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 황자에게 사로잡혔다-10화 (10/21)

제10장. 흑역사는 왜 따라붙는가

발등에 불이떨어졌다. 다른 것도 아닌, 황족을시해하려 했던 이가 호송 중에 빠져나갔으니 수도가 발칵 뒤집어졌다. 심지어 이자벨을호송하고 있던 병사들 전부와 기사들, 간수까지도 살해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이로 인해 연금당했던 카룰리아스 후작은 감옥으로 끌려 들어갔다. 이자벨 카룰리아스를 탈출시켰다는 죄목이었다.

또한 수도의 내로라하는 기사들로 추적단이꾸려졌다. 시간을끌면 끌수록 죄수와의 거리가 더 멀어졌으므로 그들은 빠르게 수도를 떠났다.

남은 것은….

"아덴 공작가에도 유능하고 뛰어난 기사들이있다."

"폐하가 직접 선출하여 보낸 자들입니다."

윌리엄의 말에도 미카엘의 표정은 좀처럼 펴질 줄을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황제가 보낸 기사단의 단장 중에 패트릭 란스필드가 있었던 것이다.

왜 하필이면 저놈을!

로제타를 지킬 사람이한 사람이라도 많아지는 것은 안심할 만한 일이었으나, 그 사이에 패트릭이있는 것은 전혀 안심하지 못할 일이었다.

심지어 저놈은 로제타의 첫사랑이지 않은가!

폐하의 마음은 고맙지만 꺼져 줬으면 좋겠다는 말이목구멍에서 날름거리고 있었다. 하다못해 패트릭 란스필드만이라도 쫓아 보냈으면 하는 마음이간절했다.

하나, 로제타의 안전에 관한 일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저놈이제국에서 손꼽히는 실력자인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방이없다고 할 수도 없고.'

다른 기사들이야 그렇다치고, 윌리엄과 패트릭, 제럴드까지 세 사람은 공작가의 저택에서 방을내어주어야 할 터였다. 지위로 보나, 가문으로 보나 그러했다.

'괜찮다. 로제타는 24시간 내내 나와 함께 있을테고, 성은 넓으니까.'

"집사가 방으로 안내할 거다."

"알겠습니다, 각하."

윌리엄이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패트릭과 제럴드는 저택 내로 들어오지 못한 채로 저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터였다.

결국 이저택 안으로 들어오게 될 테지만. 미카엘은 그 사실이상당히 약이올랐다.

***

"패트릭 란스필드 경이?"

시녀로부터 소식을전해 들은 로제타의 얼굴이달아올랐다. 두근거려서나 기뻐서가 아니었다. 그가 내뱉은 말이며, 그때 겪은 수치와 모멸감이다시 떠올라서였다.

화가 났지만 로제타는 그 화를 능숙하게 숨길 줄 알았다. 다만 수치심을누르는 것은 쉽지 않아서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은 감추지 못했다.

'왜? 무슨 생각으로? 날 경멸하는 것 아니었어?'

지금의 로제타는 패트릭 란스필드에 대한 감정이눈곱만큼도 없었다. 애초에 자라난 적도 없으며, 원작을읽었을때도 딱히 정이가지 않았다.

원작1에서도 2에서도 그는 딱히 공들여 창조한 캐릭터가 아니었다.

원작1에서는 구원자로 나왔으나 후반에만 약간 비중 있는 캐릭터였고, 원작2에서는 질투만 하는 서브남1에 불과했다.

비중 있게 다뤄진 것은 미카엘인지라 그에게는 별 관심이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만나 보니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싸가지가 없기도 했었고.'

'불쏘시개로 사용하는 데도 한계가 있으니 이제 그만 보내지?'

처음 만났을때, 그가 했던 말이었다. 빙의한 지 이틀째인 날이기도 했다.

그다음부터는 내내 그를 피해 다녔다. 혹시라도 눈이마주치면 워낙 사납게 노려보기도 했고, 그가 껄끄러웠기 때문이었다.

아이리스의 일과 얽혔을때는….

'역겨운 편지 다음에는 괴롭힘인가?'

그가 자신의 팔을움켜쥐고 날카롭게 추궁하던 날이떠올라 로제타는 귀 끝까지 열이올랐다. 그 편지의 한 줄도 자신이쓰지 않았지만, 세간에서는 그녀가 썼다고 알려져 있었다.

지금의 이몸이원작 로제타의 몸인지라, 로제타는 그 내용도 기억하고 있었다. 유치찬란하다못해 닭이되어 우주를 유영할 것 같은 내용의 편지였다.

[밤하늘에 떠오르는 조각별 같은 당신의 날카로운 콧날에 베이고 싶어라….]

'으윽!'

정신 공격에 가까운 내용에 로제타는 하마터면 제 머리털을쥐어뜯을뻔했다. 패트릭은 그 편지를 최소한 한 통은 읽은 모양이었다. 역겨운 편지 운운하는 것을보니.

정말 만나고 싶지 않다. 솔직히 패트릭 따위 어디에서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 인사를 받는 것도 싫었다. 로제타에게 있어서 패트릭 란스필드는 살아 움직이는 흑역사, 그 자체였으니까.

'서, 설마 이저택에 머무는 것은 아니겠지?'

공작과 공작부인이머무는 것은 본 저택이고, 그들은 기사로서 두 사람을호위하기 위해 온 것이니 북쪽 성에 머무를 테지만, 그래도 마주칠 가능성은 어디에든 있었다. 한 울타리 안에 기거하고 있는 이상은.

'진짜 미카엘에게 딱 붙어 있어야겠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패트릭이자신에게 말을붙일 일은 없겠지만, 로제타는 그 일만큼은 절대로 피하고 싶었다.

패트릭 란스필드라면 이제 끔찍했다.

***

"…윌리엄 경을필두로 처남과 란스필드 경은 북쪽 성에 머무를 겁니다. 혹시 처남이본성에 머무르기를 바라십니까?"

미카엘의 질문에 로제타는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제럴드와 친밀하지도 않거니와 그도 다른 기사들과 차별을두는 것을원치 않을것이다.

"아니요. 다른 기사들과의 형평성이있으니까요…."

그 형평성 문제로 윌리엄과 패트릭까지 본성에 기거하게 한다는 선택지가 있었으나, 미카엘도 로제타도 그 점에 대해서는 입도 벙끗하지 않았다. 패트릭 란스필드가 되도록 멀리 있기를 바랐으니까!

'대체 왜 그 인간이거기에 끼어 있는 거지? 자원했을리는 없고…. 폐하신가?'

황제라면 그럴 법했다. 패트릭 란스필드는 제국 최고의 기사들 중 하나였으니까. 제럴드와 함께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였다.

흑역사가 여기까지 쫓아오는 기분에 로제타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로제타? 춥습니까?"

"아…. 조, 조금…."

"불을피우라고 해야겠군요."

미카엘이자리에서 일어나 설렁줄을당기러 갔다. 로제타는 그사이패트릭 란스필드에 대한 것을생각하고 있었다.

'저도 낯짝이있으면 오지 말았어야지. 무슨 생각으로….'

그 스스로가 말한 대로 대부분 불쏘시개로 썼을테지만, 대체 몇 통이나 열어 보았는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그가 시종과 그 편지를 읽어 보며 자신을비웃었을것을생각하면 자다가도 수치심으로 부들부들 떨릴 것 같았다.

'란스필드의 머리를 매우 쳐서 기억을소거시킬 수만 있다면! 정말 그러고 싶다아아아…….'

원작의 로제타는 하루에 편지를 두세 통씩 써서 란스필드에게 보냈다. 공부는 죽도록 하기 싫어했으면서 편지 내용에는 공을 들여서, 로제타는 그 내용의 대부분이 기억에 선했다. 로제타의 몸 자체가 암기력이 나쁜 편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내 얼굴을 보면서 편지 내용을 생각하고 날비웃을 것 같아….'

그사이 미카엘이 자리로 돌아왔다. 금세 시종이 나타난 것에 미카엘은 벽난로에 약하게 불을 지피라고 지시했다. 서늘함이 날아갈 수 있도록.

시종은 금세 하인을 시켜서 불을 피웠다. 연기며 불 피우는 냄새가 굴뚝을 통해 빠져나가도록 하는 것이 매우 능숙했다.

"아직도 춥습니까?"

그사이 미카엘은 로제타의 곁에 달라붙어서 제옷을 덮어 주고 끌어안고 있었다. 그 다정함에 패트릭으로 인한 불쾌감이 조금 수그러드는 것 같았다. 로제타는 안도감을 느끼며 미카엘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전혀요."

'란스필드 놈이 대놓고 날비웃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복수해야지.'

로제타는 방긋 웃으며 생각했다. 미카엘은 걱정스러웠다.

'로제타가 다른 데 정신이 팔린 것 같은데. 설마 란스필드 놈을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리고…. 안전상의 문제로 폐하께서 장인 장모님을 황궁에 머무르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감사한 일이지만. 그래도 괜찮은 거예요?"

휘르센 백작가가 황실의 사돈인 것은 맞지만, 파격적인 조치였다. 미카엘이 황제의 동생이 아닌 아들이라 해도 그랬다.

"괜찮습니다. 두 분의 안전이 우선이니까요. 황비 전하께서는 두 분이 불편해하시지는 않을까 신경 쓰고 계셨습니다."

엔디미온은 모르겠지만 셀리나는 분명 기뻐할 것이다. 휘르센 백작가는 고위 귀족이 아니라서 황실의 연회에도 그다지 초대받지 못했었으니까. 이번 일을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있겠지.

"황실 기사들이 두 분을 경호하고 모임도 되도록 황궁에서 가지실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두 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네에…."

'황궁에서 모임을 가질 수 있도록 하다니…. 엄마가 완전히 신났겠는데?'

로제타는 두 분께 감사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미카엘을 향해 웃었다. 미카엘은 그 모습에 눈꼬리를 휘며 웃더니 고개를 숙였다.

부드럽게 포개지는 입술에 한숨이 흘렸다. 파고들어 오는 혀를 기쁘게 받아들이며 미카엘의 허리를 끌어안는데….

"크흠흠. 공작님."

화들짝 놀란 로제타가 후다닥 미카엘의 가슴을 밀고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좋은 순간을 방해받은 미카엘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는 홱 고개를 돌려 집사를 노려보았다. 집사는 예의를 지키는 척,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별일이 아니라면 날벼락이 떨어질 것 같은 목소리였다. 집사는 헛기침을 하며 집사의 정석 같은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휘르센 경과 란스필드 경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저택에 머물게 해 주신것에 대해 감사 인사를 하시겠다고…."

그냥 머물게 해 주는 것도 아니고, 황제의 명을 받고 온 거라 내쫓지 못한 거였다. 제럴드야 처남이니 어쩔 수 없었던 것이고!

"그냥 도…."

돌려보내라고 하기에는 제럴드의 존재가 있었다. 처남. 로제타와 혈연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호적상으로는 오빠인 남자 사람이었다.

처가와의 관계를 위해서라도 대놓고 괄시해서는 안 되었다.

"십 분만 있다가 올려 보내도록."

"알겠습니다, 공작님."

집사는 미카엘과 로제타에게 차례로 고개 숙여 보이고는 재빨리 사라졌다. 미카엘은 기대에 찬 표정으로 로제타를 보았다.

"아까 것. 이어서 하면…, 안 되겠습니까?"

"음…."

"안 될까요?"

간절한 눈빛에 로제타는 비식비식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 마침 집사가 예의 바르게도 문을 닫고 나간 참이었다. 벽난로에 불을 피워 주었던 시종과 하인들도 어느새 조용히 빠져나갔다.

"안 되긴요. 해 주세요."

미카엘은 안도한 듯 로제타를 끌어안고 그 입술에 부드럽게 입 맞췄다. 십 분이 너무도 짧게 느껴졌다.

***

"아버지!"

씩씩거리며 방으로 밀어닥친 딸의 모습에 미르세 후작은 짜증스레 미간을 구겼다. 사람을 보내 온다는 기척은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에 후작은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요한나…."

"황자님을 유혹하셨다는 게 진짜예요?!"

"뭐?!!!"

미르세 후작은 순간 머리가 터지는 줄 알았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요한나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미르세 후작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버님이 로제타에 대한 잘못을 몸으로 갚으시겠다면서 옷을 벗으셨다면서요!! 살롱에 나갔다가 그 소리를 듣고 제가 얼마나…!"

옷을 벗은 게 아니라, 터진 거였지만. 그게 그렇게 소문이 났단 말인가?

'이런 잔인한!'

"공작가의 하인들이 다봤다면서요!! 황자님이 질색하며 거절하니까, 스스로 옷을 찢고 난동을 부리셨다던데!!"

"아니야!!! 나는…."

"뭐가 아니에요! 며칠 전에 옷이 찢어져서 돌아오셨잖아요!!!!"

미르세 후작이 고함을 지르며 부인했으나, 딸의 목소리가 더 컸다. 방에 달린 유리창이 쩌르릉 울리지 않을까 싶은 성량이었다. 후작가의 저택이라도 창피할 판국에, 여기는 손님으로 머물고 있는 백작가의 저택이었다.

"이 멍청한 것아!! 입 다물지 못해!"

"이제어떡하실 거예요!! 창피해서 얼굴을 못 들고 다니겠어!!"

이 째질 듯한 목소리는 건너 건너의 침실을 사용하고 있는 백작에게도 생중계되고 있었다. 백작은 그 해괴한 소문을 듣고 넌지시…, 아덴 공작가에 미르세 후작을 쫓아낼까를 물어보기까지 했다. 공작 측에서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답을 보내왔다.

'자식이나 부모나….'

백작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들여다보고 있던 서류에 집중했다.

***

'역겨운 편지 다음에는 괴롭힘인가?'

그때 놀란 표정을 보고 가증스럽다고 생각했었다. 로제타는 아이리스를 괴롭힌 것이 자신이 아니라고 떠벌리고 다녔으니까.

그녀가 아이리스에게 주스를 끼얹는 광경을 본 영애가 몇이나 있었기에 믿지 않았다. 증인도 있는데, 잘도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역겨운 철면피.

패트릭은 로제타를 그런 여자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여자들이 거짓말을 한 거였다니.'

미안한 마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가엽다고는 보았다. 그러나 지금의 분위기는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진짜 괴롭힘을 당한 사람은 누구인데, 대부분의 인간들이 아이리스가 아닌 로제타를 안타깝다고 보았다.

'저런, 세상에….'

'무서웠겠어요.'

'어떤 영애라도 그런 음모에서는 빠져나갈 수가 없지요.'

그의 어머니 또한 로제타를 측은하게 보았다. 그녀의 그런 마음은 로제타가 한때 패트릭을 좋아했었기에 더했던 것 같았다.

'패트릭, 그 영애에게 함부로 대했던 것은 아니겠지? 그 영애는 너를 좋아하지 않았니. 아직도 좋아한다는 소문도 있었고….'

'어머니. 진짜 피해자는 아이리스입니다. 그 영애가 억울했던 건 맞지만….'

패트릭의 그 말에 후작부인은 눈살을 찌푸렸더랬다.

'그래. 리온 영애도 힘들었겠지. 그래서 다리가 잘린 사람이 있으니, 다리가 부러진 사람은 아프다는 내색도 하면 안 된다는 거니?'

'그건…. 아닙니다.'

'리온 영애가 힘들었다는 건 안다. 그렇지만 리온 영애는 힘이 되어 주는 사람이 있었잖니. 휘르센 영애…, 아니 지금은 공작부인이구나. 그 영애에게는 가족들마저 손가락질하는 상황이었으니, 더 힘들었을 거야.'

'…….'

'육체적인 고통만이 전부는 아니란다. 다시 생각해 봐도 안되었구나. 그 영애는 그 몇 개월간, 어디에 마음을 붙이고 견뎠을까?'

어머니의 측은하다는 그 눈길이 거슬렸었다. 그는 여전히 아이리스에 비하면 로제타의 괴로움은 별거 아니라고 여겼다. 애초에 로제타가 아이리스에 대한 악감정을 가지고 있어 누명을 씌울 대상이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더더군다나….

'아이리스가 연모했던 미카엘을 붙잡지 않았나.'

승자는 로제타고, 패배자는 아이리스였다. 강력한 경쟁자인 미카엘을 치워 준 것은 기쁜 일이었지만, 패트릭은 그 사실이 거슬렸다.

수도에서도 온통 로제타에 대해서만 가엽다고 말하며 그녀를 측은해하는 분위기였다. 아덴 공작령도 그러했다. 그런 기울어지는 가문에, 외모도 능력도 한참 빠지는 영애가 공작의 부인이 되었으니 반감을 가질 법도 하건만. 로제타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호의적이었다.

막 누명이 벗겨졌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다해도 패트릭은 아이리스가 걱정스러웠다.

진짜 피해자는 그녀인데, 그녀가 당한 괴롭힘에 대해서는 세상이 온통 잊어버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이리스는 괜찮다고 했지만….'

아이리스.

목적지가 같으니 오는 도중에 한 번이라도 얼굴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했다. 그러나 그들은 육로로 느리게 오고 있었고, 황제의 기사단은 순간이동 마법진을 사용했다. 목적지는 같아도 경로가 달라서 마주칠 일이 없었다.

'젠장.'

이러는 와중에도 로건은 아이리스와의 거리를 좁혀 가고 있을 것이다. 패트릭은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초에 왜 이곳으로 오려는 거지?'

거리의 시민들까지도 공작이 부인을 아끼는 것을 알았다. 공작부인을 맞이할 준비를 하면서 의상실을 통째로 사들였다는 소문이었다.

'그 미카엘 황자가 그 여자에게 진심일 리는 없으니…. 그렇게 소문이 나야 할 이유가 있는 건가?'

로제타는 이제까지 누명을 썼던 것이라고 했다. 거기다어차피 단순한 여자이니, 미카엘을 협박해서 결혼에 성공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역시 이 일은 미카엘 황자가 꾸몄다는 얘기가 되는데….

'미카엘 황자의 속셈이 뭐든 간에 그가 그 영애와 결혼한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도 아직 그에게 미련을 두고 있다니….'

아이리스가 미카엘에게 마음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패트릭은 미카엘이 무슨 짓을 하든 관심이 없었다. 그가 여기까지 내려온 것도 전부 아이리스를 위해서였다.

정확히는 아이리스가 미카엘의 계획에 휘말려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대체 미카엘 황자가 뭐기에!'

패트릭은 짜증스러웠다. 그는 어릴 때 그의 놀이 친구로 있어 봤기에 알았다. 미카엘 황자가 얼마나 음험하고 속을알 수 없는 인간인지.

다른 영애들이 미카엘 황자에게 열중하는 것이야 알 바 아니었지만, 그 상대가 아이리스라면 달라졌다. 왜 하필이면 미카엘이란 말인가! 그는 유부남인데!

'내가 아는 아이리스라면….'

가슴 한구석에 여전히그를 마음에 품고 있더라도 거리를 두는 것이 옳았다. 그건 미혼의 영애든, 귀부인이든 당연한 일이었다. 그게 상식적인 처사니까.

'아니, 아이리스는 아직 현실을받아들이지 못한 것뿐이다. 그 결혼은 정말이지 갑작스러운 일이었으니까….'

제럴드의 얘기를 들으면 그건 정말 이상한 결혼이었다. 카룰리아스 영애의 눈을피하기 위해서라지만, 그렇게까지 하면서 로제타 휘르센과 결혼할 이유가 있었나 싶었다.

그 여자가 뭐기에.

'…그 유치한 편지 문구는 아직도 떠오르지만.'

저도 창피한 걸 알았는지, 파티장에서는 알아서 몸을피해 주어 편했다. 말을내뱉었을때 심하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이런 찰거머리 같은 타입일수록 말을더 독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괜히여지를 남겨 주었다가는 서로 골치 아파진다.

이쪽에서 한 짓이 있으니 그쪽에서는 자신을싫어할 거라 생각했다. 정상적인 영애라면 그게 보통이었다. 소문은 그와는 반대였지만.

사실 패트릭은 그 소문 때문에라도 로제타를 더 끔찍하게 여기게 되었다. 싫다는데도 달라붙는 여자만큼 짜증스러운 것은 없다고 여겼다.

"예의를 지켜 줬으면 좋겠군. 로제타는 이제 백작가의 영애가 아니라, 공작부인이야."

패트릭과 나란히걸으며 제럴드가 말했다. 그는 이 공작가의 성에 도착한 이후부터 패트릭에게서 눈을떼지 않고 있었다. 마치 그가 로제타의 행복을깨러 온 불한당이라 생각하는 것처럼.

'어처구니없기는. 그 여자는 이용당하는 게 뻔할 텐데.'

"이전에는 내가 예의를 지키지 않았다는 건가?"

"그건 자네가 더 잘 알 텐데?"

제럴드가 싸늘하게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패트릭은 코웃음을쳤다. 그가 심한 말을한 것은 맞지만, 그것은 모두가 있었던 자리에서는 아니었다.

"파티장 한가운데서 그녀를 밀어 넘어트린 자네에게 들을말은 아닌 것 같군."

"!!!"

순간 제럴드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 일은 제럴드도 마음 깊이 후회하고 있었다. 너무 화가 나서 제정신이 아니었으므로.

아이리스가 계단에서 떨어진 날이었다.

패트릭이 아슬아슬하게 아이리스를 받아 냈고, 놀라 달려온 로제타를 제럴드가 밀쳤었다. 나중에 복도 끝에 있었다고 말한 시종이 로제타의 짓이 아님을증언했지만…, 제럴드는 로제타에게 그 일을사과하지 않았었다.

계단에서 그대로 떨어졌다면 목이 부러질 수도 있었다. 만약 패트릭이 받아 내지 않았다면 크게 다쳤으리라.

아이리스에 대한 걱정과 상대에 대한 분노로 이성을잃었던 순간이었다.

"…그 일에 대해서는 평생을속죄할 걸세."

'속죄씩이나?'

미안한 일은 맞지만, 패트릭은 제럴드가 오버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야 로제타의 입장에서는 큰 충격이고 무서웠을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모두가 속고 있지 않았나. 모든 사람들이 로제타라고 손가락질하는 상황에서 진실을가려내기는 어려웠다.

"지극정성이로군."

"자네에게 함께하자고는 하지 않을테니, 그 애에게 접근하지 말게. 겨우 행복해졌어."

"설마 미카엘 황자가 진심이라고 보나? 미리 대비시키는 편이 나을텐데…."

공작가의 시종은 다섯 걸음 앞에 있었다. 그들은 서로에게만 들릴 정도의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지만, 시종이 듣지 않을까 주의하고 있었다.

제럴드는 화가 난 얼굴로 패트릭을노려보았다.

"무례하군. 그 비열한 말에 대한 책임을질 수 있나?"

"결투를 말하는 거라면 장소가 좋지 않다고 말해 주지. 우리는 폐하의 명을받고 이곳으로 온 거야…."

굳이 피할 생각은 없으나 패트릭은 그렇게 말했다. 제럴드가 분노로 이를 악무는 것이 보였으나 패트릭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미카엘 황자의 연기에 단단히속은 모양이로군.'

그 녀석이라면 그쯤은 연기하고도 남을거라고 패트릭은 그렇게 생각했다.

우아하게 양각된 흰 공작새가 있는 문 앞에서 시종이 멈춰 섰다.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문을향해 말했다.

"공작님. 휘르센 경과 란스필드 경이 오셨습니다."

"들여보내."

문 너머로 미카엘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미미한 기색이기는 했으나 패트릭은 그가 내켜 하지 않는다는 느낌을받았다.

시종에 의해 문이 열리고 제럴드와 패트릭이 안으로 들어갔다. 미카엘과 로제타는 옆으로 긴 소파에 나란히앉아 있었다. 미카엘에 비하면 화려한 맛이 없는 용모이기는 했으나,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것이 그림같이 어울려패트릭은 잠시 멈칫했다.

기이한 일이었다. 미카엘에 비하면 참새나 다름없는 로제타일 텐데, 그의 곁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백조처럼 우아하게 느껴졌다.

"…오래간만이로군. 휘르센 경, 패트릭."

"공작 각하, 부인.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제럴드가 먼저 예의를 갖춰서 말했다. 로제타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지나치게 격식을차린 것이었으나 누구도 그것을지적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는 관계였기에.

"먼 길 오느라 고생했어."

"아닙니다. 무사한 모습을뵈어 다행입니다."

말하며 제럴드는 힐끗 패트릭을쳐다보았다. 패트릭은 슬쩍 미카엘을쳐다보고 제럴드 곁에 섰다.

"결혼을축하드립니다, 공작님, 공작부인."

"란스필드가에서 보낸 선물은 잘 받았네. 후작부인께는 따로 카드를 보냈지만, 나중에 수도로 돌아간다면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해 줬으면 좋겠군."

"전해 드리겠습니다."

패트릭의 시선이 비키듯 로제타에게로 닿았다. 로제타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제럴드를 보고 있었다. 그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일부러 쳐다보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하긴. 뭐 좋은 관계라고.'

저런 로제타를 설득하여 미카엘에 관해 물어볼 생각을하니 까마득했다. 로제타의 입장에서는 그는 그저 싫은 상대일 것이다.

편지 보내지 말라고 해서 편지도 보내지 않고 가까이 가지도 않았는데…, 뜬금없이 나타나 그런 말을했으니.

'최소한 역겨운 편지라는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녀는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다. 한 달 새 수백 통의 편지를 보내는 기행을저지르기는 했으나 그의 비아냥에 단 한 통의 편지도 보내지 않았으니까. 그뿐인가? 의례적인 인사 외에 그에게 말을붙이는 일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토록 그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진 것이 이상하다 싶었다. 그녀 스스로 영애들 사이에서 그 말을하고 다닌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달리 할 말이라도 있나?"

미카엘의 물음은 패트릭을향한 것이었다. 패트릭은 로제타를 보고 있었다. 로제타는 미카엘의 시선에 슬쩍 패트릭을쳐다보았다.

그녀는 얼핏 눈살을찌푸린 것도 같았다. 내키지 않는다는 듯 시선이 빗겨 갔지만 눈이 마주칠 때 로제타의 얼굴로 홍조가 번지는 것이 분명히보였다.

'설마 내게 아직 마음이 있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추한 일이었다. 다른 사내를 마음에 품고 결혼을하다니….

'미카엘 황자가 이를 알고서도 감내할 리가 없지. 분명 둘 사이에 다른 거래가 있을것이다.'

미카엘의 시선이 패트릭에게서 로제타로 옮겨졌다. 얼굴을찌푸린 것은 아니지만 여릿하게 번져 가는 홍조가 눈에 들어왔다. 눈을피하고는 있으나 부끄러워하는 것은 아니었다.

'화가…, 났나?'

결혼 전에 알고 지낸 시간은 짧았지만 결혼한 이후로는 늘 붙어 있는 부인이었다. 로제타의 기분을늘 면밀히살폈으니 화가 나서 얼굴이 빨개졌는지, 부끄러워하는지 정도는 분간할 수 있었다.

'싫어하는구나.'

그 짧은 깨달음이 미카엘을기쁘게 만들었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제럴드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해 불안한 표정이었다. 그는 이것을분간할 수 있을만큼 로제타의 표정을유심히들여다본 일이 없었다.

'설마, 아직도….'

패트릭이 로제타에게 편지를 그만 보내라는 말을했을때, 제럴드는 먼발치에 있었다. 그래서 패트릭이 로제타에게 무언가를 말했다는 것은 알아도, 무슨 말을했는지는 몰랐다.

당황한 로제타의 표정으로 무언가 좋지 않은 소리를 했다고 추측했을뿐이다.

그 이후로 로제타는 패트릭이 있는 방향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기에 아직까지 좋아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악의적인 소문에 의심을품은 적은 있었으나, 로제타는 철저히패트릭과의 거리를 지켰다.

'그 소문이 널리 퍼진 것은 로제타에게 덧씌워진 누명 때문이었겠지.'

패트릭을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로제타가 아이리스를 괴롭힐 이유가 없었으므로.

문득 그 소문도 이자벨이 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으나, 지금의 로제타의 반응을보아서는 확신하기 어려웠다.

"아닙니다."

패트릭은 표정을감추며 물러났다. 미카엘은 얼핏 그가 로제타의 태도를 오해했다는 느낌을받았으나 확신할 수는 없었다.

제럴드 또한 인사하고 패트릭을따라서 방을나섰다. 시종에 의해 문이 닫히는 것을보고 미카엘은 로제타에게로 시선을주었다. 로제타는 여전히불쾌해 보였다.

"…내보낼까요?"

부드러운 속삭임에 로제타의 눈이 커졌다. 미카엘이 누구를 말하는지는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폐하가 보내 주신 사람들이잖아요."

불쾌한 감정으로 뜨거워졌던 얼굴이 다시금 제 색깔을찾아가고 있었다. 로제타의 눈에 떠오른 신뢰에 미카엘은 가슴속에 간질간질한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느꼈다.

불안해할 필요 없는 거였다. 그녀가 지금 좋아하는 건 나였다. 그 사실에 기쁨을느끼며 미카엘은 로제타의 이마에 키스했다.

미르세 후작에관한소문은들불처럼 번져 갔다. 증인의 신분도 확실한데다가, 소문의 내용도 내용인지라 고작 일주일 만에수도까지 쫙 퍼졌다. 당사자인 미르세 후작은접시 물에코를 박고 싶은심정이었다.

"자네, 정말인가?"

"그럴 리 없잖은가!"

아덴 공작령에서 만난 귀족파 동료의 질문에미르세 후작은고함을 질러댔다. 그동안 당치도 않은질문과 의심의 눈초리를 한데 받은터였다.

미르세 후작은이미 여러차례 반복한해명을 늘어놓을 수밖에없었다. 자신이 비느라 한말을 공작이 오해해서 하인들이 그를 끌고 가려 했고, 그것을 뿌리치려다가 옷이 찢어졌다는 내용이었다.

사실을 고할 수는 없었으니까.

남성용 코르셋은널리 퍼진 것이었으나, 미르세 후작은늘 자신은그런것은착용하지 않는다고 주장해 왔었다. 되레 코르셋을 착용했다는 동료 귀족을 비웃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몸부림치느라 코르셋이 터졌다는 것을 어찌 말한단 말인가! 그 또한미카엘 황자에게 수작을 걸려고 옷을 벗었다는 것만큼 그의 평판에치명적이었다.

'절대 말 못 해! 그 사실은무덤까지 가져간다!'

그래 봤자 아덴 공작저의 하인들이 입을 열면 끝장인 비밀이었으나, 미르세 후작의 입장은그러했다.

"정말 아니라는 건가?"

"아닐세! 내가 미쳤나! 나는 결단코 미카엘 황자를 보고 그런마음을 품은적도 없네!"

사위로 삼고 싶다는 꿈은꾼 적이 있으나, 그런쪽으로는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그에게는 다른 정부가 둘이나 있기도 했다.

"크험험. 그거 다행이로군. 나는 절대 그 소문을 믿지 않았다네."

로웬 백작이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눈에는 여전히 불신이 가득했다. 미르세 후작은분노한얼굴로 씩씩거렸다.

"어떻게 그 일이 그렇게 와전될 수 있는지! 잔인한자라네, 미카엘 황자는!"

"성과는 있었는가?"

그렇게 난장을 피웠으니 혹시나 해서 찾아온 것이었다. 로웬 백작의 말에미르세 후작은빠드득 이를 갈았다.

"공작부인은그림자도 보지 못했네! 황자를 만났다가 그 사달이 난 거야!"

"허허…. 공작부인과 약속을 잡았는데 황자께서 나오셨단 말인가?"

사실 로제타는 후작과 아무런약속을 잡지 않았지만, 미르세 후작은그렇다고 답했다. 로웬 백작은난처한눈치였다.

'공작부인만을 초대하여 몰래 만나 보려 했는데…. 이러다미르세 후작 꼴이 나는 게 아닌가?'

그의 이름으로는 어렵겠지만, 다른 귀족의 이름으로 초대한다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알겠네. 나는 이만 가 봄세."

저가 듣고 싶은얘기를 다듣자마자 등을 돌리는 로웬 백작을 보고 미르세 후작은눈을 홉떴으나 로웬 백작은모르는 척했다.

이미 수도 사교계까지 미르세 후작에대한소문이 파다한판국에그의 눈치를 보는 것은별 의미가 없었다.

"좋은정보를 알게 되면 알려 줄 테니까…."

그나마 이렇게 덧붙이며 로웬 백작은사라졌다. 미르세 후작은끄응~, 하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주저앉았다. 아덴 공작부인의 사인을 받으려다가 되레 오명만 얻었으니, 혹 떼려다가 혹 붙인 격이었다.

'네놈은어디 잘되나 보자!'

저도 망한김에로웬 백작도 망하기를, 미르세 후작은간절히 바랐다.

***

미르세 후작의 일로 루긴에모인 수도의 귀족들은한층 몸을 사리게 되었다. 직접적으로 달려드는 것은좋지 않겠다판단한것이다. 무려 미카엘 황자가 아덴 공작부인을 싸고돈다는 소문이었다.

남편이 부인을 보호하려는 것은당연한일이었으나, 수도 귀족의 반수 이상이 미카엘 황자가 속셈이 있어 로제타와 결혼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저희들이 달려든다한들 로제타를 보호해 주지는 않을 거라 판단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무턱대고 들이댔던 미르세 후작이 그 꼴이 나자 바짝 긴장하게 되었다.

미르세 후작의 추문을 그들은믿지 않았다. 미르세 후작이 그동안 여러정부들과 염문을 뿌리기는 했으나, 그중 사내는 없었던 탓이었다.

물론 미카엘 황자의 용모가 그렇지 않은자들의 마음까지 동하게 할 만했으나, 상대는 황제가 아끼는 동생이었다. 심지어 대마법사에, 아덴 공작이니…. 미르세 후작이 무리하여 멍청한짓을 벌일 리 없다고 여겼다.

"그럼 어쩌시려는 거예요?! 벌써 수도에서 돌아오라는 공문이 내려왔잖아요!"

자작가의 영애인 레이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히스테리를 부렸다. 정확히는 수도로 돌아와 조사를 받으라는 내용의 공문이었다.

"아이고, 레이나야. 우리 딸~, 아비가 이렇게 힘쓰고 있지 않니…. 너는 일단 수도로 올라가서…."

"싫어요, 싫어! 제가 뭘 잘못했다고 조사까지 받아야 해요!"

엉엉 울음을 터트리는 레이나의 모습에훈트 자작 부부는 안타까워 어쩔 줄 몰라 했다.

늦게 본 눈에넣어도 안 아픈 딸이었다. 이번 일로 약혼자에게 파혼까지 당한가엽디가여운 내 딸.

'이 어린것이 무슨 큰 잘못을 했다고!'

레이나의 나이는 올해 21살로, 어리다보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그들의 눈에는 언제 봐도 어리기만 한딸이었다.

'나쁜 것은그 악녀인 카룰리아스 공녀일 뿐인데, 왜 내 딸한테까지!'

"그래도 수도로는 돌아가야 한다. 조사를 받지 않으면 카룰리아스 공녀처럼 감옥으로 끌려갈수가 있어."

'감옥!'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는지 레이나는 기겁하며 훈트 자작의 팔을 붙잡았다.

"아버지, 저 살려 주세요! 저는 절대 감옥 못 가요! 나는 정말…. 카룰리아스 공녀가 시키는 대로 한죄밖에없는데…. 흐흑…."

"안다, 알아. 착한우리 딸이 그저 순진해서 이용을 당한것을…. 이 아비가 아덴 공작부인의 치맛자락을 붙잡아서라도 용서한다는 편지에사인하게 할 테니, 아무 걱정 말거라!"

훈트 자작 부부는 울며불며 짜증을 부리는 레이나를 간신히 설득해서 방으로 돌려보냈다. 저 레이나를 혼자 보낼 수는 없으니, 수도까지는 자작부인이 함께할 작정이었다.

"당신 제대로 할 수 있겠어요? 우리 레이나가 달린 일이에요! 그 계집…. 아, 아니! 아덴 공작부인의 사인을 받지 않으면…."

"염려 마. 내가 공작부인 앞에서 죽는 시늉을 해서라도 사인을 받아 낼 거야! 내 하나밖에없는 자식을 감옥살이하게 둘 수는 없지!"

자신 있게 말하는 훈트 자작을 자작부인은탐탁지 않은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덴 공작이 공작부인을 싸고돈다는 소문이 있었다.

'당장은방법이 없으니….'

자작부인은사실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레이나는 차라리 한번쯤 감옥에가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훈트 자작이 오냐오냐하면서 키워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딸이었다. 그래도 저보다작위가 높은이들을 두려워하는 마음은있었는데, 요즘 한창 오만방자해져서 불안해하던 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뒤에서 저보다신분이 높은영애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일에가담했다고 하여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슨 일로 협박당했는지는 말해 주지도 않고….'

가담한횟수가 많은것으로 보아 범상치 않은약점을 잡힌 듯한데. 그 약점이 무엇인지도 걱정이었다.

"당신만 믿을게요."

자작부인은그리 말하며 걱정 가득한얼굴로 훈트 자작을 바라보았다.

***

패트릭은상대가 아이리스일 때를 제외하고는 여인에게 먼저 접근해 본 일이 없었다. 그가 말을 붙이기도 전에영애들 쪽에서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덴 공작령으로 갈때도 안이한생각이 있었다.

같은성에기거하고 있으면 로제타가 한번이라도 저를 먼저 만나러올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막상 북쪽 성에거처를 받았지만, 로제타는 일주일이 지나도록 단 한번도 찾아오는 일이 없었다. 애꿎은제럴드만 의심스럽다는 듯 패트릭을 감시할 뿐으로, 시녀나 하녀를 시켜 편지를 전달하는 일조차 없었다.

'그건 내 착각이었나? 분명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던데….'

사람의 마음은다스릴 수 없는 것이니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남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마음에휘둘리지 않고 평정을 지키는 것은칭찬할 만하다고 패트릭은생각했다.

자신은그 마음을 이용할 생각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미안해지는데? 아니지, 어차피 미카엘 황자에게 속고 있는 것일 테니, 환상을 빨리 깨 주는 것이 좋겠지.'

많은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고 있지만, 미카엘 황자는 잔인한성품이었다. 제가 목적한것을 이루고 나면 어떤 식으로든 로제타를 처분하려 들 것이 분명했다.

그가 원하는 대로 이혼해 주지 않으면 죽여서라도 자신에게서 떼어 놓을 것이다. 그러니….

'미리미리 꿈은깨는 편이 좋겠지. 괜히 지금의 상황에기대를 품게 되면, 헤어지기 어렵게 될 테니.'

이것은로제타에게도 좋은일이라 여겼다.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라 생각하고 푹 빠졌다가 뒤통수를 맞게 되면 충격이 클 터였다.

그 생각을 하니 패트릭은입안이 썼다.

하필이면 로제타 휘르센을 이용할 생각을 하다니. 카룰리아스 영애에게 한번 이용당한피해자를…. 하긴, 피해자였기에구슬리기 더 편할지도 몰랐다.

아무튼 그쪽에서 오지 않는다면 이쪽에서 가면 그만이었다.

'저 찰거머리는 떼고.'

로건과의 상의 때 제럴드를 끼워 넣은것은실수였다. 그가 로제타 휘르센의 오빠이기는 해도, 사촌이고 양자였기에방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정도로 신의가 깊은줄은몰랐다.

'결혼생활을 방해하지 말라니…. 무슨 망상을 하는 건지.'

제럴드가 아무리 지켜 주려 애쓴다해도, 미카엘과 로제타의 결혼은때가 되면 깨질 것이 분명했다. 그 미카엘 황자가 로제타 휘르센을 사랑해서 결혼했을 리 없을 테니까.

패트릭은훈련 중에도 이따금씩 자신에게 시선을 주는 제럴드를 보며 혀를 찼다.

"…란스필드 경이라고?"

서재에서 편지를 쓰고있던 로제타는 당황했다. 이제까지 본성으로는 출입하는 일이 없었던 패트릭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다니.

'왜?'

"지금 아래층에 와 계십니다. 올려 보낼까요?"

"무슨 용건이기에?"

"그것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시녀의 말에 로제타는 생각에 잠겼다.

북쪽 성에 머물고있다고는 하지만, 본성 밖으로 나가지만 않으면 마주칠 일이 없을거라생각했다. 본성에서 외출해도 저택 앞으로 마차를 부르면…, 그 우연조차 벌어지지 않을거라여기고있었고.

'하필이면 미카엘 님이 없을때에….'

미카엘이 오전 중에 업무에 몰두하고오후에는 내내 공작부인과 보낸다는 것은, 공작가의 식솔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굳이 이 시간에 방문했다는 것은 미카엘이 없는 시간을노렸다는 뜻이 된다.

그리 만나고싶지는 않지만, 자신의 집에서 손님을피해 다니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올려 보내."

"알겠습니다, 마님."

시녀가 문밖으로 나서고, 로제타는 들고있던 펜으로 편지의 나머지 부분을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패트릭이 왔다고해서 만사를 제쳐 놓고마주하기 싫었다.

똑똑.

"들어와."

로제타의 말에 문이 열렸다. 로제타는 펜을든 채로 시녀와 같이 들어오는 패트릭을바라보았다. 패트릭은 이전과 같은 기묘한 느낌에 눈살을찌푸렸다.

흰색과 상아색이 어우러진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로제타의 모습이, 그 자리에 너무 잘 어울리기 때문이었다.

귀족적인 고상함이, 마치 이전부터 공작부인의 위치에 있었던 것처럼 느끼게 했다. 고작 로제타 휘르센에 불과한데도!

"란스필드 경. 무슨 일이신가요?"

로제타가 들고있던 펜을시녀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시녀는 능숙하게 펜을정리하고옆으로 물러났다. 패트릭은 힐끗 방 안을돌아보았다.

이 방 안만 해도 시녀가 다섯이나 되었다. 넓은 실내와 화려한 드레스만 보아도 그녀가 어떤 생활을하고있는지 알 수 있을정도였다.

공작부인으로서의 생활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지?

패트릭은 불편한 표정으로 로제타를 보았다.

그 자리는 로제타 휘르센의 것이 아니었다. 성녀인 아이리스 리온의 자리다. 제가 사랑하는 여자고, 미카엘에게 빼앗길 생각이 없었건만, 막상 아이리스의 자리에 있는 로제타를 보고있자니 심사가 뒤틀렸다.

"…갑자기 찾아온 것을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우연이라도 한 번쯤은 마주치리라생각했는데, 좀처럼 뵐 수가 없더군요. 누가, 피하기라도 한 것처럼."

무례한 언사에 시녀들은 놀란 얼굴로 패트릭을바라보았다. 그가 후작가의 후계자라고는 하나 로제타는 엄연히 아덴 공작의 부인이었다.

그가 후작이 되었다 해도 말을낮출 수 없는 상대인 것이다.

"제가 일개 기사와 얼굴을맞대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당황하여 변명하리라생각했던 로제타는 미미하게 낯빛에 홍조가 들었을뿐, 의연하게 답했다. 패트릭은 그 여유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러는 것은 자신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자꾸 심술궂은 생각이 들었다.

"하긴. 맞지 않는 옷을입으셨으니 바쁘기도 하셨겠지요."

드레스 자락 위에 올려놓은 손에 힘이 들어갈 것 같았다. 로제타는 얼굴이 뜨거워지려는 것을느끼며 눈을피했다. 그 시선에 패트릭은 오만하게 웃음을지었다.

"잘 지내시는 듯하군요. 흠, 카룰리아스 영애의 건은 정말로 유감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저도 그녀가 그럴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영…. 커흠. 부인이 누명을썼다는 소식에 매우 놀라고, 마음 불편했습니다."

이제 과거의 일이 잘못되었다고미안하다고말할 참이었다. 그러나 아까부터 싸늘한 시선을보내고있는 시녀들이 거슬렸다.

영문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이전부터 뜻 모르게 영애들의 책망 어린 시선을받아 본 적이 있는 패트릭은 그러려니 했다.

물론 로제타에게 사과하는 모습을그녀들에게 보이고싶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말씀드리기에 앞서…. 시녀들을내보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적인 얘기를 해야 할 터인데, 불편하군요."

로제타는 분노로 인해 잠시 동안 숨을쉬는 것을잊어버린 것이 아닌가 싶었다. 대체 제가 나와 무어라고그런 요구를 한단 말인가! 고맙게도 그는 그녀의 친구도 동료도 아니었다.

이를 악물고침을삼킨 로제타가 입을열었을때는 다소 말이 빠르게 흘러나왔다. 이 순간을피하고싶어서일 것이다.

"…꽤 오래된 일이지만. 경이 제 팔을움켜쥐셨을때 멍이 들었답니다."

과거의 일을들먹이는 것에 패트릭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로제타의 얼굴에, 미카엘 앞에서는 보인 적이 없는 냉랭한 표정이 떠올랐다.

"경의 기사도가 어떤 것인지 알고있으니, 시녀들을물리는 일은 없을겁니다."

공작가의 시녀들은 숙련된 자들이라표정을감추는 데 능숙했다. 그러나 경멸의 시선만큼은 감추지 못했다.

패트릭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로제타가 먼저 그 일을입에 올릴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한 번은 사과하고넘어가야 한다는 인식은 있었던 일이었다.

'멍이 들었다고? 겨우 그걸로?'

여자의 몸이 사내와 다름은 알고있었다. 그는 이전에는 단 한 번도 여자의 팔을그런 식으로 움켜쥔 적이 없었다.

그때는…. 아이리스에 대한 거듭된 괴롭힘으로 예민해져 있을때였다.

사교계에서는 로제타가 패트릭을사모하여 아이리스를 괴롭히는 것이라소문이 났으므로, 패트릭은 잔뜩 성이 나 있었다.

자신의 잘못을지적받자 패트릭은 무안하기도 하고짜증스러웠다.

"그때는, 제가…. 부인을오해해서라고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

로제타는 시선을내리깔고있었다. 패트릭의 얼굴을쳐다보기도 싫다는 표정이었다. 제럴드와 같이 인사를 나누었을때와는 너무 다른 표정이라패트릭은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뭐야. 아직 날 좋아하는 게 아니었나?'

미카엘과 같이 있을때는 남편 앞이라고내숭이라도 떤 모양이었다. 패트릭은 그 사실이 가증스럽기도 하고기가 막혔다. 애초에 그 일은 그 혼자만의 잘못이 아니잖은가. 속은 것은 그 하나뿐이 아니었다. 로제타에게 잘못을한 것도 여럿이었고….

'이럴 줄은 몰랐는데…. 이러다가는 미카엘의 속내를 캐 보기도 전에 공작저 밖으로 쫓겨나는 거 아닌가?'

그건 곤란했다. 궁극적으로 비난을받을상대는 카룰리아스 영애지만, 그녀는 도망쳐 버렸고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그 하나뿐이었다.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아이리스를 위한 일이다.'

억울해도 어쩌겠는가? 지금 로제타 휘르센은 백작가의 영애가 아닌 공작부인이었다. 후작가의 후계자란 이름으로는 누를 수 없는 상대인 것이다.

지금은 굽혀야 할 때였다.

억울했으나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패트릭은 찌푸린 낯으로 로제타를 바라보다가 성큼 걸음을옮겼다.

가까워지는 패트릭의 기척에 로제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솔직히 로제타는 그에게 설레는 감정도 없었고, 대면한 것도 조롱하거나 윽박을지른 것뿐이었으니 그가 불편했다. 무섭다는 생각도 들었다.

패트릭은 로제타에게서 여덟 걸음 떨어진 위치에 섰다. 그리고보란 듯이 털썩 무릎을꿇었다. 무릎이 꽤 아팠을것 같았지만 로제타는 눈썹을조금 찌푸렸을뿐, 놀라지는 않았다. 놀란 것은 시녀들이었다. 패트릭은 이를 악물고는 입을열었다.

"제가 어떻게 해야 용서해 주실 겁니까?"

'용서?'

저런 사나운 눈으로 보며 용서라니.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로제타는 늘, 그녀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패트릭의 시선이 무서웠다.

"저를 협박하시는 겁니까?"

로제타의 말에 패트릭은 짜증스러워졌다. 사람이 무릎까지 꿇었는데도 그런 말을…. 그가 인상을구기며 입을열 찰나 로제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얼굴이 미카엘과의 자리에서처럼 빨갛게 물들었다. 화난 얼굴이었다.

"솔직하게 말하지요. 저는 경이 무섭습니다. 끔찍하고, 얼굴을보고싶지도 않습니다."

바라본 로제타의 얼굴은 어쩐지 울 것 같아서 패트릭을당황하게 했다. 그녀가 화를 낼 거라는 의식은 있었지만, 얼굴을보고싶지 않다거나 무섭다고말할 줄은 몰랐다.

"나는…."

"용서받고싶으시다고요? 제가 왜 용서해야 합니까! 경의 마음이 불편한 것은, 경이 그릇된 일을저질러서이지, 제가 용서를 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소리치는 로제타의 모습에 패트릭은 할 말을잃었다. 로제타는 늘 그의 앞에서 겁먹은 듯 움츠린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심각하게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의 안에서 로제타는 늘 가해자였고, 강자였기 때문이다.

아이리스라는 약자를 해치는 가해자.

한 번도 그의 안에서 로제타는 약자였던 적이 없었다.

"저는 경이 무섭고싫습니다! 그러니 다신 용서를 구하지도! 제 앞에 나타나지도 말아 주십시오! 끔찍하니까요!!"

소리친 로제타는 패트릭과 한 공간에 있는 것조차도 참을수 없다는 듯이, 방을가로질러밖으로 나가 버렸다. 패트릭은 당황하여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감히 뒤쫓을생각은 하지 못했다.

늘, 늘 로제타를 보면 마음이 불편했다.

아이리스를 괴롭힌다는 사실을알았을때는 그 사실이 불쾌해서 싫어한다고여겼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누명이었음을알았을때…. 그때도 패트릭은 로제타가 싫었다. 불편했다.

'…경의 마음이 불편한 것은, 경이 그릇된 일을저질러서이지, 제가 용서를 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패트릭은 낯이 뜨거워졌다. 무슨 오만으로 로제타가 아직도 자신을좋아한다고여겼을까? 그녀는 상처받은 여자였다.

떼어 놓겠다고자신이 상처를 주었으며, 나중에는 그 상처를 헤집어 놓기까지 했다.

'역겨운 편지 다음에는 괴롭힘인가?'

우악스럽게 잡아챈 팔에 놀라쳐다본 로제타의 얼굴은 어땠던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의 기분을신경 써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한때라도 마음을주었던 남자가 그런 말로 비난하고위협한 것에 어떤 기분이었을지를 상상하면….

'…다시 생각해 봐도 안되었구나. 그 영애는 그 몇 개월간, 어디에 마음을붙이고견뎠을까?'

어머니의 말이 떠올라패트릭은 마음이 괴로워졌다. 그도 로제타가 어떤 취급을받고있는지는 알고있었다.

그녀의 친구들도,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로제타를 외면했으니까. 홀로 고립되어 갔으면서도 악행을이어 가는 그녀를 어리석다 경멸했었다.

한 번은 영애들 몇몇이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었다.

'휘르센 영애야.'

'저렇게 울 거면서 왜 매번 무도회장에는 나오는 걸까?'

'멍청하기는….'

정원에서 로제타가 혼자 숨어서 숨죽여 울고있다는 얘기였다. 알았지만 그는 정원으로 나가 보지 않았다. 로제타가 싫었으니까.

'젠장….'

아이리스도 험한 일을당했다. 몇 번이고위험한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로제타 휘르센은?

황실 무도회에서 그 일이 벌어졌을때, 미카엘 황자는 그녀 곁에 없었다. 그녀에게 끔찍한 일이 생겼을때, 늘 그녀는 혼자였다.

'내가 무슨 짓을저지른 거지?'

로제타의 앞에서 제가 보인 모습을하나씩 되짚어 보니…. 그녀가 겁먹을만도 했다.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다 한들, 그 마음을아직도 가지고있을리 없었을것이다.

창피한 마음에 패트릭은 고개를 들 수 없어졌다. 이 순간에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행동을후회하고있었다.

'창피해.'

흥분해 버렸다. 귀족답지 않은 짓이었다. 공작부인으로서의연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는데, 시녀들도있는 자리에서큰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조금만 더 그 자리에 있었다면 울어 버렸을지도모르지.'

로제타는 의기소침한 얼굴로 걷고 있었다. 그녀의 뒤에서는 시녀들이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따라오고 있었다. 위로는 해 드리고 싶지만,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런 사람이었다니!'

시녀들은 둘의 대화를 듣고 깜짝 놀랐었다. 우리 마님께 그런 폭력을 쓰고도태연히 용서를 요구하는 모습에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본인은 그저 팔을 붙잡았을 뿐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충분한 폭력이었다.

기사라 키도크고 덩치도훨씬 좋은 사내가 바짝 다가서는 것만으로도무서울 텐데, 팔에 멍이들 정도로 세게 움켜쥐다니!

'란스필드 후작가의 이름도별 볼 일 없는 모양이야.'

패트릭 란스필드는 거칠기는 해도기사답고 멋진 사람이라고 소문이나 있었는데, 다 헛것인 모양이었다.

'패트릭 란스필드라면…. 마님이결혼 전에 짝사랑하고 있다는 소문이었을 텐데.'

자신을 좋아하는 여자에게 폭력을 휘두르다니. 최악이었다.

오해로 비롯된 것이었다 한들 잘못은 잘못이었다.

따귀를 때린 사람이있고, 따귀를 맞은 사람도있는데. 아무도잘못한 사람은 없다니, 그런 비열한 말이어디 있겠는가!

'설마마님한테 잘못한 사람들이다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겠지?'

용서를 구한다면서마님을 노려보던 란스필드 경의 잘생긴 얼굴이아직도눈에 선했다. 시녀들은 공작님께서왜 그리 마님을 싸고도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못된 인간들 같으니!!'

시녀들은 패트릭 란스필드 및 몇몇에 대한 악의로 이글이글 타올랐다.

***

발길 닿는 곳이여기였다. 그라면 자신을 위로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미카엘과 로제타의 관계를 의심하는 것처럼, 로제타는 자신을 가지지 못했다.

그와 잠자리를 할 때 미카엘이느끼는 쾌락은 로제타의 것과 얼추 비슷했다. 그러니 그녀의 마음이자라났다기보다는 그의 마음이대단치 않은 것은 아닐까?

'동정심…, 이라든가.'

문 앞에 선 로제타는 선뜻 문을 열지 못하고 망설였다.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들, 그녀를 경멸하고 손가락질했던 이들이그녀를 또다시 함부로 대할 때마다 자신감이깎여 내려갔다.

타인의 손가락질을 받는다 해도자신에 대한 확고한 마음만 가지고 있다면, 마음은 다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비난을 받을 때마다, 형체가 없는 돌팔매질을 당할 때마다 몇 번이고 마음의 기둥을 다시 세워야만 했다.

로제타는 울고 싶어졌다. 또다시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이런 모든 것에서도망치려고 했는데…. 겨우 패트릭 란스필드 한 사람이었을 뿐인데도, 그녀의 마음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왜 나야?'

이유는 짐작하고 있다. 시답잖은 이유일 것이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든가, 무슨 말이거슬렸다든가…. 들어 봤자 납득도안 되는, 말도안 되는 이유일 것이다.

'네가 불행해졌으면 좋겠어, 이자벨.'

문득 미카엘이이자벨에게 건 저주가 떠올랐다. 그녀의 고통이열 배로 되돌아간다는 연결, 그 연결이있으면….

눈물을 그렁거리던 로제타의 눈에 복도에 자리 잡고 있는 서랍장이보였다. 서랍장 위에는 은으로 된 촛대가 놓여 있었다. 열 배니까 심하게 할 필요도없을 것이다.

로제타는 서랍장 위에 제 손을 올려놓고 촛대를 거꾸로 쥐었다. 그녀가 촛대의 아랫부분으로 자신의 손을 내리치려는 순간,

"마님!!"

뒤따르던 시녀들이비명을 지르고 문이쾅! 열렸다. 거센 팔이자신을 끌어안으며 촛대를 쥔 오른손을 붙잡는 것을 느꼈다.

"로제타."

창백하게 질린 미카엘의 얼굴을 보자 로제타는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이자벨에 대한 미움으로 한순간 이성을 잃었었다.

"미카엘… 님…."

순간 창피스러운 마음에 얼굴이뜨거워졌다. 미카엘은 로제타의 손에서힘이빠진 틈을 타 촛대를 빼앗아 내던졌다. 로제타를 온몸으로 끌어안고는, 시녀들은 물론 집무실에 있던 모든 자들에게 돌아가도록 손짓했다.

시녀들은 빠르게 그 자리에서벗어났다. 집무실에 있던 미카엘의 부관이며 시종들도마찬가지였다. 미카엘은 집무실이빈 것을 확인하고 로제타를 안은 채로 방으로 들어갔다.

탁.

집무실 문이닫혔으나 미카엘은 여전히 로제타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는 당황한 얼굴로 로제타의 표정을 살폈다.

"괜찮, 습니까?"

"미안해요."

로제타는 미카엘의 얼굴을 마주볼 수 없었다. 자신이너무 창피하고…. 이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들었다.

잘 참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자벨이너무 미웠다. 자신을 괴롭히던 사람들도…. 마치 자신들만이피해자인 양 용서를 '요구'하는 모습에 폭발했던 것 같았다.

"제가…. 제 잘못입니다. 그런 저주를 걸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럴 수도있다는 것을 생각했어야 했다. 로제타가 자해하려는 모습을 본 순간 머릿속이하얗게 비워지는 것 같았다. 로제타의 자해는, 스스로를 상처 입히고 싶다기보다는 이자벨을 다치게 하고 싶다는 마음일 테지만….

'너무 내 생각만 했어.'

이자벨이로제타를 죽이지 못하게 하는 좋은 방법이라 여겼다. 설사 이자벨이그 사실을 알더라도로제타를 확보하려 들 테고…. 그럼 로제타는 영영 제 곁에서떠나지 못하리라 여겼다. 이자벨에게 붙잡혀 아무것도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을 테니.

감옥으로 가기 전에 탈출할 줄은 몰랐지만, 이자벨이처형당하지 않을 거라는 것쯤은 예상하고 있었다. 무도회에서의 그 일은 거짓이었으므로.

"그 여자는 제가 죽일 겁니다. 그러니, 제발…. 그런 짓은……."

안이했다. 그런 인간이살아 숨 쉬는 동안, 로제타가 받을 고통을 생각했어야 했다.

"아니야. 미안해요. 그럴 필요 없어…. 그러지 말아요."

로제타는 울음을 터트리며 미카엘을 마주끌어안았다.

"그 여자가 너무 미워서…. 복수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알고 있습니다. 제가 너무 멍청했어요. 좀 더 당신의 기분을 생각했어야 했는데…."

욕심이앞섰다. 자신에게 관심조차 없었던 여자를 돌려세우느라고, 자신의 곁에 묶어 놓을 생각만 했다.

"아니에요. 내가…. 어리석었어."

이전과는 달랐다. 지금은 곁에 아껴 주는 사람이있다는 것을 생각했어야 했다.

그런 사람이곁에 없더라도, 스스로가 스스로를 아꼈어야 했다. 그런 여자를 백배 천배 상처 입힐 수 있더라도, 스스로를 다치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로제타, 다시는 그런 짓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미카엘은 고개를 숙여 로제타와 마주보았다. 로제타는 아직 창피한 모양인지 힐끗 미카엘을 쳐다보고는 눈을 피했다.

"약속할게요."

"그럼 됐습니다. 복수하고 싶은 게 당연한 거예요. 그 감정은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스스로를 다치게 하지는 말아 주세요. 그런 여자보다 당신이수만 배는 더 소중합니다."

"으……. 네."

"행복한 일, 기쁜 일만 생각하기로 해요. 그 여자는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이일로 인해 미카엘에게는 이자벨 카룰리아스를 죽여야 할 이유가 더 생긴 셈이었다. 어차피 황비 전하의 손아귀에서서서히 말라죽을 여자라고 생각했었지만, 로제타의 고통이길어진다면 얘기가 달랐다.

한시라도빨리 죽여 버려야겠다.

미카엘은 제 품에 안긴 로제타의 머리를 보듬으며 생각했다.

***

패트릭을 찾아다녔던 제럴드는 그가 본성에서걸어 나오는 것을 보고 이를 갈았다. 기어이저놈이로제타에게 접근했구나! 멱살을 붙잡고 닦아세우고 싶었으나, 걸어오는 패트릭의 표정이심상찮았다.

'왜….'

흡사 비 맞은 개가 꼬리를 내리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자신만만하던 눈빛과 태도는 어디다 버리고 왔는지, 처량 맞은 표정에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뭐지?'

수상쩍었으나 로제타를 만나고 왔다면 저렇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미카엘 황자를 만나고 왔나 싶으면, 그것도아닐 것 같고.

미카엘 황자를 만나도주눅 드는 법이없었던 패트릭이었다.

"자네, 무슨 일이있었나?"

제럴드가 다가와 말을 걸자 패트릭은 복잡한 표정으로 말을 삼켰다. 그는 철저하게 강한 자에게는 강하고 약자에게는 약한 이였다.

한 번도약자라 생각한 적이없었던 로제타가 약해 보였던 탓에, 패트릭의 없는 양심이쿡쿡 쑤셔 온 것이다. 모두에게 손가락질받고 괴롭힘을 당한 여자를 자신이핍박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아찔해졌다.

아이리스의 몫이었던 미카엘 황자를 빼앗았으니 의기양양해하고 있을 줄 알았던 것이다.

오늘 본 그녀는 다시 상처받지 않으려고 날을 세운 고슴도치였을 뿐이었다.

이전까지는 자신을 지킬 도리가 없어서그저 웅크리고만 있었다가…. 오늘 처음, 그에게 가시를 세운 못난 고슴도치.

"아무 일도, 없었어."

짓씹듯 내뱉으며 패트릭은 성큼성큼 제럴드의 곁을 지나쳐 갔다. 여전히 그의 가슴속에서는 기분나쁜 술렁임이있었다. 이기분은 로제타에게 처음 폭언을 퍼부을 때부터 그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이었다.

'불쏘시개로 사용하는 데도한계가 있으니 이제 그만 보내지?'

당황하여 창백해진 얼굴, 수치심을 느껴 새빨갛게 물든 뺨을 보며 패트릭은 묘한 쾌감을 느꼈었다. 그 편지는 정말 짜증스러웠으니까. 시종이가져온 접시 가득 쌓여 있는 편지를 보며, 내게 가져오지 말고 태워 버리라고 했을 때도, 여동생이그를 놀렸을 때도그러했다.

그때는 그도어렸고 철이없었다. 그를 곤란하게 만들던 로제타의 마음이귀찮고 불편하기만 했다.

그런데 지금 마음이이상하게 술렁이고 있었다. 울 것 같은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던 로제타 휘르센의 표정이잊히지가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아이리스야!'

아이리스 때문에 화를 냈고, 아이리스 때문에 그녀를 적대했다. 파티장에서우연히라도눈이마주치면 무섭게 그녀를 노려보았다. 어느 순간, 로제타는 그가 있는 방향으로는 고개도돌리지 않게 되었다.

아이리스를 추종하는 영식들이로제타에게 폭력을 쓰려 한 적도있었다.

제럴드가 나서서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그들의 눈이닿지 않는 곳에서무슨 일이있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무섭고 끔찍하다고….'

로제타에게 그는 그런 영식들과 같은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이다. 로제타와 마주친 횟수는 적을지 몰랐으나, 그의 적의는 그녀에게 똑똑히 와닿았을 테니. 그가 가진 무력이있는 만큼 두려움을 가지는 것이당연했다.

억울하고 비참한 생각이들었다. 왜 이리…, 기분이끝도없이가라앉는지 모를 일이었다.

패트릭은 도망치듯 북쪽 성으로 향했다. 왜인지 숨죽인 로제타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로제타가 잠든 것을 확인한 이후에 미카엘은 침실을 나왔다. 침실 밖에는 로제타의 시녀와 시종들이 기다리고있었다. 입단속은 이미시켜 놓았다. 아덴 공작가의 고용인들 중에 주인의 지시를 받지 않고쉽게 말을 흘릴 어리석은 이는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지?"

미카엘의 말에 시녀들은 당황한 듯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로제타의 사적인 일인지라 미카엘에게 전부 고하기 어려운 것이다.

"란스필드 경이 다녀가셨습니다."

"용서를 빌고싶으시다고요."

그저 용서를 빈다는 말을 듣고저리도 상처받을 리가 없었다. 미카엘은 자신이 기억하는 패트릭의 오만함을 떠올리고눈살을 찌푸렸다.

다만 이상한 것은 패트릭은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는 약한 이라는 것이다. 로제타에게 씌워진 혐의가 전부 거짓이라는 것이 밝혀진 지금, 패트릭이 로제타를 괴롭힌다는 것은 그의 성격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아니면 로제타가 공작부인이라는 위치에 있다고강자라고의식한 것인가?'

하지만 그가 로제타를 적대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패트릭은 미카엘을 라이벌로 의식하고경계하고있었다. 그렇다면 로제타는 라이벌인 그를 데려가 준 고마운 상대인 것이다. 또한, 그녀에게 죄지은 것이 있으니 미안하게 여겨야 마땅했다.

미카엘은 패트릭의 묘하게 거만한 태도를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로제타가 그를 용서해 주었는지 아닌지가 신경 쓰였으나 묻지 않았다.

'이대로 패트릭을 쫓아내면 로제타가 화를 낼까?'

섣불리 행동하기 어려웠다. 로제타가 패트릭에 대한 마음이 남아 있지 않다고는 생각했으나, 첫사랑에 대한 어렴풋한 동경과 호의는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시녀들은 미카엘이 더 추궁해 올까 난감해하고있었다. 공작부인께서 란스필드 경에게 위협을 당했던 일까지 미카엘의 귀에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으실 것 같았다.

미카엘 또한 더 추궁할까 말까로 망설이고있었다. 그녀들이 털어놓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으나, 로제타가 그것을 어찌 생각할까가 두려웠다.

만약 패트릭이 로제타에게 무례를 저질렀다면 미카엘은 그저 그를 집 밖에 내쫓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패트릭이 마님에게 무슨…."

미카엘 님……?

닫힌 침실 문 너머로 로제타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카엘은 그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 시녀들은 안도했다.

***

"저 여기 있습니다."

깨자마자 자신을 찾는 로제타의 모습에 행복을 느끼는 것은 비열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카엘은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킨 로제타를 발견하고침대로 올라갔다. 로제타는 응석을 부리는 것처럼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것이 기뻐서 미카엘은 로제타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췄다.

"기분은 괜찮습니까?"

"괜찮아요."

늘 하던 대로 로제타를 끌어안고미카엘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속은 어떨지 모르나 겉으로는 안정을 찾은 듯이 보였다.

거의 1년여 동안 계속된 괴롭힘이었다. 그와 결혼을 하고수도를 떠났다고해서 그고통이 한꺼번에 사라질 리는 없다.

미카엘은 로제타가 집무실 앞까지 온 걸 알았으면서도 얼른 열어 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로제타가 문을 열고저를 만나러 오는 것을 보고싶어 기다리고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기척이 이상해서 문 앞으로 다가갔었다.

만약 일찍 문을 열었다면 로제타는 촛대를 집어 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혹여 그런 생각을 했었더라도 생각만으로 그쳤을 것이다.

"란스필드 경을 만났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예…."

패트릭의 얘기가 나오자 로제타의 눈빛이 흐려졌다. 미카엘은 패트릭과 뭔가 좋지 않은 얘기가 오갔음을 직감했다.

"그가 로제타를 언짢게 했습니까? 성 밖으로 내보낼까요?"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랬다가는 오늘 패트릭에게 화를 냈던 사실이 바깥으로 새어 나갈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 해도 사람들이 패트릭 란스필드가 왜 쫓겨났는지를 의아하게 생각하겠지.

어두워지는 로제타의 표정에 미카엘은 패트릭의 얘기를 꺼낸 것을 후회했다. 묻지 말고그냥 쫓아내 버릴 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오늘."

고개를 숙인 미카엘의 앞머리가 로제타의 이마에 닿았다. 미카엘은 톡 로제타의 이마에 제 이마를 대며 속삭였다.

"저를 찾아와 주어서 기뻤습니다. 안 좋은 일이 있어서, 내 얼굴을 보고싶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어려울 때, 생각나는 사람이 자신이어서 기뻤다. 그녀의 힘이 되어 주고싶었으니까. 로제타가 넘어졌다면 가장 먼저 손을 뻗는 사람은 자신이고싶었다.

"그래도…, 돼요?"

머뭇거리는 손이 미카엘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미카엘은 그손에 입 맞추고싶다는 생각을 하며 귀를 기울였다.

"오늘처럼,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찾아가도……."

"언제라도 저는 기쁠 겁니다. 로제타라면 환영이에요."

소매가 잡히지 않은 쪽의 팔로 로제타를 꼬옥 끌어안으며 미카엘은 속삭였다. 꿀처럼 달콤한 목소리였다.

"제게 기대 준다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의지하고싶은 사람이 저였으면 좋겠어요."

로제타는 참으려고했지만 다시 눈물이 솟아났다.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울고있자니 미카엘이 다정하게 등을 두드려 주었다.

'나도 이제…, 혼자가 아니야.'

아까 그렇게 울고또 눈물이 솟아나는지, 로제타는 미카엘 품에 안겨 펑펑 울었다.

***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으나…, 로제타가 전보다 더 응석을 부리는 것 같았다. 미카엘은 행복한 기분에 젖어 한숨을 흘렸다. 이전에도 공작의 업무를 빨리 처리하기 위해 힘을 썼지만, 지금은 더 안달이 났다.

이 일을 다 끝내고거처로 돌아가면 로제타가 기쁜 얼굴로 맞이해 줄 것이다. 품에 안기는 보드랍고가냘픈 몸과 달뜬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로제타의 표정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미카엘은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

'요즘 뜸하기는 했지.'

이자벨이 탈출했다는 소식을 접하고그걸 할 수가 없었다. 로제타가 불안해할지도 모르는데, 자신의 욕심만 채우는 것은 너무 짐승 같아서….

이미짐승 같은 짓을 꽤 했다는 자각은 있지만, 아무튼 그러했다.

덕분에 그것의 연습도 흐지부지되어 버리고, 벌을 주겠다 했던 것도 뒤로 밀리고말았다. 그날은 미카엘도 로제타도 행복했고, 서로에게 한 발 더 가까워진 분위기여서 섹스가 중요치 않은 것으로 여겨졌다.

'아니, 중요해.'

성으로 패트릭 란스필드 놈이 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사이 로제타와 꽤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기에 잠자리를 하여 그것을 확인하고싶었다. 단순히 그것이 아니라 해도 로제타를 안고싶기도 하고….

솔직히 말해서 욕구불만이었다.

'요즘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도리어 손을 뻗치기가 어려워졌다. 로제타가 사랑스러운, 해맑은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데 옷을 벗길 수도 없고, 거기다 로제타는 그런 쪽으로는 살짝 눈치가 없었다.

'그래서 더 귀엽지만!'

껴안고키스해 주는 것으로 로제타는 만족한 듯 보였다. 그의 품에서 행복한 듯 잠이 드는 로제타를 보며 덮치고싶은 마음이 드는 것을 꾹꾹 참았던 것이다. 요며칠 사이 로제타에게 불안한 일이 몇 번 생겼으니까. 섹스보다는 로제타의 기분이 우선이었다.

'요즘은 잠잠해졌고….'

미르세 후작의 추문이 불거져서인지, 루긴으로 온 수도의 귀족들도 몸을 사리는 분위기였다. 함부로 접근했다가 미르세 후작 꼴이 나서는 안 되겠다고판단한 모양이었다.

어리석게도 저들은 로제타를 우습게 보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이미미카엘의 사람이고, 그의 보호를 받고있는데도.

'본보기로…, 가문 하나를 철저히 짓밟아 줘야 하나?'

로제타를 미카엘의 약점으로 파악한 눈은 틀리지 않았다. 미카엘의 약점은 로제타가 분명하니까. 그러나 그로제타를 허술하게 내버려 둘 거라 생각하는 점이 어리석었다.

누구든, 로제타를 건드리는 자는 가만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처음부터 그럴 계획이었다.

'일단 패트릭 놈부터 변방으로 보내 버릴까….'

패트릭은 처음부터 거슬렸다. 로제타의 첫사랑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죽어 마땅한데. 죽으면 죽는 대로 로제타의 마음에 오래 남을 것 같아서 죽이지 못하고있었다.

무턱대고변방에 보내면 란스필드 후작이 반발할 것이 뻔하니, 란스필드 후작 스스로 패트릭을 보내도록 일을 꾸미면 좋을 것이다.

'문제는….'

당장 보낼 수가 없다는 거였다. 성에서 쫓아내는 것쯤이야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로제타와의 소문이 있으니 구설을 불러올 수 있었다.

'아이리스 리온이 수도에 있었다면 쉬웠을 것을.'

가짜 전보를 보내어 아이리스 리온이 다쳤다고만 알리면, 패트릭은 멋대로 탈영하여 수도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것을 구실로 쫓아내 버리면 그만인데, 참 아쉽게 되었다.

'그러고보니…, 루긴으로 왔다지.'

인사드리고싶다며 카드를 보낸 것을 받았다. 새로 부임한 대신관이 인사를 하러 오는 것은 드문 일도 아니었다. 루긴은 아덴 공작령의 수도나 다름없는 도시이고, 그는 아덴 공작이었으니.

'아이리스 리온이라…. 하이에나들에게 내밀기 좋은 미끼로군.'

이자벨 카룰리아스의 수작으로 피해를 입은 것은 로제타뿐만이 아니었다. 아이리스 또한 그러했다. 로제타가 당한 것이 너무 지독해서 아이리스에 대한 것은 잊혀진 감이 있지만. 그녀가 용서한다는 편지를 써 주는 것도 재판에서 비슷한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폐하가 그편지를 보고역정을 내지 않는 한은.

미카엘은 아이리스에 대해서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은 알고있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그에게 일방적으로 호감을 품은 영애가 그녀가 처음은 아니었으니까.

다만 그녀의 추종자라는 영식들이 로제타에게 해코지를 하려 든 적이 있어서, 그녀를 내켜 하지는 않았다. 추종자들이 멋대로 저지른 짓으로 아이리스를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내버려 두었을 뿐이다.

'폐하가 보낸 기사들 중에 아이리스 리온의 추종자는 패트릭뿐이었지….'

정확히는 그기사단에 끼어들 정도의 권력과 실력을 지닌 이가 패트릭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비열한 놈들은 때가 되면 적당히 처리할 생각이었다. 로제타의 마음에 찰 정도로 싹싹 빈다면 목숨은 살려 줄 생각이 있지만…. 황제가 열어 준 무도회에서 그들이 로제타와의 거리를 벌리며 먼발치에서 수군거리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추종자랍시고, 여럿이라고비열한 짓도 서슴지 않던 자들이니, 패트릭보다도 처리하기가 수월할 것이다. 전쟁이나 마물 사냥에 선발대로 보내어 죽게 만드는 방법은 언제라도 유용했으니.

전보다 미카엘이 더 좋아졌다. 곁에 없으면 보고 싶고, 곁에 있으면 만지고 싶고 껴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웃는 모습이 좋고, 자신을쳐다보아도 좋고, 다른 곳을보고 있는 것까지도 전부 좋았다.

이제까지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수 있었을까, 싶을정도로 두근거렸다.

'이건 역시 사랑…, 이겠지?'

기회주의적이라고 욕해도 할 수 없다. 힘이 되어 주겠다는 미카엘의말에 눈물이 났으니까. 마음이 한없이 약해졌을때 파고들어 오는 걸 어쩌란 말인가!

'이제는 헤어지고 싶지 않아.'

이렇게 될까 봐 미카엘이 한없이 잘해 주는 게 두려웠던 때도 있었다. 정 들었다가 차이면 자신만 손해니까.

그렇지만 지금은 상처를 받더라도 미카엘을믿고 싶었다. 겨우 몇 개월뿐이기는 해도 한결같이 자신을생각해 준 사람이었다. 그러니…. 가족들과는 다르지 않을까?

'믿어도 될 것 같아.'

그와 비교한다면 형편없다 평가받을자신을알지만, 그렇다 해도 지레 겁을먹고 그의품에서 달아나고 싶지는 않았다. 로제타가 그저 바라만 보아도 기쁘다 말해 주는 이였다.

'받은 걸 전부 되돌려 주지는 못할 테지만, 내 나름대로는 최선을다해 사랑해 주고 싶어.'

미카엘이라면 기뻐해 줄지도 모른다. 어쩌면 언젠가는 로제타에게 싫증을내고 돌아설지도 모를 일이지만, 마음이 이미 커져 버렸다. 이제는 마음먹었다고 해서 그렇게 쉬이 마음을접을수가 없었다.

유일한 내 편이었으니까.

'미카엘도 더 나를 좋아하게 되면 좋겠는데….'

미카엘이 저를 어느 정도 좋아하는지 모르는 로제타는 순진하게도 그런 생각을했다. 미카엘이 알았다면 행복해서 어쩔 줄 몰라했을생각이었다. 사랑을나누는 동안에도 미카엘이 느끼는 것을숨기고 있다는 것도 로제타는 모르고 있었다.

다만 제가 미카엘을좋아하는 마음이 커졌으니 미카엘도 꽤 자신을좋아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했다.

'그러니까…. 확인해 볼 수 있게, 했으면 좋겠는데.'

미카엘이 자신보다 더 느껴 줬으면 좋겠다. 로제타가 정신을차리지 못하고 느끼는 광경을미카엘이 좋아하는 것처럼, 로제타도 미카엘이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요즘은 왜인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어.'

이자벨이 도망쳤다는 소식도 있고 폐하가 기사단을보내시는 둥, 어수선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로제타는 두근거리며 걸음을옮겼다. 지금 그녀는 미카엘의집무실로 가고 있었다. 아무 때나 와도 된다고 말한 건 미카엘이었고, 로제타에게는 그에게 확인해야 하는 일들이 여러 가지가 있었다.

시녀와 같이 미카엘의집무실 앞에 도착하자 문밖에 있던 시종이 공손하게 인사했다. 로제타가 공작께 여쭈라는 듯이 쳐다보자 시종이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각하, 마님께서 오셨습니다."

"로제타가?!"

한바탕 요란한 소리가 울리는 것에 로제타는 멈칫했다. 시종이 문을열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며 미카엘이 뛰어나왔다.

"로제타!"

공작으로서의위엄은 갖다 버린 모습이었으나 로제타도 그런 그가 마냥 좋았다. 로제타가 폭 안기자 미카엘의입에서 웃음이 떠나갈 줄 몰랐다.

이번에는 일을일찍 끝내느라고 열을올리고 있어서, 로제타가 온 줄도 몰랐다. 급하게 늘어놓은 일거리를 치우느라소리가 요란스러웠던 것이고.

얼른 뺨이며 입술에 키스부터 하는 미카엘에 로제타는 부끄러워졌다. 그 짧은 사이 미카엘은 일거리를 치우고 나가라고 지시를 내렸는지, 집무실에서 공작의측근들이 속속들이 일감을들고 빠져나가고 있었다.

어차피 오늘 결제 받아야 할 것은 다 끝냈고, 이후의것들에 대해 논의하던 중이었다. 측근들은 로제타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숙이고는 총총히 걸음을옮겼다.

그들은 미카엘이 로제타와 결혼한 이후로 눈에 띄게 부드러워진 터라그녀에 대한 감정이 매우 좋았다. 이전에는 공작령으로 돌아오면 없는 일까지 끄집어내어 일을벌이는 미카엘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는데, 그런 걱정이 사라졌다.

여전히 일 처리는 완벽하지만, 적절하게 필요한 일만 지시를 해 주시니 그것만으로 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우리 마님 최고! 제발 그렇게만 공작님을붙잡아 주고 계세요!'

이런 이른 퇴근은 처음이었다. 측근들은 소리 없는 기쁨의눈물을흘리며 빠르게 각자의일터로 사라졌다. 미카엘은 일을다 했지만, 그는 천재에 워낙 유능한 이였고, 측근들은 뛰어나기는 해도 천재급은 아니었으니 남은 업무가 더 있었다.

그래도 이전보다 퇴근은 빨랐지만 말이다.

미카엘은 걷는 듯 뛰면서 도망치는 측근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으며 물었다.

"내가 보고 싶어서 왔습니까?"

사실 이 말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여기서 로제타가 아니라고 한다면 미카엘은 정말 많이 실망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이 말을들은 로제타의얼굴이 발갛게 물드는 것이 아닌가! 미카엘은 따라서 얼굴이 붉어지며 로제타의대답을기다렸다.

"네에…."

기다렸던 대답이 나오자 미카엘은 시녀나 호위기사들이 곁에 있다는 것도 잊고, 로제타의입술에 진한 키스를 퍼붓고야 말았다. 입술을혀로 벌리며 정신없이 빨아들이자 로제타가 당황하는 것이 보였지만, 살포시 눈을감는 것을보고 이성이 무너지고 말았다.

"흡, 읏…."

시녀나 시종, 기사들은 점잖게 등을돌리고 있었다. 이들 중에서 점잖지 못한 것은 미카엘과로제타뿐이었다.

'너무 오래 참았어.'

미카엘은 욕정으로 흐려진 눈으로 로제타를 바라보았다. 주문이 여전히 작용하는지라끈적한 키스에 몽롱하게 풀어진 듯했다. 미카엘은 거듭 입 맞추며 한 팔로 로제타를 안고 집무실로 들어갔다.

쾅!

문이 닫힐 때까지도 누구도 따라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집무실의문이 닫히자 그들은 멋쩍은 얼굴로 서로의눈치만 보았다.

'지금은 방해해서는 안 되겠지?'

심지어 문 가까이에 서도 안 될 것 같았다. 그들은 집무실의입구가 보이는 위치의복도로 걸음을옮겼다. 괜한 장면에 얼굴은 달아오른 상태였다.

***

그러고 보니 섹스만 뜸한 게 아니라키스도 뜸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벼운 키스야 숨 쉬는 것처럼 해댔으나, 입술에 하는 요런 진한 키스는 자제하고 있었다.

'이런 건 분위기를 타야 하는 거니까….'

아무 때나 들이댔다가 미움을받으면 어쩐단 말인가! 로제타가 나 없이 살 수 없게 되어 버렸다면 모를까. 아니, 그렇게 된 이후에도 로제타가 자신을더 좋아해 주기를 바라고 있으니 자제해야 했다.

그나저나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입술이 더 달콤하게 느껴졌다. 하루 종일이라도 이렇게 있을수 있을것 같았다.

'하고 싶다.'

일하는 내내 그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막상 당사자가 나타나 버리니 자제력이 흔들렸다. 지금 해도 되나? 그래도 되는 분위기인가?

미카엘은 로제타의입술을맛보며 그녀를 집무실에 있는 옆으로 긴 소파에 눕혔다. 살짝 흐트러진 머리카락을정돈해 주며 실내용 드레스에 감싸인 몸을끌어안았다. 로제타에게서 나는, 옅은 꽃향기에 뒤섞인 그녀의살내음이 미치도록 좋았다.

내가 어떻게 참을수 있었을까? 이 향기를 느끼고도 인내할 수 있을만큼…, 그만큼 내가 로제타를 사랑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로제타의앞에만 서면 짐승이 되어 버릴 것 같은데도, 잘도 참고 있었다 싶었다.

쪼옥, 쪽….

자신의타액으로 젖은 로제타의입술을빨면서 그녀의눈을들여다보자니, 갈색의달콤한 눈동자에 부끄러움과애욕이 어렴풋이 엿보였다.

'해도 되는 건가?'

목울대가 무심코 크게 꿀렁였다. 미카엘은 키스에 집중하며 집무실 전체에 마법진을펼쳤다. 저 밖에 있는 이들에게 로제타의신음 한 조각도 양보할 수 없었으므로. 방음과방어에 관련된 마법진이었다.

"벗겨도…?"

될까요? 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했다. 손은 이미 드레스의앞섶에 와 있었다. 로제타는 그 손을잡으며 미카엘을보았다.

"저어, 일은요? 괘,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괜찮고말고! 있는 일을없애 버리고서라도 하고 싶었다. 로제타만 싫은 게 아니라면! 그러자 로제타는 살며시 눈길을내리깔았다.

"그, 그럼…. 지난번의그…."

"그?"

쉽게 떠올리지 못하는 미카엘에 로제타의얼굴이 귓불까지 푹 익었다.

"벌을…. 지금…. 바, 받는 게 좋을것 같아서……. 자꾸 미뤄지니까…."

"……."

머릿속으로 댕~, 하고 종이 울린 것 같았다. 힘겹게 이어 오던 자제력이 뚝 끊어졌다. 무슨 말을하는지 알고는 있는 걸까, 이 아가씨는!

"그렇, 군요. 벌도 먼저 받는 게 낫다고 하니까…."

꿀꺽…. 마른침이 넘어갔다. 미카엘은 제 입술을핥으며 깊은 한숨을쉬었다.

"그럼…. 옷부터 벗는 게 좋겠습니다."

***

미카엘이 손수 커튼을늘어트리는 동안, 로제타는 제 드레스를 벗고 있었다. 미카엘이 벗겨 줄 줄 알았기에 조금 부끄러웠다.

'벌이니까. 저는 옷을입고 있는 게 좋겠지요.'

집무실 한구석에 코트 걸이가 놓여 있기에 로제타는 벗어 놓은 드레스를 거기에 걸쳤다. 힐끗 미카엘을살피자니 그는 커튼을정돈하며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다, 다 벗어야 하는 거겠지?'

코르셋의끈을풀고, 패티코트며 다른 속옷도 벗었다. 잘 정돈하여 벽에 등을기대고 있는 또 다른 소파에 올려놓았다. 속옷을옷걸이에 걸기는 창피했던 것이다.

팬티마저 정돈해 놓은 후에 돌아보니 어느새 미카엘이 그녀의뒤에 와 있었다. 화들짝 놀라는 로제타를 품에 안고는 그대로 입술을부딪쳤다.

"흐읍! 읏…."

혀가 파고들어 와 끈적하게 뒤엉켜 맛보는 것에 한숨이 흘렀다. 미카엘은 로제타의유방을크게 그러쥐며 음란하게 주물렀다. 이 감촉을한동안 잊고 살아야 했다니…. 그 시간이 아까울 지경이었다.

"의자가 좋겠습니까? 아니면 소파에서? 마법으로 몸을띄우는 것이 가장 편안하겠지만…. 로제타가 불안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법이요? 앗."

의아한 듯 물어볼 찰나 몸이 조금 떠올랐다. 여전히 미카엘의팔에 안겨 있어 크게 놀라지는 않았으나 발끝이 바닥에 닿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마력으로 띄우는 겁니다. 침대보다 편안할 테니, 이렇게 할까요? 로제타를 만지기도 쉽고."

흥분했는지 미카엘의눈빛이 약간 무서웠다. 형형한 녹색 눈동자에 욕정이 가득하달까? 조금 짐승 같았다.

"너, 너무 높이 띄우는 건…."

"로제타가 무서워할 만큼 높이 띄우지는 않을겁니다."

미카엘은 끌어안고 있던 로제타의허리를 놓더니 그녀의몸을마력으로 띄웠다. 허공에 앉은 듯 엉덩이가 뜨는 것에 로제타는 놀랐다.

"앗."

"무섭습니까?"

"아, 아니요…. 괜찮은 것 같아요."

책상 의자에 앉은 것과비슷한 높이였다. 이 정도라면 무서울 것도 없다. 미카엘이 자신을떨어트릴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고.

로제타의허락이 떨어지자 미카엘은 곧바로 그녀의몸을눕혔다. 몸이 천천히 눕혀지는 것에 로제타의눈이 커졌다.

"…다리를 마법으로 결박해도 되겠습니까? 벌이니까."

셔츠의 목깃을 느슨하게 하며 미카엘이 물었다. 로제타는뺨을 물들이며 끄덕였다. 그러자 로제타의 다리가 좌우로천천히 벌어졌다.

'앗.'

각오는했으나 역시 부끄러운 일이었다. 서서히 벌렸다고는해도은밀한 곳이 훤히 드러나 보이도록 크게 다리를 벌린 자세가 되자 창피했다.

"미, 미카엘 님…."

"후후, 로제타의 귀여운 곳이 아주 잘 보이는군요. 이제…, 손가락으로그곳을 벌리시면 벌을 시작하겠습니다."

어려울까요? 하고 미카엘이 짓궂은 목소리로물었다. 로제타는망설였으나 그렇게 하면 미카엘이 좋아할 것임을 알았다. 미카엘을 기쁘게 하고 싶었다.

"너…, 너무 괴롭히시면 안 돼요."

"벌이니까 약속은 못 드리겠습니다. 그치만 로제타가 엉엉 울 만큼 기분 좋게 해 드린다고는약속드리지요."

난 몰라. 로제타는빨갛게 뺨을 물들이며 제 아래쪽으로손을 뻗었다. 미카엘의 그 말에 두근거리고 말았으니, 자신은 정말 이상해진 거였다.

'부끄러워.'

가느다란 손가락이 제 은밀한 곳의 꽃잎으로뻗어 왔다. 그것이 제 여린 살점을 벌리고 안을 드러내 보이는것에 미카엘은 숨을 삼켰다.

진분홍빛의 달콤한 점막이 부끄러운 듯 씰룩이고 있었다.

"귀여워. 로제타…, 손을 떼면 안 됩니다. 손을 떼면…, 똑같은 벌을 한 번 더 받게 할 테니까."

속삭이는목소리가 로제타의 다리 사이로가라앉았다. 집무실 바닥에 무릎걸음으로선 미카엘이 그녀의 음부에 얼굴을 묻은 것이다.

"아앗!"

부끄럽고 창피한데도미카엘이 이렇게 해 주는것이 기뻤다. '그' 미카엘이었다. 황제가 아끼는동생이자 뭇 여성들의 사랑을 받는, 고귀한 황자이자 아덴 공작. 그가 이 정도로로제타를 원하는것이다.

"하, 으음…. 읏…."

핥아 달라는듯이 거길 벌린 채로미카엘에게 봉사받고 있다니….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았지만 미카엘의 입술과 혀는기분 좋았다. 너무 좋아서 창피할 정도였다.

"아…. 싫어……. 그, 그렇게 핥으면…. 아앗!"

안쪽은 핥아 주지 않고 손가락의 주변만 미끈미끈하게 핥는데도안쪽까지 움찔움찔 떨렸다. 미카엘은 벌써 흥건하게 젖은 틈새를 보고 놀리듯이 웃었다.

"로제타, 왜 벌을 받는지는기억하고 있겠지요? 자꾸 절정을 맛봐 벌을 받게 된 것이니, 이번에도제가 허락할 때까지 가서는안 됩니다."

"하으…. 그, 런 것……. 무리…. 아흐으…!"

로제타가 고개를 젓는데도미카엘은 어림도없다는듯이 씰룩거리는속살을 핥았다. 혀로미끈미끈하게 문지르고 쪼옥 빨아들이는것에 온몸이 바르르 떨렸다.

"아앙!"

미카엘이 가지 말라고 했는데도벌써 갈 것 같았다. 미카엘은 괘씸하다는듯이 뾰족하게 솟은 꽃눈을 노려보았다.

"참으라고 했을 텐데요? 이곳을 이렇게 세우시다니…."

"히익!"

혀가 날름 꽃눈을 스치자 달콤한 관능이 척추를 스치고 지나간 듯싶었다. 로제타의 격렬한 반응에 미카엘은 그것을 아래위로굴리기 시작했다. 발끝까지 오는짜릿한 자극에 로제타는기겁했다.

"응, 응…. 아앙! 거기만…. 아흐흑!"

"다른 곳도귀여워해 드릴까요?"

덥석 꽃술째로입에 물고는갈라진 틈새로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꽃술을 쪽쪽거리며 빨아대는놀림에 기겁하자니 삽입된 손가락이 안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흐앗! 읏, 아아! 미카엘 님…. 시, 싫어…. 갈 것 같……."

"아직 안 됩니다. 벌을 받는중이잖습니까?"

가차 없이 안을 비벼대는손길에 로제타는고개를 좌우로흔들며 신음했다. 뜨거운 살덩어리가 꽃술에 감기며 감미롭게 빨아대는것만으로도녹을 것 같은데, 음탕한 손가락이 끊임없이 그녀를 즐겁게 했다.

"아, 아아아…. 그만! 아앙, 더는못 참겠어요! 아흐…. 으흐응!"

다 삼키지 못한 타액이 흐르고 크게 벌어진 두 다리가 움찔움찔했다. 미카엘의 달콤한 희롱을 피해 달아나고 싶었지만, 이렇게 몸이 띄워진 상태로는어디로든 달아날 수 없었다.

쪼옥!

부드럽게 꽃눈을 빨린 것만으로도로제타는도달해 버리고 말았다. 활처럼 몸을 휘며 절정을 맛보는로제타의 모습에 미카엘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내벽이 씰룩거리며 그의 손가락을 조이는감촉만으로도그도느껴 버릴 것 같았다.

"아직 허락하지 않았는데, 느꼈군요. 이 사랑스럽고 음탕한 아가씨를 어떻게 하나…."

"하아…. 하아……."

로제타는축 늘어진 채로숨을 헐떡였다. 부끄러웠지만 기분 좋았다. 심지어 미카엘은 후희를 즐기는로제타의 갈라진 틈새로혀를 밀어 넣어 부드러운 속살을 빨면서 저 말을 속삭인 거였다.

죽을 듯이 부끄러운 감정에 휩싸인 채로로제타는할 말을 잃었다.

"손도…, 떼면 안 된다고 했는데, 떼 버렸고."

퍼뜩 정신을 차린 로제타가 당황했으나 미카엘은 심술궂게 웃을 뿐이었다. 말할 때마다 속살을 헤집는혀끝에 로제타의 음부가 움찔움찔 떨렸다.

"아, 아앙…. 숨결이…."

"응? 내가 핥아 주는것보다 숨결이 좋습니까? 이렇게?"

"아앗, 아아아앗! 아앙…. 그런 거 아니……. 아흐흑!"

후욱 꽃눈에 숨을 불어넣고는혀를 깊숙이 넣어 키스하듯 속살을 빨아댔다. 로제타는자극에 발끝까지 움찔거리며 느꼈다. 두툼하고 뜨거운 혀가 민감한 점막을 마구 범하는느낌에 거기가 녹아 버릴 것 같았다.

"아, 아앗!"

또다시 절정을 맛보는로제타에 미카엘은 진짜로벌을 줄 생각인지, 본격적으로빨아대기 시작했다. 혀끝을 구부려 질벽을 긁어내리는놀림에 로제타는기겁했다.

"하으으…. 아앗! 아앙, 미카엘 님……. 아아앗!"

"계속 도달하면…, 멈추지 않을 테니까요. 로제타…. 내 입술이 기분 좋다면 하루 종일이라도빨아 줄게요."

안 돼…. 어렴풋하게 생각했지만 이어지는혀놀림에 생각이 달아나 버렸다. 진짜로정신을 잃고 흐느낄 때까지 계속되는달콤한 벌에, 로제타는단단히 혼쭐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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