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도망자들]
"역시! 있었어! 다행이다.."
간신히 브로취른 전선을 빠져나온 타하리알이 전선 뒤쪽에 조용히 정차되어 있는 수송 차량 3대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겐은 그런 타하리알을 쏘아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봐, 다행이라니? 없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그, 그거야..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었겠지. 그런건 나중에 생각하고!"
타하리알이 헤헤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가슴팍과 등에 난 상처에서 연기가 지속적으로 뿜어져 나오며 재생되고 있었다.
"그래서 네 말은 저 차를 훔쳐타자는거지?"
"그렇지. 하겐. 너 운전할 줄 알아?"
"....아니. 하지만 어떻게든 하면 해결할 수 있겠지."
"왜 하겐도 타하리알이랑 똑같은 말을 하는거야??"
이블린이 루이를 부축해주며 타하리알과 하겐에게 투덜댔다.
"그래. 그럼 저 차량중에 맨 오른쪽에 있는거 보여?"
이블린의 말을 간단히 무시한 타하리알이 하겐의 어깨를 잡고 손가락으로 수송 차량 한대를 가리켰다.
"어."
"저걸 뺏어타자고. 내가 먼저 가서 운전병을 쫓아내버릴테니까, 네가 루이와 이블린, 마르시를 잘 데리고 곧바로 올라타. 알았지? 운전은 네가 해야하니까, 절대 부상당하면 안돼."
"...정말 그게 가능할까?"
"끄응."
타하리알이 그의 턱을 매만졌다. 그의 입으로 직접 말한 내용이었지만, 그가 말해놓고도 굉장히 믿음직하지 못한 이야기인건 맞았으니까.
"그래도 하지 않으면 이곳에서 나갈 수가 없잖아.."
"그건 그렇지."
"그럼 해야겠지? 나만 믿으라고."
자신의 가슴팍을 퉁퉁 두드린 타하리알이 잽싸게 차량들을 향해 달려나갔다. 차량 주위에서 대기하던 검은 안개 연대원 몇명이 타하리알에게 반응하며 사격했으나, 타하리알은 그들을 손바닥으로 후려치거나 밀쳐서 기절시키는 방법으로 그들을 제압해버렸다.
"빨리! 빨리와서 올라타!"
"알았어! 애들아, 가야 돼."
하겐은 먼저 루이의 손목을 붙잡고 타하리알이 차지한 수송 차량을 향해 내달렸다. 그의 뒤를 이블린과 마르시가 곧바로 따라붙은 채 달렸다.
"너희는 뒤로 올라타! 나는 바로 조종석에 탈테니까, 루이를 부탁할게!"
"걱정하지마!"
마르시가 루이를 부축하며 이블린과 수송 차량의 뒷문으로 탑승했다. 하겐은 그들이 안전하게 올라타는 모습을 보며 조종석의 문을 열었다.
"어, 어?"
"!"
조종석에 먼저 타고 있던 병사가 하겐을 보며 당황했다. 운전병을 본 하겐도 당황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당황하는 하겐의 눈에 운전병이 그의 권총을 뽑기 위해 허벅지로 손을 가져가는 것이 보였고, 하겐은 곧바로 몸을 움직였다.
[퍼억!]
하겐의 묵직한 주먹이 운전병의 볼에 강하게 꽂혔다. 얼마나 강한 일격이었는지, 이 장면을 에리가 보았다면 감탄할 정도의 위력이었다.
"꺼어어-"
하겐의 주먹을 제대로 맞은 운전병의 이빨이 팍 튀어나가며 정신을 잃었다. 하겐은 기절한 그를 조종석에서 잡아 끌어 내려버린뒤 곧바로 조종석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젠장, 다들 탔지? 이블린! 마르시! 루이!!"
하겐의 뒷편에서 마르시의 괜찮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괜찮아! 어서 출발해!"
"알았어! 타하리알!!"
조종석의 열린 문틈 사이로 하겐이 고개를 내밀고는 타하리알을 불렀다. 어느 대원을 박치기로 기절시키는 타하리알이 하겐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어서 타! 여기서 빠져나가야된다며!"
"아, 알았어!"
타하리알은 하겐이 몰기 시작하는 수송 차량에 탑승하지 않고, 그저 수송 차량의 천장으로 몸을 던졌다. 그의 날카로운 발톱이 수송 차량의 장갑을 살짝 뚫으며 박혔고, 타하리알이 올라탄 묵직한 무게감이 들자 하겐은 곧바로 페달을 밟아버렸다.
.
.
.
.
"핏자국은... 여기서 끝인데?"
타하리알이 흘린 핏자국을 따라 전선의 입구쪽까지 오게된 피터 일행이 고개를 으쓱했다. 분명 이곳은 자신들이 이곳에 침투했을때 먼저 지나쳤던 입구 부분이었다. 이 거대한 입구를 벗어나 조금만 걸으면, 멀지 않은 거리에 수송 차량 3대가 대기하고 있을 것이었다.
[부아아앙-]
"그런데 이거 수송 차량 소리 아니야?"
코리가 그의 헬멧을 제대로 뒤집어 쓰며 말했다. 다른 대원들도 코리의 말에 귀를 귀울이며 떠나가는 수송 차량의 엔진 소리를 들었다.
"맞는 것 같은데요. 준위님."
"...대체 무슨 일이지? 수송 차량쪽에서 아무런 무전도 없었는데."
테일런이 부하의 말을 듣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가 무언가 일이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확신했을때는, 그의 가슴팍에 달린 무전기가 시끄럽게 울어대고 있었다.
"말해라. 테일런이다."
"테, 테일런 준위님! 탈취당했습니다!"
"뭐? 뭐를?"
"악마 여럿과 타락자 두명이 H-100 수송 차량 하나를 탈취했습니다! 놈들이 도망가고 있습니다!"
"뭐라고!"
"뭐야, 뭐가 탈취당했다고?"
"...좋지 않은데."
테일런의 무전을 엿들은 피터 일행이 수근댔다. 테일런은 무전을 신경질적으로 끊어버린 뒤 어서 움직여야겠다고 다그쳤다.
"어서 움직여야겠어. 놈들이 도망가고 있다. 우리가 쫓던 놈들일거야."
"뭐라고요? 대체 무슨 일인데요?"
칼리브레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테일런은 그의 물음에 뒤에 있는 핏자국을 엄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우리가 쫓고 있는 녀석들이 차량 하나를 탈취해서 어디론가 도망가고 있다. 방금 들렸던 차량의 엔진 소리도 놈들의 짓이겠지. 우리는 곧바로 놈들을 쫓는다. 이의 없지?"
"..."
"좋아. 이의는 없는걸로 알겠다. 맥켄지! 트리시!"
"예. 준위님."
테일런이 두명의 이름을 부르자 남녀 대원이 걸어나왔다.
"일단 우리가 차량 한대로 놈들을 쫓을테니, 너희들은 당장 앙펠씨가 계신 본대로 돌아가서 지원 병력을 요청해. 차량 한대는 남겨놓을테니까 60명 꽉꽉채워서 오라고해. 알겠나?"
"알겠습니다."
2명의 대원들이 어두운 지하 통로로 사라졌다. 테일런은 이제 피터 일행을 포함한 14명의 대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신보다 계급이 높은 피터가 있어서인지, 그는 존댓말을 섞었다.
"우린 지금부터 도망간 그들을 쫓아갈겁니다. 놈들은 위험해. 그런 마인드 능력을 가진 자를 함부로 살려뒀다가 악마들이 전쟁에 이용하면, 크나큰 피해를 입게될 테니까. 밖에있는 2번재 차량에 전원 탑승하고, 곧바로 놈들을 쫓읍시다."
"예!"
피터 일행을 제외한 10명의 대원들의 대답이 터져나왔다. 피터 일행은 그저 말없이 테일런을 보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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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할, 망할, 뭘 눌러야 속도를 더 늘릴 수 있는거지?"
이런 저런 버튼들과 손잡이를 잡아당겨보던 하겐이 마침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니미, 씨팔!"
[삐익]
그가 화를 내며 누른 버튼이 라디오를 트는 버튼이었는지, 화가 난 하겐과는 정반대의 흥겨운 노래가 흘러나왔다.
"Never gonna give you up~ Never gonna let you down~."
"...존나게 촌스러워."
하겐은 버튼을 다시 눌러 노래를 꺼버린 뒤, 핸들을 양손으로 잡으며 황량한 들판을 내달렸다. 비록 정교한 조종은 불가능했으나 어느정도 속도를 유지한 채 달리는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H-100 수송 차량은 대부분의 병사가 한두번의 연습으로도 운전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물건인지라, 하겐도 그렇게 어렵다고 여기진 않고 있었다.
"하겐, 운전은 잘 되가?"
"타하리알?"
"루이는 완전히 뻗었어. 많이 힘들었나봐. 마르시와 이블린이 돌봐주고 있는 중야."
"...그렇군. 그런데 타하리알, 이젠 어디로 가야하지? 우리가 갈 곳은 있는거야?"
"...그냥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자. 악마들도 없고, 인간들도 없는."
"그런 곳이 있어야 말이지-."
말끝을 흐린 하겐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겐은 문득 아까전 타하리알이 병사들을 제압하던 모습을 떠올리고는 그에게 조심히 질문해보았다.
"타하리알."
"운전할때는 집중하도록 해. 위험하다구."
"그리 어렵진 않으니 괜찮아. 물어볼게 있는데, 아까 네가 쓰러트린 병사들은 죽은거야?"
"...죽지는 않았어. 내가 장담하지."
"어떻게 했는데?"
"그냥.. 순간적으로 명치를 후려쳐서 기절시킨다든가, 벽으로 밀쳐서 정신을 잃게 만든다든가... 그런거지."
"어떻게든 죽이지 않으려고 했군?"
"그렇지."
"왜 죽이지 않았지?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거야."
"죽이기 싫었으니까. 그냥 그것뿐이야."
"...두루뭉술한 대답이네."
하겐은 자신과 말하고 있는 타하리알이 왜인지 악마가 아닌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저 순수하고, 정의로운 영혼과 대화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겐은 타하리알이 인간이었다면 정말로 위대한 사람이 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타하리알.)"
생각에 잠긴 하겐을 뒤로하며, 마르시가 타하리알만이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왜?)"
"(빨리 와봐. 심각해서 그래.)"
"또 뭔데?"
"(쉿, 조용히해. 하겐이 듣겠어.)"
마르시가 그녀의 입술로 손가락을 가져가 쉬잇하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녀의 옆에 있는 이블린은 루이의 배를 열심히 누르는 중이었다. 마치 스며 나오는 피를 제지하려고 하는 것처럼.
"루, 루이가 왜 이래?"
"(쉿, 조용히 하라니까..? 하겐이 듣는다고..!)"
"(아, 알았어. 뭔데 그래?)"
"(...이거 봐.)"
마르시가 이블린이 꾹 누르고 있던 루이의 복부를 살짝 보여주었다. 이블린이 손을 살짝 뗐을 뿐이었는데, 핏방울 하나가 타하리알의 커다란 턱으로 툭 튀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총상이야. 아까 네가 집중 사격을 받아낼때, 몇발이 운나쁘게 이쪽으로 튀었나봐. 나랑 이블린은 팔뚝에 총알이 스쳤고, 루이는...)"
"(하겐은 알고 있어?)"
타하리알이 매우매우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나 마르시는 고개를 저었다.
"(하겐에게 말하면 뒤집어질걸. 루이도 말하지 말아달랬어. 아직은 버틸 수 있다면서...)"
"(어떡하지? 치료 도구는 전부 놓고 왔는데..!)"
"(일단은 나랑 이블린이 어떻게든 총알을 끄집어 냈긴했는데, 지혈이 문제야. 망할 자식들, 루이에게 *내첨탄을 쐈어.)"
(*내첨탄: 피격당한 상대의 피격 부위 내부를 헤집어버리는 탄환. 피격자는 장기가 꼬이거나 주위 살점이 뒤섞이는 부상을 입는다.)
"(루이가 살 수는 있어?)"
"(...희박해. 너무나도.)"
마르시가 희박하다는 말을 내뱉자마자, 이블린이 안타깝다는듯이 시선을 돌려버렸다.
[웅성 웅성]
"이봐, 다들 무슨 이야기 하는거야? 나도 좀 알려주는게 어때?"
열심히 수송 차량을 몰던 하겐이 그의 뒤에서 수근거리는 셋을 보며 말을 걸었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수근거리며 하겐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거야? 나도 궁금해 죽겠- 어?!"
수송 차량의 계기판 가운데에 있는 스크린에서, 무언가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수송 차량 뒷꽁무니에 달린 카메라와 연결된 그 스크린은 한대의 수송 차량이 그를 향해 맹렬히 달려오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서, 설마!"
하겐은 자신들을 뒤따라 오는 수송 차량 위를 확인하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뒤를 따라오는 수송 차량의 위에는, 분대 지원 화기로 무장한 병사 2명이 하겐의 차량을 향해 총기를 겨누고 있었다. 하겐이 더 놀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두명 다 그가 아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카, 칼리브레! 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