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재회]
"무슨!"
피터의 멱살을 단단히 쥐고 있던 마리가 뒷걸음질쳤다. 그녀의 손아귀 힘이 느슨해지자, 피터는 마리의 가슴팍을 걷어차고 탈출할 수 있었다.
"헉...헉..."
당황하고 있는 마리를 뒤로하고, 단숨에 파괴된 벽으로 젖먹던 힘까지 짜내 달려나간 피터가 발을 헛디디며 엎어졌다. 그러나 그의 머리가 땅바닥에 쳐박히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차가운 기계 의수가 피터의 가슴팍을 받치며, 그를 부축해주고 있었다.
"너, 너희는...?"
"이런, 코리가 말한게 진짜였잖아."
칼리브레가 바로 옆에 있는 코리를 보며 엄지를 추켜세웠다. 코리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피터를 받아들었다.
"너희가 어떻게 여길 알아챈거지!"
"...조그만 소리를 들었거든."
"뭐?!"
"그건 내가 설명해~주지. 마~리."
코리가 둘의 사이에 끼어들며 자신만만하게 떠들어댔다.
.
.
.
.
<피터가 구출되기 2분전의 지하터널.>
[타타탕! 타타탕!]
"으아악!"
"클리어!"
달려들던 타락자를 단숨에 처리한 제스가 외쳤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머지 병력이 물밀듯이 진입하며 주의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코리를 포함한 그의 소대도 마찬가지였다.
"클리어!"
"클리어!"
선두로 진입한 검은 안개 연대원들의 분대장들이 외쳤다. 제스는 그들의 보고에 OK사인을 올려보내며, 3분정도 휴식을 가지라고 말했다.
"3분 휴식이래."
칼리브레가 벽에 기대어서 담뱃갑을 뒤적거리는 코리에게 수통을 건넸다.
"...땡큐."
수통의 생명수로 입술을 적시던 코리가 크어하면서 괜히 용트름을 했다. 벌써 브로취른 전선의 지하 터널들과 참호 라인 여러개를 돌파해온 그들이었지만, 그 어느곳에서도 피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머리카락 한올도 발견할 수 없는것이 그들에게는 큰 절망이었다.
"피터는 대체 어디있는거냐."
"...나야 모르지. 코리. 그래도 너무 상심하진 말라고. 우린 녀석을 꼭 찾아낼거니까. 그럼."
코리를 달랜 칼리브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코리가 그에게 어디가냐고 묻자, 칼리브레는 어깨를 으쓱하며 저기에 있는 에리를 가리켰다.
"피터를 찾겠다고 미친 여자처럼 돌아다니던데. 물이라도 한모금 마시게 해줘야지."
"흐음. 그러냐. 알겠어."
코리는 그가 뒤적거리던 담뱃갑을 다시 꺼냈다. 담뱃갑 안에는 단 한개비의 담배도 남아 있지 않았다. 코리는 괜스레 화가 나 담뱃갑을 홱 던져버렸다.
"에이, 씨팔. 되는게 하나도 없어. 이럴 때 피터라도 있었-"
[캉!]
"?!"
코리의 등뒤에 있는 두꺼운 벽 내부에서, 캉하는 금속음이 울려퍼졌다. 코리는 곧바로 자신의 소총을 쥐어들며 벽을 노려보았다. 다른 동료들은 가만히 있는걸로 보아 이 소리는 코리만이 들은 것 같았다.
"뭐, 뭐지?"
벽을 바라보던 코리의 볼에서 땀이 한방울 흘렀다. 그는 땀을 훔쳐내듯 닦아버리곤 에리를 보살피고 있는 칼리브레를 다급히 불렀다.
"칼리브레! 야! 칼리브레!!"
"?"
"빨리 와봐! 빨리!!"
"뭐야, 뭔데!"
코리의 다급한 외침에 칼리브레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동시에 다른 병사들의 시선도 그들에게로 쏠리었다. 코리는 벽을 이리저리 매만져보며 알 수 없는 소리만을 내뱉고 있었다.
"이, 이게.. 이 안에서 소리가 났다니까? 캉- 하는..."
"무슨 소릴 하는거야?"
"아니 진짜라구! 이 안에서 소리가..."
"...너 많이 지쳤지? 그러니까 좀 쉬라고 했잖-"
[쿠웅-]
"?"
이번엔 벽 뒤에서 쿠웅하는 소리가 울렸다. 무언가 벽에 부딪히는 소리 같았다.
[쿠웅. 쿠웅. 쿠웅.]
"..."
벽 뒤에서는 계속해서 둔탁한 소음이 울리고 있었다. 벽이 많이 두꺼웠는지 큰 소리는 아니었으나, 정신을 집중하면 충분히 들릴 수 있을만한 소음이었다.
둔탁한 소음은 마치 무언가를 벽에 강하게 여러번 내리찍는, 그다지 좋지는 않은 소리였다. 코리는 이 소음이 불현듯 불길하게 느껴졌는지 칼리브레의 기계 의수를 붙잡았다.
"너도 들었지?! 당장 제스를 불러와!"
"제스를 불러와서 뭘 어쩌게?!"
"몰라서 물어?"
코리가 벽을 손바닥으로 짚었다.
"이 빌어먹을걸 부숴버려야지."
.
.
.
.
"자! 알겠지?"
코리가 맛깔나게 박수를 치며 이야기를 마쳤다. 제스는 그런 그를 잠시 못마땅하게 바라보았지만, 이내 소총을 마리에게로 겨누며 경고했다.
"선택해라. 퍼플 윙. 여기서 죽든가, 아니면 생포당하든가. 마음에 드는거 하나를 골라."
"..."
"항복하지 않겠단거지? 좋아. 그럼."
제스의 뒤에서 중화기로 무장한 검은 안개 연대원 3명이 걸어나왔다. 그들은 곧바로 그들의 무기를 마리에게로 겨누었다.
"...돼."
"뭐라고?"
마리가 조용히 속삭이는 것을 겨우 들은 제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안. 돼."
"!"
마리가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시공간이 살짝 일그러짐과 동시에 그녀의 손에서 날카로운 보라색의 창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창날이 글라디오처럼 칼날이 박혀 있는 그 창은, 손잡이 끝에 날카로운 송곳이 달려 있었다.
"산개! 산개해!!"
마리, 이제는 퍼플 윙이 되어버린 그녀가 창을 강하게 내던졌다.
[쐐액!]
보랏빛을 띄는 그 빌어먹을 창은 공기를 가르며 날아가 유탄병과 그 뒤의 3명의 대원들을 꼬치꼽듯 꽂아 죽여버렸다. 피할 재간이 없었던 매서운 공격이었다.
"망할! 다들 소위님을 데리고 여기서 벗어나! 당장!!"
제스의 지시에 대원들이 피터를 부축한채 물러나기 시작했다. 퍼플 윙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영혼의 짝'을 데려가는 그들을 가만 둘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창으로 손을 뻗었고, 4명의 대원을 관통해 끝장낸 그 창은 그녀의 손으로 되돌아왔다.
"옵니다! 퍼플 윙이 돌진해옵니다!"
검은 안개 연대원 하나가 다급히 외쳤다. 제스는 자신이 가장 믿고 있는 12명의 소대원을 제외한 나머지를 전부 내보내며 앙펠의 이름을 불렀다.
"앙펠씨! 소위님을 부탁할게요! 당장 여기서 벗어나세요!"
"제스, 넌 어쩌려고?!"
"저희가 시간을 끌겠습니다. 얼마 버티진 못할거에요!"
"죽을 생각이냐?! 미쳤어? 너희 목표는 소위였잖아? 이제 여기서 빠져나가기만 하면 되는거라고!"
"....무턱대고 자살 작전을 펼치는건 아닙니다. 아까 믿을만한 양반께 연락을 좀 해뒀거든요."
"ㅁ,뭐?"
"어서 가세요!"
제스와 12명의 검은 안개 연대원이 총기를 난사하며 돌진해오는 퍼플 윙에게 맞섰다. 그들의 총탄이 퍼플 윙의 보랏빛 갑주에 부딪혀 스파크를 튀겨댔다. 앙펠은 그들의 뒷모습을 당황하며 바라보다가 끝내 밖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 밖에 없었다.
.
.
.
.
"피터, 피터! 정신차려!"
"으으..."
"피터!"
"...에리?"
피터의 침침한 시야에 에리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녀는 피터를 내려다보며 울먹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나올 것 같은 얼굴이었다.
"좋아. 정신이 돌아오고 있어!"
칼리브레의 기쁨섞인 외침도 에리의 울먹임과 같이 피터의 귀를 때렸다. 곧이어 시원한 냉수가 피터의 입으로 흘러들어왔다. 피터는 그저 그들이 주는 물을 받아마시며, 며칠만에 마시는 진짜 '물'을 조용히 즐겼다.
"케헥! 콜록, 콜록!"
"피터 녀석, 체 했잖아."
"냅둬, 마시게 두자구."
"...으으.. 애들아? 정말 너희들이냐..?"
"피터! 드디어.. 드디어.."
에리가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참지 못하며 피터를 꽈악 껴안았다. 그녀의 뜨거운 눈물이 피터의 어깨로 닿으며 축축해졌다. 피터와 에리는 동시에 안도가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에리는 그녀가 그렇게 재회하고 싶었던 피터를 만났기에, 피터는 더이상 마리의 추악한 손길이 아닌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와 만났기에.
"많이 힘들었지? 고생했어..."
"...너도... 너도 고생 좀 했겠네. 에리."
피터가 에리의 금발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걸 지켜보고 있던 코리도 펑펑 울며 그의 귀환을 기뻐했고, 시니컬한 칼리브레도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빨개진 눈시울을 가렸다.
"자네가 피터 소위인가?"
"?"
피터의 눈앞에, 한번도 본적 없는 사내가 서서 말을 걸어왔다. 그의 등뒤에서 연방군의 지휘관임을 뜻하는 망토가 조용히 나풀거리고 있었다.
"당신은... 누굽니까?"
"솔리드 전선의 141 연대 지휘관 앙펠이다. 자네들이 오랜만에 만나서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기쁜건 알겠다만, 지금 여기서 질질 짤 시간은 없네. 당장 이동해야 해."
"뭐라구요?"
"당장! 제스가 시간을 끌어주고 있어. 얼마 버티지 못하겠지. 그전에 우리는 이곳을 탈출한다."
"그, 그런.."
"알아들었으면 당장 일어서! 밖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는 수송 차량까지 곧바로 직진할거니까."
"연대 지휘관님. 걱정 마시죠. 저희가 안전하게 호위하며 데려가겠습니다."
칼리브레가 그의 기계 의수로 피터를 일으켜 세워주며 말했다. 칼리브레는 바닥에 쓰러진 타락자의 시신에서 소총을 뺏어들어 피터에게 넘겨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 총 쏠 수는 있겠어?"
"그럼. 날 뭘로 보고."
"알겠다. 소위는.... 너희들에게 맡기지. 난 검은 안개 연대원 녀석들과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뚫어놓겠어. 너희들은 잘 따라와라."
"여부가 있겠습니까. 지휘관님."
코리가 약간 삐딱하게 말했다. 앙펠은 그런 코리를 살짝 응시하며 뒤돌았다.
"...저런 녀석들을 군기 위반으로 한두번 처형해본게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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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좋았으. 조금만 더 가면 지하 터널이야. 뭔가 시끌벅적하긴 하지만... 별 거 아니라고 믿고 싶네."
선두에 선 타하리알이 하겐에게 조심히 말했다.
"시끌벅적?"
"응. 이런 곳은 시끌벅적한게 오히려 더 안좋다고."
"...그렇군."
"뭐, 아무 일도 없길 빌어야지. 이제 이 자동문만 열면-."
[삑. 삑.]
타하리알이 문을 조작하는 버튼을 꾹꾹 눌렀다. 그러나 문을 조작하는 키보드에 붉은 빛이 번뜩이며 문은 열리지 않는다는 걸 알려주었다.
"이, 이게 왜이러나."
[삑. 삑.]
"...휴우."
한숨을 내쉰 타하리알이 자동문이 겹쳐지는 부분에 주먹을 쾅 꽂더니 조금씩 벌리기 시작했다. 튼튼한 자동문은 끼긱거리는 듣기싫은 금속음과 함께 서서히 벌어졌다. 하겐도 그의 옆에서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주며 문을 완전히 열었다. 열린 문 앞으로 넓은 지하 터널의 복도가 펼쳐졌다.
"자. 이제 여기를 통해서 반대쪽으로 나가... 어?"
[철컥. 철컥. 철컥.]
문을 연 타하리알과 하겐을 향해 수십개의 총구가 겨누어졌다.