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 황자에게 사로잡혔다-1화 (1/21)

제1장. 사기 결혼

얼굴을 붕대로가리기는했어도 몇 번의 만남이 있었다. 전장에서의 부상으로목도 다쳤으므로목소리조차 듣기 거슬리는쉰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괜찮았다.

그는무해해 보였고, 결혼하고 나면 느긋하고 평화로운 가정을 꾸릴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래. 나한테 필요한 건 안정이었어.'

지긋지긋한 집착남들에게 둘러싸여 있는여주인공과 얽히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던가. 정말 변했다고, 이제는여주는물론 서브남1에게도 아무 감정이 없다고, 어필하고 또 어필하는나날이었다.

그래도 신전으로들어가신녀가되기는싫어서 다른 길을 택했다.

그녀도 빙의물의 주인공들처럼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한번 열어 보려고는했었다. 그러나 지니고 있던 보석을 팔아 시작한 사업은 망했고, 마법 공부도 뜻대로되지 않았다. 아, 이래서 악녀2가삐뚤어졌구나 싶은 능력치였다.

'주인공 버프는여주인공에게만 해당되는일이었지.'

정말, 능력이라고는하나도 없었다.

악녀2에 빙의되기 전에는그나마 아르바이트라도 할 수 있었지, 지금은 그것마저 안 되었다. 신분을 드러내 놓고 일자리를 구하면 집안에서 막고, 신분을 숨기고 일자리를 구하면, 이 어중된 얼굴도 미인이라고 시정잡배가붙었다.

이리 굴러도 막장, 저리 굴러도 막장이기에 그녀, 로제타는차선을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세계의 여성에게는흔한 전개였다.

결혼. 그것도 중매결혼.

'그나마 내가백작과 백작부인의 친자식이어서 다행이었지.'

적당히 무난한 성격을 가진 좋은 결혼 상대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덕분이었다.

로제타는악녀2이자 서브남3의 여동생이었다. 공식적으로는사촌오빠지만, 전 백작이었던 큰아버지가돌아가시면서 로제타의 부모님에게 입양된 것으로되어 있었다. 실제로는큰아버지가데려다 키운 평민으로서브남3과 로제타는같은 피라고는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그래도 서브남3은 로제타를 아껴서 보호하려고도 하고 말리려고도 하지만, 로제타가듣지 않는다는게 원작의 줄거리였다.

지금의 로제타는달랐다.

'어영부영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악녀1한테 휘말리지 않을 테다!'

벌써 두 번이나 악녀에게 휘말려 여주를 괴롭혔다는누명을 뒤집어쓸 뻔했다. 가까스로그 누명에서 벗어나기는했다만, 이 소설은 피폐물이었다. 이런 식으로질질 끌다가미친 남주와 서브남1, 2 중 누군가에게 목이 잘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스스로의 힘으로는도저히 백작가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마지막 수단은 이것뿐이다.

'이 남자라면 괜찮을 거야.'

국경에서도 수도에서도 가깝지 않은 적당한 변방의 시골 영주. 그럭저럭 풍요롭고 살 만한 땅의 귀족이었다. 작위도 어울리게 백작이었다.

얼굴에 붕대를 두르고 있다는점이 마음에 좀 걸리지만….

'이제 슬슬 악녀1의 본격적인 음모가시작된다고. 그 미친×은 반드시 날 이용하려고 들 거야. 그러니 그 전에….'

수도를 빠져나가야 했다. 로제타가짝사랑하는것으로알려져 있는서브남1을 완전히 포기했다는증거를 가지고 있으면 더더욱 좋은 상황이었다.

지금의 남편에게는미안하지만, 살다가이 남자는아니다 싶으면 이혼할 작정이었다. 원작의 음모가좀 가라앉은 후에.

물론 살아 보고 나서 괜찮다 싶으면 그대로살 생각도 있었다.

'그래도 이 소설의 세계관이 이혼에 대해서는부정적이지 않아서 다행이지.'

로제타의 의붓오빠는백작 가문과 로제타에게 부채 의식이 있었다. 이혼하고 돌아온 로제타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선택지를 하나하나 지워 나간 끝에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결혼식장에서까지 이런 모습이어서 미안합니다, 로제타."

눈만 간신히 내놓은 붕대 차림의 모습으로필립이 말했다. 로제타는다정한 눈으로필립을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결혼식 날짜를 앞당기자고 조른 건 내 쪽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죠."

필립의 붕대 속 얼굴에 대해서는초상화로확인했다. 필립은 초상화 속의 얼굴은 자신과 전혀 닮은 점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그리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얼굴의 상처는신전의 고위 신관이 치료해 주고 있다고 전해 들었다. 크게 흉 지는일도 없을 거라 해명했다. 나중에 이혼할지도 모르니 그 점은 중요했다. 혹시나 얼굴의 상처 때문에 이혼당한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니까.

급하게 결혼식을 올린 탓에 신랑 측도 신부측도 하객이 많지 않았다. 특히나 신랑 측의 하객이 눈에 띄게 적어서 로제타의 부친인 엔디미온 백작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이었다.

로제타는하객이 적은 게 마음에 들었다. 모르는사람들로꽉 채워진 예식장이란 보기만 해도 가슴 답답해지기 마련이다.

주례를 맡고 있는신관의 축복이 끝나자 로제타와 필립은 돌아섰다. 꽃잎이 깔린 버진로드를 걷고 있자니 어쩐지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악녀1을 피하느라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싶기도 하고….

필립의 팔을 잡고 슬쩍 가족들을 보자니 백작부인이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그 곁에 선 서브남3이자 백작가의 영식 제럴드는씁쓸한 얼굴이었다. 엔디미온 백작은 간신히 표정을 누그러트리고 있는표정이었다.

로제타는힐끗 제 곁에 있는필립을 쳐다보았다. 결이 좋은 금발에 녹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필립이 로제타를 향해 다정히 웃어 보였다. 그는서브남1과 전혀 닮은 구석이 없는남자였다. 그래서 좋았다.

주변인들로부터 서브남1과 닮아서 선택했다는얘기를 들어서는안 되니까. 오히려 남주인공 미카엘과 머리 색이며 눈 색이 흡사하다는생각이 들지만….

'이 정도는우연이지.'

애초에 남주인공이 여기 있을 리 없잖은가. 서브남1, 2를 견제하며 여주인공의 마음을 사기 위해 안달을 해야 하는데.

원작의 로제타도, 빙의된 후의 그녀도 남주인공과는연이 없었다. 한 번 본 것도 어느 파티장에서 여주인공 곁에 있는것을 먼발치에서 보았을 뿐이다.

흥미도 없었고.

'여주는잘하고 있으려나….'

이 소설은 빙의물이었다. 피폐물 소설에 당찬 여주가빙의해 들어와서 원작을 휘저어 놓는다는내용이었다.

똑같은 빙의자라고는해도 로제타는원작에 정해진 주인공이 아니었다. 그래서 빙의된 여주에게 아는척도 하지 않았다.

그건 그 나름대로악녀1이 이용해 먹으려고 들 것같아서.

'이 소설 쓸데없이 악녀1이 유능해. 악녀2인 나는능력이 죄다 빠지는데…. 그냥 악녀1에게 이용당하다가일착으로살해되는캐릭터였나?'

어찌 되었든 그 몸에 빙의된 그녀로서는억울한 노릇이었다. 왜 악녀1은 악착같이 로제타한테만 그런단 말인가! 이제 슬슬 저와 거리를 두는걸 보면 포기할 때도 됐을 텐데!

아무튼 이제 그런 위협도 끝이 났다. 원작과는멀리멀리 떨어져 필립과 결혼을 했으니.

하객들의 축하를 받으며 로제타는결혼식장 밖으로나왔다. 바깥에는지붕이 없는마차가준비되어 있었다. 결혼식을 마친 신랑 신부가탈 것이라 꽃으로화사하게 꾸며져 있다.

"로제타."

필립이 손을 잡아 주어 로제타는웨딩드레스차림임에도 수월하게 마차에 오를 수 있었다. 필립도 훌쩍 마차 위로올라가로제타 옆에 앉았다. 어깨를 감싸 안는팔이 든든하게 느껴져 로제타는약간 놀랐다. 이제까지의 그는스킨십을 자제하고 있었으니까.

'그, 그렇지. 이제는결혼했으니까….'

로제타는뺨을 물들이며 필립의 시선에 고개를 숙였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이전에 몇 번 만나 대화를 나누었을 때도 이런 순간이 있었다. 비록 얼굴도 제대로볼 수 없고 목소리도 듣기 거북했지만, 이런 순간들 때문에 결혼을 결정했던 걸지도 모른다는생각이 들었다.

"이제 출발하죠, 로제타."

필립이 다정히 말을 건네며 로제타의 손등에 키스했다. 붕대 사이로보이는입술은 완벽한 형태의 것이었다. 무언가생각이 날 듯했으나 로제타는지금의 두근거림에 제 마음을 맡겨 보기로했다.

이미 그와 결혼을 했으니, 더 이상의 고민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주사위는던져졌다. 당분간은 그와의 결혼 생활을 해 볼 작정이었다.

"네."

필립이 마부에게 끄덕여 보이자 마부가마차를 출발시켰다. 하객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떠나는그들을 축복했다.

***

마차는교외에 있는백작의 별장으로가기로되어 있었다. 일단 엔디미온 백작이나 로제타에게 얘기한 것은 그랬다는얘기다.

"저, 필립. 어디로가는거예요? 이쪽은…."

"별장에서 머물기로했잖아요."

여전히 목이 쉰 듣기 거슬리는목소리로필립이 대답했다. 로제타는다소 놀란 얼굴로필립을 보고 있었다.

로제타는이전에 악녀1인 이자벨을 쫓아다녔기에 이 길을 알고 있었다. 이 길을 따라가면 고위 귀족의 별장지가나왔다. 그러니까 공작가나 대공가, 후작가의 별장이 모여 있는지역이었다.

"어…. 이 근처에 별장이 있는거예요?"

이 지역에 별장이라니…. 신흥 부자라도 된단 말인가? 물론 필립과 몇 번의 만남을 가지며 그가부유하다는것쯤은 알고 있었다. 아니라면 백작이 로제타에게 소개시켜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까지 부유하다고는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그런 셈이죠."

붕대에 가려진 얼굴이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또다시 그 미소를 어디선가본 듯한 느낌을 받고 로제타는불안해졌다.

'그런 셈이라니. 설마 결혼을 한다고 친분이 있는공작에게 별장을 빌린 건가?'

그렇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로제타는그렇게까지 하는것은 불편하다는생각을 했다. 신분제가아직 어려운 로제타에게 자신보다 위 계급인 공작이나 후작은 별로마주치고 싶지 않은 이들이었다.

로제타의 예상이 적중했는지 마차는어마어마한 부지를 차지하고 있는어느 공작가의 별장으로향하고 있었다.

이자벨이 아주 자랑스럽게 설명해 준 적이 있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남주인공인 미카엘이 소유한 별장이었다.

'하필이면!'

벌써부터 이자벨의 비웃음 소리가들리는것같아 로제타는아찔해졌다.

"여, 여기? 정말 여기예요?"

"아…. 설마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겁니까? 로제타 양이 더 아담한 곳을 선호한다는것을 알고 있었는데, 제가경솔했군요."

눈꼬리를 축 늘어트리며 사과하는필립에 로제타는당황했다.

"아, 아뇨! 그렇다는게 아니라…. 조금 당황스러워서…. 여, 여기는제2황자님의 별장이잖아요."

제2황자인 미카엘은2년 전, 결혼과 동시에 황궁을 나왔다. 그리고 공작작위를 받았으나…, 신부가결혼식 당일에 살해되었다.

황위는 이미 12살 연상인 제1황자가물려받은상태였다. 미카엘은황제인 형과 사이가돈독했으므로, 미카엘의 목숨을 노린 짓은아니었다.

이후에 미카엘을 남몰래 연모하고 있던 영애의 소행임이 밝혀졌다. 그녀는 진노한 황제의 명에 의해 고문 후에 사형을 당했지만, 그 일로 미카엘의 심성은삐뚤어지고 말았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신부가마물에게 살해되었으니, 그를 첫 번째로 목격한 자의 참담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을 터다.

그것이 사랑 없이 황제의 손에 결정된 결혼이라 해도 그러했다.

부인을 잃고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미카엘에게 황제는 다시 결혼을 권유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주가나타나지.'

미카엘의 변모에 책임감을 가지게 된 황제는 미카엘의 잘못된 행동에도 추궁하지 않고 한발 물러선 태도를 보인다. 그로 인해 여주의 입장은점점 더 고립되고 난처해지고.

황제의 총애를 받는 제2황자가집착한다는 것만으로도 곤란했을 텐데, 서브남1, 2, 3까지 여주에게 집착을 보였으니, 여주의 난처함이 이해가갔다.

이번에 빙의된 애는 좋아하는 것 같았지만.

'응? 그러고 보니….'

여주인공의 태도도 어딘가원작과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괜히 휘말릴까 봐 되도록 여주인공을 멀리했던 로제타로서는 확실히 알 수는 없는 부분이었다.

'알 게 뭐야. 나는 이미 행복을 찾았어.'

이 남자에게 안주해서 살아 볼 작정이었다. 적당히 안온하고 평화로운 삶이야말로 이 세계에 휘말린 로제타가바라던 삶이었다.

로제타가필립을 바라보자 필립이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왜 그러십니까, 로제타?"

"결혼했다는 생각을 하니까 두근거려서요. 우리 진짜 행복하게 살아요."

필립은로제타의 그 말에 당황한 듯 물끄러미 로제타를 바라보았다. 붕대에 감싸여 있지 않은필립의 귀가빨갛게 물드는 것 같았다.

"그래요, 로제타. 저도 노력하겠습니다."

잡고 있던 로제타의 손을 끌어당기며 필립은그녀의 이마에 입 맞췄다. 점잖은사람이어서 이제까지 제대로 된 스킨십 하나 없던 필립이었다. 로제타는 머뭇거리다가, 이제 이 정도는 괜찮겠거니 싶어서 붕대 위의 뺨에 입을 맞췄다.

순간 필립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로제타는 당황하며 필립을 보았다. 그녀는 필립이 단순히 흉터 때문에 붕대로 감고 있다고 알고 있었다.

"아. 설마 아직 아물지 않았어요? 건드리면 안 되는 건가요? 미안해요."

"아니…. 절대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당황한 필립이 허둥지둥 말했다. 그는 붕대 위, 로제타의 입술이 닿았던 곳을 어루만지며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 처음이라 그런 것뿐이니…."

차마 다시 해 달라는 말은하지 못한 채로 필립은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정말 힘들게 여기까지 온 그였다.

두 사람이 가벼운 스킨십에도 허둥대는 사이 마차가공작저의 대문을 통과하여 정원을 가로질렀다.

저택으로 가는 길까지 아치형의 커다란 간이 구조물이 세워져 있었다. 일렬로 늘어선 그것은숫자를 다 세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꽃으로 장식된 그것에서 연분홍빛의 꽃잎이 눈처럼 쏟아졌다.

'와아아….'

로제타는 놀라며 그것을 바라보았다. 별장의 정원이 상당히 넓었으므로 그 터널을 지나는 내내 그들은꽃비를 맞을 수 있었다.

휘둥그레져 바라보는 로제타를 필립은흐뭇하게 쳐다보았다.

"마음에 듭니까, 로제타?"

"예. 너무 예쁘네요. 설마 이것도 필립이 준비한 거예요?"

"네. 로제타가기뻐할 것 같아서…. 아, 그렇지만 비용이 너무 많이 든 것은아니니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는 마법사가있거든요."

설마 그 아는 마법사가이 별장의 주인인 미카엘은아니겠지? 잠시 불안해졌으나 로제타는 그 부분에 대해서 더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막 결혼한 따끈따끈한 신혼이 아닌가! 필립에게 온 신경을 집중해도 부족한 이때에 다른 남자의 생각으로 머릿속을 채우고 싶지는 않았다.

'필립한테…, 필립한테만 집중하자.'

로제타는 머리 위로 떨어지는 꽃잎을 바라보며 즐거워했다. 어쩌면 평생 기억하게 될지도 모르는 이 순간을 즐길 작정이었다.

마차가꽃잎이 쏟아지는 터널을 빠져나와 별장 앞에 섰다. 저택의 문은이미 활짝 열려 있었고, 고용인들이 좌우 두 줄로 도열하여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가선 자리에서 저택의 현관, 홀과 계단을 따라 이어지는 길에 붉은카펫이 깔려 있었다.

카펫 위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붉은꽃잎이 뿌려져 있었다. 시종이 다가와 마차의 문을 열어 주자 필립이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로제타."

마차 앞에 선 필립이 손을 뻗는 것에 로제타는 당연히 손을 잡아 주겠다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필립은로제타의 허리를 잡고 번쩍 들어 올렸다.

"어? 앗! 필립!"

어린아이처럼 훌쩍 들어 올리는가싶더니, 공주님 안기로 이어졌다. 아무리 힘이 세도 보이기 힘든 묘기이기에 로제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방으로 들어가는 길이니 신부의 구두가바닥에 닿아서는 안 되지요."

'많이 무거울 텐데….'

악녀2인 로제타가제법 날씬한 몸을 가지고 있다 해도 드레스 무게가있다. 평범한 남자인 필립이 들기는 버거운 것이다.

'미카엘의 별장을 빌린 시점에서 이미 평범한 남자는 아닌 것 같지만….'

필립은로제타를 안아 든 채로 별장으로 들어갔다. 붕대에 감긴 얼굴이었지만, 눈과 입은드러나 있었으므로 힘든 기색을 보였다면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필립은로제타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뭔가….'

이상했다. 분명 평범한 시골 영주와 맞선을 보고 결혼했는데…, 어째서 남주인공이나 서브남들이 보일 법한 묘기를 보이고 있는 거지?

'아니! 남주인공의 측근이라 가능할지도 몰라. 설마 남주인공이 수족으로 부리는 숨은캐릭터라든가, 기사였던 건 아니겠지?'

그런 것치고 마주 잡았을 때 필립의 손바닥은부드러웠었다. 검을 잡는 사람의 손바닥이 딱딱하다는 것쯤은제럴드를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뭘까 싶어서 로제타는 필립을 바라보았다.

저택의 홀을 가로질러 계단을 올라가고 있던 필립은지척에서 마주치는 시선에 녹아내릴 듯한 시선을 보냈다.

'으아아아!'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한 느낌에 로제타는 홱 고개를 돌렸다. 필립은로제타를 그윽한 시선으로 바라보고는 계단의 끝까지 올라갔다. 융단과 꽃잎 길은복도로 이어지고 있었다.

황자의 별장에 와 본 적 없는 로제타였으나 저택에서 좋은방이 어디쯤에 위치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설마 제일 좋은방을 내준 건 아니겠지?'

그런 거라면 필립은미카엘과 꽤 친밀한 관계라는 얘기가되었다. 그러나 필립은로제타와 만남을 가지며 단 한 번도 미카엘을 언급한 적이 없었다. 평범한 지방 영주라면 자신을 대단한 인물인 양 포장하기 위해서라도 한 번쯤은말할 법도 한데.

'아니. 이건 필립이 소탈한 성품의 남자라는 증거야! 누구누구와 친구라면서 거들먹거리는 남자는 꼴불견이니까….'

침실이 있는 복도로 들어서자, 침실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문을 열었다. 그들은필립과 로제타를 보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필립이 로제타를 안고 침실로 들어가자, 시종들이 문을 닫았다.

'응? 어, 어엉? 잠깐….'

그들이 결혼한 시간은늦은오후였다. 결혼식이 있다고는 해도 빈속으로는 이 묵직한 드레스를 입고 걸을 자신이 없어 점심을 먹기는 했다. 그러나 아주 가벼운 식사였고….

'아직 저녁 먹기도 전인데, 치, 침대로 가는 거야?!'

악녀의 모략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피하듯 한 결혼이라고는 해도 설렘은있었다. 로제타는 새빨갛게 물든 얼굴로 필립을 바라보았다. 필립은로제타를 침대 위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로제타."

당장 로제타를 침대에 눕히고 싶은충동이 일었으나 아직 한낮이었다. 저녁때에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날이 밝다. 붕대를 벗는 것은더 늦은시간이어야 할 터였다.

'아직은안 돼.'

필립은스스로를 억누르며 로제타의 뺨을 보듬었다. 달아오른 살결을 어루만지는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드디어 여기까지….'

설레는 마음에 필립은로제타 곁에 앉았다. 팔을 뻗어 강하게 끌어안자 로제타가당황한 듯 움찔했으나 필립의 가슴에 몸을 기대 왔다. 그것만으로도 필립의 마음속은뜨거운 기쁨으로 울렁거렸다.

더는 참을 수 없게 된 마음에 조급하게 입술을 빼앗자 로제타는 놀란 듯싶었다. 그래도 밀어내지 않고 뺨을 물들이며 눈을 감았다.

"응…. 흡, 음?!"

얌전한 키스를 기대한 로제타였으나 입술 틈새로 파고드는 열기는 격렬했다. 뜨겁게 옭아매며 여린 점막을 탐닉하는 키스에 온몸이 달아올랐다.

'뭐, 뭐지? 이건….'

이미지하고 전혀 다르다. 설마 피폐물 속 캐릭터는 엑스트라라고 해도 절륜한 건가?! 머릿속을 스친 생각이 이어질 틈은없었다. 필립은로제타의 타액을 마시며 이미 품에 안고 있는 그녀를 바싹 끌어당겼다.

몸이 단단히 밀착되며 로제타의 가슴이 필립의 몸에 눌렸다. 맞닿은곳으로 두근두근 울리는 서로의 심장 고동이 들리는 듯했다.

'조금 답답한데.'

진정하라는 의미에서 로제타는 손끝으로 필립의 옆구리를 훑었다. 그 가벼운 손길에도 필립은전율을 느꼈다. 이성이 마비되기 직전이었다.

안 돼!

고개를 든 필립이 로제타의 몸에서 떨어졌다. 몽롱한 꿈에 잠겨 있었던 듯 필립의 키스에 푹 빠져 있던 로제타가숨을 몰아쉬었다. 필립은자신의 타액으로 젖은로제타의 입술을 훔쳐보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미안, 해요. 조금 흥분해 버려서…."

"아…. 괜찮아요."

놀란 건 사실이었지만 바라 왔던 스킨십이었다. 신혼 첫날이기도 했고.

"점심에 제대로 식사하지 못했을 테니 배가고플 것 같은데…. 그 드레스부터 갈아입게 시녀를 들여보내 줄까요? 물론 웨딩드레스는 내가벗기고 싶지만. 아직 부끄러울 것 같아서요."

"네. 시, 시녀 쪽을…."

"알았어요."

필립은웃으며 로제타의 뺨에 입 맞추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필립이 시녀를 부르기 위해 방을 나서자 로제타는 깊은한숨을 쉬었다.

'오늘 밤에 잘할 수 있을까?'

어쩐지 굉장히 떨렸다.

식사 시간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로제타는 단순한 디자인이었으나 화려하게 자수가 놓인 드레스로 갈아입고 필립과 산책을 즐겼다. 필립은황자의 별장 곳곳을 안내하며 구경시켜 주었다. 워낙 넓은곳이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수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저녁 식사는 온실에서 할 겁니다."

"온실에서요?"

별장에는 온실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일 년에 한두 차례 올까 말까 한 별장을 이렇게까지 꾸며 놓는 것은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 때가 가까워졌으므로 필립은로제타를 온실로 데려갔다. 저택에 있는 온실 중에서도 바깥으로 나갈 필요없이 통로가 연결되어있는 온실이었다. 벽에는 등불이 밝혀져 있고, 때 이른 꽃이 만개해 있는 온실은아름다웠다.

온실 내에 있는 연못에도 작은불빛을 올린 꽃송이 모양의 등이 띄워져 있었다.

"로제타."

필립이 의자를 빼 주는 것에 로제타는 자리에 앉았다. 최고급 레스토랑이라 한들 이와 같은분위기를 자아내기는 어려울것 같았다.

곧 시종과 시녀들이 음식을 가져왔다. 식사는 모두 훌륭했다. 로제타는 긴장한 상태이기는 했어도 배가 고팠으므로 꽤 잘 먹었다. 디저트 접시까지 모두 비우고 나니 필립이 다시 산책을 권했다. 로제타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하루 온종일 별장 안을 돌아다녔지만 아직 다 보지 못했다. 온실도 구경하지 못한 부분들 중의 하나였다. 온실 곳곳에는 그들이 식사를 한 장소와 마찬가지로 등불이 띄워져 있었다.

"…너무 근사해요.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어요. 황자 전하가 부럽네요. 저라면 이 별장을 비워 두고 싶지 않을 것 같아요."

"그렇습니까?"

필립은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로 식사 시간 내내 로제타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로제타는 어쩐지 민망한 기분이 들어눈길을 피했다.

"그, 내일은아침을 먹자마자 출발하는 건가요?"

"예. 오늘은이곳에서 신혼 첫날밤을 보내고…. 내일 신혼여행지로 갈 겁니다."

논의하기로는 제국의 남쪽에 위치한 유명한 휴양지로 간다고 했다. 빙의된 이후에 그쪽으로 가 보는 것은처음인지라 로제타는 기대하고 있었다.

"바닷가로 가는데, 수영을 하지 못하는 게 아쉽네요."

"수영을 할 수 있으십니까?"

무심코 말했던 로제타는 아차 싶었다. 이쪽 세계에는 아직 수영복이 없었다. 그러니 거의 모든 영애는 수영을 못한다고 봐야 했다.

"야, 얕은물에 들어가서 물장구치는 것 정도죠. 어릴 때 얘기예요."

"영애에게 수영을 하는 취미가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호숫가에서라면 충분히 수영할 수 있으니까요."

"설마요. 누가 보면 어쩌려고…."

가끔 소설에 그런 여주인공이 나오기는 했다. 물론 이 원작 소설 중에서는 아니었다.

"영애와 같이 수영을 하는 것도 근사할 것 같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제가 영애에게 수영을 가르쳐 드리고 싶군요."

로제타의 손을 잡아 그 손등에 입 맞추며 말했다. 로제타는 빙그레 웃었다.

"필립. 이제 저는 영애가 아니에요. 당신과 결혼해서 백작부인이 되었잖아요."

"아…."

필립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붕대에 가려져 있기는 해도 귀 끝이 붉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렇, 군요. 그렇네요, 부인…."

속삭이듯 불러 주는 목소리에 로제타의 얼굴도 뜨거워졌다. 부끄럽다는 생각에 고개를 숙이고 있자니 필립이 로제타를 끌어당겼다. 품에 안고 조용히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제 침실로 올라갈까요?"

"아! 그, 그 전에 씻어야 하니까 시녀들을…!"

로제타가 고개를 들며 다급히 외쳤다. 필립과 눈이 마주치고 화르륵 뺨을 물들이자 필립이 피식 웃었다.

"기꺼이 그렇게 하지요, 부인."

말하며 필립은로제타에게 키스했다.

***

"마님."

시녀들에게 그렇게 불리는 것은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곳은공작의 별장이 아닌가! 마님이라는 호칭은공작부인이 들어야 할 터였다.

로제타가 그것을 지적해야 하나, 하고 쳐다볼 찰나 더 나이가 있어보이는 시녀가 얼른 '마님'이라 부른 시녀의 팔을 쳤다. 시녀는 사색이 되어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손님을 모시는 것이 처음이어서 실수를…."

"아니야. 괜찮아."

대수롭지 않은듯이 넘어가며 로제타는 시녀들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입고 있던 드레스가 벗겨지고 적당히 따끈한 목욕물에 몸을 담갔다. 여덟 명이나 되는 시녀들이 달라붙어바쁜 손길로 몸을 씻기는 것에 황송해졌다.

'…미카엘은늘 이런 식의 시중을 받는 건가?'

백작 영애인 그녀는 시녀 하나와 하녀 두 명의 시중을 받으며 목욕을 했었다. 이렇게 많은사람들이 달라붙어목욕 시중을 들어주는 것은처음이었다.

'기분 묘하네.'

열심히 닦아 광을 내다시피 한 그들은로제타를 마사지 침대로 옮겼다. 씻기는 것이 끝났으니 바르는 게 남았다는 식이었다. 향유와 크림을 듬뿍 발라 마사지를 받자 피로도 풀리고 피부에서도 반짝반짝 윤기가 흘렀다.

'앗, 녹는다….'

결혼식에 이어첫날밤을 보내야 한다는 긴장감으로 스트레스가 쌓인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 시녀들의 전문적인 손길을 받으니 몸이 노곤노곤해져 버렸다.

졸기 시작하는 로제타를 보고도 시녀들은비웃는 기색 하나 없이 엄숙하기만 했다. 실수했다가는 큰일을 치르기라도 할 것처럼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왜 저러지? 필립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가?'

그녀에게 실수라도 하면 미카엘이 경을 치는 줄 알겠다. 그만큼 필립이 미카엘에게 중요한 인물이라는 뜻도 되어서 로제타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빨리 이자벨의 영향권 밖으로 벗어나야 하는데. 일이 쉽지 않다.

로제타는 깊은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시녀들이 소리도 없이 첫날밤에 걸칠 속옷과 가운을 가지고 돌아왔다. 끈 하나만 당기면 풀릴 베이비돌과 속이 다 비쳐 보이는 아슬아슬한 속옷에 로제타는 기겁했다.

"이, 이건?!"

"황비님께서 선물하신 것입니다."

제 결혼식에 왜 황비님이 선물을 주시나요?

로제타는 멍해졌으나 황족의 선물은쉽게 버리거나 할 것이 아니었다. 거기다 흰 레이스가 달린 그것은야하기도 했지만 예쁘기도 해서 머뭇거려졌다.

'첫날밤은딱 한 번뿐인데…. 입어봐?'

"아, 알겠으니까. 다들 나가 줄래? 나 혼자 입을 수 있어."

새신부의 심정을 이해하는 것인지 시녀들은가만히 고개를 숙인 후에 탈의실을 비웠다. 로제타는 속옷을 집어들고 각오를 다졌다. 지나치게 야릇해서 입는 데도 각오가 필요할 것 같았다.

'이거 뒷부분은그냥 끈인 것 같은데?! 황비님!!!'

우아한 모습으로 부채 뒤에서 웃고 있던 아리따운 황비의 모습을 떠올리며 로제타는 소리 없이 절규했다.

입고 나니 확실히 더 야해 보였다. 첫날밤을 보낼 새신부에게 보내는 선물이라 흰색이었지만 디자인이 지나쳤다.

'일단 입기는 입었는데….'

중요한 부분이 다 트여 있는 건 왜인가요? 베이비돌과 한 세트여서? 베이비돌도 속이 다 비쳐 보이는데요?

'다, 다시 벗을까?'

입은것만으로도 너무 부끄러워졌다. 다른 속옷을 가지고 오게 할까, 망설였으나 저들은공작가의 시녀들. 황비님의 선물을 입어만 보고 첫날밤에 사용하지 않았다는 소식이 황실에까지 전해질 것 같았다.

'첫날밤에까지 황실의 눈치를 봐야 하다니!'

필립은좀 덜 유능해질 수는 없었던 걸까? 왜 아직도 황실과 이자벨의 그림자가 느껴지는 것인지, 로제타는 울고 싶어졌다.

"부인. 다 입으셨습니까? 도와드릴까요?"

한참을 고민하고 있자니 문밖에서 시녀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로제타는 이런 모습을 아무에게도 들킬 수 없다는 생각에 가운을 낚아챘다. 허둥지둥 팔을 꿰며 대답했다.

"아, 아니야! 들어오지 마!"

비단 가운으로 꽁꽁 몸을 싸맨 로제타가 단단히 끈을 묶었다. 아직 필립에게 이 모습을 보인 것도 아니건만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이제 첫날밤을 치러야 할 텐데…. 떨린다.'

가운 위로 손을 올리며 로제타는 깊이 심호흡을 했다.

***

침실에서는 필립이 로제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침대정면, 벽난로 위에 설치된 대형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 보고 있었다. 거울에 비치는 남성은붕대로 얼굴을 꼼꼼히 감싸 귀와 머리카락, 입과 눈만 내놓은상태였다.

'로제타….'

그는 처음부터 로제타에게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은아니었다. 그가 로제타에게 관심을 주게 된 것은아이리스 때문이었다.

아이리스 리온.

리디아가 죽은후에 처음으로 그의 관심을 끈 여자.

리디아가 살해당한 후, 미카엘은제정신이 아니었다. 리디아를 사랑했던 것은아니었으나 형인 황제의 뜻에 따라 그녀에게 마음을 붙여 보려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리디아는 살해당했다.

누구도 방해치 못하리라 생각했던 그들의 첫날밤에.

잠시 잠깐, 황궁에서 왔다는 서찰을 확인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틈이었다. 찢어질 듯한 시녀의 비명을 듣고 올라갔을 때는 이미 늦었다.

머리만 남겨진 채로 몸통을 난도질당한 리디아의 모습은미카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리디아의 표정에는 공포와 고통이 고스란히 배어있었다.

왜! 어째서 그녀를 죽였단 말인가!

사랑해 주지 못했기에 미카엘이 가진 죄책감과 분노는 컸다. 그들은서로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친구 같은부부가 되리라 확신했다. 서서히 서로를 알고 좋아하게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황제는 서둘러 그와 같은일을 저지른 자를 잡아들였지만, 미카엘은그 여자, 마리엘라가 범인이라고 확신하지 못했다.

그와 같은방법을 실행할 수 있을 만큼의 힘도, 수단도 가지고 있지만 우둔한 여자였다. 자신의 머리로는 그 같은방법을 생각해 내지 못했을 거라 여겨졌다.

그러나 그것을 캐내기도 전에 마리엘라는 죽어버렸다. 고문 중에 합병증으로 인해. 대외적으로는 처형당했다고 알려졌으나, 미카엘로서는 분한 일이었다.

'미카엘, 범인은밝혀졌지 않느냐. 더는 그 일에 미련을 두지 말거라….'

황제는 그렇게 말했으나 미카엘은그럴 수 없었다. 리디아의 겁에 질린 얼굴이 자꾸만 그의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왜 나는 그때 자리를 떠났을까? 내가 조금만 더 늦게 자리를 뜨거나, 서찰 따위 무시해 버렸다면 리디아는 무사할 수 있었을 텐데.

그것은죄책감이라기보다는 공포에 가까운 것이었다. 마음의 한 조각이나마 허락한 이가 잔인하게 찢겨 죽었으니, 마음이 서서히 공포와 분노에 잠식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진범은 분명 따로 있었다.

마리엘라에게 방법을일러 주고 부추긴 이가…. 교묘하게 뒤에서 조장하는 이를 잡지 않으면 이와 같은 일은 반복될 터였다.

그래서 미카엘은 또다시 자신의 마음을뒤흔들지도 모를 이가나타나자, 주변부터 의심하기 시작했다.

로제타에게 관심을주게 된 것은 그래서였다.

하찮은 백작 영애였지만, 아이리스를 해칠지도 모르는 여자였으니까. 조심해 두어서 나쁠 것은 없다 여겼다.

처음 위화감을느꼈던 것은 파티장에서였다. 같이 파티에 참석한 영애가귀걸이 따위를 잃어버렸는지, 시녀들이 테이블 안으로 들어가찾고 있었다.

그때 로제타는 제 전속 시녀가테이블에 머리를 부딪힐까 신경 쓰였는지, 손을집어넣어 머리 위쪽에 대어 주고 있었다. 멀리서 그녀들의 입술 움직임을읽어 대화를 알아낸 미카엘은 적잖이 놀랐다.

그런 귀족 영애는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녀의 상냥함이 조금 신경 쓰였다.

그리고 며칠 뒤, 아이리스는 로제타가참석한 다과회에서 뜨거운 찻물을뒤집어써 크게 화상을입을뻔했다. 로제타가화병의 꽃을버리고 물을쏟아붓지 않았더라면 심하게 다쳤을것이다.

어차피 마법이나 신관의 성력을통해 치료하면 나을상처이기는 했으나, 그 손속이 잔혹하여 기가막혔다. 펄펄 끓는 찻물을뒤집어씌울 생각을하다니. 악랄했다.

그러나 그 사건의 범인으로 몰린 것은 로제타였다. 제가일을저질러 놓고 범인이 아닌 척하기 위해 응급처치를 했다는 것이다.

로제타는 부인했으나 아무도 그녀의 말을들어 주지 않았다. 고의로 찻물을쏟아 버린 하녀마저 그녀를 지목했으니, 가족마저 믿어 주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다과회를 주최했던 영애는 일이 커질 것을우려하여 문제의 하녀를 쫓아내는 것으로 사건을일단락했다.

명확히 범인이 밝혀지지 않은 채, 로제타만 억울한 채로 일이 끝나 버린 것이다.

막상 일을저지른 하녀는 직장을잃기만 했을뿐이다.

미카엘이 조사해 보니 그 하녀는 큰돈을받아서 다른 도시에서 제 애인과 번듯한 가게를 열어 생활하고 있었다.

이 일로 피해를 입은 이는 오직 아이리스와 로제타일 뿐이다.

미카엘은 로제타가정말 범인일까 의심했다. 마리엘라는 부추김을받았다고는 해도 자신이 저지른 일이 맞았지만, 로제타는 달랐다. 그녀에게는 의심의 여지가있었다.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자 미카엘은 로제타에게 사람을붙이기에 이르렀다. 사람을붙인 것만으로는 믿을수 없어 자신이 직접 지켜보기도 했다.

로제타는 보이는 바대로 평범한 아가씨였다. 모두에게 사랑받을특별한 친절함도 사랑스러움이나 영특함, 아름다움을갖추지는 못했다. 그러나 자신의 곁에 있는 이들, 자신이 마음을준 자들에게는 다정한 이였다.

대부분의 이가그러하듯.

미카엘은 지루함을느끼면서도 로제타를 찬찬히 살피었다. 그녀는 아이리스를 해치기에는 소심해 보였다. 하녀 하나가일하다가크게 손을베이자 기겁하는 모습을보이기도 했다. 하인들 사이에서도 그만하면 착하고 좋은 아가씨라는 평이었다.

그러나…. 미카엘이 이렇게 관심을두고 살피고 있다는 것을'누군가'가알아차린 것 같았다.

아이리스를 해치려는 음모마다 로제타가휘말리기 시작했다. 로제타도 이를 눈치챘는지 기를 쓰고 빠져나오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미카엘은 책임감을느꼈다.

마치 리디아 같았다.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그가조금 관심을보인 것만으로 괴로움을겪는 로제타의 모습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제가먼저 나서서 도와주고 싶었으나, 그래서는 그 누군가를 더 자극하는 꼴만 될 것이다. 아직 누가흑막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또 한 번무도회장에서 원흉으로 몰린 로제타가홀로 서러움을삼키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방금 오라버니인 제럴드에게까지 떠밀려 파티장 바닥에 내던져진 참이었다.

그녀의 부모님까지도 로제타를 감싸 주지 못했다. 로제타 또한 기대하지도 않는다는 듯이 등을돌려 꿋꿋한 얼굴로 무도회장을나갔다.

홀로 정원으로 들어가분수대의 물을바라보며 눈물을뚝뚝 흘리는 로제타를 보고 있자니,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신은 아무 힘이 없었다. 황자이고 제국 최고의 마법사라는 칭호를 얻으면 무엇 하나 싶었다.

로제타.

이름을불러 주고 그녀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이미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짓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것도 포기하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남의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가게 생겼다 여겼는지, 수도를 떠났다.

사교계에서는 모두 로제타가제 음모가밝혀져 도망쳤다고 수군거렸다. 미카엘은 로제타를 보호할 시간이 생겼다 안도하면서도 걱정했다.

이후 흑막이 밝혀져 모든 사실이 드러난다 해도 걱정이었다.

사실이 밝혀져도 그때 잠깐일 뿐. 저들은 몇 년에 걸쳐 로제타를 괴롭혔던 사실이 없었던 것인 양 행동할 것이 분명했다.

로제타는 그 상황에 또 괴로움을맛보게 될 것이다.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이었건만 미카엘은 그 사실이 분하고 억울했다. 그래서 흑막을찾아내 고발이 아닌, 복수할 방법을고민했다.

그는 이미 리디아도 아이리스도 생각지 않고 있었지만, 스스로 그 사실을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오직 로제타 대신 복수할 기회만 노렸다.

한 번에 한 사람씩.

자신에게 마음을품고 있는 영애들을시험해 보았다. 아이리스와 로제타가해를 입었듯, 그녀들 또한 해를 입는지를.

로제타는 고작 자신이 시선을몇 번주었을뿐이라는 이유로 누명을뒤집어썼다. 그런 지독한 질투심을가진 이라면 분명 반응을보이리라 여겼다.

미카엘이 시험한 것은 그만한 권력과 힘을가진 영애들이었다. 사람을부추겨 일을만들고, 또한 처리하라 명령할 수 있는 자들.

증거는 잡지 못했으나 단 한 사람에게로 혐의점이 모아졌다.

'잡았다!'

이자벨 카룰리아스 공녀.

카룰리아스 공작가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천사 같은 성품을지녔다고 일컬어지는, 미카엘의 결혼 상대자로 후보에까지 올랐던 영애이기도 했다.

다만 황제인 그의 형이 무언가찜찜하다 생각하고 후보에서 제외시켰다. 대외적으로는 다른 후보들과 같이 내려온 것으로 되어 있으나, 황비에게 미리 언질을주어 제외시킨 영애였다.

미카엘은 이자벨이 자신을짝사랑하는 것을알고 있었다.

결혼 상대자가발표되기 며칠 전, 아주 조심스럽게 제 마음을표현해 왔기 때문이었다.

공작가공녀라는 신분도 있고, 섬세한 영애라는 착각에 미카엘 또한 부드럽게 돌려서 거절의 뜻을표시했었다.

'감히….'

다만, 그녀가로제타를 모함한 것은 맞으나 마리엘라를 사주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증하기가어려웠다. 그래서 미카엘은 다른 방식의 복수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마법사인 그의 능력을십분 발휘하여 이자벨의 몸에 저주를 내린 것이다. 그것도 로제타가물리적인 고통을받으면 그녀의 몸에는 백배의 고통과 상처가전해지는 저주를.

아직 로제타의 몸과 연결하지 않아 저주가완전하지는 않지만, 이자벨은 곧 알게 될 것이다. 로제타가무사하지 않으면 저도 몸성히 살아갈 수 없음을.

***

이렇게 로제타가무사히 수도로 돌아올 발판을하나하나 만들어 가고 있을즈음, 소식이 전해져 왔다.

백작이 로제타의 결혼 상대를 찾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알아보니 로제타가먼저 결혼하고 싶다고 청해 왔다고 했다.

이때 미카엘은 불같은 분노를 느꼈다. 배신감이 하늘을찌를 정도였다. 자신은 그녀가안전하게 수도로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었건만, 나를 배신하다니!

그리고 뒤늦게 그는 그 분노가이치에 맞지 않음을깨달았다.

로제타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은 뒤늦게 알았다.

당황했으나 이미 마음은 줘 버린 상태였다.

동정심에, 리디아에 대한 연관성으로 시작된 마음이기에 잊으려고도 해 봤다. 그러나 이미 리디아도, 아이리스도 그의 안중에 없었다.

지극히 평범한 영애이니 만나 보면 마음이 시들 거라는 생각에 신분을위장하고 로제타 앞에 나타나기까지 했다.

'피, 필립…, 이라고 부르면 되나요?'

당황한 얼굴로 뺨을물들이며 묻는 말에 미카엘의 심장은 멎어 버렸다. 그때는 이미 마음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신분을위장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죄를 저질러 작위와 영지를 몰수당한 곳을눈여겨봤다가형인 황제에게 달라고 부탁하면 되었다. 미카엘은 이미 공작 작위 외에도 후작 작위와 백작 작위가둘, 자작 작위가다섯이나 있었지만, 황제는 신경 쓰지 않고 주었다.

가신들 중 하나에게 줄 거라 생각한 듯싶었다.

아직 대외적으로 그의 것이 되었다고 발표된 백작 작위가아니니, 로제타의 가문도 눈치채지 못할 터였다.

그들은 순조롭게 만남을이어 갔고…, 결혼으로 이어졌다.

저주를 완성시키려면 로제타의 몸에 주문을걸어야 했으므로, 그것은 첫날밤에 그녀가잠들었을때 행하면 될 것이다.

'내가로제타와 결혼하는 것은 폐하와 황비님만이 알고 계시니…, 당장 로제타는 안전할 것이다.'

미카엘의 설명을들은 황제는 그런 결혼을하는 그를 인정해 주고 축하해 주었다. 그로서는 자신의 동생이 평생 상처를 끌어안고 혼자 살 줄 알았다가결혼하는 것이니 다행이다 싶었다. 황비 또한 비슷한 심정이었다.

'이자벨 영애라면 저도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만한 역량을가진 영애는 흔치 않은 법이니까요. 공작께서 로제타 영애와 결혼식을치르는 동안그녀가눈을돌리지 않도록 제가시선을끌겠습니다.'

이자벨의 시선을끄는 것이란 쉬운 일이었다. 황제로부터 미카엘의 결혼에 대한 암시를 받았다면서 명단을작성하는 일을도와달라고 청하면 되었다.

황제는 로제타가아주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뛰어난 제 동생에 비하여 로제타가여러 면에서 너무 빠진다 여겼다. 그러나 미카엘이 리디아의 그 일이 있었던 이후로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알기에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미카엘이 마음을붙이고 살 수 있는 이라면 누구라 해도 봐줄 마음이었다.

'설사 50살 연상에, 아이가아홉은 딸리고, 여덟 번재혼한 여인이라 해도 받아들일 마음이었으니…. 뭐, 됐다. 로제타 영애는 씩씩하기는 하니 너와 잘 살아 주겠지.'

'상냥하고 속이 깊은 사람입니다. 귀여운 구석도 많고요.'

황제의 박한 평이 불만이었는지 미카엘이 이렇게 덧붙이자 황제는 뜨악한 표정을지었다. 황비는 기쁜 듯했다.

'공작께서 진정으로 마음에 두셨군요. 감사할 일입니다. 로제타 영애께, 두 분의 앞날을축복할 것임을전해 주십시오.'

또다시 그때와 같은 비극은 없어야 할 터였다. 형수님이자 황비이신 아네트의 말에 미카엘은 고개를 숙였다.

'반드시 전하겠습니다. 전부 밝혀진 이후에요.'

'빨리 사실을털어놓으시는 편이 좋을거예요. 영애를 위해 감춘 일이라고는 해도 속인 것은 속인 것이니까요.'

'…로제타가 날 미워하면 어쩌지?'

그러나 그는 거짓말은하지 않았다. 그저 제 신분을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백작 작위를 가진 것도 맞고, 초상화 속의 얼굴과 전혀 다르니 그 점도 거짓말하지 않았다. 필립이라는 이름도, 그의 가운데 이름의 애칭 중의 하나였다.

'그래도 지금 털어놓을 수는 없다. 일단 첫날밤을 보내고…, 내일 아침에 털어놔야 해.'

거기다 오늘 밤 그녀의 몸에 주문을 걸어야 하니, 로제타가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푹 잠들어야 했다. 저주의 연결 주문을 걸어야 하는 몸이니 수면 마법을 걸 수는 없어 로제타를 정신 못 차릴 만큼 지치게 만들어야 했다.

이를테면 열정적인 밤으로 녹아떨어지게 만드는 것 같은.

생각하니 온몸에 열이 올라서 미카엘은마른침을 삼켰다. 로제타를 사랑한다는 자각을 한 이후부터 미카엘은자신이 이상해진 느낌이 들었다.

그녀만 보면 닿고싶어 몸이 안달을 했다. 이런 기분은이전에는 결코 없었던 것이었다.

'처음인데 잘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책을 읽고지식을 습득해 놓기는 했다. 그러나 역시글이나 삽화로만 공부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런 일을 연습할 수도 없고.

거기다 이런 일에 능숙해지고싶은것이 아니라 로제타를 기쁘게 해 주고싶은것이니, 그녀와 밤을 보내며 알아 가는 수밖에 없다고생각했다.

미카엘은몇 시간 전의 키스를 떠올리며 초조해했다. 그때처럼 성급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로제타를 아프게 했다가는 후회하는 것은자신이 될 터였다.

고민하던 미카엘은사람이 다가오는 기척에 바짝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는 로제타가 침실에 붙어 있는 욕실에서 목욕하고마사지를 받는 동안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마법으로 감지하고있었다.

변태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결혼식 첫날밤에 한 번 신부를 잃은적이 있었던 미카엘이었다. 한시라도 그녀의 존재를 확인하지 않으면 불안감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로제타가 문 앞에 서 있는 것이 감지되었다.

그리고지금, 로제타의 시녀가 문을 열 것이다. 미카엘은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로제타를 기다렸다.

***

"필립…."

문이 열리고비단 가운을 걸친 로제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수줍어하는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미카엘은두근두근 가슴이 떨렸다.

"로제타."

성큼 로제타의 앞으로 다가온 미카엘이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로제타는 부끄러운지 고개도 들지 못한 채로 미카엘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로제타에게는 여러 가지로 미안한 게 많았다. 그녀를 속이고있다는 사실도 그러했고, 얼굴도 제대로 보여 주지 않은채로 결혼한 것도 그랬다. 그러니 최소한 첫날밤만은기억에 남을 만한 황홀한 밤이 되기를 바랐다.

'붕대를 풀려면 불을 꺼야 할 텐데.'

키스하고만지고할 텐데, 몸에 잔뜩 붕대를 감은채로 하고싶지는 않았다. 사실 결혼 전에 신분을 밝힐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어차피 보여 준 초상화보다 자신의 원래모습이 더 잘생겼고, 신분도 진짜 신분이 더 나았으니까.

그러나 이자벨과 친분이 있었던 로제타였다.

이자벨과 모든 인연을 끊었다고는 해도 자신의 약혼자가 미카엘이라는 사실을 깨닫고죄책감을 느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자벨에게 사과하려고따로 만나러 가기라도 한다면, 로제타가 위험해졌다.

이제 결혼했으니 다 말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으나…, 아직 두려웠다.

더는 사교계와 연관되고싶어 하지 않았던 로제타였으니, 자신이 누구인지 밝혀도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리스와 같이 미카엘은현재 사교계에서는 태풍의 눈과도 같은존재였으니.

'오늘 밤까지는 숨겨야 한다.'

미카엘은로제타를 안은채로 침대로 올라갔다. 그도 이미 다른 욕실에서 몸을 씻고가운을 입고있는 터였다.

"불을 끌까요, 로제타?"

로제타는 한순간 제 속옷 차림을 필립에게 보여 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로 갈등했다. 그러나 너무 창피해서 보여 주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네. 그, 그래주세요."

당황한 듯한 목소리에 미카엘의 입꼬리가 비죽비죽 올라갔다. 미카엘은무심코 제가 하는 버릇대로 마력을 날려 침실의 불을 꺼 버렸다. 이렇다 할 움직임 없이 불이 꺼지자 로제타는 놀란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뭘 어떻게 불을 끈 거지?'

로제타가 봤을 때는 필립이 등불이 놓인 곳으로 손을 뻗었을 뿐이었다. 제 실수를 눈치챈 미카엘은얼른 거짓말을 지어냈다.

"신기하지요? 마법이 걸린 등불이라 그렇습니다."

"공작가에는 그런 것도 있군요."

속이는 것은괴로웠지만 내일 아침에 전부 털어놓으면 될 것이다. 미카엘은필사적으로 제 양심을 속이며 로제타를 침대에 내려 주었다. 이제 불빛은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은은한 달빛이 전부였다.

로제타는 미카엘의 실루엣 외에는 볼 수 없었지만, 미카엘은마법을 사용했다. 그래서 밤인데도 낮처럼 볼 수 있었다.

비단으로 된 흰 가운을 입고긴장하고있는 로제타의 모습은귀여웠다. 미카엘은숨죽여 심호흡을 하고자신의 가운부터 벗었다. 어둠 속이지만 기척에 로제타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긴장되겠지.'

잡아먹으려는 게 아니라고말해 주고싶지만, 잡아먹을 생각이니 그럴 수가 없었다. 옷을 다 벗어 버린 미카엘은로제타 곁에 앉았다.

"로제타, 가운을 벗기겠습니다…. 겁내지 말아요. 로제타가 아플 것 같은행동은하지 않을 테니."

미카엘의 다정한 목소리에 로제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안심한 듯 표정이 누그러지는 것까지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고마워요."

스러질 듯한 속삭임에 미카엘은눈을 빛냈다.

"나야말로…. 나 같은사람과 결혼해 줘서 고마워요, 로제타."

그저 누명을 써서 수도에서 피신해 왔을 뿐인 로제타와 끔찍한 스토커가 붙어 신부가 살해당한 자신 중에 누가 더 아까우냐고묻는다면…. 로제타였다. 미카엘은자신에게 딸이 있었다면 절대 자신 같은남자에게 딸을 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절대 위험하게 두지 않아. 반드시지킬 겁니다.'

그녀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서는 거리를 두는 편이 낫다는 걸 알지만, 이미 미카엘은그럴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로제타가 다른 남자의 곁에 있을 거라는 상상만으로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흉포한 감정이 고개를 들었다.

조급해지려는 마음을 누르고미카엘은가운의 허리끈을 풀었다. 어찌나 긴장했던지 손끝이 덜덜 떨리고있었다. 가운 자락을 벌리던 그는 가운 틈으로 보이는 광경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허억!'

새하얀 베이비돌은얇고부드러운 소재로 만든 사랑스러운 것이었다. 투명한 소재의 레이스가 달려 있고허벅지 위로 한들한들하게 살랑거렸다. 그런 베이비돌 너머에는 틈새가 벌어져 연분홍빛의 유두가 보이는 브래지어 차림의 가슴이 엿보였다.

'이런 취향이었나?'

당혹스러웠지만 자신을 위해 입었다는 생각이 들자 흥분을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렇잖아도 흥분하여 로제타를 다치게 할까 노심초사하고있었는데!

미카엘이 손끝을 떨며 가운을 벗기자 로제타는 갸웃했다. 분명 그도 자신이 보이지 않을 텐데, 필립의 기색이 묘했다.

'약간, 숨소리가….'

거칠어진 것 같다.

'안 보일 텐데?'

로제타가 제 모습을 살펴보았지만 실루엣이 보이는 정도였다. 가운 속에 잠옷을 입었구나 하는 정도? 그러는 사이 미카엘은로제타의 모습을 샅샅이 살펴보고있었다.

그 자신을 위해 준비된 선물 상자를 받은기분이었다. 가슴의 리본을 당기면 베이비돌이 풀어지는 구조라 더욱 그러했다.

"정말 행복하게 해 줄게요, 로제타."

미카엘의 속삭임에 로제타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녀는 여차하면 그와 이혼하고제국을 떠날 생각이었으니까.

"저, 저도 최선을 다할게요."

조그만 목소리로 로제타가 중얼거렸다. 미카엘은그 목소리에 미소를 지으며 베이비돌에 달린 리본의 끈을 당겼다. 역시…, 끈을 당기자 리본이 풀리며 베이비돌이 양쪽으로 벌어졌다.

노골적인 속옷 차림에 미카엘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귀여운 차림이라고말하면 내가 다 보고있다는 사실이 들통나겠지….'

소드마스터도 아닌 그가 야밤에 그렇게 시력이 좋다는 사실을 납득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 한 번의 거짓말을 해야 했다.

"불을 켜 놨으면 좋았을 텐데…. 모처럼 귀여운 차림을 한 것 같은데, 아쉽네요. 다시불을 켤까요?"

속삭이자 로제타가 당황하는 것이 보였다.

"아, 아니에요! 이대로 좋으니까…."

울상이 된 얼굴로 보아 입은것만으로도 창피한 모양이었다. 귀여운 생각이 들어 더 놀려 주고싶었지만 마음이 급했다.

"하아…."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온 뜨거운 한숨에 로제타의 눈이 커지는 것이 보였다. 레이스로 감싸인 유방을 그러쥐고싶은충동이 일었지만, 로제타가 자신을 변태로 여길까 두려웠다.

'키스부터….'

미카엘은로제타의 몸에서 베이비돌을 벗기며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하반신은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브래지어가 그러했듯 팬티에도 틈새가 있었다.

그녀의 여린 꽃잎이며 갈라진 틈새가 전부 눈에 들어오는 것에 가슴 속으로 뜨거운 전율이 흐르는 것 같았다.

오늘 그녀의 전부가 자신의 것이 된다는 생각에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미카엘은초인적인 인내심을 짜내며 로제타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로제타…, 사랑합니다."

속삭이며 미카엘은로제타의 위로 고개를 숙였다. 부드러운 두 개의 입술이 포개지고열기가 부드럽게 로제타의 입술 사이로 파고들었다. 로제타는 입술을 벌려 미카엘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이번이 겨우 두 번째인 키스는 숨이 멎을 정도로 감미로운 느낌이 들었다. 필립이 자신을 아낀다는 생각이 들어 로제타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녀 또한 백작가의 귀한 딸이기는 했으나, 사교계에 악명을 떨친 이후로 가족들의 냉대가 이어졌던 것이다.

'필립…….'

두근거리는 마음에 로제타가 미카엘을 끌어안자 그의 몸이 덜컹 흔들렸다. 로제타는 제가 무엇을 잘못했나 싶어서 손을 뗐다.

왜? 첫날밤이고남편인데, 끌어안으면 안 되는 거야?

미카엘은탐욕스러운 시선으로 당황한 로제타의 얼굴을 들여다보고있었다. 그저 그녀의 팔이 둘러졌을 뿐인데도 이렇게 심장이 뛸 줄 몰랐다. 심장이 제 것이 아닌 기분이었다.

"떨려서…. 로제타, 당신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지금이 너무 어렵군요."

꺼림칙하게 울리던 목소리로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것인데도 가슴이 뛰었다. 미카엘은깊은한숨을 쉬며 다급한 손길로 제 붕대를 풀었다.

"여인과 관계하는 것은처음입니다. 노력할 테지만…, 나를 너무 설레게 하면 당신이 곤란해질 수 있습니다."

지금 미카엘의 목에는 목소리를 변조하는 마법이 걸려 있었다. 그의 목소리를 로제타가 들은 적이 있으니 그를 알아볼까 두려워서였다.

'목소리 정도라면….'

이 목소리 변조 마법의 좋은 점은 서서히 목소리를 되돌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미카엘은 객관적으로 봐도 자신의 목소리가 꽤 좋은 편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니 로제타도 내 목소리를 좋아해 주지 않을까?

미카엘은 그런 기대를 하며 제 목에 걸린 마법을 풀었다. 일종의 상처와도 같은 마법이 서서히 풀려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로제타……. 이제 당신을 만질 겁니다. 괜찮은 거겠지요?"

"네, 넷!"

잔뜩 긴장한것이 보여서 미카엘의 숨결이 뜨거워졌다. 그는 달아오르기 시작한로제타의 뺨에 입술을 누르며 그녀의 목덜미로 훑어내려왔다.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숨결이 로제타의 민감한피부를 어지럽혔다.

"뺨을 깨물면 안 되겠지요? 귀여워 보이는데."

한숨을 쉬는 듯한목소리로 속삭이는 말에 묘한음색이 섞여 있었다. 미카엘의 목소리가 변했지만, 로제타는 정확히 뭐가 바뀐 것인지 눈치채지 못했다. 그의 크고 우아한손가락이 로제타의 어깨를 쓸어만지며 가슴으로 내려왔다.

유방을 가볍게 쥐었다가 제 손바닥에 닿는 작은 돌기를 손끝으로 더듬는 것에 미카엘의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속옷 장식이 말랑거리는 것도 있군요."

놀리는 듯한어조를 감추며 속살거리자 로제타가 울상을 지었다. 그녀는 불을 꺼서 미카엘이 보이지 않을 거라 여기고 있었다. 그러니 내 말이 진심이라 생각하겠지.

"귀여운 감촉이네요. 어라? 왜 단단해지지?"

속삭이며 미카엘이 브래지어의 틈새로 손가락을 스윽 밀어넣어부드러운 살갗을 맛보듯 쓸어올렸다. 부끄러움을 참고 있었던 로제타가 원망하듯 미카엘을 흘겨보았다.

"아, 알고 있으셨죠?"

"이런 귀여운 속옷을 입었다는 걸요? 아니면 내 사랑스러운 신부의 취향이 이렇게 야하다는 것?"

"이, 이건 황비님께서 선물해 주셔서!"

허둥지둥 변명하는 로제타의 목소리에 미카엘은 속으로 혀를 찼다. 로제타의 취향이 아닐까 기대했건만, 역시 형수님의 장난이었던 모양이다.

"흐음…. 부인의 취향이어도 좋았을 텐데."

속삭이며 미카엘은 앞에 나 있는 브래지어의 끈을 풀었다. 보기는 매우 좋았으나 오늘은 로제타의 맨살을 음미하고 싶었다. 입는 것보다는 벗는 게 나은 속옷이었을 텐데도 로제타가 헛숨을 들이쉬는 것이 보였다.

"너무 귀엽게 굴면 곤란하다고 했을 텐데…."

깊은 한숨을 쉬며 미카엘은 로제타의 가슴께로 숨을 불어넣었다. 힉, 하고 몸을 비트는 로제타의 앙가슴으로 손을 옮긴 미카엘이 서서히 손끝을 미끄러트렸다. 배꼽 주변에서 서서히 원을 그린 손가락이 다리 사이로 파고드는 것에 온몸이 떨렸다.

'흣….'

속옷의 자수를 어루만지는 듯했던 손가락이 속옷의 틈새를 발견한듯 그 주변으로 파고들었다. 로제타는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모르며 숨을 삼켰다.

"로제타, 다리를 더 벌려 봐요. 어차피 어둠 속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텐데, 뭘 그리 부끄러워하는 겁니까?"

속살거리며 미카엘이 속옷의 틈새를 벌렸다. 그 안의 여린 꽃망울이 미카엘의 눈앞에 비춰지고 있다는 것을 그만이 알고 있었다. 로제타는 미카엘의 그 말을 믿으면서도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고개를 돌렸다.

밤이라 다행이었다. 필립의 음성이 이렇게 야하게 들릴 수 있는 줄은 오늘에야 알았다.

'뭔가 목소리가 변한것 같기도 하지만…. 그도 흥분해서 그럴 테지.'

미카엘의 손가락이 느릿하게 로제타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길고 우아한손가락이었으나 로제타의 것보다는 큰 손이었다. 당연히 손가락도 더 굵었다.

"으흐…."

"이 정도로도 조이는군요. 아프게 하고 싶지 않은데."

초조한듯 속삭인미카엘의 손가락이 점막을 문질렀다. 이곳저곳 찔러 보기도 하고 섬세하게 돌아다니며 안을 풀어내는 듯한손길에 로제타는 당황했다. 처음에는 그저 이상하게만느껴졌던 손길이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이쪽인가……?'

어둠 속임에도 전부 보이는 미카엘은 로제타의 표정을 살피며 점점 더 대범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두 마디 정도 들어왔던 손가락이 뿌리까지 잠기고, 한개가 두 개, 세 개로 점점 늘어났다.

"흑, 앗…. 아흣…."

젖어오는 내부를 로제타 스스로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시시각각 변해 가는 로제타의 표정에 미카엘도 자신감을 얻어가고 있었다. 질척질척한소리가 미카엘을 기쁘게 했다. 로제타가 느끼고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부끄러움에 로제타가 입술을 깨물어소리를 참으려 하자 미카엘이 그 입가에 키스하며 속삭였다.

"듣기 좋으니까…. 참지 말아요, 내 사랑."

로제타는 화들짝 놀라며 깨물었던 입술을 벌렸다. 미카엘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갰다.

맛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기분 좋게 달아오르는 입술에 미카엘은 더욱 정성껏 로제타의 안을 괴롭혔다. 그의 두 눈에는 로제타가 야릇한쾌감에 어쩌지 못하는 것이 고스란히 보였다. 너무 귀엽다는 생각에 하루 종일이라도 괴롭힐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하반신의 열기만아니라면.

'너무 아픈데….'

이 뜨거운 것을 얼른 로제타의 안에 넣고 싶었다. 넣고 비비고, 로제타가 엉망이 될 때까지 탐하고 싶어미치겠다.

네 개째로 늘어난 손가락으로 로제타를 열락에 몰아넣고 있으면서도 미카엘은 아직도 부족하다 여겼다. 자신의 것은 너무 크고, 로제타의 그곳은 좁고 부드러웠다. 마구잡이로 밀어넣었다가는 로제타가 큰 충격을 받으리라.

'아, 하지만더는….'

결국은 이것을 로제타 안에 넣어야 끝이 날 텐데. 자신을 이 이상 기다리게 했다가는 참지 못하고 움직여 버릴 것 같았다. 미카엘은 더 신경 써서 풀어주지 못하는 자신을 욕하며 로제타의 안에서 손가락을 뽑아냈다.

"하으으…."

미카엘의 집요한애무에 거의 넋이 나가 있던 로제타는 겨우 숨을 몰아쉬었다. 헐떡이는 가쁜 숨소리마저 미카엘을 흥분시킨다는 것도 모르고.

'달 것 같은데.'

미끈거리는 것이 손목까지 흐르고 있었다. 어차피 로제타가 볼 수도 없을 터이므로 미카엘은 그것을 조심스럽게 맛보았다.

달았다. 역시나 혀가 녹아내릴 것 같은 야릇한맛이었다.

"하아…."

전부 맛보고 싶었지만, 그의 인내심이 이미 한계였다. 거기다 귀중한로제타의 꿀을 맛보는 것으로 다 소비할 수는 없었다. 미카엘은 끈적하게 묻은 액체를 빳빳하게 선 제 페니스에 발랐다.

로제타의 애액을 바르는 것만으로도 제 것이 더욱 팽창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보다 더 커지면 로제타가 괴로워질 거라는 생각에 한번 빼는 것이 낫지 않겠나 싶었으나, 새신부를 앞에 두고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로제타…."

헉?! 뭐야, 이건!!

제 여린 점막 위로 눌러지는 거대한열기에 로제타는 화들짝 놀랐다. 엉덩이가 튀어올라 점막에 선단이 문질러지자 미카엘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넣을, 넣을게요. 더는 참을 수가…."

"처, 천천히! 필립!"

비명처럼 내지른 목소리에 미카엘이 이를 악물었다. 충분히 풀어주었다 여겼지만그래도 아플지 몰랐다.

'히익?!!'

커다란 것이 점막을 벌리며 파고들었다. 로제타는 제 생각보다 훨씬 큰 필립의 그것에 당황했다. 이런 건 못 들어가! 하고 소리칠 찰나 그것이 움직였다. 밀고 들어온 것이 아니라 내부를 벌리듯 비벼댔다.

"흐, 흐아! 읏, 흡…!"

손가락으로 그러했듯 그걸로 안을 자극할 모양이었다. 로제타는 필립이 마구잡이로 밀어넣을까 두려웠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미카엘은 초인적인인내심으로 아주 조금씩 전진하고 있었다.

"으음, 큿…."

예상은 했지만로제타의 안이 너무 기분 좋아서 현기증이 일 것 같았다. 미카엘은 로제타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자신을 억누르고 있었다.

로제타를 눈물 흘리게 하는 것은 행복에 겨워 울게 하는 것, 그거 하나만이면 족했다. 이미 충분히 고통받은 그녀를 아프게 해서는 안 되었다.

"힉! 아아…. 필립!"

첫 경험이니만큼 아주 기분 좋거나 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건….

'뭔가 이상한데, 기분 좋아…….'

손가락으로 안을 헤집는 것도, 지금 페니스가 들어오는 것도 좋았다. 너무 커서 무서운데도 아직까지는 좋기만했다. 숨소리만으로 필립이 괴로워한다는 건 알 것 같은데도.

'뭐가 뭔지…. 앗?!'

드디어그 순간이 온 것 같았다. 무언가 얄팍하게 걸리는 듯한느낌도 있었으나 미카엘은 때가 왔음을 깨닫고 강하게 밀어붙였다.

"윽, 아……."

선명한아픔에 눈물이 고였다. 미카엘은 얼른 제 페니스를 뽑고, 베개 속에 감춰 두었던 포션을 꺼내 거기에 듬뿍 묻혔다.

"앗!"

로제타가 뭐라 반응할 새도 없이 커다란 것이 쑤욱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픈 곳까지도 밀고 들어오는 것에 눈물이 기어이 떨어져 내렸다.

"흑…."

"로제타, 미안해요. 아프게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미카엘은 로제타를 끌어안고 필사적인얼굴로 달랬다. 로제타도 첫 경험이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임을 알았으나, 몸이 아프니 필립이 원망스러워졌다.

그러나 아픔은 잠시였다. 페니스에 발라져 있던 포션이 금세 효과를 나타내며 날카로운 아픔이 서서히 가시는 것이 느껴졌다.

로제타도, 미카엘도 꼼짝 않고 허리를 움직이지 않았으나, 아픔이 사라지니 로제타가 먼저 허리를 움직였다. 계속 한자세로 있으려니 불편했던 것이다.

"읏, 로제타…."

당황한듯 미카엘이 신음했다. 내부가 마찰되는 느낌에 얼굴이 달아오른 것은 로제타도 마찬가지였다.

"아흐…. 응, 필립……. 이제 빼도…. 앗!"

분명 빼라고 했는데 더 들어온다. 거기다가 아까처럼 좌우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앞뒤로 왕복운동을 하고 있었다.

"흐, 흐아아…. 필립! 아앙, 이거……. 으흣!"

야릇한자극이 배 속을 가득 메우는 것에 당황했다. 부드럽게 안을 비벼 주던 것도 좋았지만, 지금의 이것도 창피할 만큼 좋았다.

"…더 세게 해도 좋은 모양이군요. 그런 얼굴이라니."

황홀한듯한목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왔다. 쉰 듯한기분 나쁜 목소리가 달콤한것으로 뒤바뀌고 있었으나, 로제타는 그도 의식하지 못한채로 허리를 떨었다.

"아아……. 배 속이…. 배 속이, 이상해서…. 아흐흑…!"

"그건 쾌감이라고 하는 겁니다, 로제타."

땀에 젖은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며 미카엘이 속삭였다. 다정한손길과는 달리 그의 하반신은 점점 파렴치한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본능적이지만, 그보다 음탕하게 느껴지는 허릿짓에 로제타는 당황해 버렸다.

"이게? 아, 흐! 아앙, 으…. 필립, 아앗!"

"느껴요, 로제타…. 당신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뭐든 할 테니."

속삭이며 미카엘은 로제타의 입술을 빼앗았다. 이제까지의 감미롭기만한키스가 아닌, 그와의 첫 키스를 떠올리게 하는 탐욕스러운 입맞춤에 로제타는 얼이 빠졌다. 배 속을 가득 메우고 있던 미카엘의 것도 날뛰고 있었다.

"읏, 흡, 윽, 크흑!"

입을 벌릴수록 미카엘의 혀가 더 들어왔다. 아래쪽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질척질척하게 녹은 것을 빌미로 삼듯 점점 더 깊숙이 파고들고 있었다. 또 찢어질 것 같은 느낌에 두려웠으나, 한편으로는 무서울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하아……. 드디어전부…. 사랑해, 로제타. 사랑해요."

황홀한듯 속삭이며 미카엘이 로제타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음탕하기까지 했던 야릇한 움직임이 드디어 멈추는가 싶었으나 아직이었다. 뿌리까지 들어온 것은 사정하지도 않은 채로 무섭게 제 존재감을 드러내고있었다.

"앗, 피, 필립…. 으흡…."

또다시 포개지는 입술에 정신없는 키스가 쏟아졌다. 그마저도 기분 좋았으므로 로제타는 전부 받아들이고있었다. 미카엘이 다시 허리를 움직이기 전까지는.

"힉?! 으흡!"

로제타의 입술을 빨아대며 아까와는 다른 기세로 쳐대는 것에 배 속이 음란한 자극으로 가득 차는 것이 느껴졌다. 빙의되기 전에도, 이후에도 이런 것은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처음이라면서!'

질척질척하게 찌르고문질러대는 허릿짓에 로제타는 미칠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는 두 눈은 뚫어질 듯자신을 쳐다보고있는 것 같기도 하고.

평범한 남자가 이런 움직임을 보일 수 있는 건가? 아니면 동정이라던 게 거짓말이었나?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으나, 어느 것 하나 입 밖으로 내보낼 수 없었다. 그녀의 입술은 미카엘에게 빨리느라고바빴으니까.

***

"아…. 이런."

겨우 세 번밖에 안 했는데.

로제타가 느끼다가 까무룩 정신을 잃고말았다. 미카엘은 순간 당황했으나 로제타가 기절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안도했다. 그 정도로 기분 좋았던 모양이었다.

'귀여워.'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책에서 읽기는 했으나 로제타가 그럴 줄은 몰랐다. 이렇게 민감한 몸이라니…. 아직도 더 그녀에게 반할 것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첫날밤에 혼자만 만족하고잠들어 버리다니…. 이 서운함은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전부 받아낼 겁니다, 로제타."

속삭이며 미카엘은 여전히 단단하기만 한 제 것을 뽑아냈다. 부드러운 틈새에서 정액이 울컥거리며 쏟아지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흥분이 일었다.

미카엘은 빳빳하게 선 자신의 페니스를 보며 한숨을 짓다가 스스로 위로하기 시작했다. 잠들어 버린 데다가 이번이 처음인 로제타의 몸에 대고할 수는 없었다.

'섹스라는 게 원래 이런 건가? 아니면 나만 짐승 같은 건가…….'

경험이 로제타를 안은 것뿐이니비교해 볼 수도 없다.

미카엘은 몇 번이나 사정하고도 여전한 제 것을 보고당황했다. 자위한 경험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건만, 이 정도로 심하게 흥분된 것은 처음이었다.

'하는 수 없지.'

다행히 침대에 무방비하게 늘어진 로제타가 있었기에 자위할 거리는 충분했다. 미카엘은 내일 아침이 되면 로제타에게 할 이런저런 것들을 떠올리며 제 욕망을 풀었다.

한참을 씨름한 이후에야 겨우 제 것을 가라앉힌 미카엘은 로제타에게 다가갔다. 로제타는 그가 덮어 준 이불을 목까지 덮은 채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춥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마법으로 주변의 공기를 데우고이불을 젖혔다. 반드시 맨살에 할 필요는 없는 주문이었으나, 로제타의 몸을 보는 것이 좋아서 옷은 입히지 않았다.

뻗어 온 손끝이 로제타의 가슴 한가운데로 향했다. 그녀의 피부 위로 붉은 마법진이 떠오르며 마법의 문자들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한밤중이니, 저 멀리 수도에서 제 침대에 누워 있을 이자벨의 피부에도 같은 문자가 떠올랐을 것이다.

'이제 그 여자는 다시는 로제타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로제타를 다치게 하면 제가 더 큰 해를 입게 되니, 지금처럼 로제타를 고립시키는 것이라면 모를까, 리디아를 죽인 것처럼은 하지 못할 터였다.

로제타에 대한 누명은 이제부터 풀어 가면 된다. 이제 그녀는 제 수가 먹히지 않는다는 이유로 로제타를 살해하지는 못할 테니.

"하앗."

짧은 기합을 토해 내며 로제타의 위로 마력을 쏟아붓자 마법진이 빛을 내며 로제타의 몸속으로 사라졌다. 아마저주를 '받는 쪽'인 이자벨은 엄청난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잠들어 있었다면 깨어났을지도 모르겠다.

'부디 로제타가 고통받은 것 이상으로 고통받길 바라. 카룰리아스 공녀.'

***

"꺄아아아아아아악!"

한밤중에 울려 퍼지는 아가씨의 비명에 저택의 고용인들이 하나둘씩 일어났다.

가장 먼저 눈을 뜬 것은 이자벨의 전속 시녀 낸시였다. 그녀는 이자벨의 침실 가까이에 붙어 있는 시녀용 작은 침실을 사용했기에 금세 눈을 떴다.

다급히 침실 문을 열고들어가니우아하고청초했던 아가씨가 제 온몸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하고있었다.

"아가씨!!"

"아악! 아아아아악! 온몸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아!"

"아가씨, 아가씨! 정신 차리세요!"

평소의 아름답고단정한 모습은 간데없이 흉한 몰골이었다. 낸시는 새파랗게 질려 침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복도에는 이미 등불을 들고달려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선두에 선 공작의 모습에 낸시가 입을 열었다.

"아가씨가, 발작을!"

발작이라는 말에 공작의 눈에 황당한 시선이 어렸다. 가벼운 감기 정도는 걸린 적이 있지만, 심하게 앓은 적도 없는 이자벨이었다. 그런 딸에게 발작이라니!

공작은 낸시를 밀치고침실로 들어갔다. 이자벨은 아직도 발작을 일으키고있었다.

"이자벨! 이자벨, 정신을 차리거라! 뭐 하느냐!!"

당황하는 하인들의 위로 공작의 무서운 목소리가 떨어졌다.

"의원을…. 치료사라도 불러라! 얼른!!"

카룰리아스 공작의 고함에 하인들이 바삐 움직였다. 눈치 빠른 집사는 의원만을 부른 것이 아니라 신전에도 사람을 보냈다. 카룰리아스 공작가 정도라면 상급 신관을 자택으로 불러들이는 것이 가능했다.

***

의원이 처방해 준 진정제로 이자벨은 겨우 정신을 잃을 수 있었다. 정신을 잃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무시무시한 통증이었던 것이다.

한참을 진찰한 후에도 병의 원인을 모르는 의원에 공작은 불같이 화를 냈다.

"네가 그러고도 의원이라 할 수 있느냐! 내 딸에게 생긴 발작의 원인을 알아내지 못한다면, 더는 살아서 이 공작가를 나가지 못할 것이다!!"

난데없는 불벼락에 의원은 생각하고있던 한 가지 의견을 조심스럽게 내보였다.

"그, 그것이…. 확실치는 않지만……, 마법사에게 보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내 딸의 발작이 마법과 상관이 있다는 거냐?"

"아무래도…."

의원은 침을 꼴깍 삼키고는 공작의 눈치를 보았다.

"공녀님께서는 저주를…, 받으신 게 아닌지."

"뭐라?"

카룰리아스 공작은 기가 막힌 듯이빨을 드러내며 의원을 노려보았다.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평가를 받고있는 그의 딸이 저주를 받았다?

"지금 그 말을 책임질 수는 있는 것이겠지?"

"화, 확신은 할 수 없으나…. 어느 모로 보아 건강하신 분이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마나의 움직임이 기묘하게 꼬인 것은 그것 외에는 설명할 방도가…."

의원이 변명처럼 덧붙인 말에 카룰리아스 공작은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부인하고싶었으나 당치도 않은 이유로 상대를 저주하는 이도 있는 법이었다.

하물며 그의 딸은 많은 이의 선망과 질시를 받는 몸이었다. 지체 높은 위치에 아름답기까지 하니어느 나라의 황녀 못지않은 대우를 받았다.

"저, 공작님. 상급 신관이신 발렌시아 님이 오셨습니다."

"그래."

카룰리아스 공작은 하인들에게 의원을 잡아 두라 이르고신관을 맞이하러 갔다. 발렌시아는 교단의 장로들을 모실 정도로 급이 높은 신관이었다. 여러 차례 공작의 부상을 치료해 준 일도 있었다.

"신관님, 이쪽입니다."

공작이 집무실 밖으로 나갔을 때는 시종이 발렌시아를 모셔 오고있었다. 신관은 공작을 보고인사를 건넸다.

"공녀께서 아프시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이리도 늦은 시간의 방문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얼른 가시지요."

마음이 급한 공작은 앞장서 이자벨의 침실로 향했다. 이자벨이 제정신이었다면 제 모습이 흐트러진 것을 이유로 들어 시간을 끌었을 테지만, 지금의 그녀는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시녀와 공작부인이 지켜보는 가운데에, 발렌시아 신관이 이자벨의 상태를 살폈다. 공작은 점점 더 어두워지는 신관의 표정에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어떻습니까?"

신관은 주위의 눈을 의식하는 듯싶더니자리를 옮길 것을 부탁했다. 공작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

'공작께서 최근에 단단히 원한을 사신 것이 있습니까?'

세간에 행실이 바르다는 평을 듣고있는 이자벨이어서 신관의 첫마디는 저것이었다. 저주를 받은 것은 이자벨이나 다른 사람 탓으로 이자벨에게 저주가 내려졌다 여긴 것이다.

발렌시아 신관은 그렇게 말하며 어지간한 마법사를 불러오는 것으로는 힘들 거라고경고했다. 거기다….

'적령기의 영애가 아닙니까? 소문이 나지 않도록 조심하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 말인즉, 제 입을 막기 위해 막대한 금액을 교단에 기부하라는 뜻이었다. 이미 상당한 액수를 기부하고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할 터였다.

카룰리아스 공작은 발렌시아 신관의 목을 조르고픈 충동을 느끼며 적당히 응수했다.

언젠가는 가장 좋은 값어치에 혼인이라는 형식으로 집안을 빛나게 해 줄 딸이라 여겼다. 그런데 저주라니…. 절대 새어 나가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저주받은 아가씨를 신부로 들이려는 자는 없을 테니말이다.

공작은 이를 갈며 이자벨의 방문을 노려보았다. 급히 상급 마법사를 수배하여 저주를 풀도록 노력해 볼 테지만, 당장은 이 사실을 숨겨야 했다.

'대체 누가 이자벨에게 이따위 저주를 걸었단 말인가!'

이자벨에게 걸린 저주를 푸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녀에게 저주가 걸렸다는 사실을 숨기는 것 또한 그것 이상으로 중요했다.

카룰리아스 공작은 신관을 설득하여 며칠 더 자신의 집에 머무르도록 조치를 취한 이후에 제 집무실로 내려갔다.

오늘 저택으로 부른 의원을 비밀리에 처리하는 것은 물론, 신관인 발렌시아도 사고로 위장하여 죽여야만 했다. 그들이 말한 대로 이자벨이 저주에 걸린 것이 맞다면 말이다.

'혹여 이자벨이 어리석은 처신을 한 것은 아닌가?'

공작은 제 딸이 심상치 않은 성품을 지니고있음을 알고있었다.

대외적인 모습 모두가 가면이라는 것도.

그녀의 그런 장난질을 눈감아 주고있는 것이 카룰리아스 공작 본인이니당연했다. 이자벨의 그런 여론 몰이는 대부분의 경우 카룰리아스 공작가에 이득이 되는 일은 있어도 해가 되는 일은 없어 왔다.

아직까지는.

그래서 카룰리아스 공작도 모른 척해 주고있었던 것이다.

'이자벨의 소행임을 알았다 한들…, 모든 일은 깨끗이 처리했으니뒤를 잡힐 일은 없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보복을 했단 말인가?'

짚이는 일은 있었으나 너무 많아서 탈이었다. 몇 개월 전에 수도에서 도망친 로제타 외에도 이자벨이 망친 인생은 하늘의 별처럼 많았으니.

'일단은 입이 무거운 마법사를 들여 저주 여부를 확인하게 한 이후에 찾아보는 수밖에…. 이런 저주를 걸 수 있는 자는 몇 되지 않을 것이다.'

공작은 무서운 얼굴로 이자벨의 방에서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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