님과 연결되어 있는 그자가 상처를입은모양입니다."
"……."
이자벨은분노에 찬 얼굴로 눈을 굴렸다.
이것이 그녀에게 경고하는 의미인지, 아니면 단순히 자신과 연결된 사람이 부상을 입은것인지판단하기 어려웠다.
문득 자신이 잡아오라고 한 로제타가 떠올랐으나, 그럴 리 없었다.
만약 로제타가 그녀와 연결되어 있었다면, 황궁 무도회 사건의 그날 밤에 자신의 얼굴에는 더 무시무시한 상처가 생겼을 거라고 생각했다.
'설마 내 저주가 미카엘로 인한 것이고…. 로제타가 납치되었기 때문에 미카엘이 나와 연결된 자를고문하는 것인가?'
가능한 상상이었지만, 증거 없이는 그저 상상에 불과했다. 이자벨은고통으로 눈물을 흘리며 치료를받았다.
***
"으으…."
떨어지면서 바닥을 잘못 짚었는지팔을 삔 것 같았지만, 다리는 움직일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몸을 움츠렸지만 머리를세게 부딪쳤다. 로제타는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한 채로 끙끙거렸다.
【로, 로제타! 로제타! 살아있는 거야?!】
'너는 걱정이 그것뿐이겠지. 못돼 처먹은정령 같으니….'
로제타가 이대로 죽는 건 또 안 되는 모양이었다. 로제타는 잘 돌아가지않는 혀를움직여 소원을 빌려고 했다.
"미카…. 엘……. 돌아…. 가, 게……. 으…."
상황이 이렇게 되니 정령도 다른 소원을 빌라고 채근하기 어려웠다. 당장 저들을 쓰러트린다고 해도 로제타가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지않았다.
【알았어! 그 마법사의 곁으로 보내 달라는 거지? 어….】
그러나 로제타는 정령의 뒷말을 듣지못하고 기절해 버렸다. 정령은당황했다. 로제타가 그의 말에 긍정해 주지않으면 소원을 들어줄 수 없었다.
【로제타! 로제타, 정신 차려!】
정령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울렸지만, 로제타의 감긴 눈은떠질 줄 몰랐다. 가짜 성기사들은말에서 내려 로제타에게로 다가갔다.
그녀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한 그들은, 말안장에 로제타를싣고 길을 서둘렀다. 이제슬슬 공작가의 추적자가 쫓아올 시간이었다.
***
미카엘은기사들을 이끌고 신전의 마차를추적했다.
마차는 공작가 소유의 숲 중간에 버려져 있었다. 마차를뒤졌지만, 거기에는 가짜 성녀의 옷과 성기사들의 갑옷이 버려져 있을 뿐이었다.
기사들은카일의 지시 아래에 숲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기사들 중 하나가 로제타가 신고 온 것으로 추측되는 신발 한 짝을 찾아냈지만 그뿐이었다.
수색 도중에 묶여 있는 아이리스 일행을 찾아낸 것이 전부였다.
아이리스는 시중을 들 신녀 하나와 성기사 둘, 마부 하나를대동한 채로 공작가의 무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오던 중이었다.
로건이 그녀의 파트너로 동석했다면, 시간이라도 끌었을지모르지만, 로건은나흘 전에 사촌 여동생의 편지를받고 급하게 수도로 돌아간 참이었다.
"공작부인이 납치되셨다니요?!"
소식을 들은아이리스는 크게 놀란 얼굴로 카일을 보았다. 미카엘은로제타를찾기 위해 숲으로 가 버린 탓에, 신전 사람들을 심문하는 역할은카일이 맡게 되었다.
"성녀와 성기사 행세를하는 자들에게 그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옷을 빼앗기셨다고 들었는데, 무언가 기억하는 것은없으십니까?"
아이리스는 어느 기사가 건네준 망토로 온몸을 두르고 있었다. 가짜 성녀에게 속옷을 제외한 옷을 전부 빼앗겨 버린 탓이었다.
"그 여자 얼굴을 기억해요. 저랑 똑같은은발에, 눈동자는 저와는 다른 갈색이었어요."
카일은고개를끄덕이며 아이리스가 묘사하는 그 여자의 얼굴을 주의 깊게 들었다.
"그 외에 다른 것은생각나지않으십니까? 어디를간다거나, 누구를만난다고 했다든가…."
아이리스는 얼핏 그들이 했던 말이 떠올랐으나 선뜻 입이 떨어지지않았다. 로제타가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터질 일이 터졌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원작에서 그녀는 이자벨의 음모에 휘말려 가장 먼저 죽는 조무래기 악역이었으니까.
그러니 이대로 죽는 것이 그녀의 운명이지않을까?
양심이 찔리지않는 것은아니었으나, 아이리스는 자신이 들은것이 큰 도움은되지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런 얘기는 듣지못했어요."
아이리스가 고개를젓자 카일은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물러났다. 아이리스는 불안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