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신랑의 정체는…
언제쯤 일어나 주려나?
로제타가 눈을 뜨기를 기다리며 미카엘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사실은 몸을 만지고 싶지만 참고 있었다. 몸을 건드리면 잠에서 깰 것 같아서.
'많이 놀랄까? 얼마만큼 화를 낼까….'
마법은 성공했고, 저주는걸렸을 것이다. 카룰리아스가에 심어 놓은 세작이 그여부를 알려 올 터이니 조만간 알 수 있었다.
로제타의 안전이 확보되었으니, 이제는그녀에 대한 추문을 바로잡고 그녀를 공작부인으로 제 곁에 앉히는것만이 남았다.
'날 용서해 주면 좋겠는데.'
그를 보면 다정하게 웃어 주었던 로제타였다. 붕대에 감겨 있는얼굴에 흉터가 남아 있을지 모르는데도 그랬다. 초상화 속의 얼굴이 별 볼 일 없었음에도.
자신의 거짓말에 화가 나서 로제타가 다시는웃어 주지 않는다면 많이 슬플 것 같았다.
'폐하도 허락하신 결혼이니 쉽게 도망치지는못하겠지만….'
귀족은 결혼도 이혼도 황제의 허락이 있어야 하는법이다. 미카엘을 아끼는황제는그가 바라지 않는한은 절대 이혼을 허락하지 않을 터였다. 로제타에 대한 마음이 깊은 미카엘은 로제타와 헤어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많이 사랑해 줄게, 로제타…. 날 용서해 줘."
이제 원래대로 돌아온 목소리로 미카엘은 소곤거렸다. 꿀같이 달콤한 목소리에 설핏 잠에서 깬 로제타는꿈이 아닌가 싶었다.
'왜 필립의 목소리가 이렇게…. 내가 아직도 꿈을 꾸나?'
필립은 붕대 속의 얼굴에 대해서만 말했지, 목소리에 대해서는설명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로제타는그의 목소리는계속 그대로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도 필립의 목소리가 조금씩 변하는것 같기도 했다. 신음하는목소리가 묘하게 듣기 좋고 야릇하게 울려, 필립이 더 느꼈으면 했다.
'굉장히 야하고…, 간지러운 목소리였어. 지금처럼.'
파르르 떨리는로제타의 속눈썹에 미카엘의 웃음이 짙어졌다. 로제타가 슬슬 깨어나고 있음을 눈치챈 것이다.
이제 제 거짓말이 들통날 거라는걸 알고 있기에 긴장해야 하는데. 로제타의 얼굴만 봐도 웃음이 났다. 사랑스러워서.
"하으…. 음…."
한숨인지 신음일지 모를 소리를 흘리며 로제타가 눈을 떴다. 지척에서 저를 보며 웃고 있는미카엘을 보고 눈을 깜박거렸다.
'응?'
자신이 아직도 꿈을 꾸나 싶었다. 무늬가 들어 있는레이스 커튼을 통해 비쳐 드는햇살에 미카엘의 금빛 머리카락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서늘한 느낌이 드는진녹색 눈동자와 날카로운 콧날, 단정한 입술이 바라보기에도 너무 아름다웠다.
'왜 이런 꿈을 꾸는거지? 어젯밤에 필립하고 너무 좋았는데….'
첫날밤을 보내고 꿈을 꾸는거라면 남편 꿈을 꿔야 하는게 아닌가 싶었다. 지나치게 잘생긴 외간 남자가 아니라.
'필립한테 미안하게시리! 우리어젯밤에 좋았단 말이야! 방해꾼은 사라져라, 훠이훠이!'
아름다운 용모의 황자가 로제타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사랑스럽기 그지없다는시선에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아 로제타는시선을 피했다.
이 또한 데드플래그였다. 이자벨의 마수가 자신에게 뻗어 오는소리가 들리는것 같아 로제타는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왜 황자님이! 사라져라! 사라져! 내게는필립뿐이야! 아직은 이혼할 생각 없다고!'
"로제타. 다시눈을 감으면 어떻게 해? 아직도 졸려?"
이불 속의 알몸을 끌어안으며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귀에 착착 감기는야릇한 음성에 로제타는오싹 소름이 돋는듯했다. 너무 듣기 좋아서 귓가가 간지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히익?!"
화들짝 놀라며 로제타는상대를 바라보았다. 알몸으로 그녀를 끌어안고 있는남자는…. 필립이 아니라 미카엘 황자였다!
"꺄아아아아아!"
로제타는비명을 지르며 필립을 찾았다.
***
이런 일이 생길 것을 예상했기에 미카엘은 미리방음 마법을 걸어 두었다. 그래서 로제타의 비명에도 아무도 침실로 쳐들어오지 않은 상태였다. 로제타는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미카엘의 설명을 하나하나 되짚어갔다.
"그, 그그, 그러니까!"
로제타 앞의 미카엘은 알아서 무릎을 꿇은 상태였다. 황자님의 황송한 모습이었으나 로제타는굳이 만류하지 않았다.
"필립이 황자님?! 황자님이 필립이라고욧!!"
"응. 로제타. 속여서 미안해. 로제타의 안전을 위해서는어쩔 수 없었어."
안전?! 당연히 안전 때문이겠지! 당신한테 붙은 스토커가 몇인데! 아니, 그중에 가장 위험한 스토커가 눈 시퍼렇게 뜨고 감시하고 있잖아!
거기다 미카엘도 굳이 분류하자면 주인공 아이리스의 스토커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소설은 피폐물이었고, 미카엘은 그중에서도 독보적인 사이코력을 가지고 있는남주였으니까!
'내가 어쩌다가 남주와 엮여서!'
왜?! 대체 왜? 미카엘과 숨만 같이 쉬어도 죽일 듯한 시선을 발산하는영애들이 무서워서 가까이 가지도 않았건만!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날벼락이 폭포처럼 쏟아지는기분이야! 사방이 번쩍번쩍하는것 같다고!'
물론 후자는정신적인 충격을 이기지 못해 머릿속이 뱅글뱅글 돌아서 생기는착각이었다. 현기증을 느끼는로제타를 향해 미카엘은 더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실은…."
이자벨이 아이리스를 뒤에서 괴롭히고 그것을 자신에게 뒤집어씌우고 있다는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미카엘이 이자벨에게 저주를 걸었다는것은 새로운 사실이었다.
'원작에는없는내용….'
인 게 문제가 아니라!
"왜 하필이면 내 몸에 연결되는저주를 거는건데요! 제가 죽으면 이자벨 영애도 죽는다지만! 제가 이자벨 영애에게 저주를 걸었다며 감옥에 갈 수도 있는거잖아요!"
로제타의 외침에 미카엘은 싱긋 웃었다.
"카룰리아스 공작가는그사실을 숨기느라 급급할 테니 그럴 일은 전혀 없어. 거기다 설사 저주가 로제타와 연결되어 있다는것을 안다고 해도,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는로제타의 몸을 마법사가 살펴봐야 할 텐데. 로제타는어제 황족이 됐잖아."
"네?"
멍하니 미카엘을 쳐다보던 로제타는자신이 미카엘과 결혼했다는사실을 떠올렸다. 황족과 결혼하면 그자신도 황족의 일원으로 편입되었다.
그러니 카룰리아스 공작이 아무리날뛰고 그들을 고소한다고 해도 황제는로제타를 조사하는것을 허락해 주지 않을 것이다.
설사 조사한다 해도 그조사는마법사이자 남편인 미카엘이 하게 될 일이었다. 미카엘이 부인해 버리면 그만이다.
"이제 알겠어? 로제타에게 위험한 일은 없을 거야. 내 부인으로 있는한."
싱긋 웃으며 미카엘은 로제타의 뺨에 입 맞췄다. 아직집착의 정도가 심하지 않은 수준이지만, 벌써부터 이혼 못 하게 뿌리는떡밥이 수준급이었다.
"저, 저주를 푸는방법은요?!"
"아무 교단의 신전으로 들어가 '신의 정화'를 받으면 되지만. 그런 음모를 꾸미는여자가 신의 정화를 받을 수 있을 리없잖아?"
신의 정화란 신전에서 가지고 있는정화 의식이었다. 이것은 아무 신관이나 신녀를 붙잡고 청하면 받을 수 있는가벼운 신성 주문이다. 단, 죄인이 진심으로 뉘우치지 않으면 신성 주문이 발휘되지 않으므로, '신의 정화'라는신성 주문이 성공한 예는거의 없었다.
'그럼 저주를 풀 방법은 없다는거 아냐?!'
원작에서도 이자벨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아이리스를 해치는것만 생각했으니…. 그녀가 뉘우치기를 기다리느니 완두콩에서 팥이 나는것을 기다리는편이 나을 것이다.
"그러다 이자벨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로제타가 심하게 다치지 않는이상 이자벨이 죽지는않을 텐데? 이자벨이 죽어도 로제타가 다칠 일은 없을 테지만."
싱긋 웃으며 말하는미카엘을 보고 로제타는그가 이자벨에게 화가 난 것 이상의 증오심을 품고 있다는것을 깨달았다.
'아이리스를 괴롭힌 것 때문에? 하지만 그게 문제라면…, 왜 나와 결혼을 한 거지?'
미카엘은 자신 때문에 이자벨이 로제타에게 누명을 씌웠다는사실을 털어놓았다. 로제타는미카엘이 아니었어도 원작에서 이자벨이 로제타에게 누명을 씌워 죽였다는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느 정도는원작의 로제타 잘못도 있었지만.
그래서 그사실에는크게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미카엘이 거기에 책임감을 느낀다는것은 이상한 울림이 있었다.
'당신 그런 사람 아니잖아?'
첫 번째 부인인 리디아가 죽은 후에 미카엘은 심성이 많이 비틀렸다. 황제와 황비에게는여전히 상냥한 동생이자 시동생이었으나, 타인에게는겉으로만 상냥한 모습일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미카엘은….
'왜 저런 눈으로 날 쳐다보는거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눈빛에 로제타와 눈만 마주쳐도 뺨이 붉어졌다. 움찔움찔하며 눈치를 보는것이 이런 일에는경험이 없는로제타도 알 수 있을 만큼 보였다. 키스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로제타는뒤집어쓰고 있는이불 끝을 단단히 움켜쥐고 말했다.
"아, 아무튼 이건 사기 결혼이에요! 이혼…."
"이혼?"
당장에 서늘해지는미카엘의 눈빛에 로제타는숨을 삼켰다. 여전히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용모였으나 로제타를 바라보는시선에 묘한 기색이 어렸다.
"왜? 결혼하고 싶은 것 아니었어?"
"저, 저는아시다시피 사교계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수도에서 멀리떨어져서 살고 싶어요!"
"나와 결혼하면 공작령으로 내려가서 살 수 있어. 공작령의 본 저택으로 내려가자. 신혼여행이 끝나자마자 갈 수 있을 거야."
"화, 황자님은 이자벨 공녀가 사모하는분이잖아요! 저는더는이자벨 공녀와 얽히고 싶지 않아요!"
로제타의 외침에 미카엘이 흠칫 로제타를 보았다.
"로제타. 설마 이자벨이 네게 누명을 씌웠다는걸 알고 있었던 거야?"
"예…. 이유까지는몰랐지만. 저는더는…. 앗."
순식간에 다가온 미카엘이 이불째로 로제타를 끌어안았다. 어젯밤과는달랐다. 미카엘이 필립인 것은 머리로는알고 있으나, 필립과 똑같이 생각하기는어려웠다.
"힘들었겠구나, 로제타…. 범인을 알고 있지만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았을 테니."
"으…."
울어서는안 되는타이밍이라는것을 알면서도 왈칵 눈물이 밀려왔다. 가족들도, 친구도 믿어 주지 않는상황에서 손가락질받고 욕을 먹는것이 괴로웠다. 비록 빙의되어 생긴 가족과 친구들이라 해도 그러했다.
"로제타. 두려운 건 알지만…, 도망치는걸로는이자벨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거야. 너와 이자벨은 이미 연결되어 버렸으니까. 이자벨은 널 해칠 수는없을 테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너를 확보하려 들겠지."
"그러니까 연결을 풀어 주시면 되잖아요!"
로제타가 소리쳤지만 미카엘은 싱긋 웃을 뿐이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저주를 푸는것은 불가능해도 로제타와의 연결을 푸는것 정도는가능한 모양이었다.
"이자벨을 완전히 끌어내려서 네가 안전해질 때까지는안 돼. 내가 널 사랑하는걸 알게 되면 이자벨은 반드시널 노릴 거야. 세상 어디에 숨어 있다고 해도 죽이려 들 테니…. 이대로가 안전해."
그런 거라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감정을 숨겼어야 하는게 아니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당사자에게 그런 말을 하기는어려운 법이었다.
로제타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미카엘을 노려보자 미카엘이가볍게 입 맞췄다.
'힉!'
화들짝 놀란 로제타의 표정에 미카엘의 얼굴이달아올랐다. 놀란 표정까지도 잡아먹고 싶을 만큼 귀여워 보였다.
"내가 지켜 줄게, 로제타. 행복하게 해 주고…. 아무 일도 없게 할 거야. 응? 날 조금만 믿어 줘. 초상화 속의 그 남자보다는 내가 더 낫잖아."
그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남자는 얼굴이다가 아니라고!
"자, 잘생겼다고 뭐든 용서가 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나 능력도 있는데. 돈도 많고. 권력은…, 형보다는 못하지만 지방 백작보다는 낫잖아."
가장 중요한 성격이글러 먹었잖아!! 그러나 이역시도 당사자 앞에서 지적하기 어려운 사항이라로제타는 입만 뻥긋뻥긋하고 있었다.
"하아…. 로제타, 왜 그렇게 귀여운 거야? 참을 수 없잖아."
"네? 으앗?!"
순식간에 몸이침대에 눕혀지며 쥐고 있던 이불자락을 빼앗겼다. 삽시간에 알몸을 드러낸 채로 미카엘 아래에 눕혀지게 되자 로제타의 눈이화등잔만 해졌다.
"무, 무무…. 무슨?!!!"
"어제 혼자만 만족하고 자 버리고…."
올려다본 미카엘의 아름다운 얼굴이야릇하게 웃고 있었다. 로제타는 순간 그 미모에 넋을 잃을 뻔했으나 다리를 벌리는 손길에 기겁하고 말았다.
"으아! 화, 황자님!"
"미카엘이라고 불러. 어젯밤처럼 필립이라고 불러도 되고….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없지만, 내 가운데 이름 중 하나이기는 하니까."
무릎으로 로제타의 다리를 고정한 미카엘이정액에 젖은 로제타의 꽃잎을 만지작거렸다. 간밤의 여운이남아선지 그곳은 아직 부드러웠다. 꽃잎을 벌리고 부드럽게 들어오는 손가락에 로제타의 허리가 흠칫 튀어 올랐다.
"히익! 미카엘!"
놀라서 저도 모르게 불러 버린 이름에 미카엘의 눈이커졌다.
"이름이불린 것뿐인데, 오싹했어."
속삭이며 미카엘은 로제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에 흔하디흔한 갈색 눈이었지만, 미카엘에게는 이세상 그 무엇보다도 특별한 색깔이되었다.
"로제타…. 나는 이제 너 없이는 살 수 없어. 날 미워하지 말아 줘."
이게 다 이혼하지 않겠다는 속셈으로 보이는 연기라고 생각하면서도, 절절한 목소리로 애원하는 말에 로제타는 마음이흔들리고 말았다. 그 머뭇거리는 틈을 미카엘은 놓치지 않았다.
부드럽게 포개지는 뜨거운 입술에 로제타의 눈이질끈 감겼다. 첫 키스도, 첫 경험 상대도 본의 아니게 남주인공이되어 버리다니! 이게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원작에서는….'
아이리스가 기겁하며 공작의 본 저택에서 도망칠 만큼 절륜하고 집착적이었다. 거기다 기술도 훌륭하여 아이리스는 미카엘에게 잡혀 있던 두 달 동안 매일 밤낮으로 기절할 듯한 절정을 맛본다.
'으아아아!'
아니나 다를까 꽃잎 사이의 틈새에 파고들어 있던 손가락이야릇하게 안을 켜기 시작했다. 어제 그것을 했다 해도 하룻밤 새 익숙해질 리없었다. 화들짝 놀라며 버둥거리자 부드럽게 로제타의 입안을 훑던 혀가 더 깊숙이파고들었다.
"으으음?!"
쪼옥 하고 로제타의 혀를 빨아들여 민감한 곳을 훑어 내리는 입맞춤에 몸이파르르 떨릴 만큼의 자극이왔다. 미카엘은 로제타의 반응이좋은 것을 눈치채고 그곳을 집요하게 빨아대기 시작했다.
"흐으, 읏…. 으흣…. 앗!"
삽입된 손가락 또한 관능적으로 꿈틀거리며 로제타의 속살을 만지작거렸다. 필립이미카엘이긴 한데, 미카엘이제 안을 애무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두 배는 창피해졌다.
"으흐음…. 으흑!"
그런데도 미카엘과의 키스는 기분이좋아서 몸이녹아내렸다. 꽃잎을 헤집던 손가락 두 개가 더욱 깊숙이파고들며 안을 희롱하자 허리가 바들바들 튀었다.
"하아……. 로제타…. 넣어도 돼?"
질벽의 천장을 비비며 미카엘이졸라왔다. 주름과 주름 사이를 훑어 내리는 손끝에 로제타는 저도 모르게 미카엘의 손가락을 조이며 신음했다.
"으흐…, 황자님……. 아앙…. 아침부터…."
"아침부터인 게 부끄러운 거지, 내가 싫은 건 아니지? 응? 로제타……, 하게 해 줘. 로제타를 너무 원해서 미칠 것 같아."
로제타의 입술에 거듭 키스하며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스스로 말한 대로 지금 로제타를 안지 않으면 머리가 어떻게 되어 버릴 것 같았다.
아까 이혼하자고 말한 주제에 허락하면 안 될 것 같았지만, 안을 헤집는 미카엘의 손가락도 키스도 기분이좋아서 머뭇거려졌다.
'어차피 당장 이혼해 주지는 않을 거잖아.'
미카엘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몰래 도망쳐야만 했다. 아이리스도 같은 방법으로 미카엘에게서 도망쳤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전부 해 주어서 방심하게 만든 후에.
물론 그 뒤로 분노한 미카엘에게 붙잡혀 여러 가지로 애먼 야한 짓을 잔뜩 당했다.
"그, 그럼 한 번만…."
"아! 로제타……."
황홀한 듯한 미카엘의 미소가 단번에 로제타의 눈길을 빼앗았다. 그가 왜 여러 남자주인공들 중에서 단숨에 아이리스의 마음을 빼앗았는지 알 수 있는 미모였다.
'헉, 방금 조금 마음이동했어….'
"히익…."
안을 헤집던 손가락이쑥 빠져나오고 미카엘의 페니스가 다가왔다. 밤과는 달리무심코 시선을 주니 거대하기 짝이없는 그것이바로 로제타의 눈에 들어왔다.
"아, 안 돼!!!"
"응?"
로제타는 새파랗게 질려 미카엘을 쳐다보았다. 인간적으로 저 크기는 너무하잖아! 어떻게 저런 크기가 있을 수 있는 건데!
"아플 거예요! 저, 절대 안 돼! 찢어질 거야!"
당황한 외침에 미카엘이피식 웃었다. 그는 활짝 벌어진 로제타의 입구로 제 페니스를 세차게 문지르며 말했다.
"이미찢어졌잖아, 어젯밤에…. 이제 매일 집어넣어서 벌려 둬야지 다시 아플 일이없지."
"흐, 하으으아앗?!"
반박할 틈도 없이미카엘의 페니스가 쑤욱 로제타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시각적인 충격을 받았던 로제타는 적나라하게 밀려오는 자극에 당황했다. 그래도 몇 시간 지나고 하는 거라선지 바로 하는 것보다는 빡빡했다.
"히이…. 꽉 찼어, 으흑…."
"쉬이……. 착하다. 조금 더 힘을 빼고…. 응, 귀여워. 로제타."
꾸역꾸역 안으로 밀고 들어온 페니스가 기어이로제타의 안을 가득 채웠다. 미카엘이조금만 움직여도 꿈틀거리며 안을 헤집는 커다란 것에 로제타는 울상이되었다.
'역시 너무 커! 이딴 게 움직이니 어젯밤에 정신을 못 차렸지!'
로제타의 심정도 모르고 미카엘은 로제타의 뺨이며 관자놀이에 입 맞추며 달래고 있었다.
"…어제는 로제타의 안이너무 기분 좋아서, 정신 차리지 못하고 해 버렸지만. 오늘은 로제타가 기분 좋은 것만 해 줄 테니까."
'히이이이익!'
하루 종일 이것만 하겠다는 것처럼 들리는 말에 로제타는 기겁했다.
"시, 신혼여행은요?! 신혼여행 가는 것 아니었어요?"
"나랑 신혼여행 갈 기분은 들었어?"
기쁜 듯한 미카엘의 얼굴에 로제타는 차마 아니라고는 할 수 없어졌다.
"드, 들었지만! 그래도 이혼은 할 거예요!"
"그럼 나는 로제타의 마음을 돌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겠네?"
말하며 미카엘이가볍게 허리를 들썩이자 그 커다란 페니스가 아래위로 꿈틀거리며 로제타의 안을 헤집었다. 배 속을 가득 메우는 야릇한 자극에 로제타의 얼굴이달아올랐다.
"아! 아아아…. 황자님, 으응…."
"로제타, 유혹하는 거야? 너무 귀여운 표정이잖아. 자꾸 부추기면 안 돼. 로제타가 이러면 쉽게 흥분해 버리는데…."
아직 내부에 가득 차 있는 정액을 속살에 비비듯 페니스가 움직였다. 질척질척한 물소리에 로제타는 어쩔 줄 몰라하며 허리를 꼬았다. 미카엘은 로제타의 다리를 들어 올려 그녀의 몸을 반으로 접으며 말했다.
"어젯밤에는…, 너무 급해서 로제타의 좋아하는 곳을 전부 알아내지 못했으니까…."
"흐앗?!"
옆으로 몸이돌려지며 페니스가 내부를 질척하게 휘젓는 것에 허리가 펄떡 뛰었다. 속살이그에 반응하며 집어삼킬 듯 페니스를 조이자 미카엘의 얼굴에 초조함이실렸다.
"아…. 이렇게 기분 좋게 조이면……. 으음…."
"앗! 아아아!"
돌연 제 허리를 밀어붙인 미카엘이퍽퍽 쳐대기 시작했다. 로제타가 기겁하며 쳐다보자 미카엘이뺨을 물들이며 말했다.
"못 참겠어, 로제타…. 한 번 가게 해 준 다음에……. 할 테니까…."
"흣, 아앗! 아흑! 아앙! 아하아앙!"
푹푹! 질척질척 쳐대는 물소리가 요란했다. 로제타는 미카엘의 품에 안긴 채로 허리를 비틀었다. 어제와는 다른 각도로 맛보는 것에 배 속이너무 이상한 기분이들었다.
"아흐으! 아…. 싫어, 아앙! 거기 찌르면…. 아앗!"
"아……, 로제타…. 흐읏…."
흥분한 미카엘의 목소리를 들으며 로제타는 바르르 떨었다. 그의 야릇한 음성도, 내부를 맛보는 음탕한 페니스도 전부 기분 좋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아앗……!'
그러나 이성은 미카엘이주는 감미로운 쾌락과 달콤한 속삭임 속에 흐려질 뿐이었다. 로제타는 다시 맛본 절정에 몸을 활처럼 휘며 움찔움찔 떨었다.
***
"아앗! 으…. 아흐흑……, 으응…."
엎드린 채 허리를 들고 있는 로제타의 뒤에서 미카엘이끊임없이움직였다. 옆으로 누운 채로 받아들였을 때처럼 격렬한 움직임은 아니었다.
그러나 뜨겁고 커다란 것이속살을 느릿하게 훑으며 이곳저곳을 뭉근하게 찌르고 비벼대는 느낌에 배 속이오그라드는 듯했다.
"히익!"
어느 지점을 쿠욱 찌르며 문지르는 느낌에 로제타는 몸서리쳤다. 미카엘은 로제타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허리를 꽉 잡고는 느긋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여기는…, 이렇게 해 주는 게 좋구나?"
"아…. 으응…… 으흐응, 그만…. 아흑……."
선단이속살을 문지르며 주름을 긁어내리는 감각이선명했다. 자신의 몸이라해도 있는 줄도 모르는 곳까지 파헤쳐지는 느낌에 얼굴이뜨거워졌다.
"하으……. 아…."
이대로 안이자극으로 녹아내릴 것 같다. 벌써 이것으로 두 번이나 도달해 버렸는데도, 미카엘은 멈춰 주지 않았다. 점막과 점막이느릿하게 마찰하며 나는 물소리에, 로제타는 수치심을 느끼며 숨을 헐떡였다.
"…주인님, 마님. 일어나셨습니까?"
너무 늦게까지 시간을 끌어서일 것이다. 신혼여행을 위한 마차가 준비되어 있을 테니, 기침 여부를 묻는 것은 당연했다. 로제타는 시녀가 방 안으로 들어올까 봐 기겁했다. 허둥지둥 앞으로 기어가 도망치려 하자 미카엘이무릎걸음으로 쫓아왔다.
푸욱!
"힉?!"
돌연 미카엘의 페니스가 뿌리까지 박히며 퍽퍽! 쳐대기 시작했다. 녹아내린 점막으로 가해지는 무자비한 쾌락에 로제타의 눈이커졌다.
"안…! 안 대! 앗, 아아! 아흡! 아앗!"
터져 버린 신음에 로제타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지만 소리가 새어 나갔다. 당황하여 손으로 입을 막으려 했건만, 밀어붙이는 허리에 균형을 잡으려 시트를 잡고 말았다.
"흐아아앙!"
순식간에 뿌리까지 페니스가 들어오며 찰진 소리가 울렸다. 로제타의 엉덩이에 미카엘의 허리가 부딪힌 것이다. 굵은 줄기에 민감한 입구가 벌어지며 선단이가장 깊은 곳을 찔렀다.
"아흐흐, 아앗!"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 정도의 자극에 기겁하며 몸부림치자 페니스가 빠르게 들어왔다. 푹퍽푹푹! 사정없이 찔러드는 그것이 이제까지 발견했던 로제타의 약한 부분만을찔러댔다.
"응, 응! 하응! 앙 대…. 싫어, 아앙! 미카, 미카엘! 제발…. 아아아앗……!"
높아진 신음 소리에 문밖에서 기침 여부를 묻던 기척이 사라졌다. 로제타는 들켜 버렸다는 생각에 새빨갛게 물들었다.
"아앙, 앙! 황자님, 바보…. 아앗!"
"하…. 으음……. 로제타…."
"하앙! 아, 아하아앙! 난 몰라……. 아아아앗!"
앞뒤로 격렬하게 흔들린 몸이, 이런 상황임에도 절정으로 치달아 버렸다. 고개를 젖히며 도달했던 로제타가 쓰러지자 미카엘은 그녀를 끌어안으며 일으켜 제 위에 앉혔다.
"하아, 응…. 바로……. 안 돼…."
들썩이는 미카엘의 허릿짓에 로제타는 곧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챌 수 있었다. 로제타가 절정을맛보며 미카엘도 사정했음에도, 그의 것은 여전히 크기만 했다.
"로제타 탓이야. 심술궂게도 하는 도중에 도망치려고 하고…."
"아흐…. 사람이 왔으니까 당연! 흐아흐, 아흐…. 아아앙!"
기어이 로제타를 제 가슴에 기대게 한 미카엘이 격렬하게 찔러 올렸다. 제 체중으로 깊숙이 파고든 페니스가 안을집요하게 맛보자 로제타는 허덕이며 흐느꼈다.
"시녀 따위보다 날 생각하는 거야, 로제타…. 응? 아니면 나……. 질투해서 로제타를 하루 종일 안게 될지도 몰라. 아니면…."
그쪽이 취향인가?
속삭이며 입술을포갠 미카엘이 끈적하게 입 맞췄다. 로제타는 안을헤집는 미카엘의 혀를 받아들이며 신음했다.
오늘 신혼여행지로 출발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
어젯밤의 고통이 무색할 정도로 오늘은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이자벨은 제 몸 상태를 확인하며 이를 악물었다. 저주라니! 감히 누가 자신에게 저주를 건단 말인가?
이자벨에게 원한을품을이는 많았으나, 그들 대부분은 이자벨이 그렇게 한 것임을눈치채지도 못한 채로 파멸해 갔다. 이자벨의 소행임을안 자들은 대부분, 다시는 회생하지 못할 정도로 짓밟힌 자들뿐이었으니, 누구도 복수할 수 없어야만 했다.
그런데….
'대체 누가!'
이자벨은 분노했으나 그 분노만큼이나 두려웠다.
누가 저주를 걸었을까? 그녀가 수많은 자들을불행에 빠트린 만큼 그녀에게 원한을품고 있을자들 또한 많았다. 다만 대부분 그녀가 저지른 짓임을모를 뿐이었다.
만약 그 많고 많은 자들 중에 누군가 꼬리를 잡은 거라면…. 상대에 따라서는 저주 정도가 아니라 목숨을잃거나 멸문을당할 수도 있었다.
'아니! 그럴 리 없다. 내가 그와 같은 일을행한 지 십여 년이 지나왔다. 인제 와서 빌미를 잡힐 리가….'
거기다 대부분은 상대가 카룰리아스공작가의 공녀라는 사실만으로도 복수하기를 포기했을것이다. 카룰리아스공작가의 위세는 그만큼 대단했으니까. 황실보다는 못한 권력을누리고 있으나 황제의 총애를 받는 3대 가문 중의 하나가 아니던가.
문득 이자벨은 미카엘을떠올렸다. 황제는 진범이 잡혔다고 생각하여 리디아를 잊었지만, 미카엘은 그렇지 못함을알고 있었다. 그가 의심을품은 것을드러내지는 않으나 서서히 망가져 가고 있는 것을즐기고 있었다.
만약 미카엘이 그녀에게 의심을품게 된 거라면….
오싹한 생각이 들었으나 그럴 리 없었다.
미카엘은 제국뿐만이 아니라 대륙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마법사였다. 그가 리디아 사건의 진범으로 이자벨을확신했다면 그녀 혼자만이 아닌, 온 집안이 도륙당했을것이다.
차례로 제게 원한을품었을만한 자들을짚어 가던 이자벨은 제가 벌레처럼 짓이겨 버렸던 이들의 원한에 찬 시선들을떠올렸다. 이자벨은 모든 것을잃고 비통한 눈물을흘리던 그들에게 제가 그 원흉임을가르쳐 주며 조롱했었다.
대부분은 거기까지 가면 괴로움에 못 이겨 목숨을끊거나 광인이 되어 거리를 떠돌고, 걸인이 되어 비참한 인생을이어 가고는 했다.
설마그들 중에 새로운 기회를 얻은 자가 있나? 그런 자들이 제 목숨을버려 가며 사술을써서 저주를 건 것이라고 한다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
'아니, 아니다! 풀 수 있을것이야. 내게 저주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자신에게는 이런 불행한 일이 생겨서는 안 되었다. 그녀는 카룰리아스공작가의 자랑스러운 여식이 아니던가? 대내외적으로 아주 작은 흠도 없는, 황자 미카엘에게 가장 어울리는 여인이라는 평을듣던 그녀였다.
그런 자신이 저주받은 여인이라는 오명을뒤집어쓰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분노로 떨리는 것만 같았다.
"아가씨, 공작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지금 2층으로 올라오시…."
문밖에서 들리는 조심스러운 음성에 이자벨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작은 실력 있고 입이 무거운 마법사를 수배하기 위해 직접 움직였다.
"내가 내려가겠다. 두 분은 어디 계시지?"
***
마법사는 두 눈이 보이지 않는 자였다. 감고 있는 눈꺼풀 위에는 길게 이어지는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그 문신에 걸려 있는 마법에 의해 그는 눈이 보이는 사람처럼 움직일 수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다고 했다.
"…무언가 보이는가?"
두 시간 동안 마법사는 이자벨의 모습을살펴보기만 했다. 집무실의 카펫 위에 서 있는 이자벨은 불쾌한 표정을참은 채로 그저 초조하게 기다리고만 있었다.
"지독한 저주로군요. 이와 같은 형태의 것은 처음 봅니다."
"풀 수 있겠는가?"
카룰리아스공작의 물음에 마법사는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잠자코 기다리고 있던 이자벨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하면 누가 저주를 걸었는지는 알아낼 수 있나?"
"공녀께 남아 있는 흔적만으로는 추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다만…."
"다만 뭔가?"
마법사는 여전히 눈을감은 채로 고개를 돌려 공작을보았다. 표정을알 수 없는 이였으나 공작은 그가 왜인지 자신을비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단순한 저주라 하기에는 독특한 주문입니다. 고대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노예 계약의 주문과도 비슷하군요."
"뭐라? 노예 계약의 주문이라니…. 누군가 이자벨의 노예가 되었다는 뜻인가?"
공작이 이해하지 못하고 그렇게 말하자 마법사가 고개를 저었다.
"반대의 의미입니다. 고대 마법사들이 노예를 제 뜻대로 휘두르기 위해 걸었던 주문에 가까운 것입니다."
마법사의 말에 이자벨은 경악과 분노로 벌겋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 말은 누군가가 그녀에게 노예의 인장을찍었다는 말과도 같았다.
"대체 누가!"
분노한 것은 카룰리아스공작도 마찬가지였다. 마법사는 또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로서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제가 본 것이 맞는다면…. 상대를 찾는다 해도 주의하시는 것이 좋을겁니다."
***
'그를 상처 입히는 것만으로도 그 상처가 배로 공녀에게 돌아가 목숨을잃게 되는 경우도 있을테니까요.'
마법사는 그 말을끝으로 카룰리아스공작저를 떠났다. 공작은 분노를 감추지 못한 얼굴로 계단을올라갔다.
집무실에는 이자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다. 단정한 모습이 여느 때와 같았으나, 공작의 눈에는 그것이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그러기에 그 더러운 수작질을진즉에 그만두라 말했거늘!"
분을참지 못한 공작이 고함을질렀다. 그는 막 마법사를 보내며 제 수하에게 발렌시아 신관과 의원을처리하라 명령한 참이었다.
의원을처리하는 일이야 어렵지 않으나, 발렌시아 신관이 문제였다. 완전히 감추기는 어려운 일이니, 신전에 막대한 돈을바쳐야 할 것이다. 공작은 그러고도 이 추문이 사그라들지 않을것 같은 예감에 분노하고 있었다.
"이제 어찌할 것이냐고 묻지 않았느냐!!!"
공작의 목소리가 커지자 이자벨이 고개를 돌려 공작을보았다. 창백한 안색은 여전했으나 아까보다는 가라앉은 표정이었다.
"아버님께서는 아버님의 할 일을하시면 될 것입니다."
"뭐라? 이 일이 새어 나간다면 무슨 일이 생길지 알고나 하는 말이냐!"
저를 향한 날카로운 추궁에도 이자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공작이 이 집안의 가주이기는 했으나 이자벨은 이 집안의 많은 것을장악하고 있었다. 부친이기도 한 카룰리아스공작을내버려 둔 것은 아직 그가 쓸모가 많기 때문이었다.
"새어 나가지 않을것입니다, 아버님. 말이 샌다면 그것이야말로 제 정체를 들킬 일일 터이니…. 카룰리아스의 공녀가 저주받았다는 사실이 누구의 입에도 오르내리지 않겠지요."
저주를 건 자가 누구인지 알기만 한다면 수단과 방법을가리지 않고 잡아들여 그 입에서 저주를 풀 방법을알아내고 말 작정이었다.
그 본인을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듣기는 했으나, 본인을상처 주지 않아도 파멸시킬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범인은 제가 이 손으로 잡아들일 것입니다. 카룰리아스의 이름도, 제 이름도 더럽히지 않은 채로 처리할 작정이니…. 아버님은 그저 해야 할 일을해 주십시오."
횃불처럼 타오르는 눈을들어 말하자 공작은 미심쩍은 듯이 이자벨을보았다. 제 딸아이를 의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여겨졌으나, 이번의 일은 정말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좋다. 이번 한 번이니 믿어 볼 것이다.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내게도 생각이 있으니 각오하는 것이 좋을거다!"
"실망시키는 일은 없을것입니다."
이자벨은 마지막까지 우아한 태도를 잃지 않은 채로 말하고는 공작에게 인사한 후에 집무실을나갔다. 그녀의 두 눈에 서릿발 같은 분노가 어렸으니, 그녀의 눈을바라본 시녀와 하인들은 모두 고개를 숙여 시선을피했다.
"가자. 해야 할 일이 많구나."
앞장선 이자벨의 말에 그녀의 전속 시녀들이 종종걸음으로 뒤를 쫓았다.
***
결국 또 기절해 버렸다. 미카엘의 위에서 흔들리며 몇 번이나 절정을맛보았던 로제타는 새빨갛게 물든 얼굴로 이불에 얼굴을묻었다. 그녀가 기절한 사이 미카엘이 그녀를 씻기고 옷을갈아입혔는지, 지금은 제대로 옷을입고 있었다.
"로제타, 깨어났어?"
음식이 담긴 트레이를 든 미카엘이 다가오며 말했다. 그는 침대 가까이에 있던 테이블에 트레이를 내려놓고 침대로 올라왔다.
얇은 가운 하나만 달랑 걸친 로제타와는 달리 미카엘은 제대로 옷을걸치고 있었다. 자신이 기절한 사이 미카엘이 온몸을다 봤을거라는 생각에 로제타는 새빨갛게 물들었다.
"…흥!"
창피한 마음에 고개를 돌렸으나 미카엘은 내보인 뺨에 입을맞췄다.
'그런 의미가 아니얏!'
화들짝 놀란 로제타가 키스받은 뺨을잡으며 째려보았으나 이번에는 입술로 미카엘의 키스가 떨어졌다. 이전의 부드러운 키스가 아니었다.
"흡! 음, 으흑…."
무어라 항의하려고할 때마다 혀가 더 들어와 입안을달콤하게 헤집었다. 꽉 끌어안는 미카엘의 팔 안에서 로제타는 헐떡이며 늘어졌다.
"입술도 역시 달아…. 로제타가 기절해 있는 동안 키스하고싶어서 얼마나 참았는지. 귀여워, 로제타."
감탄한 듯 속삭이며 미카엘이 로제타의 뺨이며 입술에 가벼운키스를 떨어트렸다. 로제타는 당황하며 미카엘의 품에서 버둥거렸다.
"머, 멋대로 키스하고! 아까부터 말하려던 건데, 왜 반말하시는 거예요?!"
황자이니 신분이 드러나자마자 하대한 것일 테지만,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억지로 흠을잡아내려는 로제타에게 미카엘은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럼 존댓말을할까요, 로제타? 그게 좋습니까?"
"아, 아니…. 음…."
방심한 사이 다시 키스가 이어졌다. 자신을보며 황홀하다는 듯이 뺨을물들이고있는 미카엘을보고있자니 확 밀쳐내기 어려웠다.
'키스도, 뭔가…. 능숙하고.'
원작에 따르면 미카엘은 키스도 아이리스가 처음이었다. 아직 원작의 줄거리가 거기까지 전개되기 전이니 로제타가 처음이었을것이다.
'남주 버프? 남주 버프인 거야?'
로제타는 입술과 혀를 빨리며 생각했다. 이렇게 키스 받고있자니 사랑받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될 것 같아 두려웠다.
'이러면 안 되는데….'
원작남주와 결혼까지 해 버렸다. 차라리원작의 로제타가 짝사랑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서브남1하고한 거라면 납득이라도 하겠는데, 남주라니 생뚱맞다.
미카엘은 만족할 만큼 로제타의 입술을맛본 후에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몽롱하게 풀린 로제타의 눈을보고는 사랑스럽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신혼여행에 늦은 것 때문에 토라진 것이라면…, 준비해 두었습니다."
"준비해 두다니요? 늦게라도 마차를 출발시키시겠다는 건가요?"
밤늦게 마차를 타고여행하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인지라 로제타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미카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직접 보면 알 수 있을겁니다. 저녁 식사를 마치는 대로 타고갈 거니까. 그때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놀라게 하고싶었거든요."
싱긋 웃으며 미카엘은 로제타를 침대에서 내려오게 했다.
"아침도 늦었으니, 로제타가 좋아할 만한 것들로 가져왔습니다. 배고프지요?"
로제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결혼 전에 몇 번의 만남을가졌었으니 서로의 식성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있었다.
"출발할 때까지는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로제타, 너무 화내지 말아요."
미카엘의 달콤한 목소리에 자꾸만 경계심이 누그러들었다. 로제타는 정신을바짝 차려야겠다는 생각을하며 음식으로 시선을돌렸다.
***
"그게 정말이십니까? 로제타와 결혼한 사람이, 필립이 아닌 미카엘 황자님이시라니!"
황제 앞에서 그의 동생을황자라고부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으나, 놀란 나머지 그런 말이 튀어나오고말았다. 황제도 미카엘이 아직 대부분의 귀족에게 황자라고불리는 것을알기에 내버려 두었다.
그에게는 아직 자식이 없었으므로.
"그럴 수가…."
일개 지방 영주보다는 나은 상대이기는 하나, 분에 지나쳐도 너무 지나친 상대였다. 이전이었다면 이 뜻밖의 행운을기뻐했을것이다. 로제타가 지저분한 스캔들에 휘말려 도망치듯 수도를 떠난 것이 아니었다면.
"황송한 일입니다만…, 어째서 그런 결혼을하신 것인지. 주위의 눈 때문이십니까? 저희 로제타가 제대로 공작부인 대접을받을수는 있는 것이겠지요?"
이유는 아무래도 좋았다.
문제는 미카엘이 백작으로서 로제타와 결혼했다는 사실이었다. 신분을숨긴 채 로제타를 부인으로 맞이해 정부로 삼을생각인 거라면…. 한숨으로 땅이 꺼질 만한 일이었다.
"물론이지. 로제타 영애는 미카엘의 정실부인이 된 것이니, 그 점은 염려하지 않아도 좋을거야. 이렇게 자네를 부른 것도 미카엘이 갑자기 영애의 남편이라고나서도 놀라지 말라는 뜻에서 부른 거네."
황제의 말에 엔디미온은 안도했다. 황제의 태도로 보아 황제까지도 그 결혼을찬성해 준 모양이었다. 엔디미온은 깊숙이 황제에게 고개를 숙였다.
"부족한 제 딸을아덴 공작님의 부인으로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나야말로…. 자네의 딸이 상처가 많은 내 동생의 마음을녹였으니, 기쁘게 생각하고있네."
사교계에서 로제타의 추문은 유명했으므로 황제의 귀에도 들어갔을것이다. 굳이 그것을언급하지 않고기쁘다 말해 주는 것에 엔디미온은 다시 한번 감사를 표시하고싶어졌다.
'하지만 대체 왜 로제타인지…. 미카엘 황자는 리온 영애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묻고싶었지만, 감히 황제에게 설명을요구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방금도 로제타에 대한 걱정으로 너무 많은 것을물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미카엘 황자님…, 아니 아덴 공작께서는 언제쯤 그 사실을사교계에 공표하실 생각이신 겁니까?"
"미카엘의 결혼 사실은 오늘 연회에서 내가 귀족들에게 알릴 것이네. 그대의 딸이 공작부인으로서 사교계에 다시 모습을드러내는 것은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후가 될 테지. 그러니 아무 걱정 말고, 소식을기다리도록 하게."
황제의 부드러운어조에서 로제타에 대한 호감을느낄 수 있었다. 이제까지 로제타에게 반감을가진 자들만 보아 왔던 엔디미온은 황제의 그러한 태도를 기이하다 여겼다.
"폐하의 깊은 은혜와 배려에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거듭 감사를 표명하는 엔디미온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로제타가 누명을썼다는 사실을아는 황제는 약간은 그를 측은하게 여기고있었다.
***
휘르센 백작가로 돌아온 엔디미온은 제럴드와 부인인 셀리나를 불러들였다. 셀리나는 로제타의 결혼으로 한시름 놓고있었다.
좀 얼빠진 구석은 있어도 보통은 간다고생각했던 딸이, 어느 순간부터 사고만 일으켜 크게 걱정하고있었다. 종국에 와서는 얼굴을들고다닐 수 없게 하는 큰 사고를 쳐서 그녀까지도 사교계에서 쫓겨날 판국이었다.
이제는 결혼을했으니 철이 들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방심하고있었다. 그래서 엔디미온이 전한 소식은 청천벽력 같은 것이었다.
"미, 미카엘 황자님이요?! 농담이시겠지요?"
"폐하가 그런 농담을하실 분인가."
엔디미온도 셀리나와 같은 걱정을한 것이 분명했다. 미카엘이라는 뒷배를 얻게 된 로제타가 더욱 활개를 치며 사고를 치지 않을까 하는.
공작부인이 되면 미카엘 황자와 스캔들이 난 적 있는 리온 영애를 더욱 경계하고괴롭히려 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미 많은 사건을그녀를 괴롭히기 위해 벌였던 참인데, 일이 더욱 커지게 될까 두려웠다.
"정말입니까, 아버지? 필립이…. 미카엘 황자였다고요? 그럼 아이리스 영애는…."
쾅!
분노한 엔디미온이 테이블을주먹으로 내리쳤다.
"지금 리온 영애를 입에 올리는 거냐, 제럴드! 로제타는 네 동생이다! 네가 리온 영애의 추종자들과 어울린다는 것은 알지만, 지금 그 이름을듣고싶지는 않구나!"
"죄송합니다, 아버지."
제럴드는 시선을떨구며 순순히 사과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은 상처받았을아이리스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이리스는 내색하지는 않지만 미카엘의 마음이 자신에게서 멀어진 것 같다며 두려워하고있었다.
'로제타! 아이리스에 대한 악행을멈췄다고생각했더니…. 결국 영애에게서 미카엘 황자를 빼앗아 간 거야? 네가 좋아했던 것은….'
후작가의 장자인 패트릭 란스필드였다.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귓불까지 빨개지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그의 마음을아이리스에게 빼앗기고원한을품은 듯했다.
'하지만 그 미카엘 황자가 고작로제타에게 넘어가다니…. 이런 일이 있을수 있는 것인가?'
로제타와 아이리스라면, 들풀과 백합을비교하는 것과 같았다. 로제타가 아이리스에 대해 악심을품고있었더라도, 그 아이리스에게서 미카엘을훔쳐 갈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무언가 사술이라도 쓴 것이 분명하다! 아니면 황자에게 이유가 있어 일시적으로 로제타와 결혼을했다든가…. 애초에 공작의 신분이 아닌 백작으로 속여 결혼한 것이 아닌가.'
제럴드가 필사적으로 미카엘이 로제타와 결혼한 이유를 찾고있는 동안 엔디미온과 셀리나는 로제타에 대한 걱정을늘어놓고있었다.
로제타가 사고를 많이 쳐서 수도에서 도망쳤다고는 해도 그들의 딸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 그토록 수상한 결혼을했으니,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폐하를 믿고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겠지. 로제타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면…, 이번에야말로 행실을똑바로 하라고단단히 일러 주고말이야."
"그래야겠지요. 황자께서 부디 우리로제타를 아껴 주셔야 할 텐데…."
안타까움이 가득 담긴 셀리나의 말에 제럴드는 뒤늦게 로제타에 대한 걱정이 떠올랐다. 미카엘이 진심일 리없으니, 로제타가 이용당하고있다고생각하는 것이다.
로제타가 이제까지 벌인 일을생각하면 이용당해도 자업자득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로제타는 제 동생이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 해도.
'아무튼…. 이 사실을아이리스에게 알려야 한다! 다른 영애들에 의해 듣게 된다면 상심이 클 거야.'
백합 같은 자태를 가진 아이리스의 모습을떠올리며 제럴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부모님들 곁에서 그분들을안심시켜 드리고도 싶었지만, 그것은 소식을전한 후에 해도 충분할 것이다.
***
'미안해! 하지만 난 죽고싶지 않아!!'
'누군 죽고싶어서?'
하필이면 또 그때의 꿈을꾸다니…. 로제타는 짜증스레 머리카락을젖히며 베개 속에 얼굴을묻었다. 미카엘은 뭔가를 준비하러 나가서는 아직 돌아오지 않고있었다.
1년 2개월 전.
그녀, 윤승아는 원작의 로제타 휘르센에게 육체를 빼앗겼다. 토요일 오후, 훈제 오징어 안주에 맥주를 마시며 뉴스를 보다가 생긴 일이었다.
처음에는 핑크핑크한 덜떨어진 드레스를 입은 반투명한 여자가 나타나서 헛것이 보이나 싶었다. 귀신이라고생각하기에는 너무 총천연색에 화려해서.
원작의 로제타는 승아에게 뛰어들었고, 승아의 영혼은 순식간에 제 육체에서 튕겨져 나왔다. 승아의 육체를 빼앗은 로제타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기뻐했다.
'진짜 됐어! 이제 이 몸이 내 몸이야!'
승아는 당연히 겁에 질렸다. 기겁하며 다시 자신의 몸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소파에 올려놓은 핸드폰이 그녀의 영혼을빨아들이고말았다. 순식간에 빨려들어 가는 승아를 향해, 로제타는 일말의 죄책감이 담긴 얼굴로 외쳤다.
'미안해! 난 죽고싶지 않아!!'
'이런 $%^&*@%#%!'
연달아 삐~ 소리가 울려야 할 것 같은 욕설을 중얼거리며 내던져진 곳은 그녀의 월셋집보다도 넓은 침실이었다. 침대 위에는 괘씸하기 짝이없는 로제타의 육체가 누워 있었다.
승아의 영혼은 저 몸으로 들어가야 함을 알았지만, 들어가기 싫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에 로제타에게 들은 말 때문이었다.
'죽고 싶지 않다니! 저 몸으로 들어가면 죽는 거 아니야?!'
그때는 이세계가 소설 속 세계인 줄도 몰랐고, 저 몸이로제타라는 것도 몰랐다. 어떤 방식의 죽음인지 모르니, 차라리이대로 영혼으로 있는 게 낫지 않은가 싶었다.
'저 몸으로 들어갔다가 못 나오면 어떻게 해? 내 몸을 찾아서 그몸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는 게 더 낫지.'
마음을 결정한 승아는 그방에서 나가려 했다. 그러자….
【아, 안 돼! 그러면 그냥 죽게 될 거야!】
침실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던 다람쥐 인형이펄쩍 뛰어오르며 소리를 질렀다. 그인형이달려들었으므로 승아는 가까운 위치에 있던 쿠션을 잡아서 쳐 날렸다. 인형은 벽에 부딪히며 찍소리를 내고 잠잠해졌다.
"…죽었나?"
【안 죽었다!!】
"으악!!"
깜짝 놀란 승아는 바퀴벌레를 때려잡듯 쿠션으로 퍽퍽 다람쥐 인형을 내리쳤다. 인형은 껙, 컥, 끅, 살려 줘! 따위의 소리를 내다가 잠잠해졌다.
"휴우…. 겨우 퇴치했네."
【퇴치라니! 내가 악령이냐?!】
"으아악!"
이번에는 승아가 들고 있는 쿠션에서 나는 소리였다. 승아는 쿠션을 떨어트리며 발로 매우 밟아댔다. 영혼의 모습이라고 생각했건만 물리력을 가지고 있는지, 아주 잘 밟혔다.
그러자 쿠션에서 비실비실해 보이는 푸르스름한 영혼 같은 것이흘러나왔다.
승아는 히익! 하고 비명을 지르며 문으로 도망치려 했다. 그수상쩍은 것은 필사적인 기세로 승아에게 외쳤다.
【잠깐! 도망치지 마! 나는 악령 같은 게 아니라고!! 나는 정령이야!】
"뭔 개소리…."
승아는 의심했지만 막무가내로 도망치지는 않았다. 정령은 하늘색의 투명한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어린아이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펑퍼짐한 잠옷 같은 차림을 한 손바닥만 한 형체에 승아는 의심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네가 이방을 나가도 네 육신으로는 돌아갈 수 없어! 로제타의 몸과너무떨어져 버려 네 목숨만 버릴 뿐이지…. 그러니 제발 로제타의 몸으로 들어가!】
"어떻게 해야 내 몸을 찾을 수 있는데?"
자신의 몸을 빼앗은 수상한 여자와 그여자와 같이있는 정령.
이건 분명 한패였다. 인형에 숨어 있다가 로제타가 방을 나가려고 하자 모습을 드러낸 것만 봐도 그랬다.
【그건…. 네가 로제타 몸으로 들어가면 말해 줄게.】
"말할 생각 없음 됐어."
승아는 홱 몸을 돌려 문을 열었다. 그러자 정령이노기를 드러내며 힘을 사용했다. 불어닥친 바람에 문이쾅! 닫혔다. 물리력은 사용할 수 있어도 다치지는 않는지 상처는 입지 않았지만, 승아는 깜짝 놀랐다.
"뭐 하는 거야?!"
【너야말로 뭐 하는 거야! 로제타의 몸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죽는다니까?!】
"네 말은 못 믿어. 너 그계집애랑 한패인 거잖아. 그여자애가 내 몸을 훔칠 수 있었던 것도 네가 도와줘서 그런 거 아니야?"
승아의 추궁에 정령은 당황하는 듯했다. 승아는 코웃음을 치면서 문손잡이를 잡았다. 저 자칭 정령이방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을 보니 더 나가야겠다는 생각이들었다.
【안 돼! 나가면 넌 진짜로 죽어!】
"저 몸으로 들어가도 죽는다며? 어차피 죽을 거라면 너희 뜻대로 하지 않을 거야!"
이미 문밖에 소란이일고 있었다. 문이쾅 닫히는 소리에 누군가 다가온 모양이었다. 조심스럽게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마리야! 빨리로제타의 몸으로 들어가!】
정령이소리쳤지만 승아는 듣지 않았다. 저 몸으로 들어가면 무언가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들었다.
"싫어."
【이러다가는 정말 큰일 난다고! 나도 시간이없는데….】
방 안쪽에서 대답이없자 바깥에서 문을 열었다. 승아가 그틈에 방에서 나가려고 하자 정령이다시 힘을 발휘했다.
【안 돼!!!】
휘오오오오오!
무서운 회오리바람이일어나며 다시 문이쾅! 하고 닫혔다. 문밖에는 방으로 들어오려다가 쫓겨나 버린 시녀가 놀라 주저앉았다. 소란이커지는 것으로 봐서는 사람들이더 오는 모양이었다. 승아는 정령의 힘에도 놀라지 않았다.
지금의 모습에는 아무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모양이었으니까.
【제발 부탁이야! 네가 이대로 죽어 버리면 나도 로제타도 큰일이나! 그러니 제발….】
"그거 잘됐네! 남의 몸을 훔쳐 놓고 잘 살 수 있을 줄 알았어?!"
승아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코웃음을 치자 정령은 안절부절못했다.
【으으~, 너도 죽는다니까!】
"저 몸에 들어가도 죽을 거라며? 뭔지는 몰라도, 너희 뜻대로는 안 해! 못 해!"
【으아아아아아악! 젠장!!!】
정령이비명을 지르며 제 머리칼을 쥐어뜯더니 갑자기 모든 것이얼어붙기 시작했다. 정령의 움직임에 따라 펄럭이던 커튼도, 바깥의 사람들에 의해 흔들리던 문도, 유리창 밖의 바람에 흔들리던 잎새도 정지되었다.
【아아…. 또 힘을 써 버렸어.】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풀이죽은 얼굴로 말했지만, 조금도 동정이가지 않았다. 이쪽은 무려 몸을 빼앗긴 것이다. 인생과생명을 강탈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다 설명할게. 그러니 제발 로제타 몸으로 들어가 줘….】
정령은 침울한 얼굴로 설명을 시작했다.
***
지금으로부터 3주 전까지만 해도 정령은 돌에 갇혀 있었다고 했다. 과거 나쁜 마법사에게 붙잡혀 나쁜 일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것을 거절하자 돌에 갇힌 채로 사막 한가운데에 버려졌다는 것이다.
천 년을 그렇게 보낸 정령은 간신히 제가 봉인되어 있던 돌을 반짝반짝 빛나게 만들고, 사막 밖으로 조금씩 움직였다고 했다.
수백 년에 걸친 노력이빛을 발해 어느 새가 그를 삼켰고, 누군가 그새를 사냥하여 장터에 팔았다.
새를 사 간 이가 배를 갈라 그가 발견되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돌인 터라 창밖에 버려지고, 바닥을 굴러다녔다. 다시 8백 년을 그렇게 보냈을 때….
어린 로제타가 그돌을 주웠던 것이다.
로제타는 그돌이예쁘다고 방으로 가지고 와서 소중히 보관해 주었다. 그러다 성인이되어 물건을 정리하다가 돌을 발견하고 버릴까 말까 망설이다가 떨어트린 것이다.
【그때 돌이깨지면서 봉인이풀리고 내가 나올 수 있었던 거야!】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정령은 자신을 소중히 보관해 주고 심지어 봉인을 깨 준 로제타에게 애정을 품고 있었다. 정령은 이세계의 운명을 알고 있었고, 이대로 가다가는 로제타가 아이리스를 모함하고 괴롭힌 죄로 교수형에 처해지리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로제타에게 그것을 일러 주었다.
아이리스가 질투 나더라도 괴롭히지 말라고.
그러나 정령에게 세계의 운명을 듣게 된 로제타는 막무가내였다.
'왜 나와 패트릭이주인공이아닌 거야?! 나도 주인공을 하고 싶어!'
'이자벨 님이뒤에서 사주해서 죽게 만든다면서?! 그럼 어차피 틀린 거 아니야? 카룰리아스 공작가가 얼마나 대단한 곳인데!'
아이리스가 책 빙의를 한 이세계의 아가씨라는 얘기를 듣더니, 자신도 이세계에 가서 살고 싶다고 징징댔다.
'그여자도 내 세계에 오기 전에는 평범한 여자였다며! 나도 다른 세계에 갈래! 주인공이되고 싶어! 평생의 소원이야!'
로제타에게 은혜를 갚고 싶었던 정령은 그소원을 들어주기로 한 것이다. 정령의 설명을 듣고 있던 승아는 기가 막혔다.
이세계가 소설 속 세계라는 것도 황당했지만,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자신의 몸을 선택한 무지함에 더 기가 막혔다.
"…아이리스 리온은 미녀에, 성녀이기나 하지. 난 완전 지나가는 행인 30287번인데?"
로제타가 자신의 몸을 훔친 이유야 아무래도 좋았다. 승아가 듣고 싶은 것은 자신의 몸을 되찾는 방법이었다.
"아무튼. 난 대단한 사람이아니야. 얼른 다시 바꿔."
【그게…. 불가능해.】
정령은 승아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승아는 이미 형형한 눈으로 정령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게 형체가 온전해 보이지 않긴 하지만, 자신 또한 그러하니 쥐어 팰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서로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영혼은 형질이많이달라. 영혼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육체에 균열이생길 수 있어.】
지금 로제타의 영혼이들어가 있는 승아의 육체는 균열이사라지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한 180년쯤 지나면 육체가 안정되어 다시 영혼을 빼내도 몸이무사할 수 있지만, 지금 그몸에서 로제타의 영혼을 빼내면 육체가 부서진다는 것이다.
"180년 후면…. 이미 내 몸은 썩어 문드러졌잖아!"
뻥치지 말라고 정령의 멱살을 잡으려 했으나 허무하게 손이통과했다. 엉엉 울기 시작하는 승아를 정령은 살살 달랬다.
【이제 알겠지? 네가 살 방법은 로제타의 육체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어. 너무시간을 끌면 육체의 연결이약해져서 위험해지니까, 얼른 들어가는 게 좋을 거야.】
"흑, 끕…. 싫어."
【뭐?! 왜!!!】
"왜 그렇게 날 살리려 안달인 건데? 넌 로제타의 소원만 들어주면 그만인 거 아냐? 로제타가 죽기 싫다고 하는 소리들었어. 난 끔찍하게 죽느니 그냥 이대로 있을 거야."
【아, 안 돼! 네가 이대로 죽어 버리면 내가 죽인 게 돼!!】
정령이비명처럼 내지른 말에 승아의 얼굴에 삐뚜름한 미소가 걸렸다. 그거였군.
"흥! 그럴 줄 알았지. 남의 몸이나 뺏는 것들이내 걱정을 해 줄 리없지. 목적은 그거였구나?"
【이, 이대로 있으면 네가 죽는다는 건 맞단 말야!】
"알 게 뭐야. 어차피 죽을 팔자라며? 이소설 판타지 로맨스라던데…. 중세물이면 끔찍하게 죽을 수도 있잖아. 절대 싫어. 저 몸에는 안 들어갈 거야."
【반드시 그런다는 보장은 없어! 나도 로제타가 그렇게 죽는 게 싫어서 미래를 알려 줬던 거라고…. 제발 저 몸으로 들어가 줘!】
정령의 애원에 승아는 귀를 후볐다.
"싫어. 이대로 죽는 게 내 몸을 훔친 너에게 복수도 하는 셈인데, 내가 왜?"
【으으윽….】
정령은 안절부절못하며 파리처럼 승아의 주변을 날아다니더니, 무언가 깨달은 얼굴로 승아를 보았다.
【그럼 너도 소원 한 가지를 들어줄게! 그럼 되는 거지?】
"내 몸 내놔."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방금 말했잖아!】
발끈하는 정령에게 승아는 무시무시한 눈길을 보냈다. 정령은 승아의 눈초리에 절로 몸이오그라드는 듯싶었다.
"남의 몸을 훔쳐 가 놓고…. 꼴랑 소원 하나 들어주는 것으로 퉁치겠다고? 내가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꼴을 당해야 하지? 몸 빼앗겨, 인생 빼앗겨, 여긴 내가 사는 세상도 아니니 적응도 해야 할 테지…. 심지어 죽게 생겼네?"
【그러니까 로제타의 몸으로들어가면….】
"누구 좋으라고! 너! 내가로제타의 몸으로들어가면 냉큼 튀어 버릴 작정이었지!"
승아의 지적에 정령의 작은 어깨가튀어 올랐다. 그를 본 승아의 두 눈이 복수심으로이글이글 불탔다.
"천하에 나쁜 놈년들 같으니…. 살다 살다 이런 도둑은 또 처음 보네. 남의 인생 도둑질해도 죽이지만 않으면 괜찮다, 이거야?"
【나, 나도 네가로제타의 몸으로들어가면 돌봐 주려고했어…. 네가이쪽 세계에서 만족하고살면 되는 거잖아.】
"거짓말치고있네. …로제타 몸으로들어가게만 해 놓고튀려고했으면서."
살벌하게 눈을 부라리며 말하자 정령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그래! 내가잘못했어! 그래서 나더러어떻게 하라고! 네가원래 세계로돌아갈 수없다는 건, 내가설명했잖아!】
정령의 외침에 승아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으윽…. 겨우 빚 다 갚고자립해서 살고있었는데. 다시 이런 꼴이라니…. 로제타 쟤, 공부는 좀 했어? 뭐 할 줄 아는 건 있어?"
승아가묻자 정령은 눈을 굴렸다. 승아는 기가막혔다. 차림새 보고머릿속이 꽃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기는 했다.
"없어? 공부는 어디까지 했는데? 잘하는 건? 뭐 시도해 본 건?"
로제타가정령의 돌을 주운 것은 꽤 오래전의 일이었다. 그 이후로정령은 늘 방에서 로제타를 기다려 왔다. 오래 곁에 있었기에 정령은 알고있었다. 로제타가지극히 평범하다 못해 아무 일에도 재능이 없는 아이라는 것을.
"……."
깊이 좌절하는 승아를 보고정령은 두려워졌다. 진짜 죽겠다고날뛰면 어쩌나 싶어서.
【그, 그러면 소원을 세 개! 아니, 네 개를 들어줄게! 네 가지를 손해 봤다고했잖아!!】
애써 밝은 목소리를 내며 정령이 외치자 승아는 음산한 얼굴로고개를 들며, 지옥에서 울려 퍼질 것 같은 무시무시한 목소리로말했다.
"좋아, 첫 번째 소원은 내 노예가되어 나와 내 자손들에게 대대손손소원을 들어주라는 거다!"
【그건 너무하잖아!】
"너도 남의 인생을 망쳐 놓고고작 소원 네 개로퉁칠 수있다고생각했냐!! 내가그 나이 먹을 때까지 얼마나 '노오력' 했는지 알아! 진짜 싫었는데도 '노오력'을 했다고! 그걸 톡 털어 가다니!!!"
승아는 뒷목 잡고쓰러지고싶었다. 몸이 없어서 그것이 불가능했을 뿐이지.
【그, 그래도 로제타가한 살이라도 더 젊잖아….】
"필요 없어. 내 몸 내놔."
【으으…. 제발 소원으로타협해 줘! 대신…. 다, 다섯 개 들어줄게! 원래 세계로돌려보내 달라든가, 몸을 내놓으라는 소원만 아니면 뭐든! 그러니 제발….】
승아는 정말 화가났지만 자신에게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알았다. 이제는 로제타가되어 살아야 하는 것이다.
"책 빙의라니…. 심지어 얘, 주요 인물도 아니잖아."
불행 중의 다행으로이 세계의 원작을 승아는 읽은 적이 있었다. 워낙에 수비 범위가넓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책 제목은…. <남주는 내 것!>이었다.
"제목이 유치하다고던져 버리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거기다 비교적 최근에 읽은 책이라 내용도 기억하고있었다. 악녀1은 이자벨 카룰리아스고, 악녀2는….
【고민하고있을 시간이 없다니까! 빨리 로제타의 몸으로들어가야 해!!】
정령의 외침이 승아의 생각을 방해했다. 승아는 정령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소원 다섯 개. 확실한 거지?"
【그래! 정령은 거짓말을 안 해!】
"그건 두고봐야 알 일이고…. 내가그 말을 믿을 수있는 근거는?"
【계약의 맹세를 하겠어. 이건 로제타에게도 해 주지 않았던 것이야. 네게만 내 이름을 가르쳐 줄게. 절대 다른 누구에게도 내 이름을 가르쳐 줘서는 안 돼….】
다가온 정령이 승아의 귀에 속삭였다. 그리고승아의 영혼을 붙잡고그 뺨에 입 맞췄다. 승아는 볼이 뜨끈한 것을 보고거울에 비춰 보았다.
푸른 덩굴 같은 문양이 피어올라 있고, 각 덩굴의 한 마디마다 하나씩, 다섯 개의 꽃봉오리가맺혀 있었다.
【각각의 꽃봉오리가들어주지 않은 소원 한 가지씩이야. 소원을 빌면 꽃이 피고, 소원이 이루어지면 꽃이 사라지면서 줄기가줄어들 거야.】
"이 문양이 사라지면 너와 나 사이의 계약은 사라지는 거고?"
【그래! 그러니 이제 로제타의 몸으로가!】
정령의 재촉에 승아는 로제타의 몸으로다가갔다. 그녀가로제타의 육체에 손을 대자마자 영혼은 순식간에 빨려들어 가그 육체에 안착했다.
【됐다! 다행이야…. 나는 이제부터 힘을 모을게. 로제타의 소원을 들어주느라 남아 있는 힘을 거의 다 써 버렸거든. 네 소원을 들어줄 수있을 만큼 힘을 되찾으면…, 그때 다시 돌아올 거야.】
"뭐?!"
로제타의 육체에서 정신이 든 승아가정령을 찾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정령은 어디론가사라지고난 뒤였던 것이다.
정령이 걸어 놓은 마법이 풀린 것인지, 백작가의 사람들이 방 안으로들어왔고…. 승아는 로제타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
'사기당한 거지.'
승아, 아니 이제는 로제타인 그녀가푹푹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로제타의 육체에 빙의되었던 그때를 제외하고그녀는 다시 정령을 본 적이 없었다. 모습은커녕 목소리도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날의 일이 꿈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벌써 1년 2개월이나 지났으니…. 정령은 놓친 거라고생각해야지, 뭐.'
분하고억울했지만 별수없었다. 이미 로제타가되어 버렸고살아야 했으니까. 어찌어찌 데굴데굴 구르다 목숨은 건졌으니, 나름대로는 성공했다고봐야 했다.
'미카엘하고얽힐 줄은 몰랐지만. 아니, 미카엘하고얽혔으니 아직 살아났다고볼 수없는 것 아닌가?'
이제 이자벨은 기를 쓰고로제타를 해치려고들 것이다. 그러다가자신의 저주와 연결된 사람이 로제타라는 것을 알게 될 테지.
'이자벨을 어떻게 하긴 해야겠는데….'
이전에는 능력에서 너무 차이가나서 엄두가안 났지만, 지금은 미카엘이 곁에 있다! 속셈을 모르겠지만.
로제타는 미카엘이 그가말한 대로자신을 사랑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자신은 여러가지로부족한 점이 많았으니까.
능력도 외모도 그저 그렇고, 집안도 재력도 귀족 사회의 눈으로봤을 때는 평범한 수준이었다. 성품도 대단치 않고. '그' 미카엘이 애정을 품을 만한 상대가아닌 것이다.
'원작 여주처럼 독특한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말이야.'
주인공에게 생각이 옮겨지자 로제타는 그녀의 매력이 뭐였을까? 고민했다. 소설 내에서는 계속 매력적이라고남주와 서브남주들에게 칭송받지만, 읽는 동안은 잘 느끼지 못했었다. 예쁘다는 것 한 가지는 알겠더라.
'에이, 알 게 뭐야.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이 먼저지….'
미카엘에게 속셈이 있는 것이라면 이용할 만큼 이용하고로제타를 팽할 거라고보았다.
'어? 아닌데…. 그래도 남자주인공이, 이용할 생각으로결혼하고잠자리까지 할 리는 없잖아? 결혼까지는 어떻게 가능할지 몰라도.'
독자들의 원성이 구름떼처럼 몰려올 설정이었다. 로제타는 머리를 굴렸다.
'설마…. 미카엘, 남주 자리에서 떨려 난 건가?! 제목이 무려 <남주는 내 것!>인데?'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남주란 주인공의 마음을 최종적으로얻는 자였으니…. 그냥 주인공과 맺어지면 남주가되었다.
'하긴. 말단인 로제타도 이런 이상한 짓을 저질렀는데, 주인공인 아이리스가이상하게 변했을 수도 있겠지….'
그렇다는 건…. 미카엘이 진심으로자신과 결혼한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인데.
멍하니 그것에 대해 생각하던 로제타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하하…. 하……, 너무 가능성이 없어서 웃음만 나온다. 슬픈 웃음만 나와."
"슬픈 웃음이라뇨?"
방으로들어오는 미카엘의 말에 로제타는 화들짝 놀랐다. 어제에 이어 아침까지 무리시켜 버렸기에, 미카엘은 로제타가저녁 시간까지 방에서 쉬기를 바랐다. 몇십 분 전에 방으로저녁을 가져오게 하여 같이 먹고, 준비를 위해 잠시 방을 비웠던 참이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로제타가황급히 변명하자 미카엘은 의심스럽다는 듯이 로제타를 보았다. 로제타가긴장하며 미카엘을 마주 보자 미카엘의 눈꼬리가우아하게 휘었다. 성큼 침대로올라오는 그의 옷자락이 가볍게 나부꼈다.
쪽.
입술이 포개져 화들짝 놀라자 미카엘이 뺨을 물들였다. 반사적으로몸을 뒤로빼려는 로제타의 허리를 잡고입술을 밀어붙였다.
"제 애를 태우려고이러시는 거겠지요?"
보드라운 입술을 제 뜨거운 입술로뒤덮으며 그 틈새를 혀로간질였다. 야릇한 자극에 로제타가입술을 벌리며 한숨을 쉬자, 그 틈을 타 혀를 밀어 넣었다.
"으음…."
"이리도 달콤한 입술을 자꾸만 내어주지 않으려 하시니…. 벌을 드려야겠습니다."
속삭이며 미카엘이 탐욕스레 로제타의 타액을 마셨다. 끈끈하게 뒤엉켜 오는 입술에 로제타는 꼼짝도 하지 못한 채로헐떡였다. 마법사이면서, 기사 못지않게 강인한 팔이 단단히 끌어안고있어 옴짝달싹 못 하겠다.
"음, 응…. 그런 적…. 하읏…. 말하는데, 응…. 혀 넣으면……. 후읏!"
쪼옥거리며 입술을 빨고달아나려는 혀를 옭아매었다. 점점 밀어붙여진 입술에 로제타는 발갛게 눈가를 물들인 채로몸을 비틀었다. 뜨거운 숨결마저 빼앗겨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으으음, 후읍……. 응…!"
한참 만에 입술을 뗀 미카엘이 홀린 듯한 시선으로로제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눈물을 그렁거리고있는 갈색 눈동자가사랑스러워 보였다.
'이쯤 해야 하는데….'
이러다가는 진짜로오늘 내에 출발하지 못할 것 같았다. 미카엘은 아쉬움이 가득 담긴 얼굴로가볍게 입 맞추고는 고개를 들었다.
"준비가다 되어서 데리러온 겁니다. 로제타가너무 사랑스러워서 잊어버릴 뻔했어요."
뺨을 물들이며 네 탓이라는 듯이 눈을 흘기는 미카엘에 로제타는 할 말을 잃었다. 숨 막힐 정도로키스해댄 게 누군데! 로제타가입을 삐죽거리자 미카엘의 얼굴이 더 뜨거워졌다.
"그러니까…. 그러지 말라는 건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흠칫 쳐다보기가무섭게 다시 입술이 포개졌다.
로제타가 미카엘의 팔에안겨 침실에서 나왔을 즈음에는 해가 완전히 기울어져 있었다. 로제타의 얼굴은 새빨갰지만, 별장의 사용인들이 상상하는 것과 같은 야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저 미카엘에게 길고 긴 키스를 받았을 뿐이니까.
"그런데…."
왜 저택 밖으로 나가지 않고 옥상으로 올라가는 거지?
어젯밤에이어 오늘 아침까지도미카엘에의해 무리했으므로, 로제타는 정상적으로는 걷기 힘든 상태였다. 그래서 공주님 안기로 미카엘의 팔에들려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황자님. 어디로 가는 거예요?"
"옥상으로 가는 겁니다. 그리고…. 부부가 되었으니, 황자라는 명칭보다는 이름을 불러 주었으면 좋겠군요."
"그, 그건 좀…. 사람들 눈치도보이고…."
그들은 어느덧 계단 꼭대기에나 있는 복도에도달한 참이었다. 서너 걸음 앞장서고 있던 시종이 이미 활짝 문을 열었다.
"누구의 눈치를 본단 말입니까? 로제타, 당신은 제 부인입니다. 폐하께서도당신에게 함부로 하지는 못하실 겁니다."
시원한 밤바람이 그들에게로 밀려들었다. 별장의 꼭대기에는 완만하게 넓은 지붕이 아니라 평평한 옥상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로제타는 그 옥상에내려앉아 있는 거대한 '탈것'을 발견하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로제타의 눈앞에서 길게 하품을 하고 있는 집채만 한 존재는 분명 드래곤이라고 불리는 생명체와 흡사했다. 다만 그 크기가 훨씬 작고 날렵해 보였다.
"저와 계약이 되어 있는 소환수 중의 하나입니다. 용과 흡사해 보이지만 용보다는 정령에가까운 존재지요."
'정령?'
문득 손바닥만 한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던 정령이 떠올랐다.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계약만 하고 도망쳐 버렸지만.
물빛의 비늘을 지니고 있는 소환수는 어둠 속에서도푸르게 빛나는 것이 아름다워 보였다. 미간에는 장밋빛의 결정이 박혀 있기도했다.
"…인간과 비슷한 형태의 정령도있을까요?"
"문헌으로는 본 적 있습니다. 대부분 신과 같은 힘을 지녔다고도하지요. 고대의 마법사들은 그와 계약을 하거나 복종시켜서 큰 힘을 휘둘렀다고 합니다만…. 부인께서 정령에흥미가 있으신줄은 몰랐군요."
"그냥, 용과 비슷한 정령이라고 하니까 궁금했어요."
다른 세계에살고 있는 자신의 육체를 빼앗을 정도의 마법을 구사했으니, 강력한 힘을 가진 정령인 것만은 분명했을 것이다.
"정령의 이름이 중요한가요?"
"물론입니다. 진짜 이름을 알면 복종시킬 수 있으니까요. 진짜 이름은 계약된 이 말고는 아무도알아서는 안 됩니다."
미카엘의 설명을 들은 로제타는 기분이 묘해졌다. 미카엘의 말대로라면 그 정령은 로제타와 진짜로 계약을 한 모양인데, 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걸까 싶었다.
'정말 힘을 모으고 있나?'
소원 다섯 개.
정령이 그녀에게 한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로제타의 인생을 바꿀 수도있는 큰 것이었다.
아마도정령은 이전에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진짜 로제타를 돕기 위해 소원 하나를 들어준다고 약속했을 것이다. 그 소원 하나가 이런 식으로 마구 불어나게 될 줄은 몰랐겠지.
로제타가 생각에잠겨 있는 사이 미카엘은 로제타를 안은 채로 소환수에게 향했다. 소환수는 납작하게 몸을 엎드려 미카엘이 오르기 쉽게 해 주었다.
갑작스레 난생처음 보는 소환수의 등에오르게 된 로제타는 불안해졌다. 소환수가 워낙 커서 그들을 충분히 태우고 날 수 있을 것 같지만, 미끄러질까 두려웠다.
로제타에이어 그녀의 뒤에오른 미카엘이 로제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눈 깜박할 사이에우리의 신혼여행지에도착해 있을 테니까요. 부인께서는 오늘 밤 제게 안길 것을 신경 쓰시는 편이 나을 겁니다."
미카엘의 뒷말에로제타가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자 씨익 웃으며 소환수의 옆면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그러자 소환수가 고개를 들며 몸을 일으켰다.
"출발할 것이다. 다들 물러서라!"
미카엘의 명령에하인과 시종들이 흩어졌다. 짐은 벌써 신혼여행지로 보내 둔 모양이었다. 거의 몸만 가는 모양새에당황할 찰나 소환수가 크게 날갯짓을 하며 밤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거대한 피막 날개가 바람을 일으키는 모양이 신기했다.
'와아!'
소환수는 그들이 타고 있는 것에도아랑곳없이 쑥쑥 치솟았다. 구름이 손에잡힐 듯 가까워지는 듯싶더니순식간에구름을 뚫고 그 위로 솟구쳤다.
"헉!"
놀라는 로제타에미카엘이 부드럽게 속삭였다.
"낮게 날면 경비병들이 발견하고 소란을 일으키는 경우도있기에, 그러는 것뿐입니다."
사실 이 정도높이까지 올라오면 숨을 쉬기가 어렵지만, 미카엘이 로제타 모르게 마법을 걸어 숨쉬기가 편하게 대기를 조정하고 있었다.
소환수는 느긋하게 날갯짓을 하며 대륙의 남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불과 몇십 분 사이에몇 개의 영지를 지나간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로제타는 구름 사이로 보이는 작고 여린 불빛들에집중했다.
중세가 배경인 판타지 소설의 세계로 들어왔으니, 다시는 이런 광경을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무섭지는 않습니까?"
"조금 무섭기는 한데…."
남주인 미카엘은 제국뿐만이 아니라 대륙 최고의 마법사였다. 설사 지금 로제타가 여기서 떨어진다고 한들 미카엘이라면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미카엘 님이 곁에계시니까요."
"……."
딱히 점수 따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사실이 그랬다. 그러나 미카엘에게는 그렇게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크흠. 부인은 정말 심술궂으시군요. 하필이면 아무 짓도할 수 없는 이런 때 그런 귀여운 말씀을 하시다니…."
귓가로 입술을 가까이 가져가 속삭이는 말에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허리에둘러져 있는 미카엘의 팔이 한층 강하게 로제타를 그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오늘 밤도잠들고 싶지 않으시다는 뜻이겠지요, 그건?"
"아니, 왜 그렇게 되는데요?! 전 칭찬한 건데…."
"칭찬도, 상도감사히 잘 받겠습니다."
냉큼 대답하는 미카엘에로제타는 무언가 핀트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칭찬은 했지만 상을 주겠다는 말은 한 적 없는 것 같은데….
"상이라뇨?"
"그러게요. 무슨 상일까요, 로제타?"
당황하여 돌아보는 로제타의 시선에미카엘의 예쁜 눈동자가 들어왔다. 음란한 짓을 당할 것 같은 필연적인 예감에로제타는 새빨갛게 물들었다.
"상은 아무것도안 줄 거예요!"
"주셨다가 뺏는 건 안 됩니다."
"준 적도없는데, 언제 뺏는다고…. 이 타이밍에배 만지지 마세요!"
두 사람이 아웅다웅 싸우는 사이 소환수는 제국의 남쪽에위치한 미카엘 소유의 섬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
"…이런 늦은 시간의 방문이라니! 너무 무례한 것이 아닌가, 제럴드 휘르센?"
딱딱한 패트릭의 목소리에제럴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은 자신이 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했다.
"자네야말로 왜 이 시간에여기서 나오는 것이지?"
제럴드의 말에패트릭은 거만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한밤중에갑자기 들이닥치는 결례를 저지른 자네와는 다르지. 나는 초대를 받았네."
"…나와 다른 두 명의 영애들과 같이 말이야. 안녕, 제럴드."
응접실로 들이닥친 또 한 명의 사내를 발견하고 제럴드는 낯빛을 굳혔다.
"로건."
로건은 문 앞을 막아선 패트릭의 팔을 치우며 응접실로 들어왔다. 시종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제럴드의 표정이 여지없이 구겨졌다.
다른 영애 두 명과 같이 초대를 받았다고는 하나, 그 초대에자신만이 끼지 못한 사실이 분한 것이다.
"…그리 언짢아할 건 없네. 패트릭은 제 여동생을 데려다준다는 핑계로, 나는 사촌 여동생을 에스코트한다는 핑계로 동행한 것뿐이니."
그들과 동행했다는 여동생들은 아이리스와 제법 괜찮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친구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관계는 아니었다. 아이리스의 친구는 모두 남자뿐이니.
추종자들이 많은 탓에사교계에서 어린 영애들과 관계를 쌓지 못한 아이리스를 위해 로건이 제의한 자리였다.
"리온 영애께서는 아직 여인들만의 모임을 가지고 계시지…. 오래간만에웃음을 보이고 계시니그것을 방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네만."
빙글빙글 웃으며 로건은 자신의 집이라도되는 양 제럴드의 맞은편에털썩 주저앉았다. 패트릭은 이 모든 상황이 마음에들지 않는다는 듯 팔짱을 끼고 섰다.
"그렇군. 영애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겠어."
제럴드는 짐짓 태연한 얼굴로 눈앞에놓인 찻잔을 집어 들었다. 로건은 이채를 띠고 그런 제럴드를 바라보았다.
이런 늦은 시간에찾아온 것도, 패트릭이나 자신에게 이런 대우를 받고도돌아가지 않는 것도늘 과묵했던 제럴드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패트릭도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팔짱을 풀고 성큼 다가왔다.
"무슨 일이지? 휘르센 영애가 또 무언가를 꾸미기라도하는 건가?"
"…왜 거기에내 동생의 이름을 올리는지 모르겠군. 어제 그 애가 결혼식을 올렸다는 것을 모르는 건가?"
로제타를 들먹이자 제럴드가 탁 소리가 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패트릭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으며 로건이 앉아 있는 소파 팔걸이에걸터앉았다.
"제럴드 네가 이 시간에급히 아이리스를 찾아올 만한 일은 그것 하나뿐일 테니까. 아닌가?"
휘르센 백작가의 후계자이자 기사인 제럴드는 사교계의 일에는 무지한 것에가까웠다. 교류하고 있는 이들도기사학교 출신의 동문들과 선배들에국한되어 있고, 사교계의 소문에도느리다.
그가 발 빠르게 무슨 소식을 실어다나른다는 것은 상상하기도어려웠다. 제럴드 휘르센은 그런 사내였으니까.
"자네의 질문에내가 굳이 대답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군. 나는 자네들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니라 리온 영애를 만나러 온 거야."
패트릭이 부러 아이리스의 이름을 칭한 것에불쾌감을 느끼며 제럴드는 입을 다물었다. 반면 패트릭과 로건은 제럴드가 로제타의 일로 찾아왔음을 확신했다.
아이리스에게 경고해 주러 왔든가, 로제타가 저지른 잘못에대해 용서를 빌러 왔을 것이다.
최근 아이리스에대한 악의적인 소문이 나돌고는 있으나,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 영지에가 있는 로제타의 소행이라고는 보기 어려웠다.
다만 아이리스와 같이 태풍의 눈이라 할 수 있는 미카엘까지도종적이 묘연해진 것이 이상하게 여겨질 뿐이다.
'설마 미카엘 황자에대한 것을 알려 주러 온 것은 아니겠지?'
로건은 힐끗 제럴드의 완고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분하지만 그들은 그 문제에있어서만큼은 모두 패배자였다. 아이리스 리온은 그들 중 한 사람이 아닌 황제의 동생이자 대마법사인 미카엘 황자를 연모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카엘은 확답을 주지 않은 채로 어느 순간부터 아이리스와 멀어지고 있었기에, 미약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리스가 미카엘에대한 마음을 접지 않을까 하는.
바보 같은 바람이기는 해도가능성 없는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미카엘은 성녀로서인 아이리스에게 약간의 흥미를 나타냈을 뿐이었다.
세간에알려진 것과 같이 두 사람이 연인이었던 적은 한순간도없음을 로건은 알고 있었다. 패트릭은 달리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제럴드 님."
부드럽게 울리는 가냘픈 목소리에 세 남자가 즉각 반응했다.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난 세 남자가 서로 어색한 눈빛을 쏘았다. 이미 열려 있던 응접실로 들어온 아이리스가 로건과 패트릭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여기들 계셨군요. 세 분이 사이가 좋으시니 보기가 좋네요."
미카엘이 이 말을 했다면 빈정거리는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리스였기에 어떠한 감정도 담기지 않은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리온 영애. 늦은 시간에,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셨겠지요. 앉으세요."
아이리스는 제럴드가 이미 차를 마셨음을 확인했다. 자신을 포함한 나머지 두 사람분의 차를 부탁하고 자리에 앉았다.
제럴드는 다소 초조한 기색으로 아이리스를 보았다.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이 두 사람이 여기에 있을 줄은 몰랐다. 어찌 보면 집안의 치부를 말해야 하는 것인데, 패트릭과 로건의 존재가 제럴드를 불편하게 했다.
"영애. 이자들이 반드시 여기에 있어야 하겠습니까?"
"왜? 우리가 있으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 자네가 리온 영애와할 만한 비밀 이야기는 없는 것으로 아는데?"
패트릭의 싸늘한 응수에 제럴드는 그를 노려보았다. 아이리스는 당황하며 패트릭을, 다시 제럴드를 보았다.
"패트릭 님, 그러지 마세요! 제럴드 님도 화 푸세요. 패트릭 님에게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러시는 것은 아닐 거예요…."
"그래, 제럴드. 패트릭은 평소와같이 두 번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야. 저치는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그대로 내보내지 않으면 큰일 나는 줄 알거든."
로건이 찻잔을 들며 빈정거리자 패트릭이 사나운 눈길을 보냈다.
"자네처럼 두 번, 세 번 머릿속으로 궁리하여 꼬아 내보내는 자보다는 낫겠지!"
"자네를 상대로는 두 번, 세 번 꼬아 말할 필요도 없지. 다만 입 밖으로 내보내기 전에 우리가 무엇을 위해 여기에 와있는지 정도는 생각하라는 거야."
패트릭의 무례에 제럴드가 화를 내고 가 버린다면, 그가 이 밤에 급히 달려온 이유조차 듣지 못하게 되어 버릴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곤란해지는 것은 그들 둘이 아닌 아이리스가 될 것이다.
로건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제럴드를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자네가 우리를 불편하게 여기는 것은 이해하지만…. 패트릭과 나는 여기, 리온 영애를 위해서 와있는 거네. 우리가 영애의 편이라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겠지. 리온 영애가 자네를 위해 신의를 지켜 준다 해도 결국 알게 될 일이야."
"……."
제럴드는 눈살을 찌푸리며 아이리스를 제외한 두 남자들을 노려보았다.
황제가 백작을 직접 불러 말하였고, 오늘 밤 연회에서 알리겠다 말씀하셨으니 널리 퍼져 나갈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아이리스가 아닌, 저 둘 앞에서 말하는 것은 로제타를 배신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제럴드 님, 말씀하시기 어려운 일인가요?"
아이리스가 걱정스럽게 제럴드를 보았다. 그녀의 다정한 시선에 제럴드는 한순간이나마 망설였던 것을 후회했다.
이 일로 상처받을 사람은 아이리스인 것이다. 로제타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아닙니다…. 리온 영애, 마음 단단히 먹으시길 바랍니다."
제럴드의 이 말에 패트릭이 눈살을 찌푸리며 귀를 기울였다. 로건 또한 표정을 굳히며 제럴드를 쳐다보았다. 아이리스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시길래…."
"어제, 제여동생인 로제타가 결혼을 했다는 사실은 아실 겁니다. 그 일로 오늘 아버님께서 폐하께 불려 나가셨습니다…."
그는 결코 말이 많은 자는 아니었다. 필요한 말을 하고, 묻는 말에 대답하는 일은 있으나 농담 한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했다. 제럴드는 이 순간만큼은 로건처럼 그럴듯하게 돌려 말하는 능력이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돌아오신 아버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붕대로 얼굴을 감고 있던 그자가 미카엘 황자님이라 하시더군요. 쇠로 긁는 듯한 목소리 또한 마법으로 만든 것이라며…."
제럴드가 조심스럽게 사실을 고하자 응접실 내가 침묵에 싸였다. 그들은 제럴드가 무언가 로제타와관련된 것을 알려 주러 온 것임을 눈치챘지만, 그런 내용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가장 놀란 것은 미카엘에게 연심을 품고 있었던 아이리스였다.
맑은 피부가 그야말로 백지장처럼 하얗게 물들어 보기에도 딱할 지경이었다.
"그런…. 그럴, 리가……."
"폐하께서 오늘 밤에 황궁에서 열리는 연회에서도 말씀하신다 하셨습니다. 내일쯤은 수도 전역에 알려지겠지요. 다른 영애들에 의해 이 말을 전해 듣는 것보다는, 차라리 지금 듣는 것이 나을 듯싶어서…."
아이리스의 추종자 중에 패트릭이 있다는 이유로 그녀를 적대하는 영애들은 많았다. 대놓고 드러내지는 못했으나, 아이리스가 미카엘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이 암암리에 퍼졌으니, 고소하다는 듯이 그 사실을 알리려 들었을 것이다.
"그럴 리 없어요!"
비명과도 같은 말을 외친 아이리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현기증을 느낀 듯 뒤로 비틀거리는 모습에, 곁에 앉았던 로건과 패트릭이 동시에 손을 뻗었다. 아이리스는 두 사람의 손을 뿌리치고는 제럴드를 노려보았다.
"백작께서 잘못 아셨을 겁니다! 아니면 폐하가 무언가 오해하셨을 수도…. 아아아……!"
삽시간에 눈물이 차오른 투명한 눈동자가 슬픔에 젖어 들고 있었다. 제럴드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아이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도 다른 두 남자처럼 자리에서 일어난 채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황제폐하께서 오늘 제아버님을 불러 말씀해 주신 것 또한 황자님께서 부탁하신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대체 황자님께서 왜 그런 결혼을 하셨단 건가! 신분을 속이고…. 휘르센 영애 따위와!"
"패트릭."
로건이 짜증스레 미간을 구기며 패트릭에게 주의를 주었다. 세간에 로제타의 평판이 나쁜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 오라비인 제럴드 앞에서 지나친 언사였다. 그러나 제럴드가 그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기도 전에 아이리스가 다가왔다.
"무언가 잘못된 거겠지요? 휘르센 영애는 미카엘 황자 전하께 관심이 없었잖아요! 그분은 다른 분께 마음이 있으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째서…."
"저도 왜 그와같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아이리스는 흘러넘치는 눈물을 감추지 못한 채 흐느꼈다. 그와의 사이에 장벽을 느꼈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결국은 넘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거지?'
패트릭도, 로건도, 제럴드도 마음에 들었지만 미카엘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가 자신에게 소홀한 것을 이해할 수 없어 질투심을 자극해 보려 한 것뿐인데! 물론 사심이 들어 있었던 것은 인정하지만. 그사이 미카엘과 영영 멀어져 버리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로제타라니. 이해할 수 없어. 왜 로제타지?'
로제타라면 이자벨에게 동조하여 악행을 하다가 이자벨의 죄까지 뒤집어쓰고 사형을 당하는 악녀들 중의 하나였다.
아이리스도 로제타의 행동이 소설과 다르다는 것은 알았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어차피 조무래기 악당에 불과한 존재였다. 그녀가 악행을 저지르든 말든 전체 줄거리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여자가 남주인 미카엘과 결혼을 해 버린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줄거리 전개였다.
'원작 파괴는 나만 할 수 있는 거였는데!!'
패트릭과는 포옹과 키스까지 가 봤지만, 가장 독보적인 미모를 가지고 있는 미카엘과는 손 한 번 잡아 보지 못한 아이리스는 원통했다. 최소한 키스는 해 봤어야 했다! 작가 설정에 밤일도 미카엘이 제일 잘한다고 쓰여 있지 않았던가!
그것과 별개로 아이리스는 미카엘을 좋아하는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그를 만나 첫인사를 나누는 순간 거짓말처럼 그에게 빠져들어 갔다.
'설마…. 원래 이 몸에 있어야 할 성녀의 영혼이 로제타의 몸으로 가기라도 한 건가? 그래서 미카엘도 로제타에게 끌리는 거야?'
로제타, 윤승아가 읽은 <남주는 내 것!>은 빙의물이었지만, 지금 아이리스의 몸에 빙의된 원작 여주가 읽은 소설은 전혀 다른 제목을 가지고 있었다.
<성녀는 밤에 피어난다>.
미카엘이 성녀에게 집착한다는 설정은 같지만, 줄거리는 전혀 달랐다.
그 소설 속에서는 성녀가 결국 자신에게 집착하는 미카엘을 죽이고 패트릭과 결혼했다. 그것도 그냥 한 게 아니라, 미카엘을 죽이는 데 도움을 준 로건과의 계약대로 그와는 애인 관계로, 셋이서 어울리는 것을 합의하는 걸로 끝이 난다.
그 사실이 떠오르자 아이리스는 새하얗게 질렸다. 로제타의 몸속에 있는 것이 성녀의 영혼이고, 그래서 미카엘이 집착하는 거라면….
'미카엘 황자가 위험해!'
이미 결혼까지 갔으니 미카엘은 성녀에게 집착하기 시작할 테고…. 성녀는 결국 다른 남자를 끌어들여 미카엘을 죽이고 말 터였다. 그녀는 그런 캐릭터니까.
하지만 이미 결혼까지 가 버린 미카엘을 누가 말린단 말인가! 미카엘의 집착은 죽어서야 끝이 나는 것이었다.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할지….'
창백해진 얼굴로 입술을 깨무는 아이리스를 보고 로건이 먼저 다가왔다.
"영애. 안색이 너무 안 좋습니다. 올라가 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이리스는 그제야 정신이 든 듯 로건과 패트릭, 제럴드를 보았다. 아이리스는 흐릿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제럴드가 가져온 소식이 너무 황망한 것이라 그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릴 뻔했다.
"그럴 수는…. 아직 다른 방에 영애분들도 계시는데…."
"그 애들은 우리와같이 돌아갈 거야. 아이리스…."
힐끗 로건을 째려본 패트릭이 말을 이었다.
"…로건의 말대로 해. 지금 안색이 너무 나빠."
"사람을 불러오겠습니다."
먼저 응접실을 나선 제럴드가 아이리스의 시녀를 불러왔다. 시녀는 아이리스의 창백한 낯을 보고 깜짝 놀라 위층으로 데려갔다.
대신에 손님을 배웅한 것은 남작가의 집사였다. 그들은 집사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각자의 마차로 향했다.
"패트릭, 너희 마차로 레샤를 집까지 바래다줄 수 있을까? 너는 내 마차를 타고."
"무슨 헛소리를…."
로건의 제의에 눈살부터 찌푸리려던 패트릭이 문득 로건을 보았다. 로건은 제럴드에게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제럴드, 자네도 함께해 줬으면 좋겠는데. 자네 말은 마차 뒤쪽에 따라오게 하면 되니까 말이야."
요컨대 마차 안에서 회동을 가지자는 말이었다. 패트릭은 로건의 말을 무시하고 싶었으나 울고 있던 아이리스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제럴드 또한 비슷한 심정이었다.
미카엘의 결혼은 그들에게는 좋은 소식이었으나, 미카엘이 다름 아닌 로제타와결혼했다고 하니 그냥 넘기기 어려웠다. 혹여 미카엘이 무슨 함정에라도 빠진 것이라면…, 미카엘을 좋아하는 아이리스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그래. 얘기해야 할 것이 있겠지."
제럴드는 로건의 말에 따르겠다고 했다. 패트릭 또한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마부와호위 기사들에게 두 아가씨를 바래다줄 것을 명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