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아드라말렉의 분노 2]
검은 악마가 테리우스의 시선에 맞춰 그의 오른손을 툭툭 털었다. 그의 날카로운 검은 손가락들이 점점 길어지며 테리우스의 갑주를 찢을만큼 위협적으로 변했다. 검은 손가락들은 전부 두껍고, 날부분은 불어오는 바람을 삭 가를 정도로 날카로운 것이었다.
"그럼."
손가락이 길쭉해진 오른손을 테리우스에게 내지르며, 검은 악마가 날렵히 돌진했다. 테리우스는 그가 다가오는 경로를 찰나의 순간 예측해 롱 소드 손잡이를 쥐었다. 보팔 소드라는 이름을 가진 그의 롱 소드는 악마들에게 심각한 부상을 입힐 수 있는 검이었다. 검은 악마도 이 검에 맞으면 어쩔수 없으리라. 테리우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카앙-!]
"!"
"오."
테리우스의 롱 소드 날을 두껍고 날카로운 손가락으로 붙잡은 검은 악마가 과장되게 놀란 표정을 했다. 인간을 닮은 놈의 낯짝이 이내 테리우스를 비웃기 시작했다.
"이 검은 내 피부를 부식시키고, 깊은 상처를 입힐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것도 내게 닿아야 일어나는 일. 지금 같은 상황에선 네놈이 할 수 있는 건 없다."
"입 다물어라!"
검은 악마가 오만함에 빠졌다고 생각한 테리우스가 그의 주먹을 휘둘렀다. 그의 코사트 갑주가 부여하는 동력으로 인해 테리우스의 주먹은 두꺼운 벽조차도 간단히 가루로 만들 수 있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검은 악마는 그 주먹을 피할 수 있었음에도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놈은 오히려 검을 잡은 반대편 손으로 주먹을 쥐더니, 그대로 테리우스의 주먹과 맞부딪혔다.
[쿠궁---]
반신과 강력한 포데스타의 두 주먹이 맞부딪혀, 주위의 모든 것을 진동시켰다. 강력한 전율에 주위 공기가 뒤집히듯 솟구쳤으며 땅이 그들을 응원하듯 거대하게 울렸다.
순간적인 충격으로 발생한 흙먼지가 걷히고 두 주먹은 계속해서 맞부딪힌채 힘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검은 악마쪽의 피해가 훨씬 적어보였고, 테리우스의 주먹이 점점 뒤로 밀려나고 있었음은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아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하하하하-!!!."
검은 악마가 테리우스의 가슴팍과 복부를 주먹으로 수십차례 가격했다. 테리우스의 갑주 부분이 상당수 찌그러지며 공격을 방어하는데 실패하고, 그가 피를 토하게 만들었다.
"정말, 토나오게 약하군. '반신'이여."
"....넌 패배할 것이다."
테리우스는 그렇게 경고하며 그의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검의 날을 잡고 있던 검은 악마의 손가락이 잘려나가더니 이윽고 팔꿈치까지 보팔 소드의 날이 파고들어 반으로 갈라버렸다.
"크악!"
[퍼억-]
검은 악마는 검을 잡고 있지 않던 다른 손등으로 테리우스를 후려쳐 물러서게 만들고는 상처를 재생시키기 시작했다. 상처를 완전히 재생시킨 검은 악마는 테리우스를 쏘아보며 조롱했다.
"하, 네놈같은 약자가 내뱉는 말이 내 귀에 뭘로 들릴 것 같으냐? 오히려 내겐 찬가들일 뿐이지. 더 징징대보아라. 더 울부짖어보아라. 그게 날 더욱 강력하게 만들어줄 것이니까. 그리고..."
검은 악마가 그의 날카로운 손가락들이 있는 손을 높이 쳐들었다. 테리우스는 곧 그에게 날아올 공격을 대비하며 검으로 방어하는 자세를 취했으나, 악마는 테리우스의 헬멧을 벨라토르조차 반응하기 힘든 속도로 후려쳐버렸다.
[카각--]
테리우스의 손을 벗어난 검은 앞쪽으로 날아가며 땅바닥에 꽂혔고, 헬멧이 찌그러지며 파괴되는 소리와 함께 테리우스가 공중으로 5m를 솟아올랐다가 땅에 떨어졌다. 검은 악마는 그런 테리우스를 조롱하며 깔깔댔다.
"고작 이정도야? 고작? 아드라말렉이 날 풀어주면서까지 막아야하는 존재들이 고작 이정도란 말이냐?"
"...윽."
테리우스는 그의 상체를 일으켜 머리를 한번 세차게 흔들었다. 그의 헬멧 내부에선 적의 약점을 자동으로 파악해주는 장치와 여러가지 장비들이 고장나 붉은 빛을 경고음과 함께 띄워대고 있었다.
"흥."
그는 일체 망설임도 없이 헬멧을 벗어 땅바닥에 내던졌다. 곧이어 굳센 표정과 검은 눈썹을 가진 짧은 흑발의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머리와 이마에서는 굵은 핏물이 흐르는 중이었다. 아마도 검은 악마의 공격이 만든것이 분명했다.
"이제 어느정도는 알았느냐? 너와 나의 차이가 이만큼이라는걸. 넌 내게 조금의 타격도 입히지 못했지만, 난 널 쓰러트리고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두들겨주었지."
"...타격을 입지 않은건 아닐텐데."
"여기서 제일 강하다는 네놈조차 내 상대가 되지 않으니, 나머지는 불보듯 뻔하겠구나. 이제 죽어라."
"너무 오만하군."
"...뭐라고?"
검은 악마가 눈살을 찌푸렸다. 테리우스가 픽 내뱉은 말이 그의 신경을 건드린 것 같았다.
"내가, 오만하다고?"
"그렇다. 이 악마야. 그리고 그 오만은 네게 독으로 돌아올거다. 아니면 이미 돌아오고 있을지도 모르지."
"..."
검은 악마가 잠시 얼빠진 표정으로 테리우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이내 분노가 가득담긴 얼굴로 테리우스에게 달려들며 괴성을 질렀다. 그는 테리우스에게 달려들기전, 무언가 비행기 같은 것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소리를 들었으나 분노에 눈이 먼 그는 그런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우주에서 가장 오만한 생물들이, 누가 누구에게 오만하다는 것이냐!!!!"
"그런점에서 네놈이 오만하다는거다!!!!!"
테리우스가 무기대신 검지 손가락 하나를 펼쳐 검은 악마를 가리키며 외쳤다. 그 순간, 검은 악마의 가슴팍에 길다란 칼날이 등쪽에서부터 뚫고 앞으로 튀어나왔다.
"이익.. 이, 이게 뭐-"
그의 가슴팍을 뚫은 검이 옆으로 움직이며 검은 악마의 몸을 베었다. 시커먼 피가 땅바닥에 튀기며 사그라들었다. 검을 찌른 자는 검은 악마의 어깨를 잡고 옆으로 강하게 넘겨버린 뒤, 테리우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게. 테리우스."
"...중대장님."
테리우스가 라미엘을 보며 미소지었다. 라미엘은 헬멧을 쓴 채 고개를 끄덕거리며 검은 악마의 가슴팍을 찔렀던 검을 테리우스에게 건넸다. 그 검은 아까 테리우스가 검은 악마의 공격을 받을때 손에서 놓쳐버린 그의 보팔 소드였다.
"중대장님, 아직 놈은 죽지 않았을겁니다. 놈은... 상당히 강력합니다. 규격 외의 존재 같아요."
"...알겠다. 테리우스. 자네의 부상은 어떤가?"
"소심장 하나가 터진 것 같습니다. 문제는 없- 푸헉.."
테리우스의 입에서 핏덩이가 툭 튀어 나왔다. 아무래도 그의 복부와 가슴팍을 검은 악마의 주먹으로 난타질 당한 것이 큰 상처였던 것 같았다.
"별로 좋지 않은 모양이군. 미체르! 다렌!"
"네. 중대장님."
라미엘의 명령을 받은 두 군단원이 예의를 갖춰 앞에 섰다. 라미엘은 그들에게 테리우스를 부축하게 시킨 뒤 키아나의 행방을 물었다.
"테리우스 부중대장을 부축하게. 그리고 키아나 유나이트 리더는 어디있지?"
"키아나 유나이트 리더는 현재 탈출하지 못한 연방 잔존병들과 검은 안개 연대원들을 수송 차량으로 대피시키는 중입니다. 저희 중대는 10분 후 도착할 팔콘 수송선으로 탈출하기로 하였습니다."
"좋군. 내가 없는 동안 키아나가 좋은 결정을 내렸어. 자네들은 테리우스 부중대장과 함께 키아나쪽에 합류하게. 여기 있는 중대원들 전부."
"주, 중대장님은 어쩔 생각이십니까?"
"....테리우스의 복수를 해줘야하거든. 자네들 먼저 가 대기하고 있게."
"하- 하지만.."
테리우스를 부축하는 군단원 하나가 라미엘을 걱정하는 듯 말을 더듬었다. 그러나 테리우스는 그에게 화내듯 을러대며 중대장을 믿으라고 말했다.
"지금 중대장님을 의심하는거냐? 살아돌아오실거다. 우리는 저분이 내리시는 명령을 지키면 되는거다.."
"...알겠습니다."
테리우스의 말을 들은 군단원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헬멧 통신망에 접속했다.
"여기는 미체르. 라미엘 중대장님의 명령이다. 테리우스 부중대장 휘하의 전 군단원은 키아나 유나이트 리더가 대기하고 계신 탈출 지점으로 신속히 이동하라. 이상."
.
.
.
.
"우으..."
어두운 방안의 벽에서, 창에 복부를 뚫려 벽에 단단히 박혀있던 마리가 이성을 붙잡았다. 그녀의 머릿속에선 당장 날아올라 자신에게서 피터를 빼앗아간 빌어먹을 방해꾼들을 전부 찢어죽여버리고 싶었으나, 그러기 전엔 복부에 꽂힌 자신의 창 먼저 뽑아내야만 했다.
"망...할."
라미엘의 강력한 힘으로 박아넣은 이 창은 창의 주인인 마리조차도 손쉽게 빼어낼 수 없을 정도로 단단히 박혀져 있었다. 마리가 마침내 양손으로 창을 잡아 서서히 빼내기 시작했을 때는, 그녀의 입에서 고통을 참는 신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크흐으... 크흐으으!!"
처음은 고통을 참기 위한 신음이었으나, 점점 분노와 증오, 질투가 가득 담긴 신음으로 뒤바뀌어가는 것은 마리의 감정을 잘 표현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피터가 에리에게 사랑을 속삭였던 날만큼 분노하고 있었다.
[카삭-]
갑주 조각과 마리의 뽀얀 살결을 벗어난 창날이 소리를 냈다. 마리는 벽에서 자유로워지자마자 땅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채 숨을 골랐고, 숨고르기는 그녀의 앞에 누군가 당도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쿵. 쿵. 쿵.]
위압적인 발소리를 내며 그녀의 앞에 당도한 것은 바로 지옥 군세의 돌격수장, 아드라말렉이었다.
"아드라말렉..."
"하등한년. 네년에게 그 자를 맡기는게 아니었다. 고작 인간놈들의 기습도 못버티고 이렇게 빌빌대고 있던것이냐?"
"...."
"이런식으로 하라고 우리가 네년에게 힘을 준 줄 아나?!"
아드라말렉이 마리의 멱살을 한손으로 쥐어 들어올렸다. 마리는 그의 손아귀에 잡혀 숨이 막혔음에도 전혀 발버둥치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피터'만이 가득 차 있었기에. 어차피 피터를 더이상 만나지 못한다면 죽는 것이 더 나았다.
[퍼억- 쿠웅-]
마리를 주먹으로 후려쳐 벽에 밀친 아드라말렉이 분노하듯 울부짖었다.
"크카아아아-!"
"..."
마리는 아드라말렉에게 밚아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아드라말렉에게는 그녀의 관심이 하나도 쏠리지 않았다. 아드라말렉도 이런 마리의 표정을 읽어내곤 이빨을 빠드득 갈았다. 그것은 마리가 안쓰러워서가 아닌, 이런 상황을 만들어낸 마리의 한심한 작태에 질렸기 때문이었다.
"퍼플 윙. 네년에게는 질렸다. 피터를 다시 잡아오기 전까지는 우리에게 돌아오지도 말아라. 못찾으면, 그냥 나가뒤져버리든-"
그 순간, 아드라말렉의 말을 끊고 어두운 방안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쯤해. 아드라말레크."
"....하후케크. 여긴 무슨 일이지? 허튼 소릴 할거면 당장 꺼져라."
하후케크의 등장을 경계하며, 아드라말렉이 으르렁댔다. 그러나 하후케크는 아드라말렉에게 농담조로 넌지심 ㅏㄹ했다.
"오, 너무 그러진 말라구. 아드라말-레크. 난 저 소녀에게 다시 의지를 북돋아주려고 왔으니까. 흐하하하..."
"흥."
아드라말렉이 콧김을 씩 뿜었다.
"맘대로 해라. 저 의지가 없어진년을 다시 되돌리든 말든."
아드라말렉의 말에, 하후케크가 움직였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수많은 육신 중 하나인 조그만 흑구름이 마리의 머리 주위에서 움찔거리고 있었다.
조그만 흑구름은 마리에게 양쪽 귀를 분주히 돌아다니며, 마치 중요한 정보를 속삭이는 듯 소근소근댔다.
"...별 지랄을 다하는구나. 하후케크."
아드라말렉이 한심한 표정으로 내려보아도 하후케크는 멈추지 않았다. 아드라말렉이 그에게 더 쏘아 붙이려고 입을 연 순간, 마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
그녀의 눈은 예전처럼 다시 의지가 빛나고, 생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그녀는 그대로 보랓빛이 감도는 날개를 활짝 펼쳐 천장에 창을 던져 부수었다. 그녀는 날개를 움직여 잔해들 사이로 빠져나가 저멀리 사라졌고, 아드라말렉은 그런 그녀를 보며 하후케크에게 물었다.
"뭘 속삭였지?"
"...위치. 고작 그런 걸로도 저 소녀는 다시 움직일 수 있어. 아드라말렉. 너도 움직여야지. 밖에 네 도끼를 기다리는 자들이 있다."
"...흥.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