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 황자에게 사로잡혔다-6화 (6/21)

제6장. 황궁에서의 사흘

황제 부부에게서 받은 선물들은 시종에 의해 방으로 옮겨졌다. 그들과의 만남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로제타는 드물게도들뜬 기분을 느꼈다. 부담으로만 여겨졌던 황실 무도회도끝났고, 오늘을 제외한 사흘간의 황궁 생활이 끝나면 수도를 떠날 수 있었다.

공작령으로 들어간다면 그곳에서는, 그곳 나름의 어려움이 있겠지만. 자신을 배척하는 귀족들과 떨어져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마음이 편했다.

그들은 이미 시선으로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감히 너 따위가?'

본인이 바라서 미카엘과 결혼한 것이 아닌 만큼 로제타에게는 억울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그모든 것이 큰 문제 없이 마무리 지어졌다고 로제타는 생각했다.

공작령으로 내려가게 된다면, 수도에서 황제가 불러도미카엘만 보내리라. 수도로 같이 가 주지 않아 미카엘이 바람이라도피운다면, 그것을 빌미로 이혼하면 된다.

어쨌든 로제타는 더는 수도로 올라오지 않을 작정이었다. 수도는 이자벨의 영역이었으니까.

'이제 괜찮겠지. 황궁에서는 이자벨도더는 어쩌지 못할 테고.'

사교계에서 이자벨이 암묵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는 해도, 황실이나 황궁에서는 얘기가 달랐다. 알렉시스도아네트도만만치 않은 인물이었으니까.

그두 사람이서 미카엘의 행동을 묵과해 주었기에 아이리스는 그렇게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괜찮아. 이제 나흘만 지나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 거야.'

안도한 로제타와는 달리 미카엘은 차근차근히 상황을 되짚어 보고 있었다. 이자벨에게 동원되었던 영애들을 휘어잡는 것은 황비님이, 카룰리아스 공작가를 손보는 것은 폐하께서 맡아서 해 주신다고 했다.

그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신부에게 집중하라는 엄명이었다. 말은 번지르르하지만 알렉시스가 자신을 걱정해서 그렇게 해 주었음을 알았다.

이자벨을 조사하면서 혹여리디아 사건과의 접점이 나올까 우려하는 것이다. 과거의 사건이 들춰져서 이성을 잃게 되면, 아직 잡지도못한 로제타의 마음까지 멀어질 수 있었다.

또한 이번 사건을 꾸미며 가짜라고는 해도로제타의 얼굴을 난도질한 것으로 위장했다. 그사건 때 리디아는 오히려 얼굴만은 남아 있었지만, 사건의 잔혹함에 미카엘이 과거를 떠올릴까 두려워했다.

다른 누구도아닌 황제인 알렉시스가.

그정도로 미카엘은 리디아의 사건 이후로 많이 변했던 것이다.

'네 얼굴이 좋아진 것 같아 다행이구나.'

알렉시스는 아네트와 얘기를 나누는 로제타를 보며 미카엘에게 그렇게 속삭였었다. 리디아의 사건 이후로, 미카엘은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속은 아니었다. 가장 가까운 이들만이 그변화를 알아차렸다.

'로제타 덕분입니다….'

미카엘은 그렇게 대답하며 로제타를 보았다. 이번만큼은 머리카락 한 올, 마음 한 조각도다치지 않게 보호해 주고 싶었다. 온 열과 성을 다해, 자신이 이용하고 동원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끌어들여그렇게 할 작정이었다.

그들이 안내받은 궁은 새벽궁이었다. 새벽빛을 받으면 성의 외벽이 오묘한 빛으로 물든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시종은 침실까지 안내하고는 조용히 머리를 조아리고 물러났다. 먼저 침실로 들어간 로제타는 방 안이 꽃잎으로 장식된 것을 보고 웃었다.

침대 근처의 테이블에는 차가운 샴페인과 간단한 안주도준비되어 있었다.

'우연이겠지? 내가 좋아하는 샴페인이네.'

물론 로제타의 취향에 맞춘 것이지만, 로제타는 황제 부부가 거기까지 신경 써 줄거라고는 꿈에도생각지 못했다.

"따라 드릴까요?"

아까 무도회장에서는 긴장하여제대로 먹고 마시지도못했을 것이다. 미카엘이 시종을 통해 음식을 가져오게 시켰지만, 로제타는 거절했다. 그러며 미카엘의 귀에 속삭이는 것이,

'지금 먹으면 체할 것 같아요.'

였다.

"네. 그래 주세요!"

드물게 기분이 좋은 로제타가 긍정했다. 미카엘은 이것보다도산미가 강하거나 맛이 묵직한 술을 즐기는 편이었지만, 뭐든 로제타에게 맞추고 있었다.

로제타가 웃는 것을 보면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가 기뻐하는 것을 보면 맛없는 것도맛있게 느껴지니, 술 취향을 맞추는 것은 아무것도아니었다.

두 개의 잔을 채워 가볍게 서로의 잔에 부딪힌 그들은 샴페인을 맛보았다. 로제타는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도맛이 좋은 것에 놀랐다.

같은 상표지만 황실에 진상하는 것은 물건이 조금 달랐다. 두 사람을 위한 날이었으므로 아네트가 특별히 주문하게 한 것이었다.

"조금 다른 제품이군요. 마음에 들어요?"

"네…. 맛있어요."

"더 따라 드릴게요."

잔을 채우고, 먹고 싶었던 핑거푸드도먹었다. 로제타를 소파에 앉힌 미카엘은 익숙한 듯 로제타의 발에서 구두를 벗겼다. 미카엘은 로제타의 발뒤꿈치나 발가락에 다친 곳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만족했다.

"부끄러우니까 내려 주세요."

가죽 구두를 오래 신고 있었으니 발에서 냄새가 날까 신경 쓰였다. 미카엘은 로제타의 발등에 입 맞출까 하다가, 잔뜩 경계하고 있는 표정을 보고 관두었다.

"드레스, 불편하지 않습니까? 벗겨 드릴게요."

달콤하게 웃는 얼굴에 은근한 목소리로 말하는 미카엘에, 로제타는 잠시 눈을 반짝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거 말고…."

로제타의 시선이 방 한쪽에 놓여있는 상자에 와닿았다. 황비가 선물한 티아라가 들어 있는 상자였다. 드레스를 벗기 전에 써 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아아…."

미카엘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상자를 가지고 돌아왔다. 상자 뚜껑을열고 반짝이는 그것을로제타의 머리에씌워 주었다.

두근.

뭉클한 기분에미카엘은 수줍은 듯이 웃고 있는 로제타를 바라보았다.

티아라는 공작가의 여인이나 황족이나 얹을수 있는 것이었다. 백작가의 영애인 로제타가 그것을머리에쓰고 있는 것을보니 제 여인이라는 실감이 났다.

"예뻐요, 로제타…. 결혼식 날 이렇게 씌워 주었으면 좋았을텐데. 내가 많이 미안해요."

공작과의 결혼식이니 티아라를 쓸 수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그가 신분을드러내고 접근했다면 로제타에게 위험했다.

"아니에요. 그날의 결혼식은 정말 기뻤으니까 아무것도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별장 입구에서 보았던 꽃 터널도 아름다웠고, 저녁식사도 근사했고…, 또……."

둘의 첫날밤이 떠오르자 로제타의 얼굴이 붉어졌다. 미카엘은 키득거렸다.

"첫날밤도 훌륭했고요?"

"아, 아주 훌륭하셨어요."

"솔직하게 말해 주네요?"

놀리는 듯한 어조에로제타는 그를 흘겨보았다. 부인해 봤자 로제타가 미카엘에게 안기며 실컷 즐거움을누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지금도 매일 밤 그에게 안기며 엄청 느끼고 있었으니까.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만회해 보겠다고 할 거잖아요."

"들켜 버렸네요. 그럼 첫날밤의 일을오늘 재현해 보는 건 어때요?"

"괜찮지만…, 드레스를 벗기 전에미카엘님과 한 곡 더 추고 싶어요. 지금 음악은 없지만요."

로제타의 말에미카엘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녀가 자신과 춤을추고 싶어 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을느꼈다.

"지칠 때까지라도 괜찮아요. 음악은 준비할 수 있으니까."

음악이 없어도 괜찮다고 말할 줄 알았건만, 들려온 것은 전혀 다른 대답이었다. 미카엘은 로제타의 입술에가볍게 키스하더니,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침실을나왔다.

서재를 지나 거실을가로지르니 안쪽에위치한 음악실이 보였다. 음악실이라는 것도 미카엘의 팔에안겨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안 것이었다.

미카엘은 로제타를 한 팔로 안은 채로도 능숙하게 마법을써서 음악실을밝혔다. 환해진 실내에로제타가 미카엘을돌아보았다.

"지금 연주자를 부르려고요? 그렇게 할 필요는…."

"로제타. 내가 마법사잖아요."

이것은 어릴 때 그가 장난삼아서 만든 주문이었다. 유령이 나타나 연주한 것이라고 사람들을놀라게 하기 위해.

그가 피아노와 비어 있는 악기들을향해 주문을걸자 악기가 스스로 움직여 음악을연주하기 시작했다. 그가 연주하게 할 수 있는 곡은 몇 가지 안 되었지만, 왈츠 등 춤곡이 두 가지는 되었다.

저절로 연주하기 시작하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모습에로제타의 눈이 커졌다. 어린 시절 만든 주문인 만큼 음악은 매우 가벼운 곡이었다.

그러나 로제타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샴페인까지 마셔서 기분이 매우 좋았으니까.

미카엘은 로제타를 음악실한가운데에내려서게 하고는 우아하게 인사했다. 로제타 또한 치맛자락을살짝 들어 올리며 마주 인사했다.

서로를 바라보는 부부의 시선에서 웃음이 감돌았다. 그들은 가벼운 웃음을터트리며 느긋하게 춤을추기 시작했다. 스텝이 엉켜도 상관없고, 박자를 놓치거나 동작이 틀려도 상관없었다. 미카엘에게는 로제타의 웃음소리와 환한 얼굴만이 전부였고, 로제타 또한 그러했다.

로제타는 이 순간 진정으로 미카엘과 지내는 시간이 즐거워졌다. 그녀의 안에서 작게만 느껴졌던 그에대한 마음이 한 뼘 더 자란 순간이었다.

내리 세 곡을추고서도 그들은 지치지 않았다. 세 번째부터는 이전 곡의 반복이었으므로, 로제타는 그만하면 되었다 싶었다.

침대 위에서 따로 할 일이 있었으니까.

로제타가 미카엘의 옷깃을끌어당겨 입술을포개자 미카엘의 눈이 커졌다. 그로서는 이토록 행복한 데이트는 처음이었다.

"사랑해요, 로제타."

두근거리는 감정을이기지 못하고 속삭이자 로제타가 미소를 보였다. 그의 고백에로제타가 난처한 얼굴을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더는 참을수 없어!'

미카엘의 손이 허겁지겁 로제타의 드레스를 벗겼다.

***

벗어 놓은 옷가지가 바닥에깔렸다. 순식간에속옷 차림이 되어 버린 로제타가 아직 바지를 입은 채로인 미카엘을보았다. 미카엘의 녹색 눈동자가 정욕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미카엘만큼은 아니라 해도 로제타도 원했기에그의 손길을따라 코르셋을벗었다. 속치마가 끌어 내려지고, 레이스로 만든 얄팍한 팬티가 벗겨졌다.

로제타가 뺨을물들이며 미카엘의 탄탄한 가슴을쓸어내리자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낮은 숨소리가 마치 신음 소리처럼 들렸다.

"로제타…."

미카엘은 제 바지를 벗을새도 없이 로제타의 다리 사이로 손을밀어 넣었다. 춤을추면서 여러 차례 키스했기 때문인지 약간 젖어 있었다. 미카엘은 그것만으로도 기뻐서 군침을삼켰다.

옷가지 위에로제타를 눕힐 수도 있었지만, 옷에달려 있는 장식이 걸렸다. 딱딱한 장식 위에로제타가 눕혀지면 불편할 것 같았다.

'어디….'

침실까지는 그리 멀지도 않았건만, 침실은 그의 선택지에들어 있지도 않았다. 미카엘은 벌거벗은 로제타를 피아노 의자로 이끌었다.

음악실에는 커다란 창이 나 있었지만 모든 창에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래서 로제타도 부끄러움도 잊고 미카엘과 움직일 수 있었다.

"로제타, 여기에손을대고 엉덩이를 뒤로 내밀어 봐요."

피아노 의자를 두드리며 말하는 것에로제타의 얼굴이 붉어졌다. 미카엘의 의도를 알기에거부할 수 없었다. 바지 위로 그의 욕망이 두드러져 보이기도 했고.

'창피한데….'

로제타가 피아노 의자를 짚으며 허리를 뒤로 빼자 미카엘이 그녀의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야릇한 손길에로제타의 등허리가 파르르 떨렸다. 미카엘의 음란한 손끝이 엉덩이 사이 골을훑어 내려가는 것에오소소 소름이 돋는 듯했다.

"으응…."

체위 때문인지 로제타의 은밀한 곳이 전부 보였다. 젖기 시작한 꽃잎에서부터, 미카엘의 시선을느낀 듯 옴찔거리는 작은 구멍까지.

입 맞추고픈 충동에미카엘은 군침을삼키며 뜨거운 눈길을보냈다. 거기에얼굴을가져가면 로제타가 기겁할 것임을알지만, 붙잡고 로제타가 울 때까지 빨아 주고 싶었다.

"귀여워요, 로제타."

"힉!"

노선을바꿔 봉긋한 엉덩이에입술을눌렀지만 로제타는 화들짝 놀랐다. 미카엘은 야릇하게 웃으며 그녀의 허벅지를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긴장과 기대로 갈라진 틈새가 오므려졌다가 다시 열리는 것이 보였다.

"거의 매일 안아 주었는데도…, 이럴 때는 긴장하는군요. 걱정하지 말아요. 아무리 흥분했어도 내가 로제타를 아프게 할 일은 없을테니까."

허벅지를 따라 올라온 손가락이 들어올 듯 말 듯 꽃잎 주위를 맴돌았다. 로제타는 가늘게 숨을헐떡이며 미카엘을돌아보았다. 고개를 든 미카엘이 그녀의 등에입 맞추고는 간질이듯 부드럽게 꽃잎을훑어 내렸다.

로제타는 깊은 한숨을쉬며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이가 자신을원한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하긴 로판의 세계니까….'

열망 어린 시선으로 로제타의 눈을바라보던 미카엘이 그녀의 꽃잎 틈새로 손가락을밀어 넣었다. 길고 우아한 것이었지만 로제타의 것보다 굵고 거친 손이기도 했다.

"으읏…."

"아직도 이렇게 좁아서…. 많이 풀어 드리지 않으면…."

파고든 손가락을느리게 움직이는 것에도 점막이 문질러졌다. 로제타는 어젯밤 안긴 것보다도 기분 좋게 느껴지는 것에당황했다.

'왜? 그사이 미카엘이 더 좋아졌나?'

느끼고 있는 얼굴을들킬세라 로제타는 고개를 돌렸다. 부드럽게 안을침범하던 손가락이 안을켜는 것에허리가 움찔 튀었다.

"반응이 좋다. 기분 좋아요, 로제타?"

이제 겨우 손가락 하나일 뿐인데도 느꼈다. 로제타는 자신이 아직 미카엘을사랑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겨우 호감이 좀 더 자라났을뿐인데도 이렇게 느끼니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모, 몰라요. 그런 거 물어보지…. 으으응!"

손가락이 구부러지며 안을강하게 긁어내렸다. 입구까지 빠져나왔던 그것은 두 개째의 손가락과 같이 파고들었다. 안이 한층 벌어지는 느낌에로제타는 숨을삼켰다.

'기분 좋아.'

무도회에서의 긴장도, 피로도 잊은 채로 집중할 수 있었다. 아까 마신 샴페인의 기운 때문에그런지도 몰랐다.

"읏, 아아…. 아흑!"

세 개, 네 개째로 늘어난 손가락이 로제타의 안을음란하게 들쑤셨다. 부드럽게 문지르는가 하면 야릇하게 비벼대고, 안을긁어내리며 희롱했다.

느릿하게 반복되는 자극에로제타의 그곳은 흠뻑 젖어 투명한 액체를 흘리고 있었다. 여린 입구도 자극에반응하여 씰룩씰룩 미카엘의 손가락을빨아대는 것에, 미카엘의 입가에흐뭇한 미소가 어렸다.

"…맛있어요, 로제타?"

"몰라…. 아앙, 응…. 미카엘님, 이제 그만……. 아아앗!"

손끝을구부려 안을켜는 놀림에로제타의 고개가 젖혀졌다. 자극으로 바르르 떠는 로제타를 황홀한 듯이 바라보며 미카엘은 손가락을뽑았다.

"하아…."

손목까지 흐른 투명한 액체에절로 군침이 돌았다. 가볍게 제 손목에입술을눌러 그것을혀로 핥은 미카엘은 낮게 신음했다.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도 감미로웠다. 미카엘의 욕정 어린 시선이 로제타의 갈라진 틈새를 향했다.

로제타가 화를 낼까? 아니면 부끄러워 울어 버릴까.

어느 쪽도 미카엘의 구미를 돋우는 일이었다. 화를 내는 로제타도, 부끄러워 우는 로제타도 보고 싶었다. 치밀어 오르는 욕망에이끌려 미카엘은 로제타의 엉덩이를 붙잡았다.

덥석 잡는 손길에무언가 이상함을느낀 로제타였으나, 뒤를 돌아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순간 젖은 숨결이 로제타의 꽃망울에느껴졌다.

"에?! 잠깐! 아앗!!"

처음이라 해도 이런 감촉을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타액에젖은 혀가 갈라진 틈새로 벌리고 들어오는 감촉에로제타는 기겁했다.

"안 돼! 미카엘님, 그, 그거 안 돼! 앗…. 흐아아……."

저런 것으로 느끼면 안 되는데, 거기가 야릇한 자극으로 녹아내렸다. 로제타는 쾌락으로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을느끼며 신음했다.

'말도 안 돼!'

민감한 입구가 황홀한 자극으로 술렁였다. 두툼한 혀가 좁은 곳을벌리고 들어와 집요하게 빨아대는 것에허리가 들떴다.

"흐읏, 아흑…."

이런 자극은 처음인지라 머릿속이 이상해질 것만 같았다. 상상했던 이상으로 감미로운 자극에엉덩이가 바들바들 떨렸다.

"앙, 잠깐…. 혀 움직이지…. 흐으응……. 앙 대…. 아앗!"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로제타는 미카엘을뿌리치지도 못한 채로 바들바들 떨었다. 멈추게 해야 하는데, 미카엘이 핥아 주는 것이 너무 좋았다.

"히익! 흣, 안 돼! 그건 싫어……. 앗!"

꾸물거리며 수축하는 속살의움직임에 로제타의엉덩이를 단단히 잡은 미카엘이, 추르릅 꿀을 빨아들인 것이다. 안까지 오는 진동에 로제타는 기겁하며 파르르 떨었다.

"안 돼요. 아앗…. 그거 마시지 마……. 아하아아아앙!"

다급한외침이 민망하게도, 로제타는 그것으로 가볍게 도달해 버리고 말았다. 절정을 맛보는 로제타의모습에 미카엘은 느리게 혀를 뽑았다. 이제는 더 커다란 것으로 그녀를 즐겁게 해 줄 차례였다.

"앗, 읏…."

바지를 내리고 제 것을 드러낸 미카엘이 주저 없이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입구를 빠듯하게 채우는 음탕한열기에, 로제타는 숨을 헐떡였다. 부끄러워 울고 싶었던 기분 위로 야릇한자극이 파고들어 왔다.

"사랑해요, 로제타…. 하아……, 너무 뜨겁고 부드러워…. 내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죠? 로제타…."

"흑, 히익…. 아흐흑…."

허리를 잡은 채로 가볍게 페니스를 아래위로 흔드는 것만으로도 안이 녹아내렸다. 미끈거리는 꿀을 흘리며 페니스에 감겨드는 속살에 미카엘의녹색 눈동자가 위험한빛을 띠었다.

"참을 수 없어…. 로제타의안……. 너무 기분 좋아서…."

"허억!!"

퍽, 허리를 찔러드는 몸짓에 커다란 것이 깊숙이 파고들었다. 로제타의엉덩이 위로 허리가 눌러질 정도로 깊이 밀어 넣는 것에 로제타는 허리를 비틀었다.

"아흐…. 응, 아앙…. 미카엘…. 아앗!"

돌연 로제타의허리를 끌어당긴 미카엘이 마구 허릿짓하기 시작했다. 장대한페니스가 쑥욱, 쑥 파고들며 퍽퍽 쳐대는 것에 눈앞이 벌써 하얗게 물들었다.

"앗! 아앙, 앗! 너무 세…. 아아, 아흐아!"

"아, 좋아…. 로제타……. 사랑해요, 으음…. 미칠 것 같아."

시작부터 넋을 잃은 듯한미카엘의반응에, 로제타는 그 또한감도가 높아졌음을 눈치챘다. 오늘의일로 로제타가 더 좋아진 모양이었다.

'그건 기쁘지만….'

"하으, 앙! 아아앙! 아앙…. 안 돼! 흣, 읏, 아앗…."

지나친 자극에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배 속이 쾌락으로 오그라들고, 발끝까지 관능적인 자극이 내달렸다.

로제타는 타액을 삼키는 것도 잊은 채로 버둥거렸다. 저도 모르게 미카엘의것을 조였다 풀었다 하는 것에, 미카엘은 미치겠는지 더욱 퍽퍽! 쳐댔다.

"흐앗! 응! 아앙, 놔줘…. 놔줘요! 아흐앙앙! 싫어어…. 너무 깊어, 아아아아앗!"

집요한허릿짓에 로제타는 얼마 견디지 못하고 절정을 맛보았건만, 미카엘은 아직이었다. 그는 달라진 감도에 적응하지 못했는지 미친 듯이 허릿짓하고 있었다.

"크으…. 헉, 으음……. 로제타…."

"앗, 아아……. 지금 움직이면…. 아앙!"

흐느끼며 허리를 비틀었으나 미카엘의집요한손길에 도로 끌어당겨졌다. 번번이 뿌리까지 박히는 페니스에 눈앞으로 불꽃이 튀었다.

"하아아앙! 아앙!"

또다시 부풀어 오는 쾌락에 신음하며, 로제타는 이 밤이 지나면 미카엘이 걸어 놓은 주문부터 풀어 버리겠다고 다짐했다.

***

미카엘과의섹스는 당연히 그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미카엘은 로제타를 피아노 의자에 앉게 한후에 다리를 벌리게 하여 삽입했다. 그리고 그 상태로 로제타를 들어 올려 그녀가 이성을 잃을 때까지 탐했던 것이다.

로제타는 좀처럼 내려 주지 않는 미카엘의위에서 거듭 쾌락을 맛보아야만 했다.

"흐윽, 아앙……. 더는…. 아, 아앗! 거기가…, 으응……. 제발, 미카엘…."

신음하며 애원하는 로제타에게 끈적한키스를 퍼부은 미카엘은, 한번만 더 하게 해 달라고 졸랐다.

미카엘의유혹적인 미소와 안을 자극하는 달콤한허릿짓에 녹아깜박 허락해 버리면, 정신을 잃을 듯한쾌락이 주어지는 것이다.

"아, 아아……. 아아아……."

마침내쾌락에 푹 절여진 로제타가 늘어지자 미카엘은 그제야 만족해 주었다. 미카엘은 로제타를 다시 피아노 의자에 앉히고는 조심스럽게 페니스를 뽑았다.

'아아……. 난 몰라.'

음악실 이곳저곳으로 움직이며 정사를 나눈 탓에 바닥에 음란한얼룩이 가득했다. 이걸 황실의시녀나 하녀들이 보면 무어라 할지…. 상상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졌다.

"귀여운 로제타. 침실로 돌아가서 또 해요. 침실에서는 여기에서보다 더 다양한체위를 할 수 있으니."

미카엘의속삭임에 로제타는 화들짝 놀라며 그를 보았다. 제정신인가? 그러나 미카엘의정신은 말짱해 보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글이글 타는 듯한미카엘의눈빛에 로제타가 무어라 말하려는 찰나 입술이 포개졌다.

'왜 키스까지 기분 좋아지는 거야!'

녹아내릴 듯한입맞춤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사이, 미카엘이 로제타를 안은 채로 음악실을 나왔다. 그대로 침실로 직진하여 다시 덮치는 미카엘에, 로제타는 싫다는 말 한마디도 못 한채로 감미롭게 탐해졌다.

미카엘에게도, 로제타에게도 황홀한밤이었다.

***

라울 카룰리아스는 딸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불이 켜지고 사람들의비명과 외침 소리에 고개를 돌렸을 때, 이자벨은 피투성이인 모습이었다.

'기어이 일을 저지른 것인가?!'

이자벨이 누명을 썼을 것이라는 생각은 없었다. 본디 타인의손을 빌려 잔혹한짓을 저질렀던 아이였다. 최근의저주도 있고…. 저주를 받아서 감춰 왔던 본성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라 여겼다.

로제타 휘르센을 난도질하는 것이야말로 이자벨이 원하던 것이었으므로.

그래서 카룰리아스 공작은 이자벨 곁으로 다가가기는커녕, 두어 걸음 물러났다.

휘르센 영애는 이제 아덴 공작부인이 되었다. 일개 백작 영애가 아닌 황족인 것이다. 그것도 황실과 연관이 있는 인척이!

이것은 쉬이 빠져나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이리스 리온을 상하게 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 황궁을 나가야 한다!'

카룰리아스 공작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의머릿속에 이제 이자벨은 안중에도 없었다. 저주를 받아몸값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딸이었다. 대외적으로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고위 신관도 서슴지 않고 죽였으나, 완전히 숨기는 것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이자벨에게 저주를 건 자의입을 막을 수 있는 길은 없었으므로.

이자벨이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그가 입을 다물 것이라 설득했지만, 카룰리아스 공작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이자벨의입장에서는 필사적으로 제 가치를 강변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카룰리아스 공작은 병사들이 달려오기 전에 무도회장을 빠져나가는 것은 성공했으나, 마차를 부르기도 전에 잡히고야 말았다.

가문의일원이 죄를 저질렀으니, 카룰리아스 공작가도 그 형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감히 카룰리아스 공작가의공작을 붙잡은 기사들은 그에게 아무런 설명 없이 본궁으로 끌고 갔다.

본궁의한방에서 카룰리아스 공작은 무릎을 꿇은 채로 기다려야만 했다. 굴욕적인 상황이기에 이자벨에 대한카룰리아스 공작의분노는 더 커져 갔다.

'고작 계집 하나 때문에 이런 모멸감을 느껴야 하다니!'

그는 좌우에 선 기사들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기사들은 그가 혹시라도 일어나지 못하도록 어깨를 잡고 짓누르고 있었다.

그를 이렇게 만든 이는 황제일 것이다.

오늘의무도회는 황제가 직접 연 것이니…. 그 분노는 가히 짐작이 갔다. 이자벨은 목숨을 건지기 어려울 것이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으려니 고통스러웠으나, 황제는 좀처럼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공작이 고통을 참고 기다린 지 3시간쯤 흘렀을 때 황제가 나타났다.

서슬이 퍼런 눈동자에 절로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오래 기다렸겠군. 카룰리아스, 공작."

그저 불리었을 뿐인데도 조롱하는 듯한느낌이 들었다. 그를 붙잡고 있던 기사들의손이 떨어졌다. 카룰리아스 공작은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것을 느끼며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폐하! 소신은 모르는 일이옵니다!"

보자마자 첫마디가 제 딸의범행에서 발을 빼는 것이라니. 알렉시스는 실소를 숨기지도 않은 채로 카룰리아스 공작을 바라보았다.

"모른다? 자네의딸자식이 무도함을 모른다는 얘기인가? 아니면 공녀의광증을 이제껏 숨기고 있었다는 말인가?"

저주에 대해서 알았구나, 싶은 생각에 카룰리아스 공작은 새파랗게 질렸다. 피투성이 드레스를 입은 채 당황한얼굴로 주변을 보던 이자벨의얼굴이 선했다.

그 모습만 봐서는 꼼짝없이 살인 현장에 놀란 영애였으나, 주변 영애들의증언으로 상황은 일변했다. 카룰리아스 공작은 영악한딸이, 불이 켜지기 직전 칼을 던지고, 아닌 척 시치미를 뗐다고 여겼다.

"과, 광증이라니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카룰리아스 공작은 말꼬리를 흐리며 힐끗 황제를 훔쳐보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황제 앞에서 당당하게 제 의견을 표했건만, 이런 비굴한모습을 보여야 하다니….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하는 수 없었다.

황제는 이 기회에 거슬리는 카룰리아스 공작가를 없애 버리고 싶을 터였다.

"공작은 모르는 일이다? 공녀의광증과 아덴 부인에 대한증오심을 알고 있으면서도 무도회에 참석시킨 것이 아니라?"

"제가 어찌 그런 마음을 품겠습니까? 카룰리아스 공작가는 황실에 대한충심을 하루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카룰리아스가는 내가 내리는 그 어떤 벌도 당연하게 받겠군. 그렇잖은가?"

알렉시스의조롱기 어린 말에 공작은 차마

'그렇습니다.'

라고 답하기 어려웠다. 카룰리아스 공작은 고개를 숙인 채로 눈을 굴렸다. 어떻게든 여기서 빠져나가야만 했다. 그래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었다.

"지금쯤 이자벨도 제 죄를 깨달았을 테니…. 폐하가 내리시는 어떤 벌도 달게 받을 것입니다."

저와 가문의이름을 쏙 뺀 이자벨만 내미는 공작의대답은 예상한바였다. 이미 이자벨이 감옥에서 난동을 부린다는 보고를 전해 들은 알렉시스는 차가운 눈으로 공작을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싶었다. 결혼하기 전의휘르센 영애를 모함했다고 하더니, 그 모습이 본모습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무도회장이나 연회에서 카룰리아스 공녀를 만날 일이 잦았던 알렉시스로서는 그 변화가 황당할 따름이었다.

'하긴. 그러하니 그와 같은 일을 꾸민 것이겠지.'

알렉시스로서는 이대로 이자벨과 카룰리아스 가문에 죄를 물어 양쪽 다 처리하는 것이 좋았다. 그러나 아네트와 미카엘은 로제타의무고함을 밝히는 것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 고집했다.

그녀의무고함에 신경 쓰는 이가 누가 있겠냐 싶었지만, 공작부인으로서 살아가게 될 그녀의삶이 걸려 있으니 완전히 모른 척하기 어려웠다.

아네트의힐난이나 미카엘의보복도 두려웠고.

"그렇다면 그것을 증명해라."

"증명하라니요.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공작이 조심스레 입을 여는 것에 알렉시스는 여유로운 얼굴로 답했다.

"그대의 딸이 참회하고 있음을 내 앞에 보이라는 뜻이다."

***

오늘 밤은황궁에서 보낼 것이라는 아이리스의 전갈을 받은로건은당황했다.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큰 소동이 나서 아이리스가 연관된 것인가 했다.

그러나 피해자는 아이리스가 아닌 로제타였고, 심지어 중상을 입어 아이리스의 치료를 받는 중이라고 했다.

성녀의 신분이니 자신을 괴롭힌 상대라 해도 황족의 치료를 거절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로건은아이러니함에 혀를 찼다.

당연히 무도회는 그대로 파장되었다. 무도회장을 빠져나가는 길에서 귀족들은모두 그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고 있었다.

사건이 벌어진 장소 가까이에 있던 영애나 영식들은전부 증인으로서 황궁에 남았다. 그들은간단한 진술을 마친 후에, 몇몇을 제외하고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휘르, 아니. 아덴 공작부인이 공격을 받았다는 게 사실인가?"

뒤늦게 나타난 패트릭이 로건에게 물었다. 그도 로건이 받은것과 같은황실 시종의 방문을 통해 아이리스의 전갈을 받은듯했다.

아이리스도 만날 수 없겠다 이대로 따로 떠나면 그만이었지만, 그들은같은마차를 타고 왔으므로 떠날 때도 어쩔 수 없이 같은마차를 타야만 했다.

마차를 따로 준비했다가는 아이리스를 한 사람이 독점할 수도 있었으므로 그렇게 했다. 서로 합의한 사안이었으나 이럴 때는 괜한 짓을 벌였다 싶었다.

"그래. 아주 잔혹하게 일을 벌였다고 들었어."

얼굴을 난자당하다니. 훈련받은병사라도 두려움을 느낄 만한 일이었다. 상처도 상처지만 정신적인 충격이 클 터였다.

"아이리스가 무사해서 다행이로군."

듣기로는 아이리스와 미카엘 사이에 도는 소문이 있으니, 황제가 따로 불러내어 주의를 준 것이라고 했다. 아이리스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아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심약한 그녀에게 있어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 끔찍한 장면을 보지 못하였으니.

"하지만 아덴 공작부인이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로군."

귀족들이 분주히 하인들을 시켜 자신의 마차를 부르는 사이에도 휘르센 백작가의 사람들은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부상당한 로제타의 곁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미카엘 황자…. 아덴 공작의 인기는 하루아침의 것이 아니니까. 늘 그가 관심을 보인 영애들은공격을 받았지 않나. 리온 영애의 일도 그렇고…."

"그렇다면 이제는 아덴 공작부인이 괴롭힘을 당할 거라는 건가?"

"그럴 리가. 리온 영애는 남작영애지만 아덴 공작부인은공작부인이니, 그와 같은괴롭힘은어려운 일이지."

오늘과 같은사태는 예상외였지만 말이다.

귀족들은제각기 사건에 대해 떠들어대고 있었다. 다들 놀란 기색이었으나 흥분된 기색을 보이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그' 카룰리아스의 공녀가 아덴 공작부인을 다치게 한 것에 경악하고 있었다. 지나가던 귀족의 입에서 카룰리아스 공녀가 그럴 줄은몰랐다는 속삭임이 들려오자, 패트릭은놀란 얼굴로 로건을 보았다.

"정말 카룰리아스 공녀인가?"

"나도 현장에 있었던 것은아니야. 하지만 불이 켜졌을 때, 카룰리아스 공녀가 단검을 던지는 것을 많은영애들이 목격했다고 하더군."

누구도 로제타가 원래 있는 장소에서 카룰리아스 공녀근처까지 자리를 옮긴 것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로건이 보았다면 무언가 이상한 점을 눈치챘을지도 모르나, 그는 이자벨의 계획대로 자리를 비운 터였다.

이자벨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일부는 그녀의 계획을 따라야 했으므로.

"공녀답지 않은일이야. 그녀는 꽤 냉정한 이가 아닌가. 만약 그녀가 아덴 공작부인을 죽이려 들었다면 직접 손을 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시켰을 거야."

나지막한 패트릭의 말에 로건은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패트릭은아직 모르는 것이 있었다.

***

"공녀는 행실이 아주 바른 줄 알았더니…."

"그래서 사람은뚜껑을 열어 봐야 한다지 않아요."

"무서워라~. 아덴 공작부인의 얼굴을 보셨어요?"

귀부인들은마차 안에서 숙덕거리며 '그 사건'에 대한 얘기를 떠들어댔다. 사실 그들 중에 부상당한 로제타의 얼굴을 제대로 목격한 이는 없었다. 아덴 공작부인을 온몸으로 보호하려고 했다던 영애가 계속 몸으로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영애는 상처를 막아 주고 있어서 옷이 아주 피투성이였다.

몇몇이 보기로 그저 감쌌다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피가 묻은것이 아닌가 싶었으나, 대부분은그런 생각조차 없었다.

"카룰리아스 공녀답지 않은짓이에요. 칼로 사람을…, 그렇게 다치게 하다니."

"그렇긴 해요. 평소 행실이 있는데…."

"그게 말이지요. 카룰리아스 공녀에게 그럴 만한 일이 있었답니다. 그것이…."

귀부인들 중 하나가 제 친구들에게 낮은목소리로 '소문'을 전했다. 어느 살롱에서도 들어 보지 못한 소문은아주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세상에. 그럼 와병 중이라던 소문이…."

"병은무슨. 오늘 얼굴 보셨지요? 아주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는."

"아무튼 카룰리아스 공작가는 이미 끝난 셈이지요. 황제 폐하의 동생분과 결혼하신 분께 그런 짓을 저지르다니. 그것도 폐하가 연 파티에서!"

"천인공노할 짓이지요."

"맞아요. 그나저나…."

느리게 부채질을 하며 귀부인은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보탰다.

"공녀는 무슨 끔찍한 일을 저질렀기에 그런 저주를 받았을까요? 겉으로는 늘 완벽한 귀족인 양 가식을 떨더니 말이에요."

그들은말하지는 않았지만 사교계의 여왕이 추락하게 된 것을 고소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나 귀족적인 것을 강조하며 하급 귀족들이 황실에서 여는 연회에 참석하는 것에조차 눈총을 주던 이였다.

"또 모를 일이지요. 저주 때문이라고는 해도…, 근본 없이 그런 끔찍한 행동이 나왔을까요? 평소 하던 짓이 있었을 거예요."

귀부인들은은밀한 시선을 나누며 부채 뒤에서 미소를 지었다. 오늘의 일로 카룰리아스 공작가는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것을 잃고, 이자벨 카룰리아스 또한 추락할 것이다.

사교계에서 칭송받던 꽃이었지만, 사람들은그러한 자의 추락에 더 기뻐하기 마련이었다.

마차를 타고 흩어지는 귀족의 숫자만큼, 카룰리아스 공작가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은수백 갈래로 부풀어 갔다.

***

이자벨은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누명을 쓰는 것이 이토록 고통스러운 일인 줄은몰랐다. 그녀는 제가 세운 계획을 되짚고 또 되짚으며 허점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그러나 그것은로제타를 쓰러트리기 위한 계획이었다. 이미 여러 번 구상하여 어디로도 빠져나갈 길이 없는 계획을 세웠다는 것을 의미했다.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하나.

이 사건을 조작한 자들이 자백하는 것뿐이었으나….

'황족에 대한 살인미수다. 절대 자백하려 들지 않을 거야.'

설사 이자벨이 그들의 약점을 들이밀어 협박한다 해도 그러할 것이다. 그깟 약점으로 파멸할지언정, 가문 자체가 멸문되지는 않을 테니.

그녀가 휘말린 음모는 그토록 치명적인 것이었다.

생각이 이쯤 진행되니, 그 영애들이 알고서 타깃을 자신으로 변경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황족을 해한 죄를 뒤집어쓰면 결코 빠져나오지 못할 테니까.

그들의 약점을 쥐고 있는 유일한 자이니, 이번 기회를 빌어 자신을 해치우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들이 아닐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모든 걸 포기한 이자벨이 그들의 비밀을 세상에 공표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들의 명예는 회복될 수 없는 손상을 입고 만다. 명예가 다라고 할 수 있는 일부 귀족에게는 죽음보다도 끔찍한 형벌이 될 터였다.

'날 이 함정으로 몰아넣은것이 그 영애들이든 아니든, 이제 소용없게 됐다! 내게 남은것은최후의 선택뿐이니! 아버님은….'

제법 영리한 머리를 가지고 있으나 심지가 단단하지 못한 라울 카룰리아스는 쉬이 자신을 버리리라 생각했다. 그로서는 이 위기에서 어떻게서든 빠져나가고픈 생각뿐일것이다. 자식인 이자벨을 버리고서라도!

자신이 손수 골라서 참여시킨 영애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던 이자벨은헬렌 라로쉬에서 생각이 멈췄다.

헬렌 라로쉬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영애였다. 아이리스를 공격하고 그 칼날을 로제타의 발치로 던지는 역할이었다.

그녀는 한때 가문에서 도망쳐 기사가 되었기에 그와 같은일이 가능했다. 그녀의 약점은그 기사 생활에서 평민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는 것이었다.

라로쉬 백작은그를 인정치 않고 딸을 찾아내어 딸의 남편을 납치했다. 그리고 그 손자를 볼모로 헬렌에게 다른 귀족 영식과의 결혼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녀의 비밀이 들통난다면 라로쉬 백작은헬렌의 아들을 죽일것이다.

'그러나…. 이 일에 연관된 것을 들켰다가는 라로쉬 백작가 또한 멸문당할 테지. 헬렌 라로쉬가 입을 열지 않는 것은마찬가지다!'

남은방법은…, 어떻게든 죄를 줄여 보는 것이었다.

그 많은영애들을 조종하여 로제타를 모함한 것을 실토하는 것.

그렇게만 한다면 감히 그런 비열한 계획을 세운 것에 대한 처벌은받아도, 황족 살인미수라는 무시무시한 죄에 대해서는 벗어날 수도 있었다.

'아니! 그건 싫다! 그럴 수는 없어!'

자신의 손으로 로제타에게 씌운 악녀의 굴레를 벗기라니. 그녀가 비록 미카엘과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녀는 계속 고통받아야만 했다.

감히 자신의 것인 미카엘의 관심을 받았기에, 그와 결혼했기에, 로제타는 평생토록 악녀라 손가락질받으며 살아야만 했다.

하지만….

'진정 이 방법 외에는 내가 빠져나갈 길이 없는 것인가?'

아무리 생각을 짜내 봐도 자백하는 것 외에는 수가 없었다. 이자벨은비참한 심정으로 저를 가두고 있는 감옥의 창살을 바라보았다.

서둘러 고백하지 않으면 그녀는 이대로 목숨을 잃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럴 수는 없다! 아직 미카엘을 내 손아귀에 넣어 보지도 못했는데…. 하다못해 로제타 그년을 죽여야만 해!'

무시무시한 집념을 삼키며 이자벨은궁리했다. 그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도 이 감옥에서 나가야만 했다. 그녀는 이곳에 들어온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자신이 절대 이곳에서 버틸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소리 높여 간수를 불렀다.

몸에 밴 달콤한 나른함이 그녀를 한없이 기쁘게 했다. 로제타는 저를 끌어안은 미카엘의 팔을 느끼며 한숨을 흘렸다. 기분 좋은 쾌락이 그녀의 온몸에 가득했다.

미카엘이 준 것이었다. 그녀 또한 그와 비슷한, 혹은 그 이상의 쾌락을 미카엘에게 주었다.

황홀한 숨소리와 뜨거운 열기에 취해 몇 번이나 절정을 맛보던 그를 기억하니까. 그가 얼마나 행복한 얼굴로 자신을 탐하였는지도 똑똑히 기억났다.

가장 두렵던 순간을 무사히 넘겼기 때문일까?

로제타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한 기분이었다. 그녀가 기대한 것과는 다르게 흘러갔지만, 그녀가 바란 대로 안정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와중에 미카엘에게서 받는 사랑은 로제타에게 새로운 기쁨이 되었다. 그것은 예상치 못했던 선물을 받은 것과 같았다. 그의 사랑이 인생의 보물이 되리라는 예감에 로제타는 행복한 기분을 느꼈다.

아직 서로의 감정이 갖는 무게가 비슷하지는 않지만, 언젠가는 맞춰질 것이다. 그리고 미카엘이라면 그때까지 자신을 기다려 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안 돼. 설레발치지 말자. 미카엘과의 결혼 생활은 한 달이 조금 넘었을 뿐이잖아.'

그러나 어젯밤은 특별한 순간이 되었다. 훗날 미카엘과 헤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그때를 좋게 기억할 것임을 로제타는 알고 있었다.

이 세계로 와서 로제타 휘르센으로 살며 느낀, 몇 안 되는 행복한 순간이 되었으므로.

품속의 로제타가 꼼지락거리자 미카엘은 금세 눈을 떴다. 그는 본디 잠을 깊이 들지 못하는 이였다.

그러나 그것은 로제타와의 생활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로제타를 품에 안고 잠이 들면 언제나 깊이 잠이 들었다. 악몽을 꾸는 일도 없이 사랑하는 이의 체온을 느끼며 단잠이 들었다.

사실 악몽은 로제타를 사랑하게 되면서 많이 사라진 뒤였다. 지금도 아주 가끔은 리디아를 생각하게 될 때가 있지만…, 그것은 죄책감 때문임을 이제 알고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니 그 차이가 더욱 선명했다.

그래서 더욱 미안하고 안타깝게 여겨지는 이였다.

'그래도…. 나는 로제타를 사랑할 거야.'

리디아라면 그 또한 이해해 주리라 여겼다. 둘 사이를 이어 준 알렉시스의 바람과는 달리 리디아에게는 달리 연인이 있었으므로.

다만 그녀의 연인은 미카엘과의 혼담이 있기 전에 제국을 떠났다. 본디도 제국에 오래 발붙이고 있지를 못하는 이였다. 그래서 리디아는 미카엘과의 결혼 전에 부탁했었다.

가짜 결혼을 해 달라고. 1년의 긴 항해 후, 그가 돌아올 즈음에 이혼을 하고 그를 따라갈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

미카엘이 리디아와의 결혼을 순순히 받아들인 것은 그래서였다. 한번 이혼하고 나면 알렉시스가 더는 결혼을 강요하지 않으리라 여겼다.

1년 후, 그가 돌아올 즈음이 되어 미카엘은 딱 한 번 그의 거취를 찾은 적이 있었다.

배가 풍랑으로 뒤집혀 그 또한 죽었다는 소식이 돌아왔다.

아아…, 그래도 네 곁에 그가 있겠구나, 하고 미카엘은 아주 조금 안심했더랬다.

그러니, 아니 이제는 그가 아니더라도 미카엘은 리디아의 곁에 있어 줄 수가 없었다. 제 목숨이 다하더라도 곁을 지키고 싶은 이를 지금에서야 찾았으므로.

그가 있을 곳은 여기였다.

"로제타, 일어났습니까?"

살그머니 묻는 목소리도 달콤했다. 로제타는 절로 웃음이 도는 것을 느끼며 미카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지금 일어났어요."

"제가 깨운 것은 아니겠지요?"

"아니에요. 깰락 말락 했어."

잠에서 깬 미카엘의 눈동자가 아침 햇살을 받아 나른하게 일렁였다. 그의 얼굴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로제타는 눈을 감았다. 부드러운 입술이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의 이마에 콧날에, 눈두덩이에…. 두 뺨과 입술에 와닿았다.

사랑한다고, 입으로 말하는 것보다도 선명한 애정 표현에 그저 웃음이 났다.

"기분이 좋아 보여서 다행입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이렇게 보낼까요?"

"하루 종일이요?"

미카엘에게는 로제타가 다른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붙잡아 두어야 하는 책임이 있었다. 카룰리아스공작가를 몰아붙이는 것은 황제가, 영애들을 휘어잡는 것은 황비의 몫이 될 터였다. 미카엘은 로제타의 일에 제가 뒤로 물러나 있는 것이 내키지 않았으나, 아네트는 단호했다.

'너는 피해자의 남편이잖아. 그러니 관계자지.'

억울한 누명을 쓴 이가 스스로 나서 제 누명을 벗겨야 하는 것은 억울한 일이라고 아네트는 주장했다. 그 일은 이 제국의 법과 질서를 만들고 다스리는 자의 몫이어야 한다는 이유였다.

'네 부인을 먼저 생각해 주렴. 네가 말한 대로 상냥한 아이라면, 그리고 한번 도망칠 만큼 겁을 먹었다면…, 그 과정을 전부 겪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 될 거야.'

그럴까? 미카엘이 보기에는 그 과정에 참여하여 자신의 분노를 삭이는 것이 오히려 더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이리도 행복한 모습을 보이는 로제타를 보니…, 잠시 동안만큼은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사흘 후, 공작령으로 가면 말할 생각이었다. 그때까지는 그저 천진하게 황궁에서의 시간을 즐겨도 좋으리라.

로제타에게 죄를 지은 자들은 살아 있는 지옥을 맛보겠지만 말이다.

***

이자벨은 자백하겠다는 말로 손쉽게 사건을 담당한 관리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황제의 보좌관 중의 하나인 오스카였다. 사적으로도 카룰리아스가에 원한을 가지고 있는 이였기에, 그에게 고백해야 한다는 사실은 부담이 되었으나, 그는 공정한 자였다.

어리석게도 말이다.

'아니지. 그래서 황제에게 등용되었으니…, 그치에게는 잘된 일인가?'

물론 지금의 이자벨은 그를 비웃을 상황이 아님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간수가 전달한 내용에 감옥까지 행차한 오스카였으나, 표정은 심드렁했다. 자백하겠다는 이자벨의 말이 높은 사람을 불러내기 위한 수작이라 짐작한 듯싶었다.

'영 틀린 생각은 아니야.'

그녀가 자백하려 하는 것은 제가 저지르지 않은 상해 사건이 아니라, 과거의 수없이 많은 사건을 조작한 일이었다. 그 또한 죄가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목숨이라도 건져야지 뒤를 도모할 수 있으므로.

이자벨은 절대이대로 끝낼 수 없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요, 카룰리아스공녀."

오스카의 차가운 눈빛을 받으며 이자벨은 가장 최근의 사건부터 읊어 가기 시작했다. 오스카는 처음에는 이번 사건에 대한 일이 아님을 깨닫고 멈추게 하려 했으나, 로제타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멈칫했다.

사건의 동기가 될 수 있겠다 싶어서였다. 그러나 이어져 나오는 내용은 오스카를 경악하게 만들기 충분한 것들이었다.

이자벨은 결국 다 드러날 것이란 생각에 모든 사건을 낱낱이 고했다. 제가 부인한다고 해도, 피해자인 로제타가 지적해 버리면 소용없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별 감흥 없이 듣고 있던 오스카는 이자벨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 악랄함과 치밀함에 치를 떨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오스카의 눈에 노골적인 경멸이 서렸지만, 이자벨은 상관하지 않았다. 선량함이야말로 약한 자들의 액세서리라고 생각하는 이자벨이었다.

길고 소름 끼치는 자백이 끝나자 오스카는 혀를 찼다. 그의 곁에는 이자벨의 '자백'을 받아 적기 위한 관리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이자벨이 털어놓은 모든 것을 적어 놓았다.

"가장 중요한, 아덴 공작부인의 살인미수에 대해서는 자백하지 않으셨군요. 왜죠?"

"내가 저지르지 않았으니까. 내가 계획을 세운 것은 맞지만…."

이 대목에서 이자벨은 이를 악물어야 했다. 로제타를 피해자로 내세운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꼭 패배를 시인하는 것만 같았다.

"아이리스를 피해자로 만들 생각이었지…. 아덴, 부인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없었다."

"아이리스리온 영애가 피해자라. 그렇다면 가해자는 지난번 범행 때와 마찬가지로 아덴 공작부인으로 할 생각이었습니까?"

이 부분을 인정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그 또한 황족을 능멸하는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래."

"흐으음~, 그런데 인제 와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바뀌었다? 그 검증된 수법을 통해 아덴 공작부인을 해치고 몰래 빠져나가려던 것은 아니고요?"

예상 가능했던 의심에 이자벨은 그저 부인의 말을 할 뿐이었다. 지금의 자백은 그들이 바라는 바는 아니었지만, 구미에는 맞을 것이라 생각했다.

악녀로 알려져 있던 로제타가 사실은 피해자였다는 의미였으니.

신전에서는 미카엘의 결혼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이리스를 노골적으로 적대하고 있는 로제타가 그 상대라는 이유에서였다.

이 사실이 드러나면 일단 황실은 신전과의 관계에서 면을 세울 수 있었다.

"일단 사인해 주시죠, 공녀님."

오스카는 그리 말하며 제 부하가 적어 놓은 이자벨의 자백서를 내밀었다. 펜을 받아 든 이자벨은 분기를 누르며 사인을 했다. 꽤 많은 사건을 털어놓았기에, 사인해야 하는 서류도 많았다.

서류에 사인이 끝나자 오스카는 서류를 부하에게 돌려주고 감옥을 나왔다. 다시 감옥 문을 잠그는 절그럭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에 이자벨은 오한을 느꼈다.

어쩐지 이 감옥에서 다시는 빠져나갈 수 없을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협력하기로 했다. 그래서 황실에서 내어준 방에서 밤을 보내고 나오는 길이었다.

성녀라고는 하나 그것은 신전의 일이고, 황실에서 아이리스리온을 대할 때는 늘 남작 영애 이상의 대우는 없었다.

물론 그렇다 해도 황실의 대우는 후한 것이었다.

충실한 시녀가 시중을 들어 주었으며, 훌륭한 아침 식사를 받았다. 내어준 침실 또한 남작가의 것보다 훨씬 대단한 것이었다.

돌아가는 길에도 황실의 마차가 내어졌다.

겉으로 보기에 이것은 황족이 된 로제타를 치료해 준 대우라고 알려져 있을 것이다.

'진짜 아이리스는…. 미카엘과 같이 있겠지?'

그 모든 계획을 세운 것은 아마도 미카엘일 것이다. 그는 집착 남주라는 설정이었으니까. 원작의 줄거리보다도 한참 빠르지만, 이번에 이자벨을 처리할 모양이었다.

'지금은 미카엘에게 접근하기 어렵겠지. 로제타의 몸에 빙의된 아이리스와 패트릭을 가깝게 만드는 것도 그러할 테고.'

어젯밤 아이리스는 방에서 몰래 빠져나와 미카엘과 로제타의 처소로 가 보려 했다. 물론 복도를 지나기도 전에 병사와 마주쳐서 실패했지만 말이다.

시녀에게 지나가는 척 로제타의 상태를 묻기도 했다. 완벽한 연기를 위해서 로제타가 있는 곳에 가 보기는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로제타가 머물고 있는 곳에 미카엘이 있는 걸 알아서 한 말이었다.

돌아온 대답은 아이리스를 실망시키는 것이었다.

'이자벨의 일이 있으니, 며칠 더 머물러 주면 좋으련만.'

미카엘은 로제타와 딱 사흘만 황궁에 머물고 공작령으로 내려갈 예정이라고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미카엘 본인이 정한 일정이니 얼마든지조정가능할 것이다.

이자벨의 재판이나 처벌 등의 일이 있으니 며칠 연장할 수도 있을 법한데…. 아이리스는 왜인지미카엘이 그렇게 하지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작령으로 내려가기 전에 한 번은 더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는데….'

로제타의 몸이라 해도 원작의 아이리스가 빙의한 이와 맺어졌으니, 미카엘은 한동안 공작령에 틀어박혀 있을 것이다.

황족이고 공작인 그와는 달리, 아이리스는 성녀이기는 해도 남작 영애였다. 원래는 미카엘과는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어려운 상대인 것이다.

아이리스는 깊은 한숨을 쉬며 다가오는 이를 바라보았다. 황실의 시녀가 그녀에게 마차가 준비되었음을 알렸다. 아이리스는 그녀를 따라 마차에 올랐다.

남작가에서 그녀의 귀환을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로제타는 미카엘의 품에서 꼼지락거리며 생각했다. 서로 끌어안고 입 맞추다 보니 몸이 달아올라 또 하고 말았다. 서로 벗고 있었다는 사실은 인지했어야했다. 미카엘이 상당히! 꽤! 엄청! 욕구가 강하다는 사실도.

덕분에 로제타가 실컷 시달리는 사이 아침이 지나가 버렸다. 황궁에서 머물게 된 첫날이라 당연히 황제폐하와 황비 전하에게 인사를 가야한다고 생각했던 로제타였다.

그러나 미카엘은 그 의지에 반기를 들었다.

'로제타는 나와 결혼한 거지, 폐하의 며느리가 된 게 아닙니다.'

문안 인사는 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였다. 황제나 황비 측에서도 그런 언질은 없었다. 식사를 같이 하자거나, 차를 마시자는 얘기도 없다. 이렇게 두 사람이 아침부터 침실에서 뒹굴거릴 것을 알고 있었다는 반응이었다.

"로제타, 좀 더 들어요. 자꾸 몸이 가벼워지는 것 같아서…."

하루가 멀다 하고 미카엘에게 시달리고 있음에도 로제타의 체중은 아직 그대로였다. 그러나 사랑에 눈이 먼 미카엘의 눈에는 로제타의 체중이 줄어든 것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로제타는 굳이 반박하지않고 넙죽넙죽 잘도 받아먹었다. 원작을 알고 있기에 열심히 먹어 둬야나중에 후회하지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체력이 국력이지….'

특히나 밤낮으로 기회만 노리고 있는 미카엘의 곁에서는 아주아주 잘 챙겨 먹어야만 했다.

"이것도 드시겠습니까?"

로제타가 꼬박꼬박 잘 받아먹으니 그것도 귀엽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뺨을 발그레하게 물들이고 음식을 권하는 모양새가 퍽 솔직해 보였다.

그러나 그런 미카엘의 모습도 퍽 예뻤으므로 로제타는 봐주기로 마음먹었다. 포크로 찍어 내민 것을 날름 받아먹자 미카엘이 흐뭇하게 로제타를 바라보았다.

'내가 뚱뚱해져도 이런 얼굴로 봐 주면 좋을 텐데…. 아, 살이 찔 새가 없겠구나.'

"황궁에 머물게 되었는데, 따로 하고 싶은 일은 없습니까?"

로제타에게는 아쉽게도, 라스탄 제국의 황궁은 사흘 만에 다 돌아볼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더 긴 시간을 가지고 차근차근 둘러봐야했다. 그러니 미카엘은 로제타가 궁금해할 만한 곳만 골라서 구경시킬 생각이었다.

'로제타가 마음에 들어 한 곳은 공작가의 본성에도 똑같이 지어 놓아야지.'

싱긋 웃는 얼굴로 미카엘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로제타는 입안에 들어 있는 고기 조각을 우물거렸다. 음식물을 꿀꺽 삼킨 로제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족들을 초대하고 싶은데. 안 될까요? 공작령으로 내려가기 전에 제대로 인사하고 싶어서…."

"가족들을 말입니까?"

고작 2년이 안 되는 시간을 가족으로 보냈을 뿐이고, 이자벨의 음모가 시작된 이후에는 로제타를 외면했던 이들이지만. 그래도 공작령으로 내려가면 거의 볼 일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녀를 자신의 딸로 알고 있는 백작 부부를 위해서라도 제대로 한 번은 인사를 해야겠다 싶었다.

미카엘의 입장에서는 백작가에 머물던 하루 동안 인사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로제타는 미카엘의 그런 심정까지는 몰랐다.

"그렇게 하지요."

"그, 미카엘 님께서는 참석하지않으셔도 돼요. 불편하실 수도 있고…."

"그럴 수는 없지요. 이제저도 로제타의 가족인데요."

'특히 제럴드는 요주의 대상이고.'

사과하고 싶다는 둥 하며 로제타에게 접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바짝 날을 세웠다. 반면 로제타는 미카엘이 신경 써 준다고 여겼다.

'원작도 바뀌었고…. 어쩌면 미카엘도 변했는지도 모르겠어.'

집착 남주에서 다정남주로! 근거도 없는 확신에 빠져 로제타는 미카엘을 향해 생긋 웃었다.

***

황궁에서 백작가 사람들을 초대한다고는 해도 당일이나 그다음 날에 불쑥 초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날짜는 자연스레 사흘째인 날로 잡혔다. 그래야서로 불편하지않게 예의를 차릴 수 있다는 판단이 서서였다.

한편, 사실을 알게 된 휘르센 백작가는 좌불안석이었다. 사교계의 많은 인사들이 로제타의 상태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고자 휘르센 백작가에 편지를 보냈지만, 모두 무시했다.

황제의 측근으로부터 입을 다물라는 경고를 들은 터였다. 그게 아니라 해도 딸의 결백을 믿어 주지않았다는 자책감에 그들은 사람을 만날 기분이 아니었다.

그 와중에 황궁에서 초대장이 날아왔다. 아덴 공작부인의 이름이었다.

사흘 후에는 공작령으로 내려가니, 그 전에 인사를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셀리나는 괜스레 눈시울이 젖어드는 것을 느끼며 초대장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누명을 써서 속이 속이 아닐 텐데도 마음을 써 주는 것이 미안하고 고마웠다.

"황자님께서 로제타에게는 비밀로 하고 싶은 모양이니, 그 뜻을 따라 드려야겠지…."

셀리나의 곁에서 초대장을 확인한 엔디미온이 속삭였다. 그도 로제타에게 냉정하고 무심하게 대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다시 딸자식과의 관계를 바꿔 볼 수 있지않을까 생각했지만, 애초에 그와 로제타 사이는 그리 가깝지못했다.

여느 귀족가의 가정이 그러하듯 각자의 생활에 충실한 삶이었다. 가족으로서의 애정은 없는 것이 아니었으나 끈끈하지는 못했다.

더욱이 로제타는 이제황실의 사람이 되어 버린 뒤였다.

부녀 사이를 달라지게 하고 싶어도 그럴 기회가 없는 것이다. 엔디미온은 로제타가 좀 더 어렸을 때 신경 써 주지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 애는 잘 살 거야. 황자께서 그리도 로제타를 아껴 주시고 있잖은가. 당신과 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잖아."

아마도 로제타와는 영영 가까워지지못하리라. 그런 확신이 들었다.

그들 사이의 골은 이미 깊어졌다. 그들은 로제타를 신뢰하지못했고, 로제타 또한 그들에게 기대하는 것을 버렸다. 미워하는 것조차 잊어버린 사이에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었다.

모두가 속았는데, 어떻게 속지않을 수 있겠느냐는 항변도 가족이란 이름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음을 알았다.

가족이라는 그 말 자체가 특별한 의미가 있었으므로. 특별한 무언가를 기대하는 관계이기에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가족이지만 진정한 의미의 가족은 되지못할 것이다. 그것이 뼈저린 아픔으로 다가왔다. 표현하지는 않았으나, 그것을 알고 있는 셀리나는 숨죽여 울었다.

***

제럴드는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로제타 때문에 고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전에도, 그 이전에도 몇 번이고 그녀를 두고 고민했었다. 로제타의 행실 때문에. 그녀를 어떻게 하면 막을 수 있을까 하고…. 휘르센 백작가에 누를 끼치지않도록 충고해야한다고 생각한 때도 있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누명이었다니. 로제타는 침묵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제럴드를 붙잡고 여럿이 되는 영애들이 제게 누명을 씌웠다는 말을 했다. 그냥 듣기에도 말도 되지않는 소리였다.

'그 많은 영애들이 너 하나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작당했다고? 어째서지?'

로제타는 이 질문에 대답하지못했다.

누군가 지나가는 고양이에게 돌을 던졌다고 해서, 그 고양이가 저를 공격한 이의 기분을 알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런데도 제럴드는 그것을 추궁했다. 대답하지못한다고 그녀의 말을 믿어 주지않았다.

'처음부터 믿을 생각이 없는 거였겠지.'

그날은 그가 처음으로 리온 영애에게 마음을 빼앗긴 날이었다. 피는 통하지않는다 해도 사교계에는 제여동생이라 알려져 있는 이가 아이리스의 드레스를 망쳐 놓았으니, 제럴드는 분노로 들끓고 있었다.

저는 제법 냉정하고 공정하게 행동했다 생각했었는데, 착각이었다.

그는 화가 나 있었고…, 그들의 첫 만남을 망쳤다고 생각한 로제타에게 그 화를 풀고 싶어 했던 것이다.

검은 잉크로 얼룩져 망쳐 버린 아이리스의 드레스처럼, 그의 마음도 검게 얼룩져 있었다.

겉으로는 가족을 위한다며 참고 있다고 생각했으면서도, 거기에는 로제타를 가족으로 여기는 마음 따위는 없었던 것이다.

'뭐가 기사냐? 기사도의 근본도 모르는 놈이….'

다수 앞에서 로제타는 약자였다. 약자를 지키겠다는 기사도의 맹세를 제럴드는 오래전에 저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려서. 심지어 로제타는 남도 아닌 여동생이었다.

미안했으나 이미 로제타에게 갚을 길은 없어 보였다.

로제타는 그녀가 원하던 대로 백작가보다 훨씬 나은 집안과 결혼을 했다. 그녀를 믿어 주지않던 가족들을 떠나, 그녀의 결백을 믿어 주고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들과 살아가게 된 것이다.

제럴드는 그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분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영영 빼앗겨 버린 기회였으므로.

약속된 마지막 만남을 제외하면, 그가 진짜 로제타를 알게 될 기회는 사라져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제타가 이런 사람들의 상황을 모르는 채 미카엘과 느긋한 시간을 보내는 사이, 일은 조금씩 진척되어 가고 있었다.

알렉시스는 이자벨의 빠른 자백에 놀라워하고 있었다. 며칠은 기운을 빼야 가능한 일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역시 머리가 좋다고 혀를 내두르다가, 아네트의 눈총을 받은 알렉시스는 상황을 정리했다.

이자벨이자백했다하더라도 그 자백을 믿어 줄 이는 없었다. 그녀가 로제타를 괴롭힌 방법 자체가 믿어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많은 영애들도 자신들의 정체가 들통난다싶으면 부인할 게뻔했다.

알렉시스가 지시한 것은 카룰리아스 공작가의 수색이었다. 카룰리아스 공작은 아직도 황궁에 붙잡혀 있었고, 첫째 공녀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

둘째 공녀는 황실의 기사들을 상대로카룰리아스 공작가의 권리를 주장할 만큼 영리하지도, 강단이있지도 못했다. 이자벨이아덴 공작부인을 해쳤다는 소식에 당장 짐을 싸 들고 별장으로도망쳤을 뿐이다.

그사이황실의 기사들은 순조롭게카룰리아스 공작저에서 원하는 정보를 빼 갔다.

이자벨의 장부를 찾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카룰리아스 공작의 기밀 서류들이속속들이황실의 손에 넘어갔다.

그를 확인한 알렉시스는 매우 흡족해졌다. 공녀에게누명을 씌운 김에 카룰리아스 공작가를 끌어내리고 싶었던 것이그의 속내였으므로더더욱.

각 영애들의 자백을 통해 그녀들의 비밀은 이미 알고 있었으나, 실질적인 증거를 손에 넣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황실의 기사들은 이자벨의 거처에서 그것을 찾아냈다. 이자벨의 자백이있었기에 가능했다.

다만, 미카엘과 로제타를 습격했던 마물에 관련된 증거는 얻을 수 없었다. 알렉시스의 측근들은 이자벨에게따로협력하는 세력이있거나 힘이있는 것이아닌지 의심했다.

카룰리아스 공작가에 소속된 마법사로서는 한 떼의 마물을 움직일 수 없었으므로. 또한, 리디아가 살해된 사건이이자벨과 관련 있는 것은 아닌지 면밀히 검토해 보기로했다.

로제타의 누명을 벗는 것과 이자벨에 대한 조사, 또한 라울 카룰리아스의 집무실에서 발견한 장부를 분석하는 일은 하루아침에 끝날 일이아니었다.

따라서 카룰리아스 공작은 황궁에서 끌려 나와 어느 귀족의 별장에 연금되었으며, 이자벨의 재판 날짜는 뒤로미루어지게되었다.

이자벨의 자백이나왔으므로, 무도회장에서 증언을 했던 영애들은 각 가문으로보내졌다. 그러나 아직은 이자벨이뒤집어쓴 황족 살인미수라는 죄를 벗겨 줄 수 없기에, 사건에 대해서는 함구할 것을 명령했다. 또한 황실 기사들을 보내 보호하도록 했다.

이자벨과 카룰리아스 공작. 두 사람이갇혀 있다고는 해도 카룰리아스가에서 그녀들을 죽이려 할지도 모른다는 판단에서였다.

황제의 측근들이이와 같은 일을 처리하며 바쁘게보내는 사이, 백작 부부와 제럴드를 초대한 날짜가 되었다.

***

이게완전한 마지막은 아닐 테지만, 그래도 마지막에 가까울 것이다. 애초에 원수나 다름없는 진짜 로제타의 부모님이었다.

'그래도 2년 가까이내 부모님 노릇을 해 주시기는 했어.'

처음에는 제 몸을 빼앗아 간 로제타의 부모여서 싫었다. 그들 또한 워낙에 자신의 일에 바빠 자식에게관심을 주지 않는 사람이라 부딪힐 일이없었을 뿐이다.

그들은 로제타의 결백을 믿어 주지는 않았지만, 로제타의 행동을 '실수할 수도 있는 것'으로치부하며 나름대로는 편을 들어 주기는 했다. 로제타에게씌워지는 혐의가 점점 지독한 것이되어 가자 로제타를 탓하기 시작했지만. 그만큼이라 해도 로제타에게는 생경한 일이었다.

그녀가 아는 부모님은 그렇지 않았으니까. 그분들이라면 자신을 완전히 모른 체했을 거라고 로제타는 확신했다.

'그 사람들에 대해서는 잊어버리자. 어차피 나는 다시 그곳으로돌아갈 수도 없고…. 다시 만날 일도 없을 거야. 앞으로만 생각해.'

아직까지는 미카엘과의 삶이퍽 좋았다. 황제 부부도 다정했으며, 시중을 드는 이들 또한 친절하게느껴졌다. 공작령으로내려가면 또 다른 사람을 만나게되고 어떻게될지 모른다해도 지금은 좋았다.

전 생애 통틀어 이렇게순조롭고 행복한 적은 처음인 것 같았다.

'어?'

깨닫는 순간 눈물이고여서 로제타는 당황했다. 지금이좋으니 전혀 울 일이아니었다. 다만 자신이꽤 힘들었었구나, 하는 생각이들었다.

힘들었었나 보다. 자신도 모르게눈물을 흘릴 만큼.

한 방울 흘러넘치는 눈물을 서둘러 훔쳤으나 미카엘에게는 들키고야 말았다.

"로제타?"

당황한 얼굴이가까워졌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로제타의 뺨에 흐른 눈물을 손끝으로훔쳐 주었다. 로제타는 멍하니 그런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무도회가 끝나면서부터 쭉 같이있었던 로제타였다. 그사이미카엘이모르는 무언가가 로제타에게벌어졌을 리가 없다. 그걸 알기에 미카엘은 허둥거렸다.

"내가 뭔가 실수했습니까?"

"아니에요. 눈이조금 따가워서…."

"눈이따갑다고요?"

미카엘이당장 로제타의 얼굴을 아프지 않게잡고 눈을 들여다보았다. 지척에서 보이는 아름다운 녹색 눈동자에 로제타는 눈을 깜박거렸다. 미카엘은 꼼꼼한 시선으로로제타의 눈동자를 살폈다.

"이상은 없어 보이는데…. 의원을 부르겠습니다."

돌아서려는 미카엘의 모습에 로제타는 충동적으로그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미카엘은 놀랐으나 재빨리 로제타를 끌어안았다.

"로제타."

"그냥….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거지요? 우리는 부부니까."

상냥한 손이로제타의 머리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물론입니다. 저는 로제타의 것이에요. 이몸도, 마음도…. 온전히 당신만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니….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아요, 로제타. 제가 당신 곁에 있습니다. 내가 당신의 편이되어 드릴게요."

부드러운 속삭임에 눈물이방울져 흘러내렸다. 편이되어 준다는 말이깊숙이로제타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살면서 그 한 사람을 가지는 것이그렇게어려웠다.

'내가 진짜 좋아하게되면 어쩌려고….'

남자주인공인 주제에, 이렇게정성을 기울이는지 모르겠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이나 하고. 그래도 로제타는 지금 이순간이기꺼웠다. 이렇게끌어안는다해도 자신을 뿌리치거나 밀어내지 않는 사람이있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사랑해요, 로제타."

마지막 말은 지금 해서는 안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들었다. 그러나 제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리는 로제타를 보고 있자니 감정이흘러넘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조용히 고개를 드는 로제타의 갈색 눈동자가 무언가를 말하는 듯하여 미카엘은 고개를 숙였다. 사랑스러운 입술이달싹이는 것에 귀를 기울이니, 로제타가 속삭였다.

"지금 키스하면 되는데."

귀여운 말에 미카엘은 단숨에 로제타의 입술을 삼켰다.

***

황실의 사돈이되었으므로그들은 어디를 가도 환영받는 사람이되었다. 그것은 황실에서조차 마찬가지였다. 황실에서 마차를 보내 그들을 데려갔으며, 식사를 하게되어 있는 새벽궁 앞에는 시종이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그러나 자신만만하게무도회장으로향하던 그때와는 달리 그들의 표정은 어딘가 초라하게시들어 있었다.

진실을 알아 버렸다. 자신이한 행동과 말이모두 부메랑이되어 돌아왔다. 로제타에게한 폭언 전부를 기억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순간순간 떠오르는 기억들이두려웠다.

'대체 그걸 어떻게아냐고!'

귀족 사회 전부가 등을 돌리기 직전이었다. 모두가 로제타가 범인이라고 손가락질하는 마당에 딸아이를 고치기 위해서라도 그럴 수는 없었다. 그들 모두가 로제타 때문에 사교계에서 망신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 제럴드가 성녀와 친분이있었고, 그들의 편이었기에 휘르센 백작가는 완전히 배척받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게….

'카룰리아스 공녀 때문이라니! 이간악한 것!'

무도회장에서 보았던 공녀의 뻔뻔스러운 얼굴을 기억하고 백작 부부는 치를 떨었다. 심지어 그 무도회장에서 공녀는 로제타를 다시 한번 궁지로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공작가의 공녀만 아니었더라도 머리채를 잡아 흔들었을 것이다. 치밀어 오르는 분기를 참지 못하고 셀리나는 그렇게중얼거렸다.

백작가의 귀부인으로서 어울리지 않는 언행인 줄은 알았지만, 너무 억울했다.

그들은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되어 버렸으니.

황궁의 시종을 따라 들어간 곳에는 근사한 만찬이준비되어 있었다. 로제타의 얘기를 듣고 황궁 주방장이힘을 써 준 것이다.

이미 황제로부터 로제타에게아무 눈치도 주지 말라는 언급을 받은 터라, 그들은 로제타에게사과 한마디건네지 못했다.

로제타는 백작 부부가 무언가 기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다. 제럴드도.

그러나 깊이고민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서글프면서도 기분이좋아 보였고, 원작에서도 제럴드의 존재가 있어 휘르센 가문은 화를 입지 않았었다. 그저 로제타만 죽었을 뿐이다.

'내가 공작령으로내려간다고 서운해하는 건가? 설마….'

빙의되기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들은 로제타 없이잘 살아오던 이들이었다. 가끔씩 편지로잘 지내고 있다고 소식을 전하고, 드물게수도로올라오는 일이생겼을 때 인사를 전하는 것으로충분할 것이다.

이제는 수도로올라올 일이생겨도 백작가가 아닌 아덴 공작가의 별저에 머물게될 테니.

그러니 그것으로충분했다.

***

식사는 온화한 분위기에서 끝이났다. 미카엘이동석한 자리였으니, 백작 부부는 로제타에게사과하고 싶다는 암시도 주지 못했다. 제럴드 또한 차마 로제타의 얼굴을 똑바로쳐다보지 못한 채로낯을 흐렸다.

'왜 저러지?'

백작 부부도 그렇고, 제럴드도 하고 싶은 말이있는 표정이었다. 다만 미카엘의 웃는 얼굴과 눈이마주치면 당황한 얼굴로눈길을 피했다.

'뭐지?'

로제타가 미카엘을 돌아보면 미카엘은 꿀이떨어질 듯한 눈으로마주 볼 뿐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로제타?"

"아뇨…."

뭔가 자신만 모르는 것이있는 것 같은데, 그걸 알 수가 없었다. 로제타는 이자벨이지난 무도회에서 아무 사건도 벌이지 않은 것을 의아하게생각하고 있기는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꼭 미카엘이호위기사로붙여 준 사람 곁에서 떨어지지 말자고 다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어두워져서 움찔했는데. 황비의 시녀로얼굴을 본 적 있고, 목소리가 특징적이었던 시녀가 로제타를 데리러 왔었다.

"내일 황궁에서 곧바로출발할 것이기 때문에 인사하러 오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작위가 더 높다고는 해도 상대는 로제타의 부모인지라 미카엘이정중히 말했다. 백작 부부는 뜻밖에도 많이서운한 눈치였다.

로제타가 수도를 떠나 지방의 별장으로 내려간다고 했을 때도 서운한 기색 한 자락 없었던 부모인지라, 로제타의 반응은 담백했다.

'결혼이라고 하니 특별하게 생각되나 보다.'

평소에도 로제타없이잘 살아온 이들이기에, 갑자기 섭섭함을 보이는 것이이상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아덴 공작부인의 자리가 대단한 자리기는 하구나.'

아마도 백작인 필립과 결혼하여 영지로 내려간다고 했다면, 이전처럼 후련해하는 반응을 보이지않았을까 싶었다.

그래서 로제타는 굳이그들이하고 싶은 말이무언지묻지않았다. 그들과의 관계는 이제까지처럼 거리를 두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므로.

"그럼…. 이만 가마."

잡아 주었으면 하는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보였지만 로제타는 모르는 척했다. 엔디미온이나 셀리나의 성정을 알고 있으니 로제타는 대충 이렇게 짐작하고 있었다.

아덴 공작을 사위로 둔 것을 자랑하고 싶으니 수도에 좀 더 머물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

이것은 백작 부부가 로제타의 결백을 알기 전에 생각하던 것이었으므로, 거의 맞혔다고 할 수도 있었다.

아쉬움을 가득 담은 얼굴로 백작 부부가 마차에 올랐다. 마지막으로 남은 제럴드가 할 말이많은 얼굴로 로제타를 보았다.

로제타는 그의 그런 표정이이상했다. 백작 부부야 사위인 미카엘을 과시하고 싶어서라도 수도에 머물 것을 권하겠지만, 제럴드는 아니었다.

꼴 보기 싫은 미카엘을 로제타가 치워 준 것을 좋아하고 있을 줄 알았다.

겉으로는 아닌 척할지몰라도.

"로…."

운을 떼자마자 로제타의 곁을 지키고 선 미카엘의 눈빛이싸늘해졌다. 제럴드는 단숨에 제 실수를 눈치챘다.

"공작부인."

명목상이라고 해도 그들은 남매였으므로, 그리 부르는 것은 맞지않을지몰랐다. 그러나 로제타는 굳이그 사실을 지적하지않았다. 그들은 정말 먼 사이였으니까.

"내가 네게 많은 잘못을 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뭐 잘못 먹었나?'

로제타는 뜨악해졌으나 미카엘의 눈빛은 살벌해졌다. 제럴드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고개를 돌렸다.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행복해라."

제럴드는 미카엘에게 진지한 시선을 던지고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소중한 여동생을 맡긴다는 듯한 태도에 미카엘의 다소 짜증스러운 표정이누그러졌다. 그러나 여전히 제럴드를 탐탁지않게 생각하는 눈빛이었다.

휘르센 백작가의 후계자가 오르자 마차의 문이닫혔다. 마차가 출발하는 것을 바라보며 로제타는 오래 배웅하지않았다.

저들은 그녀의 가족이되어 준 사람들이아니었다. 그녀의 가족은 지금, 그녀의 곁에 있었다.

"짐은 마차로 보낼 겁니다. 폐하의 선물 말고도 결혼 선물을 보낸 자들이꽤 되더군요. 로제타도 더 가져가고 싶은 것이있습니까?"

있다고 한다면 로제타의 것이아니라해도 가져다줄 것 같은 분위기였다.

"미카엘 님 말고는 없어요."

미카엘의 팔에 찰싹 달라붙으며 말하자 그의 얼굴이흐물흐물해졌다. 미카엘은 붉어진 얼굴을 한 손으로 가린 채 로제타를 보았다. 그는 그 와중에도 로제타의 허리를 나머지손으로 끌어안고 있었다.

"그런 귀여운 말만 하면 잡아먹어 버릴 겁니다."

"얼마든지요."

눈을 반짝이며 쳐다보는 로제타의 시선에 미카엘의 녹색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 기세, 오늘 밤 침실에서도 계속되는지두고 보겠습니다."

무시무시한 엄포에도 로제타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미카엘이키스하려는 듯 고개를 숙이는 것에 곁을 지키고 있던 시종과 시녀들은 점잖게 등을 돌렸다.

그들은 결혼한 지한 달이조금 넘었을 뿐인 신혼이었으니까.

***

이자벨은 초조하게 감옥 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벌써 이더러운 감옥에 갇힌 지나흘이나 지나고 말았다.

씻을 물은커녕 빗 하나도 주어지지않아서 그녀의 화려한 자줏빛 머리카락은 산발이되고, 기름이끼어 불쾌하게 번들거렸다. 거기다 목욕을 할 수 없으니 온몸에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손에 묻은 핏자국을 씻을 물도 주지않으니 당연했다. 그녀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든 죄수들에게 공평하게 배급되는 귀리죽과 식수. 단 두 가지뿐이었다.

처음에는 먹지않고 버텨 보았으나 지금은 그것이라도 먹지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어디에나 힘이닿지않는 곳이없는 카룰리아스 공작가이건만, 카룰리아스 공작이그녀를 버리기라도 했는지아무런 혜택이주어지지않았다.

영애들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황실에게 빼앗겼을 테지만, 이자벨은 모든 것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시릴이있었다.

'리디아 시르기스를 죽이고 싶지않은가?'

미카엘과 리디아의 약혼 소식을 듣고 분노한 그녀에게 접근했던 남자. 그가 이자벨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는 검은 가면으로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있었다. 스스로를 흑태자라지칭한 그는 이자벨에게 시릴을 선물로 주며, 대가로 리디아를 죽이라일렀다.

카룰리아스 공녀인 이자벨은 미카엘과 리디아가 생활할 수도의 저택에 대해서 낱낱이알아낼 수 있었다. 그녀는 마물이공작저에 침입하기 쉬운 경로를 알아냈고, 시릴에게 지시하여 리디아를 죽이게 했다.

흑태자의 원대로 리디아는 죽었으나, 그는 주었던 선물을 도로 받아 가지않았다. 그는 미카엘에 대한 이자벨의 집착을 재미있어했다.

'그래…, 시릴. 시릴만 내 곁에 있다면 기회는 있다. 카룰리아스가는 겨우 이정도로 무너지지않아.'

공작가의 지위를 잃는다 해도 그들에게는 은닉한 재산이있었다. 거기다 은밀하게 기르던 사병과 훈련된 용병들도 있었으니…. 가문의 이름과 목숨만 건질 수 있다면, 재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아니었다.

'그깟 계집애들의 하잘것없는 비밀 따위는 버려도 되는 것이지. 두고 봐라, 나는 이대로 무너지지않아!'

빠드득 이를 갈며 이자벨은 다짐했다. 이치욕에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하고 말 것이다. 그 상대가 미카엘이든, 황제 부부이든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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