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아덴 공작령
마법으로 소환수를 불러내는 장면은 언제 보아도 장관이었다. 허공에 거대한 마법진이나타나고 그 마법진을 뚫고 화려한 날개가 달린 소환수가 나타났다.
얌전히 정원의 빈 곳에 발을 뻗고 앉은 소환수는 납작하게 몸을 엎드렸다. 덩치가 크니 타기 쉽게 자세를 낮추는 것이다.
"로제타."
미카엘의 부름에 로제타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황제 부부에게 인사를 올렸다. 들어올 때 소환수를 타고 오는 것은 안 되지만, 나갈 때는 허가를 받으면 가능했다. 돌아선 로제타는 미카엘의 손을 잡고 소환수의 등에 올라탔다.
이런 것도 세 번째가 되니 약간은 익숙해지는 것 같았다.
"그럼 폐하, 황비 전하. 나중에 다시 뵙기를 바라겠습니다."
"저 녀석, 영영 안 올 것처럼 말하는 것 봐라!"
알렉시스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아네트는 온화한 얼굴로 그들을 배웅했다.
"먼 길 조심해서 가도록 해, 두 사람."
다정한 얼굴에 로제타는 하마터면 다녀오겠다고 답할 뻔했다. 미카엘은 로제타의 시선이아네트에게서 떨어질 줄 모르는 것조차 질투가 나는지그녀를 끌어안았다.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로제타의 귓가에 속삭이고는 독수리를 닮아 강인한 날개를 가진 소환수를 출발시켰다. 소환수가 날개를 움직일 때마다 그들의 몸이하늘로 솟아올랐다. 금세 라스탄의 황궁을 벗어나 수도에서 멀어지는 모습에 로제타는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벌써 황제와 황비, 호위기사며 시녀들의 모습이보이지않게 되었다. 지난 무도회에서 받게 된 선물들은 마차를 통해 공작령으로 옮겨질 것이다.
공작가의 저택에 모든 것이준비되어 있기에, 로제타는 미카엘의 마법 주머니에 들어가는 것 이상의 짐은 필요치 않았다.
아덴 공작령이수도의 어느 방향에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제국의 곡창 지대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넓은 숲을 끼고 몇 개의 산맥을 가지고 있는 땅이었다.
목축업에 유리한 환경이고, 마물의 침입이적은 땅이었다. 진귀한 약초나 광물의 생산이많아서 의학과 마법이발달한 곳이라고 알고 있었다.
마법사인 미카엘을 위해 황제인 알렉시스가 하사한 땅이기도 했다. 그의 공작령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만 보아도 알렉시스가 미카엘에게 품은 애정의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
알렉시스는 미카엘이3살이되던 해에 즉위했다.
그해에 전대의 황제 부부가 암살되었기 때문이었다. 알렉시스는 너무 어려서 제 아버지와 어머니를 기억하지도 못하는 남동생을 극진하게 보살폈다. 황비감으로 미카엘의 어머니가 될 만한 여자를 고를 정도였다.
미카엘도 저를 예뻐하는 알렉시스를 무척이나 따랐는데, 알렉시스에게 접근하는 여자는 덮어놓고 싫어했다.
다만 유일한 예외가 아네트였다.
아네트는 애초에 알렉시스가 아닌 미카엘의 귀여운 모습에 반해서 황궁에 드나들던 이였다. 뛰어난 정령사로서 불의 정령왕과 계약을 맺은 그녀는 미카엘의 다섯 스승 중의 한 사람으로 황궁에 들어왔다.
지금도 아네트는 미카엘을 자식처럼 귀여워하고 있었다. 로제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 것도 그녀가 은연중에 상처받은 미카엘의 마음을 다독여 준 이이기 때문이었다.
'감사했습니다. 형님, 스승님….'
미카엘은 로제타를 따라저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미카엘이황궁을 떠나 공작령에 정착하는 것으로 황제 부부도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한참 뒤로 미뤄 두었던 자식 계획을 다시 세울지도 모른다.
'바라시는 대로…, 행복해지겠습니다.'
소환수의 방향을 공작령이있는 곳으로 틀며 미카엘은 생각했다. 자신은 행복해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사람을 알게 되었고, 그녀와 같이행복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로제타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는 행복해졌으니…. 이제 행복이야말로 그에게서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는지도 몰랐다.
두 사람을 태운 거대한 소환수가 창공을 향해 날아갔다.
"시릴."
가면을 쓴 남자 앞으로 회색 머리칼의 마법사가 다가왔다. 그는 쓰고 있던 두건을 벗으며 사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전하."
"그래. 카룰리아스 공녀가 드디어 꼬리를 잡혔다지?"
"그렇사옵니다."
시릴은 가만히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그는 흑태자의 충실한 사냥개 중의 한 명이었다. 흑태자의 심복으로, 그의 명에 따라 이자벨 카룰리아스를 도왔다.
마물을 부려 리디아 시르기스를 죽인 것도 그 일환이었다.
흑태자가 원한 것은 시르기스 공작가와 황제의 사이가 틀어지는 것이었다. 그가 바란 대로 리디아가 살해되자 시르기스 공작은 황제와 미카엘을 원망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척을 지지는 않고 정계에서 물러나 은퇴하는 선에 그쳤다.
영리한 알렉시스는 시르기스 공작이 놔 버린 권력을 서서히 자신의 것이 되게만들었다. 그러니 흑태자의 계획은 반만 성공한 셈이었다.
그것으로 시릴의 임무는 끝나는 것이었으나, 흑태자는 이자벨의 고약한 취미를 눈치챘다. 그녀는 아직 자신의 취미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는 않았지만…, 흑태자는 그녀의 취미가 제법 이용 가치가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시릴에게이자벨의 곁에 남아서 그녀를 도우라 명했던 것이다.
이자벨이 쥐고 있는 영애들의 약점은, 각 가문의 영애들을 첩자로 이용할 수있는 것이었다. 흑태자는 휘하의 부하들을 이자벨의 '익명의 협박자'인 것처럼 꾸며 교묘히 내부 정보를 빼 나갔다.
지난 2년 동안, 흑태자는 제법 유리한 정보들을 손에 넣을 수있었다.
다만 상대도 만만치 않은지라 아직 형국을 그와 그의 나라에 유리하게뒤집지 못할 뿐이었다.
"…이런 식의 결말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닌데. 그렇잖은가, 시릴?"
"전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시릴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흑태자는 이자벨이 아덴 공작부인을 공격했다는 얘기를 듣고, 바로 그녀가 함정에 빠졌음을 짐작했다. 일개 영애를 괴롭히거나 누명을 씌우는 것과 황족을 해하는 것은 죄의 무게가 다른 법이었다.
이자벨은 고약한 쪽으로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여자였다. 저주받고, 짝사랑하던 사내가 결혼을 했다고는 해도 그런 멍청한 짓을 저지를 리는 없었다.
황족 살인미수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죄를 실토했다고 하니…. 간신히 가문의 이름과 목숨은 건질 수있을 것이다. 카룰리아스 공작가는 표면적인 재산보다 은닉한 재산이 더 많은 가문이었다.
라울 카룰리아스라면 불가능할 테지만, 이자벨 카룰리아스라면 그 재산을 기반으로 백작 작위까지는 회복할 수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야 재미가 없지.'
흑태자는 이자벨이 좀 더 화려하게날뛰어 주는 것을 원했다. 그 어지러운 혼란 속에 제국의 두 기둥이라 할 수있는 아네트와 미카엘을 죽일 수있다면 더 좋고.
"돌아가라. 돌아가서…, 이자벨 카룰리아스를 구해 주거라. 어차피 그녀는 양지보다 음지에 어울리는 여인이니…. 어울리는 자리에 발을 디딜 수있게해 주어야지."
"전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시릴의 대답에 흑태자는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흑태자가 물러날 것을 허락하자 시릴은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이제 제국은 또 한 번 발칵 뒤집힐 것이다.
***
로제타와 미카엘이 공작령으로 떠난 그 시간. 영애들의 살롱에서는 사교계가 발칵 뒤집힐 만한 일이 일어났다. 젊은 영애 두 명이 과거 로제타가 범인으로 지목된 사건에서 거짓말을 했었다고 양심선언을 한 것이다.
"사실은 저희가 그렇게말한 것은 협박받아서였어요."
"무시하고 넘어가려고도 했는데…. 정말편지에 적힌 그 일이 벌어지고, 다른 사람들도 휘르센 영애…, 아니! 아덴 공작부인을 지목하기에…."
눈물이 섞인 이 고백은 가히 충격적이라 할 수있을 만한 것이었다. 그 사건에 연루되었던 영애들을 추궁해 보니, 그들은 실은 협박당하여 그런 거짓말을 했었음을 인정했다.
"맙소사."
"어떻게이런 일이 있을 수있지요?"
귀족들의 관심은 로제타가 가해자로 지목된 다른 사건들에게로 넘어갔다. 하나의 사건이 그리 밝혀졌으니 다른 사건도 그럴 수있겠다 싶었던 것이다.
로제타가 그러는 것을 보았다고 말한 영애가 있는 집안에서는 당장 딸을 다그쳤다. 무섭게야단치는 부모님의 모습에, 영애는 눈물을 흘리며 마지못해 고백하는 것이다.
이런 가문이 한둘이 아니었다. 영애들이 사실을 고백하며 말하기를, 실은 황실에서 이미 이 사건을 조사하였고, 협박 편지를 보낸 이로 이자벨 카룰리아스를 지목했다는 것이다.
이자벨 카룰리아스!
무도회에서 갑자기 광증을 일으켜 아덴 공작부인을 해쳤다는 공녀였다. 그제야 많은 사람들은 이자벨의 행동을 납득했다.
뒤로 그런 술수를 부려 미카엘 황자와 휘르센 영애의 사랑을 방해했었는데, 그것이 통하지 않자 마지막 패악을 떤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상황이 이쯤 돌아가자 사교계의 귀족들은 물론이거니와 수도의 일반 평민들까지도 로제타를 가엽게여기게되었다.
그저 황자와 사모하는 마음을 주고받았을 뿐인데, 1년 넘는 기간 동안 괴롭힘을 받으며 가해자라 손가락질당했던 것이다. 또 다른 피해자인 아이리스 리온에 대한 관심은 묻히고, 얼굴에 심한 상처까지 입은 로제타에 대한 동정론이 떠올랐다.
더불어 악녀인 카룰리아스 공녀를 사형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평민들사이에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건 알렉시스가 예측하지 못한 결과였다.
"…라는데. 역시 살려 둘 필요, 없지 않을까?"
옥좌에 앉은 알렉시스가 그 옆자리에 앉아 있는 아네트에게물었다. 살롱에서 젊은 영애 둘이서 제 죄를 고백한 것은 아네트의 작품이었다.
아네트가 으름장을 놓았던 영애들대부분은, 이자벨에 대한 증거를 잡지 못했다. 아네트가 예상한 대로의 결과였다. 그녀들의 손에 잡힐 정도였다면 황실이 먼저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 영애들사이에서도 신분의 고하가 있는지라, 한미한 가문의 영애들은 자신들이 본보기로 뽑힐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인두로 혀를 지지는 형벌은 그만큼 가혹한 것이었기에.
겁에 질린 영애들몇몇이 황비의 시녀를 찾아와 비는 것에, 시녀가 그리해 보라고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 또한 아네트가 시녀에게일러둔 말이었다.
시녀에게매달린 이는 이자벨의 음모에서 비교적 역할이 가벼운 이였다. 이자벨에게잡혀 있는 약점도, 발각되면 부모에게크게야단맞는 정도의 선이었다.
여덟 명의 영애가 이와 같은 충고를 들었으나, 가장 먼저 이를 시행한 이는 딱 둘뿐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잇듯 영애들은 양심선언을 했다.
로제타의 누명이 완전히 벗겨지게된 순간이었다.
"카룰리아스 공녀도 여기까지는 예측하지 못했겠지요."
아네트가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이자벨은 가문과 목숨을 건지려 한 말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 악행으로 말미암아 평민들과 귀족들의 지지를 잃게되었다.
그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절반가량의 사람들이 카룰리아스 공녀가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이 이상하다고 의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카룰리아스 공녀에게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카룰리아스 공작의 석방을 주장하던 귀족파 사람들도 잠잠해진 참이었다.
"…카룰리아스 공녀의 목을 거두실 수는 있겠으나, 카룰리아스 공작과 그 식솔을 사형시키는 것은 다른 문제가 될 겁니다."
지금이야 여론이 좋지 않아서 카룰리아스의 편을 들지 못한다 해도, 귀족들은 이 일을 기억할 터였다.
물론 아네트 또한 이자벨을 살려 둘 마음은 없었다. 그녀에게리디아를 살해했을지도 모른다는 혐의가 있는 이상 더 그랬다.
같은 일을 반복할 수는 없었으므로.
미카엘의 결혼 생활에 방해가 될 만한 것은 남겨 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귀양을 보내시는 것이 어떨는지요? 연약한 영애의 몸으로는 쉽지 않은 일일 테지만. 그와 같이 간악한 성정을 지닌 영애라면 능히 버텨 낼 것입니다."
말은 부드러웠으나 열악한 환경을 갖추고 있는 곳에 귀양을 보내 서서히 말라죽게하자는 얘기였다.
"또한 카룰리아스 공작가는, 대부분의 재산을 몰수하고 작위를 후작으로 낮추는 정도로 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귀족들도 그것으로 잠잠해질 테지요."
평소 황제파라 불리는 자들도 이런 일에 대해서는 한 목소리를 내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작위를 빼앗거나 강등시키는 것에 민감했다.
황족을 해한 것이기는 하나, 로제타는 엄밀히 말해 황실의 피가 흐르는 이는 아니었다. 거기다 목숨을 잃은 것도 아니니 그 정도면 너그러운 처사라 여겨질 것이다.
"흐흥. 라울 카룰리아스는 수완이 없는 자이니 그대로 무너지겠군."
알렉시스는 카룰리아스가에서 당연히 어느 정도 자금을 은닉했을 거라 보았다. 이자벨 카룰리아스라면 그 자금을 바탕으로 가문을 일으킬 수있을지도 모르지만, 카룰리아스 공작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카룰리아스 공작의 오만은 그가 황족이었을 때나 그의 뒤를 받쳐 주는 것이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카룰리아스가의 독이 될 것이다.
"남은 것은 다른 영애들에 대한 처분인가?"
스스로 죄를 뉘우쳤다 양심선언을 한 영애들은, 이자벨의 음모에서 상대적으로 미약한 역할을 맡은 자들이었다.
주도적인 역할을 맡은 영애들은 선뜻 자신의 짓이라고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괴롭힌 상대가 한미한 가문이라 해도 성녀인 탓도 있고, 사교계에서 자신들을 어찌 취급할지도 두려워서였다.
"…일단은 휘르센 백작가에 금전적인 손해배상을 하게만들어야겠지요."
저들이 단합하지 못하게흩어 놓는 데는 성공을 했다. 아이리스를 해치고 로제타에게그 누명을 씌웠던 영애들은 각자 크든 작든 간에 벌을 받게될 것이다.
***
아덴 공작령에는 이미 소환수를 타고 돌아간다고 연락을 해 놓은 상태였다.
미카엘은 곧바로 공작저의 앞마당으로 내려가지 않고 소환수로 하여금 공작령의 상공을 비행하게했다. 로제타에게앞으로 그들의 땅이 될 곳을 구경시켜 주려는 목적이었다.
숲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산맥과 호수, 영토의 삼분의 일 정도가 농경지인 것이 보였다. 크고 작은 도시와 마을이 있는 이곳은 이미 하나의 작은 왕국을 연상케 했다.
제국의 크기가 있으니 라스탄 제국의 다섯 공작들의 공작령은 하나의 작은 왕국이라 불리어도 될 만큼의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아덴 공작령은 그 규모가 컸다. 미카엘의 마법 연구를 위해 황제가 흔쾌히 산맥 하나를 공작령에 끼워 넣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저까지 포함해서 전부 로제타의 것입니다."
로제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고 있는 이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공작령을 한차례 둘러보는 것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소환수는 크게선회하여 공작가의 본성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뾰족한 지붕을 가진 아덴 공작가의 성은 황성에 버금갈 정도의 규모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백작가의 영애인 로제타로서는 이래도 되는가싶은 화려한 성이었다.
가장 크고 웅장한 본성과 네 개의 작은 성으로 나뉘어 있었다. 미카엘은 그중에서도 본성의 앞마당에 소환수가내리게 했다.
소환수는 날아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주위에 돌풍을 일으키며 서서히 내려앉았다. 바람이 멎고 소환수가날개를 갈무리하자 대기하고 있던 고용인들의 모습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공작가의 고용인들이구나.'
수도 근처에 있는 별장에서도 만나 보았지만, 본성에 있는 자들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저도 모르게 긴장하는 로제타의 뺨으로 미카엘의 손길이 다가왔다.
"긴장하는 겁니까? 귀엽네요."
소곤거리는 말에 로제타의 얼굴이 붉어졌다. 미카엘은 로제타를 먼저 소환수의 등에서 내리게 하고 자신도 따라 내렸다.
고용인들은 도열한 채로 미카엘이 돌아설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미카엘은 소환수를 돌려보내고 로제타의 곁에 섰다.
"공작님. 주인마님."
다른 이들보다 두어 발자국 앞에 서 있던 남자가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집사인 허버트입니다."
미카엘과는 이미 알고 지낸 지가오래되었으므로, 이 인사는 로제타를 위한 것이었다. 허버트는 한 발 옆으로 물러서며 제곁에 선 중년 여인을 보았다.
그녀는 친절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로제타에게 말했다.
"시녀장인 제나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마님."
신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서 미카엘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공작가의 중요 부분을 담당하는 이들 일부만이 로제타앞에서 제소개를 했다.
공작가안에서 일을 하는 자들은 너무 많았기에, 단번에 기억하는 것에는 무리가있었다. 제나는 일단 로제타의 시중을 들 시녀들을 추천했다.
당장은 이들에 대해 아는 바가없었기에 로제타는 받아들였다.
"이제들어가요, 로제타."
미카엘이 로제타의 손을 잡아 감싸며 말했다. 로제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카엘과 나란히 공작가의 저택으로 향하는데, 돌연 미카엘이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미카엘 님?!"
"이 집으로 온 건 처음이니까. 침실까지는 안고 가고 싶습니다."
하고는 반론할 틈도 주지 않고 성큼성큼 저택의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은 이미 활짝 열려 있는 상태였다.
아덴 공작이 이미 성의 고용인들에게 단단히 일러두었기에, 로제타에게 함부로 할 만한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작의 마음이 확실하게 부인에게 있다는 것을 하인들에게 각인시키는 것은 중요했다.
"그, 그래도…. 침실까지 멀 것 같은데."
"제체력에 문제가없다는 것은 매일 밤 확인시켜 드리고 있습니다만. 아직 부족했습니까?"
미카엘의 짓궂은 대답에 로제타는 사정없이 그의 팔뚝을 꼬집었지만, 미카엘은 아픈 내색도 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없었다면 그녀의 얼굴에 키스 세례를 퍼부을 듯한 표정이었다.
공작저의 현관을 넘어 넓은 계단을 올라가는 걸음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무거운 웨딩드레스를 입었을 때도 거뜬히 침실까지 안고 갔던 미카엘이었다. 이 정도로 힘들어할 리가없다.
'과연 로맨스 소설 남주….'
다행스럽게도 공작저 본성의 구조는 지난번에 들렀던 별장과 비슷한 듯싶었다. 다만 그보다 몇 배는 더 크고 넓은 듯했다. 몇 개의 계단을 올라가공작부부의 주 거주 구역으로 들어가니 장식이 한층 화려해진 것이 눈에 띄었다.
미카엘은 그곳에 이르러 침실까지 들어간 이후에야 로제타를 침대 위에 내려 주었다. 그러며 눈을 흘기는 로제타의 입술에 쪽 하고 입 맞췄다.
"목욕물부터 준비하게 할까요? 아니면 식사부터?"
로제타는 그가신혼여행 때부터 고수해 온 그녀의 시중들기를 이곳에서도 이어 갈 작정임을 깨달았다. 공작체면이 있지, 그래도 되는 건가? 싶었으나 한편으로는 본인이 좋다는데 누가뭐라고 그럴까 싶기도 했다.
이제부터 이곳은 그들의 저택이고 돌아갈 곳인 것이다.
"목욕부터요."
"분부대로 전하겠습니다."
미카엘은 가벼운 입맞춤만으로는 부족했던지, 로제타를 붙잡고 길게 입 맞춘 후에 속삭였다. 시녀들을 부르러 나가는 미카엘을 보며 로제타는 키스 받은 입술을 매만졌다.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이대로 있을 수는 없어!'
황제의 동생이며 아덴 공작. 그쪽에서 먼저 다가오지 않으면 쳐다볼 수도 없는 높은 자리에 있는 인물이었지만, 완전히 기회가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성녀였기에.
'딱 하나 방법이 있다.'
교단에서는 벌써 여러 차례 아이리스의 복귀를 요청하고 있었다. 여섯 개의 교단이 난립하고 있는 이 세계에서 아이리스는 유일한 성녀였다. 거기다 교황급의 신성력을 지닌 인물이라 어떻게든 모시고 싶어 안달이었다.
아이리스는 교단의 소속이기는 했으나, 제국 유일의 성녀라는 타이틀 덕분에 황실의 보호를 받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교단에서도 함부로 아이리스의 거취를 결정하지 못했다.
지금의 양부모를 만나고 그들의 딸이 된 것도 황제의 명을 듣고 나타난 미카엘이 신경을 써 주었기때문이었다.
이렇듯 황실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아이리스를 보호하고 있기에, 교단에서는 아이리스의 눈치를 살피는 형국이었다.
'아덴 공작령에도 신전은 있을 터….'
성녀로서 아덴 공작령에 위치한 신전으로 부임하면 된다. 그녀의 신분은 교황보다는 못해도 대신관급이었다. 매일같이 만나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구실을 붙여서 공작가에 방문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라 여겨졌다.
교단에서는 그녀의 이 요구를 거절하지 못할 터였다. 그들로서는 아이리스가교단에 복귀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테니까!
'좋았어! 결정했으니, 지체하지 말자! 미카엘은 벌써 공작령에 도착했을 거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아이리스는 활기찬 목소리로 마차를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다.
***
"캐스틸…. 지방 말입니까?"
대신관은 듣자마자 그곳이 어디인지 눈치채고 눈살을 찌푸렸다. 캐스틸 지방 일대가바로 아덴 공작령이었기때문이었다.
어디를 가도 신전은 어느 정도 번화한 마을이나 도시에 있기마련이었다. 거기다 성녀란 작은 도시나 마을에 있는 신전이 아닌, 큰 도시의 신전에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캐스틸 지방의 대신전이 있는 곳은 아덴 공작가의 본성이 있는 도시와 같았다. 아이리스가어떤 의도에서 그것을 청했는지 눈치챈 대신관의 주름이 깊어졌다.
"성녀님…."
"불가한 일이겠습니까? 아덴 공작부인의 상처 문제도 있고…. 아덴 공작님께 받은 것이 많기에 그분의 영지민들을 도우며 그 은혜를 조금이나마갚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하나…. 두 분께는 불미스러운 소문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 그곳으로 부임하셨다가또다시 좋지 않은 소문에 연루되실까 봐 걱정스럽습니다."
거기다 미카엘의 부인인 로제타의 존재도 있었다. 민중에 도는 소문으로는 로제타가완전히 누명을 뒤집어쓴 것이라고 하지만…. 남편에게 접근하는 여자는 누구든 좋게 보는 사람이 없는 법이었다. 그것이 얼굴에 난 상처를 치료해 준 이라 해도 그러했다.
"대신관님께서 걱정하시는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이리스는 다시 간곡한 어조로 답했다. 대신관은 탐탁지 않다는 시선으로 성녀 아이리스를 바라보았다. 겉모습이나 태도야 크게 변한 바가없었지만, 지난 2년간 아이리스는 퍽 묘하게 바뀌었다.
성녀로서 남자와 소문이 났다고 한다면 꺼릴 법도 하건만, 어려워하는 것도 없고…. 거기다 무엇에든 적극적이고 꽤 밝아진 모습이었다.
'그저 그것만이라면 다행인 일인 것일 테지만.'
지금의 성녀는 갑자기어린아이가되어 버린 것 같았다. 철이 없다고나 할까?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향해 질주하는 야생마…. 라기보다는 멧돼지 같은 기색이었다.
'아이리스 님은 어렸을 때도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차분하고 주변의 사람들을 잘 챙겼던 아이리스였다. 고민하던 대신관은 아이리스가내내 억눌려 살다가귀족 사회를 접하고 성격이 변한 것이 아닌가싶었다.
'부딪히고 나서 포기하게 되는 것도 있는 법이다.'
듣자 하니 미카엘 황자는 누명을 썼다는 그 영애를 지극히 사랑하는 모양이었다. 그를 곁에서 볼 아이리스가가엽기는 하다만, 스스로가원한 일이었다. 차라리 그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미카엘에 대한 마음을 접을 수 있다면 교단에는 이득일 것이다.
"알겠습니다…. 위에 말씀을 올려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신관님."
싹싹하게 인사를 올리는 아이리스를 대신관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역시 변해도 너무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미카엘과 로제타의 짐을 실은 마차는 저녁 식사를 마칠 즈음에야 도착했다. 그나마도 순간이동 마법진을 이용하여 줄인 거리라고 하니 수도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가실감 났다.
이미 많은 짐이 공작저에 와 있었지만, 그래도 짐 정리가필요했다.
실질적으로 정리하는 것은 하인들이고 로제타는 지시만 했는데도 시간이 상당히 소요되었다.
늦은 밤에야 정리를 마친 로제타는 피곤해 보였다. 미카엘은 로제타를 먼저 재우고 통신용 수정구슬을 꺼냈다.
로제타의 잠을 방해하지 않기위해서라도 다른 방에서 연락해야 할 테지만, 미카엘은 아직 로제타를 제시야에서 떼어 놓는 것이 어려웠다. 특히나 로제타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미카엘.
통신용 수정구슬 너머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미카엘은 의례적인 인사말을 건네며 황제의 안색을 살폈다.
"…일은 잘 끝난 것 같군요."
-그래. 공작부인은 자고 있는 건가?
"네. 곤히 잠들었습니다."
알렉시스는 수정구슬에 얼핏 비치는 실내가침실인 것만으로도 미카엘이 침실 밖으로 나오지 않았음을 눈치챘다.
오늘이 공작저로 들어온 첫날이니만큼 더 조심하고 싶을 것이다. 이자벨 카룰리아스가리디아의 일을 자백하지 않았으니 더더욱.
영애들이 자백한 것을 아네트가꾸몄듯이, 평민들의 여론도 하루 만에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황제파의 일원이 여러 가지 소문을 조심스레 흘려 놓은 결과였다.
이렇게 빨리 로제타에게 호의적인 여론이 모일 줄은 몰랐다. 사안이 워낙 자극적인 만큼 소문 또한 빠르게 확산된 것이라 분석했다.
뭐라 해도 황제가연 무도회에서 그와 같은 유혈 사건이 났으니, 백성들의 시선이 쏠리는 것은 당연했다.
-네 아내에게 말하기 전이냐?
"오늘은 일이 많아서 아직 말하지못했습니다."
로제타에게 이 일을 털어놓을 생각을 하면 약간 불안했다. 민심이 너무 빨리 돌아서 버린 탓에 무도회장에서 있었던 사건이 가짜임을 공표할 타이밍을 놓쳤다. 로제타가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황을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었다.
-공작부인의 누명이 벗겨졌으니, 죄지은 자가 먼저 연락을 취해 올 것이다.
한두 번에 그친 것이었다면 사교계에서 외면받는 정도로 일이 끝났을 테지만, 그들은 1년여에 걸쳐 무고한 영애의 평판을 떨어트렸다.
이것은 각 가문에 배상 책임을 지우는 것은 물론, 징역을 살게 할 수도 있는 죄였다.
평민이었다면 유야무야 넘어갈 수도 있었을 테지만, 상대가 귀족이 되면 달랐다. 휘르센 가문에서 고소를 하여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게 만들 수 있는 사건이 되는 것이다.
-이미 휘르센 백작가에는 사죄를 하는 편지가 쌓이고 있다더구나. 제 자식의 징역형만은 어떻게 해서든 모면해 보겠다는 수작이겠지.
물론 모든 가문에서 죄를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까지도 자식의 혐의를 부인하며 아니라고 주장하는 가문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 황실에서 겹겹이 덫을 놓고 증거를 확보한 상태였다.
카룰리아스 공작가를 수색하여 그들 개개인의 약점까지쥐고 있는지라, 그들의 저항은 오래가지못하리라 생각되었다.
-아덴 공작령은 이곳과는 거리가 떨어져 있다만…. 그럼에도 사람을 보내 사죄를 하거나 직접 찾아가는 이가 있을 거다.
가장 죄가 무거운 이자벨의 재판을 우선으로 처리하더라도, 나머지영애들의 고발 및 재판은 순차적으로 진행되게 되어 있었다. 이자벨에 대한 조사가 마무리되지않아 아직 영애들에 대한 고발을 미루고 있지만, 곧 진행될 것이다.
재판 날짜 전까지로제타에게 죄를 용서받았다는 사인이나 편지를 받으면 비교적 가벼운 형을 받을 수도 있었다.
미카엘이 황궁에서 머무는 날짜를 짧게 잡은 것은 그래서였다.
저들의 접근을 어렵게 만들기 위해.
아네트가 추궁하기 전까지는 로제타에게 미안하다는 마음 한 자락을 가지고 있는 이가 몇 되지않았으니, 그들의 반응이야 뻔했다.
살살 구슬려 용서를 받았다는 증거만 손에 넣으면 된다는 식이겠지.
"절대 로제타에게 접근하게 두지않을 겁니다."
-그래야지. 혹시 공작부인이 재판 상황을 지켜보고 싶다고 하면 말해다오. 수도로 돌아와도 되고, 아니라면 수정구슬을 통해 지켜볼 수 있도록 황궁의 마법사에게 이르마.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오냐. 이 일은 긴 상처를 남길 수 있는 일이니 각별히 신경 써 주는 것이 좋을 거다.
"알고 있습니다."
말하며 미카엘은 고개를 돌려 로제타를 바라보았다. 깊이 잠들었는지뒤척이지도 않고 잘 자고 있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폐하."
-그래. 너도 신혼잘 보내라.
그 말을 끝으로 수정구슬의 빛이 사라졌다. 미카엘 또한 수정구슬에 걸린 마법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로 돌아가니 로제타가 눈을 비비며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미카엘 님?"
"깼습니까? 더 조용히 들어올 걸 그랬습니다…."
미카엘은 로제타의 곁에 누우며 속삭였다. 로제타는 배시시 웃으며 미카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얇은 옷자락 너머로 느껴지는 체온이 따스했다.
"금방 잠들 수 있어요. 아직 졸려…."
"주무십시오. 제가 곁에 있겠습니다."
그 말은 꼭 미카엘은 자지않겠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로제타는 더 말을 잇지못하고 가물가물한 눈을 감았다. 금세 숨소리가 고르게 울리는 것에 미카엘은 만족했다.
'잘 자요, 로제타….'
***
수도 안에서 로제타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이 형성되자, 가장 먼저 힘을 얻은 것은 백작가의 고용인들이었다.
그들은 음식 준비를 하는 주방에 모여 그 일에 대해서 떠들어댔다. 빈손으로 입만 털었다가는 시녀장에게 혼이 날 수 있었으므로, 각자 손에는 양파와 감자를 하나씩 들고 열심히 까고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우리 아가씨가 맹한 구석은 있어도, 독한 구석은 없는데! 그럴 리가 없지!"
"맞아요. 성녀니 뭐니 하는 여자만 보였다하면 피하기 바빴는데…. 계속 그 여자만 골라서 괴롭히실 리가 있겠어요?"
저택 밖으로 나가면
'그 휘르센가?'
라고 불리며 은근히 배척받았던 그들이었다. 괴롭힌 이가 그저 한미한 가문의 영애가 아니라 성녀인 아이리스 리온인 탓이었다.
우리 아가씨는 얼빠진 구석이 있어서 그런 음모 같은 건 못 꾸민다고 우겨도, 들어 주는 이는 하나 없었다.
사람들이 하도 그러하니, 정말 그런가? 하고 도끼눈을 뜨고 로제타를 보려고 해도, 주인 아가씨라 눈을 깔게 되고, 또 자신들에게 못되게 구는 것은 아니어서 갸웃했었다.
거기다로제타의 전속 시녀인 마리도 늘 펄펄 뛰며 로제타 편을 들었기에, 그들은 긴가민가하던 참이었다.
"아, 그러게 내가 뭐랬냐고!!"
가장 기가 산 것은 마리였다. 마리는 이곳에 결혼을 약속한 애인이 있어서 로제타를 따라 공작령까지가지못했다. 로제타 또한 수틀리면 이혼하거나 도망칠 생각이었기에, 굳이 마리에게 같이 가자고 청하지않았다.
"아가씨가 여기 계셨어야 하는데! 우리 아가씨한테 손가락질하고 욕한 인간들, 다무릎 꿇리고 빌게 만들었어야 하는데!"
"용서는 구하겠지만…, 빌기야 하겠니? 귀족 체면에."
"한두 번이라 해도 못 참을 판국에! 우리 아가씨 괴롭힘당한 햇수가 몇 년인데요!"
"1년 좀 넘었나?"
뭐라도 얻어먹을까 주방을 기웃거리던 마부가 끼어들자 마리가 버럭 화를 냈다.
"그게 짧아서요?!"
"아, 왜 나한테 화를 내고 그래. 나는 남들이 아가씨 욕하면…."
"욕하면?"
모두의 시선이 모이자 얼렁뚱땅 대답할 셈이었던 마부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잽싸게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지~."
"에~이."
"아, 왜! 다들 한 목소리로 욕하는데, 나 하나가 무슨 힘이 있나? 쭈그러드는 거지."
다들 비슷한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야유하는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다수가 상대일 때에는 목소리를 내기 힘들었다.
"이제라도 밝혀져서 다행이지. 그 공녀라는 여자, 악독하기도 하지. 우리 아가씨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미카엘 황자님 때문이잖아요."
"남자 때문이래도! 누가 그렇게까지해? 여간 독한 여자가 아니야…."
"무도회장의 일도 있고…. 폐하가 빨리 사형시켜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우리 아가씨 안심하고 주무시지."
"응응."
"그러게 말이야."
하인들이 그렇게 수긍하는 찰나 부엌문이 벌컥 열렸다. 다들 화들짝 놀라서 돌아보니 심부름꾼인 로시가 들어오고 있었다.
"깜짝이야! 기척 좀 하지."
하녀의 구박에 로시는 날름 혀를 내밀고는 마리를 보았다.
"누가 너 좀 찾는데?"
"누가?"
"나야 모르지. 네 친구 아냐?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가 봐."
시큰둥한 반응에 당장 주방 하녀와 안채의 시녀들이 몰려들었다.
"남자, 여자?"
"여자예요."
로시의 한마디에 이들은 모두 흥미를 잃고 흩어졌다. 로시가 따로 말을 덧붙이지않는 것으로 보아 여자 혼자인 모양이었다.
마리는 갸웃하고는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하인들 통로로 빠져나갔다. 기사들이 아침 운동을 하고 있는 둘레를 지나 백작가의 정문으로 향하니, 과연 로브를 뒤집어쓴 여인이 보였다.
얼핏 보이는 얼굴은 마리 또래였으나, 특유의 거만함이 엿보였다. 마리는 단박에 그녀가 누군지알아보았다.
'저게 왜 여…, 어?'
마리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갔다. 양 소매를 걷어붙이고 콧김을 뿜어내며 성큼성큼 걸어가는 모습이, 누가 봐도 싸우러 가는 모습인지라 문지기가 움찔했다.
"마, 마리?"
"열어 주세요. 저거 내쫓아야 돼요!"
당당하게 로브의 여인을 가리키며 마리가 말하자 문지기가 순순히 문을 열었다. 마리가 나오자 이쪽을 힐끗거리고 있던 여자가 억지로 웃었다.
"오래간만이네."
"오래간만 좋아하네! 재수 없게 아침부터, 얼른 안 사라져!"
생각 같아서는 욕을 한 바가지는 쏟아붓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있어 그렇게 하지못했다. 마리의 말을 듣고 여자는 눈이 쌜쭉해졌다.
"나는 너 생각해서 좋은 얘기 해 주려고 온 건데. 그렇게 나와도 돼?"
"참~, 니가 날 생각해 줬겠다! 집사 어르신한테 너 우리 아가씨한테 어떻게 한 건지일러서, 사람들 끌고 한번 나와 봐? 머리카락이 한 줌은 뽑혀야 정신 차리지!"
마리가 금방이라도 달려들듯 소리를 지르자 여자는 찔끔한 얼굴로 어깨를 움츠렸다. 마리는 그것으로 기세등등해져서 허리에 손을 얹었다. 마리의 목소리가 더 커지기 전에 여자가 불쑥 마리 앞으로 목걸이 하나를 들이밀었다.
"뭐야?"
의심 가득한 얼굴로 마리가 물었다. 그녀, 멜리사는
'네가 그러면 그렇지.'
라는 얼굴로 새침을 떨었다.
"우리 아가씨가 너 가져다주라고 하셔서. 그동안 미안했다고 하시더라."
"……."
얼핏 보기에도 엄지손톱만 한 에메랄드가 달린 비싼 목걸이였다. 함정일 것이 분명한 수작이었음에도 마리의 마음은 흔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일 년 봉급을 모은다해도 그녀로서는 살 수 없는 물건인 것이다.
"들고 있는 사람 무안하게 이게 무슨 짓이니? 받아."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다문 마리의 손에 멜리사가 목걸이를 쥐여 주었다. 손바닥에 에메랄드 목걸이의 감촉이 느껴지자 마리는 기겁하며 손을 털었다.
"너, 너 이래 놓고 나 도둑으로 몰려고 하는 거지? 안 속아!"
"도둑은 무슨. 이래서 머리 나쁜 애들은 안 돼. 회유하려는 거지, 당연히~."
"회, 회유?"
멜리사는 목걸이를 쥔 손을 유혹하듯 흔들며 말했다.
"백작가에서 잘해 줘봤자 얼마나 잘해 주겠니? 너 결혼하면 일 그만두고 약혼자네 가게에서 일할 거라며? 그럼 돈 필요하지않아?"
"…결혼안 해도 돈은 필요해."
마리는 불쑥 대답했다. 멜리사가 참 멍청한 소리를 한다싶었던 것이다. 멜리사가 픽 비웃는 모양새가 참 꼴 보기 싫었다.
"우리 아가씨 말만 잘 따르면…, 이딴 목걸이 정도가 아니라 더 큰 걸 주신다고 했어. 수도 귀퉁이에서 작은 가게를 하는 정도가 아니라…, 지방의 소도시에서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을 정도로."
"……."
"귀 열고 있어? 소도시의 부자로 살 수 있다니까?"
멜리사의 말에 마리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나한테 바라는 게 뭔데?"
"이제야 좀 머리가 도나 보네. 너…. 그 아가씨 오래 모셨잖아."
"그랬지. 8살 때, 놀이 친구로 들어가서 지금까지 모셨으니까."
마리는남작가의 사생아였다. 그 집에서 학대당하는것을 셀리나가 눈여겨보고, 사 오는것이나 다름없이 휘르센 백작가로 데려갔다. 마리의 어머니는남작가의 하녀였다. 마리를 낳고 추천장 없이 쫓겨나 거리에서 죽었다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리는휘르센 백작부인도, 로제타도 퍽 좋아했다.
로제타는화를 잘 내고 단순하기는해도 제 놀이 친구에 시녀라고 잘 대해 주었고, 셀리나는마리를 지옥 같은 그곳에서 빼 준 사람이었다.
거기다휘르센 백작가는일하기 괜찮은 곳이었다. 주인들의 성품이 박하지 않아선지, 고용인들도 너그러웠다.
만약 남작가에 남아 그대로 컸다면 자신의 삶이 어떻게비참해졌을지 짐작이 갔다. 그래서 마리는휘르센 백작가를 퍽 좋아했다.
돈을 주고 데려왔음에도 결혼해서 백작가를 나가는것을 반대하지 않은 이들이었다. 반대는커녕 소액의 결혼 축하금도 준다고 약속했다.
"그…, 그렇지?"
"그럼 뭐 하나 알지 않아? 네 아가씨가 꼼짝 못 할 비밀 같은 거…."
드디어 멜리사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마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게본론이었구먼?
마리는기가 찼다. 죄를 지었으면 사과하고 벌을 받는게먼저지, 이런 식으로 피해자의 약점을 잡으려고 들다니.
"우리 아가씨는단순해서 비밀 같은 거 안 만드셔."
"세상에 비밀 없는사람이 어딨어?!"
"있네. 우리 아가씨!"
솔직히 말해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일 것이다. 멜리사는후작 가문 영애의 시녀였고, 그 집은 어마어마한 부자였으니까. 로제타에게죄를 뒤집어씌운 영애들 중에, 자신의 죄를 시인하지 않는한 명이었다.
'하지만 진짜로 약점 같은 거 없다고. 단순하고 게으른 거?'
그나마도 요 1년간 괴롭힘을 겪으며 좀 달라지신 것같았다. 마리는빙의하여 뒤바뀐 로제타의 성격을, 누명과 다른 사람들의 질시로 바뀐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리는멜리사에게날름 혀를 내밀고는휘르센 백작가로 도망쳐 버렸다. 멜리사가 약이 올라 발을 굴렀으나, 마리를 따라 들어가지는못했다.
먼발치서 엿보고 있던 문지기가 멜리사를 아가씨의 적이라 판단하고 무서운 눈초리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
'못된 것들 같으니라고!'
문제는이런 유혹이 마리 한 사람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데 있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로제타의 방을 청소했거나, 시중을 들었거나, 가까이에서 호위했던 모든 이들에게이런 유혹의 손길이 다가왔다.
수법은 다양했다. 더 좋은 일자리를 소개시켜 준다고 약속한다든가, 거액을 내밀거나, 집이나 가게를 주겠다고 하는가문도 있었다.
다만….
'아가씨가 약점이 있어야 말이지!'
평범한 영애로서의 약점은 당연히 있다. 아침잠이 많다든가, 단 거나 고기를 밝힌다든가, 주말에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한 몸이 된다든가. 그러나 이 정도의 단점은 그들이 바라는'약점'이 아니었다.
휘르센 가문도, 로제타도 이렇다할 약점 같은 것은 없었다.
왜냐하면 원작의 로제타는이용당해 파멸하는1차원적인 악역이었고, 휘르센 가문은 서브남3의 가문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본디 로제타 휘르센은 그 단순함 때문에 이자벨에게속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운명이었다. 로제타의 몸에 다른 이가 빙의되었다해도, 극도로 조심 또 조심해 온 그녀가 인제 와 약점을 만들 리 없었다.
그래서 로제타를 모셨던 자들도 아쉬움에 침만 삼켰다. 아무리 돈과 권력으로 유혹해 봐도 내어줄 정보가 없는데 어쩌겠는가?
덕분에 세간에서는휘르센 백작가의 고용인들이 제법 충성심이 있다고 평가받게되었다. 백작가로서는의도치 않게귀족으로서의 명성을 높이게된 일이었다.
약점을 잡으려는시도가 무산되자 그들은 정공법으로 나섰다.
귀족의 체면이 있으니 많은 이들이 보는앞에서는부탁할 수가 없고…. 로제타 휘르센의 부모인 엔디미온과 셀리나를 사적으로 만나고 싶어 안달이었다.
이미 황제의 측근으로부터 로제타에게누명을 씌운 가문의 목록을 받은 그들이었다. 엔디미온과 셀리나는가해자의 가문에서 초대장만 날아와도 노발대발했다.
물론 친분이 있는사람을 통해 자리를 주선받는자도 있었다. 그러나 엔디미온이든 셀리나든 간에 그런 자리라면 당장 박차고 나왔다.
가해자 가족의 그런 괴롭힘에서 제럴드라고 무사할 수 있는것은 아니었다. 그는기사단까지 쫓아와 로제타에게전해 달라는부탁을 받고 불쾌해했다.
참다못한 제럴드가 폭발하여 결투를 신청하기 시작하자 그제야 그들은 멈췄다. 검으로 제럴드를 누를 자신은 없었던 것이다.
사정이 이렇게되자 엔디미온은 황제에게가해자 가족들의 접근을 막아 달라고 청했다.
황제인 알렉시스는그 청을 받아들였다. 휘르센 백작가는물론 아이리스 리온에게사적으로 접근하는이는진행 중인 재판을 방해한 것으로 간주해 엄벌에 처하겠다고 공표했다. 또한 수사 중인 사건에 간섭한 것으로도 치부해 최고 형량을 내리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제야 휘르센 백작가를 향한 검은 손들은 멈췄지만, 완전히 사그라든 것은 아니었다. 엔디미온을 비롯한 백작가의 식솔들은 그 정도로도 한시름 놓았다.
***
"저 하나를 괴롭힌 정도였다면 용서해 드릴 수도 있었을 겁니다."
아이리스는차가운 얼굴로 자리에 모인 영애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들은 겉으로는죄책감 어린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도 억울하다는눈빛은 지우지 못했다.
"하나 무고한 영애에게자신의 잘못을 뒤집어씌운 당신들에게는그럴 수 없군요."
본디 용서란 죗값을 전부 치르고 제 잘못을 깊이 뉘우친 자에게만 허용되는자비였다. 아이리스는저들의 태도에서 그것을 읽을 수 없었다. 이 순간만을 모면하기 위해 연기를 한다는느낌을 받았다.
'드라마와 영화로 단련된 내 눈을 속일 수는없지.'
이것은 진풀잎이 아이리스에 빙의되지 않았다하더라도 아이리스가 했을 법한 말이었다. 그녀는자신에게잘못을 한 이에게는너그러워도, 타인을 해친 자들에게는그렇지 않았다. 하물며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타인에게덮어씌우기까지 했으니, 그 죄가 더 무거웠다.
"성녀라고 해서 네가 뭐라도 되는줄 아는모양이지!"
"가짜 귀족인 주제에!"
"그러니 미카엘 님께 버림받은 거야!"
제각기 아이리스에게악담을 퍼붓고는돌아가는영애들의 모습에 아이리스는미간을 구겼다. 아이리스의 연기를 하는것은 이렇게어려웠다. 진풀잎 본인이었다면, 그녀들의 처지를 신나게비웃었을 것이다.
'못돼 처먹은 것들! 내가 용서해 준다고 해도 미카엘이 내버려 둘 것같으냐?'
계략 남주인 미카엘은 제가 사랑한 이를 건드린 자를 용서하는법이 없었다. 로제타에게그런 모습을 들키고 싶지는않으니 아마도 뒤에서…, 저들의 가문을 하나씩 파멸시키려 들 것이 분명했다.
그 앞에, 황제나 법의 처벌은 지극히 가벼운 것이 될 터였다.
응접실을 빠져나가던 그녀들은 공작가의 자제인 로건과 후작가의 후계자인 패트릭이 서둘러 들어오자 당황했다. 얼굴을 가리고 허둥지둥 물러나는그녀들을 사납게노려보며, 그들은 아이리스의 곁으로 다가갔다.
"괜찮나, 아이리스?"
아이리스의 옆자리를 차지한 것은 로건이었으나, 그 발치로 다가와 손을 잡은 것은 패트릭이었다. 아이리스는옅은 미소를 보였다.
"괜찮아요."
"죄를 뉘우칠 줄 모르는자들이군요. 폐하의 엄명이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로건은 언짢은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그는방금 지나쳐 온 영애들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 속에 담아 둔 터였다.
"…불온한 가문들이 피해자의 가족을 귀찮게군다는얘기가 있어 급히 왔더니. 역시나로군."
불온한 가문들.
이번 사건에 연루된 스물일곱 개의 가문을 지칭하는말이었다. 어디서 나온 말인지는알 수 없으나, 사교계에서는그런 말이 나돌고 있었다. 서서히 그들에 대한 배척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말이었다.
"한 번 거절했으니 다시 찾아오지는않을 겁니다. 저는정말괜찮아요. 걱정되는것은…, 로제타 님이로군요."
친분이 있는것도 아니니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 안 된다는것은 알지만, 아이리스는그녀를 아덴 공작부인으로 부르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이름이어야 하니까.
패트릭이나 로건은 아이리스의 그 호칭을 이상하게만 여겼을 뿐 지적하지 않았다. 여기 있는이는그들뿐이었으니.
"그녀에게는미카엘 황자가 있잖아."
"황자가 곁에 있다해도 1년이나 누명을 썼어. 아무도 믿어 주지 않으니 입을 다물고 있었겠지만 괴로웠을 테지."
로건이 수긍하며 말했다. 그는로제타에 대한 패트릭의 반감을 조금이라도 낮춰 보고 싶었다. 그래야만 그가 로제타에게접근하는일이 쉬워질 것이다.
"…정말그녀가 누명을 쓴 게맞긴 하는건가?"
아직 로제타를 믿을 수 없는패트릭이 내키지 않는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녀가 피해자라는사실은 패트릭에게있어 어딘가 불편하게다가왔다.
"제가 괴롭힘을 당할 때마다제 시선을 가리는이가 있었어요. 혹은 뒤에서 공격을 받아 공격한 자를 알 수 없게되는…. 그런 식이었지요. 한 번도 휘르센 영애가 제게무엇을 하는건 본 적이 없어요."
오히려 로제타는그녀를 도우려는쪽이었다. 그 방법이 어설퍼서 그렇지.
뜨거운 차가 쏟아져 화상을 입을 뻔한 아이리스에게꽃병의 물을 부은 것은, 도와주는척 괴롭히는것이 아닌가 하는의심이 들었었다.
물론 자신이 범인으로 지목되자, 아이리스를 피하는쪽으로 바뀌었지만 말이다.
"많이 괴로웠을 거야. 나중에는가족들까지도 그녀를 비난했으니까 말이야."
로건이 재차 로제타를 두둔하자 패트릭의 표정이 불편해졌다. 여기 있는사람들 중에서 가장 화를 많이 낸 이는패트릭이었으니. 로제타를 가장 심하게대한 이도 그였다.
"…사과를 해야 한다는얘기로군."
욕지거리를 중얼거리고 싶었으나 곁에 아이리스가 있음을 의식했다.
설사 로제타가 피해자 중 한 명이라고는해도 아이리스와 같은 안타까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의 지긋지긋한 편지 때문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고민에 사로잡힌 패트릭을 내버려 두고 로건은 아이리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대신관으로부터 한 가지 부탁을 받은 참이었다.
"리온 영애. 아덴 공작령으로의 발령을 부탁하셨다고요?"
"뭐?!"
물어본 것은 아이리스에게였으나 먼저 목소리를 낸 것은 패트릭이었다. 패트릭은 뒤통수를 맞은 얼굴로 아이리스를 보았다.
"정말인가, 아이리스?"
"네. 결정되면 두 분께도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그들의이런 반응쯤은 예상했던 바였다. 아이리스가 담담하게 그것을 인정하자 로건은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패트릭은 당황한 모양이었다.
"어째서…. 네가 아덴 공작령으로 가야 할 필요는…."
"어차피 성녀로서 봉사해야 하기도 하고, 미카엘 황자님께 받은 은혜가 크기에 그곳에서 봉사하기로 한 것뿐입니다."
"성녀님. 반드시 그러셔야만하시겠습니까? 미카엘 황자와의스캔들도 있으니, 공작령으로 가는 것은 영리한 생각이 못 됩니다."
거기다 미카엘은 갓 결혼한 남자였다. 아이리스가 그를 연모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해 쫓아갔다는 인식을 심어 줄 수도 있었다.
"이것은 전부터 마음에 두었던 일입니다. 제 작은 소원이기도 하니 부디 반대하지 말아 주세요."
저 두 사람이 반대한다 한들, 아이리스는 강행할 욕심이었지만말은 그렇게 해 두었다. 그 말을 들은 패트릭은 눈에 띄게 누그러진 표정이었다. 로건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미카엘 황자가 포기가 되지 않는단 말인가?'
이미 결혼까지 한 남자였다. 거기다 로제타 휘르센의무고함이 밝혀졌으니, 꿍꿍이가 있는 것은 로제타가 아닌 미카엘일 터…. 리온 영애가 로제타를 구하자고 아덴 공작령으로 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마음을 바꾸지 않으신다면…, 저도 성녀님을 보좌해야 하니 함께하겠습니다."
대신관이 로건에게 부탁한 것은 아이리스의마음을 돌리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실패했다. 남은 것은 혹시라도 아이리스가 미카엘에게 휘말리지 않게 곁을 지켜 주는 것뿐이었다.
로건은 성기사이기는 하나 발레르 공작가의둘째이고 백작이라는 지위를 가졌다. 교단 내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아이리스가 교단에 신청하여 발령지를 정할 수 있는 것처럼, 로건 또한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너도 아덴 공작령으로 가겠단 말인가?"
패트릭은 눈살을 찌푸리며 로건을 노려보았다. 로건이 아이리스와 함께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으나, 미카엘에게 대항할 누군가는 있어야 할 터였다.
'그게 반드시 로건일 필요는 없지!'
로건이 함께하는 것을 막고 다른 인선을 끼워 넣고 싶지만, 란스필드 후작가의힘만으로는 부족한 일이었다.
"…결국 미카엘 황자가 신경 쓰인다는 얘기잖아. 그럼 나도 함께하지."
"그럴 필요는 없을 텐데."
패트릭의말에 로건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차피 미카엘은 아이리스를 밀어내려 할 테니, 두 사람이 같이 공작령으로 간다면 기회는 로건에게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로건의표정에 패트릭은 심술궂게 웃었다.
"미카엘 황자가 걱정되는 거라면 한 명이라도 더 우군이 있는 편이 낫지 않나? 그는 만만치 않은 상대니까 말이야."
"와 주신다면 감사한 일이지요."
아이리스는 긍정하며 말했다. 로제타와 패트릭을 이어 주고 싶었었는데, 그가 알아서 따라와 준다면 고마울 따름이었다. 로건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팔짱을 꼈다.
"아덴 공작령이야. 지낼 곳은 있고?"
"구실이야 만들면 그만이지."
란스필드 후작가이니 그 정도쯤은 일도 아니었다. 거기다 패트릭은 미카엘과는 외사촌 간이었다. 지금은 서로 데면데면하지만한때는 미카엘 황자의또래 친구로 황궁에 불려 가기도 했었다.
'여차하면 공작가에라도 신세를 져야겠지….'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미카엘 황자의속셈이 뭔지 궁금하기는 하니까 말이다.
***
정말 참고 또 참았지만, 닷새째의아침이 한계였다.
공작가의성에 온 첫날은 성에 이미 도착해 있는 짐들을 정리하느라 분주해서 하지 못했고, 이틀째인 날도 같은 이유였다. 셋째 날에는 하루 종일 공작가의저택과 성을 돌아다니느라 하루가 꼬박 소요되고 말았다.
다음 날도 같은 이유였다.
지쳐서 금세 곯아떨어져 버리는 로제타를 다시 깨울 수도 없었으므로 미카엘은 참았다. 아주 많이 참은 거였다.
그러고도 저택과 성을 다 돌아보지 못해서, 미카엘은 처음으로 성이 넓은 것이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왜 이렇게 구경할 것이 많단 말인가!
"로제타, 로제타 제발…."
닷새째의아침이 되자 미카엘이 이렇게 속삭이며 덮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로제타의마음을 확인하는 것을 닷새나 미루고 말았으니.
엄밀히 말하자면 나흘이었지만, 미카엘에게는 닷새를 꽉 채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로제타도 자신이 좀 심했다는 자각이 있었는지, 웃으며 미카엘을 받아들여 주었다. 애초에 그가 욕구가 깊은 것은 알고 있었다.
"흣, 읏…. 앗, 아앗!"
그 며칠 사이에 미카엘에게 안기던 감각을 잊었던 걸까? 아니면 미카엘에 대한 감정이 또다시 자라나기라도 한 걸까…. 지나치게 달콤하게 느껴지는 쾌락에 로제타는 넋을 잃었다.
로제타의이런 변화를 눈치채지 못할 미카엘이 아니었다. 온몸과 영혼을 홀릴 듯한 쾌락 속에서도 이를 알아챈 미카엘은 환희에 젖어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두 사람이 서로의몸을 탐닉하는 시간이 늘어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미카엘은 로제타에게 달라붙어 허리를 멈출 줄 몰랐고, 로제타도 기분이 좋아서 그저 그가 하는 대로 몸을 내맡겼다. 기쁜 마음이 들어 미카엘의목을 당겨 입을 맞추기라도 하면, 미카엘이 흥분하여 섹스 시간이 더 길어지고 말았다.
"앗, 아아…… 좋아…. 이거 좋아."
"좋습니까, 로제타? 나도 좋아요…….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아."
서로의입술을 정신없이 맛보며 타액을 뒤섞는 것만으로도 음란한 느낌이 들었다. 로제타는 몽롱하게 풀린 눈으로 미카엘의밑에서, 때로는 위에서 아래위로 흔들렸다.
섹스 중에 그가 흥분하여, 혹은 서로의쾌락을 높이기위해 그녀의몸을 만질 때도 놀라울 정도로 감미로운 자극이 퍼져 나갔다.
'이거 왜 이렇게 좋은 거지? 미카엘도 그런가……?'
혹시나 싶어 그의가슴을 만지자 미카엘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쾌락으로 붉게 물든 얼굴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 실렸다.
"흐읏, 로제타…. 그러면 안 돼, 그러지 말아요. 참고 있는데, 로제타가 그러면……."
그럼 이건?
무심코 제 안을 황홀하게 헤집는 미카엘의것을 조였다. 미카엘의표정이 흐려지며 아름다운 얼굴에 무언가를 참는 기색이 가득 어렸다.
'아, 귀여워라…. 귀여워.'
미카엘이 왜 섹스 중에 자신에게 귀엽다고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너무 귀여워서…, 더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미카엘이 정신없이 느낄 때까지 괴롭혀 주고 싶다.
그러나 현실에서 쾌락에 휘둘리는 것은 로제타 쪽이었다. 로제타의달콤한 괴롭힘에 흥분해 버린 미카엘이 더욱더 음탕하게 그녀를 몰아세웠던 것이다.
수용하는 쪽의쾌락이 더 크다지만, 지금 그녀는 미카엘의주문이 걸린 상태였다. 로제타의감정이 미카엘과 비슷한 수준으로 자라나면, 어마어마한 즐거움을 맛보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흐앗, 으…. 아아아앗! 아아……. 아아아……!"
너무도 달콤한 열락에 로제타는 그저 미카엘의품에 안긴 채로 말이 되지 못한 소리만내질렀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타액이 흐르고, 배 속까지 달콤하게 술렁였다. 절정을 맛봐 음탕하게 수축하는 속살에 미카엘은 짐승처럼 허리를 놀렸다.
"하아…. 로제타……. 로제타, 사랑해요."
포개지는 뜨거운 입술에도 신음하며 로제타는 미카엘의혀를 받아들였다.
전부, 너무도 황홀했다.
***
'아…. 이런 삶은 안 되겠다.'
배는 고프고, 해는 지고 있었다. 미카엘에게 안길 때는 너무 기분이 좋아서 그저 즐기고 있었는데, 이건 안 될 일이었다.
'하루 세끼를 다 빼먹었어!'
빙의되기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던 일이었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저녁이야 지금이라도 챙겨 먹으면 된다지만, 놓친 두 끼가 아까웠다. 미카엘에게 시달리려면 하루 세끼를 잘 챙겨 먹어야 하는데 말이다.
로제타는 한숨을 쉬며 그녀를 껴안은 채로 곤히 잠들어 있는 미카엘을 쳐다보았다. 그동안 욕구불만이 심했는지,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행복해 보이네.'
기분만이야 로제타도 행복하기는 했다. 배가 너무 고파서 그렇지.
꼬로로록….
위장에서 나는 소리가 아주 선명했다. 꼬박꼬박 세끼를 잘 챙겨 먹고 간식까지 먹어 주어서 최근에는 듣는 일이 없었던 소리였다.
그러자 미카엘은 마치 제 배 속에서 소리가 나기라도 한 것처럼 번쩍 눈을 떴다.
"어…. 로제타, 배고픕니까? 음식을 가져오게 할까요? 지금…."
본능적인 손짓으로 로제타를 품으로 끌어당기며 미카엘이 주변으로 눈을 돌렸다. 그의눈에 막 저물어 가는 저녁노을이 들어왔다.
"미, 미안해요."
당황한 미카엘의얼굴이 벌겠다. 손바닥은 마주쳤는데, 왜 혼자 미안해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요?"
로제타가 미카엘의허리를 끌어안으며 그를 올려다보자 미카엘의낯빛이 다른 의미에서 붉어지기시작했다.
정직한 그의몸은 이 와중에서도 착실하게 흥분하고 있었다. 금세 단단해진 것이 로제타의배를 눌러, 미카엘은 물론 로제타까지 이불 속을 쳐다보았다.
"지금, 하려는 게 아니라! 로제타가 안아 주니 흥분돼서…."
"알고 있어요."
당황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이러는 것도 전부 좋았다. 로제타가 배시시 웃으며 미카엘의가슴에 얼굴을 비비자 미카엘이 멍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고요."
웃는 얼굴이었으나 단호하게 덧붙이자 미카엘은 꼴깍 침을 삼키며 끄덕였다. 미카엘은 될지 몰라도 로제타의몸 상태로는 무리였다.
"네…."
"저녁 먹고, 이거에 대해서 얘기좀 해요."
다정한 목소리에, 상냥한 얼굴로 말했건만미카엘은 잔뜩 긴장해 버리고 말았다.
"제가 미카엘님을많이좋아하게 돼서….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요."
로제타의 입에서 좋아하…, 까지 튀어나온 시점에서 미카엘은 심장이제 기능을잃어버린 듯한 기분이들었다. 멍한 얼굴로, 얼굴을벌겋게 물들인 채로 로제타를 쳐다보는 시선에 로제타는 갸웃했다.
"듣고 계세요, 미카엘님? 그 주문 말이에요."
"네? 주, 주문이요?"
로제타의 '미카엘을많이좋아한다'는 말에 혼이빠졌던 미카엘은 로제타의 뒷말을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상태였다. 미카엘은 눈을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문…, 말이군요. 무슨?"
"그거요. 좋아하는 만큼 더 느끼게 된다고…."
"아아, 그거 말이군요."
미카엘은 그제야 생각이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로제타와의 결혼 생활이너무 행복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로제타는 살포시 뺨을물들이며 다시 말했다.
"제가…, 미카엘님을생각보다 많이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그래서 매번…, 너무 정신없이느껴서……. 공작가에 정착하기도 했고, 이제 노, 노력해서 주문을풀면 어떨지…, 하고."
"……."
"이제 저도 미카엘님이절 좋아하신다는 걸 아니까요. 저도 그렇고…. 이제 매일 확인하실 필요는 없지 않나요?"
로제타의 감정에 3배만큼 더 느끼게 했다는 것을모르니 그리 말하는 것일 것이다. 로제타는 미카엘의 그 거짓말 때문에 자신이그를 좋아한다고 여기고 있는 듯했다.
미카엘스스로가 바라던 상황이었지만, 왜인지 씁쓸했다.
"로제타의 뜻이그렇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만, 제가 해 드렸던 말은 기억하고 계신 거겠지요?"
로제타는 뺨을물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카엘과의 잠자리가 좋아진 건 좋은데, 너무 느끼니 슬슬 위험하다 싶은 생각이들었다. 어차피 이전에도 미카엘과의 잠자리는 좋기만 했으니, 굳이주문의 힘을빌릴 필요가 없겠다 싶었다.
'미카엘이더 좋아지기 전에 이주문을풀어야 해!'
"느끼면 안 된다는 거 말이죠?"
"절정을느끼지만 않으면 됩니다. 그것만 지켜 주시면 제가 로제타와 제 몸에 걸린 주문을풀 수 있을테니까요."
그들의 감정에 선명한 차이가 나는 만큼, 미카엘은 로제타에게 걸린 주문을풀기 싫었다. 그에게서 이토록 달콤한 쾌락을맛볼 수 있다면, 다른 사내는 거들떠보지도 않게 되리라는 생각이들어서였다.
그래서 더 좋아지고, 그 감정을바탕으로 더 느끼고…, 좋아지고를 반복하다 보면, 로제타도 자신을사랑하게 되리라 생각했다.
거기다 설사 그 감정이사랑까지 나아가지 못한다 해도, 이런 쾌락을줄 수 있으니 버려지지 않을것이란 계산도 깔려 있었다.
"알겠어요."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로제타의 입술에 미카엘은 가벼운 키스를 떨어트렸다.
언젠가 이사실을들키게 된다면 로제타에게 미움을받을것 같지만…, 그래도 이것밖에는 생각나지 않았다. 로제타를 자신에게 묶어놓을방법이.
'들키면 빌어야겠지.'
한 번도 누구에게 빌어본 적이없지만, 아마도 최선을다해 빌게 될 것 같았다.
***
공작령의 사람들은 묘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처음에 그들은 공작님께서 악녀로 소문이나 있는 영애와 결혼을해서 뭔가 싶었다.
귀족들은 이면의 거래가 있을거라 판단했고, 평민들은 그저 흔해 빠진 귀족들 사이의 정략결혼이겠거니 했다. 귀족들은 늘 그렇다 생각했으니까.
세상의 많고 많은 영애 중에 왜 그런 영애인지…. 폐하께서 참 냉혹하시다고 혀를 찼었다. 세상 무서운 것이없는 아덴 공작이그런 결혼을할 이유는 황제밖에 없다고 여겼으므로.
그러다 황실 무도회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소식이전해졌다.
그들은 모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황궁에서! 그것도 축하 무도회에서 그런 일이벌어지다니….
그 어떤 사람도 버텨 내기 어려운 사건인지라, 많은 사람들이아덴 공작부인을측은하게 여겼더랬다. 마침 성녀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신의 축복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후에…, 지난번 사건만큼 놀라운 일이일어났다.
영애들 중 몇몇이양심선언을했다는 소식이었다. 우리 공작부인은 이미 악녀로 불리고 있었는데, 그게 다 연극이고 조작이라는 얘기였다.
이를 전해 들은 공작령의 귀족들은 경악했고, 평민들은 혀를 내둘렀다. 과연 젊은 처자라도 귀족들은 다르다는 생각이들 정도였다.
상황이이쯤 되니 측은한 마음이슬슬 분노로 뒤바뀌었다.
그런 끔찍한 일을겪은 공작부인이실은 악녀도 아니었다니! 이억울한 마음을어디다 풀어야 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저 상전의 상전.
평생에 몇 번 얼굴 볼 일도 없는 공작부인이었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사는 지역을다스릴 분이었다.
이제국을다스리는 폐하께서 뺨을맞았다고 해도 이리 화가 나지는 않을것이다. 그들은 괜히 분통이터졌다. 공작부인이억울한 것인데, 왜인지 제가 당한 것처럼 가슴이답답하다는 생각이들었다.
그러다가 수도에서 연루된 영애들의 가문이피해자인 휘르센 가문과 리온 가문을회유하려 한다는 소문이나돌았다.
곧, 여기 공작령으로도 그런 자들이들어올 것이다.
수도에서 아덴 공작령의 초입까지 들어오는 데는 3일. 관문을통과하여 아덴 공작가의 성이있는 곳까지 들어오는 데는 다시 2일이걸렸다.
소문이다소 늦은 감은 있었지만, 영지민들은 묘한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어디 이땅에 발 디디기만 해 봐라!'
'몰래 마차 바퀴 축에 흠집을내 놓아야지!'
'음식에 돌을섞어놓을까 보다!'
이역시도 황제나 미카엘이계산하지 못했던 효과였다. 미카엘이나 로제타가 모르는 사이, 공작령의 주민들은 이렇게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
영지민들의 결의도 모른 채 미카엘은 행복의 절정을맛보고 있었다. 그는 이주문을만들어낸 자신과 변명이랍시고 말도 안 되는 조건을붙인 과거의 자신을칭찬해 주고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로제타, 준비되었습니까?"
상기된 두 뺨에서 미카엘의 기쁨이느껴져 로제타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주문을풀기 위함이었건만, 시도할 때마다 해야 하는 통에 미카엘은 상당히 많이좋아하고 있었다.
'거기다 매번 엄청 느껴지고….'
미카엘이기분 좋게 해 주니 어쩔 수 없다. 참아야 하는 건 아는데도 자꾸만 자신의 몸이절정을맛봐 버려서 로제타는 난처했다.
"주, 준비됐어요."
대답하는 로제타의 뺨을미카엘이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로제타를 바라보는 미카엘의 녹색 눈동자에 황홀하다는 기색이감돌았다.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면….
'더 부끄러워지는데!'
지난 며칠을제외하고, 결혼하고 나서 매일매일 관계를 하고 있건만, 그때마다 왜 이리 기뻐하는지 모르겠다.
"흐으읏!"
파고들어오는 페니스의 감촉에 로제타는 진저리를 쳤다.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돋을만큼 자극적인 쾌락에 머릿속이멍해지는 것 같았다.
"읏, 아아……."
"그렇게 기분 좋습니까, 로제타?"
로제타를 끌어안은 채로 속삭이는 미카엘의 목소리조차 꿀처럼 달콤하게 느껴졌다. 나신으로 뒤덮듯 끌어안고 있는 그가 급하게 허리를 움직이자, 쾌락에 반응한 듯 부드러운 속살이술렁거렸다.
"으응…. 세게 하면……. 아앙!"
"미안, 해요. 로제타…. 로제타의 안……. 너무 기분 좋아서…."
한쪽은 마음 놓고 느끼고 사정까지 해야 하는데, 이쪽은 절정을맛보면 안 된다니. 너무 불공평한 룰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절정을맛보는 순간 방출되는 로제타의 마력이, 미카엘이주문을푸는 것을방해한다고 설명하니 어쩔 수 없었다.
'절정을맛보는 순간 마력이방출된다니…. 무슨 19금스러운 설정이냐고!'
"하읏, 하읏! 응, 아앙…. 으으응……. 앙 대, 너무 기분 좋게…. 아앗!"
점점 격렬해지는 허릿짓에 로제타는 타액을흘리며 흐느꼈다. 느끼면 안 되는데…. 미카엘의 페니스가 너무 기분 좋았다. 로제타의 느끼는 곳은 물론이거니와 흠뻑 젖은 속살의 구석구석까지 파헤치는 듯한 허릿짓에 정신을차리기 어려웠다.
"아, 로제타! 흐으……. 으음, 헉…."
쾌락으로 흐려진 표정으로 자신에게 매달리는 미카엘의 입술에 키스하며 로제타는 황홀한 자극에 몸을떨었다. 절정을참아야 한다는 것만 아니면 정말 기분 좋았다.
'못 참아! 아니, 참기 싫어! 이렇게 기분 좋은데…. 가는 순간 엄청 느낀다고!'
"흐앗! 앗, 아아아아…… 안 돼, 안 돼! 못 참겠어!"
"로제타…."
"아앙, 더 기분 좋게……. 싫어, 싫…. 아흐흑, 아앗! 아하아아아앙!"
시달리던 로제타는 활처럼 몸을젖히며 도달하고야 말았다. 심지어미카엘보다도 빠른 절정이었다. 바르르 떨며 느끼는 로제타 안으로 사정한 미카엘은 행복한 표정으로 흐뭇하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기회는 많이있으니까요."
황홀한 듯 속삭이며 미카엘은 로제타의 입술에 키스했다. 로제타 또한 쾌락에 젖은 멍한 눈초리로 미카엘의 키스를 받았다.
아직 처음 한 번 시도한 것뿐이니 괜찮을거라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