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재판과 형벌
'이건 안 괜찮아!'
일찍 잠자리에 들어새벽까지 미카엘에게 안겼는데도 한 번을성공하지 못했다. 덕분에 로제타를 마음껏 안은 미카엘은 그저 행복하기만 한 모양이었다. 아침부터 로제타의 뺨에 쪽쪽거리며 제 행복한 기분을발산하고 있었다.
그런 미카엘이얄미운 것은 아닌데, 앞으로를 생각하니 이거 괜찮을까 싶었다.
'주문을풀려고 한 거였는데…. 실컷 즐기기만 했어!'
흡사 공부를 하려고 책을폈는데, 실컷 잠만 잔 것과 비슷한 기분이이것일 것이다. 죽어있는 수면제, 교과서!
간밤에 기분은 좋았지만, 어쩐지 자신이한심한 기분이드는 로제타였다.
"오늘 밤에도 또 할까요? 로제타가 원한다면 저는 낮에도 상관없습니다."
로제타가 느끼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이꽤 마음에 들었는지, 미카엘이입가에 웃음이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얄미워!'
어제는 얄밉지 않았는데, 오늘은 얄미웠다!
그 기분을한껏 담아 미카엘의 뺨을꼬집었으나 미카엘은 배시시 웃으며 좋아할 뿐이었다. 꼬집히는 것도 좋냐! 더 꼬집어주겠다는 생각에 손에 힘을주었으나, 상대는 미카엘이었다.
자신에게 헌신적인 사람을얄밉다는 이유로 괴롭히기가 뭐했다. 결국 손을떼자미카엘은 그 손가락도 사랑스럽다는 듯이입 맞춰 왔다.
'…참 예쁘네.'
반짝이는 금발과 야살스럽게 접힌 눈꼬리가 사랑스러웠다. 지금의 미카엘은 처음 그가 얼굴을 보였을 때보다도 더 반짝반짝 빛이나고 있었다.
로제타와의 시간이행복하여 얼굴에서광채가 나는 것이다. 로제타는 여기까지는 모르고, 자신이미카엘을 좋아하게 되어 그가 더 잘생기게 보이는 줄 알았다.
미카엘의 녹색 눈동자와 눈이마주치자 그가 웃었다. 행복한'듯'이아니라 진짜로 행복한모습이었다.
자신으로 인해 누군가 이리도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이상하게 울렁거렸다. 기쁜 것 같기도 하고, 행복한것 같기도 한이상한기분.
'여기서더 좋아지면 안 되는데….'
이미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느끼고 있었다. 이이상 미카엘을 좋아하게 되어 더 느끼게 되면…, 주문을 푸는 것이불가능해질 것이다.
'최소한더 좋아지는 것을 미루기라도 해야 할 텐데.'
그게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
행복을 구가하고 있는 미카엘과는 달리 아덴 공작령의 관문에서는 한무리의 귀족들이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그들이관문에 도착한것은 어제 오후.
오후라고는 해도 점심 식사 시간을 한참 넘긴 3~4시 무렵이었다.
필요한서류와 신분패까지 보였음에도, 병사들은 그들을 얼른 보내지 않고 맥락 없이시간을 끌었다. 확인해야 할 것이있다며, 책임자를 불러야 한다며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때가 되자 시간이끝났다며 냉큼 문을 닫아 버렸다.
귀족가의 하인들은 제 주인을 마차에서주무시게 할 수 없어 가까운 마을로 다시 되돌아가야만 했다. 거기서하룻밤을 보내고 다시 들른 그들은 이번에는 이른 아침에 관문에 도착했다.
'이건 미카엘 황자가 손을 쓴 것이아닌가?'
모여 있는 귀족들은 그렇게 판단하고 있었다. 죄인이있는 가문만 가서는 문전 박대당할 것이뻔해, 친인척까지 동원하여 온 그들이었다.
다시 신분증을 내밀자, 이번에는 불온한가문을 제외한나머지 가문들만 통과시켰다. 그러고는 또다시 기다려 달라는 말만이되풀이되었다.
그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으나, 여기서난장을 피우면 그 사실이미카엘 황자의 귀에 들어갈 것이분명했다.
병사들은 시간을 끌고 또 끌다가 관문이닫힐 즈음에서야 그들을 들여보내 주었다. 그들이귀족이기는 하니 관문 앞에서또 붙잡아 세워 둘 수는 없다고 판단한듯싶었다.
겨우 관문을 통과한그들은 가까운 마을로 향했다. 이미 날이어두워져서더 이상의 이동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마차에 앉아서기다리기만 하는 시간이었지만, 언제 통과시켜 줄지 알 수 없었던지라 진은 빠질 대로 빠진 상태였다.
'내가 왜! 나는 협박받아서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인데!'
덜컹거리는 마차에 앉은 영애는 침울한얼굴로 맞은편에 앉은 부친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의 가문은 그나마 황실에 연이있어서귀띔을 받았다.
관리의 말에 따르면 이일이폐하와 황비 전하의 심기를 매우 어지럽혀, 피해자의 용서를 받지 않으면 중형이선고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만만해 보이는 휘르센 백작부인이나 그 아들에게 사인을 받으려 했으나 그 정도로는 감형이안 될 거라 경고했다.
제1피해자인 아덴 공작부인의 용서가 있어야 할 것이라는 거였다.
겉으로 보아 피해자는 성녀인 아이리스 리온이었지만, 그녀의 피해는 무도회나 다과회 등 모임에 참석했을 때 옷을 버리거나 골절 이하의 부상을 입은 것이었다.
평판은 모든 귀족, 특히나 젊은 영애에게는 치명적인 문제였으므로, 재판부나 황실에서는 로제타를 제1피해자로 보았다.
이자벨 카룰리아스가 다른 해에 같은 방식으로 괴롭혔던영애의 경우, 악녀라는 오명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으니…. 죄질이나쁜 흉악한범죄로 분류된 것이다.
"이게 무슨 꼴이냐!"
부친은 관문을 통과하자 겨우 분통을 터트리며 딸을 노려보았다. 자식이셋 있는 중에, 그것도 귀여워만 해 주었던막내딸이었다.
황실의 눈 밖에 나고, 사교계에서도 망신을 떨친지라 형을 살든 말든 모른 척하고 싶었으나…. 결혼한지 얼마 안 되는 아들의 앞날이걱정스러워 이렇게 나선 것이었다.
"……."
영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채로 고개를 숙였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무슨 말을 해도 호통만이돌아올 것임을 알고 있어서였다.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그녀의 비밀은 터졌다가는 사교계에 두고두고 오르내리며 망신을 살 만한것이었다. 그래서절대 그 비밀이새어 나가게 할 수 없었던걸, 어쩌겠는가!
그녀도 처음 편지를 받고 시도했을 때는 무서웠다. 다음 편지도, 그다음 편지에도 무섭기는 했으나, 무섭기만 했던것은 아니었다.
누구에게도 욕을 먹지 않고 사람을 괴롭힐 수 있다는 것은 은근히 기분이좋았다. 힘을 가진 것 같은 생각이들었다. 너도 내게 잘못 보이면 이렇게 될 수 있다 과시하고 싶다는 생각마저 한적이있었다.
절대 말할 수 없었지만.
그녀들은 자신들끼리의 연대를 만들어, 다음 편지는 언제 날아올지 기대하기도 했었다. 이일이언젠가 들킬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렇잖은가.
지척에 있던세, 네 명의 목격자가 모두 한사람을 가리키는데, 그들이진범과 한통속일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할 거였다.
거기다 그들의 범행이라고는 드레스에 잉크를 뿌리거나, 정원 풀숲으로 밀치거나, 신발을 망가트리는 등의 하찮은 것들뿐이었다.
범죄가 되지 못한장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이런 장난으로 형을 사네 마네, 전과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들을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너무해! 이건 너무한일이라고!'
영애는 울상이되어 부친의 눈치를 보았으나 그는 짜증스레 눈을 부라릴 뿐이었다. 이번에는 거짓 울음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영애의 눈에 눈물이고였다.
그녀는 로제타 휘르센이얄미웠고, 이자벨 카룰리아스는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미웠다.
***
'설마 진짜로 저질러 버릴 줄이야!'
영애들은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자벨에게서마지막이될 협박 편지를 받고 곧장 황비의 측근을 찾아갔었다. 편지를 보고 한참 후에 그들에게 돌아온 얘기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편지에 쓰인 대로 해도 좋다는 얘기였다.
단, 피해자 역은 로제타 아덴으로 바꾸고, 가해자는 이자벨 카룰리아스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제 황족이된 아덴 공작부인을 습격하는 일에 가담하라니!
지나치게 위험한일이었다. 그래서그들은 거절하고 싶었으나, 황비의 측근이무섭게 그들을 얼렀다. 황실에서요구한대로 한다면, 그들은 혀에 낙인을 찍는 형벌에서는 제외시켜 줄 수 있다고도 했다.
그들은 겁에 질렸으나 결국 그 명에 따르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거부한것은 아덴 공작부인을 실질적으로 공격해야 하는 헬렌 라로쉬였다.
그녀는 따로 황궁에 남아서얘기를 듣고 난 이후에 생각을 바꿨다.
그들은 라로쉬 영애가 할 거라 대답했음에도 반신반의했다. 무도회 당일, 정말로 일이벌어지자 늘 하던대로 움직였으나…. 바닥에 쓰러져 있는 아덴 공작부인을 보고 놀랐다.
아덴 공작부인에게는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음이분명했다. 미카엘 황자도 이를 모를 것이라 여겼다.
알면 그것을 허락할 리 없으니.
그들은 황비와 황실의 잔혹함에 혀를 내둘렀다. 그러며 자신들을 뒤에서조종했던이자벨을 고발하는 데 묘한쾌감을 느꼈다.
이자벨이황궁의 감옥으로 끌려가자 그들은 겨우 안도할 수 있었다. 아덴 공작부인이그렇게 된 것은 무서웠으나 실질적으로 손을 쓴 것은 라로쉬 영애였다.
그들이아니라.
"우리, 이정도면 굉장히 큰 활약을 한거 아니야?"
한영애의 제의로 그들은 키가 낮은 관목으로 이루어진 정원 한가운데에 의자와 테이블을 놓고 티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비밀이많았기에, 누군가 엿들을 것을 늘 염려했다.
이렇게 시야가 탁 트인 정원에서는 차라리 말소리가 새어 나갈 걱정이덜했다. 접근하는 이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게 말야. 누구 때문에 카룰리아스 공녀를 잡을 수 있었는데. 설마 우리까지 고발하는 건 아니겠지?"
세간에서는 이자벨 카룰리아스를 욕하느라 정신이없었다. 많은 영애들이양심선언을 하며 제 죄상을 까발렸지만 그녀들은 거기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들이생각하기로 이자벨의 무도회 사건에 증인이되었으니, 자신들이양심선언을 하면 오히려 황실이곤란해지지 않을까 여겼다.
문제는 그들이로제타에게 누명을 씌운 횟수가 많은 베테랑들이라는 거였다. 이자벨이왜 무도회 때 그들을 꼽아서지시를 내렸겠는가?
그만큼의 경험이쌓일 만큼 로제타를 괴롭혔기 때문이었다.
이미 여러 영애들이같이작전을 벌인 이로 그들을 몇 번이나 지목했기에, 영애들은 몹시 불안해졌다.
"실은…, 수사관들이찾아와서이전 일을 물어보기는 했어요. 일단 아니라고 부인하기는 했는데, 다시 찾아온다고 해서."
"아니, 우리한테 왜? 황비 전하께서수사관들에게 아무 말씀도 없으셨단 거야?"
"일 처리가 늦은 건지도 모르지요."
영애 중 하나가 분통이터진다는 듯이벌떡 일어났다.
"일 처리가 늦긴요! 지금 수도에서이사건만큼 관심이쏠리고 있는 사건이없는데! 카룰리아스 공녀만 봐도 구류 후, 일주일 뒤에 재판에 회부된다고 하잖아요!"
역시 자신들 또한벌을 받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그들 사이로 퍼져 나갔다. 이미 그들은 황실의 뜻대로 따르면 낙인을 찍는 것만은 면해 주겠다는 확답을 받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어요!"
"없으면요?"
"그럼 이대로 있다가 다른 죄인들처럼 감옥에 가겠다고요? 우린 그저 장난 몇 개 친 것뿐이잖아요!"
그녀의 그 말은 다른 영애들의 생각을 대변한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동조하는 영애들의 눈빛에 자신을 얻어 그녀는 신중한어조로 말했다.
"물론 우리가 한짓을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씌운 건 인정하지만…, 그것도 협박을 받아 어쩔 수 없었던일이잖아요! 우리도 피해자라고요!"
"맞아! 우린 피해자예요!"
진정한'피해자'였다면, 그들은 로제타에게 미안한마음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할 테지만…. 여기 있는 자들은 젊은 영애들이모이는 자리에서로제타를 욕했던이들이었다.
진범이누구인지 뻔히 알면서로제타를 흉보고 낄낄거리고, 그들끼리 모인 자리에서는 로제타를 비웃었었다.
협박을 당했다 하더라도 참여하지 않는 쪽을 택한이도 많았다.
딱 한번 참여하기는 했으나 로제타를 보는 것이미안해서, 사교계가 무서워져서낙향해 버린 영애도 있었다.
그들은 그런 영애들을 겁쟁이라 비웃었었다. 자신들을 사교계의 숨은 지배자라 여기며, 뒤로 아이리스와 로제타를 조롱했던것이그들이었다.
"가요, 여러분.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당할 수는 없어요!"
"황비 전하께 따지자고요?"
영애들 한둘이내키지 않는다는 듯이눈을 피했다. 무도회 사건은 마지막이고, 확실히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인지 이자벨이꽤 많은 영애들을 동원했었다.
헬렌 라로쉬까지 포함하여 동원된 영애가 모두 아홉이나 되었다.
"그래야죠! 필요하면…. 우리가 진짜 사실을 털어놓을 거라는 말을 해서라도 압박해야 해요!"
"하지만그러면…."
그들은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이 자리에 헬렌 라로쉬는없었다. 실제 로제타를 해친 것은그녀였기에 그녀는일부러 부르지 않았다.
그녀가 무섭기도 했지만…, 이런 논의가 오갈 것 같아서였다.
"라로쉬 영애가 곤란해지지 않을까요? 미카엘 황자가 고발이라도 하면…. 그녀는큰일을 겪을 텐데요?"
"그녀 하나를 위해 우리 모두가 희생할 수는없죠. 여기 있는사람들 중에, 감옥에 갈 만한 죄를 지은사람은아무도 없다고요! 우리는우리 권리를 주장해야 해요!"
단호한 목소리에 영애들의 눈빛에 오만한 기색이 실렸다. 이제까지는황실에 약점을 잡혀 휘둘렸지만, 이번에는황실의 약점을 잡은기분이었다.
여론이 돌아선 것은카룰리아스 공녀가 로제타를 상처 입혔기 때문이니, 그녀가 누명을 썼다고 알려지면 여론도 돌아설 것이 분명했다.
***
"아하? 그래서 그 일이 알려지면 라로쉬 영애만처벌을 받을 거라 생각해서 이러는거로군요?"
자신만만하게 나섰던 영애들의 얼굴에서 힘이 빠지는것은순식간이었다. 상급 관리이자 황비의 측근이기도 한 레베카는철없는어린아이를 보는듯한 눈으로 그들을 보았다.
"직접 손을 쓴 것은라로쉬 영애지만, 만약 사실이 밝혀져 벌을 받을 때는여러분 모두 동등한 벌을 받게 될 겁니다. 한패잖아요?"
한패라는뉘앙스에 조롱기가 담겨 있었으나 영애들은알아듣지도 못했다. 그녀들은새하얗게 질려 각자 변명과 항의의 말을 내뱉었다.
여덟 명인데도 각자 떠들어대니 교실이 따로 없었다.
레베카는팔짱을 낀 채로 그들이 입을 다물 때까지 기다렸다. 이 작전이 내려왔을 때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예측했다.
차갑게 지켜보는눈을 의식한 듯 그들이 이윽고 입을 다물었다. 레베카는책상에 걸터앉은채로 천천히 말을 꺼냈다.
"영애들께서 그것이 진실이라 하신다면 저로서는말릴 마음이 없습니다. 다만, 이것만알아주십시오."
레베카는관리적인 태도를 가감 없이 드러내며 말했다.
"황실의 명을 따라 아덴 공작부인을 해친 것이라 주장하신다 해도…. 저는그런 명을 내린 적이 없다 부인할 것이며, 영애들께서는황족 시해로 처벌을 받게 되실 거라는걸 말입니다."
"부, 부인해도! 여론이 당신을 내버려 둘 것 같아?!"
"사람들이 가만있지 않을 거라고!"
그 와중에도 황비를 입에 올리지 못한 것은그녀가 두렵기 때문이었다. 레베카는그런 그들을 어리석다는듯이 보았다.
"뭔가 착각하시는군요. 아덴 공작부인이 악녀 오명을 벗은것은그녀가 오점이 없는피해자였기 때문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빙의는로제타가 악행을 저지르기 전에 되었다. 그러니 로제타에게 흠잡을 거리는없는셈이었다.
"아덴 공작부인께서는무리를 지어 성녀를 핍박하지도, 무고한 이에게 누명을 씌우신 일도 없으십니다. 영애들과는다르지요."
누가 영애들 말을 믿어 주겠습니까?
마지막으로 더해진 레베카의 말에 영애들은창백해졌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누구도 자신들의 말을 믿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가족들조차 로제타의 말을 믿어 주지 않았던 것처럼.
"하, 하지만우리가 기소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길 거야! 무도회 사건의 증인들이니까!"
레베카는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영애들이 아덴 공작부인을 질투해서 편지 내용을 바꾼 것은아니고요?"
누가 피해자가 되고, 누가 가해자가 되는지는딱 한 장의 편지에만쓰여 있었다. 위조가 가능하다는얘기였다.
당황하는영애들에게 레베카가 말했다.
"아시겠지만…. 영애들이 황족 살인미수로 붙잡힌다면 최소한 사형을 당할 겁니다. 그것도 고문당하다 말이죠. 카룰리아스 공녀가 재판까지 갈 수 있는건, 그녀가 공작가의 핏줄이기 때문입니다."
이자벨 카룰리아스는뒤를 잡힐 만한 가문의 영애를 자신의 희생자 목록에 넣지 않았다. 여기에 모인 이들 중에 황실과 인척 관계를 맺은이는아무도 없었다.
빳빳하게 세웠던 목에서 힘이 풀리고, 힘이 들어갔던 눈빛도 사그라들었다.
사실을 세상에 공표해 봤자 황실은약간의 타격을 입을 뿐이지만, 그들은끔찍한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돌아가시지요, 영애들. 카룰리아스 공녀님의 재판이 끝나면…. 폐하께서는그리 오래 기다려 주시지 않을 겁니다."
황제는그들 스물일곱 가문에 책임을 물을 것이다. 영애들의 겁먹은시선이 서로를 향했다.
***
사건의 진상을 아는이는몇몇뿐이었다. 막상 일을 벌인 영애들 중에서도 오직 헬렌 라로쉬 영애만이 사실을 안다.
상처 입은척했던 것은실은아덴 공작부인이 아닌 마법사였다는걸. 상처 또한 마법으로 만들어 낸 환상이고, 피는전부 돼지 피와 소 피에 약품을 섞은것이었다.
'저는처음부터…. 언젠가 이 사실이 들통나면 죗값을 달게 받을 작정이었습니다.'
죄상이 드러나면, 그녀의 비밀 또한 세상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라로쉬 백작이 그녀의 남편과 아들을 살려 둘 이유가 사라진 셈이었으므로, 헬렌 라로쉬는죽음으로 죄를 갚을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헬렌의 남편은실종자로 경비대의 명부에 이름을 올린 자이기도 했다. 라로쉬 백작이 그들을 납치한 것 자체가 범죄였으므로, 그들을 구해 내는것은당연한 일이었다.
'저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것을 압니다. 저는한 무고한 영애의 인생을 망치고 있던, 비열한 사기꾼이었으니까요. 하나 제 남편과 아들을 구해 주셨으니…. 뭐든 명하시는대로 할 것입니다.'
헬렌 라로쉬는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 전직 기사였던 그녀는몇 개월 감옥에서 보내는것 정도는자신의 죄에 비해 가벼운 형벌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설사 혀에 낙인을 찍히는형벌을 받았어도 그러했을 것이다.
반면 저 영애들은황족 살인미수의 죄가 무거워 입을 다물겠지. 아덴 공작부인이 진짜로 상처 입은줄로만알고 있을 테니, 로제타나 미카엘에게도 헛소리를 하지 못할 것이다.
모든 것이 황제와 황비, 아덴 공작이 계산한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레베카는이들 중에서 가장 큰 공헌을 한 이가 아덴 공작일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런 분이 연모하시는분을 건드리다니…. 간도 크지.'
레베카는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
이자벨의 재판일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미카엘은로제타와 보내는시간이 행복해서 너무 오래 미루었다는생각을 했다. 무도회장의 사건과 이자벨이 붙잡혔다는말을 해야 했다.
그러나 아직은어떻게 하는것이 로제타를 위한 것인지 모르겠다는생각이 들었다.
재판에 참석해서 이자벨이 심판받는것을 지켜보는것과, 모르는채로 일이 다 끝난 후에 사실을 알게 되는것.
미카엘 본인이었다면 당연히 전자를 택했을 것이다. 그는복수할 힘이 있으니 자신의 적을 용서 없이 해치울 자신이 있었다. 로제타는….
'그녀는상냥한 사람이지.'
물론 그 상냥하다는말이 착하다는것을 의미하는바는아니었다. 미카엘은무조건 로제타의 일이라고 해서 색안경을 끼고 보지는않았다. 그는비교적 정확하게 로제타를 알았다.
그녀의 상냥함은제 곁의 한정된 이에게만향하는것이었다.
선량한 부분이 있으나, 어느 때고 그럴 수 있는심지 곧은선량함은아니었다. 흔들리기도 많이 흔들린다.
그러나 그녀는제 행동을 평가하고 비교적 냉정하게 파악할 수 있는이였다. 또한 누군가 지켜보지 않는순간이나, 자신의 이익과 관계된 것임에도 옳은것이 아니면…, 오랜 갈등 후에 외면할 줄도 알았다.
선량하고 상냥하고…, 제 사람에게는한없이 부드러운 구석이 있는사람이었다.
그래서 미카엘은지금 이 순간이 싫었다.
많은이가 그녀에게 선량함과 상냥함을 강요하게 될 순간이기에.
재판에 대해서 알려 준다면, 더는로제타에게 비밀로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 로제타에게 용서를 구할 이들로부터 로제타를 완전히 떼어 놓는것이 불가능해지는것이다.
로제타가 그들을 만나고 싶어 할지도 모르니까.
'그래도 말해야겠지.'
시녀와 같이 온실에서 꽃을 따 온 로제타가 방으로 들어왔다. 꽃바구니를 시녀에게 맡기고 미카엘의 앞으로 다가왔다.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미카엘은자신이 근심스러운 얼굴이었음을 깨닫고 뺨을 매만졌다.
"무슨 일이에요?"
안색을 살피는시선까지도 사랑스러운 것을 그녀는알까?
미카엘은표정을 누그러트리며 로제타의 손을 잡았다. 앉아 있던 소파의 옆자리로 이끌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로제타에게 숨기고 있던 것이 있어요. 실은…."
이어지는미카엘의 고백에 로제타의 눈이 커졌다.
***
"이자벨…, 아니 카룰리아스 공녀가 자백했다고요? 진짜예요?"
무도회에서의 사건에서부터 이자벨이 자백을 하고, 궁지에 몰린 영애들이 양심선언을 한 것까지 모두 털어놓았다. 로제타에게 용서를 빌겠다는목적으로 가해자 가문의 사람들이 공작령의 관문을 넘었다는것까지도.
"그렇습니다. 일찍 털어놨어야 하는데…. 로제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서."
"그래서…."
가족들이 이상한 반응을 보였던 거구나! 내가 무죄란 것을 알아서!
로제타는놀라우면서도 기뻤다. 이제까지 모두가 자신을 악녀라고 손가락질하는상황이었는데 왜 아니 기쁘겠는가!
'이자벨이 잡혔다면….'
난 안전해진 거야! 목숨 건졌다!!! 살았다!!
"와…. 우와아아아아아!!"
저도 모르게 환호성을 울리는로제타의 모습에 미카엘은깜짝 놀랐다. 로제타가 좋아할 줄은알았지만, 이 정도로 좋아할 줄은몰랐다.
시녀들도 움찔하며 로제타를 보았다가, 미카엘과 눈이 마주치고는서둘러 응접실을 나갔다.
"그렇게 좋습니까?"
"당연히 좋죠! 레스토랑에 갔을 때, 영애께는드릴 수 있는자리가 없습니다, 라든가. 저희 카페에서는영애와 같은분께는차를 드릴 수 없습니다…, 라는소리를 더는듣지 않게 된 거잖아요!"
"그런 일까지 있었습니까?"
미카엘의 서늘한 눈빛이 어느 레스토랑이고 카페인지 물으려는것 같았다. 로제타는배시시 웃으며 와락 미카엘의 품에 달려들었다. 미카엘은로제타를 끌어안았으나 언짢은기색을 지우지는못했다.
"괜찮지는 않지만! 밝혀졌으니까, 다시 그곳으로 가서 복수할 거예요! 본인들도 양심이 있으면날 근사하게 대접해 주겠죠!"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음울한 목소리로 뇌까리는 미카엘에 로제타는 피식피식 웃었다. 그녀는 미카엘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어리광을 부리듯 그를 쳐다보았다.
"미카엘 님이 있으니까 뭐든 부족하지 않아요. 당신이 내가 무고한 걸 알아줬으니까, 그러니까…. 으…."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것에 미카엘은 로제타의 이마에 부드러운 키스를 떨어트렸다. 로제타는 울면서 미카엘의 키스를 받은 이마를 문질렀다.
"미카엘 님이 이렇게 응석을 받아 주시면눈물을 참을 수가 없잖아요."
"제 곁이니까 울어도 되는 겁니다. 저야말로 완전한 당신의 편이 아닙니까? 제 품 안에서는 얼마든지 울어도 됩니다. 제가 지켜 드릴 테니까요…."
"으…."
그 말에 참으려 했던 눈물이 다시 터져 나왔다. 무려 1년 넘게 계속되었던 괴롭힘이었다. 가문의 위세를 휘두를 수 있을 만큼 대단한 가문이었다면, 사람들도 그렇게 손가락질 못 했을 것이다. 그저 저 영애의 기행이 또 이어지는구나, 했겠지.
로제타 휘르센이 여러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받았던 것은 그런 여러 가지 요인이 한꺼번에 작용해서였다.
한참 눈물을 쏟고 나니 한바탕 휘몰아치던 감정이 잦아들었다. 미카엘은 그때까지 로제타를 끌어안은 채로 가만가만히 다독여 주고 있었다.
"…이제 진정이 되었습니까?"
"훌쩍, 네…."
미카엘은 손수건을 집어 주고는 로제타의 눈가를 입술로 문질렀다. 로제타는 잠시 미카엘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코를 팽 풀었다. 그것을 보고 미카엘이 피식피식 웃었다.
"왜요?"
"아니요. 제가 로제타를 상당히 좋아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예?"
어리둥절한 얼굴로 보자미카엘이 말을 이었다.
"방금 코 푸는 것도 귀엽게 보였거든요."
"뭐예요."
민망해진 로제타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미카엘은 그런 로제타의 눈가를 살피며 말했다.
"내일이 공녀의 재판일입니다. 참석하고 싶으십니까?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우시다면참석하지 않고 통신용 수정구로 재판을 지켜볼 수도 있습니다."
마법사인 미카엘은 수정구의 영상을 커다란 화면으로 띄워서 불편하지 않게 해 주겠다고까지 했다. 로제타는 고민했다.
'다시 수도까지 가는 건 부담스러운데….'
이제 무죄가 밝혀졌으니 자신을 손가락질하던 사람들에게 사과받고 싶기는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동정하는 눈으로 바라볼 사람들이 싫기도 했다.
어느 때든 동정받는 처지에 놓인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그보다 끔찍한 일은 질시받는 처지에 놓이는 것이었지만.
"수도로 가고 싶지 않아요."
"그럼 수정구로 재판 상황을 보시겠습니까?"
"……."
있었던 일을 되짚고, 변론하는 이자벨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로제타는 그녀가 벌을 받는 것을 보고 싶은 거지, 자기 위안이나 파렴치한 변명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로제타는 이자벨을 과거로 만들고 싶었다.
순간순간 떠오를 때마다 아프기는 하겠지만, 결국 잊을 수 있는 과거로.
그래도 가해자인 그들이 어차피 지나간 일이지 않느냐고 말한다면화가 날 것이다. 당해 보지 않은 이들이 전부 잊고 편해지라고 말한대도 분노할 것 같다.
가해자를 과거로 만들되, 그들의 죄는 과거가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저는 이자벨을 과거로 만들고 싶지만, 이자벨은 저나 다른 사람에게 한 짓을 평생 지고 살았으면좋겠어요. 그럴 수 있을까요?"
"그렇게 될 겁니다."
그보다는 아네트의 눈 밖에 났으니 어떤 식으로든 죽을 거라 보는 게 맞지만, 로제타에게는 알려 주지 않았다. 말했다가 아네트를 무서워하게 되면안 되니까.
그리고 미카엘 또한 이자벨은 죽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다.
아직 증거를 손에 넣지는 못했으나, 아무래도 그녀가 리디아의 죽음부터 이번마물의 습격까지 관여했을 거라는 정황이 보였다.
'되지 않더라도, 그렇게 되게 만들어야지요. 제 부인께서 원하시는 일인데….'
미카엘은 그렇게 생각하며 로제타의 젖은 눈가에 키스했다.
***
재판 당일이 되었다. 이자벨은 재판을 기다리는 내내황제나 황비는커녕 로제타도 자신을 면회 오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마치 자신이 하잘것없는 존재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장기간의 수감이 결정되자그들은 드디어 이자벨에게 목욕을 허용했으며, 새로운 의복도 제공했다. 빳빳하고 거친 천으로 만든 색이 없는 드레스였다.
처음에는 진득한 죽만 주더니, 이제는 빵과 수프를 주기 시작했다. 그래 봤자죄수에게 주는 하잘것없는 음식이었으나 이자벨은 그것을 먹었다.
먹으면서도 내내복수만을 생각했다. 자신이 받은 굴욕을 하나하나 기억했다가 모두 되갚아 줄 작정이었다.
이렇게 감옥에 갇힌 것, 며칠이나 씻지 못하고 방치된 것, 감히 신분이 낮은 관리가 자신을 심문한 것이며, 침대 하나 없는 시설에 감금된 것과 이런 음식을 먹게 된 것 등…. 나열하기에도 지칠 만큼 쌓였다.
이자벨은 결코 그것들을 잊지 않았다. 고통은 분노가 되고, 분노는 곧 싸울 의지를 심어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재판 시간이 가까워지자황실은 이자벨에게 면회를 허용했다. 여동생이 전속 시녀를 데리고 나타난 것에 이자벨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왜 왔니?"
"왜 왔냐니! 언니가 무슨 짓을 한 줄 알아?! 무슨 짓을 한 줄 아냐고!! 아버지는…."
이자벨의 여동생은 말을 잇지 못한 채로 오열했다. 그녀의 시녀까지도 눈물을 글썽였으나 이자벨은 울지 않았다. 동생의 나약함이 지긋지긋하다는 표정만을 지었을 뿐이다.
여동생이 가져온 것은 재판을 위한 의복이었다. 장식을 최소한도로 줄인 까만 드레스. 마치 장례식을 마치고 온 귀부인이 문상객들을 맞이할 때입는 것 같은 옷이었다.
이자벨은 마뜩잖았으나 그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색에 어울리는 붉은 드레스를 입고 싶었다.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으로. 그것이야말로 싸우러 가는 여인에게 어울리는 복장이라 생각했다.
면회 시간은 짧았다. 이자벨이 드레스를 갈아입자마자여자간수가 그들을 재촉했다. 이자벨의 여동생은 눈물을 닦으며 이자벨을 노려보았다.
"재판정 안에서 제대로 말해! 가문이 살아야 언니도 산다는 걸 잊지 말고!"
그녀는 홱 몸을 돌려 면회실로 마련된 장소를 빠져나갔다. 이자벨은 그제야 카룰리아스가의 핏줄다운 행동을 했다고 평가했다.
이제 재판까지는 3시간이 남았다. 이자벨은 간수를 따라 감옥으로 돌아가는 줄 알았으나, 간수는 그녀를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좀 더 화려하고 견고한 방문을 본 이자벨은 드디어 제게 격이 맞는 이가 나타났음을 직감했다.
제발 미카엘이기를.
그가 증오 어린 눈길로 자신을 쳐다봐 주기를 바랐다. 절대 자신을 잊을 수 없도록. 그의 기억 한구석에 자신의 모습이 선명히 새겨지기를 기대했다.
찰칵.
문 앞에 선 기사들에 의해 문이 열리고, 이자벨이 안으로 들여보내졌다.
넓은 실내에는 가구가 거의 없었다. 화려한 의자에 앉아 있는 여인은 이자벨보다도 아름다운 붉은 머리칼을 가진 이였다.
"…카룰리아스 공녀."
"황비 전하."
이런 상황임에도 이자벨은 의연하게 예를 갖췄다. 이자벨을 바라보는 여인의 눈빛 속에 증오심이 일렁이는 것을 보고 이자벨은 속으로 그녀를 비웃었다.
알렉시스와 아네트는 미카엘을 아꼈지만, 그보다 못하다 해도 리디아도 아꼈다. 특히 아네트는 시르기스 공작가와 친분이 있었다.
'당신이 아끼는 리디아는 내가 죽였어.'
그렇게 아끼고 귀여워했으면뭘 하나. 지켜 주지 못했는데. 그 애가 죽을 때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알아? 나는 알지. 내가 보낸 시릴이 말을 전해 주었거든.
면전에서 비웃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으나 그럴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내가 그 사실을 전하면당신들은 고통에 엉엉 울지도 몰라.'
그 꼴을 봐야 하건만. 아직은 자신이 그녀보다 우위를 점하지 못하여 입을 다물고 있어야만 했다.
"전하께서 여기까지 행차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어디까지나 우아한 공녀의 모습을 버리지 않은 이자벨의 말에 아네트는 냉랭한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시작해라."
황비의 말이 떨어지자병사들이 움직였다. 방 한쪽에 놓인 나무 의자로 끌고 가려는 것에 이자벨은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황비 전하! 이게 무슨…."
"증거는 부족하지만 실마리를 얻었단다. 네가 감히 리디아도 괴롭혔다지?"
부드러운 목소리가 노랫소리처럼 울렸다. 마치 야수가 갸르릉거리는 듯한 목소리 같다고 아네트 곁의 기사들은 생각했다.
"네가 리디아를 죽인 것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겠니? 감히 내가 아끼는 아이를 괴롭히고, 또 미카엘이 사랑하는 아이를 해쳤는데."
"저, 전하! 재판이 몇 시간 남지 않았습니다! 제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이거 놔라!"
우악스러운 손길에 의해 이자벨은 의자에 앉혀졌다. 병사들은 의자에 달려 있는 가죽 구속구에 이자벨을 꽁꽁 묶었다. 팔과 다리는 물론 목과 허리, 머리까지 고정된 모습에 이자벨은 두려움을 느꼈다.
"황비 전하! 아닙니다! 저는 아니…. 우읍!"
억지로 그녀의 턱을 벌린 고문관들이 이자벨의 입을 고정했다. 또 다른 한 명이 이자벨의 혀를 끄집어냈다. 이자벨은 불에 달궈진 인두가 준비되는 것을 보고 공포에 질렸다.
"으! 으으으으으!"
이자벨은 아네트를 바라보며 필사적인 눈빛을 보냈다. 아네트는 그 모습을 비웃었다.
"재판을 받기 전에 주는 내선물이란다, 카룰리아스 공녀. 네 간악한 세 치 혀는 이미 잘 알고 있으니…. 그로부터 피해자들이 다시 상처받는 일만은 없어야 하지 않겠니?"
말하며 고문관에게 고개를 끄덕이자그가 인두를 가져왔다. 이자벨은 그 모습에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부친에게 따귀를 맞아 본 적도 없었던 그녀였다.
'증거는 없지만. 이 계집이 리디아를 죽인 것이 분명하다.'
카룰리아스 공작가의 하인들을 심문하고 조사한 끝에 마물을 부리는 마법사에 대한 정보를 손에 넣었다. 마법사 본인은 모습을 감춰 찾아내지 못했으나, 정황상 그가 이자벨의 사주를 받아 리디아를 죽이고 로제타를 노린 게 분명했다.
아네트는 차가운 얼굴로 이자벨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리디아의 고통을 생각하면이 정도로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딸자식을 잃은 시르기스 공작부인과 공작의 고통은 또 어떻겠는가?
고문실로 카룰리아스 공녀의 억눌린 비명이 울려 퍼졌다.
정신을 차리는 데만도 2시간이 걸렸다. 눈을 떴을 때는 온갖 결박이 풀려 있었다. 이자벨은 황비 또한 자리를 떴음을 깨닫고 이를 악물려다가 고통에 신음을 삼켰다. 인두로 지져진 혀가 너무도 아팠다.
"어, 으…."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전해지는 극심한 통증에 이자벨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이 빚은 반드시 갚고야 말것이다!'
불꽃의 정령왕과 계약을 맺은 그녀를 사로잡기란 불가능하다지만…, 황제인 알렉시스를 인질로 잡는다면 잡지 못할 것도 없었다. 이자벨은 비어 있는 황비의 자리를 무시무시한 눈길로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간수의 재촉을 받고 일어났다.
통증에 식은땀을 흘렸는지 머리카락이며 옷이 축축했다. 오늘 씻고 나왔음에도 땀에 젖은 모습이었다. 혀가 부어오른 것이 느껴졌으나, 그녀에게는 약도 주어지지 않았다.
감옥까지 안내한 간수는 이자벨을 감옥에 밀어 넣었다.
앞으로 몇 시간이 남았는지조차 가르쳐 주지 않고 이자벨의 감옥 앞을 떠나 버렸다. 이자벨은 제 뺨에 말라붙은 눈물 자국이 있음을 깨닫고 신경질적으로 문질렀다.
비록 죄수 신세가 되었으나 그녀는 카룰리아스 공작가의 공녀였다.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 다갚아 줄 것이다! 어디 두고 보자!'
아득바득 칼을 갈며 이자벨은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이 황궁의 감옥을 떠나 재판을 받고 징역을 살게 될 감옥이 결정된 후에야 대응할 방법이 생길 것이다.
***
로제타는 긴 고민 끝에 통신용 수정구슬을 통해 재판을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미카엘이 제의했던 큰 화면으로의 시청은 거절했다. 이자벨의 얼굴을 크게 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이자벨은 로제타가 곤란에 처했던 파티장이나 다과회에 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고위 귀족이었고, 하급 귀족의 자제와는 어울리는 일 자체가 없었다.
휘르센 백작가의 핏줄은 그녀의 그림자 정도는 밟을 수 있는 입장이었다.
다만 그뿐으로, 로제타는 원작에서처럼 이자벨의 충실한 추종자가 되지는 못했다. 우선 로제타 자체가 그녀에게 접근하지 않았으니까.
로제타는 처음 누명을 뒤집어쓰고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왜 이런 일이? 원작에는 이런 설정없었잖아. 그러다가 어느 파티장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이자벨의 시선을 보고 깨달았다.
너구나, 하고.
원작과는 달리 이자벨의 추종자가 된 게 아니었음에도, 악녀의 굴레도 사망 플래그에서도 벗어나지 못한 것임을 그때 눈치챘다.
'미워했었나?'
밉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애초에 나한테 왜 이러나 싶었다. 그러나 궁극적인 증오심은 그렇게 결정지어져 있는 소설의 줄거리에 가지고 있었다.
원작의 줄거리라서 그렇게 흘러가려고 그러는 줄 알았으니까. 거기에 이유가 있었다는 것은 미카엘과 결혼한 이후에 알았다.
이전에는 그저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러는 줄 알았다. 이자벨은 그런 이유로도 여럿의 인생을 파멸시킨 악녀였으니까.
"로제타, 괜찮습니까?"
소파 테이블 위에는 통신용 수정구슬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멜론만 한 그것에는 재판정의 모습이 잘 비춰지고 있었다.
방청객의 자리는 꽉꽉 들어차 있었다. 귀족과 평민을 나란히 앉히면 싸움이 벌어지는지라 자리는 나뉘어져 있었다. 다만 고위 귀족의 자리는 좀 더 높은 지대에 있었다.
'부모님과…, 제럴드, 아이리스도 있구나….'
제럴드와 아이리스는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아이리스의 곁에는 그녀의 양부모님도 보였다. 지극히 아이리스를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오늘 재판의 죄인인 이자벨이 손목에 수갑을 찬 채로 등장했다. 앞뒤로 병사들이 지키고 서고, 양옆에는 여자 간수가 지키고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이자벨의 파리한 모습은 나름대로 충격적이었다.
평소의 당당하던 모습은 간데없었다. 빳빳하게 목을 세우기는 했으나 시퍼렇게 질린 안색은 그녀가 이미 겁을 먹었음을 드러내 보였다.
'표정이 좀…, 이상한데.'
그냥 겁을 먹은 것 정도가 아니라 아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문 과정에서 고문이라도 당한 건가?
'중세 감옥은 무서워….'
판타지 소설 속 세계이고 로맨스 소설이기도 하여 여러 가지 장치를 가지고 있다고는 해도, 중세는 중세였다. 범죄자의 인권 같은 것은 없는 세상인 것이다. 새삼 그 사실이 떠올라 로제타는 어깨를 움츠렸다.
미카엘은 그것을 달리 받아들였는지, 로제타의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이자벨이 자리에 서자 조금 지난 후에 재판관이 들어왔다. 재판관이 준비를 마치자 이번에는 황제 부부가 재판정으로 들어와 황제와 황비를 위해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황제가 착석하라고 명령하자 모든 귀족과 평민들이 자리에 앉는 것이 장관이었다. 물론 피의자인 이자벨을 제외한 조처였다.
"…뭔가 이상하네요. 카룰리아스 공녀가 한마디도 안 할 리가 없을 텐데."
로제타가 속삭이는 말에 미카엘은 힐끗 로제타를 보았다. 그는 이자벨에게 생긴 일을 짐작하고 있었다.
'황비 전하께서 무언가 하셨을 테지.'
카룰리아스 공작가에 대한 조사 결과는 바로바로 미카엘에게도 보고되고 있었다. 황제 부부의 배려였다. 미카엘이 본 증거를 아네트도 봤을 것이 분명했다.
마물을 부리는 마법사에 대한 보고.
이자벨이 그런 진귀한 자를 데리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정황 증거는 확실했다. 이자벨이 남몰래 미카엘을 흠모하고 있음을 알고, 후보에서 내린 것을 미안해했던 아네트였다.
그러나 이후 이자벨이 리디아를 노려보는 시선을 눈치채고, 아네트는 폐하의 판단이 옳았던 것 같다고 알렉시스에게 속삭였다.
세간에 알려진 이자벨의 이미지와는 다른 눈빛이었으므로.
이후 범인으로 마리엘라가 붙잡혔기에 아네트는 이자벨에 대해서는 잊고 있었다. 그러나 미카엘이 마리엘라가 범인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하는 말에 뒤늦게 이자벨을 떠올렸다.
아네트는 황비로서의 업무는 능숙하게 처리했으나 무도회나 파티를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녀는 굳이 말한다면 연회나 조용한 다과회를 즐겼다. 그것도 정치에는 아무짝에도 도움이 안 되는 어린 영애나 영식들이 없는 모임으로.
그러니 사교계는 두 갈래로 갈릴 수밖에 없었다.
카룰리아스 공녀인 이자벨을 주축으로 한 젊은 영애들의 모임과, 황비인 아네트가 군림하고 있는 귀부인들의 모임으로.
이자벨도 결국 결혼을 하게 될 테고, 이쪽으로 넘어오게 되면 그 명칭조차 사라지리라.
그래서 아네트는 이자벨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았었다.
미카엘의 이야기를 듣고 이자벨을 다시 주의 깊게 살피면서, 아네트는 자신이 그리 행동했던 것을 후회했다.
정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사교계의 일부를 등한시한 사이, 젊은 영애 몇이 괴롭힘을 당하고 몇 명은 파멸하기까지 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 느낀 분노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마치 어리고 경험 없는 애송이가 제 안방까지 들어와 흙발로 휘저어 놓은 것을 본 기분이었다.
전체 귀족의 숫자로 본다면 매우 미미한 숫자였으나, 그 본인에게는 다른 일이었다. 아네트는 그 점에 분노했다.
그녀는 귀족이기 이전에 전장에서 직접 부딪혀 온 사람이었다. 병사 한 명, 한 명의 목숨을 귀하게 여기는 정령사이기도 했다.
갓 데뷔탕트를 치른 영애가, 그저 이자벨의 눈에 거슬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런 괴롭힘을 당했다. 몇몇은 인생이 망가졌으며 자살한 영애도 있었다. 리디아 또한 이자벨의 괴롭힘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아네트는 많이, 아주 많이 화가 나 있었다.
'얼굴이 살짝 부은 것으로 보아…, 혀를 지진 것 같군.'
미카엘은 아네트가 한 짓을 눈치챘지만 굳이 그것을 말해 주지는 않았다. 로제타가 알면 겁을 먹을 테니까. 그래도 재판을 앞두고 있어 그 이상의 짓은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자벨은 타는 듯한 시선으로 황제와 황비, 그리고 그 주변을 훑었다. 로제타는 그것을 보고 이자벨이 누군가를 찾는 것임을 깨달았다.
'미카엘! 미카엘을 찾는 거구나!'
원작에서는 미카엘이 자리를 지켰다. 아이리스 곁에서 이자벨이 형을 선고받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녀를 위로했었다.
지금의 그는 로제타의 곁에 있었다. 원작과는 다른 또 한 가지의 변화였다.
이미 원작에서 너무 멀리 와 버린 미카엘이었지만, 로제타는 그 사실이 기뻤다.
'이제는 내 남자니까.'
아이리스도, 이자벨의 것도 아닌 내 남자였다. 누구에게도 내어줄 수 없는 내 것.
그 사실이 기쁘면서도 불안해져 로제타는 미카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역시나 미카엘은 그런 로제타가 걱정스러우면서도 좋은 듯했다.
모든 이가 착석하자, 법원의 직원이 목소리를 높여 이자벨의 죄목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죄목이 너무 길어서 전부를 말하는 것에도 시간이 걸렸다.
방청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입에서 경악하는 탄성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다만 재판을 드라마에서 본 적이 있는 로제타만 이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이 재판 길겠다.'
죄목이 저리도 많으니 어쩔 수 없다. 아주 숨 쉬는 것처럼 손에 권력을 쥔 그 순간부터 사람들을 괴롭혀 온 모양이었다.
로제타가 여러 고민에 휩싸이는 사이 재판이 시작되었다.
***
이 시대의 재판에는 변호사가 없었다. 재판정에 피의자를 세우고 수사관들이 제시한 증거가 맞는지, 재판관이 확인하는 순간만이 있을 뿐이다.
피의자, 혹은 피의자의 가문이나 가족이 붙여 준 사람이 변명을 할 수는 있었지만, 현대와 같은 변호사는 없는 셈이었다.
카룰리아스 공작가 또한 이자벨에게 사람을 붙였다. 가신들중에서 전후 사정을 꿰뚫고 있고 언변이 좋은 비서를 붙인 모양이었다.
그가 침묵하고 있는 이자벨 대신 변명의 말을 던졌으나 그리 효과적이지는 못했다.
증거는 명명백백했고, 이자벨이 저지른 죄는 지나치게 많았다. 특히나 평민들을 상대로 저지른 잔혹한 행각이 드러나자, 방청객들이 욕설을 퍼부을 정도였다. 상대가 공작가의 공녀임에도 그러했다.
"조용! 폐하의 앞이다!"
재판관이 언성을 높이고 나서야 장내가 조용해졌다. 재판관은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와 황비에게 사과의 말을 올리고 재판을 다시 이어 나갔다.
내밀어진 죄목 앞에 이자벨이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동기가 무엇이냐 묻는 질문에는 그저 침묵할 따름이었다.
저 침묵이 차라리 나은 것임을 로제타는 알고 있었다.
가벼운 이유였으니까. 불쾌했다거나, 거슬렸다거나…. 마침 그날 지루해서 눈에 보이는 이를 타깃으로 삼은 적도 있었다.
'원작에서는 그 발언을 들은 황제가 그 자리에서 혀를 뽑으라고 했었는데….'
황비가 말려서 사형전 감옥에서 혀를 자르는 것으로 그쳤다. 이번에는 조용한 것으로 보아 그런 무시무시한 광경은 나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이자벨은 무언가 당한 것이 있는지 분을 삭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원작에서 나왔던, 모든 희망을 잃어 막말을 흘리던 모습은 아니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숨기며 다음을 기약하는 모습이 로제타를 불안하게 했다.
'설마…. 몇 개월 사는 정도나, 벌금형정도로 그치는 건 아니겠지?'
황족이 죄를 지으면 거의 그 정도였다. 황제가 분노할 정도의 사건을 저지르면 또 다르지만. 이번 이자벨은 분명 황제의 관심을 끌 정도의 죄를 지었다고보았다.
모든 죄상에 대한 검증이 끝나자 재판관은 고심한 얼굴로그 자리에서무언가를 적어 재판정의 관리에게 내밀었다. 직원은 그것을 가지고황제와황비가 있는 자리까지 올라갔다.
고위 귀족이나 황족을 재판하는 경우, 재판관은 판결을 내리기에 앞서황제나 황비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이렇게 황제가 자리한 재판에서는 바로승인을 받을 수 있지만, 황제가 자리하지 않은 경우 재판 결과가 나오기까지 몇 시간을 기다리는 일도 허다했다. 물론 그때에는 재판관이 자리를 떠나 황제의 재가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관리가 황제의 시종에게 서류를 내밀자 시종이 그것을 가지고황제와황비 앞으로갔다. 서류를 펼쳐서보여 주는 모양이 마치 비밀 투표를 하는 듯했다.
내용을 확인한 황제는 재판관의 자리로고개를 돌렸다. 황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재판관은 안도한 얼굴로숨을 내쉬었다.
"판결을 내리겠습니다."
황제의 반응을 보고조용히 웅성거리기 시작했던 방청객들이 다시 고요해졌다. 재판관은 무거운 얼굴로이자벨을 바라보았다.
"죄인 이자벨카룰리아스는 고위 귀족으로서의 신분과 의무를 망각하고, 라스탄 제국민은 물론 많은 이들을 분노케 하는 범죄를 저질렀으니…."
통신용 수정구슬 너머로그 광경을 바라보는 로제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미카엘은 긴장하고있는 로제타의 어깨를 쓸어 주었다. 어떤 판결이 나든지 간에 이자벨은 다시는 세상 밖으로나오지 못할 터였다.
"황제 폐하께서허락하신 권한으로무기징역을 선고하겠습니다."
방청석에서안타까운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자벨에 대한 동정이 아닌 아쉬움의 소리였다. 이자벨에 의해 잔혹한 죽음을 맞은 평민들이 있으니, 방청하고있는 평민들은 대부분 이자벨의 사형을 원하고있었다.
반면 귀족들은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죄상은 무거우나 카룰리아스 공작가는 라스탄의 대귀족 중의 하나였다. 간단히 사형이 언도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조용! 폐하가 말씀하실 것입니다!"
시종이 장내를 향해 외치자 아우성치던 목소리들이 가라앉았다. 황제인 알렉시스는 중후한 목소리로입을 열었다.
"재판장의 판결은 들었을 것이다. 카룰리아스 공작가는 황실의 은덕을 입고도 그에 반하는 행위를 하여 짐을 분노케 했다! 그것은 고귀한 피를 이었다 해도 용서받지 못할 일이다!"
이대로끝나지 않으리라.
황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에 기대가 실렸다. 반면 선고가 떨어지자 일단은 다행이라며 안도했던 카룰리아스가의 둘째 공녀는 사색이 되었다.
"공녀의 악행으로인해 연루된 가문만도 스물일곱 곳이니! 이자벨카룰리아스는 그 벌로스물일곱 대의 채찍질을 받을 것이다! 이는 공개적인 장소에서행할 것이다!"
안 돼…, 하는 미약한 목소리가 흘러나왔으나 누구도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황제는 성난 목소리로말을 이었다.
"또한 카룰리아스 공작가는 황실에서그 이름이 제명될 것이며! 황족으로서누리던 권리와봉토를 모두 반납해야 할 것이다!"
공개적인 장소에서채찍질하겠다는 말이 떨어진 순간, 카룰리아스가 황족의 자리에서쫓겨날 것임은 모두 눈치채고있었다. 그러나 황제가 직접 그 이름을 제명하고영지를 빼앗겠다고하자 방청석에서환호성이 튀어나왔다.
카룰리아스 공작가에서는 차라리 이자벨의 목숨을 내어주고가문을 지키고싶었을 것이다.
'언니가 기어이…. 우리 가문을……!'
카룰리아스가의 둘째 공녀는 눈물 젖은 얼굴로죄인석에 선 이자벨을 노려보았다. 이자벨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감히 황제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그녀가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하는 듯했으나 방청객에서터져 나온 황제의 찬양에 묻히고말았다.
미카엘은 거기까지만 보고통신용 수정구슬의 연결을 끊었다. 로제타는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괜찮습니까, 로제타?"
"아아…. 네."
"이제 다 끝났습니다. 폐하께서는 아마도 유형지를 수도 밖으로결정하실 테고, 로제타가 그녀를 다시 볼 일은 없을 겁니다."
과연 그럴까? 로제타는 이자벨정도의 악녀가 너무 일찍 탈락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체가 발각되는 것도, 재판정에 서는 것도 너무 일렀다.
'이대로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
"아이리스, 나가자."
리온 남작 부부와아이리스의 곁으로패트릭과 로건이 다가왔다. 제럴드는 그들 쪽을 힐끗 바라보는 것 같았으나 휘르센 백작부인을 부축하는 일에 집중했다.
제럴드는 로제타가 누명을 썼다는 것을 안 다음부터 되도록 아이리스에게 접근하는 일을 삼가고있었다.
그것은 사랑에 눈이 멀어 의붓누이를 외면한 자신에게 주는 벌이었다.
'나 같은 놈에게는 성녀님을 마음에 품을 자격도 없다.'
아이리스의 곁을 지키며 그녀의 방패가 되어 주고싶다는 생각을 했으나, 로제타에 대한 진실을 알고나니, 자신은 그저 방해만 될 뿐이라는 판단이 섰다. 어차피 아이리스 곁에는 패트릭과 로건이 있었다.
거기다 다른 영애들을 조종하여 아이리스를 괴롭혔던 이자벨또한 그 정체가 낱낱이 밝혀졌으니…. 더는 위협받는 일이 없을 것이다.
패트릭과 로건의 호위를 받으며 나가는 아이리스는 고민하고있었다.
'왜 사형이 아닌 거지? 찝찝하게…. 소설 후반이 아니라서그런가?'
지금 위치는 묘했다. 초반이라고도 중반이라고도 할 수 없는 그 어디쯤이었다. 이자벨은 원작 후반쯤에 사형을 당했었다. 물론 죄목도 지금보다 훨씬 많고무거웠다.
'죽어야지 마음이 편한데.'
이자벨에게 당한 것이 많은 아이리스는 입을 삐죽거리고싶은 심정이었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이자벨에게 전 재산을 빼앗기고파멸한 평민들이 수두룩한데, 왜 죽이지 않나 싶었다. 재판정의 평민들은 카룰리아스가 황족의 이름을 빼앗긴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듯싶었지만….
'폐하께서용단을 내리셨군.'
아이리스와리온 남작 부부의 뒤에서재판을 지켜본 로건은 그렇게 판단했다.
귀하게만 자라 온 이자벨은 어차피 수감 생활을 버티지 못할 것이다. 몇 년 넘기지 못하고병사할 것이 뻔했다.
건장한 남자라 할지라도 버티지 못하는 것이 감옥 생활이었다. 바늘보다 무거운 것은 들어 본 적도 없을 것 같은 공녀에게는 무리였다.
그런 공녀의 목숨을 일시적이나마 살려 주며 카룰리아스를 황족에서제명시키는 것은, 살을 내어주고뼈를 취하는 것과 같았다. 카룰리아스 공녀가 그와같은 만행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대귀족의 이름이 있어서였으니까.
같은 범행이 반복될 수 없도록 뿌리를 뽑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다른 귀족이나 황족들에게 경고하는 의미도 되었을 것이다.
또한, 채찍질형을 선고하여 카룰리아스 공작가가 황족의 자리에서내려왔음을 대중에게 보이고, 그들의 분노를 가라앉히는 것까지도 잊지 않았다. 일반 시민들은 이자벨의 무기징역이 아닌 사형을 원했을 테니까 말이다.
'방심할 수 없는 분이다, 폐하는….'
로건은 속으로감탄하며, 패트릭과 같이 나란히 걸어가는 아이리스를 보았다. 그녀 또한 마음이 복잡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하긴. 상냥한 아이리스로서는 편치 않겠지.'
***
이자벨은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히고있었다.
'채찍질형? 날 채찍질하겠다고?!'
그것도 공개적인 자리에서하겠다고했다. 귀족은 물론 평민들도 나와서구경할 것이 뻔한 일이었다.
귀족으로서의 이름이 바닥으로떨어진…, 마치 카룰리아스 가문이 더는 황족이 아니게 되었다며 이를 공표하는 것과 같은 행위였다.
황실 직계는 아니었으나 스스로를 황실 직계와대등하다고생각했던 이자벨에게는 감당하기 벅찬 치욕이었다.
'황제가 저따위로행동할 때까지 아버님께서는 뭘 하고계셨던 거지?!'
이자벨의 목을 내어줄지언정, 카룰리아스의 격이 떨어지는 것은 용납하지 않을 카룰리아스 공작이었다. 재판정에서도 모습이 보이지 않은 것을 보면, 일찌감치 황제에게 꼬투리를 잡혀 감옥에 들어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무능한 작자!'
진작에 세력을 키워 황제에게 압력을 넣어야 한다고말했던 이자벨의 의견을 묵살하던 어리석은 치였다. 황제가 사납기는 해도 카룰리아스 공작가를 건드릴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는 오만을 떨면서.
가문과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입 다물고있을 생각이기는 했다만, 거기에 채찍질형과 같은 형벌을 받는 것은 끼어 있지 않았다.
다가올 치욕스러운 순간에 이자벨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
재판은 신속히 치러졌으나 그에 대한 처벌은 바로집행되지 않았다. 그녀가 채찍질형을 받을 형벌대를 만드는 데까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수도의 광장에 형벌대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사나흘 정도였다.
이자벨은 채찍질형을 받고하루를 감옥에서보낸 이후에 유형지로보내지기로했다. 북서쪽 섬 아나크샤에 위치한 감옥이었다.
카룰리아스의 둘째 공녀는 이자벨이 살아서는 돌아올 수 없음을 깨닫고서럽게 울었다. 북서쪽으로유배를 떠나는 이는 북쪽의 산맥을 넘지도 못하고죽는 이가 수십이었다. 추운 데다가 마물의 출현이 잦은 탓이다.
설사 어찌어찌 유배지까지 도착한다고해도 탑 형태의 열악한 감옥에서1년을 버티지 못하고죽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자벨의 여동생 베아트리체는 이자벨이 걱정돼서우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 후작가가 되어 버린 카룰리아스가를 자신이 어찌 움직이나 싶은 두려움이 앞서는 것이다.
베아트리체에게는 남동생이 있었지만, 이제 15살이 되었을 뿐인 남동생 헨리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나 혼자 뭘 어떻게 하라고!'
이자벨이 감옥 밖으로나올 수 있었다면 그녀가 알아서했을 것이다. 이자벨은 카룰리아스 공작이 자금을 어떻게 운영하는지도 알고, 사업체에 대한 것도 알고있으며, 숨겨 둔 자금이 어디 있는지까지 알고있었다.
여인을 무시하는 카룰리아스 공작이니 이자벨을 가르친 것은 아니었다. 이자벨이 라울을 써먹기 위해 스스로알아낸 것에 가까웠다. 헨리는 어느 정도 교육을 받기는 했으나, 그 애는 사업보다는 검을 휘두르는 것을 더 좋아했다.
'아버지만이라도 나오실 수 있다면….'
그는 이자벨처럼 감옥에 갇힌 것이 아니라 연금된 상태였다. 그러니 언젠가는 풀려나 가문으로돌아올 수 있으리라. 베아트리체는 그것에만 희망을 걸고있었다.
기쁠 줄 알았는데, 기분이싱숭생숭했다.
모든 게 완전히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느낌.
로제타는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제 이자벨은 저 멀리에있는 섬에유배를 가서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로제타는 그 섬이황제가 대놓고 죽이기 뭐한 귀족에게 죽으라고 보내는 유배지인 줄은 알지 못했다.
고위 귀족이나 아는 사실이었으므로. 미카엘과 결혼해서황족이되었다고는 해도 로제타는 아직 모르는 것이많았다.
'이제 끝난 거야. 원작하고는 다르지만…. 다시 볼 일이없으니 다행이지.'
로제타….
"로제타!"
로제타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소파에앉은 채로 너무 오래 생각에잠겨 있었던 모양이었다.
탁자 위에올려져 있던 수정구슬은 어느새 치워졌고, 그 자리에는 김을 모락모락 피어 올리는 라즈베리 홍차와 알록달록한 빛깔의 타르트가 놓여 있었다.
"…수도로 돌아갈까요? 카룰리아스 영애가 벌을 받는 광경을 보고 싶습니까?"
카룰리아스 영애. 그 명칭만큼 그녀가 받은 벌을 분명하게 하는 말이있을까?
이제 그녀는 공녀로 불리지 못하게 되었다. 그녀가 저지른 악행에경악한 황제가 그녀 하나만을 벌한 것이아니라 집안 전체를 끌어내렸기 때문이었다.
카룰리아스 공작가는 이제 공작이아닌 후작가가 되었다. 카룰리아스 가문이보유한 작위 중에후작가가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아니요. 카룰리아스 영애가 채찍질당하는 걸 보려고 수도까지…. 전 싫어요."
"그렇게 말할 것 같았습니다."
미카엘은 로제타의 옆자리에앉으며 그녀의 양손을 감싸 쥐었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에로제타는 조금 기분이풀리는 것 같았다.
"당장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리기는 힘들 겁니다. 하지만 자신의 기분을 우울한 채로 내버려 두지는 말기로 해요."
불행한 일을 겪었다고 해서언제까지고 그 불행에머물러 있기는 싫었다. 한때 자신은 불행해야 마땅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으나…. 대상이로제타라면 얘기가 달라졌다.
미카엘은 로제타가 언제나 행복하기를 바랐다.
로제타는 고개를 들어 미카엘의 눈을 바라보았다. 자신이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사람. 그 간절한 말과 표정에어쩐지 얼굴이달아오르는 듯한 기분이들었다.
"네…. 그, 그럴게요."
"자, 우선 차부터 들어요. 단 걸 먹으면 기운이난다고 하더군요."
방 안에둘만 있는 줄 알았더니 어느새 다가온 시녀가 '주방장 특선'이라며 타르트를 강조했다. 공작령의 가장 유명한 제철 과일을 사용했다고 했다.
산딸기와 블루베리, 복숭아가 얹어진 타르트를 보며 로제타는 뺨을 물들였다. 디저트는 그녀가 예상한 것보다 달고 맛있었다.
***
"…위에서허락이떨어졌습니다만. 정말로 아덴 공작령으로 가셔야겠습니까?"
리온 남작가로 돌아온 아이리스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대신관이보낸 전령이었다. 아이리스는 그길로 수도 근처에위치하고 있는 대신전으로 향했다.
대신관은 아이리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이재판일이기는 하나, 전령으로부터 연락을 받으면 지체하지 않고 올 것을 예상했다.
"예. 카룰리아스, …영애의 일도 있고, 당분간은 수도를 떠나 있고 싶어요."
"그곳이반드시 아덴 공작령이어야 하는 것은 아닐 텐데요?"
"……."
"사람들의 입에오르내리실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걸 대체 왜 각오해야 한단 말인가! 어이가 없어진 대신관은 추가로 잔소리할 말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대신관은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대공령으로 가신다 한들 상대는 아덴 공작이십니다. 성녀님께서존귀한 분이시라 해도 함부로 뵐 수 없는 분일 겁니다. 그래도 아덴 공작령으로 가셔야겠습니까?"
"예! 이사건으로 상처받으셨을 아덴 공작부인께도 위로의 말을 전해야 하고, 공작님께 제가 받은 은혜를 돌려드리고픈 마음뿐입니다."
누명을 쓴 것에불과한 로제타를 이제까지 가해자로 알고 있었으니…. 비난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한들, 침묵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상처를 주었을 수 있다.
성녀로서그 점을 생각하는 것은 기특한 일이지만, 대신관의 눈에는 아무리 봐도 구실로만 여겨졌다.
"제발 그 마음뿐이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누르며 대신관은 그 한마디를 겨우 내뱉었다. 아이리스는 생각 없는 표정으로 어색한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출발은 사흘 후, 새벽일 겁니다. 그때까지 리온 남작 부부께 인사를 하시고 여행을 떠날 채비를 하시지요. 긴 여행이될 것입니다."
교단에서는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마법사들이설치한 순간이동 마법진의 사용을 자제하고 있었다. 그래서이번 성녀의 행차에도 순간이동 마법진을 사용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이리스 또한 알고 있는 사실이기에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큼. 발레르 경께서성녀님의 호위를 자처하셨는데, 알고 계십니까?"
로건의 성이발레르였다. 본래는 발레르 백작이라 불러야 할 테지만, 그는 교단 소속이기도 해서신관들의 입에서는 발레르 경이나 로건 님이라고 칭해졌다.
"네. 로건 님께서말씀해 주시어 알고 있었습니다."
"발레르 경의 힘을 빌리는 것은 고마운 일입니다만…."
대신관은 로건의 마음뿐만 아니라, 성녀의 주변에여러 남성 추종자들이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성녀에게 대중적인 인기는 필연적인 것이었지만, 그것이이성적인 인기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교단으로서는 난처한 분쟁 거리가 생길 수도 있었다.
잔소리를 할까, 싶다가도 어떻게 이런 것까지 말하나 싶었다. 아덴 공작에게 연모의 마음을 품은 것을 알고 있으니, 발레르 경에게 괜한 여지를 주어 곤란한 일을 만들지 말라는 말은 하기 어려웠다.
'이번 기회에아덴 공작에대한 마음을 버리고… 차라리 성기사인 발레르 경과 이어진다면, 교단의 일에좀 더 적극적이될지도 모르지.'
"발레르 경께서는 성녀님을 생각하는 마음이커서, 때로는 아덴 공작께 무례를 범하는 일도 있으니…. 성녀님께서잘 중재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중한 로건이그리 행동하는 일은 드물지만, 대신관은 일단 그리 말해 두었다. 얼핏 눈치가 없어 보이는 아이리스가 로건의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아이리스는 알 듯 모를 듯 한 표정으로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대신관님. 걱정해 주셔서감사합니다."
덧붙이는 성녀의 말에대신관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또 주름이늘어날 것 같은 필연적인 예감이들었다.
***
"카룰리아스 공녀가 채찍질형을 받았단 말이냐!"
가문의 마법사로부터 연락을 받은 후작은 화들짝 놀랐다. 카룰리아스 공녀의 소행에황제가 분노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그 정도로 무서운 형벌을 받을 줄은 몰랐다. 황실의 정보에능통한 자들로부터 황제가 귀족파의 압력에어느 정도 수긍했다는 소식을 들어서였다.
'하긴. 목숨을 살려 주신 것만으로도 다행인 일인가….'
무려 동생의 부인을 해친 여자였다. 황제는 이자벨의 목을 취하는 대신에카룰리아스 공작가를 끌어내리기로 결정을 내린 듯싶었다.
공작 작위와 영지를 몰수하고 이자벨 카룰리아스를 무기징역에처했다는 소식이었다.
처벌을 결정한 것은 얼핏 황자인 것으로 보이나, 황제의 허락을 받아야만 집행이가능하니, 황제가 벌을 결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채찍질형이요? 그 이자벨 카룰리아스가…."
제가 처한 상황도 있고 후작 영애가 눈을 빛냈다. 수도에서멀리 떨어진 위치에있어서그 광경을 보지 못한 것이아깝다는 얼굴이었다.
'멍청한 것!'
"아직도 상황 파악이안 되는 것이냐! 그 카룰리아스 공녀가 채찍질형을 받았다면, 너인들 무사할 듯싶으냔 말이다!"
후작의 호통에영애는 찔끔했다. 그러나 아직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카룰리아스 공녀는 아덴 공작부인의 얼굴에직접적으로 상해를 입혔잖아요."
그러니 자신과는 입장이다르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후작의 딸이아덴 공작부인에게 누명을 씌웠을 때, 그녀는 아직 황족이되기 전이기는 했다.
황비가 직접 경고한 말이있기는 했으나, 그녀는 정말 그 일이벌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들의 행동이심술궂은 짓인 것은 인정하지만…, 그들이심한 위해를 끼친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심각하게 다칠 뻔한 것은 늘 아이리스의 몫이었으니, 로제타의 일로 그렇게까지 벌을 받지 않으리라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아이리스가 아닌, 아덴 공작부인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긴 그쪽의 신분이더 높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
어차피 아이리스는 늘 근사한 남성들이달려와 구해 주지 않았는가. 그녀는 아이리스가 가볍게 멍이드는 것 외에다치는 걸 본 적이없었다. 꼭 누군가 달려와 받아 주거나 감싸 주거나 잡아 주기 일쑤였다.
'제가 주인공이야, 뭐야!'
한때는 멋진 남성들에게 둘러싸여 사랑만 받는 꼴에그런 생각을 품었던 때도 있지만, 그런 생각은 버렸다. 무엇보다 가장 남자주인공스러운 미카엘로부터 버림받은 것이다.
'미카엘 님도 그 계집애의 본성을 눈치채신 거겠지.'
여러 남자들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어장관리녀로서의 본질을! 그러나, 그렇다고는 해도….
'그런데 왜 로제타 휘르센 따위에게 마음을 빼앗기신 거지?! 그 바람에내가 이런 먼 곳까지 왔어야만 했잖아!'
아덴 공작령의 관문에서부터 제대로 되는 일이하나도 없었다. 밤늦게야 통과한 관문에서가장 가까운 마을에는 여관이두 곳밖에없었다. 그중한 곳에서는 공사 중이라며 그들을 거부했고, 나머지 한 곳은 침대 한가운데에징이박혀 있었다.
식사도 너무 짜거나 타서,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다.
분노한 후작이한바탕 여관을 뒤집어 놓으려 했으나, 경비병이일찌감치 들이닥쳐 상황을 살피고 가는 것에입이닫혔다. 여기서소란을 피웠다가는 공작의 귀에들어갈 것 같다는 느낌이온 것이다.
마을이형편없어서그렇다고 여긴 그들은 마을을 황급히 빠져나갔다. 그러나 첫 번째 도시에도착하기도 전에바퀴 축이부러지고 만 것이다.
폭삭 주저앉아 버린 마차에, 후작은 하인들을 다 내리게 하고 하인들이타던 마차에탔다.
같이온 친척들은 후작 일행이시간이오래 걸리자 앞서서출발해 버린 뒤였다. 그래서그들의 마차를 같이타기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후작가의 마차는 당연히 질이좋은 것이었지만, 하인들에게 내어준 마차까지 그러하지는 못했다. 심하게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엉덩이가 너덜너덜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도착한 첫 번째 도시에서그들은 같은 일을 반복하게 되었다. 후작가의 기사들이걸치고 있는 망토에서가문의 상징을 보자 영지민들의 눈빛이싸늘해진 것은 기분 탓이아닐 것이다.
'서, 설마…. 아덴 공작이사사로이복수를 하려고 이런 유치한 짓을?!'
황제의 동생인 그가 이런 치졸한 방법으로 괴롭힐까 싶었으나, 그게 아니라면 영지민들 따위가 이리도 대범하게 나올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문 근처 마을에서는 그나마 여관이라도 잡았지만, 지금은 방을 내어준다는 호텔이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방을 빌릴 수 있는 여관은 마구간 같은 냄새가 나는 터라차라리 마차에서 자겠다고 나온 참이었다.
그러다가 이자벨 카룰리아스의 소식을 듣게 된 것이고.
앞선 친척의 일행 중에 마법사가 있었는데, 그가 연락을 받고 사람을 남겨서 소식을 전해 준 것이었다.
"카룰리아스 공녀가, 아니지. 이제는 영애구나! 아무튼 그녀가 가장큰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이치지만, 너희도 그보다 못할 뿐, 엄한 벌을 받는 것은 마찬가지인 거다! 이 어리석은 녀석아!"
후작이 호통을 쳤지만 영애는 겉으로만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후작은 딸의 모습에 진작 좀 더 엄하게 가르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가자! 이런 곳에서 시간을 낭비하면 무엇 하겠느냐. 차라리 아덴 공작에게 용서를 빌고, 빨리 수도로 복귀하는 것이 좋을 거다!"
마구간 냄새가 나는 곳이라고는 하지만, 호위기사들의 절반 정도는 2교대로 그곳에서 쉬고 있었다. 그러나 주인인 후작의 지시에 느릿느릿 여관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후작은 기사들의 한숨 어린 눈초리를 무시하고 길을 서둘렀다.
***
누군가 징역형을 언도받았다고 그를 축하하는 일을 벌인다는 것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상대는 1년여에 걸쳐 자신을 괴롭히던 사람이었다.
'기뻐해도 되지 않을까?'
더는 죽음의 그림자를 두려워하며 주변을 신경 쓰며 살지 않아도 된다. 이자벨의 음모를 피하려고 결혼까지 감행했던 로제타였다. 더 위험한 쪽으로 몸을 던졌다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자벨의 파멸을 앞당기는 일이 되었다.
'아….'
미카엘과 헤어져도…. 그래도 이제는 안전하구나. 미카엘이 이자벨의 몸에 저주를 건 보람도 없이, 이자벨은 저주가 로제타와 연결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채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뭔가 하고 싶은 일은 없습니까?"
다정하게 웃으며 바라보는 미카엘의 미소에 로제타는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 남자와 헤어질 생각이 들까?
필립과 결혼한다고 생각했을 때도 살면서 그와 사는 게 괜찮다고 여겨진다면, 그대로 살 작정이었다. 미카엘과는….
'괘, 괜찮은 것 같아.'
잠자리를 할 때 지나칠 정도로 느끼게 되는 것은 부끄럽지만, 그래도 좋았다. 너무 느낀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것은 노력해서 주문을 풀면 되는 일이었다.
다정하고 상냥하고…, 자신을 많이 사랑해 주는 남편과 이혼을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더 많이 사랑해 주면 모를까!
"바람을 쐬고 싶어요."
실은 쇼핑을 하고 싶었지만, 공작가에 있는 로제타의 드레스룸에는 미카엘이 미리 사다 놓은 드레스가 너무 많았다. 거기다 뻔히 그가 사 줄 것을 아는데, 쇼핑을 하고 싶다는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
"카페에서 차도 마시고…. 이것저것 구경도 하고요."
공작가의 주방장솜씨도 훌륭했지만, 바깥에서 먹는 것은 그 나름대로의 멋과 즐거움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래요. 바로 마차를 준비하도록 하지요."
로제타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춘 미카엘이 속삭였다. 로제타는 시녀들에게 외출복으로 갈아입는 것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미카엘과 하는 첫 번째 평범한 외출이었다.
***
공작가의 본성은 도시 외곽에 위치하고 있었다. 공작가가 방대한 크기의 숲과 정원을 끼고 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래서 마차는 공작가의 소유인 넓은 정원을 가로질러 한참을 달린 후에야 도시로 들어섰다.
아덴 공작령의 공작이 직접적으로 통치하는 도시 루긴은 수도 못지않은 시설과 규모를 자랑하는 제법 큰 도시였다.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기는 했으나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처음인지라, 로제타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구경했다.
마차는 미카엘의 지시로 느긋하게 달리고 있었다. 미카엘은 자랑스럽게 각각의 거리와 상점가를 소개했다.
마법과 의학이 발달된 도시답게 루긴에는 그와 관련된 거리가 많았다. 의학서를 전문으로 하는 서점이 즐비한 거리가 있는가 하면, 약초나 약, 혹은 마법서와 마도구를 파는 상점이 즐비한 거리가 있었다.
"루긴의 시민들이 애용하는 거리는 이쪽입니다."
간판부터가 화려한, 의상과 구두, 보석 등을 취급하는 상점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수도 못지않은 규모에 로제타의 눈이 반짝였다. 미카엘은 그런 로제타를 장난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럼 뭐부터 사 드릴까요?"
"네? 이…, 이미 드레스룸이 꽉 찼는걸요?"
"그건 봄에 입을 것들 아닙니까? 여름이 다가오고 있잖아요. 여름에는 또, 여름 드레스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건 맞는 말이었으나, 드레스룸이 터져 나가라가득 차 있는 드레스의 반도 입지 못했다. 그 상태에서 새 드레스를 사 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괘, 괜찮아요. 제가 가지고 온 드레스도 있고…."
"부인의 치장을 돕는 것은 남편의 즐거움이지요. 제가 사 준 것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장한 당신을 보는 게…, 얼마나 짜릿한지 당신은 모를 겁니다."
속삭이는 미카엘의 말에 로제타는 귓불까지 새빨갛게 물들었다. 시녀를 다른 마차에 태워 따라오게 했으니 망정이지, 같은 마차에 탔다면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을 것이다.
"로제타의 사랑스러운 나신을 제가 준 것으로 감싸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드레스룸 정도가 아니라이 거리를 다 사 주어도 아깝지 않을 겁니다."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당황한 로제타가 미카엘의 팔을 찰싹찰싹 때리자 미카엘이 쿡쿡 웃었다.
"제 속내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음흉한 남편의 지갑 사정은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쇼핑해 주세요. 저는 로제타가 제가 사 준 옷을 입는 것만으로도 기쁜 사람이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면…, 진짜 많이 사 버릴 거예요."
아직 로제타가 미카엘을 필립으로 알고 있을 때, 미카엘은 이미 이 거리의 봄옷을 전부 샀었지만, 로제타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전부 로제타의 사이즈로 맞춘 그 옷들은 반은 공작가의 본성에, 나머지 반은 섬에 있는 성에 채워 넣었다. 별장에 있는 드레스룸은 수도 의상실에 있는 신상품을 전부 사들여 채웠고.
"부디 그렇게 해 주시죠."
여유 만만한 미카엘의 표정에 로제타는 입을 삐죽였다. 그렇게 말한다면 후회하게 해 주지! 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귀여워 죽겠네.'
미카엘은 차오르는 웃음을 삼키며 가장가까운 귀족의 의상실에 마차를 세우라고 지시를 내렸다.
***
"로제타, 전부 다 사지요."
미카엘을 사색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생각하며 호기롭게 들어가던 마음은 간데없었다. 로제타가 수도 못지않은 화려한 드레스에 얼이 빠져, 이것저것 고르고도 뭘 입어야 할지 고르지 못하자 미카엘이 폭탄을 던졌다.
"마담. 드레스가 훌륭하군. 전부 내 부인의 사이즈에 맞춰서 공작가의 성으로…."
로제타는 기겁하며 미카엘의 입을 막았다. 공작가의 부인으로서 보여야 할 체통도 이미 잊은 뒤였다.
"제, 제정신이세요?! 이거 한 벌도 어마어마하게 비쌀 텐데…."
"이 드레스를 만든 마담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로제타를 끌어당긴 미카엘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로제타가 하루에 여덟 번씩 이런 드레스를 입었다가 버려도 괜찮을 만큼 아덴 공작가의 재정은 튼튼합니다."
미카엘의 말에 로제타는 그제야 그가 소설 속 남주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황제 못지않은 부는 기본 사항인 것이다.
'현실의 황제라도 그런 드레스 값은 못 댈 것 같은데…. 나라재정이 파탄 날 거야.'
"그, 그래도 안 돼요. 두 벌만 살게요."
"로제타가 여기 드레스를 보는 눈을 봤습니다. 전부 마음에 든 것 같은데, 망설일 필요는…."
"아, 아니! 셋, 아니! 다…. 여덟 벌 고를게요! 고를 테니까…."
머리털 나고 이런 것을 조르게 될 줄은 몰랐다. 미카엘은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으나 로제타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로제타는 최대한 미카엘의 눈치를 안 보는 척하며 빠르게 드레스 여덟 벌을 고를 수 있었다.
다행히 미카엘의 위협(?)에 뇌가 반응했는지,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재빨리 골라낼 수 있었다.
의상실을 나오자 미카엘은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좀 더 오랫동안 옷을 고르며 시간을 보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요."
정확히는 예쁜 옷을 입고 고르며 즐거워하는 로제타를 볼 기대로 부풀어 있었다. 로제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충분히 즐거웠어요. 다른 곳으로 가죠!"
"보석상이 보이는데…."
"아뇨! 카페로!"
아까의 전철을 밟을 것 같은 예감에 로제타는 강력하게 주장했다. 미카엘은 웃으며 로제타를 보았다.
"아무리 저라도 보석상의 보석을 전부 구입하지는 않습니다."
"그, 그래요?"
"그러니 갈까요?"
방긋 웃는 얼굴로 미카엘이 안내하려 했으나 로제타는 그의 팔을 꽉 잡았다.
"수작 부리지 마세요."
"음…. 안 통하네요."
주문한 드레스는 사이즈를 조정하는 대로 공작가의 성으로 보내질 예정이었다. 로제타를 마차에 태운 미카엘은 따라서 올라탔다.
다소 먼 거리에 있지만 홍차를 아주 잘하는 카페가 있었다. 미카엘은 거기서 점심을 먹자고 하며 마부에게 행선지를 불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