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추격자들]
"제기랄, 칼리브레! 코리!"
하겐이 자신의 옛 친구들을 보며 핸들을 확 꺾었다. 육중한 수송 차량이 있었던 곳에는 깊은 타이어 자국과 총탄들이 빗발쳤다.
"망할! 망할! 여기까지 따라왔군!"
"무슨 일이야?!"
타하리알이 조종석의 비좁은 문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하겐은 욕설을 내뱉으며 계속해서 핸들을 좌우로 꺾어댔다. 고작 총탄들을 피하려고 그런 것이 아닌, 칼리브레 일행이 타고 있는 수송 차량이 계속해서 자신들을 들이받으려고해서였다.
"무슨 일이냐니까, 하겐!"
"빌어먹을 내 옛 친구들이 우릴 잡으러 왔거든! 다들 자리에 앉고 뭐라도 단단히 붙들어!"
하겐의 말뜻을 알아챈 타하리알이 마르시의 곁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마르시와 이블린이 타하리알의 허벅지와 복부를 끌어안으며, 충격에 흔들리지 않게 대비했다.
"왜, 왜 날 잡아?"
"하겐이 뭐라도 붙들라고 하잖아! 여기에 붙들게 너 말고 뭐가 있어? 안 그래, 이블린?"
"응! 응!"
"..."
"좋아! 다들 꽉 잡았지? 씨발, 어디 한번 해보자고."
하겐이 기어를 강하게 잡아당겼다. 그러자 수송 차량의 엔진이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더욱 더 빨리 가동되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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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저 미친 새끼들 뭐야?!"
하겐의 차량을 뒤쫓고 있는 차량의 운전병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테일런이 곧바로 그에게 달려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문제가 생겼나?"
"...네. 저 새끼들, 엔진을 아주 혹사시키고 있군요. 저희에게서 어떻게든 벗어나려는 속셈인 것 같습니다."
"그래?"
"어떻게 할까요?"
"...피터 소위님!"
테일런이 뒤에서 무기를 정비하고 있는 피터를 불렀다. 피터가 그를 향해 말없이 고개를 움찔거리자, 그는 차량 천장에 있는 해치를 가리켰다.
"위에 있는 두 병사, 안으로 들여보내십시오. 지금부터는 저희도 속도를 낼거라서, 중심 잡기가 상당히 어려울겁니다."
"알았어."
피터가 에리에게서 건네받은 헬멧을 장비하고 귀쪽을 향해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코리와 칼리브레가 함께하는 통신망에 접속하는 행동이었다.
"칼리브레, 코리, 여기는 피터다. 들려?"
[드드드드드드-!]
"아주 잘 들려! 무슨 일이야?!"
둔탁한 경기관총 소리에 코리의 대답이 섞여들렸다.
"안으로 들어와! 속도를 낼거래. 중심 잡기가 상당히 어려울거라고!"
"그런데 녀석들, 이미 우리와 거리가 벌어졌는데? 따라잡을 수는 있는거야?!"
코리의 질문에 피터가 잠시 통신망을 벗어나 테일런을 불렀다.
"테일런! 코리 말로는 이미 놈들이 상당히 멀어졌다는데? 따라잡을 수는 있는건가?"
"..."
테일런은 피터의 질문을 받고는 말없이 운전병을 쳐다보았다. 운전병은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될것 같습니다. 따라가기야 하겠지만, 이미 이만큼 거리가 벌어졌다면..."
"...그런가. 그럼 잡을 수 없는건가?"
[치직-]
칼리브레에게서 긴급한 통신이 연결되었다. 피터는 다시 헬멧의 귀부분에 손을 가져가며 칼리브레의 통신에 응답했다.
"무슨 일이야, 칼리브레."
"따라잡을 수 없다고?"
"어떻게 들은거야? 통신망을 나왔는데.."
"지금 공격을 잠시 멈췄거든. 느그들이 아래서 떠드는건 아주 잘들린다 이거야. 아무튼! 내게 방법이 있어! 놈들을 따라잡을 방법이!"
"뭐? 그런게 있다고?"
"그래! 우리 뒤쪽에 있는 중기관포을 이용하자고. 코리는 내려보낼게!"
"야! 얌, 얌마!"
칼리브레의 통신이 끊어졌다. 곧이어 해치가 열리며 코리가 내쫓기듯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피터!"
"코리? 칼리브레는 왜 안내려온거야?!"
"몰라, 그 녀석은 차량 위에 달린 기관총 포대에 기어들어갔어. 아마 그걸로 하겐 차량을 박살낼 생각인것 같던데!"
"...!"
피터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테일런을 바라보았다. 테일런은 피터와 잠시 눈길을 교환한 후 운전병의 어깨를 두드렸다.
"차량 위의 기관총 포대에 자동 조준 시스템 입력해. 그리고 자넨 자네가 할 수 있을만큼 차량을 놈들에게 가까이 몰아. 알겠나?"
"알겠습니다."
운전병이 그의 기어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피터 일행이 탑승하고 있는 차량의 엔진도 똑같이 울부짖으며, 폭발적인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
.
.
.
"속도가 붙는구나!"
차량 위에서 중심을 잡던 칼리브레가 잠시 몸을 낮추었다. 확실히 수송 차량의 속도가 눈에 띄게 불어나고 있었다.
"읏차!"
38mm 관통탄을 이용하는 중기관포 포대에 칼리브레가 몸을 비집으며 들어갔다. 모든 H-100 수송 차량 위에 달려있는 이 중기관포 포대는, 전투 능력이 전무한 H-100 수송 차량의 유일한 전투 장비였다.
"이렇게 좋은 걸 갖고, 왜 안 쓰고 있던거야?"
칼리브레는 중기관포 포대의 좌석에 앉은 뒤 손잡이를 잡고 중기관포의 포신을 돌려보았다. 묵직하고 길쭉한 중기관포의 총구가 그의 마음대로 자유로히 움직였다. 이윽고 중기관포 포대 내부의 스크린이 푸른빛이 번쩍 빛나더니 은은히 퍼져나갔다.
"뭐지?"
[치직-]
"칼리브레!"
피터의 통신이 칼리브레의 헬멧을 파고들었다.
"왜!"
"아마 지금쯤 자동 조준 시스템이 입력됐을거야! 푸른 빛이 나왔지?"
"(방금게 그거였나?)"
"아무튼, 조심하라고! 중기관포 포대는 화력을 갖고 있긴 하지만, 노려지기 쉬우니까! 순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기억해!"
피터의 말을 들은 칼리브레는 첫 전투에서 기관총 포대를 공격당해 불타죽은 순이 떠올랐다. 플라이어들의 폭발성 구체를 맞은 기관총 포대는 순을 지켜주지 못했고, 결국 그를 화염으로 감싸버렸었다.
지금 하겐쪽에서 반격을 해온다는건 생각하기 힘든 것이었지만, 만약 그들이 반격해 온다면 칼리브레가 먼저 죽을 것이 틀림없었다.
"....알고 있어. 차량이나 제대로 몰아달라고. 내가 녀석들을 어떻게든 제지시켜볼테니까."
통신을 끊은 칼리브레가 중기관포의 손잡이를 움직이며 총구를 하겐의 차량쪽으로 겨누었다. 하겐이 몰고 있는 차량은 벌써 100m는 넘게 거리가 벌어져 있었다.
"도망갈 순 없지!"
칼리브레가 숨을 참으며 손잡이에 달린 발사 버튼을 누르자, 기관포가 웅장한 소리를 내뿜으며 38mm의 관통탄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부아아아아아아악---!!]
하겐이 탑승한 차량과 거리가 있기도 했고, 갖가지 흔들림에 명중률은 상당히 낮았으나 자동 조준 시스템이 칼리브레의 사격을 보조해주며 여러발의 탄환이 명중하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타캉, 타캉!]
탄환이 명중한 하겐의 차량 뒤꽁무니에서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불씨가 번쩍였다. 이 소리가 어찌나 컸는지, 50m 가까이 접근한 칼리브레의 귀에 똑똑히 들릴 정도였다.
"(널 잡고 말겠다. 하겐. 네 죗값을 치루게하고, 불쌍한 네 영혼을 구제해주마. 옛 친구로서!)"
굳은 의지가 담긴 표정으로 기관포의 버튼을 누르는 칼리브레가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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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우와앗!!"
갑작스레 차체가 흔들리자, 이블린이 비명을 질렀다. 타하리알은 그녀를 넘어지지 않게 붙잡아 준 뒤, 조종석을 쳐다보며 하겐을 불렀다.
"하겐! 무슨 일이야!! 뭐가 이렇게 우릴 두들겨대고 있는거야?!"
"제, 젠장! 지금은 바빠! 중기관포의 탄막을 피하느라 죽을 맛이다!"
"중기관포?!"
타하리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인간들의 화력은 널리 들어서 잘 알고 있었으나, 고작 수송 차량에도 두꺼운 장갑을 찢어발기는 중기관포를 운용하고 있단 말인가?
"그래! 벌써 후미 장갑은 다 찢어졌어! 더이상 맞다가는...앗!"
차량의 계기판을 내려다보던 하겐이 깜짝 놀랐다. 8개의 타이어 상황을 알려주는 계기판이 붉은색으로 점등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겐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계기판을 눌렀고, 계기판은 후미의 타이어 2개와 왼쪽 중간 타이어가 박살났음을 경고했다.
거기에, 연료 탱크를 보호하는 두터운 장갑마저 지속적인 사격에 상당한 타격을 입어 붉은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하겐은 저 기관포를 누가 쏴대는지는 몰라도, 참으로 총질 하나는 기가맥힌 자식이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날카로운 기관포의 관통탄들이 수송 차량 장갑을 찢고 내부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심지어 어느 탄환은 두꺼운 뒷문의 장갑을 뚫고 타하리알의 어깻죽지를 손쉽게 파고든 뒤 하겐이 운전하고 있는 계기판에 박힐 정도였다.
"씨팔!"
하겐은 그의 바로 옆에 탄환이 꽂히자 질겁했고, 타하리알은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크으으악!"
상처를 알아챈 타하리알이 그의 어깨를 쥐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마르시는 타하리알의 상처를 보자마자 이블린에게 루이를 맡긴 뒤 단박에 일어섰다.
"타하리알!"
마르시는 타하리알의 깨끗이 관통된 상처를 보며 기겁했다. 얼마나 깨끗히 뚫렸냐면, 악마의 육신을 가지고 있는 타하리알조차 재생시키지 못하고 있는 상처였다. 상처가 발생했을때 어느정도 살점이 서로 붙어가며 재생을 하는게 일반적인 것인데, 이 상처는 아예 그런 접점도 없이 훤한 구멍이 뚫려버렸으니까.
"이블린, 가서 하겐에게 당장 여기서 벗어나라고 전해! 내가 타하리알을 돌볼테니까!"
"아, 알았어-!"
마르시의 다급한 지시를 받은 이블린이 헐레벌떡 조종석으로 뛰어들어갔다. 하겐은 그때까지도 핸들을 이리저리 꺾어가며 마지막 희망인 연료 탱크가 더이상 피격당하지 않게 발악하고 있었다.
"하겐! 타하리알이 크게 다쳤어! 어서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구!"
"알고 있어! 하지만 놈들이 추적해오는걸 뿌리칠 수가 없잖아?! 게다가 지금은-"
하겐이 잠시 이블린에게 말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을때, 운전석 전체의 계기판이 공포스러운 경고음과 함께 시뻘건 붉은색으로 점등했다. 마침내 칼리브레의 자동 조준 시스템이 연료 탱크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는데 성공한 것이었다.
"이런 씨----"
차체의 후미와 가운데가 폭발하며 뒤집어지는 그 순간에, 하겐은 조종석에서 재빨리 빠져나와 이블린을 감싸며 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