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 황자에게 사로잡혔다-12화 (12/21)

제12장. 주인공이 바뀌었나?

이자벨이 탈출했다는소식에 비상이 걸린 것은 아덴 공작령뿐만이 아니었다. 이자벨의 소행이라 증언했던 영애들이 소속된 가문은 대부분 그러했다. 물론 황실 기사들이 파견되어 그녀들의 호위를 돕고 있었지만,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는노릇이었다.

"해서…. 재판 일정을 앞당기자는건가?"

옥좌에 비스듬하게 앉은 알렉시스가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들의 증언은 이미 마법사들을 시켜 수정구에 저장해 놓았다. 인제 와서 이자벨이 그녀들을 협박해 거짓 증언이나 유언장을 남기고 자살하게 만들어도 소용없다는얘기였다.

"예. 아무래도 사가보다는감옥이 안전하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황실 무도회 사건에 동원된 영애들은 각자 여러 차례 로제타에게 누명을 덮어씌운 자들이었다. 이자벨이 엄선하여 고른 영애들이니 당연했다.

그들도 황실 관리인 레베카와의 면담 이후 감옥행을 면하기는어려울 거라는자각이 있는모양이었다.

"나쁘지 않은 얘기지."

이자벨 카룰리아스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기는했으나, 그녀가 자백한 것은 로제타에게 누명을 씌운 것뿐이었다. 가장 결정적이라 할 수 있는황족 살인미수에 대해서는부인했다.

사실 그들 여섯 영애가 증인으로 나서기는했으나, 그 증언이 언제든 뒤집힐 수 있는것임은 알렉시스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로제타의 얼굴을 난도질하는광경은 누구도 보지 못했기에, 주동자인 라로쉬 영애만 휘어잡는다면 빠져나갈 구멍이 아주 없지는않았다.

"…라로쉬 영애는 어찌하고 있나?"

"라로쉬 백작이 잡혀 들어간 이후로…. 백작가의 재산을 은밀히 처분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흠…."

라로쉬 백작은 납치와 감금으로 감옥에 갇혀 있었다. 헬렌 라로쉬의 남편은 평민이기는 했어도 기사인 데다, 엄연히 소속된 기사단이 있는 자였다.

그런 자를 그 아들과 함께 납치했으니 죄를 묻기가 쉬웠다.

어느 나라든 그러했지만 영유아의 납치에 대해서는 엄중한 죄를 묻기 마련이었다. 귀족이 평민을 상대로 그러했을 경우는 증인을 매수시켜 사건을 유야무야하게 만들었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황실 기사가 그 사건의 수사를 맡은 탓이었다.

"벌써부터 도망 보낼 준비를 하는 것인가? 뭐…. 나쁘지는 않겠지."

라로쉬 영애 본인은 제대로 재판을 받고 처벌을 받겠다맹세했으니 믿어 보기로 했다. 거기다그녀의 남편과 아들은 죄가 없었다. 라로쉬 백작으로부터 고통받기까지 했으니, 그들에 대한 보호는 당연할 것이다.

"라로쉬 백작의 재판은 어찌 되어 가고 있지?"

"미성년자에 대한 납치는 엄중히 처벌되는 터라…. 쉬이 풀려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잘된 일이었다. 이번 기회에 본보기로 삼는 것도 나쁘지 않다여겼다.

"라로쉬 영애의 소행이야 백작이 딸을 고소하기 전까지는 문제 삼을 필요 없겠지. 감시를 늦추지 말고, 바라던 대로 재판 일자를 앞당기도록 해라. 그들이 일찍 형을 받는다는 소식은 카룰리아스 영애를 자극하게 될지도 모르니."

자신의 죄를 뒤집으려면 영애들이 재판을 받기 전에 행해야 했다. 이미 징역형을 살고 있는 영애의 증언이란 이전보다한층 가벼운 것이 될 테니 말이다.

"폐하, 영애를 호송하던 호송대가 모두 살해되었사옵니다만…. 영애가 다시 자신의 죄를 뒤집으려 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호송대에는 마물에게 습격당한 흔적이 있었다. 마물이 그들을 습격한 틈을 타 도망을 쳤다고 주장한다면, 이에 반박할 수 있는 이는 없을 거다. 살아남은 이는 그녀뿐이니."

그 틈에 라로쉬 영애를 비롯한 제 사건을 증언한 영애들을 협박해서 자신의 판결을 뒤집게 하는 증언을 받아 내면 그만이었다.

"물론 그때까지 자신의 편이 되어 줄 고위 귀족을 손에 넣기는 해야겠지."

라스탄 제국에는 아덴 공작가와 공작위를 빼앗긴 카룰리아스 가문을 제외하고도 다른 세 개의 공작가가 남아 있었다.

그들이 카룰리아스 영애의 편을 들어 줄 이유는 없지만, 이자벨 카룰리아스라면 그런 이유를 만들어 내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조심해서 나쁠 이유는 없었다.

'자신의 복권을 위해 움직이는 것과 원한을 푸는 것….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는 모르겠군.'

알렉시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음 안건을 올리라고 지시했다.

***

늦은 밤까지 창문을 올려다보고 있던 패트릭은 당연히 로제타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그동안 로제타는 미카엘에게 시달리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늦잠을 잔 패트릭은 피곤에 찌든 얼굴로 훈련에 임하고 있었다.

아이리스와 로제타, 어느 쪽도 그에게 큰 관심은 없었으나, 그의 마음은 양쪽을 노닐면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느냐로 고민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로제타의 마음이다. 제럴드의 말에 따르면 로제타는 사기 결혼을 당한 것과 진배없으니 미카엘 황자에게 좋은 감정은 없을 것이다.'

황실 무도회에서 꽤 다정한 모습을 보이기는 했으나, 미카엘 황자의 거짓 사랑에 로제타가 넘어갈 리는 없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사람은 그리 쉬이 변하는 것이 아닌 법이다.'

로제타가 그에게 싫다고 말했지만, 패트릭은 그 감정만은 아닐 거라 여겼다. 한번 그를 마음에 품었던 로제타였다. 그가 그인 이상 다시 사랑에 빠질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는 자신이 아직 로제타를 사랑하거나 그런 것은 아니라고 여겼다. 그와 같이 힘든 일을 겪고서 미카엘 황자 같은 사악한 자의 눈에 띄어 속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서였다.

'그래! 이 감정은 그런 것이다!'

심지어 성녀인 아이리스가 미카엘에 대한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으니…. 미카엘 황자도 결국에는 흔들릴 거라고 보았다. 어느 면으로 보아도 아이리스가 더 사랑스러우니까.

패트릭에 이어 남편인 미카엘까지 아이리스에게 빼앗긴다면, 로제타의 충격이 얼마나 크겠는가? 아직 로제타가 미카엘을 마음에 품기 전에 그 환상을 깨 줘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 다가올 충격이 덜할 것이다.

그 와중에 그의 마음이 로제타에게 기울 수도 있을 테고. 물론 아주아주 작은 가능성일 테지만 말이다.

"흠. 험험…."

거기까지 생각한 패트릭은 멋쩍은 기분에 괜히 혼자 헛기침을 했다. 아직까지 패트릭을 감시하고 있는 제럴드는

'저자가 왜 저러는 거지?'

하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패트릭은 겸연쩍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만약 자신이 로제타와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제럴드가 처남이 되는 건데….

'그건 좀….'

제럴드 앞에서 한 로제타 욕이 있어서 찔리는 구석이 너무 많았다. 제럴드가 가볍게 아무 얘기나 하고 다니는 이는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자신과 로제타가 맺어지는 것을 싫어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설마 저 녀석도 로제타에게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

이전에도 의붓여동생이라고 신경을 써 주기는 했으나, 지금은 무언가 달랐다. 로제타의 무고함이 드러나서 죄책감을 느껴 그런 것이라고 말하기에도…, 수상한 구석이 있는 것이다.

제럴드는 패트릭의 시선에 무슨 일이냐는 듯이 눈썹을 찌푸렸다. 패트릭은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망상이 지나치군."

로제타가 대단한 미인이라면 또 모를까, 자신에 이어 제럴드까지 그럴 리가 없었다. 패트릭은 은연중에 자신이 로제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는 것도 모른 채, 그렇게 생각했다.

***

"로제타."

착 달라붙은 미카엘이 연신 로제타의 얼굴과 어깨에 키스를 쏟아붓고 있었다. 어젯밤 사랑한다는 말이 그 정도로 좋았을까? 아침 내내 행복해 죽겠다는 얼굴을 하는 미카엘에게 로제타는 미안해졌다.

'이렇게 좋아하는 줄 알았으면 진작 말해 줄걸.'

하지만 그전에는 미카엘을 경계하고 있었고, 사랑하게 될 줄 몰랐었다. 미카엘이 사랑한다고 말한다한들 그의 마음이 변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언젠가는 그의 곁을 떠날 일이 생길 거라 예측했다.

여기는 엄연히 소설 속 세상이고 주인공은 따로 있었으니까.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이 세상 역시도 또 하나의 현실인 것 같았다.

고정되어 있는 줄거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으니까. 이 세상은 이미 아이리스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다행이야.'

누가 주인공이라 한들 미카엘과 자신은 그에 휘말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둘이서 계속,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어쩌면 나중에 셋이나 넷이 될 수도 있고.

"로제타, 제가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시간을 늘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무슨 시간을요?"

미카엘의 가슴에 기대어 있던 로제타가 고개를 들어 물었다. 미카엘은 로제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싱긋 웃었다.

"우리가 침대 위에서 하는 그…, 시간 말입니다."

"아…."

로제타는 최근 밤에만 일을 치르고 낮에는 거의 하지 않았던 것을 떠올렸다. 그렇다해도 꽤 이른 저녁부터 침실에 틀어박히고는 했는데, 미카엘에게는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이대로는 주문을 풀기 어려울 테니까요. 차라리 자극에 노출 빈도를 높여서 익숙하게 만들면, 로제타도 절정을 참아 내기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카엘의 말에 로제타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실은 요즈음에는 전혀 참지 않았다. 미카엘에게 안기는 것이 좋아서 실컷 즐기기만 했다.

좀 지나치게 느낀다는 자각은 있지만, 미카엘과 서로 사랑하게 되었으니, 주문은 그대로 내버려 두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말을 하기는 좀….'

부끄러웠다. 아주 많이.

그 말을 듣고 미카엘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되기도 하고.

"저도 단순히 삽입하는 것 외에 로제타를 기쁘게 할 만한 것들을 준비해 놓겠습니다."

"예? 그, 그게 무슨…."

중세 판타지물이니 성인용품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 있을 리 없는데…. 미카엘의 표정이 왜인지 그런 것이 있다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니까요."

놀라지 말라는 듯이 미카엘이 로제타의 관자놀이에 입 맞췄다. 물론 미카엘과의 잠자리를 해 온 로제타로서는 털끝만큼도 신뢰가 가지 않는 소리였다.

***

'이상해.'

로건에게 깊이 사과를 하고 그럭저럭 관계를 회복한 아이리스는 골몰하고 있었다. 분명 화해를 했고 로건에게 괜찮다는 말을 들었는데도, 관계가 예전 같지 않았다. 무언가 자신을 보는 눈초리가 달라졌음을 아이리스 본인도 느끼고 있었다.

'설마 공작저 내에서 망신당한 게 로건의 귀에까지 들어갔나?!'

굳이 분류하자면 로건은 계략남에 속하므로, 그 사실을 모르면 더 이상했다.

그래도 로건은 아이리스가 더한 실수를 해도 그녀에 대한 마음을 꺾지 않았던 이인데…. 요 며칠 사이 부쩍 눈빛이 달라졌다고 느꼈다. 태도는 이전과 같지만.

'사랑이…, 사랑이 시들해졌어!'

물론 신전 내에 존재하는, 새롭게 형성된 그녀의 친위대들은 한결같았다. 아이리스와 동행한 성기사와 신녀가 아덴 공작 성에서의 일에 함구하고 있어선지, 동경 가득한 눈빛으로 아이리스를 보고 있었다.

아이리스는 그들을 적당히 대하며 고민했다. 미카엘을 만나 볼 수 없는 것도 큰일이지만, 로건의 마음을 잃는 것도 문제기는 했다.

로건은 패트릭과 같이 아이리스를 후원해 주는 가장 큰 두 개의 가문 중의 하나였다. 이전에는 미카엘까지도 그녀를 후원해 주었으나, 그녀와의 스캔들이 터진 이후로는 온건하게 결별을 선언했다.

물론 그들 외에도 아이리스를 후원해 주는 가문은 많았지만, 로건은 다른 가문과는 결을 달리하는 이였다.

서브남이니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최고봉은 미카엘이지만, 패트릭이나 로건도 그에 못지않은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물론 제럴드도!

'패트릭은 로제타에게 빙의한 아이리스에게 줄 생각이니 로건은 쥐고 있으려고 했는데….'

제럴드에게도 은근슬쩍 발을 걸치려고 했으나, 제럴드는 어느 순간부터 아이리스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마치 미카엘 때와 같다.

거기다패트릭도, 수도에서는 뻔질나게 드나들며 연락을 해 오더니, 언제부터인가 서신 왕래도 뜸해지고 있었다.

'내가 기절한 척한 게 패트릭의 귀에도 들어갔나?'

미르세 후작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기는 해도, 자신의 것까지 소문을 낼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자신이 조금 위협하기는 했다해도, 그들은 한배를 탔으니까.

로제타가 황궁 무도회의 사건에서 아무런 상처를입지 않았다는 사실은 나름대로 큰 스캔들이 될 터였다.

'뭔가 이상해. 마음에 들지 않는데…. 콕 집어 말하기가 어렵고…….'

일이 틀어지고 있었다. 정확히 어느 순간인지는 모르나, 미카엘이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눈치챈 그 순간부터 느꼈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원작이 흐트러졌음을.

미카엘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패트릭이나 로건에게 잠시 한눈을 판 것이 실패 요인인지도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돌아왔잖아! 내가 다시 너를봐 주고 있다고!'

패트릭과도키스까지만 했을 뿐이지, 그 이상으로 가지는 않았다. 미카엘과의 결혼 전에 그랬다가 곤란한 일이 생길 것 같아서였다. 패트릭은 초딩 같은 데가 있어서, 그를차 버리고 미카엘과 결혼하면 자신과 관계했다는 사실을 미카엘에게 어떤 식으로든 들킬 것 같았다.

'아직 로건을 잃으면 안 되는데…. 로건은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사람이잖아.'

패트릭도아직 쓸모가 있기는 했다. 이미 그녀의 손아귀에서 많이 벗어나 소맷자락을 붙잡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는 했으나, 그랬다.

란스필드 후작가와 발레르 공작가의 힘이 아직은 필요했다.

'내가 뭘 잘못한 거지? 뭘 실수한 건지 모르겠어.'

그들을 내버려 두고 무작정 미카엘의 뒤를쫓은 것은 맞지만, 그와 자신이 이루어지는 것이 스토리의 대부분이 아닌가! 물론 후반부에는 미카엘을 차 버리고 다른 두 사람과 맺어지는 것으로 끝나기는 하지만….

아이리스는 턱을 괴고 좀 더 고민했다. 저를훔쳐보고 있는 추종자들에게 이따금씩 미소를날리는 것도잊지 않으며.

***

"…그리고 목욕도같이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매일 몸을 씻겨 주며 로제타의 성감대가 얼마나 민감해졌는지 확인하는 것도좋을 테니까요."

이어지는 미카엘의 말에 로제타는 입을 뻐끔거렸다. 미카엘의 손길이 얼마나 기분 좋은지는 알고 있지만, 목욕을 같이 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로제타의 몸을 확인하기는, 그게 가장 빠른 방법이니까요. 목욕은 매일 하는 것이기도하고…."

그 핑계로 안기는 횟수만 늘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으나, 로제타는 다른 변명 거리를찾지 못했다.

'그냥 노력해서 빨리 주문을 푸는 방법밖에는 없나?! 그치만 이제는 풀기 싫어졌는데….'

어젯밤에 미카엘이 한번 주문을 풀었다가 다시 걸었다는 사실을 로제타는 알지 못했다. 2.5배였던 배율을 2배로 낮춘 참이었다.

쾌락이 슬쩍 낮아졌을 것이므로, 미카엘은 연습을 핑계로 로제타가 실컷 느끼게 만들어, 주문이 변했다는 사실을 모르게 할 작정이었다.

"저도방법을 좀 더 연구해 볼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로제타."

"으으~ 네에…."

체념한 듯 한숨을 쉬는 로제타에게 미카엘은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그러면 내친김에 지금 몇 가지 해 볼까요? 확인해 보고 싶은 것도있고…."

확인?

"뭘 확인해요?"

어리둥절하게 쳐다보는 로제타의 모습에 미카엘의 얼굴에 야릇한 표정이 떠올랐다.

"로제타가 어느 쪽으로 느끼는지요. 그곳을 덜 자극해야 로제타가 견디기 수월할 테니, 전부 알아내야겠지요."

"아……."

당황하는 로제타의 모습에 미카엘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필요한 도구도마련해 놓았으니 당장 가도록 하지요."

미카엘의 재촉에 로제타는 그의 손을 잡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대낮부터 야한 짓을 하게 생겼다는 생각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

금속으로 된 링이 허리를고정했다. 엎드린 채로 엉덩이를뒤로 내민 자세였다. 링에는 금속으로 된 봉이 달려 있어서 로제타의 자세를유지시켜 주고 있었다. 마치 엉덩이를맞기 위해 허리를고정해 놓은 형틀 같은 형상이었다.

"미, 미카엘 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한 채로 금속 틀에 허리가 고정된 로제타와는 달리 미카엘은 단정한 차림에 페니스만 내놓은 차림새였다. 하긴, 저 무지막지한 페니스를드러내 놓고 있는 것 하나만으로도외설적인 차림새로 보였다.

미카엘은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로제타의 나신을 훑어보며 그녀의 엉덩이를매만졌다. 느릿하게 피부를쓸어 만지는 손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불쾌하다기보다는 자극적이어서 그랬다. 그 주문을 걸기 전에도미카엘의 손길은 기분 좋았으니, 걸고 난 이후는 말할 것도없다.

"반응이 뚜렷한 편이 알기 쉬울 테니, 여기에… 미약도바를겁니다. 로제타도솔직하게 답해 주세요. 아니면 계속 확인해야 할 테니까."

쪽 하고 로제타의 엉덩이에 입을 맞춘 미카엘이 미약이 든 병을 가져왔다. 유리로 된 마개를열자 벌꿀과도흡사한 향기가 흘러나왔다.

미카엘은 그것을 로제타의 여린 점막에 듬뿍 펴 발랐다. 로제타는 한숨을 흘리며 그런 미카엘을 돌아보고 있었다.

형틀을 준비한 것은 삽입하는 동안 로제타의 몸을 만질 수 없기 때문이었다. 미카엘이 로제타의 엉덩이를주무르기만 해도로제타는 느끼니까. 순수하게 삽입한 것만으로 로제타가 어느 정도느끼는 것인지를확인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그게 소용이 있나?'

얼핏 도움이 될 것 같기도하고, 도움이 안 될 것 같기도했다. 로제타가 머뭇거리는 사이 미카엘의 섬세한 손가락이 로제타의 꽃잎과 꽃술에도듬뿍 미약을 묻혔다.

"흡, 응…."

매끄러운 액체를펴 바르는 느낌이 묘했다. 액체는 차가웠지만 그걸 바르는 미카엘의 손가락은 뜨거워서 야릇한 기분이 고조되었다.

이 뒤는 무엇인지 알고 있는지라, 그걸 기다리며 서비스를받고 있는 기분이었다.

"힉…."

예고도없이 꽃잎을 만지작거리던 손가락 하나가 속살을 벌리며 파고들어 왔다. 미카엘의 페니스보다는 한참 작지만 자극적인 감촉에 엉덩이가 튀어 올랐다. 물론 금속 틀에 가로막혀 움찔거리는 것이 전부였지만 말이다.

"응…. 으음…."

"후후…. 매일 내 것을 맛보고 있으니, 만족하지 못할 법도한데…. 손가락 하나를물리는 것으로도이렇게 조이는군요."

미약에 젖어 미끌거리는 손가락이 뿌리까지 들어오며 손끝을 구부렸다. 느릿하게 속살을 긁어내리는 손길에 로제타는 파르르 떨었다.

"으으응…. 싫어…."

"더 빠른 게 아니면 싫습니까?"

속삭이는 목소리가 노래하듯 달콤했다. 미카엘은 다시 미약으로 적셔 로제타의 안에 손가락을 꽂고는 푹푹 찔러대기 시작했다. 찌를때마다 으응, 으응, 하고 신음하는 것이 사랑스러웠다.

안이 서서히 풀리며 그의 손가락을 오물오물 받아먹는 것이 귀여웠다. 손가락 개수를늘리자마자 약하게 찌푸려지는 표정까지도. 저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서 매일 공들여 이곳을 풀어 주는지도몰랐다.

"하으…. 읏, 음…."

기분이 괜찮은지 약하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미카엘은 세 개째까지 손가락을 늘리다가 그것을 쑥 뽑아냈다.

"흐읏…."

손가락을 놓친 틈새가 씰룩씰룩 수축하는 것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그곳에 얼굴을 묻고 로제타가 울 때까지 빨아 주고 싶었지만, 지금 그곳을 맛봐야 할 것은 그의 입술이나 혀가 아닌 이것이었다.

"하아…."

미카엘은 빳빳하게 선 제 페니스에 미약병을 기울였다. 아예 선단에서부터 쏟아부어 흠뻑 적시는 것에, 뒤를돌아본 로제타가 당황하는 것 같았다.

"괜찮습니다. 이 미약은 남자에게는 통하지 않는 것이니까요."

속삭이며 미카엘은 선단을 오물거리는 입구에 가져갔다. 미끈하게 선단을 물리자 얼른 내놓으라는 듯이 수축하는 것이 느껴졌다.

'귀엽기는-.'

"흐으…."

쑤욱 허리를밀어붙이자 안이 벌어졌다. 미끈한 액체로 적시고 그의 것까지도듬뿍 적셨기에 야릇한 감촉이 입구에 가득 넘쳤다.

"으으으응!"

느릿하게 밀어붙이는 것에 안이 조여 왔다. 아직 반도삽입하지 않았기에 미카엘은 힘을 풀라는 듯이 로제타의 꽃술을 쓰다듬었다.

"히익! 흣…."

퍼져 나가는 관능적인 자극에 안이 꽉 조였다가 풀어지는 순간을 노려 쑤욱 밀어 넣었다. 굵직한 줄기로 한계까지 벌어지는 느낌에 입안에 타액이 고였다.

"아흐흐…."

행위 자체는 평소와 그리 다르지 않을 텐데도, 미끈미끈한 감촉이 더해져 이상했다. 아니면 벌써 미약의 효과가 오고 있는 것인지도몰랐다.

"좀 더…."

이미 한참 들어온 것 같은데, 페니스가 자꾸만 꾸역꾸역 안으로 들어왔다. 미카엘의 허리가 로제타의 엉덩이에 눌러질 만큼 밀어붙이고 나서야 만족한 것에 로제타는 바르르 떨었다.

'안이….'

전부 벌어지고 눌린 것 같았다. 몸속 깊은 곳까지 음란한 쾌락으로 가득 차 버린 느낌에, 로제타는 숨도크게 쉬지 못하고 가늘게 움찔거렸다.

미카엘은 잔경련을 일으키는 로제타의 등줄기를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척추가 만져지는 오목한 곳에 입술을 누르며 그녀를끌어안자 경련이 서서히 가라앉는 듯했다.

"하으응…."

손이 아래로 내려와 뾰족해진 유두를가볍게 튕긴 것에 로제타가 움찔 반응했다. 미카엘은 로제타의 뺨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지금은 어디가 가장 느껴지고 있습니까?"

"아……."

말하면 그곳을 집요하게 헤집어댈 것 같았다. 말하지 않아도저 큰 것으로 깊숙한 곳을 구석구석 비벼대겠지.

로제타는 이미 달아오른 얼굴이 한층 더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거기…. 거기 안쪽, 힉! 아, 아아……. 거기!"

말을 꺼내자마자 그 커다랗고 탐욕스러운 것이 로제타의 가장 기분 좋은 곳을 향해 단단한 선단을 내밀었다. 정확히 그곳을 뭉근하게 비비고, 괴롭히고 싶은 것처럼 아래위로 파헤치는 느낌에 입이 벌어졌다.

"으응, 응! 앙…. 아아……. 거기만! 안 돼에!! 아흐흑! 아앗!"

"허억, 음…. 로제타……."

쉴 새 없이 방아질하며 미카엘이 허리를꼬았다. 정확히는 로제타의 깊은 곳을 벌리듯 좌우로 허리를흔들었다. 그 거대한 것이 안을 파헤치는 느낌에 로제타는 입술을 벌벌 떨며 허리를튕겼다. 너무 깊다 못해 진득하게 맛보는 감각에 미칠 것 같았다.

"흐으…. 아흥! 앙, 아아앙…. 너무 깊…! 아아아, 아학!!"

시달리던 몸이 너무나도쉽게 첫 절정을 맛봤으나 미카엘은 쉬게 내버려 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 바르르 떨리는 로제타의 엉덩이를쓰다듬어 주고는 수축하는 질내로 퍽퍽 허리를쳐댔다.

"으응! 으응, 앙! 아앗…. 시러……. 방금…. 하으응, 으흡…."

"민감해졌을 때, 더 찾기 쉬울 테니까요."

로제타가 느끼는 곳 전부….

속삭이는 목소리에 로제타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허리가 금속 틀에 걸려 꼼짝도못 하는 이 상태로 듬뿍 괴롭힘을 당할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아아……. 미카엘 님…."

"일단, '이곳'을 어떻게 귀여워해 주는 게 가장 기분 좋은지부터 확인하도록 하지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허릿짓하는 미카엘에 로제타의 눈이 커졌다. 이어지는 심술궂은 피스톤질에 로제타는 음탕한 천국을 맛봐야 했다.

"히익…. 으읏, 아아……. 제, 발…. 으응……."

파르르 떨리는 허벅지를따라 정액과 애액이 뒤섞인 액체가 주르륵 흘렀다. 로제타는 바들바들 떨며 제 앞에놓인 푹신한 쿠션에몸을 묻었다.

허리가 금속 틀에고정된 것은 여전했으나, 그 상체가 기대기 쉽도록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쿠션을 가득 쌓아 놓아 준 덕이었다. 덕분에로제타는 쿠션에상체를누인 채로 쉴 새 없이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

철퍽! 푹….

다시 파고드는 페니스에로제타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녀는 끌어안고 있던 쿠션에손톱을 세우며 애원했다.

"아…. 또, 또 가……. 으응, 으으응! 아앗…."

로제타의 신음에잔뜩 성이 난 페니스가 그녀의 안에서 더욱 부피를키웠다. 음탕한 열기에로제타는 그곳을 반사적으로 조이며 달콤한 소리를높였다. 미약이 제대로 효과를발휘한 탓에미카엘이 삽입할 때마다갈 것 같은 쾌락을 느꼈다.

"아아아, 아!"

기분은 좋지만 느끼는 데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절정에로제타는 관능적인 고문을 받고 있는 기분이었다. 혀가 아릴 정도의 단맛이 쉴 새 없이 입안을 괴롭히듯 크고 묵직한 페니스가 쉼 없이 로제타를느끼게 했다.

"히익, 읏! 아앗! 아아아…. 그만……! 으흥, 아하아아앙!!"

발끝까지 바르르 떨며 도달하고 또 도달하며 로제타는 미카엘의 것을 조였다. 그녀의 등 뒤에서 동물적인 신음을 흘리는 미카엘이 미친 듯이 박아대는 것에거기가 온통 녹을 것만 같았다.

"아! 아아아앙…. 으응, 으으으응! 아앗…."

하는 동안 로제타의 몸을 만질 수 없으니, 이런 금속 틀로 고정시켜 준 거라고 하더니, 하면서 로제타의 온몸을 만지고 있는 미카엘이었다. 집요한 손길에유두를꼬집히고 유방이 크게 주물리는 것을 느끼며 로제타는 타액을 흘렸다.

부끄러울 만큼 기분 좋았고, 기절할 것 같았다. 처음에무엇 때문에이런 금속 틀에묶여 미카엘의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는지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그의 욕정을 받아들이기 위해 이런 체위를허락한 것만 같았다.

푹! 푹! 푹!

격렬하게 페니스가 안을 헤집고 질척이는 소리가 오갔다. 한번 밀어 넣을 때마다안에가득 쏟아 낸 액체가 밀려나오며 로제타의 허벅지와 엉덩이를적셨다.

"흐으응, 앗!"

넣을 때마다안이 벌어지는 느낌을 받는데, 어디를가장 느끼는지 알 수 없었다. 미카엘의 페니스가 닿는 곳마다그저 달콤하기만 했으니, 로제타는 엉덩이를움찔거리며 그저 느낄 뿐이었다.

'아…. 또 가…….'

"아앗, 아……. 아아앗!"

신음하고 체액을 흘리고 엉덩이며 비부를바들바들 떨다가 절정을 맛보기를쉼 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로제타는 타액을 흘리며 헉헉거렸다. 쾌락으로 부푼 속살이 굵직한 줄기에문질러지는 느낌에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져 갔다.

"아항……. 더는…. 아아아!"

로제타는 미카엘의 품속에서 몸을 움찔거리며 정신을 잃었다. 기절할 때까지 음탕한 즐거움을 맛보는 것은, 그녀가 상상했던 것보다도 체력을 요하는 일이었다.

그만큼 관능적이기도 했고 말이다.

***

기절했다가 눈을 뜬 로제타는 어쩐지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미카엘과의 그런 섹스에기절할 만큼 느꼈다는 사실이 창피하게 느껴졌다. 정신을 잃은 사이 미카엘이 그녀의 몸을 금속 틀에서 풀고 구석구석 씻겼다는 사실도.

눈을 떴을 때는 나른하고 달콤한 감각뿐이었다. 너무 몸부림쳤으므로 허리에틀 자국이 남지 않았을까싶었으나, 그런 것은 없었다. 미카엘이 치유 마법으로 흔적을 지운 것도 같았다.

"내 사랑…. 몸은 괜찮습니까?"

"부끄러운 것 말고는 괜찮아요."

이불에얼굴을 묻은 채로 로제타가 대답하자 미카엘은 낮은 웃음을 흘렸다.

"아까는 마음껏 즐겨야 했던 시간이니까…. 부끄러워할 필요 없는데."

부끄러워하는 모습도 귀엽지만 말이다.

미카엘은 이불 속에숨어 있는 로제타를꽉 끌어안으려기꺼이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슬금슬금 옆으로 도망치려는 몸을 낚아채어 품에안자 로제타의 달큰한 한숨이 미카엘의 피부를간질였다.

피부도, 숨결도 전부 다귀여웠다. 이렇게 안겨 있음에도 빠져나갈 틈을 노리고 꼼지락거리고 있는 것까지도.

"…그렇게 움직이면 흥분될 것 같은데."

속삭임에움직임이 딱 멈추는 것도 그러했다.

아직 햇살이 강렬한 낮인지라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음에도 밝았다. 미카엘은 로제타를바로 눕히고 그 보드라운 입술에깊고 진하게 키스했다. 그 체위는 다좋은데 키스하기가 힘든 것이 결정적인 흠이었다.

로제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지만, 미카엘은 얇은 비단 가운을 하나 걸치고 있었다. 부드러운 천의 감촉은 나쁘지 않지만 역시 맨살을 맞대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키스하며 황급히 가운을 풀어헤치자 로제타가 그 손을 잡았다.

마주치는 시선에로제타가 무엇을 오해했는지 알았다. 실제로 피부를맞닿게 하는 것이 그 일로 이어지는 것도 흔했다.

미카엘은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었지만, 저를바라보는 로제타의 시선에그럴 마음이 동하고 말았다.

"…안 되겠습니까?"

간청하듯 바라보는 시선에로제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미카엘에대한 마음이 깊어질수록 로제타는 그와의 잠자리를거절하지 못했다.

미카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과 그와의 녹아내릴 듯한 쾌락에마음이 약해지는 것 같았다. 미카엘은 그 사실이 기꺼웠다.

"정말 안 될까요, 로제타?"

속살거리며 미카엘이 로제타의 뺨에입 맞췄다. 치유 마법을 받아서 회복을 했다고는 해도 깊은 나른함은 남아 있을 것이다.

쪽, 쪽…, 하는 자잘한 키스가 입술로 내려오며 부드러운 입술에입 맞추자 가운의 허리끈을 누르고 있던 손이 느슨해졌다. 미카엘은 그 틈에허리끈을 풀고 가운을 벌렸다.

로제타의 다리 사이로 미카엘의 무릎이 들어오고, 두 개의 나신이 틈 없이 서로를부둥켜안았다. 미카엘의 음탕하고 섬세한 손가락이 로제타의 갈라진 틈새로 파고들어 그녀를기쁘게 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어지는 달콤한 열락에그들은 아침나절을 푹 젖어서 보냈다.

***

황제가 추적자를붙이리라는 것은 예상했던 일이었다. 이자벨에게는 많은 선택지가 남아 있지는 않았다. 그녀는 이제 제국에서 발붙이고 살 수 없다. 호송대의 많은 기사들을 죽인 것을 구실로 황제는 그녀를없애려고 들 것이다.

'어차피 죽이려했으니 참으로 잘되었다생각할 테지.'

처음부터 이자벨을 내켜 하지 않던 황제였다. 그 앞에서는 무엇도 허투루 행동했던 적이 없는데, 알렉시스는 이자벨을 탐탁지 않은 눈으로 보았다.

단지 카룰리아스 공작가의 세가 높다는 이유에서만은 아니었다. 거짓에민감하고 사람의 행동거지에날카롭게 반응하는 그이기에, 이자벨의 '거짓'을 눈치챘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이자벨은 황제 알렉시스의 앞에서는 배는 더 조심해야만 했다.

젊은 황제는 제 부모가 암살된 이후로 누구도 믿지 못한 채로 청년 시절을 보냈었다. 이후 황비를들여 그런 부분이 누그러지기는 했으나, 그의 날카로운 감은 여전했던 듯싶었다.

감옥 안에서 이자벨이 탈출을 기대하며 계획했던 것은 헬렌 라로쉬를협박하여 로제타를해쳤다는 죄목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것 외에는 감옥에서 정당하게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으므로.

시릴이 그녀를구하며 마물을 사용할 것임은 예측 가능한 범위였다. 그녀가 아는 한 마물을 부릴 수 있는 마법사는 시릴이 유일한 만큼, 이 사건을 마물의 '우연한' 습격으로 돌릴 수 있었다.

마물을 이용한 사건은 그래서 좋았다. 물론 미카엘로부터 심상치 않은 의심은 받을 테지만, 로제타를괴롭힌 과거가 드러난 시점에서 미카엘은 이자벨을 적대할 터였다.

'황제는 바보가 아니니….'

헬렌 라로쉬를철저하게 지키고 있을 것이다.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죽이는 것도 불사하리라고 생각했다. 인제 와 카룰리아스 공작가를복권시켜 줄 수는 없으니까. 설사 헬렌 라로쉬를협박하는 데 성공해, 죄목에서 벗어나더라도 복권은 불가능했다.

황실이 한번 선언한 것이 있으니, 카룰리아스 공작의 비리를빌미로 이자벨의 징역형을 면해 주는 것이 한계였을 거라 판단했다.

그녀는 공작가의 공녀로 돌아가지 못한 채 한 단계 작위가 내려간 후작가의 영애로서 만족해야 했을 것이다.

'후작가의 영애라니!'

이자벨은 그럴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그녀는 사교계에서 자신보다높은 위치의 여인이 있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응당 이 라스탄 제국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이는 아네트 황비였지만, 그녀는 사교계에는 관심이 없던 이였다.

그래서 이자벨은 마음껏 활개를펼치며 사교계의 여왕 노릇을 할 수 있었다.

황족을 살해하려했다는 죄에서 벗어난다한들, 사교계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이제까지 저지른 것들이 있으니 사교계에서는 그녀를배척하려할 테고, 로제타 휘르센에게 했던 것처럼 자신을 짓밟으려들 것이다.

감히. 누군가에게 비난받고 손가락질당한다는 것은 이자벨에게 있어서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미카엘…!'

처음 본 순간부터 이자벨은 미카엘을 손에넣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의 신분이 아니라 해도 그러했다. 황족이라는 배경과 그를둘러싼 정치적인 움직임을 알게 된 이후에는…, 더더욱 손에넣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알렉시스와 아네트는 자식을 낳을 생각이 없었다.

이것은 황실에심어 놓은 첩자를통해 은밀히 손에넣은 정보였다. 무슨 이유로 그러는가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으나 그러했다.

알렉시스는 때가 되면 미카엘에게 황위를넘겨주든가, 미카엘이 낳은 자식을 황태자로 책봉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미카엘의 결혼에그토록 신경을 쓴 거였다.

리디아가 그런 식으로 살해된 뒤, 미카엘이 이상해지자 그 생각은 버린 듯했지만. 이자벨이 미카엘을 알았을 당시에는 그러했다.

꿈처럼 아름다운 용모와 장차 황제가 될지도 모르는 위치, 그 총명함과 뛰어난 능력을 알게 되자 이자벨은 그를갖고 싶어 미칠 지경이 되었다.

미카엘이 황제 자리에는 전혀 뜻이 없다는 것을 아는 지금도 그러했다. 그가 관심이 없다한들, 그의 자식이 황제가 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제 이자벨 그녀가 아닌 로제타 휘르센의 아들이나 딸이 이 라스탄 제국의 황제가 될 것이었다. 이자벨은 그것이 못 견디게 싫었다.

'내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카룰리아스 공작가가 숨겨 놓은 것들을 가지고 다른 나라로 망명하는 것. 신분을 숨기고 적당히 공을 세워 신흥 귀족이 되는 것은 그녀에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문제는 이자벨이 이대로 떠나기 싫다는 거였다.

미카엘을 포기하는 것도, 로제타를미카엘 곁에내버려두는 것도 싫다. 또한 자신에게 저주를건 자가 누구인지 밝혀내지 않고 가는 것도 위험했다.

'최소한 로제타 휘르센만이라도…. 그년만이라도 다시는 재기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고 가야겠다!'

그녀를미끼로 미카엘을 유인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황제나 아네트는 위험한 존재였으나 로제타라면 하찮기 그지없었으므로.

기어이 황제가 아끼는 동생을 노예로 만들어 제 발아래에꿇리는 상상을 하며 이자벨은 오만한 미소를지었다.

그녀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그러니 미카엘 하나쯤은 가지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무도회, 말인가."

대꾸하는 미카엘의 어조에는 그다지 하고싶지 않다는 심정이 고스란히 묻어 나오고있었다. 그런 미카엘의 눈치를 보며 가신은 연신 머리를 기울였다.

"공작부인께 결례를 저지른 무뢰한들의 재판이 곧 열릴 예정이니…. 심란하시다는 것은 알고있습니다. 하오나 공작부인께서 오신 지 한 달이 넘었고, 많은 이들이 그분을 궁금해하고있는 터라…."

사실 아덴 공작령에공작부인이 생겼으니, 파티를 열어야 하는 것은 맞았다. 더더군다나 수도에서 내려온 수많은 군소 귀족들이 가신들의 저택을 점령하고있는 상황이었다.

수도에서 귀족이 내려오면 의례적으로 그 지방의 유지가 파티 등 모임을 열어 그들을 소개하는 자리를 갖기 마련이었다.

물론 지금 루긴에와 있는 수도의 귀족들에게 파티는커녕 걸레 빤 물도아까웠지만, 그렇다 한들 귀족의 의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은 로제타가 큰일을 당했다는 핑계로 미뤄 두고있었을 뿐이다.

미카엘은 내키지 않았지만, 로제타의 위신과도관련 있는 일이니 함부로 쳐내지 못했다.

"…생각해 보도록 하지."

여전히 마땅치 않다는 어조로 대답하고다음 안건으로 넘어가는 미카엘에가신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미카엘의 성격에그 자리에서 거절하지 않은 것만도천만다행이었다.

***

그동안 로제타에게 날아온 초대장은 꽤 많았다. 가신의 집안은 물론 제법 부유한 평민까지도공작부인의 행차를 바라고초대장을 보냈다. 물론 그들도로제타가 초대에응해 줄 거라 생각하고보낸 것은 아니었다. 혹시…, 하는 마음에보낼 뿐이다.

신분이 낮은 이들이 보낸 초대장은 전속 시녀의 손에커트당하고, 로제타의 선에까지 가는 것은 백작이나 후작 가문에서 보낸 것들뿐이었다.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자들의 서신이야,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로제타에게 전달되겠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의 것은 한 달 정도보관된 후에처리되었다. 로제타가 일일이 뜯어보기에는 그 양이 너무 많아서였다.

그런 기준에서 전속 시녀였던 마리의 서신은 로제타 앞까지 도달했다. 시녀가 가져다준 봉투칼로 서신을 뜯어본 로제타는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결혼했구나."

그동안의 친분을 생각하면 참석해야 했지만, 신분이 너무 높아져 버려 도리어 참석하기 어려워졌다. 물론 그녀가 보낸 선물은 백작부인의 시녀들이 알아서 마리에게로 보냈을 것이다.

서신에는 긴 편지와 그들의 청첩장이 들어 있었다. 일반 우편은 귀족들의 우편보다도훨씬 긴 시간이 걸려 마리의 결혼식 날짜는 이미 지나 있었다.

마리는 결혼식을 일주일 앞두고휘르센 백작가를 그만두어야 했던 일, 백작부인이 웨딩드레스와 구두를 선물해 준 일, 백작님이 친히 집사를 보내어 신랑인 토마스를 은근슬쩍 겁주었던 일 등을 장황하게 설명하고있었다.

제대로 된 부모가 없는 마리에게는 상당히 기쁜 일이었던 모양이다.

'원작에는 마리에대한 얘기는 없었으니까….'

로제타가 미카엘과 맺어지는 바람에무언가를 노리고마리에게 접근하는 이가 있다고해도이상하지 않다. 휘르센 백작이 조사해 본 바에따르면 토마스는 그저 평범한 청년인 것 같았지만, 그렇기에백작 부부는 더 마음에들어 하지 않았다.

마리는 절반뿐이기는 해도귀족의 피가 섞였고, 토마스는 평민이었으니까.

그러나 마리는 토마스와 결혼하기를 원했다. 자신이 겪었던 귀족으로서의 생활보다 평민으로서의 생활이 더 좋다고판단한 것 같았다.

[결혼 선물은 잘 받았어요. 너무 감사해요. 마음에쏙 든답니다. 저는 아가씨가 결혼하셨을 때에수놓은 손수건 같은 것밖에는 해 드리지 못했는데…. 너무너무 좋아요.]

로제타가 마리에게 선물한 것은 화장대였다. 실은 보석을 해 주고싶었지만, 도둑이 들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두었다.

수도의 치안이 좋다고해도거리 사정이 그렇다는 것이지, 평민의 집까지 그렇다고할 수 없었다. 귀족들조차 사병을 두어 도둑에대비하는데, 평민은 오죽하겠는가.

휘르센 백작가에서도그 점을 염두에두어 큰돈은 주지 않았다. 대신에결혼식이며 신혼집 살림에여러 가지 도움을 준 것으로 알고있었다.

'잘 살아야 할 텐데.'

토마스와의 결혼생활이 좋지 못하면 다시 돌아와도된다. 휘르센 백작가도그녀를 반겨 주겠지만 로제타 또한 마리를 받아 줄 마음이 있었다.

똑똑.

응접실 문은 열려 있었다. 노크 소리에고개를 돌리니 문가에서 미카엘이 웃고있었다.

"좋은 소식입니까?"

"네. 마리가 보낸 편지와 청첩장이에요."

로제타는 미카엘에게 마리의 편지를 보여 주었다. 미카엘은 마리가 마지막까지 로제타의 편을 들었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그녀를 좋게 보고있었다.

"청첩장이라, 결혼한 모양이군요."

미카엘도사람을 시켜 마리에게 선물을 보냈다. 아덴 공작가에서 그 가게를 비호하고있음을 나타내는 패였다. 본래 아덴 공작가의 소속인 상단이나 가게에지급하는 것이었지만, 로제타가 마리를 아끼는 것을 보고그것을 내어주었다.

이제 마리와 토마스의 가게는 치안에대한 큰 걱정은 하지 않은 채로 장사할 수 있을 것이다.

방으로 들어온 미카엘은 로제타 곁에앉았다. 시녀들이 차를 가져오려 했으나 미카엘은 그것을 거절하고로제타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 있으세요?"

"부인께 루긴의 귀족들을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할까 합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연회를 열고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아덴 공작령이 너무 거대하고거기에소속된 가신들이 많았다. 최소한도가 파티였으니, 기왕 여는 거 아덴 공작가의 이름에걸맞은 큰 파티를 열고싶었다.

로제타가 아덴 공작령에서 참석하는 첫 번째 파티인 것이다. 미카엘은 로제타의 이름에조금의 누도끼치고싶지 않았다.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어떻게 해서든지 그 자리에끼려고하는 수도의 귀족들이 있을 겁니다. 로제타가 원한다면 모두 배제할 수도있고, 이 파티도반드시 열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걱정스러운 듯 덧붙인 말에로제타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미카엘과 결혼했고, 그와의 관계가 좋아진 만큼 아덴 공작부인으로서 살아갈 작정이었다.

자신의 저택에서 열리는 파티였다. 거기서 그녀가 주눅이 들거나 겁을 먹을 이유는 없었다.

"괜찮아요. 이 기회에그들 모두 참석하라고해요."

로제타는 그들이 자신을 얕잡아 보고있음을 알고있었다. 아니었다면 그 먼 거리를 달려 여기까지 찾아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일방적으로 해를 끼쳤음에도, 그들이 로제타와 어떤 '관계'를 맺은 것처럼 행동하고있다는 것은 불쾌한 일이었다. 그들에게 제 주제를 알게 해 줘야만 했다.

"파티장에서 제가 소란을 피우거나, 공작가에누가 될 행동을 하게 될지도몰라요. 그래도…. 화내지 않으실 거지요?"

조심스레 말하며 미카엘의 눈치를 보자 그가 로제타의 이마에입 맞췄다.

"그 안에서 로제타가 결례를 저지른 자의 목을 벤다 해도제가 전부 수습할 겁니다. 로제타는 마음껏 하고싶은 대로 하십시오."

미카엘의 그 말에로제타는 활짝 웃으며 그의 팔에안겼다. 시녀들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있었지만, 이 대화가 밖으로 새어 나간다 한들 문제가 될 것은 없을 것이다.

***

"공작가에서 파티를 연단 말이냐?"

"드디어!"

아덴 공작가에서 열리는 파티는 많은 이들이 바라 마지않는 것이었다. 가장큰 환호성을 지른 것은 루긴의 디자이너들이었으나, 젊은 처자들이 있는 가문의 비명도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미카엘이 결혼했다는 소식에는 풀이 죽었으나, 그 상대가 로제타라는 것에만면에웃음을 띠고있었다.

그들은 그동안 미카엘이 그들에게 무관심하게 대했던 것을 애써 외면하고있었다.

일찌감치 미카엘에대한 마음을 접고각자 연애와 결혼에매진한 영애가 상당수였으나, 어디 가나 눈치가 없는 자들은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그녀들은 미카엘이 그들을 외면한 것은 그동안 연애나 여자에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라고생각했다. 이번 결혼으로 이성과의 관계에눈을 떴을 테니, 로제타 휘르센보다 아름다운 자신을 발견하게 되면 그 마음이 돌아설 것이라고여겼다.

'지금은 구원자 콤플렉스 같은 것으로 로제타 휘르센이 아름답게 보이실지도모르지만…. 결국 내게 마음을 돌리시겠지!'

그렇게 되면 미카엘은 적당한 돈을 주어 로제타 휘르센을 떨궈 놓고자신에게 청혼할 것이라고생각했다.

아덴 공작부인!

입속으로 중얼거리는 것만으로도오싹할 정도의 즐거움이 퍼져 나갔다. 그들은 수도의 디자이너가 여기에없는 것을 아쉬워하며, 루긴의 유명한 의상실에앞다투어 찾아갔다.

남은 것은 여자들의 전쟁뿐이었다.

***

그런 오만에빠져 있는 영애들과는 별개로 공작령의 젊은 귀부인들도아덴 공작가에서 열리는 파티를 고대하고있었다. 수도에는 황제가 있다지만, 이 아덴 공작령에서 황제와 버금가는 지위를 누리는 것은 아덴 공작가였다.

이제까지는 공작가에공작부인이 생기지 않아서 서로 눈치 경쟁을 하고있었다면, 지금부터는 실전이었다. 누가 공작부인의 가장총애하는 친구가 되느냐에따라, 아덴 공작령 내에서의 지위가 결정된다!

심지어 은밀히 도는 소문에따르면, 아덴 공작부인은 다음 대 황제의 어머니가 될 가능성도큰 이였다. 이르면 아덴 공작 자체가 황제가 되어, 황비가 될 수도있다.

가까이해 두어 득만 되지 실은 되지 않는 존재인 것이다.

'거기다 공작께서 공작부인을 그리도사랑하신다지?'

공작부인께서 한마디만 해 주시면 아덴 공작령 내에서 남편, 혹은 제 형제들의 지위가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깊은 친분을 쌓아 훗날 공작부인께서 자식을 보았을 때 소꿉친구로 만드는 것도미래 계획에포함되어 있었다.

'가까워지고말 테다!'

지금처럼 아덴 공작부인께서 마음이 약해지셨을 때가 기회였다. 수도의 잔악한 무리들에게 깊은 상처를 받고아덴 공작령으로 내려오신 분이었다.

그 무리 중 일부가 내려왔다는 사실만으로도기함할 일인데, 그들은 건방지게도공작부인에게 접근할 기회만 노리고있었다. 이때에공작부인에게 아예 접근도못 하게 차단해 버린다면…. 그 모습만으로도공작부인이 자신을 총애해 주지 않으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눈치도없이!'

분위기 파악도못 하고울며 겨자 먹기로 그런 자들에게 저택의 방 몇 개를 내어준 가문이 있다는 것은 알고있었다. 수도의 연줄 때문에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도방을 빌려주기는 해도철저히 그들과는 외면하고있었다. 집과 하인들만 일부 빌려주었을 뿐, 식사도차도같이 하지 않았다.

눈치가 빠르지 않아도그쯤 되면 불청객이라 여겨지고있음을 알 터인데, 과연 그들의 낯은 두꺼웠다. 공작부인에게 초대장만 보냈을 뿐, 그림자에도스치지 못했으면서 아직까지 버티고있는 것도그러했다.

자신들이었다면 사죄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고, 문 앞에서 죄송하다고사과를 하는 정도에그쳤을 것이다.

지금처럼 영지까지 쫓아와 용서를 '요구'하는 것은, 또 다른 죄를 짓는 행동이었다.

'어쩜 그렇게 뻔뻔할 수 있을까?'

자신들 또한 수도를 왕래하고는있지만, 저들의 행태는이해가 되지 않는행동이었다.

귀족의 자부심은 그저 다른 이들에게 오만을떨기 위해서만 존재하는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잘못을인정하고 그에 걸맞은 배상과 사과를 하는것도 귀족의 자부심을지키는일 중의 하나였다.

'몰염치한 것들!'

마침 그들에 대한 혐오감이 필요와 일치했으니 잘되었다 싶었다. 소문을듣자 하니 신세를 지고 있는가문에 빌붙어서 공작가의 파티에도 참석할 모양인데, 아주 쓴맛을보여 주어야겠다는생각이 들었다.

'수도 귀족들만 텃세를 부릴 수 있는게 아니지! 어디 맛 좀 봐라!'

***

앞다투어의상실로 달려간 영애나 귀부인들과는달리, 로제타는디자이너를 아덴 공작가로 부를 수 있었다.

황비인 아네트는무엇을입어도 아름다운 천연의 보석 같은 이였지만, 철저한 실용주의자였다. 드레스와 보석은 다 비슷비슷하다고 생각했기에 늘 드레스를 적당히 골라 수도 디자이너들을좌절시켰다.

그래서 루긴의 디자이너들은 로제타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황비님하고는다르지 않을까하고.

과연 이번 공작부인에게는제대로 된 취향이 있었다.

자신들이 보여 준 스케치를 보고 드레스를 고르는로제타를 보고 그녀들은 눈을빛냈다. 아덴 공작부인께서는실험적인 디자인도 꺼리지 않는젊은 감각을지니신 분이었다.

그들은 그 스타일이 새로운 유행을선도할 것임을믿어의심치 않았다.

반면 로제타는영드나 미드, 혹은 영화에서 본 적이 있는스타일로 적당히 고른 것뿐이었다. 겉은 이쪽 세계의 귀부인일지 몰라도 속 알맹이는현대인이었기에, 드레스를 고르는것은 매번 어려웠다.

평범한 백작 영애 시절에는예산의 제한이 있어비교적 선택의 폭이 좁았다면, 이번에는무제한에 가까웠다. 모든 드레스 중에서 마음대로 골라 입을수 있게 되자 도리어선택이 어려워졌다.

'이 정도면 되겠…지? 왜인지 좋아하네?'

골라 놓은 스케치화를 보고 뛸 듯이 기뻐하는디자이너들을보고 로제타는갸웃했다. 디자이너들은 눈물을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골라 주신 디자인으로 완성해 올리겠습니다!"

기대하시라는둥,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다는둥의 말을꺼내며 떠나가는디자이너들을보며 로제타는어리둥절해했다. 자신이 고른 디자인이 특별한가 하면, 딱히 그렇지도 않았던 것이다.

'드레스를 맡겨 줘서 고맙다는건가?'

로제타로서는영문 모를 일이었다.

***

파티 준비는차근차근 진행되어가고 있었다. 미카엘은 주로 연회를 열었고 파티는거의 열지 않는편이었다. 열어봤자 영애들이 귀찮게 굴어서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작가의 가신들도 이번에 열리는무도회를 기대하는눈치였다.

공작부인이 오신 뒤에 열리는첫 무도회니 그 규모가 어마어마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미카엘 황자는모르는척하고 있지만, 아덴 공작령의 사람들은 내심 미카엘이 알렉시스의 뒤를 잇는다음 황제가 되지 않을까하는생각을했다.

황제가 워낙 강건하시니 미카엘 황자까지는무리라 한대도, 아덴 공작가에서 태어난 이가 라스탄 황실을잇는게 아니냐는시각도 있었다.

알렉시스도 그런 소문이 도는것을알면서도 그저 내버려 두고 있었다.

다들 황제의 성정을알기에 추측이 사실이 되지 않을까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카엘 황자를 노리고 그토록 많은 영애들이 날뛰었던 것이고.

"장식을더 할까요, 마님?"

"아니, 그 정도면 될 것 같아."

실내 장식가들의 솜씨를 확인하며 로제타는고개를 끄덕였다. 파티를 여는것은 처음이었으나 백작 영애 시절, 지켜보던 것이 있어서 너무 어렵지는않았다. 그저 솜씨 좋은 사람들을부르고, 초대할 사람과 실내 장식, 음식과 음악을고르는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마저도 미카엘이 상의할 수 있는유능한 비서를 여럿 붙여 주어쉽게 끝났다. 특히나 아덴 공작가의 가신들을초대하는부분에 있어서는비서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로제타는파티를 여는김에 자신의 취향대로 몇 가지를 장식했다. 약간은 현대에 와 있는듯한 기분을내고 싶어서였다.

초대객 중에는아이리스도 있으니, 그녀가 로제타도 빙의자라는것을눈치챌 것 같다는생각은 했으나….

'걔 1990년대 사람이라 알아볼지 모르겠네….'

로제타가 이 원작 소설을읽은 것은 대학 때였다. 당연히 빙의녀의 시대도 예전이었다. 그때에는이런 장식이 당연하지 않았으니, 아이리스가 보면 그저 놀라기만 할 것 같다는생각도 들었다.

'진풀잎은 끈질기고 단순한 애였으니까.'

명랑 쾌활하다는성격을걷어내면 그랬다.

로제타가 지시한 장식은 공작가 사람들에게 호평을받았다. 메탈 레드의 색깔이 이쪽 세계에서도 그렇게 잘 구현될 줄은 몰랐다.

파티가 열리는홀의 입구, 붉은 폭포가 쏟아져 내려오는화려한 장식에 절로 눈이 돌아갔다. 따스한 황금빛으로 가득 찬 입구를 지나면 흰빛과 메탈 블루의 빛깔로 장식한 무도회장에 들어서게 되는것이다.

이제 막 여름의 초입에 다가서고 있으니 파티장을시원하게 꾸미는것이 좋을것 같아서 선택한 것이었다. 무도회 초대장에도 흰색과 푸른색을기조로 한 드레스를 입을것을권고하고 있었다.

로제타가 선택한 드레스도 푸른 비단 드레스였다. 장식을최소한도로 했음에도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것이었다.

'센스가 있다면 젊은 영애들은 흰색에 파란색이 포인트로 들어간 드레스를, 기혼자라면 파란색에 흰색이 들어간 드레스를 입을텐데….'

딱히 그녀들을시험해 볼 목적은 아니었지만, 녹록하지 않게 보이는것도 중요하다 싶어서 그렇게 했다.

도드라지는것이나 튀는것을좋아한다면 다른 노란색이나 붉은색 계통의 드레스를 입을것이다. 흰색과 파란색 드레스가 많은 가운데, 그런 의상을입으면 단연코 눈에 띌 터이니.

그러나 공작부인이 여는첫 번째 파티에서 도드라지는의상을선택해서 좋을것은 없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되바라졌다는인상을공작부인에게 심어줄 수 있을테니까. 경험이 없는영애라면 그 집의 안주인이나 시녀들이 말릴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색깔을입는다면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는게 된다.

신중하다면 다른 색깔을입되, 파란색이나 흰색이 섞인 드레스를 입을것이고, 다소 철이 없는이라면 따뜻한 원색 계통을선택할 것이다.

반대로 미카엘을노리고 있는이라면….

'노랑 아니면 빨강인가?'

로제타는일단은 그런 식으로 그녀들의 성격을파악하기로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

가신들의 안주인은 예상했던 대로 푸른색 계통의 드레스를 주문했다. 아덴 공작가에 순응하겠다는이미지를 심어주는것이 중요하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다만 데뷔탕트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영애들의 선택은 좀 달랐다.

너무 튀는색깔을선택하자니 젊은 공작부인에게 찍힐 것 같고, 그렇다고 보라색 드레스는너무 칙칙하다 느껴졌다. 그녀들이 선택한 드레스는대개가 아이보리나 분홍색이 옅게 들어간 드레스였다. 옅은 하늘색 드레스도 인기였다.

'흰색과 푸른색이라니, 웃겨.'

그런 수수한 색상이라니. 젊은 여인들에게는어울리지 않는다 여겼다. 파란색은 아름답기는하지만 우울하고 칙칙한 느낌을준다. 더더군다나 빨간색 계통의 드레스를 입은 사람이 있다면 그 무리는단숨에 그저 배경이 되어버릴 터였다.

'나도 저들과 같은 옷을입고 배경이 될 수는없지.'

초대장에는그저 권하고만 있을뿐, 드레스 코드로 정해 놓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이미 생각해 놓은 드레스가 있었다.

마치 자신만을위해 준비된 것 같은 드레스.

그 황금빛 드레스가 파티장 안에서 자신을주인공처럼 보이게 해 줄 거라 믿어의심치 않았다.

'그 드레스라면 공작님의 시선을내게 묶어놓을수도 있겠지! 더불어칙칙한 로제타 휘르센 따위 수도로 돌아가 버리라지!'

다만 약간은 변형을주는것이 좋을듯싶어서, 시녀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가슴이 더 도드라지게 고치라고.

***

로제타가 방으로 들어오자 미카엘은 키스부터 퍼부었다. 그저 미카엘이 먼저 일을끝내고 돌아와 로제타를 기다리는식으로 입장이 바뀌었을뿐인데도, 로제타가 하루 종일 업무에 시달리다가 지금 돌아온 것처럼 굴었다.

미카엘은 능숙하게 로제타의 옷을벗기고 욕실로 데려갔다. 그가 고한 대로 미카엘은 요즘 로제타의 목욕 시중을들고 있었다.

부끄러운 것과는별개로 기분이 좋았고, 편했다. 시녀들의 시중을받는것도 익숙해지면 편하다고는하지만, 남편인 미카엘만큼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그들은 남이니까.

"하아…. 응……."

"기분 좋습니까, 로제타?"

속삭이며 미카엘은 로제타의 전신으로 손을미끄러트렸다. 귀찮거나 힘들지 않을까, 하는로제타의 걱정은 미카엘의 짓궂은 듯한, 그러면서도 기뻐하는표정을보고 사라졌다. 미카엘은 로제타의 몸을매만지는것을꽤 좋아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정도였다.

미카엘은 그러며 어디서 마사지 기술까지 익혀 왔는지, 로제타의 근육을풀어주기까지 했다. 목적은 침실에서의 그 일을더 수월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힉, 아응…. 미카엘 님…. 하읏…."

마사지에 애무를 더한 음란한 손길에 로제타는허리를 비틀며 미카엘에게 매달렸다. 입가에 어린 진득한 웃음이 조급한 표정으로 뒤바뀌며 익숙한 키스가 쏟아졌다. 혀가 뒤엉켜 가쁘게 서로를 맛보는사이 로제타는절정을느끼며 허리를 튕겼다.

미카엘은 황홀경을맛보는로제타의 눈을들여다보며 그녀의 파르르 떨리는혀를 끈적하게 빨아댔다. 이내 축 늘어질 때까지 넘치는로제타의 타액을마시며 가쁜 숨을흘렸다.

"…넣어도 되겠습니까?"

목욕을다 할 때까지 참을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참지 못했다. 어떨 때는욕실에서 여러 차례 사랑을나눌 때도 있고, 어떨 때는….

"으응, 좋아요. 하읏!"

크게 벌어진 다리 사이로 미카엘의 페니스가 들어왔다. 그의 손가락으로 몇 번이나 절정을맛보았기에 오늘의 첫 삽입이라 해도 수월한 편이었다.

"하으…. 커…. 으흣…."

로제타가 미카엘의 목을끌어안자 미카엘이 그녀를 안아 올렸다. 로제타는미카엘의 가슴에 착 달라붙으며 그의 허리를 두 다리로 감았다. 로제타의 엉덩이를 받쳐 든 미카엘이 허릿짓을하며 욕실의 입구로 향하기 시작했다.

"앗, 아아…. 으응! 아흑…. 음…."

미카엘의 커다란 것이 생각지 못한 곳을찌르고 비벼대는감촉을즐기며, 미카엘의 허리에 감겨 있는제 다리에 힘을주었다. 미카엘은 로제타가 매달릴 때마다 참지 못하겠는지, 허릿짓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이러다가는침대에 도착하기 전에 사정할 것 같았다.

'안 될 일이지….'

마법을 풀고 다시 걸던 날로부터 며칠간 관계 때미약을 사용했기 때문인지 로제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단순히 미약을 사용하지 않아서 쾌감이 달라진 것으로 생각하는 눈치였다.

어차피 그녀로서는 지나친 쾌락이 골칫거리였으므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오늘은 다른 걸 해 볼까요?"

빨라지려는 허릿짓을 늦추며 미카엘이 속삭였다. 그가 은근슬쩍 시험해 본 결과 로제타는 미카엘이 마력을 불어넣은 물체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았다.

이를테면 진동석 같은 물건에도.

비밀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낮춘 미카엘의 은근한 속삭임에 로제타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미카엘의 조르는 말에 결국 허락해 주고 말았다.

***

지친 듯 늘어진 로제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미카엘은 그녀의 이마에 입 맞췄다. 최근 황실에서 보내 준 보고서에 따르면, 이자벨을 탈출시킨 무리들은 그녀를 데리고 국경을 통과한 것 같다고 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자벨로 추정되는 여자를 데리고 국경을 통과하는 것을 목격한 자가 몇몇 있다.'

는 거였다.

협박 편지를 보내 다른 영애들을 움직여 누군가에게 누명을 씌우는, 음험한 여자였다. 그런 여자가 아무리 상황이 급박하다 한들 로제타나 자신을 포기할 것 같지는 않았다. 당장은 어쩔 수 없이 손을 놓더라도 언젠가는 해코지를 하려 들 것이다.

악의를 가진 인간들이란 제멋대로니까.

멋대로 기대를 품고,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고서는 그것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악심을 품는 자란 의외로 흔했다.

미카엘은 귀족 중에서든, 평민 중에서든 숱하게 그런 자를 보아 왔다. 그런 자들은 상대가 조금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이면 타인의 목덜미를 물고 싶어서 안달하는 이였다. 미카엘이 보기에 이자벨 카룰리아스도 그들과 다를 바없었다.

인간이라기보다는 짐승…. 아니, 짐승이라는 말도 사치였다. 마물과도 같은 심성을 가진 여자였다. 탐욕스러우니 제 욕심을 버리기보다는, 가지고 싶었던 그를 망가트리는 것을 선택할 것 같은 이였다.

'그 여자를 죽이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 없다.'

로제타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이자벨을 살려 준 것이 아쉬웠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테지만, 기회가 있을 때죽이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었다.

'다시는…. 같은 일은 없을 것이다. 아니, 그때와 같지 않다.'

리디아를 잃었던 그때와는 같을 수가 없었다. 로제타가 다친다는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혀 올 지경이니. 그녀를 잃는다면 이번에는 살아갈수 없을 것이다.

"로제타…."

옆에 길게 누워 있던 미카엘이 로제타를 품에 안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에 코를 박고 조용히 그녀를 부르자 설핏 잠이 들었던 로제타가 미카엘의 가슴에 달라붙었다.

무서울 정도로 달콤한 감각이 퍼져 나가는 것에 미카엘은 긴 한숨을 쉬었다. 이게 꿈이라면 절대 깨고 싶지 않은 꿈이었다. 심지어 최악의 악몽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깨는 순간 도저히 살아갈자신이 없었으므로.

***

무도회에 참석하라는 지시는 황제가 붙여 준 기사들에게도 내려왔다. 전부가 차출된 것은 아니었다. 신분에 따라, 혹은 참석하고 싶은지 여부에 따라 결정되었다. 공작가의 가신들이 참석하는 자리이니, 그 가신의 아들딸들도 참석할 것이다.

그러나 수도와는 달리 이곳의 영애는 한동안 얼굴을 보다가 다시 볼 것을 기약하기 어려웠으므로, 가까워지는 것이 의미가 없었다. 그런 탓에 무도회에 참석하겠다고 나서는 기사들은 별로 없었다.

기사단장인 윌리엄은 신분에 따라 적당히 참석자를 골랐다. 신분이 높은 패트릭이나 로제타와 남매인 제럴드는 당연하다는 듯이 차출되었다.

유람을 온 것이 아닌 임무를 받고 온 것이라, 가지고 온 의복 중에 무도회에 참석하기 좋은 옷은 기사단 정복뿐이었다.

다만 패트릭은 따로 시종과 하인을 데리고 온 데다가, 자금이 넉넉하여 따로 옷을 맞췄다. 제럴드의 경우 미카엘이 의복을 보내 주었다. 휘르센 백작가의 관계가 있기에 모른 척할 수 없어 보내 준 것이었다.

그렇다 해도 최상의 것이었기에 제럴드는 한숨을 쉬었다. 로제타에게는 그저 미안한 마음이 가득해서 이런 수고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하긴. 어차피 아랫사람을 시켰겠지.'

그것도 로제타가 아닌 미카엘이 준비시켰을 것이라 확신했다. 로제타는 제럴드에게까지는 신경 쓰지 않았을 테니.

로제타가 아주 잠깐 제럴드에게 신경 쓰려고 했던 시기도 있었으나, 파티장에서 그가 그녀를 밀쳐 버린 이후부터는 신경을 끈 것 같았다.

호적상으로는 남매라고 해도 사이가 먼 사촌이라는 의식은 있었는데, 그마저도 사라졌다는 기분이 든다.

'누굴 탓할 수 있나.'

제럴드는 시종을 통해 건네받은 의복을 거절하지 못했다. 아덴 공작가에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데다가, 거절하는 것도 폐를 끼치는 일이었다.

기분상으로는 미카엘에게 아무것도 받고 싶지 않지만, 기사단 정복을 입고 무도회장에 나타난다면 그 나름대로 구설에 오를 수도 있었다.

아덴 공작가의 그 재력에도 불구하고 제럴드가 기사단 정복을 입고 나온다면, 공작가에서 아무런 신경도 써 주지 않은 증거가 되니 말이다.

'로제타는 미카엘 황자가 사 준 드레스를 입고 나올까?'

황제의 무도회장에 입고 나갔던 드레스도 매우 아름다웠고 그녀에게 잘 어울렸다. 사람이 달리 보일 정도였으니, 미카엘 황자가 얼마나 신경을 써 준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이번에도 미카엘 황자는 그렇게 해 줄 것이다. 일단 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는 로제타에게 매우 지극정성이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었으나, 제럴드는 한편으로는 그게 불편했다. 자신이 해 줄 수 없는 많은 것들을 해 주고 있다는 사실도 어쩐지 그의 뱃속을 들끓게 했다.

'잘된 일이다. 이제 누구도 로제타에게 손댈 수 없을 테니….'

그 사실을 떠올리며 제럴드는 신전에서 온 서신에 눈길을 주었다. 아이리스가 보낸 것이었다.

***

'제럴드 휘르센과 나에게 각각 편지를 보내다니!'

더더군다나 내용은 아덴 공작저의 분위기를 묻는 것이었다. 겉으로야 패트릭의 안부를 묻는 내용이었지만, 부쩍 아이리스에 대한 인내심이 줄어든 패트릭은 금세 그것을 알아차렸다.

제럴드에게 보내진 편지도 자신과 같을까, 궁금했으나 같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무리 그래도 제럴드보다는 패트릭과 가까운 사이였던 아이리스이니.

패트릭은 한때아이리스가 자신과 미카엘 황자를 두고 저울질했던 순간이 있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지금도 아이리스는 완전히 패트릭을 놓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감히, 이 자신을 두고 다른 사내와 저울질하다니!

미카엘 황자가 결혼하기 전이었다면 못마땅해도 어쩔 수 없다 인정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그는 유부남이 아니던가!

무언가 목적이 있어 결혼했다고는 하더라도 결혼은 결혼이었다. 결혼한 남자와 자신이 저울질당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니면 결국 그녀가 원하는 것은 미카엘 황자란 말인가?'

어쩌면 그가 가져다줄지도 모르는 황비관이 탐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먼 훗날 자신의 자식을 황제로 세우고픈 욕심을 가지고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패트릭은 읽고 있던 편지를 저만치 치워 놓았다. 아이리스의 속셈이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느 쪽이든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세속적이지 않은 순수한 여인이라 생각했는데….'

그녀에 대해 알면 알수록 진창에 발을 들이는 듯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순수함은 무지에서 오는 어리석음으로, 귀여운 고집은 오만에서 오는 욕심으로 생각되었다.

한번 길을 잃자 점점 침잠하는 마음에 패트릭은 편지를 접어 봉투에 넣었다. 다 읽지는 않았으나 의례적인 내용일 게 뻔해 이게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차라리 로제타 쪽이 더 순수했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한때아이리스에게 흥미를 느꼈던 미카엘이 급속도로 빠져들어 갔는지도 모른다. 생각에 잠겨 있던 패트릭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미카엘 황자의 마음이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불안해졌다.

'그럴 리 없다!'

음험한 사내였다. 그런 남자가 고작 로제타 정도로 만족할 리 없다. 로제타는, 휘르센 영애는….

"……."

패트릭은 가만히 비어 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에게 흥미조차 없었던 자신도 이렇게 끌리고 있는데, 미카엘 황자라고 무엇이 다를까 싶었다. 피해자로서의 로제타에게 흥미를 느꼈다가 가까워진 것이라면….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만 한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로제타도 결국에는 미카엘 황자에게 흔들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이리스조차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대가 아닌가.

패트릭은 사랑에 빠진 얼굴로 로제타를 바라보던 미카엘을 떠올리고는 우울해졌다. 로제타는 아직도 그를 미워하고 있는데, 미카엘은 그런 얼굴로 로제타를 바라보며 매 순간 그녀를 유혹할 터였다.

'내가 더 먼저 그녀를 알았는데도!'

그 시절에는 그저 로제타가 혐오스럽기만 했다. 이런 날이 올 줄 모르고…. 신사로서, 기사로서의 의무를 다하기만 했어도 이렇게 후회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니, 아직이다! 아직 아이가 생긴 것도 아니고….'

가장 중요한 로제타의 마음만 돌릴 수 있다면 달라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결혼생활은 혼자서 유지하는 것이 아니니까. 로제타만 자신을 받아 준다면, 그 후에 벌어질 일은 얼마든지 수습할 자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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