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 황자에게 사로잡혔다-5화 (5/21)

제5장. 황실 무도회 소동

미카엘은 로제타가이혼을 다시 입에 올린 것이 충격이었는지, 대부분의 시간을 로제타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휘르센 백작 부부는그 모습을 보고 미카엘이 로제타에게 빠진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들은 오래간만에 황실에서 날아온 초대장에 기뻐하고 있었다. 그들도 황실에서 열리는무도회나 파티에 참석하기는했지만, 그것은 1년에 몇 번 안 되는드문 행사였다. 이렇게 자신들이 주역이나 다름없는위치로 참석하는것은 또 다른 의미였다.

"어떤 드레스를 입고 가면 좋을지…."

로제타는미카엘이 그녀와 결혼하면서 휘르센 집안에 상당한 선물을 보냈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고위 귀족이나 대단한 부자들이나 탈 수 있는고급 마차에서부터, 드레스와 양복, 혈통 좋은 말까지…. 내일 파티장에도 미카엘이 선물한 옷을 입고 갈 거라고 했다.

제럴드 또한 셀리나의 손에 잡혀 미카엘이 선물한 옷을 입어야만 했다. 퍽 불만스러운 눈치였으나 그는셀리나의 결정에는거부하지 못했다. 어머니 없이 자란 그에게 셀리나의 관심은 기쁜 것이었던 탓이다.

'로제타도…. 제럴드에게 좀 친절했다면 둘이 많이 친했을 텐데.'

이미 그럴 수 있는어린 시절은 지나가버렸다. 지금의 로제타가빙의된 것도 2년이 안 되었을 뿐이니 사이가좋아지기는무리라고 생각했다. 미카엘과 결혼해 버리기도 했고.

로제타는셀리나에게 붙잡혀 그녀의 드레스 자랑을 들어 주고 있었다. 미카엘도 따로 할 일이 있는지 자신의 보좌관을 만나 무언가대화를 나누는듯했다.

"엄마가보기에는이 연두색 드레스가나을 것 같은데? 어떠니? 봄이기도 하고 말이야."

즐겁게 드레스 이야기로 꽃을 피우는셀리나에게 웃음을 보이며 로제타는드레스룸을 가득 메운 옷가지들을 구경했다. 중년 여인을 위한 디자인이라고는해도 젊은 영애들을 위한 드레스와 특별히 차이가나지는않았다.

"로제타."

똑똑.

열려 있는문을 두드리는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이제 황실 무도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옷을 차려입고 있는제럴드였다. 오래간만에 만난 그는흰색과 짙은 갈색이 어우러진, 정복을 연상시키는예복을 입고 있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는태도에서 기사다운 기백이 느껴졌다. 로제타는자신을 향한 제럴드의 시선에 뜨악해졌다.

'왜? 왜 날 쳐다봐?'

빙의된 후로 사이를 바꿔 보려고도 했지만, 이미 아이리스를 괴롭힌다는누명을 쓰고 있어서 쉽지 않았던 제럴드였다.

"어머니, 로제타에게 할 말이 있는데. 잠시 빌려 가도 되겠습니까?"

"그래, 그러렴! 남매끼리 할 말도 있겠지~."

셀리나는그렇게 말하며 로제타와 눈을 맞추고 잘 부탁한다는듯이 찡긋했다. 제럴드와 로제타가피가통하지 않는다 해도, 로제타의 친정은 결국 휘르센 백작가였다. 둘의 사이가나쁜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모양이었다.

'무리가아닐지.'

부모님이 살아 계신다면 모를까, 제럴드가휘르센 백작가를 받고 두 분이 돌아가신다면 제럴드와 왕래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나한테 할 말이라는게 뭐지?'

로제타는미심쩍다는생각을 하면서도 제럴드를 따라백작부인의 드레스룸을 나왔다. 제럴드는불편하다는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더니 응접실로 향했다.

사실 그의 방도, 로제타의 방도 이야기를 나누기는적합하지 않은 자리였다. 표면적으로는남매라지만, 그들은 서로를 남매라고 생각한 적이 거의 없었으니.

"무슨 말을 하려고?"

먼저 응접실 안으로 들어간 로제타는적당한 자리를 찾아보며 물었다. 제럴드는문을 닫고는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란스필드 영식과…,"

응?

"발레르영식을 조심해라. 내가해 줄 수 있는말은 거기까지다."

란스필드 영식과 발레르영식이라면 패트릭과 로건이었다. 그 말은 그 두 사람이 무언가음모라도 꾸민다는얘기인가?

소파에 앉으려던 로제타는성큼 제럴드에게 다가갔다. 제럴드는로제타의 이런 접근이 처음인지 흠칫 물러섰다.

"무슨 소리야? 란스필드 영식하고 발레르영식 뭐? 그 두 사람이 뭐라고 했어?"

"너는 이제 결혼을 한 몸이니까…. 행실을 조심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얘기다."

로제타는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나 싶었더니.

'아니지. 제럴드가 이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닌데? 그 둘과내가 어울리게될 이유도 없고.'

패트릭과로건과는 일방적으로 로제타를 적대하는 관계였다. 이미 로제타는 여러 차례 아이리스 리온을 핍박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니까.

반면 로제타는 패트릭을 짝사랑해서많은 연서를 보냈고, 패트릭의 친구인 로건에게도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말 하지 않아도 얽힐 일 없어."

그들과의 대화는 아이리스의 일로 책망받을 때뿐이었다. 솔직히 로제타는 그들의 그림자만 보아도 피해 왔으므로, 저 충고는 그저 불쾌하기만 한 것이었다.

흐려진 로제타의 낯빛에제럴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전부 로제타가 잘못한 것임을 알고 있는데도 얼마 전부터 로제타는 그의 마음을 약하게하고 있었다.

리온 영애에게그런 심한 짓을 한 주제에피해자인 척 체념하는 듯한 로제타의 표정이 가증스러웠으나, 가끔은 안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망이 없는 짝사랑을 하고 있는 것은 그 역시도 마찬가지였으므로.

"너는 나를 오라비라 여기지 않는지 모르지만…."

제럴드는 로제타의 시선을 피해 눈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휘르센 가문을 지키는 것은 나다. 그러니 네게위험한 일이 생기면 내게말해도 된다."

내가 오라비이기는 하니까. 제럴드는 뒷말을 삼키며 로제타를 바라보았다. 여느 때와 같이 로제타가 불쾌하다는 듯이 미간에인상을 쓰고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로제타는 그저 놀란 것처럼 보였다.

"구해 줄거야, 나를?"

"그래."

기사로서도, 휘르센 가문에구원을 받은 이의 입장으로서도 당연했다. 만약 미카엘의 함정에빠진 거라면 너를 구원할 이는 내가 되겠지.

'거짓말. 날 믿어주지도 않으면서.'

정말 구해 줄사람이었다면 한 번은 의심을 했을 것이다. 고민하는 그녀를 보고 무슨 일이냐고 손을 내밀었을 수도 있다.

'아니야. 저렇게까지 말했으니까…. 다시 말한다면, 어쩌면 이번에는 내 말을 믿어주지 않을까?'

주저하던 로제타가 입을 열려던 찰나,

달칵.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들어온 이는 찌푸린 제럴드의 시선에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미카엘은 아랑곳없이 로제타를 보고 있었다.

"여기 있었군요."

제럴드와 단둘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미카엘은 성큼 방을 가로질러 로제타 곁으로 와서는 그녀의 뺨에가볍게입을 맞췄다.

원작1의 아이리스였다면 화들짝 놀라 미카엘을 밀쳤을지 모르지만, 로제타는 움찔 어깨가 튀어오르는 정도가 다였다. 미카엘은 그 반응마저도 마음에드는지 웃음을 보였다.

불편해진 것은 제럴드였다.

"로제타를 찾으셨습니까?"

"…그 호칭은 적절치 못하군."

사실 로제타가 황족과결혼했기에제럴드를 비롯한 모든 가족들이 로제타에게경어를 쓰는 것이 맞기는 했다.

"실례했습니다."

제럴드는 미카엘이 휘르센 백작 부부와 자신을 구분 짓는 것을 느꼈으나 굳이 불쾌감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미카엘이 자신을 적대시하는 것이 의아하게여겨졌을 뿐이다.

미카엘은 아이리스 곁에있던 제럴드를 보고도 무심했었다. 그저 호위기사 중의 하나를 보는 듯한 태도였다. 그런데 상대가 로제타라는 것만으로도 이렇게태도가 바뀌다니….

'정말 로제타를 좋아한단 말인가?'

"아까 카일과상의할 게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카일은 미카엘의 부관이었다. 그는 섬을 덮쳤던 마물을 소환한 마법사를 추적한 일에대해서보고하기 위해 미카엘을 찾아왔었다.

결과가 좋지 못했던 만큼 미카엘은 바쁘게로제타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녀에게건네주었던 팔찌의 마법은 강력했지만, 마음은 놓이지 않았다.

"네. 보고를 받고 돌려보냈습니다. …로제타가 보고 싶어서찾아다녔어요. 안 됩니까?"

로제타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미카엘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에, 제럴드가 커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몸을 돌리는 제럴드의 모습에로제타는 아차 싶었다. 내버려 둔다면 그는 여전히 로제타를 오해한 채 있을 것이고, 이후에이자벨이나 다른 영애들에게이용당할 수 있었다.

"저, 미카엘 님. 잠시만요."

로제타는 미카엘의 손을 밀어내고 제럴드를 쫓아갔다. 이미 복도까지 나왔던 제럴드가 의아한 얼굴로 로제타를 돌아보았다.

"할 말이라도?"

"제럴드. 여전히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미카엘 님과마리 외에는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지만…. 나 아니야."

순간적으로 제럴드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로제타는 그 표정을 보자마자 제럴드가 그녀를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너. 아직도 그런 말을…."

"왜 그 많은 영애들이 나한테 뒤집어씌웠는지는 나도 몰라. 그치만 정말 아니야."

로제타는 그렇게까지만 말하고 돌아섰다. 이미 믿지 못하는 제럴드의 말을 들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돌아서는 그 모습을 보던 제럴드는 마음이 심란해졌다.

'로제타가 아니라고? 하지만 그렇게많은 영애들이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을 리 없다.'

혼란스러운 기분에로제타를 쳐다보자니 그녀를 따라 나온 미카엘이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로제타는 바닥으로 시선을 떨구고 있어미카엘을 보지 못했다. 섬찟한 기분이 들게하는 형형한 녹색 눈동자에제럴드는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미카엘의 그 시선에는 다시는 내 여자 곁으로 접근하지 말라는 암묵적인 경고가 배어있었다. 그 경고 끝에물들어있는 짙은 살기에제럴드는 흠칫 몸을 굳혔다.

그러나 그것은 한순간이었을 뿐이었다.

로제타가 고개를 들자 미카엘의 시선은 로제타에게로 와닿았다.

닿으면 사르르 녹아끈적하게달라붙을 것 같은 달콤한 시선에로제타는 한껏 가라앉았던 기분이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도 모르게그의 품으로 다가가자, 미카엘이 기쁜 듯이 웃으며 로제타의 이마에입술을 눌렀다.

누가 보아도 잘 어울리는 듯한 두 사람의 모습에제럴드는 기분이 이상했다.

그는 아이리스를 사랑하기는 했지만, 자신과그녀가 이어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녀는 당연히 더 높은 사람, 그녀가 연모하고 있던 사람에게가리라 생각했다.

많은 추종자들이 있는 만큼 그녀는 고귀하고 아름다운 이였으니까. 응당 자신의 사랑을 바친 남자와 이루어지리라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언젠가는 미카엘 곁으로 갈 아이리스를 그때까지만이라도 지켜 주리라 다짐했건만. 상황은 이상하게변해 버렸다.

'로제타라니.'

사랑은 이상한 것이었다. 그저 그 남자가 로제타를 사랑하고 있을 뿐인데도, 그것으로 그녀가 더 아름다워 보였다.

제럴드는 당황스러운 기분에고개를 돌렸다. 다시 고개를 돌려 그 두 사람을 보았다. 그때는 미카엘이 로제타의 어깨를 감싸 다른 곳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힐끗 이쪽을 바라보는 경고 어린 시선에제럴드는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

황실의 마차는 그들 다섯을 모두 실을 수 있을 만큼 컸다. 그러나 두 대나 왔으므로 굳이 다섯이서비좁게타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앞선 마차에공작 부부인 로제타와 미카엘이 타고, 뒤이은 마차에휘르센 백작 부부와 제럴드가 탔다.

미카엘이 준비해 준 드레스를 입고 단장을 마친 로제타는 몰라보게아름다워졌다. 그가 붙여 준 사람들의 솜씨가 뛰어나서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과연 화장발! 이쪽 세계에서도 여전하구나!'

다행인 것은 판타지 소설 속의 세계인지라, 독이라고 입증된 수은이나 각종 중금속을 화장품이랍시고 사용하지는 않는다는 거였다.

"…나는 맨살에닿는 게더 좋지만. 이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로제타의 곁에앉은 미카엘이 분가루가 칠해진 로제타의 뺨을 가볍게만지작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항시 로제타를 물고 빨아대는 그의 입장에서는 화장을 안 한 쪽이 좋은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화장품이 입으로 들어가니까.

"로제타의 살 냄새가 더 좋은데."

못 참겠는지 목덜미에얼굴을 묻는 미카엘에로제타의 입에서비명이 터져 나올 뻔했다. 드레스를 입고 있어목덜미를 가릴 수도 없는데, 여기에깨문 자국이라도 내면….

"아, 안 돼요! 자국 남기시면…. 히익."

쪽 하고 민감한 피부를 빨아들인 미카엘이 불퉁한 표정으로 로제타를 보았다. 로제타는 뺨을 물들이며 제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차라리 여기에해 주세요."

"화장이 번질 텐데요?"

"시녀 데려가고 있으니까 마차에서내리기 전에고치면 돼요."

세 번째 마차에는 공작가의 시녀와 휘르센 백작가의 시종이 함께 타고 있었다. 본래는 한 마차에같이 타고 가기 마련이었으나, 여분의 마차를 거느릴 상황이 되면 그렇게하는 귀족들도 꽤 되었다.

로제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미카엘은 로제타의 부드러운 입술을 머금었다. 그가 사 준 화장품의 내음과입술연지의 맛이 났으나, 그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금 그의 품 안에서가늘게헐떡이고 있는 상대가 로제타라는 게중요했다.

'오늘 파티에는 란스필드 놈도 올 테지.'

그녀에대한 조사는 이미 오래전에마쳤으므로 로제타가 패트릭 란스필드에게수백 통에달하는 연서를 보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황제에게부탁해서란스필드 가문만 명단에서뺄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하지 못했다.

대놓고 패트릭 란스필드를 경계하고 있다고 광고하는 꼴이 될 테니까. 오늘은 그놈 앞에서로제타가 자신의 부인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 줄생각이었다.

***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뒤따라오는 또 다른 황실의 마차에서는 휘르센 백작 부부가 즐겁게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양부모님의 말에적당히 대답하고 있던 제럴드 또한 심경이 복잡했다.

'리온 영애는 어떤 기분일지….'

패트릭 란스필드는 물론 내로라하는 모든 가문이 초대를 받은 큰 파티였다. 작위는 낮다 해도 황실에대한 충성심으로 이름 높은 리온가에도 당연히 초대장이 왔다. 집안을 빼놓아도 아이리스는 성녀였으므로 결국 초대받았을 것이다.

이번 파티에서미카엘의 모습을 본다면 아이리스는 아마도 큰 충격을 받을 터였다. 로제타에게아무런 감정이 없는 자신조차 이렇게놀랐으니, 다른 사람들은 더 충격이 크리라 생각되었다.

'리온 영애의 곁에는 응당 패트릭과로건이 있을 테지만, 그들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는 로제타도 걱정되었다.

미카엘과결혼해서그녀의 신분이 높아지기는 했다 해도, 그녀에대한 평판이 하루아침에달라질 리 없었다. 공작부인이라는 위치 때문에대놓고는 못 한다 해도 뒤에서수군거릴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은 로제타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다. 내가 도와줄수 있는 것은 없어.'

아직도 반성하지 못한 채로 자신을 속이려 했던 로제타의 모습이 거슬렸다. 그런 그녀를 마치 피해자라는 듯이 감싸던 미카엘의 모습까지도.

'왜 미카엘 황자는 로제타를 그리도 좋아하는 거지? 그 아이의 행실은….'

추악한 질투심을 버리지 못하여 그 아이리스 영애를 괴롭혔다. 한두 번 정도라면 그녀에대한 질투심 때문이라 여기겠지만, 로제타는 정도가 지나쳤다.

'이해할 수 없군.'

제럴드는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카룰리아스 공작은 먼저 황궁으로 출발했으므로, 공작저의 남은 마차를 타는 것은 이자벨뿐이었다. 여동생도 같이 오고 싶어 했으나, 그녀가 귀찮았던 이자벨은 배탈이 나는 약을 먹여서 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최근 카룰리아스 공작은 저주로 인해 이자벨의 쓸모가 다했다고 여기고 있었다. 슬금슬금 이자벨을 뒤로 미루고 그녀의 여동생을 우선시하려는 모습이 보여 거슬리던 참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아!'

그녀가 보낸 마법사들이 실패한 것도, 평상시처럼 그녀의 수족처럼 움직였어야 할 영애들도 요즘에는 뭔가 이상했다. 잘 돌아가던 톱니바퀴에 맞지 않는 부품이 들어간 것처럼 삐걱대는 것이 느껴졌다.

마법사들은 간신히 꼬리를 잡히지 않고 도망쳤고, 영애들도 잠깐의 위엄을 보이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들 쪽에 무언가 이전과 같지 않은 분위기가 어린 것을 이자벨은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녀가 그런 저급한 편지를 보낼 거라고는 누구도 의심하지 못할 터였다.

이자벨이 편지를 보낸 자들은 그녀가 상대하지 않던 이들이었으니까. 일부 영애들은 이자벨을 추종하기는 했으나, 서로 비밀을 토로할 만큼 가깝지는 않았다.

그녀들이 가지고 있는 사사로운 흠결을 약점으로 삼아, 그런 편지를 보낼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할 터였다.

시작은 늘 가벼웠다. 하나의 음모에 가벼운 역할을 맡기고, 횟수가 늘어날수록 '이전의 음모'에 가담한 것을 약점 삼아서 더 깊은 역할을 맡겼다.

이자벨은 그녀들이 아닌 척하지만, 누군가를 자신의 명성을 더럽히지 않고 괴롭히는 데 재미를 붙였다고 확신했다.

아니라면 그런 보잘것없는 약점으로 자신의 지시를 따를 리 없을 테니까.

그녀들이 이자벨의 지시를 따르게 된 것은 그들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악의를 주체하지 못해서였다.

이자벨은 그렇게 생각했다.

'작은 악이라도 한번 허용하게 되면, 결국 머리끝까지 진흙 속에 담그게 되는 법이지….'

물론 그런 손을 더럽히는 일은 한미하거나 세력이 없는 가문의 영애들이 맡을 일이었다. 가장 높은 가문의 고귀한 신분을 가진 그녀는 뒤에서 조종하는 역할을 맡아야 마땅했다.

이자벨은 오늘을 위해서 로제타를 위한 판을 짜 놓았다. 감히 그녀의 것인 미카엘을 탐한 그 죄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가장 비참하게 손가락질을 당하고, 사교계에서도 미카엘에게서도 쫓겨나게 만들어 줄 작정이었다. 황실에서 그녀를 반대한다면 미카엘도 어쩔 수 없을 것이므로.

더불어 건방지게도 사교계의 숨은 여왕 행세를 하는 아이리스 리온도 짓밟아 줄 생각이었다.

'얼굴에 끔찍한 상처를 입는다면…. 최소한 공포증 정도는 생기겠지.'

다른 영애라면 그길로 사교계를 떠날 테지만, 아이리스 리온은 성녀였다. 강력한 신성력을 바탕으로 며칠이면 자신의 상처를 치료할 것이다. 이자벨은 그 점이 아쉬웠다.

'그 연약한 척하는 낯짝을 아예 못 쓰게 만들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짜증스러운 일이었다.

***

푸른색과 금색이 어우러진 정복을 입은 패트릭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그림이 됐다. 아이리스는 그의 미모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안도했다.

원작에서도 아이리스는 패트릭에게 호감이 있었다. 그러니 미카엘과 결혼했다고 해도 이 모습을 본다면 약간은, 아주 약간은 흔들릴지도 모른다.

본디 미카엘은 질투심이 매우 강한 이였다.

로제타에게 빙의된 아이리스에게는 미안하지만, 미카엘을 충동질해 주는 것만으로도 둘 사이는 쉽게 벌어지리라 여겼다.

'진짜 아이리스와 패트릭이 잘되도록 도와준 다음! 두 사람이서 도망치게 해 주는 거야. 그리고 혼자 남은 미카엘을 위로해 주며 가까워지는 거지!'

물론 미카엘이 지독한 집착을 버릴 수 있도록 계획도 세워 두었다. 로건에게 부탁하여 로제타의 몸속으로 빙의된 아이리스가 죽은 걸로 위장하게 할 생각이었다.

가짜 시신을 발견하면 미카엘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 원작의 아이리스와 패트릭도 해피하고, 자신도 해피할 것이라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미카엘도 죽을 일 없을 거고 말이야.'

원작의 아이리스는 모든 남자를 꾀어내는 마성의 미녀였으니…. 자신의 육체를 잃고 로제타의 몸속에 들어갔더라도 무언가 매력이 있을지 모른다.

'패트릭이나 로건이 아니래도 미카엘을 죽일 수 있는 인물의 마음을 잡을지 모르지.'

원작1의 아이리스는 그런 여자였다.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주변에서 내버려 두지 않는 향기 깊은 여자.

지금 아이리스의 몸에 빙의되어 있는 진풀잎은 그런 그녀가 밉고 부러웠다. 그 아름다운 육신을 제가 가졌음에도 왜 가장 중요한 이의 마음은 얻지 못한 것인가 싶었다.

'그래도 기회가 없는 건 아니야! 아이리스의 마음은 미카엘에게 없을 테니까, 나는 그 틈을 파고들면 돼!'

다정한 시선으로 저를 올려다보며 방긋 웃는 아이리스의 모습에 패트릭은 뺨을 물들였다. 제럴드 휘르센으로부터 미카엘 황자가 로제타 휘르센과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내내 우울해했던 아이리스였다.

"영식의 에스코트를 받는 이는 행운아겠군요."

안타깝게도 오늘 아이리스를 에스코트하는 이는 성기사인 로건이었다. 신전에서부터의 인연으로 황실의 공식적인 행사에 참석할 때는 로건이 곁을 지키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패트릭은 파트너 없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붉은색과 금색이 어우러진 정복을 입은 로건이 패트릭의 표정을 보고 피식 웃었다. 미카엘 황자가 결혼을 했다니 기대하는 마음은 이해한다. 속을 알 수 없는 것은 아이리스였다.

'며칠 동안 우울해 보이더니…. 미카엘 황자와 휘르센 영애를 보고 마음을 정리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그리 쉬이 접힐 리가 없기에 로건은 미묘한 기분으로 아이리스를 보고 있었다. 이번 파티는 그도 기대하는 것이었다. 황궁의 파티 따위 고위 귀족들이 너무 많아서 불쾌하다고만 생각했지만, 미카엘과 로제타에게 흥미가 있었다.

'황자가 무슨 속셈인지 궁금하단 말이지.'

패트릭 또한 이번 파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도 아이리스가 마음을 훌훌 털고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아마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하려는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한 달 전에 들은 일이지만, 그 또한 아직 믿기지 않으니.

'이번 일로 아이리스는 결국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게 될 거다. 그렇다면 나 또한….'

한 발 더 아이리스에게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고백과 비슷한 말을 해서 상처받은 그녀의 마음이 자신에게 기울어지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거슬리는 것은 로제타 휘르센의 존재.

'무슨 속셈으로 미카엘 황자와 결혼까지 한 건지 모르겠군.'

로제타는 수많은 영애들 중에도 드물게 미카엘 황자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이였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미카엘 황자를 사랑하게 되었을 거라 생각지 않았다.

'속셈이 뭐지?'

뭐든 간에 그것이 아이리스에게 좋지 않은 것임은 분명해 보였다. 그 속셈이 뭔지 캐 보기는 해야 할 텐데…. 아이리스를 놔두고 로제타에게 가서 그녀의 비위를 맞추라니.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다.

'리온 영애에 대한 자네의 마음은 그 정도였군. 영애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싫은 일' 정도는 해낼 수 있는 것 아닌가?'

로건의 조롱기 어린 목소리가 떠오르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힐끗 로건을 쳐다보자 로건은 싱긋 웃음을 돌려주었다. 더 기분 나빠진 패트릭이 홱 고개를 돌렸다.

"이제 출발하지."

상쾌한 목소리로 로건이 말했다. 리온 남작가의 저택 앞에는 이미 란스필드 가문의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패트릭이 앞장서고 로건이 아이리스를 에스코트했다.

파란 하늘이 눈부신 날이었다.

***

황실의 마차는 제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황실의 마차를 타고 있어선지 일반적인 검문 없이 바로 황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다만 로제타와 미카엘이 탄 마차는 옆으로 빠지고, 휘르센 백작부부와 제럴드가 탄 마차만이 파티장으로 향했다.

"아니, 저 마차는 왜 옆으로 빠지지?"

앞선 마차를 엿보고 있던 셀리나가 당황하며 물었다. 엔디미온이 마부석으로 통하는 작은 문을 열고 묻자 황실의 시종이 친절하게 답했다.

"아덴 공작님과 공작부인은 먼저 폐하를 뵈러 가시는 것입니다."

"아아, 폐하라니…. 봬야지, 그럼."

납득은 됐지만 실망스러웠다. 로제타들과 같이 들어간다면 많은 귀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끼리 들어가도 귀족들의 시선이 모일 테지만, 주인공과 함께 걸어가는 것은 또 달랐다.

요 한 달간 여러 살롱과 무도회, 다과회의 초정을 받았던 셀리나는 아쉬움에 한숨을 쉬었다. 꽤 재미있는 나날이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척 실마리를 던져 주면, 그녀들은 제가 먼저 나서서 너스레를 떨고 셀리나의 비위를 맞춰 주었다.

"셀리나. 오늘은 폐하앞이야."

노골적으로 우울한 낯빛을 하는 셀리나의 모습에 엔디미온이 부드럽게 주의를 주었다.

셀리나는 귀족이었으나 더 큰 권력을 요구하지 않고 주어진 것에 맞춰 즐거움을 찾을 줄 아는 여인이었다.

요컨대 자신을 궁금해하는 지위 높은 부인들의 초대에는 적당히 응수하면서, 저와 권력이 비슷하거나 낮은 자의 파티를 주로 다니며 즐거움을 맛봤다.

평민이라 해도 신흥 부자라고 하면 적당히 대해 줄 줄 아는 이였기에, 셀리나의 그런 태도가 엔디미온의 사업에는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 파티는 황실의 것이었다.

그녀가 늘 어울리는 친구들 사이에서는 여왕 노릇을 할 수 있었겠지만, 이 파티에서는 주인공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알고 있어요, 디온. 그 애가 마음을 돌려서 수도에 남아 주면 좋겠는데…."

그 애가 누굴 칭하는지는 엔디미온도 제럴드도 알고 있었다. 로제타는 이 무도회에 참석하고 황궁에서 며칠 머문 후에 곧바로 아덴 공작령으로 내려가기로 되어 있었다.

원래도 필립과 결혼하고 수도에서 하룻밤 머문 후에 그의 영지로 내려가기로 했었으니, 비슷한 일정이라 할 수 있었다.

"미카엘 황자와 결혼했다고 해도 그 애의 평판이 있잖은가. 공작령으로 내려가 자식이라도 보고 나면…, 사람들도 젊었을 때의 실수로 넘어가 줄 거야. 그때 다시 수도로 돌아오면 될 일이야."

"그동안 나는 어쩌고요?"

셀리나의 볼멘소리에 엔디미온은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로제타가 미카엘과 신혼여행을 가 있는 동안, 황자의 장모로서 신나게 놀러 다닌 주제에 무슨 소리냐고 지적했다가는 싸움이 날 것이었다.

"…부인이야, 전처럼 로제타를 대신하면 될 일 아니겠소."

그 많은 파티를 다니며 셀리나가 한 일은 로제타를 변명해 주는 것이 아니라, 미카엘 황자와 어떻게 얽히게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일이었지만. 뭐…, 그것도 나쁘지 않다 여겼다.

"로제타가 남는다 해도 어머니를 쫓아 파티에 가지는 않을 겁니다."

보다 못한 제럴드가 엔디미온을 구해 주었다. 셀리나는 로제타가 모함을 받기 전에도 자신을 쫓아다니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하긴. 그 애는 그 애의 친구가 있었지?"

지금은 모두 등을 돌려 친구라고는 시녀인 마리 하나뿐이지만 말이다.

셀리나가 한숨을 쉬는 사이 마차가 파티가 있는 황궁의 계단 앞에서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린 시종이 문을 열고 물러서는 것을 보며 엔디미온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자, 셀리나."

그 어느 때보다도 근사해 보이는 남편의 모습에 셀리나는 미소를 지었다. 이번 무도회에서의 주인공은 자신의 가족이 될 거라는 생각에 그녀는 한껏 들뜬 기분이었다.

셀리나는 엔디미온과 제럴드, 어디를 보아도 부족한 곳이 없어 보이는 두 남자들을 거느리고 파티장으로 입장했다.

"로제타."

마차에서 내려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미카엘의 모습은 그림 같았다. 로제타의 육신을 가지고 있기에 빙의된 그녀, 윤승아는 로제타의 모든 기억을 공유하고 있었다. 셀리나는 마차에서 내릴 때 자신을 에스코트해 주는 엔디미온의 모습에 반해 그와의 결혼을 허락했다고 했다.

로제타도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먼저 내려 손을 내밀며 미소를 보여 주는 그 시선에 그를 한 발, 자신의 마음에 들여놓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반하면 안 되는데.'

이미 매일 밤 그와 사랑을 나누는 처지에 무슨 생각을 하냐 싶었지만. 아직은 그랬다. 로제타는 완전히 미카엘에게 마음을 내어주지 않은 상태였다.

무엇보다 그는 이 소설의 남자주인공이었으므로…. 돌싱남 컨셉으로 로제타의 죽음 이후 원작 남주로 복귀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사망 플래그가 보이는 듯하면, 이혼하든 일단 도망치든 해야 했다.

"로제타?"

"내, 내려요!"

로제타는 얼른 한 손으로는 드레스 자락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미카엘의 손을 잡은 채로 조심조심 마차에서 내렸다.

빙의된 이후로 가장 고생한 것이 이 드레스를 입고 행동하는 거였다. 이런 차림이면 자동차를 타도 불편할 텐데, 하물며 마차라니!

'마차를 타는데 힐을 신어야 하다니, 미친 짓이야!'

로제타와 미카엘이 나란히 서자 기다리고 있던 시종장이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였다.

"황제폐하와 황비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종장의 말에 로제타는 긴장했다. 빙의된 이후로 황제를 본 것은 멀고 먼 발치에서 딱 두 차례뿐이었다. 솔직히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했으므로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다. 엄청 잘생겼다는 소문만 들었지.

넓고도 웅장하고 복잡한 황궁이었으나 시종장은 지름길을 알고 있는 듯했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미카엘 또한 알고 있는 길이었으나, 예법은 예법이었다. 거기다 황제는 로제타의 입장을 생각하여 굳이 시종장을 보내 안내를 맡도록 했다.

높은 천장을 지닌 웅장한 복도를 몇 개나 지나고 계단을 올라갔다. 서서히 노을이 질 시간이었으나 마법의 불빛이 띄워 올려져 있어 복도는 대낮처럼 밝았다.

"공작 각하. 공작부인."

문 앞을 지키고 선 시종이 다시 한번 로제타와 미카엘에게 인사를 올렸다. 경비병들이 문을 열어 주기에 거기에 황제부부가 있는 줄 알았으나, 비슷한 문을 세 개나 더 지나고 나서야 황제부부가 있는 내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미카엘."

황비와 나란히 앉아 찻잔을 기울이던 황제가 기쁜 듯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무도회 시간이 가까운 터라 그는 화려한 예복을 입은 상태였다. 미카엘과 똑같은 금발이었지만, 그는 검은색에 가까운 푸른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어서 오너라. 공작부인도. 황실의 일원이 된 것을 축하하지."

"처음 뵙겠습니다. 황제폐하, 황비님…."

떨리는 손끝을 숨기며 로제타가 인사를 올렸다. 황제의 곁에 앉아 있던 아네트는 그 모습을 보고 표정을 흐리며 힐끗 황제를 쳐다보았다. 황제도 비슷한 심정인 듯했다.

'이런….'

생각보다 순진하고 선량해 보이는 영애여서 당황했다. 데뷔탕트를 치른 후 몇 년이 지난 이인지라 좀 더 뻔뻔한 태도가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데뷔탕트를 치르면, 가문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저보다 신분이 높거나 낮은 이와 어울리며 어딘가 변하기 마련이었다.

첫인상만으로는 솔직하고 단순한 이로 보였다.

'이런 아가씨가 그런 누명을 뒤집어썼단 말인가?'

누구도 타인의 죄를 덮어쓰는 일은 없어야 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저 단순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아네트는 그 대상에 대한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생각하기로, 싸움은 저와 상대가 되는 이에게 걸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순진한 이가 아니라!

알렉시스도 순수한 분노를 느끼기는 했다. 그도 아네트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이였으니 당연했다. 그러나 그의 그런 분노에는

'미카엘이 관심을 주는 영애를 괴롭힌다.'

는 부분이 더 컸다.

어떤 시건방진 것이 황족의 일을 방해한단 말인가.

그것도 감히 내 동생의 일을! 미카엘의 설명에 따르면 그가 리디아의 사건과 연관이 있을지 모른다고 하여 그 분노는 더 컸다. 리디아의 죽음은 알렉시스에게도 큰 충격이고 상처였기에.

거기다 권모술수라고는 모른다는 게 눈에 보이는 로제타의 모습은, 미카엘과 리디아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여 더 알렉시스를 자극했다.

'보호해 주어야겠다!'

고작 인사말밖에 안 했는데도 나온 두 사람의 결론이었다.

인사를 올렸는데도 대답 없이 각자의 고뇌에 빠진 황제와 황비 부부에 로제타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폐하."

우리 로제타가 기다리잖습니까! 하고 짜증을 내는 듯한 미카엘의 눈이 보이자 알렉시스는 체통도 잊고 히죽 웃어 보였다. 우리 동생이 사랑에 빠지면 저렇게 되는구나~, 하고 놀리는 듯한 표정에 미카엘은 발끈한 듯싶었다.

"반가워. 아덴 공작부인. 공작에게 듣던 것보다도 귀여운 사람이었네."

히죽거리는 황제를 대신하여 인사를 받아 준 것은 아네트였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미카엘과 같이 귀여운 오리 한 쌍으로 등록이 되어 버린 참이었다.

황제보다 연상인 그녀는 미카엘과의 첫 대면 때

'엄마가 필요하지 않니? 엄마가 되어 줄까?'

라고 했다가 작은 고사리 손에 이마를 철썩 얻어맞은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 황자가 이렇게 자라나다니….'

이번이 두 번째 결혼이건만. 아직도 애 취급하는 저 눈길을 보고 있자니 미카엘은 속이 다 불편해졌다. 그가 공작령을 받은 지가 언제인데, 아직 황자로 불리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네. 감사합니다."

어쩐지 어린아이를 어르는 듯한 말투에 로제타는 순간 당황했으나 정신을 차렸다. 아네트는 손수 자리에서 일어나 대각선 자리를 권했다. 황제도 제대각선 자리로 미카엘을 끌어다 앉혔다.

이어지는 대화는 황제부부라기보다는 가까운 친척들 간의 대화 같아서 로제타는 다시 멍해졌다.

***

금발에 크고 푸른 눈을 가진 황제와 크게 웨이브 진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황비는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특히나 불꽃의 정령왕과 계약을 맺었다는 황비 아네트는 제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였다.

작중에서도 폭주한 미카엘을 막는 장면을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강자였다. 황제와 마찬가지로 미카엘을 남동생처럼 귀여워해서 그의 악행을 다 눈감아 주긴 했지만.

로제타는 그 두 사람이 왜인지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안도했다. 뭐라고 그래도 나라님 눈 밖에 나는 것보다야 눈에 드는 것이 나을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서로 눈에 안 띄는 것이겠지만.

"오늘 무도회가 끝나면 며칠을 머문다고 했던가? 한 달? 아니 두 달이었나?"

"어머, 폐하도 참. 3주였습니다."

"…나흘입니다."

날짜를 과장해서 늘려 버린 알렉시스에, 아네트가 미카엘의 눈치를 보며 재주껏 날짜를 줄여 보았으나 통하지 않았다. 미카엘의 단호한 말에 알렉시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미 결혼하지 않았나. 수도에 머물러도 될 텐데, 그렇게 곧바로 공작령으로 내려갈 필요는…."

"신혼입니다. 수도에 머물러 있는다면 여러 귀족들이 귀찮게 할 테지요. 황비 전하에 대한 사랑이 깊은 폐하시라면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래도 3주는 너무 짧은 것 같은…."

"나흘입니다."

"공작! 공작부인에게도 황실의 기풍을 익힐 시간은 주어야 하지 않는가!"

"기풍 같은 건 없으니 내일 바로 출발해도 되겠군요."

미카엘의 폭언에 로제타는 기겁했으나 황제부부는 불쾌한 기색 하나 없었다. 되레 찔리는 구석이라도 있는지 아네트는 조용히 눈을 피하고, 알렉시스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크윽! 그래 3일로 해라! 3일로! 이 인정머리 없는 녀석 같으니…."

"그 3일도 저는 제부인하고 보낼 겁니다."

로제타는 그 말에는 안심했다. 황제부부가 격의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는 해도, 황제고 황비인 것은 여전했다. 저들이 총애하는 이는 미카엘인 거지, 그녀 자신은 아닌 것이다. 미카엘이 없는 자리에서 그녀를 잡아먹으려 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무려 악녀2 따위가 남주와 결혼을 해 버렸으니.'

저 시답잖은 것을 얼른 해치워 버리고 주인공을 미카엘의 짝으로 점찍어 놓고 있을지도 모른다. 미카엘에게 보이는 유쾌한 모습과는 달리 황제와 황비는 꽤 무서운 이들이었으니까.

알렉시스는 그런 미카엘에게 원망 어린 눈빛을 보이면서도 어쩔 수 없지, 하고 체념하는 듯했다.

"신혼이라는 건 알지만 굳이 그렇게 딱 잘라 거절할 필요는…. 황제인 내 체면도 있는데…."

하고 구시렁거림을 이어 가는 알렉시스의 모습에 아네트가 그의 옆구리를 툭 쳤다. 정말 툭 친 것뿐인데도 통증이 상당한지, 알렉시스는 억 소리도 내지 못한 채로 허리를 꺾었다.

"…폐하, 황비 전하. 말씀하신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무대는 이미 만들어졌다. 막이 오를 시간이 되었으므로 알렉시스는 고개를 돌려 아네트와 미카엘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영문을 모르는 로제타의 얼굴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기다리는 자들이 있으니 일어나 봐야겠지."

알렉시스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고 아네트가 뒤를 이었다. 아네트는 잠시 로제타의 머리 모양을 쳐다보다가 살짝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 파티는…, 긴장하지 않아도 되니까. 편히 즐기도록 해."

"네, 네에."

로제타는 살짝 두근거리며 뺨을 물들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미카엘의 얼굴에 못마땅한 시선이 어리는 것을 보고 아네트가 피식 웃었다.

황제부부가 앞장서 응접실을 빠져나가고, 미카엘의 손을 잡은 로제타가 그 뒤를 따랐다. 황족 전용 통로로 다니는 것은 처음인지라 기분이 묘했다.

'장식부터가 다르구나.'

금박이 되어 있는 벽에조차 독특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숨을 죽인 채 걸어가는 로제타의 귓가로 미카엘이 속삭였다.

"폐하께서 우리를 위해 열어 준 무도회이기는 합니다만, 지루해진다면 얼마든지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로제타의 손을 끌어당겨 그 손등에 입술을 누르며 미카엘이 눈꼬리를 휘었다. 이것이 그가 로제타를 유혹할 때 짓는 표정이라는 것을, 로제타는 이제알고 있었다.

"저와 단둘이 되고 싶으신 거라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속삭이는 목소리에 로제타는 대답 없이 뺨을 물들였다. 황제부부와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다고는 해도 미카엘의 이 말이 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주책이라고 꼬집어 줄 수도 없고.'

황제부부가 있는 데서 미카엘의 몸에 상처를 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상처가 나기는 하나 의심스럽기는 하다만. 아무튼 그랬다.

미카엘에게 주의를 집중하는 사이 무도회장이 가까워진 것을 알았다. 멀리서 들려오던 음악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음악이 뚝 끊겼다.

"이 라스탄 제국을 길이 빛낼 태양이시자, 그 태양을 한층 빛내 주실 달인 황제 폐하와 황비 전하가 들어오십니다!"

시종의 우렁찬 목소리에 온몸에 닭살이 돋는 듯했다. 이전에 딱 두 번 들은 말이었지만, 언제 들어도 오글거렸다.

'판타지 로맨스의 세계란….'

황제 부부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파티장 안으로 들어갔다. 로제타는 미카엘의 손을 잡은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알렉시스는 아네트와 같이 옥좌가 있는 자리까지 걸어가 아네트를 먼저 앉히고 자신 또한 옥좌에 앉았다.

"다들 즐기고 있는 것 같군."

알렉시스의 차가운 시선이 회장 안을 훑었다. 그는 명민하고 좋은 황제였으나 모든 이에게 너그러운 황제는 아니었다. 전형적인 강강약약을 지닌자였다.

귀족들은 그 사실을 알기에 황제 앞에서는 몸을 조심했다. 귀족이기에 그쯤은 당연하다는 사고방식은 황제 앞에서는 통하지 않았으므로.

그러나 그 모든 기준에서 미카엘은 늘 예외였다. 그의 어린 동생이자 아킬레스건이었으니까.

"알고 있는 이도 있을 테지만…. 이 자리를 빌어 경사스러운 소식을 전하려 한다."

시종의 커다란 목소리와는 달리 알렉시스의 목소리는 약간 큰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회장이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으므로, 그 목소리가 구석구석까지 퍼졌다.

"내 동생이자 아덴 공작인 미카엘이 휘르센가의 영애와 결혼식을 올렸다. 오늘의 이 무도회는 그것을 축하하는 자리이니, 나의 신하된 자는 마땅히 이것을 기뻐해야 할 것이다."

알렉시스는 만면에 웃음을 띤 얼굴로 시종을 돌아보았다. 시종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소리를 높였다.

"아덴 공작님과아덴 공작부인께서 들어오십니다!"

쥐 죽은 듯이 고요한 회장 안으로 미카엘의 손을 잡은 로제타가 천천히 발을 들이밀었다. 반원형으로 무리를 이루고 있는 귀족들 사이로 나지막한 탄성이 흘렀다.

그들은 황제의 입에서 휘르센 영애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까지도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그 미카엘 황자가 로제타휘르센 따위와 결혼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혹시라도 휘르센가의 먼 친척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미카엘의 손을 잡고 나타난 이는 로제타휘르센이었다.

사교계에서 악녀라 불리며 서서히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고 있던 그녀, 자신이 저지른 악행이 자신의 짓이 아니라 주장하던 이였던 것이다.

"어떻게 저런…."

누군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속삭였다. 황제와 고위 귀족들이 있는 자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귀족들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그 소리를 시작으로 은밀히 속닥이는 소리가 퍼져 나갔다. 일순 로제타의 얼굴이 질리려는 것에 미카엘이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끌어당겼다.

"로제타."

다정한 목소리에 로제타는 정신을 차렸다. 이쯤이야 예상했던 바였다. 아네트가 악단장을 쳐다보자 음악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알렉시스는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나 있는 방향으로 싸늘한 시선을 던지고는 미카엘과로제타를 향해 웃어 보였다.

"첫 춤은 오늘의 주인공이 시작해야 하지 않겠나? 미카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미카엘은 우아하게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로제타에게 손을 내밀었다. 주변의 불이 모두 꺼지고 중앙과황제와 황비가 앉아 있는 곳만 불빛이 비춰졌다.

그들은 모두 황제 부부가 아닌새로운 아덴 공작부인과아덴 공작을 보고 있었다. 무언가 목적이 있어 미카엘이 어쩔 수 없는 결혼을 했다생각한 귀족들도 모두 보았다.

'호오?'

아이리스의 곁을 지키고 있던 로건 또한 일그러지려는 아이리스의 얼굴에서 눈을 떼어 미카엘을 보고 있었다. 그는 명백히 사랑에 빠진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어떤 귀족들도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저 미카엘 황자께서…."

사랑에 빠진 사람의 시선은, 그 시선이 닿는 자를 특별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저 미카엘이 로제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도, 그가 바라보고 있는 동안은 로제타가 이 회장 안에서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인처럼 느껴졌다.

미카엘의 시선에 로제타도 자신감을 얻은 듯했다. 그저 한 걸음 나아가 그의 손을 잡았을 뿐인데도, 미카엘의 품에 안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악단이 연주하는 감미로운 춤곡에 따라 로제타가 미카엘과춤을 추기 시작했다. 빙의된 지 거의 2년이 다되어 가는 데다가, 로제타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 그럭저럭 출 수 있었다.

불빛이 그들과황제 부부 위로만 쏟아졌으므로, 주변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다. 음악은 선명하고 힘 있게 퍼져 나갔고, 수군거리는 목소리마저 가라앉게 만들었다.

지켜보고 있던 이들은 미카엘 황자가 로제타에게 푹 빠졌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은 단 한 순간도 로제타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더없이 사랑스러운 것을 바라보는 시선에, 로제타는 부끄러워하면서도 온전히 미카엘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마침내 음악이 끝나고 춤도 마무리 지어지자, 미카엘이 우아하게 인사하는 로제타의 앞으로 다가왔다. 춤에는 들어 있지 않은 동작이었으므로 로제타가 의아한 듯 쳐다보자, 미카엘이 고개를 숙여 로제타의 입술에 부드럽게 키스했다.

순간 불빛이 닿지 않는 부분에 모여 있던 일부 영애들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미카엘이 결혼했다는 소식에 각오는 했지만, 실제로 보는 것은 다른 모양이었다. 일부는 졸도했는지 시종이나 시녀의 손에 무도회장 밖으로 실려 가기도 했다.

"갑자기 무슨 짓을 하시는 거예요!"

로제타가 속삭였으나 미카엘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미카엘은 당황하는 로제타를 품에 안고 황제 부부를 돌아보았다.

"이제 폐하 차례십니다."

알렉시스는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아네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긴 붉은 머리칼을 늘어트리고 있는 황비는 당당하게 일어나 알렉시스의 손을 맞잡았다.

"우리가 춤을 출 때는 이렇게 불빛을 비출 필요는 없지. 오늘의 주인공은 아덴 공작 부부가 아닌가."

아네트의 손을 잡은 채로 알렉시스가 손짓하자 회장 안으로 다시 불빛이 돌아왔다. 어둠을 틈타울음까지 터트렸던 일부 영애들이 허둥지둥 시녀나 아는 이의 뒤로 숨는 것이 보였다.

"무도회를 즐기도록 해라! 오늘은 기뻐해야 하는 날이니!"

황제 부부가 플로어로 내려오는 것에 따라 경쾌한 춤곡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미카엘 또한 로제타를 안고 있던 것을 놓고 우아하게 인사하며 춤을 청했다.

아직 자신에게 다가올 사람들이 두려운 로제타는 기꺼이 그 청을 받아들였다.

***

'분명해! 저 안에 있는 건 로제타가 아니라 성녀 아이리스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거기다미카엘의 그 표정이라니!

'완전히 사랑에 빠진 사람의 표정이었어.'

미카엘의 그런 눈빛은 아이리스의 몸에 빙의된 이후로 단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었다. 활자로 읽던 것과는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미카엘이 그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봐 주기만 한다면 아이리스는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미카엘이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건…. 상대가 아이리스이기 때문일 텐데.'

아이리스의 육신을 가졌다고 해서 진풀잎이 아이리스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완벽하게 아이리스의 흉내를 내고 있다고 생각한 지금도 그랬다.

원작보다도 먼저 패트릭을 만나고 로건을 만나 친분을 쌓았음에도, 그들과의 사이는 생각처럼 진전되지 않았다. 물론 그들은 그녀에게 좋아하는 마음을 품은 것 같았지만, 원작에서 읽었던 것처럼 절절한 느낌은 없었다.

감정의 깊이가 달랐다.

'아니. 지금은 내가 아이리스 리온이야! 아이리스의 몸을 가지고 있는 건 나니까…. 아이리스의 몸과그녀의 기억을 가지고 있으니, 미카엘도 언젠가는 나를 사랑해 줄 거야.'

나도 아이리스니까.

"리온 영애. 공작 부부에게 인사를 드릴 생각이십니까?"

아덴 공작 부부는 연달아 세 곡의 춤을 추고는 플로어에서 빠져나온 상태였다. 황제 부부 또한 옥좌로 올라가 자신들에게 인사를 올리는 고위 귀족들과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악사들은 여전히 즐거운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으며,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넘쳤다.

이미 사람들은 로제타가 과거에 저질렀다는 악행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 듯했다. 백작 영애였다면 그녀를 배척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 그녀는 공작부인이었다. 그것도 황제의 총애를 받는 미카엘 황자의 부인이었다.

무도회의 시작 무렵 황제가 보인 반응으로 보아, 황제는 그들의 결혼을 허락하고 축복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 상황에서 로제타에게 반감을 드러내 봤자 손해를 보는 것은 그들이었다.

내심이 어떻든…. 신분의 벽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

"그래야지요. 선물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마음이 전해지지 않으니."

리온 남작가는 물론 모든 가문에서 미카엘 황자의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을 보낼 것이다. 아이리스는 그 생각에 눈물이 고이려는 것을 꾹 참았다. 로건은 그런 아이리스의 표정을 보더니 걸음을 멈췄다.

"서두르실 필요는 없습니다. 공작께서는 오늘 외에도 3일간 황궁에 머무실 예정이니, 리온 영애께서 바라신다면 기회를 만들겠습니다."

로건은 다른 이들과는 달리 황실의 인척이어서 황궁에 출입하는 것이 가능했다. 미카엘이 쉽게 만나 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으나, 아이리스를 위해서라면 노력할 만했다.

"아뇨. 그럴 수는…. 저도 공작님께 인사드리고 싶으니까요."

아이리스는 애써 웃음 지으며 로건과같이 로제타와 미카엘이 있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아이리스가 그 두 사람에게 다가가자 귀족들이 수군거리며 힐끗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런 파티나 연회에서 아이리스는 피해자로, 로제타는 가해자로 마주치고는 했으니 그들이 관심을 가질 만했다. 더더군다나 지금 로제타는 아이리스가 조심스럽게 연모하는 것으로 알려진 미카엘과결혼한 상태였다.

사람들은 로제타가 몰래 미카엘과사귀었고, 미카엘을 좋아한다고 알려진 아이리스가 거슬려서 그녀를 괴롭힌 거라고 단정 짓고 있었다.

마치 그런 상황이었다면 아이리스를 괴롭혔던 것이 용납된다는 식이었다.

아이리스는 본인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고 해도, 애인이 있는 남자에게 추파를 던진 꼴이 되고 있었지만, 친한 영애들이 전무하다시피 한 그녀는 아직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에게 집중해서인지 그 주변의 소란만이 가라앉았다. 로제타에게 고위 귀족을 소개시켜 주고 있었던 미카엘은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로건."

"각하.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부인께도요."

발레르 공작가의 둘째 아들인 로건은 미카엘과대등한 위치에서 인사를 올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이들 중의 하나였다.

작위는 백작이지만, 황가의 먼 친척임은 사라지지 않는 사실이었으므로.

"성녀님께서도 두 분의 결혼을 축하드리고 싶다고 하십니다."

로건이 옆으로 비켜서며 아이리스에게 길을 내어주었다. 미카엘은 로건을 대할 때와 그리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아이리스를 보았다. 로제타를 바라볼 때 보여 주었던 사르르 녹을 것 같은 표정과는 달랐다.

'왜….'

잘근 입술을 깨물던 아이리스는 원작의 그녀가 그러하듯 여린 목소리를 냈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두 분…."

의연한 듯한 목소리가 나왔으나 목소리 끝의 떨림은 감출 수 없었다. 그를 들은 미카엘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아이리스를 바라보는 눈초리가 사나워지려는 것에 로건이 나설 찰나, 로제타가 미카엘의 손목을 당겼다.

로제타의 손길이 닿는 것만으로도미카엘의 얼굴에서 사나운 기색이 사라졌다. 흡사 맹수 조련사와 같은 느낌에 로건은 속으로 감탄했다.

냉정하게만 보이는 미카엘 황자가 사실은 꽤 사나운 성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일부 황족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미카엘은 다소 누그러지기는 했으나, 역시나 못마땅하다는 시선으로 아이리스를 보았다.

결혼에 대한 소식이 알려진 것이 한 달 전이고, 이곳은 그들의 결혼을 축하하는 무도회였다. 거기에 참석하여 제가 비련의 여주인공인 양 금방이라도울음을 터트릴 듯한 표정을 하는 아이리스가 여간 거슬리는 것이 아니었다.

로제타와 관련된 사건에서 아이리스 또한 피해자인 것은 맞지만, 그녀가 결혼 축하 파티에 참석해서 저런 모습을 보일 자격은 없었다. 이 파티는 그들의 결혼을 축하해 주는 사람들을 위한 파티였으므로.

"그래, 고마워."

싸늘한 음성이 냉기가 서릴 정도였다. 아이리스는 그 말에 창백하게 질려 힐끗 로제타를 바라보았다. 기어이 아이리스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에, 미카엘은 짜증을 느꼈다.

"로건. 영애를 데리고 가지. 집안에 우환이라도있는 모양이로군."

그나마도곁에 로제타가 있어 봐주는 것이었다. 상냥한 그녀는 아이리스가 상처받는 것을 원치 않을 터였다.

"결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영애가 몸이 안 좋은 모양입니다."

로건은 사람들의 시선에서 아이리스를 감추듯 감싸고는 그들의 곁에서 멀어졌다.

아이리스는 적지 않게 서러웠다. 미카엘이 저렇게 날을 세우고 보호해야 할 사람은 자신이었다. 저 로제타 휘르센이 아니라!

***

이자벨은 그들에게서 다소 떨어진 자리에서 그들 사이의 가벼운 촌극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리스 리온이라면 저런 식으로 나올 줄 알았다. 금세 제 추종자의 부축을 받고 자리를 떠나 위로받고 있는 모습이 꼴사나웠다.

'하지만 이상하지.'

한때는 이자벨 그녀조차도미카엘이 아이리스를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영애에게도흥미를 보이지 않던 미카엘이 처음으로 흥미를 가진 이였으니.

'그것도로제타를 지키기 위한 연극이었을지도모르지.'

지금의 미카엘은 아이리스와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미카엘을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는 이자벨의 가슴에서 피가 흐를 것 같은 광경이었다.

이자벨이 힐끗 파티장 한쪽을 보자니 황제와 황비가 퇴장하고 있었다. 이번 무도회에서의 행사 일정을 미리손에 넣었던 이자벨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황제와 황비가 퇴장하고….'

시종 하나가 로제타와 미카엘에게 다가왔다. 시종이 내민 쪽지를 보고 미카엘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로제타의 부친인 엔디미온 백작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로제타, 잠시 다녀올 데가 있는데…. 혼자 있을 수 있겠어요?"

"괜찮아요."

로제타가 웃음을 보이자 미카엘은 그녀의 뺨에 입 맞추고 자리를 떠났다. 미카엘이 받은 쪽지는 엔디미온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가족들 보기에 곤란한 일이 생겼으니, 누구에게도말하지 말고 빨리장미 정원으로 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때 미카엘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보낸다면 이 계획은 실패지만, 그는 자리를 떠났다.

"후훗…."

미카엘이 자리를 떠났으니 사실 지금 그 행사를 진행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자벨은 영애들에게 시종에게 거짓 전갈을 전해 행사를 앞당기라 일러두었다.

팟!

갑자기 회장 안의 모든 불빛이 사라졌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안으로 시종의 목소리가 높이 울려 퍼졌다.

"다음으로 두 분의 결혼을 축하하는 황제 폐하의 선물이 전달되겠습니다!"

이 어둠을 틈타 누군가 로제타의 곁으로 다가올 것이다. 선물 전달을 위해서라며 속삭여 그녀의 위치를 바꿀 터.

황족 전용 통로로 작은 불꽃놀이 장치가 달려 있는 카트가 나오고 있었다. 카트 위에는 고급스러운 포장지에 싸인 선물 상자가 올려져 있었다. 다소 유치한 선물 증정식이었으나, 미카엘을 아직 소년이라 생각하는 황제가 할 만한 취급이었다.

꺄악! 꺄아아악!!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울리고, 미지근한 액체가 사람들의 뺨에 튀었다. 이자벨은 제게까지 미지근한 액체가 떨어진 것을 짜증스럽게 여겼다.

'아이리스가 나와 가까운 위치로 자리를 옮겼던가?'

어둠 속이라 해도사람들의 모습을 완전히 분간하지 못할 정도의 어둠은 아니었다. 이 파티의 경호를 맡은 기사가 황급히 시종들에게 불을 밝히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 들렸다.

'후후….'

곧이어 펼쳐질 잔인한 광경을 기대하며 기다리는데, 누군가 그녀의 오른손을 꽉 쥐었다. 손바닥에 축축한 것이 쥐여졌다가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이자벨은 화들짝 놀랐다.

"무슨…!"

무도회장 내의 모든 불이 켜진 것은 그때였다. 댕그랑! 하는 날카로운 소리를 울리며 단도가 이자벨의 발치에 떨어졌다.

이자벨 주변을 감싸고 있던 영애들이 비명을 지르며 이자벨을 가리켰다. 연한 황금빛 드레스를 입고 있던 이자벨은 경악했다. 그녀의 옷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으으…."

"의원! 의원을!!"

날카로운 목소리로 쓰러진 이를 부여잡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은, 이자벨이 편지로 가장 큰 역할을 맡겼던 영애였다. 그녀는 단도로 아이리스의 얼굴을 난도질하고 그 죄를 로제타에게 뒤집어씌우도록 되어 있었다.

"아덴 공작부인!"

"로제타라고?!"

저 멀리에 다른 귀부인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셀리나가 비명을 질렀다. 이자벨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범인은 지금, 쓰러진 이를 부둥켜안고 있는 영애였다. 피해자의 상처에서 배어 나온 피가 자신의 옷에 묻게 하여 제 옷에 묻은 핏자국을 가리려 저렇게 끌어안고 있었다.

이자벨이 그녀에게 그렇게 지시했다.

"맙소사…. 카룰리아스 영애가 미카엘 황자님을 연모하시는 줄은 알았지만…."

"미쳤어! 경비병!!"

영애들 중 누군가 건넨 술을 마시고 배탈이 나서 화장실에 가 있는 엔디미온을 제외하고, 셀리나와 제럴드가 달려왔다. 셀리나는 기절할 듯한 얼굴로 쓰러진 이에게 달려갔다. 얼굴을 난도질한 모습에, 낯이 새하얗게 질렸다.

제럴드는 참혹한 로제타의 모습에 분노했다.

"공녀인가! 로제타에게 이런 짓을!"

"아니, 아니야! 내가 아니야!!! 이건 저 영애가!"

이자벨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로제타의 상처를 누르고 있는 영애를 가리켰다. 영애는 서슬 퍼런 눈으로 이자벨을 노려보고 있었다.

왜지? 내가 편지를 보낸 줄은 아무도모를 텐데.

무서운 생각이 들어 이자벨은 곁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자벨의 시녀와 시종들은 어둠을 틈타 하나둘씩 다른 곳으로 유인되어 그녀 곁에 없었다. 곁에 있는 자들은 모두 이자벨이 편지를 보내어 협박한 자들뿐이었다.

그들이 한결같은 시선으로 이자벨을 노려보고 있었다.

'안 돼….'

"제가 보았어요! 불빛이 들어온 순간에 카룰리아스 공녀가 단검을 떨어트리는 것을!"

증인 역할을 맡게 되어 있는 영애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로제타를 최악의 상황으로 빠트리기 위한 가장 중요한 무대라, 연기하는 솜씨가 가장 뛰어난 영애들에게 편지를 보냈었다.

"너희들! 내가 가만둘 줄 알아! 너…."

분노한 이자벨은 이 자리에서 그녀들의 약점을 하나씩 까발릴 뻔했으나, 그녀들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멈칫했다.

여기서 그것을 밝히면 제가 쥐고 있는 패만 내버리는 꼴이었다.

나중에라도저들의 마음을 돌리면, 이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말했다가는 저들과 같이 자신도추락할 것이 분명했다.

"세상에, 방금 협박하는 것 들으셨어요? 그 우아했던 공녀가…."

누군가 소곤거리는 말에 이자벨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피에 젖은 오른손을 보며 이자벨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자신이 다시는 카룰리아스의 장미라 불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혐의에서 빠져나간다 하더라도, 그 빛은 바래고 말 것이다.

"카룰리아스 공녀님. 저희와 같이 가 주셔야겠습니다."

파티의 호위를 담당하는 기사가 두어 명의 동료 기사들을 거느린 채로 다가와 말했다. 이자벨은 반사적으로 카룰리아스 공작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공작은 낭패한 얼굴로 인상을 찌푸리고는 있으나, 나설 마음은 없는 듯했다. 오히려 사나운 얼굴로 이자벨을 노려보고 있었다.

여기서는 어쩔 수 없다. 자신은 무죄였지만 일단은 그들을 따라가야만 했다.

이자벨은 분노한 눈길을 영애들에게 던지며 기사들을 따라 무도회장을 빠져나갔다.

그녀를 스쳐 무도회장으로 뛰어 들어간 황실의 의원들이 로제타, 아니 다친 로제타의 모습으로 변신한 마법사를 진찰하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

"선물 정도는 가족끼리있는 데서 풀어 봐야지. 자."

알렉시스가 흐뭇하게 웃으며 시종에게 손짓했다. 황제의 지시에 따라 시종이 상자의 뚜껑을 열자 황족들에게만 내려지는 한 쌍의 예복이 담겨 있었다.

본래 미카엘이 아덴 공작이 됐을 때 주려고 했었지만, 그때 생긴 일 때문에 그 물건은 태우고 새로 마련한 옷이었다. 로제타의 것까지 한 벌로.

"감사합니다. 폐하."

가문을 뜻하는 문장이 담겨 있는 인장 반지와 망토, 휘장이 한데 들어 있었다. 미카엘은 그중에서도로제타의 예복이 같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 기쁜 것 같았다.

"내 것도있어, 로제타. 아, 로제타라고 불러도되겠지?"

"네. 황비 전하."

아네트는 웃으며 시녀에게 손짓했다. 상자를 가져온 시녀가 로제타 앞으로 다가왔다. 로제타가 힐끗 아네트를 보자니 열어 보라는 듯이 눈짓했다. 미카엘과 로제타, 둘에게 주는 선물이 아니라 로제타에게만 주는 선물인 듯싶었다.

열어 보자 메추리알만 한 사파이어가 박힌 티아라가 들어 있었다. 황족이나 쓸 수 있는 티아라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스레 울렁거렸다.

"로제타에게 주는 선물은 미카엘에게 주는 것과 마찬가지니, 이것 하나로 결혼 선물을 마무리해도되는 거겠지?"

"물론입니다. 황비 전하."

눈이 휘둥그레져 티아라를 보는 로제타를 보니 미카엘도기분이 좋은 듯했다. 반짝이는 눈으로 쳐다보기만 하고 감히 만져 보지도못하는 로제타의 모습에 미카엘이 슬며시 웃었다.

"씌워 줄까요?"

"아, 아니요!"

제가 어떻게…. 하고 말을 이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제는 티아라를 써도되는 신분이 되었으므로. 로제타는 당황하며 힐끗 알렉시스와 아네트를 보았다.

"이따가 방에서 씌워 주세요."

"……."

무엇이 미카엘의 스위치를 눌렀는지 그가 빤히 로제타를 쳐다보더니 덥석 끌어안았다. 알렉시스는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뭘

'보셨죠?'

하는 표정으로 날 보는 거야! 나도부인 있다, 이 녀석아!"

로제타는황제 부부 앞에서 보이는추태에 당황했지만, 그 두 사람은 오히려 미카엘의 그런 모습을 기뻐하는듯했다.

"시간이길어졌는데…. 다시 무도회장으로 가는것도민폐니까 궁으로 가도록 해. 휘르센 백작 일가에는사람을 보내 놓았으니."

알렉시스의 말에 로제타는당황했다. 오늘부터 사흘간 황궁에서 머무는것은 알고 있지만, 가족들에게 인사는해야 했다.

"아직 가족들에게 인사를 못 했는데…."

"이런. 사람을 보낸 지 꽤 돼서 벌써 떠났을 텐데."

아네트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말하며 로제타를 보았다.

"신경 쓰인다면 휘르센 백작가에 초대장을 보내도록 해. 공작령으로 떠나기 전에 황궁에서 식사를 같이하는것도좋을 테니."

뭔가 이상한 느낌이들었지만, 로제타는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로제타가 가족에게 인사를 한다고 나서면 어쩌나하고 걱정했던 황제 부부와 미카엘은, 속으로 안도했다.

***

무도회장에서 사건이터지기 직전, 아이리스는황궁의 시종에 의해 무도회장을 빠져나간 뒤였다.

'폐하의 명으로 리온 영애를 모시러 왔습니다.'

시종의 뒤를 따라 걷는아이리스의 마음은 복잡했다. 그녀의 신분이성녀이기는하나정치적인 힘은 없었다. 황제가 그녀를 따로 불러 할 말이란….

'역시 미카엘 님에 관한 일일까?'

암전이되기 전 한 시종이패트릭의 바지에 술을 부었고, 로건 또한 부친의 부름으로 아이리스의 곁을 비웠다.

두 사람이각자의 이유로 자리를 비우자 아이리스는긴장했다. 이런 패턴은 전에도있었으므로 무언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막상 암전이되자 그녀를 부르러 온 것은 황제의 시종이었다. 황제의 명이라고 하면 거절할 수 없었으므로 아이리스는시종을 따라 무도회장을 나온 것이다.

로건에게 신신당부한다는말을 들은, 그녀의 또 다른 추종자들이당황하는것 같았으나어쩔 수 없었다.

'만약 이게 또 로제타의 괴롭힘이면 어쩌지?'

설마 미카엘과 결혼한 이후에도그럴까 싶었으나, 사람의 마음이란 모를 일이었다. 거기다 로제타라면 어리석게도황제의 이름을 사칭했을 것 같기도했다.

"이방입니다."

시종은 앞장서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관리로 보이는듯한 이가 아이리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성 관리였으므로 아이리스는일단 안도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성녀님."

자리에서 일어난 관리가 아이리스에게 자리를 권했다.

"레베카 윌슨이라고 합니다."

"아이리스리온입니다."

아이리스는신전의 인사는생략했다. 이곳은 성녀인 아이리스의 이름으로 참석한 것이아니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리온 가의 영애로서 왔다.

물론 황실에서는그녀가 성녀라는것을 감안하여 초대장을 보냈겠지만…. 지금은 신전의 인사말을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

"우선은…, 이것부터 봐 주십시오."

레베카가 내민 것은 아이리스를 괴롭히고 로제타에게 그 죄를 덮어씌운 영애들의 진술서 사본이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류를 읽어 내려가던 아이리스는경악했다.

백 마디 말보다 분명한 증거였다. 아이리스는그다음 영애의 진술서로, 그다음 영애의 것으로 넘어갔다. 거기에는경악할 만한 내용의 것이적혀 있었다.

피해자는단순히 아이리스한 사람뿐만이아니었다. 괴롭힘을 견디지 못해 수도에서 도망치듯 떠난 영애가 있었고, 지금은 세상에 없는리디아도그 대상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많은 영애들이전부 가담했다는말인가요?! 대체 왜…."

"그 이유로 짐작하시는바가 있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아덴 공작부인께서도같은 이유로 누명이씌워졌으니까요."

'누명….'

레베카는부드러운 어조로 미카엘이이전부터 로제타에게 관심이있었다는것을 설명해 주었다. 아이리스를 괴롭히던 흑막이그것을 눈치채고, 로제타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시작했다는것도.

"그렇다면 휘르센, 아니 공작부인께서도피해자이신 거군요."

아이리스는힘없이대답했다.

로제타가 단 한 번도그녀를 괴롭힌 적이없다면, 지금의 그녀가 로제타가 아닌 게 맞다고 여겼다. 역시 진짜 아이리스가 로제타의 몸에 빙의한 것이다.

"황비님께서는또 다른 피해자인 리온 영애께도이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미카엘이아닌 황비의 배려였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아이리스는가슴이미어지는것 같았다.

"지금 무도회장에서는큰 사건이일어나고 있을 겁니다. 본래는피해자가 리온 영애이고, 아덴 공작부인이그 가해자로 몰릴 사건이었지요."

기사 수업을 받은 적이있는영애를 내세워 아이리스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한다는…. 참으로 흉측한 계획이었다.

얘기를 전해 듣는것만으로도아이리스는두려움에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가 미카엘을 좋아하는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런 일을 당해도좋다는것은 아니었다.

"…이미 이일에 가담한 영애들은 황비님의 손아귀에 놓여 있었습니다."

일을 지시하는편지가 오자마자 그들은 앞다투어 황비에게 달려갔다. 황비는이사실을 미카엘에게 상의했다. 많은 고민과 회의 끝에 이자벨이벌이려는짓을 온전히 그녀에게 되갚아 주자는결론이났다.

"진술서를 확인했으니 아시겠지만…, 증거라고 할 만한 것이없는사건입니다. 편지가 증거라니…. 매우 미약하지요."

그래서 알렉시스는이자벨이벌이려던 일을 되레 그녀에게 덧씌우는것으로 일을 마무리 짓는것이어떻겠느냐고 제의했다. 미카엘은 반대했지만, 아네트가 그를 설득했다.

가장 좋은 일은 이자벨이모든 죄를 자백하고, 가담한 모든 영애들에게 죄를 묻는것이었다. 그러나….

"편지는위조라고 주장하고, 영애들의 진술은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고 우기면 그만입니다. 카룰리아스공녀도그 점을 알고 있기에 악용한 것일 테지요."

거기다 이자벨과의 연관성을 주장하기란 더더욱 어려웠다. 고작 편지 한 장이니, 자신이보낸 것이아니라고 하면 그만이었다. 카룰리아스공작가에는많은 사람들이있었으니… 그들 중 한 사람이죄를 뒤집어쓰고 자살하는것으로 공녀는풀려날 것이다.

"황비님께서는이계획을 세우시며 리온 영애께 모든 사실을 알리려 하셨습니다. 아덴 공작부인께서도피해자지만, 영애께서도카룰리아스공녀의 피해자이시니."

"그렇, 군요."

범인이이자벨이라는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이자벨이그런 방식으로 로제타를 괴롭히고 있었다는사실은 뜻밖이었다.

'원작에는없던 내용인데.'

후반부에서 이자벨이자신이저지른 짓을 로제타에게 뒤집어씌우기는했다. 로제타가 그 일로 사형을 당하기도했고….

'하지만 방법이달라! 이자벨까지 변해 버리다니. 왜 이렇게 된 거지?'

"그런 이유로 리온 공녀께서는한 가지 거짓말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어지는레베카의 제의에 아이리스는잠자코 협조하겠다고 했다. 그녀 또한 이자벨에게 원한이있었던 데다가, 로제타에게는아주 많이미안한 마음이있었으므로.

'몸을 빼앗았는데, 이정도는해 줘야겠지.'

***

통곡을 하며 진료실로 따라 들어온 셀리나앞에서, 부상 입은 로제타의 모습으로 변신하고 있었던 마법사가 제 모습으로 돌아갔다. 기겁하여 기절하려는셀리나를 붙잡고 이일에 동원된 황제의 측근들은 사정을 설명하였다.

제럴드와 셀리나, 엔디미온은 나란히 앉아서 로제타가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 경위에서부터, 이번 작전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아니, 그럼 왜 우리한테는설명을 안 해 주고!"

"죄송합니다. 카룰리아스공녀를 속이기 위해서는어쩔 수 없는일이었습니다."

황제의 측근이정중히 사과하기는했으나제럴드는그 말을 믿지 않았다. 이자벨의 계획에 끼어 있어 엔디미온이빠지기는했으나, '원래부터' 말하지 않을 작정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로제타를 믿어 주지 않았으니까.

이번 일로 깜짝 놀란 것 정도는작은 벌에 불과했다. 그들은 이미 1년 넘게 로제타의 결백을 외면하고 무시하고 있었다.

'맙소사….'

실망하며 자신을 바라보던 로제타의 눈빛이머릿속에 떠올랐다. 지켜 준다는말을 듣고 한 줄기 희망을 얻은 것처럼 쳐다보던 얼굴도.

"로제타는…. 아덴 공작부인도이계획을 알고 있었습니까?"

제럴드의 물음에 황제의 측근은 여상한 표정으로 대답해 주었다.

"모르시는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분께 즐거워야 하는날이니까요. 오늘의 사건도공작령으로 돌아가신 후에야 듣게 될 겁니다."

이제야 철저히 로제타를 지키려고 했던 미카엘의 태도가 이해가 되었다. 자신을 경멸하듯 바라보던 눈길도.

'나는눈 뜬 장님이었어.'

둘의 사이가 소원했다고는해도로제타의 말을 믿어 주었어야 했다. 아이리스를 지키려는마음이로제타에 대한 불신을 낳았다. 아이리스곁에는그녀를 지켜 줄 많은 이가 있었는데도불구하고 로제타를 혼자 내버려 뒀다는생각에 가슴이서늘해졌다.

몇 번이고…, 무도회장에 혼자 남아 있는로제타를 보았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는모습을 보고서도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라고만 여겼다.

'제대로 말만 들어 줬어도….'

엔디미온과 셀리나도당황한 기색이역력했다. 셀리나는역시 내 딸이그럴 리 없었다고 말하면서도난처한 기색이었고, 엔디미온은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그 많은 사람들이그 애라는데! 그걸 어떻게 믿지 않겠냐고!"

맞는말이었으나, 그래도곁에 있어 줬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불신하여 꾸짖는다 하더라도, 로제타가 몇 번이고 그렇게 죄를 뒤집어쓰도록, 혼자 버티도록 내버려 두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이자벨의 추악한 짓이반복되지는않았을 텐데.

"그럼 그 영애들은? 설마 이대로 빠져나가는것은 아니겠지요! 그 많은 사람이하나를 죄인으로 만들어 놓고!"

울화통이터지는지 셀리나가 제 가슴을 두드렸다. 시녀가 내미는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시고는황제의 측근을 노려보았다. 엔디미온도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이었다.

"폐하께서 차차 풀어 가실 겁니다. 황비님과 아덴 공작께서도황족을 해하려 한 이 사건을 그냥 넘기시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며 그들은 로제타가 실제로는 다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숨기고, 여전히 슬퍼하는 기색을 드러내도록 부탁해 왔다.

이 사건으로 이자벨이 이제까지 로제타에게 죄를 덮어씌워 왔다는 자백을 이끌어 내야 하니, 당분간은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이자벨이 자백하지 않는다고 한데도오늘의 일로 이자벨은 사형당할 것이고, 카룰리아스 공작가도무사하지 못할 거라고 했다.

"그래도그렇지! 사람들 앞에서…. 가짜가 보인 연극이라고 해도…."

황실의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길에 셀리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대역이 아픈 시늉만 했다고는 해도그런 모습을 사람들 앞에 보인 것이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체통이나 위엄이 목숨과도같은 귀족이기에.

"……."

엔디미온은 그저 침묵하고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건만 그소식이 들렸을 때, 그는 의심 없이 그말을 받아들였었다. 경솔하고 참지를 못하는 아이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카룰리아스 공녀가 자백해야 할 텐데…."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로제타가 공작부인이 되었으니, 이제 사람들은 그녀를 손가락질하지는 못한다고 해도…, 그일은 남을 것이다. 무죄를 밝혀내기 위해서는 이자벨이 자백을 해야만 했다.

미카엘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제럴드는 이 순간만큼은 로제타가 미카엘과 결혼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로제타가 황족과 결혼한 게 아니었다면 평생 손가락질받고 살았을 수도있었을 것이다.

***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지?"

순순히 무도회장에서 빠져나온 이자벨이었으나 감옥으로 가는 도중에 주춤거렸다. 그녀는 공작가의 공녀이고 황가의 먼 친척이었는데, 향하는 곳이 이상했다. 귀족은 귀족을 가두는 곳이 따로 있기 마련이었다.

"…현행범으로 잡히지 않으셨습니까? 그것도황자님의 부인 되시는 분을 말입니다."

"그건 내가 아냐. 재판 전이고, 아직 아무것도밝혀지지 않았다. 그런데도나를 이런 곳에 가둔다면…."

말이 길어질 듯하니 짜증스러웠는지 병사들이 강제로 이자벨을 끌고 가기 시작했다. 제 발로 걸어 나왔을 때는 제법 신사적이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못했다. 우악스러운 손에 붙잡혀 감옥으로 끌려가는 이자벨은 느껴 본 적 없는 공포에 이를 악물었다.

미카엘의 결혼으로 한껏 기분이 좋아진 황제였다. 그미카엘의 신부가 다시 해를 입는 상황이 발생했으니, 유죄 여부를 떠나서 황제가 직접 자신을 고문하려 들지도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

더럽고 냄새나는 감옥이라는 말이 딱 맞았다. 지푸라기도깔리지 않은 축축한 감옥 바닥에 내던져진 이자벨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이, 이봐…!"

겨우 정신을 차린 이자벨이 몸을 일으켰지만, 감옥 문은 쿵! 하고 닫혀 버린 뒤였다. 이자벨이 감옥 문에 매달려 철창문을 흔들었으나 꿈쩍도하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리다니….'

자신에게 죄를 덮어씌우던 영애들의 시선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증오 어린 시선이었다. 마치 그녀가 협박해 왔다는 것을 아는 것 같은….

'그런…. 그럴 리 없어!'

설사 안다 한들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처음에는 약점 때문이라고 해도, 그들은 반복적으로 악행을 쌓아 왔다. 이자벨은 자신은 터럭 하나 다치지 않고 그들에게 전부 죄를 뒤집어씌울 자신이 있었다. 그렇기에 시작한 일이었다.

'내게 약점이 잡혔으니…, 그들은 아니다. 설마 내가 보낸 편지에 문제가 생겼나? 누군가 편지 내용을 바꿔치기했다든가.'

그녀의 몸에 자리 잡은 저주를 비롯하여, 수도에 도착하기 전에 로제타를 해치려던 계획까지도전부 그녀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누군가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여그녀의 앞길을 막고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설마 미카엘 황자가 무언가 눈치챈 것이 아닌가 싶었으나…. 미카엘은 아닐 것 같았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미카엘은 로제타와 그녀를 연결시켰을 것이고.

'내 얼굴에….'

로제타의 것과 같은 난도질한 상처가 생겼을 거라는 사실에 온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저주. 그래, 저주에 대한 것을 간과하고 있었어….'

미카엘이 결혼했다는 소식에 눈이 뒤집혀서 자신의 목숨과 연관된 것이었음에도기억 저편으로 밀어놓았다. 그만큼 분노가 깊었으므로.

이자벨은 이제 누구도쉽게 다치게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저주를 건 당사자가 이자벨이 협박했던 영애들 중 한 사람이라면, 그녀가 자해를 할 수도있었다.

'저주는 경고였을지도모른다. 자신의 비밀을 발설하면 너 또한 다칠 거라는…. 하지만 누구지? 대체 누구이기에.'

이를 갈며 이자벨은 자신이 오늘 밤을 견뎌야 할 감옥을 돌아보았다. 이미 저 찐득한 바닥에 내던져져서 그녀의 모습은 엉망이었지만, 도저히 바닥에 앉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싫어! 난 이런 곳에 있을 수 없어!!"

참지 못한 이자벨은 다시 감옥의 창살문을 흔들며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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